1.출애굽기와 레위기의 관계를 말하시오(시내산 언약과 레위기의 관계)
레위기는 시내산 언약의 일부이다. 레위기7:37에 보면 율법의 일부인 제사규례(성막제도)를 시내산에서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5대의
제사 규례). 율법은 출20장에서 십계명으로 주어진 후 21-23장은 시민법, 24장에 오면 언약의식이 나온다. 25장은 성막 건축을 지시하는데
먼저 헌물에 대하여, 성막의 설계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31장에 가면 건축기술자를 지정하고(브사렐과 오홀리압), 이어 12-18절은
안식일 규례를 말씀하신다(중요)
32장은 이스라엘의 배도, 모세의 중보, 언약갱신이 나온다. 31:18절에서 두 돌판을 주심은 증거판인데
32장에서 배도해 버리자 모세가 돌판을 깨어버린다. 그 의미는 언약의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중보 기도하고 언약을
갱신한다(두 돌판을 다시 주심).
34장에 두 돌판을 다시 들고 내려옴
35장에는 안식일 규례가 또 나온다.
35장은 성막
건축이 시행된다.
35-40장은 성막에 관계된 제도이다.
31장의 성막 규례가 나타나고 또 35장에 다시 성막 규례가 있는 그 둘의
차이는 전자는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것이고, 후자는 그 명령을 받은 모세가 대신 명령을 시행하는 것이다.그런 구조에서 볼 때 31장의 성막
규례는 바로 35장으로 연걸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32-34장의 내용은 왜 들어가 있는가?
그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해 이스라엘이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하며 모세의 중보로 인해 파기된 언약이 다시 갱신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문맥은 성막 건축
명령과 시행(35장)사이에 되어짐으로서 성막의 기능의 주요한 것은 인간과 하나님사이에 파기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의미가 있다.이것이 레위기의 성막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룩하지 못한 백성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제사를 통한 거룩화된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성막인
것이다.레위기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의 일부인데 특히 성막과 관계된 율법이다. 출5장에 보면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섬기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섬김(예배, 제사)은 애굽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백성으로 사는 삶의 본질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원리는 십계명이다. 20장의 첫 부분은 하나님 섬김이 나오는데 특히 뒷부분에는 의식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김은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적 형태의 섬김이다. 레위기는 성막 중심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김성수 교수 참조).
문/예배(제사)의 필요성과 그것과 우리의 윤리적인 삶과의 관계가 무엇인가? 당신은 과연 예배의 참된 의미를 누리고 있는가?
2.레위기의 중심주제를 말하시오.
레위기를 진행하면서 출애굽기를 살펴보면 25장 전체는 성막을 언급하여 성막 완성으로 출애굽이 종결된다. 흔히 레위기는 제사직분과 관련된
여러가지 규레라 여기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레위기는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율법이 계속됨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레위기 내용은 성막 중심의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이야기한다. 먼저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규레에서 공동체, 사회생활에 관한 모든 생활규레로 확대된다. 그러므로
의식영역에서의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제일 초두에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 섬김의 삶으로 언급되었음은 매우 의미가 있다. 즉 이는 예배의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섬김에서의 핵심은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 섬김의 삶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교회에서 드리는 의식적 예배를
가볍게 드려서는 안될 줄 안다. 특히 선지서에서 온갖 제물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등의 표현이 의식적인 예배를 상당히 소홀히
여기게 하는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자체는 의식적인 예배를 매우 중요시하며, 여기에서 드린 여러 제사,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들의 의미는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섬김의 삶으로 항상 피가 전제 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성소에 임재해 계시고
제사장이라는 중보 자가 있다해도 예배드리는 자가 성막에 찾아와야 인격적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이에 피가 필요하다는 것은 거룩하지 못한
백성이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 조건이 되었졌다. 이렇게 속죄의 필요성 때문에 성막은 필요하게 되었다. 성막에는 속죄와 헌신,감사와
화목제 등을 드리면서 제사장과 다른 사람들과의 서로 나누는 교제가 어우러졌다. 그러므로 이러한 헌신, 감사 등은 의식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실제로 이러한 헌신과 감사와 용서와 교제등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인 삶의
의미는 실제로 감사, 헌신, 교제, 용서 등이 우리 삶 속에 가장 밀도 있게 이루어지는 순간이므로 이처럼 예배가 중요하다. 이러한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도록 가르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선지자가 문제를 삼는 것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적인 섬김의 삶이 우리 실제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섬김의 삶의 토대가 되지 않고 연결이 되지 않을 때, 겉으로만의 의식적인 예배가 무의미하다고 한 것이지 의식적인 형태의 하나님
섬김의 삶 전체가 무의미하다거나 별로 중요치 않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대개 성소에서 의식을 통한 하나님의 섬김은 백성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제사장이라는 중보자를 통했다. 이처럼 백성을 대신한 중보자인 제사장은 반드시 더욱 엄격한 성결이 요구되었다. 가장 명백한 사건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이다. 그런데 이 성결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제사장이 본보기가 되어서 온 백성에게 까지 확대 적용된다.
정결한 음식들을
열거하며 제사장이 이를 백성에게 가르치라 했는데, 제사장은 백성에게 모범을 보여야 함을 암시한다. 또한 성결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은
성, 속을 구별하라는 것으로서, 성 속을 구별함은 짐승과 부정한 음식, 피부병, 시체 만진 것, 여자의 경우는 월경, 아이 낳고 난 뒤의 처리
등에서 말씀하신다. 또한 불법적인 성관계도 포함된다. 왜 하나님은 성, 속을 구별하기를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인 세칙을 먹는 것, 입는 것 등으로
표현하셨는가? 이것은 우리의 성, 속의 삶은 이러한 것까지 철저히 하시기를 요구하시며 속 사람의 성결이 이러한 부분까지 철저히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를 크게 오해한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었다(그들은 외식적인 성결에만 관심이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의 심령적
성결이 없었다. 우리가 성결해야한다는 것이 구약의 성속을 구별하는 모든 세칙을 지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 다면
부정한 것을 물로 씻으라는 것은 의식적인 행동을 하라는 것보다, 먹고, 마시고, 잠자리까지 구별해야 하는 삶의 정결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성생활은 전통적으로 매우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실제 가르치기를 매우 꺼려하는데, 레위기에서 성생활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는
이유는 부도덕하고 타락한 사람의 타락이 성적인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로마서에서도 타락의 가장 극악한
경우를 동성연애로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인의 성결의 삶이 이런 부분까지도 나타나야 하며 특히 요즈음 같이 성 윤리가 타락한 시대에서는 더욱
교회에서 철저히 가르쳐져야 한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은 계명을 주면 그 계명을 틈타서 범죄케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를 잘 피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신경을 써야한다.
이렇듯 하나님 섬김의 삶이 먹고, 마시고, 잠자리까지 철저히 성결이 이루어져야 하는 기본성격이 공동체의 삶,
경제적인 삶까지 확대되어서 노예해방, 토지를 쉬게하는 것까지 확대된다.
이와 같은 제도 마련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의 하나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뒤틀려 버린 하나님과의 관계, 즉 파괴된 삶의 질서를 회복하는 기능을 갖는다.
희년제도, 안식년 등이 그 예인데
안식년에는 노예를 해방시켰다. 그 의미는 노예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삶 질서를 다른 사람에게 유예 당하고, 빼앗긴 자이므로, 그들에게 삶의
권리를 회복하는 기회를 희년제도가 준 것이다. 특히 땅의 경우도 희년이 되면 다시 돌려 주었는데 이는 땅이란 삶의 터전으로서 생계의 터전을 받을
수 없으면 남의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다. 땅을 돌려줌은 바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자에게 그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요약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간추려 보면 출애굽,홍해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목적을 알리시고 그 목적 수행의 구체적인 방도로써 율법을 말씀하셨다.그 율법의 내용은 십계명부터 시작하여 의식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섬김의 삶을 ,의식적인 형태로서의 하나님 섬김의 법도를 레위기에서 말씀하신다. 특히 레위기에서 의식적인 형태로서의 하나님 섬김이 결코 가법게
여겨져서는 안되며 중심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들이 실제 삶의 실생활에 파고들지 않으면 전혀 무의미하다. 이와 같은 섬김의 삶이 하나님과 가까이
만나므로 나타나야 하는데, 이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성,속을 구별한 성결의 삶으로서 그것이 의식영역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먹고,입고,자는 것까지
즉 실제 생활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김성수교수참조).
3.레위기에 나타난 성막중심의 삶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나?
레위기에 나타난 성막중심의 삶이란 우리도 구약시대처럼 성막의 제사를 드려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성막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구약의 모든 제사를 다 성취시키시고 이루셨다. 그러면 이제 레위기 나타난 성막중심의 삶이란 것이 신약시대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요한1서이다. 구약에 나타난 성막 중심의 삶이란 신약시대에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의 삶으로 연결되는 것이다(하나님과의 사귐이란 의식적인 예배, 일상적인 기도의 삶, 또한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이루어 질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귐의 삶이 없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들을 이루어
드릴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의 삶을 무시한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만을 강조한다면 인본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우리가
만일 하나님과의 사귐만을 이야기하고 삶을 무시한다면 그것도 경건주의에 빠질수 밖에 없다.("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1:6)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사귐과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죄의 고백이다.
"요일1:7b,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8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9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2: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그리스도시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5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신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짖는 죄에 대하여 죄를 고백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하나님과의 사귐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문/1.구원파에서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예수께서 모두 사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도 없고, 또 죄를 짖는다 하더라도
그 죄는 자동적으로 사해진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요한 일서를 통해 반박해 보시오
4.구약적 희년은 무엇이며,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1)구약의 희년적 규례(레25:8-21,40-54,민36:4)
A.땅을 안식케 하는 것(토지)
B.빚은 면제하여
채무자와 채권자가 동등한 신분이 되는 것(경제)
C.노예들을 해방시켜 어느 누구도 인간과 인간 사에에 주인 노릇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공동체,사회)
D.각 개인이 원래의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 돌아가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기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구약 희년의 의미
A.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이 가나안땅에서의 안식으로 계승
창조 때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왕 되셨고, 땅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인간은 소유권이 아닌 청지기권만 있었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창조 때에 하나님은 안식하셨고, 인간도 그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려고 했고(창6장), 땅에 대해서도 청지기권이 아닌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인간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자신의 업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년과 희년을 통해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희년법을 제정하셨다. 그런데 결국 이 희년법은 구약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되었다(히4).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안식을 제공해줄 수 있는 분이시다.
B.출애굽정신의 계승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종되었던 곳에서 꺼집어 내신 그 사상을 이스라엘공동체내에서 재조명하고 구현시키고 반복시키기 위한 조치이다.
출애굽당시 그들은 애굽에서 공통된 가난의 공통된 형제의식가운데 오직 여호와의 일방적인 언약으로 말미암아 출애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가게 될 가나안땅은 이러한 출애굽의 정신을 잊기에 적합한 장소였다(신명기). 그래서 가나안땅에 이스라엘백성들은 땅과 재산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서 이스라엘백성간에 사회적, 경제적 차등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차등이
언약의 공동체 안에서 억제케 하심으로, 그들이 어디에서 어떤 상태에서 구원(출애굽)받은 것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희년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노예를 해방한다든지, 빚을 탕감해준다든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인간 이상사회를 꿈꾸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언약공동체내에서 언약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조치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희년의 정신들이 이스라엘 역사상 거의 실현되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결국 옛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감으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즉 희년정신을 구현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이
아니
다).
이러한 구약적 상황가운데 선지자 이사야는 주의 성령이 임하여 짐으로 이러한 희년의 규레들이 성취되어질 것을 예언한 것이다(즉 옛언약의
실패는 성령이임하지 않음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성령이 임함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고(눅3:22), 또한 사탄의
시험으로(눅3:1-13)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온 세상에 입증시킨다. 이제 이렇게 성령의 충만을 받은 예수님은 희년의 성취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 질 것임을 선포한 것이다.(4:21)
이러한 희년의 구현은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4:25-27/40-41/5:4/8:24/32/6:20-24,35,38/7:5,13,22-23.37,41-49/8;43/9;38/10;30-37/11;8,46/12;13-21,32/13;8,10-12,16/14;5,10-11/12;1,21-24/15;3-32/16;9,13-14,19-31/17;4,1318;8,9-14,22/19;1-10,20;22,45-47/21;1-4,34-35/22;24-30,35,51/23;26,29,42-43,50/24;26)
왜 이상의 구절들에서 불쌍히 여김과 일방적인 도와줌, 무조건의 용서를 베풀어줌, 그리고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삶을 하나님백성의
삶으로 말합니까? 이것은 자신의 의를 드러 내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김을 당하였으며, 우리의 육신적
조건과는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은혜받았으며, 또한 값없이 한 없는 용서받았다는 것을 단순히 종교적 의식이나 말을 통해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회생활을 통해 모든 인류들에게 고백되어지고 드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다(예수에게 있었던 희년의 구현이 오순절날 성령이 임함으로 신약의
교회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성령충만의 결과로 경제적 유무상통, 공동체적 하나됨이 초대교회가운데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는 희년
공동체이다.)
그런데 이렇게 희년의 축복이 선포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사렛동네의 사람들 은 예수를 배척하고, 희년의 축복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의 긍휼이 모든 과부에게 베풀어지지 않았고 사렙다 과부에게만 임하였고, 엘리사시대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는데 나아만 한
사람만 낳은 것과 같다. 즉 이러한 희년의 축복이 예수님과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굉장한 특권을 가졌다 해도, 또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가난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임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받은 사람이란 자신이 은혜(용서)받은
존재임을 알기에 그 용서의 정신을 온 땅에 드러내주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즉 참 이스라엘은 나사렛(유대)사람들이 아니라 이러한 은혜의 정신을
이 땅 가운데 구현하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전 인류(세상)에게 보여 줄 세상을 충만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로
말하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