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시간부터는 야고보서를 오후예배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여기서 이 글의 저자가 야고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행15장 13절에 보면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야고보가 지금 누구에게 문안을 하고 있습니까?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란 스테반의 순교이후에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 보시면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 죄를 짓고 잘못해서 당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말합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이 시험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시험을 당하거든 2절에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1:6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여기서 기쁘게 여긴다는 말은 순간적인 내 감정으로 기쁘게 여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에게 믿음의 시험이 있으면 처음에는 감정상으로는 기쁘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감정상으로는 기쁘게 여길 수 없지만, 의지적으로라도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서 기쁘게 여긴다는 말은 친한 친구를 만났을 때 기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친한 친구를 만나면 얼마나 기쁘게 여깁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의 시험을 만날 때도 마치 친한 친구를 만나듯이 “친구야 반갑다”하듯이 “시험아 반갑다”고 해야 합니다.---시험아 반갑다—합시다.
--그러면 왜 우리가 믿음의 시험을 만날 때 친한 친구를 만나듯이 반갑게 여겨야합니까?
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우리의 믿음의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시험을 기쁘게 여겨야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인내란 무엇입니까? 인내란 말은 “휘포모넨”란 말로서 “어디 아래에 거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내란 우리가 “주님 아래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겨야합니까?
그 믿음의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아래 거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기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이 풍랑인하여 주님 앞으로 더 빨리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 아래에 거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시험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되는 그 일 아래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있어서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품 안에 거하게 한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시험 가운데서 “끝까지 주님 아래 거하여 있으라” 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시험가운데서 적당히 주님 아래 거하여 있다가 금방 뛰쳐나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의 시험이 있을 때 “끝까지 주님아래 거하여 있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입니까?
우리는 단순하게 그 믿음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2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이라는 말은 “한 번 당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여기서 당하거든 이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당한다”는 말입니다.
한 시험이 지나면 또 다른 시험이 있습니다. 그 시험이 지나면 또 다른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믿음의 시험이 끝날 때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우리가 주님 아래 거하여 있어 합니까?
4절 인내(주님 아래 거하여 있음)를 온전히(끝까지) 이루라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때까지”입니다.
여기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내 안에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고,내 안에서 온전히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시험을 허락하십니까? 아직 내 속에 불순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직 내 속에 죽지 않는 내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의 시험을 슬프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의 시험은 우리로 주님 아래 거하게 합니다. 또 그 믿음의 시험은 우리가 주님 아래 거하여 내 속에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온전히 예수님을 닮게 만듭니다.
내 속에 온전하신 주님의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끝까지 주님 아래 거하여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①①②③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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