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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요한복음

김세윤교수 요한복음강해

by 금빛돌 2012. 9. 28.

김세윤 요한 복음 강해

서론 - 요한복음1- 김세윤 신약 신학

요한복음 강해

서론

요한복음의 전반적인 서론은 요한신학 참조 바람.

 

본문주해

1

요한복음 1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1-18절의 서시와 1:19-51절의 증언들. 이상 두 부분으로 나뉜다.

1:1-18절 서시는 요한의 공동체에서 찬송시로 쓰여졌다가 요한복음 마지막판에 서문으로 덧 붙여져서 헬라의 시고방식에 익숙한 헬라 유대인들이나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서의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서 서문역활을 하도록 덧붙여진 것이다.

 

6-8절과 15절은 세례요한에 대한 것으로서 원래 복음서의 첫판에 시작한 것인데 여기에 서문이 덧 붙여혀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6-8절과 15절을 괄호로 묶고 일으면 세례요한의 증거로서 이것이 첫판에서는 요한복음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서시의 구조의 분류에 대해서 학자들간에 논쟁이 많다. 서시의 주제와 요한복음 본문의 주제는 깊이 상관이 있다. 서시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자로서의 사역을 하나님의 말씀이다 로고스라 지칭해서 사용한다. 로고스라는 말의 배경은 헬라철학, 스토아 철학의 중요한 개념이었다. 이것은 합리적인 생각, 생각의 표현인 말이었다. 스토아 철학은 온 우주의 합리성, 생명을 주는 원리가 바로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의 씨들이 우리 영혼속에 박혀 있어서 합리적으로 말하고 생각할 수 있고 우주와 일치감을 깨달을 수 있고 우주의 원칙들을 탐구할 수 있고 지식을 얻고 지식에 의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요한복음 11절의 로고스라는 말의 헬라사상적인 배경이다.

 

또 구약과 유대교적인 배경도 중요하다.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지혜 사상이 배경을 이룬다. 여호와의 말씀을 선지자들이 받아서 전달했다.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수단이다. 말씀으로 창조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수단이다. 말씀을 전할때 깨닫고 회개할때 구원이 일어난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 계시, 구원의 수단이다. 지혜도 마찬가지이다. 지혜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계시하시고 계시에 따라사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에 이른다. 하나님의 말씀, 지혜가 창조, 계시와 구원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선재해야 한다. 창조전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가 존재한다.

 

이렇게 볼때 말씀과 지혜는 하나님의 속성들인데 질량을 가지고 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들인데 점차 이것을 물질화 했다. 더 나아가 인격화 했다. 하나님의 수단일 뿐아니라 일꾼으로 규정한다. 하나님의 창조, 계시, 구원의 AGENT인 말씀과 계시를 통해서 하신다. 이렇게 물질화, 인격화하는 사상이 발전했다.

 

그것의 극치가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지혜는 하나님의 딸로 지칭을 한다. 말씀은 남성명사 지혜는 여성명사이다. 하나님의 아들 딸로 지칭하는 것은 아들 딸의 개념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관계론적인 개념이다. 아들 딸의 개념의 근본적인 의미는 상속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아 피조물의 한계성을 극복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무한함에 참여하고 같이 나누는 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계시, 구원의 일을 같이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신화적인 언어같다. 그러나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 언어 수단인가? 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 이 사상이 발전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자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즉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하심을 동시에 천명하고자 하는 언어 수단이다. 왜 동시에 천명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우주보다 커야 이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 있다. 그래서 초월자임을 천명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초월자로 계시하신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초월로만 계시면 구원이 안 일어난다. 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내 밀어야 구원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분이어야 실제로 우리를 구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위해서는 그는 초월하시며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성경은 점진적인 계시 초월하시며 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이 초월하시며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구약과 유대교적인 범주에서는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하실 수 있다. 원숭이가 사람을 나타낼 수 없다. 즉 계시할 수 없다. 사람은 사람만이 나타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다. 교회사의 아리우스의 대논쟁이 여기에 있다. 아리우스가 예수가 하나님보다 조금 모자란다고 하였다. 그러면 계시, 구원이 안 일어난다. 계시가 없으면 구원도 없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느냐? 유대교의 근본적인 신앙고백이 신명기 6:4절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는 유일신론이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이위 개념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들로서, 지혜가 딸로서 그가 아들이고 딸이기에 하나님의 속성에 완전히 동참하기에 하나님을 완전히 동참 100% 하나님과 같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 지혜는 세상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이위일체론적인 신개념이 나타나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계시 삼위일체 개념으로 점진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세상의 고등종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1) 이슬람교, theism(이신론)

 

정밀한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고 시계태엽을 한 번 감아 놓았다가 놓아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없다시피 한다. 하나님은 너무 거룩해서 혼자 있고 자기가 창조한 세상은 버렸다. 자력구원, 숙명주의, 훈련, 금식해서 구원을 이룬다.

 

 

 

 

(2) 반면에 신의 내재는 있으나 초월을 부인하는 힌두교 개혁힌두교인 불교 등이 있다. 초월자가 없으니까 구원은 자력구원이 된다. 범신론의 신관이다. 이신론이나 범신론은 자력구원으로 아루어질 수 밖에 없다. 모든 종교들이 자기가 수양하고 묵상하고 선을 행해서 자신을 구원할 수 밖에 없다.

 

 

 

 

(3) 그러나 인간이 자기를 구원할 수는 없다. 성경의 하나님 아버지는 초월하시며 내재하시는 분이시다. 초월하시며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다. 언제 오셨는가? 예수 그리스도 자기 아들을 통해서 오셨다. 복음서들은 초월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서 요한은 로고스 개념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다. 이 로고스 개념이 기능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유는 헬라적인 배경도 있고 유대교의 이위일체론적인 신계시를 표현하는 하나님의 지혜, 말씀을 훌륭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1.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태초라는 말은 창세기 11절의 말씀을 상기 시킨다. 태초에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태초에 계신 하나님이 3절 부터 창조의 수단 일꾼으로 그려져 있다. 태초에는 창조 때부터가 아니라 창이전부터이다. 1:1절과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다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로고스와의 긴밀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말씀과 하나님은 긴밀한 관계에 있으나 두 개체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여호와의 증인은 관사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헬라어 문맥에서는 보어가 주격일 때는 관사가 생략이 된다. 이것을 칼루이스 rule이라 한다.” 말씀이 하나님이셨다 고 번역하기도 어렵고 말씀이 신적이었다고 번역하면 좀 약하다. 이 문장의 의도는 1절 후반부의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말하면서 분리한다. 두 가지 다 되는 것 같다. 1:1c를 넣는 이유는 둘로 생각을 하면 안 되고 하나이다. 삼위일체론의 모든 문제가 다 이 속에 들어있다. 두 부분이 하나 됨과 별다름을 동시에 표현하려고 하는 아주 예민한 언어 사용이다.

 

3-5절은 로고스의 우주론적인 역활, 창조에서의 역활을 말한다. 모든 것, 온 우주가 다 그를 통해서 생성이 되었다. 로고스는 창조의 수단, agent 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창조의 source이고 로고스는 창조의 수단이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역활을 정기적으로 이렇게 구분한다. 예로 고전 86절에 보면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고전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생성된 것이 없다. 여기는 구두점을 어디에 찍느냐?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그가 없이 아무 것도 생성된 것이 없다. 그 안에 생성된 것은 생명이었다.”고 번역할 수도 있고 그가 없이 생성된 것 어떤 것 고 생성된 것이 없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원래 헬라어는 띄어 쓰기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로고스를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의 참여 없이 아무것도 창조된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로고스를 통해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에서 세상이 로고스성을 띈다. 도자기는 만든 사람의 성격이 나타난다. 만든 사람을 계시한다. 세상은 하나님을 계시한다. 세상에는 창조주의 도장이 찍혀있다. 창조주의 성격, 능력, 합리성이 그 속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질서가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계시를 띄고 질서가 있다. 타락으로 많이 망가지고 희미하게 되었다. 이런 계시를 자연계시 일반계시라 한다.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그 안에 생성된 것은 생명이었다.”로 둘로 번역할 수 있다. 5절에 그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다”(현재형) “그러나 어두움이 극복하지 못했다, 터극하지 못했다”. 로고스가 생명을 주는 분이었다. 그를 통해서 생성된 것에 생명이 주어졌다. 생명은 피조물들이 산 것이 되었다. “그 생명은 인간들의 빛이었다빛이란 말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말이다. 4절은 창 1:1-3절 까지의 빛과 연결된다. 빛은 우리에게 활동하게 한다. 빛이 있어야 우리는 안심하게 된다. 빛이 없으면 캄캄함 속에서 불안하여 한다. 이것은 생명의 본질과 관계가 있다. 생명이 살아있는 상태를 가능하게 한다. 빛은 행복과 관계가 있다. 반대로 암흑은 죽음의 상태, 불행의 상태, 활동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빛은 종말에 주어질 구원의 상징으로 쓰여진다. 종말에 우리가 근심과 불안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피조물로 된다. 우리를 제약하는 모든 요소가 없어진다. 빛은 지식과 관계가 있고 행동의 원칙을 제시한다.

 

이 빛이 어두움 가운데 비친다.” 과거형을 쓰다가 갑자기 현재형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현재 비추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냐?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인간과 세상에 영원히 비추이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냐? 후자이다. 영원한 현재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태초부터 암흑속에 있는 세상을 계속해서 비추어 왔다.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나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께 적대해서 암흑속에 있는 적대세력이다. 그래서 고난 속에 있고 구원의 대상이다. 세상이 구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피조물을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계속해서 빛을 비추어 오고 있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καταλαμβανιν 이 말은 붙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긍정적으로 쓰였느냐? 부정적으로 쓰였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로 붙든다, 체포한다. 극복한다의 뜻이다. 긍정적인 의미로 붙든다, 환영한다, 받아들인다의 뜻이다. 긍정적인 의미로 붙든다, 터득한다, 이해한다,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 , 의 의미 중에서 어느 의미로 쓰였느냐? 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도 말이 된다.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보면 어둠의 세력이 빛의 세력을 덮어 버리려고 했다. 어둠이 빛을 극복하려고 했다. 어둠, 사단의 세력이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좌절시키려고 했다. 아담과 이브를 꾐으로서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계시하고 구원의 행위를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구원을 하셨다.

 

도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시고 나타내셨으나 어둠의 세력이 깨닫지 못했다. 아담으로 부터 모세, 모세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랬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기법중 하나가 이중, 삼중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의도라고 한다. 이것도 부정적인 의미, 긍정적인 의미 둘 다를 포함한다. 여기서 긍정적인 세계관을 우리로 갖게 한다. 하나님의 빛의 궁극적인 승리를 천명하고 있다. 또 이 세상은 암흑 속에서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에 놓여 있다.

 

 

 

 

5절은 우리에게 세상은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으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계시하시고 빛을 비추신다. 그러나 세상은 깨닫지 못하고 암흑 속에 있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빛이 승리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이 세상은 도둑질 잘 하는 사람이 잘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승리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승리할 수 밖에 없다.

 

 

 

 

6-8절은 세례요한의 기사이다.

 

요한은 한 사람이다. “났으니생성이 되었으니피조물이다. 이것은 로고스와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으로 부터 사명을 위임받은 자이다. 빛에 대해서 증거하러 왔다. 모든 사람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7). “빛이 아니었다” “증거하러 왔다가 세 번 나온다. 이러한 문구들은 어떤 학자들은 요한을 깍아 내리는 문구라고 한다. 즉 요한의 추종자들이 요한이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계시자였다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고 예수가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계시자였다는 것이다.

 

 

9. 9절은 5절과 연결시켜 읽으면 의미가 명확히 통한다. 9절도 번역하기가 어렵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었다.”고 변역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으로 들어와 있었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후자가 요한복음적인 문법구조에 맞다. “참빛이란 진짜 빛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진짜 빛이 암흑의 세상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 세상의 빛은 참빛의 반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로고스의 빛이 이 세상으로 들어옴을 말하느냐? 예수이전의 구원사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율법)을 말하느냐? 의 시점이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은 14절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9-12) 선재한 로고스의 시내산 율법계시를 말하느냐? “모든 사람을 비춘다는 말 14절의 말이 특별계시를 말한다면 그 전의 것은 일반계시를 말하느냐? 9-12절까지는 시내산에서 토라를 줌으로 해석을 하려는 사람들은 14절에서 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전의 로고스의 계시활동을 성육신 전의 계시활동으로 보아야 한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토라를 주심으로 나타나셨으나 그의 백성이 영접치 않고 남은 자만 영접하였다. 이 로고스가 드디어 성육신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거해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 성육신한 로고스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진리와 은혜가 가득한 것으로 모세를 통해서 계시된 율법보다 능가하는 것이다. 율법과 성육신을 통한 계시가 대조된 것을 보고 이렇게 언급한다. 즉 로고스의 성육신전 계시는 모세를 통한 토라의 계시이다. 로고스의 성육신을 통한 계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9-12절은 로고스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의 활동을 말한다.

 

 

 

 

반면에 아니다. 여기서 부터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을 말한다. 그 이유는 6-8절에서 요한이 증거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자라고 증거한 것이다. 11, 12절이 요한복음의 내용을 너무나 정확히 요약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두 권의 책으로 되어 있다. 첫째 표적들의 책)2-12)에서 예수의 청중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이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표적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했으나 빛을 대부분이 거부하고 소수만 예수를 믿는 자들이었다. 둘째 13-20장의 수난과 영광의 책은 예수가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한다(13:1).

 

11절은 첫 책을 요약하고 있다. 즉 예수가 자기 백성에게 왔으나 대부분이 영접하지 않고 소수만 영접했다. 12절은 두 번째 책을 요약한다.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한다. 즉 이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계시한다고 함. 그런데 이것도 요한복음의 기법중 하나이다. 요한복음의 이중 삼중의 의미를 갖는다. 요한이 보기에는 세상도 로고스의 것이고 특별한 이스라엘도 로고스의 것이다. 11절에 그가 자기 것들 속으로 왔다. ”이 세상도 특별한 이스라엘도 로고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세상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예수에게 한 것이 세상이 예수에게 한 것이다. 예수의 오심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오심이다. 성육신 가운데 오심이나 같은 것이고 이스라엘의 반응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래서 여기서 자기 것도 이중의 의미이다. 즉 이스라엘과 세상의 이중의미이다.

 

9-12절의 예수오심도 이중의미를 나타낸다. 즉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오심과 동시에 성육신한 예수를 통한 오심의 이중의미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보기에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토라에 로고스가 왔을 때 대부분 이스라엘이 적대하고 거부하고 남은 자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성육신에 오실 때도 대부분이 거부하고 소수만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따라서 9-12절의 성육신전의 로고스 활동, 성육신후의 로고스 활동은 구분할 필요가 없다. 17절을 생각하면 성육신전을 그린 것 같고 세례요한의 증거와 요한의 구조를 생각하면 성육신 후을 그린 것 같은데 구분할 필요가 없다.

 

 

 

 

10. “세상에 빛이 있었다”·····“알지 못했다aorist인데 시점이 아니라 항상 알지 못했다. nomic aorist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말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유대인들이 영접하지 않으므로 첫 책에서 보여준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 정도로 볼 수 있다.

 

11. 토라를 통한 계시와 성육신의 계시를 영접치 않했다.

 

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아니고 로고스가 주는 것이다. 은혜의 사상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에게만 적용했다. 자녀는 τεκνα를 쓴다.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하는 부차적인 의미이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 됨이 주어지느냐? 믿는 자들, 주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준다. 믿음의 근본의미를 잘 정의하고 있다.

 

 

13.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무엇이냐? , 혈통으로도 아니고 육신의 의지로도 아니고 남자의 의지로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난자이다. 피와 육은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전혀 인간의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자연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을 강조한다.

 

14. λογος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처를 취하시고·····.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 ” 창조와 계시의 수단이 되셨던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 육신은 하나님께 적대하는 의미가 아니고 피조물이라는 하나님과 다른 존재로서의 인간, 영적인 조재와 분리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신적인 로고스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모든 제약성을 나누게 되었다. “되었다.”aorist로 한 시점을 지칭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로고스가 시간 공간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창조의 중보자였던 로고스가 시공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엄청난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 즉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그리스도의 인격의 역설을 한마디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배제해야할 오해는 2세기 말에 시작이 된 도케티즘이 배격이 된다. 어떻게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가 물질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느냐? 예수가 단지 결합해서 육신이 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못박힐 때 영적인 예수는 떠나고 인간 예수가 못 박혔을 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부인하고 신성만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이 도케티즘적인 기독론은 진정한 계시를 불가능하게 한다. 계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할 수 있다. 예수의 신성이 천명될 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다. 또 인간이 인간에게 완전하게 계시한다. 인간으로서만 하나님을 인간에게 완전히 보여줄 수 있다. 그래서 신성 인성 둘 중 하나가 약화되면 계시가 안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로고스로서의 완전한 성육신이 완전한 계시자가 되어 하나님을 완전히 보여주고 인간이 되어 인간에게 하나님을 완전히 보여줄 수 있다. 인간 안에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계시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계시되는 상황속에서 동시에 감추어져 있다. 계시되는 하나님은 감추어진 하나님이다. 인간을 통해서 계시되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보인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인간 예수만이 보인다. 성육신의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며 감추어짐의 성격을 말하고 있다. 또 계시의 sacremental character를 나타내 준다. 하나님이 육신안에서 육신을 통해서 계시한다. 곧 인간 예수가 하는 것 말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계시이다. 동시에 이것은 시공에서 일어나는 물질적인 물리적인 현상이다. 이 물질적인 형상들이 영원한 하나님을 계시하는 수단들이다. 영원한 하나님을 표징해 준다. 계시해 주는 물질적인 형상들을 sacrement라 한다. sign이다. 그래서 예수가 행하는 것들 말하는 것들은 영원한 로고스의 sign들로서 물질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띄고 신성을 띈다.

 

 

 

 

거하신다σκηνοω라는 말은 텐트속에 거한다. 정착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의 ןכשׁ과 발음과 의미가 똑같다. 그래서 아마 요한복음의 저자가 이 단어를 취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אנכשׁ라는 명사를, 명사의 원천은 동사인데 이 말은 유대교에서 중요한 신학적인 언어였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심을 나타내는 말이 ןכשׁ, אנכשׁ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심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의 성막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 그의 임재하심(אנכשׁ)을 나타낼 때 어떤 외적인 현상이 나타나느냐? 구름과 빛의 현상이 나타난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ןכשׁ하고 성막에 אנכשׁ(임재)하시고 구름과 빛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보고 דבק(영광)이라 했다. 이 짧은 문장에 이런 뜻이 들어있다. 옛날 출애굽 당시 야웨가 그들 백성과 함께 거하시면서 그들의 성막에 임재하시면서 sign으로 빛이 내려 쬐고 구름을 보여주었듯이 그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영광을 보도록 보여주셨는데 이제는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서 우리들 가운데 אנכשׁ했다. 그래서 그의 영광을 우리가 보게 되었다. 구약의 하나님의 나타나심,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나타나심의 theophany의 완성으로 예수의 성육신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은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내셔서 거하시고 나타나신 것과 같이 그 구원을 완성하는 사건이다.

 

 

 

 

우리라는 주어는 요한의 교회이다. 또는 기독교 교회전체이다.

 

영광이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로는 좋은 의견” “좋은 영성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의 나타나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이 인식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이 계시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로 인식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본질, 창조자 되시고 구원자 되시고 구원주임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다. 로고스가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을 나타내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 임재하시면 그 표로 구름과 빛의 현상이 나타났다. 구름과 빛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름과 빛을 דבק라고 하고, 70인경에서는 δοξα라는 말로 나타낸다.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종말에 시온에 드러난다. 영광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지면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고 하나님의 본질을 알게 된다. 그러면 자기가 지금까지 섬기는 신들이 거짓임을 알고 우상을 버리고 시온에 와서 진짜 신인 야웨를 섬기게 된다. 이것이 선지자들과 묵시가들의 위대한 vision 이었다. 이방인들의 시온에 대한 종말론적인 순례라 한다. 선지자들의 vision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근간을 이루고 바울의 신학의 근간을 이룬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나는 것은 종말론적인 소망이다. 요한과 요한의 저자는 예수오심이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영생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2장부터 예수안에서 그가 말하고 행한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예수의 이적을 통해서(2:11, 11:4, 40)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고 특히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2: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을 취하나(5:44, 12:43)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므로(5:41, 7:18, 8:50)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드러낼 것이다.

 

 

 

 

여기에 아주 심오한 사상이 있다.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하나님과 같아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예수보다 커야 한다. 그러니까 본질적인 동등함과 기능적인 순종 복종의 상태의 두 가지가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이기 위한 조건이다. 하나님적인 로고스가 인간이 되어서 하나님을 보여줄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나타내려 한다. 예수의 하는 말과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말과 뜻만을 이행하니까 그렇다. 그래서 본질에서 뿐아니라 의지에서는 하나님과 하나 되었음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자가 된 것이다. 어디에서 완성이 되느냐? 십자가에서 바로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완성이 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힘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만 나타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낸다. 사랑으로 하나님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낸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림은 하나님의 본질을 확연히 드러낸 것이다. 십자가에 죽음이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냄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냄이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라는 것을 드러낸다. 역으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분,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을 사랑이심으로 나타내며,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이 고난 받으심이 아니라 예수의 영광 받으심이다. 예수의 본질이 드러남의 의미에서 그렇다.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자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역설적인 의미가 있다.

 

 

 

 

그 영광이 아버지로 부터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영원한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아들이라는 그림언어를 쓸 수 밖에 없다. μονογηνης(독생자)라는 말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독특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아들의 근본 의미는 상속자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본질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성육신하신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을 같이 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독특한 아들이기 때문에 또한 순종한 자다. 완전한 순종을 아버지께 하는 자다. 아버지의 본질에 동참하며 동시에 완전히 순종하는 자이다. 그래서 계시의 두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계시할 수 있는 분이다. 그 계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다.

 

 

 

 

34: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출애굽기 3456절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에 충실하심, 언약을 신실히 지킴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서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는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 말은 그들을 보호, 인도, 구원하겠다고, 사랑,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이스라엘은 그의 보호, 인도, 은혜에 의존해서 살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에 항상 신실하지 못했다. 이것이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자기 쪽의 의무를 신실히 지키신다. 이스라엘이 불성실하고 죄를 범할 때에도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다. 이 신실하심이 죄의 용서와 구원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구원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신 것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언약에 신실하심은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런 것을 여기서 나타내고 있다. 로고스가 성육신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인류에게 그의 창조주로서의 언약을 지키심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창조주로서의 언약을 지키심이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심은 온 피조물에게의 신실하심이다. 로고스의 성육신 사건은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지킨 사건, 구원의 사건이다. 또 그것은 인류에게 창조주로서의 신실하심을 보이는 행위로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사건이다. 그래서 그 성육신한 사건은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심, 구원자로서 사랑이심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낮아짐은 은혜의 사건이고 그것은 하늘에서의 실재를 이 물질의 세계에 가져온 사건이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이다. 진리라는 말은 헬라세계적인 사고로 말하면 진짜세계의 것이다. 가짜의 세계에 진짜의 세계가 온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가 가짜 세계 시공으로 들어온 것이다. 1:14절은 복음의 주제를 천명하는 말이다. 복음을 정의하면서 동시에 요한복음의 논지를 천명하는 것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즉 성육신한 로고스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본질 곧 하나님이 사랑이고 진리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분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부터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 사역이 기술될 것이다. 이 삶, 가르침, 사역은 한 인간의 사역이다. 곧 육신의 세계에 일어나는 육신의 활동들이다. 그런데 이 육신은 신적인 로고스의 성육신으로서의 육신이기 때문에 그의 삶, 가르침, 사역은 모두 하나님을 계시하는 사건이다. 나사렛 예수의 구체적인 사건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들임을 보여줄 것이다.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5. 8절에서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요한의 증거이다. “증거한다는 말이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말이다. 계시가 sign으로 오기 때문에 믿음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증거가 중요하다. 세례요한이 첫 증거자로 나타난다. “그가 내 뒤에 오시는 자이다. ”시간적으로 뒤에 오는 자이다. “나보다 앞선 자이다. ” 이것은 시간적이긴 하지만 계급에 있어서 앞선 자이다. 로고스의 선재사상이 들어있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6. 14절과 연결시켜 읽을 때 이해가 된다. “우리가 그의 충만함으로부터 은혜위에 은혜를 받았다.” “그의 충만함으로부터라는 말은 신성의 충만함을 말한다. “은혜위에 은혜러라는 말은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Χαριν αντι Χαριτος를 일반적으로 번역을 하면 은혜에 대항하는 은혜로서 반대적인 의미가 나타난다. 또 하나는 은혜위에 또 은혜로 번역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은혜에 상응하는 또 은혜로 번역이 될 수 있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 17절을 일고 16절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17절은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의 표현으로서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곧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율법을 주신 행위가 은혜이다. 율법이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 그리고 아무 접속사가 없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다고 이어서 쓰고 있다. 이것이 17절이다. 17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대조를 이루느냐? 연속성을 말하느냐? 모세의 율법도 은혜의 표시이고 사랑의 표시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냐? 루터파 신학은 복음과 율법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칼빈주의자는 복음과 율법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곧 복음이 율법의 성취임을 강조한다. 복음과 율법의 신학은 바울신학에서 주로 바울의 가르침을 토대로 논의된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16, 17, 18절에서 바울신학의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여기에 도입해야 하느냐는 것이 첫째문제이다. 루터파 신학의 입장은 은혜대신 은혜라고 해야한다. 기껏해야 그렇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구약의 율법을 주신 것도 은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더한 은혜이다고 이해한다.

 

 

 

 

18. “누구도, 어디에서나,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만 그 분을 나타냈다. ” 여기의 한마디 한마디가 재미있는 말이다. “아무도 어디서나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 많은 학자들이 구약성경에서 모세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으로 다 파악할 수 있는 존재이면 하나님은 인간보다 작은 존재, 이성보다 작은 존재이다.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보이지 않아야, 초월하셔야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느냐? 보이기로 스스로 결정했을 때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스스로 결정했을 때이다. 구약과 유대교의 구원사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계시자인가? 모세이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여주셨나?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어느 때나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이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적인 의미가 더 많다. 예수가 성육신한 로고스로서 비로소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논리가 전개된 것이다. 18절을 읽으면 반대쪽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러나 구약성경 스스로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성육신한 예수의 완전한 하나님의 빛의 계시의 빛 아래서 본다 하더라도 구약성경 자체를 무시할 수는 있느냐? 특히 요한복음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한다는 사상이다. 그것은 구약의 예언을 궁극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은혜위에 은혜로라고 해석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점진적인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부터 보면 예수가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할 뿐 아니라 폐지한다. 이것은 반대의 개념으로 들어온다. 즉 성취와 대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변증법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 긴장이 서문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다.

 

 

 

 

아무도 어디에나 어느 때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은 모세를 두고 하는 소리이나 보편적인 적용성이 있다. 모든 종교가 신을 논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 구원을 논하나 그것은 다 가짜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계시할 수도 없다. 그런데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만이 계시하셨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 이것을 어느 사본에는 θεος로서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 어떤 사본에는 υιος로서 나타난다. 독생하신 아들이 계시하고 있다. 요즘의 학자들은 θεος로 보고 있다. μονογηνης라는 말은 독생자라는 말이고 독생자 하나님이 계시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서시의 클라이맥스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절의 요한복음 전체의 클라이맥스와 상응한다. 도마가 예수의 왕 되심을 인식하고 신앙고백함으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요한복음의 결론은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 요한복음의 전체내용을 로고스의 존재와 활동으로 요약하는 이 서시가 결론되는 곳에서 θεος로 읽어야 전체 결론과 상응한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밀접한 관계와 사랑의 관계속에 있는 독생자이다. 아버지와 독특한 아들의 관계인데 하나님의 품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지에 있어 일치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타낸다. 이 나타낸다는 말 즉 εξεγησατο는 말이 재미있다. εξεγηοναι는 지도자로서 무리를 이끈다는 뜻이 있다. 신약성경에는 이 의미로는 안 쓰인다. 해석한다는 말로 쓰인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본질에 참여하고 완전히 순종하는 독특한 아들 예수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셨다. 계시해주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계시자는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 말씀이라 소개하고 있다. 말씀의 계시활동도 해석이다. 곧 계시의 말씀성, 예수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했는데 그 계시는 무엇으로 왔는가? 말씀으로 왔다. 로고스의 찬송시와 잘 어울리는 동사로 예수의 활동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기독교의 활동도 keryguma와 복음선포로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냥 귀신을 보듯이 보기를 갈망하나 성경에서는 중요시 하지 않는다. 바울이 고전후에서 그렇다. 말씀이 중요하다. 십자가의 도가 깁자가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롬 10장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하고 있다. 기독교 계시체계 전체는 말씀선포와 들음으로 되어 있다.

 

1:19-51절은 증언들의 section이다.

 

 

 

 

세례요한의 증언(3일간에 걸쳐 일어나는)과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의 제자인 자들의 증언, 그리고 예수 스스로의 증언들로 이루어졌다.

 

세례요한의 증언은 3일에 걸쳐 일어난다. 첫날은 자신에 대한 주정의 증언들이다. 둘째 날은 예수에 대한 증언적인 증언들이다. 셋째 날은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로 이동하는 증언들로 되어 있다. 이들의 증언 속에 계속해서 구약과 유대교와 당시의 다양한 메시야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진정으로 믿음 있는 자는 예수가 바로 이 다양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성취하는 메사야라는 것을 보여준다. 증언들의 section의 기능들은 2장부터 20장까지의 예수의 계시활동이 당연히 불러 일으켜져야할 믿음 그리고 그 계시 활동을 보고 깨달은 자들은 예수가 메시야 사상을 성취한 것을 믿고 고백하게 된다.

 

 

 

 

19-24절은 요한의 3일간의 증언이다.

 

19-28절은 첫째 날의 증언이다. 바리새인들로 부터 파견된(24) 제사장 레위인들이(19) 세례요한에게 와서 질문한다. “네가 그리스도냐?” 세례요한의 답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 그 다음 질문 누구냐? 엘리야냐?” “나는 아니다. ” 그 다음 질문 그 선지자냐” “아니다고 답이 줄어든다. 질문들은 그리스도냐? 선지자냐? 엘리야냐? 이것들이 예수 당시 메시야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메시야 사상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 주된 메시야 사상은 나단의 신탁이었다. 나단의 신탁에 의거하여서 정치적 군사적인 메시야 사상이 민속 메시야 사상이었다. 대표단이 물은 이유는 세례요한이 종말론적인 회개운동을 하니까 메시야라고 주장하는가 보다하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까 엘리야냐고 물었다. 엘리야는 말라기 3:23절에 의하면 메시야 보다 먼저 와서 메시야를 소개할 자로 되어 있다. 11:14, 17:12절에서는 예수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다. 3:23절의 예언 대로 메시야인 자기를 소개하는 자로 이해를 하고 있다. 변화산에서 율법의 대표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가 예수의 메시야 됨을 준비한 분으로 같이 나타난다.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런데 왜 요한복음 여기서는 요한이 자기를 엘리야가 아니라고 하는가? 얼핏 보기에 모순이 하나 생겼다. 아마 마, 막에서는 예수가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기능을 성취한 것으로 엘리야라고 말한 것 같고 요한복음에서는 엘리야가 다시 살아나서 오는 것으로 믿는 유대 묵시문학적 엘리야가 아니라고 요한자신이 부인을 한 것 같다.

 

 

 

 

그 다음 그 선지자냐그 선지자란 신명기 18:15절에 근거해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제 2의 출애굽을 구원을 이룰 것으로 믿었다. 이것을 종말의 선지자가 한다. 거기에 대해 요한이 부인한다.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네가 무엇이냐?” 하니까 이사야 403절을 인용해서 광야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부르짖는 목소리다고 한다. 이것은 로고스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로고스인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반해서 요한은 소리다. 그리고 예수는 빛인데 비해 요한은 등불이다고 대조를 이루고 있다. 26절에 너희들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서 있다.”는 말도 당시 메시야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메시야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다는 사상이 있었다. 나중에 예수와 대적자들 가운데 이 사상으로 논쟁이 벌어진다. 우리는 메시야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너를 잘 안다. 즉 나사렛에서 난 요셉의 아들인 줄을 잘 안다고 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그런데 세상적인 것만 보는 사람들은 예수를 잘 안다고 하지만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 자격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는 예수는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 실제로는 예수가 메시야 사상을 충족시키는 사람이다. 이것을 요한복음적인 메시야 비밀이라고 한다. 첫날은 자기에 대한 부정으로 끝났다.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29-34절은 둘째 날의 증언들이다.

 

예수에 대한 증거는 두 가지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성령이 그 위에 머무는 자이다. 즉 성령으로 안수 받고 기름부음 받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로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무슨 뜻이냐?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느냐? C. H. Dodd는 계시록의 양을 의미한다. 양은 죄악의 세계를 정복하고 그의 백성으로부터 모든 죄악을 제하는 양을 말한다. 아람 말로 팔리아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양이라는 뜻도 된다. 이사야 53장의 주의 종이 팔리아로서 양이라는 뜻도 된다. 예수가 주의 고난 받는 종이라는 뜻이다. 53장의 주의 종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사 53장의 주의 종, 고난 받는 주의 종,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대신적으로 고난 받는 주의 종을 하나님의 양이라고 그랬다. 70인경에는 암노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르미로 되어 있다. 예수가 주의 종으로서 자기 백성과 세상의 죄를 없앨 분으로 세례요한이 증거한 것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증거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만찬을 위해서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온 양들을 성전에서 잡아 음식으로 준비하는 그 순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힌다. 닛산 14일 날 못 박힌다. 이 날 유월절 만찬을 하고 typology를 완성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십자가의 못박힘을 그릴 때 유월절의 의미를 많이 부여한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새로운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나타낸다. 바로 예수가 유월절 양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월절 양은 제사의 의미가 없다. 잔치에서 먹기 위해서 잡았다고 하며 어떤 학자들은 이 해석을 반대한다. 그러나 고전 57절에 보면 그리스도 우리의 유월절 양이 제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유월절 양이 제사의 의미로 해석이 되었다. 이것은 원래 구약에서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다양한 제사들이 각기 다양한 뜻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 당시 제사의 의미가 섞여 버렸다. 그래서 원래 제사의 기능이 없던 유월절 양도 제사의 기능을 갖는 것으로 바울이 인식을 하게 된 것 같다. 이런 것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를 세상 죄를 져 없애 버리는 어린 양이 될 수 있겠다.

 

 

 

 

많은 학자들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다 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세례요한이 예수를 유월절 양의 의미로, 주의 고난 받는 종의 역활을 감당하는 분으로 나타낸다. 예수의 구원의 사업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없애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곧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둘째 증거는 성령이 그의 위에 머물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요한복음은 세례 주는 장면을 그리고 있지 않으나 32절에서 세례요한으로 부터 예수가 세례 받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그때에 메시야로서 성령으로 안수 받음, 성령으로 기름부음받 음을 전제하고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고 성령으로 전능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라는 말이다. 31절에 보면 나도 그 분을 몰랐으나 그 분을 이스라엘에게 ······”

 

 

 

 

35-42. 여기는 요한복음의 특징 중 하나인 이중의미가 가득 들어 있다. 그래서 가령 36절의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다시 증거함으로 두 제자가 예수를 따랐다. “따랐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뒤따르다는 말이고 근본 의미는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44, 8:12, 10:4, 27, 12:26, 21:19절 이하, 22절 등에서 따르다는 의미로 제자가 된다는 말로 자주 나타난다.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38절 따르는 것을 보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다. 이 말도 표면적인 의미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무엇을 기대하고 오느냐? 는 말이나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세계에 속하는 분입니까?”라는 고백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는 하늘에서 온 로고스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분이다. 예수의 거하시는 곳은 하늘의 영의 세계이다. 그런데 어디에 거한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어휘중 하나이다.

 

 

 

 

39. “와보라.”도 이중의 의미가 있다. 예수에게로 오는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 3:21, 5:40, 6:35, 37, 45, 7:37절 등에 믿음을 예수에게 나아오는 행위로 표현하고 있다. “본다.”는 말도 지식과 믿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와보라도 문자적 표면적인 의미이나 예수께 믿음으로 나아와서 자기가 영원의 세계에서 온 구원자임을 와서 보라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에게로 와서 예수를 보고 예수를 깨닫고 그와 함께 영원의 세계, 하늘의 세계에 머무는 자이다. 이들은 결국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며 그를 믿게 될 것이다(2:31)

 

 

 

 

그때가 한 십시 쯤 되었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는 때를 한 날의 시작으로 보았다. 따라서 10시는 오후 4시쯤 된다. 주석가들은 10시가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어냐? 금요일 10시는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제자들이 예수와 더불어 안식에 참여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냐? 토론을 한다.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다.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의 첫 제자들이 된 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첫째가 안드레였다. 시몬의 형제 안드레였다. 안드레는 헬라이름이다. 위의 빌립도 헬라이름이다. 이것은 헬라어가 예루살렘의 유대인에게도 널리 쓰이는 언어이며 헬라이름을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하나의 제자도 이름을 밝히지 않으나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서 세베대의 아들 요한자신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요한의 증거를 듣고 와서 확신하고 예수를 믿게 되고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메시야를 발견했다.”고 증거한다. 증거를 받은 자는 시몬인데 예수가 그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준다. 게바는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공관복음 전승과 마찬가지인데 요한은 게바라는 베드로의 이름을 강조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사실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중요한 역활을 할 사람에게 역활을 상징하는 새로운 이름을 주는 일이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시몬에게 바위라는 이름을 준 것은 예수가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사에서 바위와 같은 역활을 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공관복음에서는 강조하며 다루나 요한복음에서는 그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 또 이튿날 예수가 갈릴리로 가려고 할 때에 빌립을 발견하고 예수가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였다. “따르라는 문자적인 의미가 있는 동시에 내 제자가 되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빌립이 베드로 안드레와 동향 사람이었는데 빌립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또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쓰고 또 선지자들이 쓴 그 사람을 내가 발견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다는 말은 아마 신 18:15절에 나오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약속했는데 그 선지자가 종말에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룰 종말의 선지자로 그려졌다. 안드레는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증거했다. 선지자들이 쓴 분이다는 말은 선지자는 엘리야이다. 모세가 율법의 대표였다면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이다. 엘리야가 다시 살아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예비한다는 사상이 있었는데 이 빌립은 예수에 대해서 종말의 선지자라고도 하고 다시 올 엘리야라고도 증거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수의 제자 된 자들의 예수에 대한 증거는 세례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 한 것과 같다. section은 예수의 메시야 됨에 대한 증언들의 section이다. 이것이 주된 제목이라고 하면 제자도에 대해서도 나타나 있다.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다. 제자는 예수께 와서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자임을 보고 알고 믿고 증거해야 한다. 제자도를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모본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와서 보고 믿고 함께 거하고 그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은 부제로 나타난다.

 

 

 

 

**** 나다나엘과의 대화 ****

 

증거하니까 처음에는 조금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나사렛에서 무슨 메시야가 나겠느냐? 구약에는 나사렛에서 메시야나 선지자가 난다는 말이 없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나온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예수를 진짜로 아는 사람들은 예수가 구약의 메시야의 고향을 충족시키는 줄을 안다. 나다나엘 처럼 피상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모르나 진짜로 아는 사람들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실제로 나셨고 실제로는 하늘에서 오신 메시야인 줄을 안다. 이 대화에서 이런 것이 나타난다. 예수가 나다나엘을 보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 속에 꾀가 들어있지 않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다고 지칭한다. 이에 대해서 나다나엘이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하니까 예수가 대답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하셨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이 예수에 대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다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말하면서 나다나엘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들이 볼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구약의 세 개의 중요한 구절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삼하 7:12-16절의 나단의 신탁이다. 나단의 신탁을 보면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서 신탁을 준다. 네 수가 다하면 네 씨(다윗의 씨)를 택해서 네 다음 왕위에 앉히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겠다. 그래서 너의 아들이 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위에 하나님 대신 합법적으로 통치하고 왕을 삼겠다. 그리고 너의 가문()을 세우겠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야웨의 집(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다윗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오르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대신에 그의 백성을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 그래서 가령 시2:7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의 등극시에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왕위에 오를 때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고 선언이 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백성위에 합법적으로 군림한다. 나단의 신탁은 다윗왕조를 건설하는 것이고 다윗의 자손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할 수 있는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방민족의 오랜 지배와 바벨론 포로의 과정에서 이것이 메시야적으로 메시야적인 예언으로 이해되었다. 종말에 다윗의 씨 다윗의 가지를 하나님께서 일으켜서 자기 아들로 선언하고 다윗의 왕좌에 앉힌다.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성군의 통치와 이방민족을 정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태평성대를 가져오리라는 메시야 사상의 중요한 뿌리가 여기서 나온다. 예수 당시 메시야적 칭호는 다윗의 아들”“다윗의 가지등이었다. 메시야 이름이 다윗이었다.

 

 

 

 

삼하712-16

 

삼하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다나엘과 예수와의 대화에서 나다나엘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을 예수가 다윗의 신탁을 성취할 메시야로서 다윗왕국을 재건할 사람이다. 즉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여기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은 정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택한 목적, 하나님의 구원사가 성취될 것을 믿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고 육신적으로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후손들이지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반대한 사람이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은 세상의 대표이다. 유대인들이 가령 요6장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서 제2의 모세로 예수를 정치적인 왕으로 만들려고 하자 예수가 도망을 갔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이스라엘 왕으로 사람들이 환영을 했다. 빌라도와의 토론에서 세상적인 왕이 아님을 예수가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아래 십자가에 못박힌다. 실제로 요한복음이 보여준 것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다. 이스라엘이 육신적인 유대인이 아니고 예수를 믿어 하늘에 속한 영적으로 새롭게 창조된 공동체가 이스라엘이다. 민족주의적인 개념, 물리적인 개념의 왕이 아니라 영적인 그들의 주로서 왕임을 보여주고 있다. 나다나엘이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분으로 예수를 고백한다. 이에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튼 것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한다. 완전한 계시를 약속한다.

 

 

 

 

하나님의 나타남에 대한 비젼을 본 것이다. 9절에 어좌들이(복수) 놓여있고 옛적부터 계신 이”(하나님)이 어좌에 등극하고 책이 펴지고 심판을 베풀고 13절에 그리고 내가 보니 또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인자)”가 하나님 앞에 구름을 타고 나아와서 14절에 하나님으로 부터 왕권과 영광을 받는 것을 보았다. “왕권을 받았다하는 말은 하나님 대신에 통치권을 받았다는 말이다. 구약의 언어를 빌리면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왕권을 부여받아 하나님 대신에 통치할 수 있는 분은 누구냐?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을 해야 한다. 실제로 다나엘이 본 것은 하나님이 등극하시고 그의 아들이 그 앞에 나와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받아 통치하신 것을 보았다. 그 아들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같이 생겼다. 사람의 아들이란 셈족오에서 사람이라는 뜻이다. 구름을 타고 하나님 같이 나타났지만 동시에 사람 같이 생겼다. 이것이 다니엘이 본 환상이다. 이 환상이 의미하는 것을 18···, 22···, 26···에서 천사가 설명을 해준다. 그 비젼의 뜻이 무엇이냐 하면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 그림에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으로 부터 왕권을 받는다는 의미를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다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여기는 개인이고 여기는 복수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 체현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서의 이 환상은 묵시 문학의 특성상 종말에 지상에서 실재가 될 하나님의 구원의 게획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게획이 이미 하늘에 짜여있다. 이 게획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나 묵시가들을 통해서 미리 내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하지 말고 타락한 세상에서 같이 타락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종말에 실재가 될 것을 바라며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히 거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다. 역사적인 현실은 바벨론, 알렉산드리아가 헬라군대와 로마군대 등에 짓밝힘을 당하고 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서 약속(언약)을 지킬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약속을 신실히 지켜 종말에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구원을 주시겠다는 계시이다.

 

 

 

 

창세기 2812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이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을 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잠을 잤다. 그때 꿈을 꾸었는데 사다리가 자기 몸에서 하늘 끝까지 놓여지고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벧엘이라고 야곱이 그 곳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이야기가 유대신학자들에게는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탈굼의 여러 판들이 일관되게 이 이야기를 확대시킨다. 또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에도 길게 서술이 되어 있다. 거기에 야곱이 그의 형을 속이고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을 갈 때 천사들이 동행해서 보호하고 있다. 벧엘에 이르러서 야곱이 잠이 드니까 천사들이 하늘에 올라가서 다른 천사들에게 빨리 내려와서 보아라. 그래서 자고 있는 야곱의 얼굴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자고 있는 야곱의 얼굴을 보았다. 왜 이럴 필요가 있느냐? 하늘의 궁전 하나님의 어좌에 야곱이 앉아 있다. 천사들이 야곱을 보기를 원했으나 보지 못했다. 지상에 잠자고 있는 야곱은 천상의 야곱의 모형이다. 그래서 야곱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저녁 내내 오르락 내리락했다. 이 이야기는 황당무개한 이야기 같으나 어떤 신학적인 진리를 표현하려고 하느냐?를 물어야 한다.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내포적인 대표이다. 야곱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이다. 야곱 이스라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숙명은 하나님의 어좌에 높힘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자기 형에게 쫓기는 신세로 방황하고 있다. 로마 사람, 바벨론 사람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이방민족으로 부터 짓밟히고 살지만 종말에 하나님의 어좌에 높힘 받아서 그와 교제하고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 영생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의 숙명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신앙을 북 돋우려고 하고 있다.

 

 

 

 

예수가 중요한 유대신학적인 용어와 이 신학적인 용어를 확장해서 말하고 있다. 더 이상 야곱 이스라엘이 아니라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했다. 예수도 자신이 인자여서 옛 하나님 백성의 조상이며 옛 하나님의 내포적 대표인 야곱과 대치해서 자기에게 소속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늘에 속하게 하는 자인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인자에게, 속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나다나엘처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진짜 이스라엘이다. 진짜 이스라엘은 그 속에 간사한 것이나 꾀가 없다. 옛 이스라엘 백성은 그 속에 야곱의 잔꾀 간사함이 들어 있다. 진짜 이스라엘 됨은 나다나엘과 같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신앙고백함으로서 나타낼 것이다. 이들을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고 있다. 51절 말씀은 창세기 28:12절 말씀을 해석한 것을 이어 받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예수가 인자로 대치함으로서 다니엘에게 계시된 단 7장의 구원의 약속을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어좌에 높힘을 받는다고 예언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 지상에 사는 인간들이 예수 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세상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것을 영생이라고 한다. 이 구원을 나다나엘에게 약속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1: 51절은 서론의 결론이다. 서론을 전체적으로 결론지으면서 요한복음의 본론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28:12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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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주해) 2-4- 김세윤 신약 신학

2008/02/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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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요한복음 본론 2-4

 

 

 

 

본론(2-20)은 이 51절의 예수의 약속을 펼칠 것이다. 예수가 어떻게 약속을 성취하느냐? 예수가 인자로서 대속과 새 언약의 죽음을 당하시므로 그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된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계시하고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어서(12:32) 그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들로 자기 있는 곳에 있게 한다. (14:3, 3:13)시공의 제한성 속에 사는 인간은 위엣 세상 무한에 참여해야 만이 구원이 가능하다. 이 구원은 하늘에서 온 인자가 대속의 제사로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연합시켜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고 하늘로 높인다. 하나님의 보좌 위에 높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함과 영광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이것을 본론에서 보여준다.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2:1-4:42

 

 

 

 

이 부분은 두 개의 이야기와 두 개의 설교로 구성이 되어 있다.

 

2:1-11 물을 푸도주로 변화시킨 첫 표적에 대한 이야기

 

2:12-19 예수의 성전 소란

 

3:1-21 니고데모와의 대화와 긴 설교

 

4:1-42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와 예수의 설교

 

 

 

 

이 두 가지의 설교들은 두 가지 의미의 표적들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첫 표적과 더 많이 관계가 있다. (성전소란과도 관계가 있지만)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도 첫 표적과 관계가 있으나 성전소란과 더 관계가 있다. 그런데 표적들이 나타내는 것은 예수가 새 시대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음이다. 요한복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성취, 예수가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한다. 성취함으로서 능가해서 완전히 대치하는 주제가 흐른다. 이것이 집약적으로 있는 곳이 제 1부이다. 어떤 때는 성취가 강조되어 있고 연속성이 강조되어 있고 어떤 때는 대치가 강조되어 있다. 강조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다.

 

 

 

 

2:1-11 가나 혼인 찬치

 

잔치는 종말에서의 메시야 왕국에서의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기 위해서 즐겨 쓰고 있다. 잔치는 하나님이 대표요 하나님이 source이다 우리는 그의 손님이다. 잔치에 가면 풍요함이 있다. 배부르면 만족하고 기쁨이 있다. 잔치라는 것은 모든 것이 사랑의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구원의 실재를 잔치로 비유할 때는 인간의 실존을 결핍성으로 제약성으로 설명한다. 모든 죄가 이 결핍성에서 온다. 결핍성에서 욕구불만 채워질 수 없는 욕구불만이 있고 배고품 기쁨이 없고 사랑이 없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인간에게 예수께서 구원을 약속한다. 이 구원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풍성한 기쁨이 있다. 이유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베푸는 잔치이기 때문이다. 구약 유대교에서 종말에서 전치는 메시야 왕국의 소망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었다.

 

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것은 이 잔치는 풍성한 잔치가 아니다 결핍성의 잔치이다. 흥이 깨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깨뜨려져 버렸다. 이 잔치에 커다란 유대 정결의 예를 갖추기 위한 물동이들만 앉아 있다. 유대교의 정결의 예(레위기)를 다 갖출 수 있는 물동이가 흥이 깨진 잔치에 아주 소용이 없다. 이것은 맥빠진 유대교를 상징한다. 여기에 예수가 나타나서 아무 쓸모없는 정결의 예의 물독을 제일로 맛있는 포도주로 만들었다. 다시 생명력이 넘치는 잔치로 바꾸었다. 이것을 요한은 표적이라고 한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 이것을 표적으로 더 깊은 하늘의 진리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이적의 표적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한 본질을 영광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진정한 본질은 예수가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여는 것으로 깨달았다. 하늘에서 오는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푸심으로 결핍성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셔서 하늘의 기쁨과 생명력에 참여하게 할 시대를 여셨다.

 

 

 

 

2:12-19 성전 소란 사건이야기

 

전통적으로 이것을 성전 청결이라고 했다. 성전 뜰이 얼마나 크냐 하면 가로 300미터 세로 475미터이다. 성전 뜰 여인의 뜰 남자의 뜰 제사장 제단 지성소 등이 있다. 로마 군대가 약 5-6백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감시하고 있었다. 중요한 순례절기에는 민족해방운동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장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와서 예수가 상을 뒤업고 소란을 피웠다. 전통적으로 이것을 성전청결이라고 한다. 성전의 거룩성을 회복해서 하나님께 헌당했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다. 이방인의 뜰은 요즘 사람들이 만든 뜰이고 원래 없었다. 11:16절에 근거해서 성전이 유대인의 전유물로 전락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원래 성전은 모든 사람 이방인들 까지 포함한 기도의 처소였는데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 마저도 유대인들이 막아서 예수가 싹쓸이 해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기도처를 되찾게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위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처로 했다는 의미로 예수의 성전에서 소란피우는 사건을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새 와서는 정치신학 해방신학자들은 혁명적으로 당시 성전 제사장들의 부패 타락상을 말하는 것이고 가난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로 부터 오는 민중들을 착취하는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했다고 해석을 한다. 이런 것들은 별 의미가 없다.

 

사실 성전 소란 사건이 큰 사건이 아니었다. 큰 사건이었다면 성전경찰에게 잡혔다. 성전소란은 혁명적인 엄청난 사건이 아니라 장사치 몇 명에게 상징적으로 상 몇 개를 뒤엎은 사건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보는 선지자적 시위 싱징적인 데모이다. 행위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상징적 행위를 통해 전달하는 메세지가 있다.

 

 

 

 

여기서 논쟁이 벌어진다. 네가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표적을 내봐라. 메시야로서의 권세를 증명해라. 이에 대해 예수가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사흘 만에 내가 세우겠다고 한다. 이 말은 요한복음의 유명한 기법이 나오기 시작한다. 곧 오해(disunderstensing), 지도자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한다. 시공의 물리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고 그것의 영적인 진리 하늘의 진리 표적성을 보지 못한다. 46년 동안 걸렸는데 3일 만에 짓는다고. 그들은 에수의 표적성을 깨닫지 못했다. 요한은 이 표적성을 자기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의 부활 후에야 깨달았다. 부활의 빛 아래 되돌아 보았을 때 깨달았다. 이 말은 예수의 대속과 십자가의 죽음이 새 언약의 제사이다.

 

 

 

 

34장은 두개의 이야기가 나온다. 첫 이야기는 대표적인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이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이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관원으로 아마 산헤드린 공회의원 이었을 것이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유대교의 대표적인 유대인이다. 유대교의 심오하고 성결하고 좋은 부분을 대표하는 자이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찾아 왔다. 밤은 진리와 거리가 먼 혼돈의 질서 속에서 이 세상의 혼돈과 고난을 상징해서 하나님과 진리의 세계와 반대의 세계를 말한다.

 

 

 

 

이 때 니고데모가 빛이신 예수께로 나아온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9:4, 11:10, 13:10절 등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몇 번 쓰인다. 319, 21절에서 빛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가 세상의 빛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고 그 계시에 부정적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데 2절의 밤은 그 빛과 대조적인 현상이다.

 

니고데모가 와서 랍비여 당신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그 선생임 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라고 복수로 말하는데 여기 니고데모도 2:23절에 언급된 예수의 첫 표적들을 보고 예수에 대해 열려진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자들을 대표해서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3절에 예수가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표적들을 행한다고 씨초적인 신앙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태도로 거기서 더 깨우침을 받고자 밤에 찾아 온 것이다.

 

예수가 아멘 아멘 아노센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느니라. 여기에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첫째는 아멘 아멘 이라는 말은 유대교에서는 당시 하나님의 말씀선포 끝이나 기도 끝에 썼다. 그것이 진리 됨과 신실함을 천명하는 것으로 썼다. 예수는 항상 아멘을 먼저 쓰고 중요한 선언을 했다. 이것을 예수의 독특한 아멘 사용법이라 한다. 여기서 예수가 스스로 선포한 말이 아멘 됨 진리 됨을 보장하는 예수의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권위주장을 깨달을 수 있다. 가령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 고 말함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 여호와께로 돌려서 자기 말의 진리 됨과 신적인 권위를 보장받으려고 했는데 예수는 정반대로 아멘 그리고 내가 말한다고 말함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돌리고 자기가 중요한 말씀을 하는데 그것이 아멘으로 보장한다고 해서 선지자들보다 더 직접적인 하나님의 절대 계시자로서의 자기 주장을 했다. 공관복음에는 아멘이 한 번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아멘이 두 번 나온다. 우리 말은 진실로 진실로라고 번역을 해서 이 말이 얼마나 독특한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을 번역을 하지 말고 그냥 아멘 아멘으로 두었어야 했다.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선지자 보다 더 권위 있는 자라고 니고데모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아노센 거듭난다. 는 말이 중요하다. 번역을 하지 않고 그냥 쓰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위로부터 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다시의 의미가 있다. 요한은 둘 다의 의미로 쓰고 있다. 위로부터는 헬라의 이원론적인 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위는 하나님의 영의 세상이고 아래는 육의 세상 물질의 시간의 세상이다. 이래 있는 사람이 위로부터 나야 한다.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 영생에 참여할 수 없다. ?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이 세상에 속하는 존재로서 죽음에 얽매여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동참하려면 위로부터 나야 한다. 이미 난자가 나야 하니까 다시 나는 것이다. 육으로 난 자가 위로부터 나야 하니까 다시 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란 예수를 믿음과 세례를 통해 새롭게 된 것으로서 다시난다. 거듭난다는 개념이다. 1:12 11:52 요일2:29 3:9 4:7 5:1, 4, 18 등에 다시난다는 그림언어가 똑같이 나온다. 이것은 요한이 절대적으로 쓰는 그림언어이다. 믿음과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됨이 다시남이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외 벧전 1:3, 23 3:5 등에도 그림언어가 비슷하게 쓰이고 있다. 바울은 더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로 새창조” “새피조물(고후5:17)”로 표현한다. “거듭난다는 것이나 새창조가 나타내려는 reality는 다 똑같은 것이다. 육의 상태에 있는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죄와 죽음에 얽매여 있던 존재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존재로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요한적인 그림언어가 벤전 디도서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위로부터난다는 의미가 첫째 의미이고 다시난다는 것은 부차적인 의미이다.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4절 니고데모가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는 가?” 하고 질문한다. 여기서 유명한 오해가 발생한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대표이고 예수에 대해서 조금 눈이 띄인 상태이지만 영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참여하지 않는 자로 육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윗세상의 진리를 알리가 없다. 육의 사고방식으로 밑의 세상으로 인식을 할려고 하면 예수의 말씀을 오해할 수 밖에 없다.

 

 

 

 

5절 예수가 다시 말한다. “물과 상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5절은 3절을 되풀이 하고 있다. 병행구절이다. 5절과 3절을 똑같은 말이다. 3절의 아노센물과 성령으로나야한다고 5절은 풀어서 쓰고 있다. 세례의 물은 성령의 상징어이다. 성령의 힘이 역사하는 세례는 물로 일어난다. 물로 깨끗이 씻김을 받고 육에 속한 삶을 끝맺고 위의 세상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존재로 다시 나는 일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가 이 말을 유대인의 대표인 니고데모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유대교도 유대인의 가장 심오한 것도 이 땅에 속한 것이다. 유대교에서 자연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없고 거기에는 과격한 단절이 있어야 한다. 이 단절은 예수께서 가져오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 나야한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수양과 열심과 지혜가 아무리 심오하더라도 또 고귀하더라도 인간적인 가능성의 최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 도덕 이런 것에 대한 강력한 평가가 이 속에 숨어 있다.

 

가장 고귀한 지식 종교성도 우리 인간을 하나님 나라 영생 하나님의 세상으로 인도할 수 없다. 그 구원은 위로부터” “성령으로부터나야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을 예로 들어 인간의 모든 종교성에 대한 평가를 말하고 있다. 지혜, 과학의 발달, 도덕성 함양, 교육을 잘 시키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의 자유주의, 낙관론적인 사상, 진화론적인 사상이 그랬었다.

 

과격한 새로남 새창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위에서 오는 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요한복음에서 두고 두고 23중의 의미를 가진 말을 많이 접할 것이다.

 

67절에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일 수 밖에 없고 성령으로 난 것만이 영이다. 육적인 가능성을 아무리 개발해도 육이다.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reality에 참여할 수 없다. 영으로 난 것만이 영이다.

 

 

 

 

7절에 위로부터 나야한다는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놀라지 말라.

 

8절은 첫째 인간으로 부터는 꿰뚫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의 자유함과 심오함을 말한다. 인간의 의지로서는 control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의 자유함과 심오함을 말한다. 둘째 반면에 영의 역사의 결과가 분명히 나타남을 말한다. “푸뉴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이란 말은 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 말은 이라는 뜻도 있고 바람이라는 뜻도 있다. 예수가 영의 역사함을 바람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의 그림은 바람의 주권자적인 자유로움에 비유해서 인간이 control할 수 없는 영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그 영의 역사의 결과는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이 역사된 곳에 거듭남의 결과는 있다. 위로부터 남의 결과는 있다.

 

 

 

 

9절 통 못 알아 듣겠습니다.

 

10절 예수가 핀잔을 준다. 유대교의 한계성을 말해주고 있다.

 

11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참여함을 체험하고 우리가 그것을 증거하는데 니고데모로 대표되는 너희들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느냐?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 땅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12절에 우리가 땅에 속한 일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일을 말하면 너희가 믿겠느냐? T. K. Barret의 설명이 옳은 것 같다. “땅에 속한 일은 이 물리적인 세상 육신적인 세상의 사건들로서 예컨데 태어남. 바람이 분다 등의 사건들로서 그리스도와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비유 역활을 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난다, 태어난다, 바람이 분다는 땅의 현상을 비유로 들어 하늘의 현상을 설명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못 알아 듣고 예수를 믿지을 못했다. 그런 상황속에서 하늘의 것은 하늘의 질서는 이 땅의 비유와 연결시키지 않고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무슨 소용이 있느냐? 즉 땅의 것인 태어남 바람부는 현상으로 땅위에 속하는 물리적 현상으로 하늘에 속한 진리의 비유로 쓰이는 것들 하늘의 진리를 땅위에 있는 현상으로 비유해서 설명해도 못 알아 듣는데 비유하지 않고 하늘의 진리를 직접 말하고 선포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는 말이다.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유대교에서는 지금까지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를 뜻을 계시하는 자가 쭉 있었다.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 선지자들의 계시를 유대인들이 성경으로 묶어서 연구하고 하나님을 터득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의 계시를 가장 잘 터득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이다. 이스라엘의 선생이고 유대관원이고 바리새인이다. 제일 열심 있는 연구가이다. 그도 한계가 있다. 하늘의 진리를 못 알아 듣는다. 심지어 비유해서 설명을 해도 못 알아 듣는다. 이것이 유대교의 한계이다. 왜 유대교에 이 한계가 있느냐? 선지자 자신들이 이 세상에 속한 자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 세상에 그 말씀 하나님을 계시했기 때문에 그들 자신들이 제한적이었다. 반면에 예수는 누굽니까? 예수는 어떤 사람이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로서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다. 곧 위와 아래 세상에 속해서 다리를 놓은 사람이다. 하늘의 진리를 몸체로 이 세상에 나타내 주는 분이다. 예수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서 다시 올라가는 자로서 계시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유대교의 계시 방법은 간접적인 방법이다. 반면에 여기에는 성육신 하신 로고스가 하나님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계시한 것이다. 이렇게 계시의 역사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이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지자 시대에 속하는 대표적인 존재로서 계속 파고 파서 연구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계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새로남의 방식이다.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인자가 위세상과 아래 세상을 다리 놓는 분이고 아래 세상에 속하는 우리가 인자인 예수를 통해 윗세상에 영생에 참여하게 하는 분이다.

 

 

 

 

1415절 우선 13절에서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의 올라간다는 말과 14높임 받는다는 말은 동의어이다.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고 하늘로 올라간다. 따라서 높임받음올라감은 동의어이다. 어떻게 올라가느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여기서 높인다는 말은 이중의미가 있다. 첫째 문자 그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지상에서 들린다는 말이다. 둘째 그것은 동시에 지표에서 들림은 예수의 영광 받음이다. 영광 받음이란 예수의 본질이 드러남이다. 요한복음 13-20장 까지가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영광의 책이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예수의 십자가에 들림이 비교가 되고 있다. 비교점은 무엇인가? 랍비들의 해석은 쳐다본 자는 살고 보지 않는 자는 죽는다. 구리뱀의 구원의 힘은 놋 뱀을 쳐다본 자는 위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신뢰하고 그를 의지했다.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을 앎 이것이 구원의 힘이 있었다고 해석을 한다. 이 예수는 눈으로 보는 사람은 거기서 바로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 하나님께 의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신 사건이다.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절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아들을 주셨다. 이것이 내어줌의 형식(giving a formular)이다. 하나님이 주어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목적어인데 목적어를 내어 주셨다. 무엇하기 위해서 내어주셨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내어줌의 형식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준다. 내어줌의 형식의 대표적인 구절은 요3:16절이다. 또 롬 8:32 2:20 요일 4장에도 나온다. 나올 때마다의 강조된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사랑을 한 증거는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무엇하기 위해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자기에게 반역한 이 세상 자기의 피조물이나 계속해서 자기에게 반역하는 존재.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심오하다. 세상을 쭉 찾아보고 종합해 보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나님과 적대하는 관계 사단의 권세아래 암흑에 속해 있고 거짓 아래 있는 것이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어느 정도 사랑하느냐? 아들을 내어줌이다. 그의 아들을 내어줌은 그리스도 사건 전체이다. 성육신에서부터 십자가에 죽으심까지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주신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의 절정은 어디서 일어났느냐?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 요한일서 48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가 나타났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자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하는 자다.

 

계시의 첫 원칙은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같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분으로서 그의 하나님 됨을 나타냄이다. 그 사건이 수난인데 그것이 예수를 하나님 됨의 본질을 나타냈다. 십자가 사건으로 비로소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예를 들면 도마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예수의 영광 받음 사건이다. 놋뱀 사건이 위를 쳐다봄으로 세상의 가치들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고 위로부터 오는 위에 계시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이 육의 세상에서 자기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찾으려 하고 행복의 조건을 찾으려 하고 돈 지식 명예 등을 추구하는 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 들림 받은 예수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구원받는다. 들림 받은 사건은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인데 그 사건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함을 계시함으로 동시에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된다. 영생은 신적인 삶이다. 종말론적인 의미이다. 이 시대의 삶이 아니고 오는 세대의 삶이다. 시간적인 이원론으로 표시했을 때 이 세대의 삶이 아니라 오는 세대의 구원의 세대의 삶이다. 헬라적인 공관적인 이원론으로 한다면 이 세대의 삶은 물질의 삶 오는 세대의 삶은 하나님의 세계의 삶 영생의 삶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삶이다. 이 세대의 삶은 육신적인 제한된 자원으로서의 삶이다. 이 삶은 고난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삶이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시간의 제약 때문이다. 이 세대의 삶은 결핍 가난한 삶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이다. 이것은 죽음의 증상들이다. 우리가 죽음 병에 걸린 것이다. 죽음 병의 증상들이다. 죽음이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이 되었다. 죽음의 세력에 붙잡혀 있다. 감기가 걸리면 증상을 나타내듯이 영생은 생명이라고도 한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 질들로 만들어진 삶 신적인 삶이다. 여기에는 고난 결핍이 없다. 이것이 생명이다. 이 삶은 이 세대의 삶과 전혀 다른 것이다. 질적인 근본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는 것이다. 아직 완성이 안 되었지만.

 

 

 

 

17절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다. 16절에 내어줌의 형식이 있다. 17절은 보냄의 형식(sending formular)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다 보냄의 형식에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보낸다는 말은 유대의 미쉬나의 대하코트 55절에 보면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같다. 사자는 보낸 주인의 전권대사이다. 주인의 전권을 행사하는 자이다. 이런 보냄(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속에 숨어 있다. 특히 지혜의 신학이 배경을 이룬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으로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agent 실행자 일꾼 노릇을 한다. 요한복음 서문에서 유대 지헤의 신학의 배경으로 로고스라는 천명이 이루어 졌다.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로 말씀으로 구약시대에는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떻게 역사하셨느냐? 그의 말씀 지혜를 통해서 역사하셨다고 점진적인 계시의 초보단계에서 깨달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더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보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전권대사이다.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 아들은 상속자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에 참여하는 자,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전능함, 하나님의 모든 속성,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라는 소리이다.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목적은 즉 예수를 보낸 목적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계시해서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예수가 담당했다. 이 목적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들림 받은 사건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들림 받음을 보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구원 영생에 도달한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여기서 부정적으로 말하기를 예수는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고 한다. 심판은 정죄 벌준다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하려 왔다. 그런데 그 다음절에 금방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정죄 받지 않고 구원받고 영생에 참여한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아 버렸다 하고 몇 절에서 이 말을 부연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의 십자가를 예수 당시 예수의 십자가 복음이 선포될 때 예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쳐다보고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뜻을 헤아려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자가 있는가하면 예수가 죄인이라고 예수를 정죄하는 자가 있다.

 

로마의 관원 제사장 유대인 빌라도는 예수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사형에 처한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이 세상에 계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낸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즉 예수의 계시를 안 받았다. 터득하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가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사형에 처했다. 예수가 빛으로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 다 주는 빛으로 오셨다. 그 빛이 십자가에 나타났다. 그런데 소수 몇 사람은 그 빛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을 덧입었다.

 

이런 현상은 항상 일어난다.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항상 어떤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구원을 덧입고 어떤 사람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리석음이다. 미련함이다. 걸림돌이다고 정죄한다. 그래서 가룟유다 같은 사람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원하러 오셨는데 항상 무엇이 발생하느냐면 갈라짐이다. 이 갈라짐 갈음은 심판의 의미이다. 거짓과 참을,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른다. 두 번째 의미는 거짓과 그른 것이 잘못되었다고 정죄하고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다. 그런데 예수가 오신 것은 사실은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구원받은 무리와 그 계시를 반대해서 그 구원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절하는 가름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의 가름이 나타난다. 세상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할 자로 스스로를 밝힌다.

 

어떻게? 예수의 메세지와 십자가에 대한 자기들의 반응으로 밝힌다. 자기들이 세상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함께 멸망해가는 자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자를 두고 여기서 심판을 이미 받았다고 말한다. 예수가 심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스스로를 심판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심판하러 오심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일부에게는 구원이 일어나고 일부에게서는 심판이 일어난다.

 

추상화를 전시하는 화랑에 갔다. 우리가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합시다. 60년대에 구소련이 개방화 정책을 할 때 피카소 그림 전시회를 열었는데 후르시초프가 당나귀 꼬리를 몇 번 흔들어서 만든 그림 같다고 했다. 결국 그가 이 그림을 평가했다. 정죄했다. 그런데 실제로 피카소 그림에 대한 평가로 후르시초프 자신이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림의 세계에 대한 무식을 폭로한 것이다.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다.

 

 

 

 

예수가 빛의 세상에 왔다. 빛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 빛을 정죄하고 빛을 거짓이고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자들은 그 거부하는 행위로 내가 빛과 관계 없는 자 자신이 암흑의 세계에 속한자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고 정죄이다. 이것이 19-21절 까지의 설명이다.

 

 

 

 

22-30절 까지는 예수와 요한의 세례가 비교되어 있는데 그것은 니고데모 유대교의 대표에게 예수가 무엇을 말했느냐? 유대교의 최고의 표현도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으로 자동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하늘에서 온자 하나님의 계시자 그가 주는 영으로 새롭게 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그것이 세례(물과 성령)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세례 성령을 전달하는 예수의 세례와 물세례만을 주는 요한의 세례가 대조된다. 요한의 세례는 유대교의 최고의 가능성 니고데모와 비슷한 것이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이다.

 

 

 

 

3: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1-36절 까지

 

앞의 3:1-21절 까지의 내용들이 다시 한 번 요약되어 나타난다. 3장의 이야기는 2장에 대한 해설이다. 2장에서의 두 가지 이야기 즉 청결의 예의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성전을 청결케함의 사건이다. 이 두 이야기는 표적이다. 이 두 개의 표적성을 해설한 것이 3장이다. 청결의 예의 물과 성전은 유대교이다. 이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표현인 니고데모도 포도주 떨어진 잔치와 같다. 더 이상 구원의 힘이 없다. 기쁨이 없다. 타락한 성전에서의 예배 등은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가 주신 성령 윗세상의 힘에 의해서 유대교도 가장 고상한 유대교의 대표도 새로 나야 한다. 포도주가 상징하는 기쁨 축복 새성전으로서의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예배가 이루어진다. 어떻게 예수가 이것을 가능케 하느냐? 하늘에서 온 자이기 때문에 하늘에 것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서 그를 통해서 이 세상의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 요한복음 4장도 마찬가지로 이것에 대한 해설이 계속된다. 3장은 가장 고상한 유대교 우리 인간지성의 가장 고상함, 우리 인간 종교성의 가장 고상함 등으로 인간 가능성의 최대한 발휘로는 신적인 삶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할 수 없다. 인간 낙관론과 휴머니즘에 대한 주정의 표현이다.

 

 

 

 

4장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이방인과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방인들 보다 더 나쁜 부류이다. 그중에서도 여인이다. 즉 정통 유대교의 대표자와 남편이 6명이나 있는 이방여인이 대조된다. 이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종교를 이방인들의 우상종교의 혼합종교로 보았다. 이방인들은 우상을 남편으로 말한다. 우상을 남편으로 주로 섬기는 종교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계시한 율법에 따라 정통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겼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섞여서 더럽혀서 이방인들의 신들을 다 섬기는 창녀와 같은 존재들이다. 혼합종교이다. 사마리아교를 혼합종교로 보았다. 그런 구조로 종교의 대표자인 사마리아 여자를 들어서 설명한다.

 

이들에게도 예수는 구원자이다. 442절에 사마리아인들의 입에서 이는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는 신앙고백이 나온다. 그래서 예수가 온 세상의 구원자인 줄을 앎이니라.

 

어떻게 전개하느냐면 두 가지의 그림을 통해서이다. 하나는 야곱의 우물과 하나는 성전이다. 한 구절은 예수가 생수를 주시는 분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성령을 주시는 분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한 구절이다. 또 한 구절은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를 가능케 하는 분이다는 것이 한 구절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진리로 예배케 하시는 분이라는 주제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주제이다. 그래서 이 두 주제는 2장의 두 사건(표적)들과 연결 되고 3장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2-4장까지가 한 단위를 이루는 예수께서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9절 까지는 예수가 본론에 들어가기 위한 주변 정향을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한다. 예수의 선교활동 중에 있음직한 한 에피소드를 말하기 위해서 주변 정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10절에서 예수께서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마실 것을 달라고 한 자가 누구인줄 알았으면 너는 그에게 요구할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줄 것이라고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한다. 그런데 여자는 이 말을 못 알아 듣는다. “생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샘에서 솟아나서 흐르는 활수, 흐르는 물이다는 뜻이다. 생수라는 뜻이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는 영생을 주는 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아래 세상에 사는 보이는 것 만족할 수 있는 것 물질의 세계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활수로서의 의미 밖에 보지 못한다. 세상적인 의미로 가치판단을 하기 때문에 항상 예수가 의미하는 영의 세계 진리의 세계 높은 세상의 의미를 터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우물은 깊은데 당신이 어떻게 떠올 수 있느냐? 고 질문한다. 즉 오해가 일어난다. 게다가 이 여인은 12절에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샘을 우리에게 주었고 그도 이 샘으로 마시고 그 자손들도 이 샘으로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냐?고 한다. 즉 야곱과 비교하는 좋은 대화의 전환점이 생겼다. 야곱은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야곱의 우물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금까지 목을 축인 것은 사실이나 이 물은 마셔도 다시 마셔야 하는 물이다. 영생을 주는 물이 아니다. 이 물은 토라 율법을 상징한다. 토라 율법 모세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체로서 그 토라를 배우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구원을 힘입는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그 물이라는 것은 생명에 꼭 필요한 것이다. 물의 상징성 물은 빛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상징어로서 유대교에서는 토라가 물이다.

 

 

 

 

야곱의 물은 토라로 상징된다. 이것은 부족하다. 어떤 의미에서 부족하냐? 영원히 결핍이 없는 그런 삶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조금 도움을 주는 정도의 것이다. 반면에 예수가 주는 물은 그와 반대로 영생을 주는 물이다. 그래서 이 물을 마시면 목마름, 부족함, 결핍 등이 없다. 위에서 오는 생명의 물이다. 그러니까 이 말도 여인은 못알아 듣고 활수로서의 의미만 부여한다.

 

 

 

 

그러면 그 물을 달라고 예수께 부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가 제공하겠다는 그 물은 성령을 두고 말함을 가리키고 있다. 성령이 바라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하락하는 것임을 깨우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조를 발견한다. 토라와 예수의 계시가 대조되어 있다. 토라가 가져다 주는 축복(생명)과 성령이 가져다주는 축복(생명)이 대조되어 있다. 잠시적인 축복과 영원한 축복이 대조되어 있다. 야곱과 예수가 대조되어 있다. 요한복음 1:51절에 야곱과 예수가 대조되어 있다. 야곱이 옛 하나님의 자녀의 조상이었듯이 인자이신 예수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으로 대조된다. 야곱으로 시작된 옛 역사가 종결되어 지고 인자이신 예수를 통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요한복음 1장이 결론으로 끝나고 있다. 여기서 옛 야곱이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종교나 또는 마찬가지로 야곱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마리아 종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비록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겨우 마시면 다시 목마르는 잠깐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예수는 위에서 오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성령을 가져다 주는 분으로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가 야곱의 역사를 완성하면서 능가하고 대치하셔서 전혀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여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 여인은 계속해서 말귀를 못알아 듣는다. 그래서 16-18절 까지에는 이 여자의 불결한 삶을 지칭한다. 남편이 여섯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유대교 쪽에서 보았을 때 사마리아교를 이방우상들을 섬기는 혼합종교로 여러 남편을 섬기는 창녀와 같이 깍아 내리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가 여인에게 분명히 구원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다고 하며 이와 같이 여인이 남편이 여럿 있는 것과 같이 사마리아교가 우상을 섬기는 혼합종교 우상종교라고 은근히 나타냄으로 해서 유대교가 야곱라인의 정통임을 예수가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 전체의 증언과 같다.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는 것이고 유대인들이 그들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정통적으로 이루어 온 민족이고 유대교가 그 종교이다. 거기에 반해서 사마리아 종교는 자기들이 정통종교이고 모세율법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대교나 사마리아교나 서로 야곱라인의 정통 후계자이고 모세율법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을 하는데 둘 다 중요하지 않다. 이들의 라인은 어디에서 첨예하게 나타나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하느냐?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하느냐? 로 대표되는데 예수가 주장하는 것은 둘 다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도 그리심산에서의 예배도 이 세상에 속하는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제 예수에 의해서 완전히 능가하는 새로운 예배의 시대가 열림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대치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23-24절에 때가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진리에 속한 자들은 진정한 아버지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 아버지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2장의 성전에서의 표적에 대한 주석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제사하는 행위를 방해하는 표적을 했다. 이 표적의 의미를 해석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혼합종교는 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 성전도 이 세상의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거기서 드려지는 짐승의 피로 드려지는 제사도 물질적인 것으로서 그런 시대는 이미 다 지났다. 예수가 새로운 성령의 영의 시대를 가져온다. 그때가 임할 것이다. “때가 임한다는 말이 5장에서부터 자주 나온다. 그리고 곧장 지금이 벌써 그때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재림을 통해서 이와 같이 완전한 하나님을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인데 이것이 종말론적인 미래인데 벌써 예수가 그 시대를 지금 벌써 시작했다. 미래와 현재성이 아주 강도 높은 긴장을 이루고 있는 문장이다. 예수가 물질적인 성전의 의미를 대치해서 진리와 영으로 하는 예배의 시대를 연다. 그렇게 예수께서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그런데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 우선 왜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느냐면 24절 처음에 하나님이 영이시다. 그렇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자들은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성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물질 시간의 세계를 초월한 이 세계와 다른 저 높은 영원의 세계의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하나님이 영원의 세계 영의 세계에 속하는 분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나서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자들은 변화와 죽음의 세계에 속하는 자들은 하늘의 영적인 세계에 속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는 이 새로운 거듭남 위로부터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적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3장을 전제하고 있다.

 

 

 

 

진리로 라는 말은 무엇이냐? 이데아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질의 세계 육의 세계는 가짜의 세계인데 반해서. 그래서 여기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한다는 말은 예루살렘과 그리심산에서의 물질적인 세상에 속하는 예배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사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도 가능치가 않다. 예수가 가능케 한다. 예수가 진리를 계시하고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게 하셔서 이 세상에 있으나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하신다. 이런 거듭난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에 의해서 새로 된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은 예배의식의 드라마를 상당히 물질화 시키는데 반해서 개신교는 물질화시키는 것을 그치고 마음과 내면적인 예배로 이해를 했는데 그 말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영과 진리의 예배와 반대되는 것은 외형적인 예배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세상적인 예배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진리와 성령에 의해서 새로 난 자에 의한 예배이다. 새로 난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예배한다. 1:12절에 보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로고스에 의해서 새로 난 자가 자녀들인데 이를 연상케 하고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 즉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난자를 연상케 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내면적인 갱신 예배의 의미가 아니고 예수의 자신의 계시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자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이다.

 

 

 

 

27-42절 까지는 아주 극적인 전개의 수단으로 앞에서는 예수의 제자들과의 대화이고 뒤에서는 여자와 여자의 동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주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셔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힘 있게 하는 것이 자기의 음식 자기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여자와 동네 사람과의 대화의 주제는 예수의 메시야성 여자가 예수의 메세야 됨을 터득했는데 그것은 이 세상적인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다. 유대교에서 메시야가 오면 모든 것을 밝히리라고 했는데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만 메시야가 아니고 영생을 가져다주는 메시야임을 나타내고 있다.

 

 

 

 

2-42절의 큰 흐름을 보면 2장의 두 개의 표적은 34장에서 이 표적들의 의미를 나타냈다. 물이라는 것으로 3장과 4장이 연결이 되어 있다. 또 예배를 예수가 가능케 한 분으로 성전청결의 표적을 주석한 것이다. 34장에 동원된 인간은 대표적인 인간이다. 하나는 대표적인 고상한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하나는 이방신들을 많이 섬기는 사마리아인 여자 이방인과 다름없는 자다. 예수는 유대교도 사마리아교도 능가하고 대치해서 새로운 시대 새생명의 시대 영생의 시대 새로운 예배의 시대를 여는 분이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도 사마리아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에게도 계시이고 즉 구약과 유대교의 구원사를 완성해서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분이다. 영생 새로운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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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주해) 5-8- 김세윤 교수 신약 신학

2008/02/12 23:44

 

http://blog.naver.com/karamos/80048203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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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주해)

 

 

 

 

요한복음 본론 5-8

 

 

 

 

김세윤

 

 

 

 

 

 

 

요한복음 5

 

 

 

 

1-18절까지는 예수께서 안식일 날 병고치고 38년 된 병자에게 걸어가라 명령함으로서 일하게 했다고 시비하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더 예수를 죽이려 한다. ? 18절 안식일을 깨뜨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부름으로 해서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만들었다. 이것이 시비의 초점이다.

 

 

 

 

19-30절은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나타내 준다. 생명을 주고 심판하시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피조물들이 그의 창조질서에 합당하게 살았는지의 여부는 창조주만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을 주시는 일도 창조주의 대권이고 심판하시는 일도 창조주의 대권이다. 그런데 예수가 자기가 바로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하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듯이 자기도 안식일에 일한다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된다.

 

 

 

 

31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듯이 자기도 안식일에 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에 대한 증거가 무엇이냐? 자기가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그 증거는 옳지 않다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예수는 아니다. 나에 대한 증인이 나 혼자만이 아니고 많다. 그래서 신명기로 부터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해서는 증거가 성립이 될 수 없고 두 사람 이상이 증언을 해야 법정에서 증거가 성립이 된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만 증언하는 증거는 무효라는 랍비들의 법 해석에 대항해서 예수는 그렇지 않다. 증언이 많다.

 

그래서 31절 부터 증언에 대해서 기록한다.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을 하는 일은 하나님의 대권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종말론적인 사건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세계를 주실 것이고 종말에 대 심판이 일어날 것이고 종말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고 심판을 줄 것인데 예수가 지금 하나님 대신에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장을 어떻게 나타내느냐? 안식일 날에 두 병자를 고치는 일로 나타내신다. 이 뒤에는 어떠한 것이 숨어 있느냐면 유대인들의 랍비들 간의 논쟁이 숨어 있다. 안식일 날에 하나님께서 쉬셨다고 창 2장에 써 있는데 하나님께서 진짜 쉬셨느냐? 그런데 유대인들이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안 쉬는 것 같다. “안식일 날에도 애를 낳는다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다. “노인이 죽는다그것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적인 관찰에서 안식일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운행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세상으로 생명이 나고 생명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계속된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쉬지 않는다. 그 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지 않는 이유는 안식일의 근본의미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본래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완성된 아름다운 창조 세계에 대한 salavation이 안식일의 의미다. 더 이상 할 일이 없고 그것을 즐기는 일만했다. 이것이 안식일의 원래의 의미였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말을 듣고 사단이 세상의 왕이 되고 아담은 사단의 종이 되고 죄가 세상에 침투하였고, 죽음과 고난이 침투했고, 하나님의 저주가 들어와 세상이 망가졌다.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다운 창조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할 일이 생겼다. 구원할 일이 생겼다. 망가진 세상을 고칠 일이 생겼다. 이 구원이 완성될 때가 종말이다. 그 때 구원이 완성이 되어 더 이상 죽음 고난 저주 고장이 없는 완전한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 새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그때 진정한 의미로 안식이 있다.

 

 

 

 

인식일은 종말에 있을 새 창조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모세율법에서 4계명(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첫째 태초의 완전한 창조에 대한 기념이며, 둘째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과 더불어 있을 새 창조에 대한 소망과 기원에 대한 표시로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안식일에도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5:17절에서 일하신다. 구원의 역사를 계속해서 운행하신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 병고에 있는 어린아이와 38년 된 자를 고치심으로 무엇을 sign해 주는가? 하나님께서 이 고장 난 세계를 고치는 것을 나타내며 예수가 그 하나님의 권한 일을 대행하는 분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예수가 진정한 안식일을 있게 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지금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있다는 것은 진정한 안식이 없다. 진정한 안식이 곧 있어야 하겠다는 그 필요성을 극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를 고쳤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행위를 하셔서 종말에 고장이 없는 병고가 도무지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새 창조를 만들어서 진정으로 거기에 쉼이 있겠지요. 그것을 만들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깨달을리가 없다. 이 세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항상 오해를 한다. 안식일을 문자적인 것으로 시비를 한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공통적인 것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 때문에 예수가 유대인들과 강력한 갈등을 일으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아담이 사단을 왕으로 섬기고 사단에게 순종했기 때문에 죄가 들어오고 그 댓가로 죽음이 들어왔다. 병자 모든 고난은 죽음의 증상들이다. 죽음이라는 바이러스에 오염이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하러 왔다. 사단으로 통치 받는 죽음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오라는 선포이다.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오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을 치유라는 기적으로 설명을 해 준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해 진다는 말이다. 죽음과 고난으로 부터 해방된다는 말이다. 예수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 선포와 같다. 치유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주석이며 실제화이다. 하나님 나라를 실제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는 종말이다. 지금의 안식일은 제 4계명에 따라 쉬고 있는 날이다. 손마른자, 38년 된 병자가 있는 것은 진정한 안식이 없다. 안식이 하루빨리 있어야겠다. 바로 예수가 그러한 구원자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 영생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으로 안식일에 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문제는 18절과 같이 새로운 issue를 등장시켰다.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자로 여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행자로 하나님의 안식이 있게 하는 대행자로 자기를 내세웠으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했다. 이것은 당시 유대 유일신 사상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대권을 침해하고 욕하는 것으로 사형감이다. 그래서 예수를 죽일려고 했다.

 

 

 

 

그래서 19절 부터는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토론이 된다. 안식일 사건을 다 잊어 버렸다. 19절 부터 예수가 대답해서 말했다. 독특한 어법이 나온다. 이때는 중요한 선언이 있다. 아들은 그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버지가 한 것을 본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 그가 하는 것들을 똑같이 아들도 행한다.

 

20절에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해서 자기 스스로 하는 모든 것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것들 보다 더 큰 일을 보여 줄 것이다. 그래서 너희를 놀라게 할 것이다. 여기에 비유가 있다.

 

고대사회에서 가업이 전승되는 것을 예수가 비유로 들고 있는데 가령 천막 만드는 일이 가업이면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전승받은 그 특별한 기술을 그의 가업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에게만 고스란히 전수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 아들은 천막 만드는 일을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한다. 그리고 배운다. 이와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그림으로 비유로 삼아서 예수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자기가 하나님의 생명을 주고 심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아버지가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심판하는 일을 위임하고 자기는 그대로 행한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전제는 사랑의 관계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듯이 아들도 그가 원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준다. 또 아버지는 아무도 정죄하지 않는다. 그가 아들에게 모든 심판권을 넘겨주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듯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들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비유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다시 그림이 약간 변화된다. 사자 보냄을 받은 것으로 약간 변화된다.

 

sending formular.

 

여기에는 아들의 선재사상도 들어 있으나 아들이 아버지의 전권대사다. 보낸 자는 보냄을 받은 자와 같다. 전권을 대행한다. 예수가 아버지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생명을 주고 심판하는 일을 대행한다. 그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보낸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가 하나님으로 부터 위임받은 자기의 역활이 죽은 자를 살려 그에게 생명을 주는 일을 한다. 생명을 주는 일이 지금 현재 일어난다(24절부터)

 

 

 

 

24절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완료형).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를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임을 믿는 자, 이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그 믿음의 순간에 죽음으로 부터 생명으로 부활했고 지금 생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적인 생명, 위로부터의 종말론, 현재 실현된 종말론이다. 지금 벌써 예수의 계시를 받고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것을 이해하고 예수를 보내신 이를 믿으면 벌써 현재에 부활을 체험하고 영생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절에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살아날 것이다.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 28절도 마찬가지이다. 때가 임할 것인데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들을 것이고 선한 일을 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미래시제로 되어 있다. 미래적인 종말론.

 

 

 

 

24-29절은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인 종말론의 표현이 짧은 문단에서 나란히 나온다. 이것은 신약신학 전체에 서 있는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인 종말론 사이의 긴장. 구원은 미래적 선물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벌써 그 종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영생을 벌써 여기서 맛보기 시작했다. 바울의 용어를 빌리면 첫열매이다. 완전한 수확은 못 받았으나 벌써 종말의 복을 누린다. 그러나 아직 다 이루어지지 못했다. 첫열매를 보증하는 것이 성령이다. 동시에 이 첫 열매는 보증금 노릇을 한다.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종말의 축복 구원을 맛보기 시작했으나 때가 되면 완전한 구원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울적인 설명이다.

 

 

 

 

요한복음524-29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서는 똑같은 신약의 종말론적인 현상을 요한복음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요한복음 524-30절까지는 지금 현재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구원의 축복은 죽은 자들이 지금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과 종말에 있을 완성된 구원과는 어떻게 차이가 있느냐?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신학을 얻게 된다. 우리는 보통 죽음을 무덤에 가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잘 이해를 못한다. 성경적인 언어들을 잘 이해를 못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고 죄인이 죽었다. 이렇게 말한다면 죽은 것은 무덤에 간다는 말인데 죄인이 죽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래서 지어낸 자들이 육신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라고 설명을 한다. 이것은 좋은 설명이 아니다.

 

나무가 생명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가 뽑히면 나무는 산거냐? 죽은거냐? 살았고 죽었다. 이 나무에 간직이 되어있는 수분 양분이 지탱한 만큼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무는 죽음 병에 걸린 상태 죽음이 이미 시작된 나무이다. 우리 삶의 근원인 종교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뽑혀서 더 이상 수분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곧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 뽑히는 순간부터 이 나무는 죽음아래 있다. 죽음 병에 걸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나무는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아래 죽음의 권세아래 있다. 죽었다고 할 수 있다. 나무속에서 역사하는 죽음은 증상들로 나타난다. 잎이 마르고 가지가 마르고 한다. 이것이 죽음의 증상들이다. 나무가 완전히 말라비틀어지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뿌리가 뽑힐 때의 죽음의 시작의 확인이다. 이것이 좋은 그림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자꾸 자기주장하려고 스스로를 닫아 버리면 우리의 존재의 근원인 창조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버리고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원을 축복받아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 지혜 사랑 능력과 영혼에 힘입어 살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스스로 하나님께로 분리해 버리면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피조물적인 제한에 갇힌다. 그래서 자기자원 조그마한 생명 지혜 사랑이 있는 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리되어 더 이상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아래 있는 것이다. 죽음 병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감기 들면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우리 모두 고난들이 관계 속에서 오는 고난 병고 결핍에서 오는 고난 가난 지혜 없음은 결핍에서 온다. 그것은 무한한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을 알도록 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로고스이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한다. “안다는 말은 연합한다.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부부가 서로 안다는 의미이다. union 연합하면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와 연합하면 창조주의 무한함 부요함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생명이고 영생이다. 그것이 벌써 일어난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는 자는 연합하여 생명력을 공급받는다. 24절의 죽은 자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죄인들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여 믿게 될 때 연합할 때 생명력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는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무덤에 묻힌 자들이 이 세상의 끝에 예수의 재림 때에 무덤에 묻힌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고 완성된 생명에 이르게 된다. 지금 현재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체험을 하게 되지만 동시에 우리가 객관적인 종말론의 속박된 자들로서 다 죽게 되어 있다. 무덤에 가게 되어 있다. 무덤에 가는 자들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한 자들과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하나는 그렇지 않은 자들의 두 종류가 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부활생명을 맛본 자들도 무덤에 가게 되어 있다. 이 세대가 객관적인 종말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되어 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심판의 부활 생명의 부활이 있을 때까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나 다 죽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의 장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은 생명의 부활로 일어난다. ?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선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체험하는 부활이 그 때 확인이 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한 심판이 그때 확인이 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태도로서 발생되는 갈림이 재 확인 된다.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 그때는 더 이상 무덤에 가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의 다른 점이다. 또 하나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러면 실제적으로 죽음 객관적인 종말전의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의 장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령 바울의 설명을 빌리면 고후 5장 빌 1장 같은데 보면 그것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종말의 생명 영생보다는 좀 더 농도가 짙은 좀 더 축복된 것이다는 말이다. 그 상태가 어떤 상태냐? 그 이상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지금 여기서 누리는 영생보다 더 좋은 것 축복된 것이다. 바울은 빌 1장에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무엇이라 하느냐? 자기가 딜렘마에 빠져있다. 자기가 돌보는 교회를 생각해 보면 고난의 삶이지만 이 세상에 오래 살아서 일해야 하겠는데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죽는 것이다. ? 그것이 주께로 좀 더 가까이 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선택의 선호는 죽어서 주께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나 교회를 위해서 더 살아야겠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로서 무덤에 가는 자는 지금 여기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부요함 생명력 축복 구원 보다 더 체험하는 것이다. 종말의 부활의 상태는 아니더라도 지금 누리는 새 생명보다 더 복된 생명의 상태를 갖게 된다.

 

그 다음에 31절 부터는 예수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앞에서 안식을 주는 자고 아버지의 전권대사라고 증거했다. 유대법에 의하면 자기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증거하면 법정에서 아무 효과가 없다. 신명기에 보면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효과가 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혼자 자기에 대해서 증거하였다. 그래서 31절부터 중요한 증언이 있다.

 

 

 

 

32절에 나를 위해서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한이 증거했다. 그 증인이 진실하다. 그 증언은 참되나 사람들이 믿지를 안했다. (33) 그러나 예수는 사람의 증거를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34) 사람의 증거보다도 훨씬 확고한 증거가 있다. 세례요한의 증거도 훌륭하지만 하나님이 증거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증거하시나? 예수의 일들 예수가 행한 일들 그것은 여기 context에서 무엇이냐? 38년 된 병자를 고침 등등 이 일들은 다 생명을 주는 일들이었다. 이 일들이 볼 줄 아는 이들에게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일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예수의 증거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예수가 자기의 아들로서 자기의 권세를 가지고 자기의 뜻을 행하는 자라고 증거한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그것을 못 알아 듣느냐?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38) 그래서 못 깨닫는다. 이것이 이상한 말이 아니냐? 구약의 모세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구약성경-모세율법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한 선지자들의 말 즉 하나님의 말씀이지요-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열심이 찾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갖지 않고 있다는 말씀이 무슨 소리냐? 거기에 너희들이 열심이 생명을 찾지만 그 속에서 영생이 있는 줄을 알고 열심이 찾지만 그 성경들이 바로 예수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을 터득하지 못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바로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을 터득하지 못한다. 1장 후반부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모세와 선지자들이 성경에 쓰신 이인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이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지만 그 성경의 증언들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들이다.

 

 

 

 

왜 성경의 증언들을 받지 않느냐? 41절 이하에 첫째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느냐?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산다. 하나님으로 부터 힘입어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지 않고 자기의 능력 지혜 꾀대로 살아서 자기의 이름을 낼려고 한다. 자만하고 자신하고 산다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성경에서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가 한 일들로 예수에 대해 증거하고 그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는데 예수를 증거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그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두 가지 형태로 증거한다. 예수가 한 일들의 형태로 또 성경으로 증거한다.

 

요한이 한 증거도 진실하고 중요하나 거기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언에 의존하는데 이 예수에게 시비를 걸어 논 유대인들이야 말로 이런 것을 하나도 못 깨닫는다. ? 그들의 인식론적인 실패,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계시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터득하지 못하고 예수가 행한 생명을 주는 일을 즉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시는 일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생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분이시며 천지를 세상을 구원하셔서 진정한 종말의 안식이 있게 하는 분이시다는 그 표적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도덕적인 실패에 있다. 즉 자기 자신의 영광을 취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리 증거를 하고 하나님이 아무리 말을 해도 꽉꽉 막혀 한마디도 못 알아 듣는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최후의 심판 때에 생명의 부활로 심판의 부활로 우리가 나서야 할 때에 너희들의 고소자가 모세다. ? 성경이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예수에 대해서 증언을 했는데 너희들이 그것을 안 받아 들였기 때문에 이 바로 자기들의 존경하고 소망의 근거로 삼는 모세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증언 예언 약속을 받아 들이지 않았느냐? 왜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았느냐?고 말하고 있다. 5장은 이렇게 합시다.

 

 

 

요한복음 6장을 합시다.

 

 

 

 

긴 장이나 이야기는 잘 안다. 1-15절까지는 유월절 무렵에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에 차고 남았더라는 이적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적을 행하니까 6:14절에 그 사람들이 예수가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진짜로 이 세상에 오기로 한 선지자라고 판단을 했다. 이 말은 신18:15절에 근거한 말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약속했다. 그래서 신역시대의 유대 종말론에 의하면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그 당시 메시야 사상은 여러가지로 복잡하다. ) 모세가 행한 출애굽의 구원을 되풀이 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종말의 구원을 제 2의 출애굽으로 보았다. 그래서 민족의 해방 모든 이방인들을 굴복시키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되찾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풍성한 자유와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제 2의 출애굽을 이룰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 메시야는 모세가 행하였던 모든 이적을 되풀이 할 것으로 보았다. 애굽의 이적 광야의 이적을 되풀이 한다. 그래서 만나를 먹이고 또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내실 것이다.

 

출애굽의 만나를 먹인 것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일하지 않해도 하나님께서 먹이셨다. 그래서 이 출애굽을 다시 종말에 있을 메시야의 오심을 나타낸다. 종말에 있을 메시야의 오심은 출애굽의 되풀이 이면서 태초의 낙원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보았다. 원래 낙원에서 포도 한 송이가 장정이 수명이 들어도 못들 정도로 크다. 낙원에서의 모든 것을 죄로 다 잃어 버렸다. 그런데 이 잃어버렸던 것들이 종말에 다 회복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오천 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시니까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학적인 배경으로 즉각 판단했다. ! 이거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이에 나타났다. 그래서 모세와 같은 출애굽의 구원역사를 되풀이 할 것으로 보았다. 그 중에 한 가지를 한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 선지자구나 하고 판단했다.

 

그것도 언제 했느냐? 유월절에 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에 예수가 오천 명 군중을 먹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것만으로는 우리보다 신학적으로 더 상당히 깊은 깨달음인 것 같은데 예수는 그것이 틀렸다고 한다. 왜 틀렸느냐? 그들은 예수를 붙잡아서 모세와 같은 왕을 만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으려고 하니까 예수가 도망을 간다. ? 그것은 틀렸다. 왜 틀렸는가? 25절에 그들이 바다 건너로 도망을 가니까 맨발을 벗고 달려와 예수를 다시 붙잡는다. 그리고 예수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하니까 예수가 26절에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합니까? 아주 훌륭한 문장이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나를 추구한다. 27절에 썩어져 가는 음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계속 남는 음식을 위해서 일하라. 그 음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14절에 보면 예수가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러니까 선지자로서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다고요. 만나를 먹인다. 예수 이전에 예수 당시 신약시대 이후까지도 유대에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나온다. 이들이 대게 주장하는 것은 모세의 이적들을 되풀이 한다고 주장하며 바로 그를 통해서 자기들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이 사람들은 예수의 하신 일을 표적으로 보았다구. 모세와 같은 건지자의 표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왜 예수는 너희가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느냐? 2의 모세로서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을 하는 그 정도의 표적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의미로 예수가 구원자임을 생명을 가져다줌을 나타내주는 표적이다.

 

 

떡은 무엇이냐? 떡의 기능은 무엇이냐? 생명이다. 떡은 살기 위한 것이다. 떡의 상징성은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떡을 먹이게 했다는 사건은 예수가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육신적인 충분한 양식을 가져다주는 제 2의 출애굽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그런 구원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 훨씬 깊고 근본적인 구원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27절에서 대조를 하고 있다. 하나는 썩어져 가는 떡 이것은 썩어져가는 생명만 가져다 줄 수 있는 떡이다. 영생하도록 있는 떡은 영원히 존재하는 영원히 거하는 떡인데 그 떡은 영생을 가져다 주는 떡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추구하는 것은 전자이다. 모세가 먹인 만나도 그리고 너희 유대 종말론에서 말하는 제 2의 모세가 종말에 가져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도 전자다. 왜 만나가 썩어져 가는 떡이에요? 만나를 먹은 사람은 다 죽었고 만나는 하루 지나면 더 썩어 간다. 영원히 남는 떡이 아니다. 그래서 제 2의 모세가 이루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풍요로움도 우리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영생을 보장하는 떡이 아니다. 너희가 나를 열심히 따라오는데 나는 그런 게 아니고 영원히 남는 떡 영생을 가져다 주는 자이다.

 

오늘 물질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로 하여금 자꾸 떡을 가져다 주고 왕이 되 달라고 요구한다. 해방신학 정치신학의 이름으로 예수보고 우리들에게 제 2의 출애굽을 하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되라. 우리의 왕이 되어 가지고 우리에게 해방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라고 주장한다. 전부 예수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 왕으로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제 2의 출애굽을 이루는 분으로 한다. 해방신학은 해방을 출애굽에 두고 있다.

 

영원히 남는 떡은 무엇이냐? 35절에 예수가 그들에게 말하되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굶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는다-----하며

 

<녹음상태 불량>

 

 

 

 

41절에 유대인들이 수군거렸다. 이 사람이 자기가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나? 우리가 저를 다 아는데. 아주 요한복음적인 역설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알아도 몰라요. 모른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시적 물질주의적인 판단 기준에 의해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주장을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예수를 그들은 모른다. 하여간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어떻게 그렇게 말하느냐? 예수가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고 50절 부터 읽어 봅시다. 한 절 한 절 다 주석하려고 하면 1년 내내 해야 요한복음이 다 끝날 거여요. 다 못하고 가장 중요한 사상을 해설하면 여러분에게 중간 절들은 다 이해가 될 것이어요.

 

 

 

 

이것이 하늘로 부터 내려온 떡이다. 누구든지 그로부터 이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는다.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다. 누구든지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 내가 주는 이 떡은 나의 살이고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주는 나의 살이다.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다. 그것을 51절에서 더 확인을 했다. 이는 하늘로 부터 온 떡이다. 영생을 주는 떡이다. 나의 살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큰일이 났지. 어떻게 자기 살을 먹도록 줄 수 있느냐? 는 말이지. 유대교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여기에 대해서 53절에서 예수가 아주 중요한 선언을 한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그들 안에 영생을 갖지 못한다. 55절 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절 인자 곧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가 그들 안에 거한다. 이것은 연합을 말한다. 하나 됨. 57절 살아계신 아버지가 나를 ------살게 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언어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공관복음에 있어서 최후의 만찬을 기억해야 한다. 14:17-25절 까지를 읽어보라. 최후의 만찬의 마가복음판에 의하면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간다. 이 말은 구약이 예언한 대로 죽는다는 말을 기분 좋게 표현한 말이다. 이것을 유테미즘이라 한다.

 

 

 

 

14: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20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인자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냐?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죽는다. 내일 십자가에 죽는데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연극으로 보여준다. 연극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떡을 떼는 제스츄어와 빨간 포도주를 붓는 제스츄어와 그것을 해설하는 것이다. 떡을 떼는 손짓과 해설, 빨간 포도주를 붓는 손짓과 해설로 되어 있다. 이 드라마가 내일 다가오는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몸의 극적으로 피 흘리는 사건인데 이 피가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이 소리는 이사야 53:10-12절까지에 있다. 기록된 바와 같이 성경에 예언된 대로 간다고 그랬지. 그러니까 그의 죽음은 성경의 예언의 성취이다. 어디에 예언이 되었느냐? 53장에 예언되었다. 주의 종이 패역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스스로를 대속의 제사로 자기 영혼을 흘린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죄의 용서함을 얻고 그들을 다시 의롭게 한다.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다음에 언약의 피다 이 소리는 출애굽기 19장 또는 24장 또 렘 31:34절 또 사42:6 42:8절 등에 의하면 출 19장에 보면 모세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는 장면이다. 언약의 제물을 제사로 바치고 그 제물의 피를 이스라엘 회중에게 뿌리면서 언약의 피다 언약의 피다고 함. 그러니까 예수가 내일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옛 출애굽 당시 모세가 세웠던 그 언약에 상응하는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라는 말이다.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는 예레미야서에도 있고 이사야서에도 고난 받는 종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바쳐진다고 예언되었다. 이 새언약을 세우겠다는 예언에 따라 옛언약(19)에 상응하는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라고 자신의 죽음을 해석한다.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대속의 제사다(53)

 

 

 

 

출애굽기243-8

 

24: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결과는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새언약으로서 세우는 제사로의 결과로 일어나는 일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창조이다. 언약을 세운다는 소리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이것이 언약의 공식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운다는 소리는 이 땅의 사람들을 택해서 자기 백성을 삼고 자기가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들을 보호 인도 부양하겠다고 약속, 언약을 세웠다는 소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았다는 소리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하겠다는 소리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내일 자기 죽음을 거기에 상응하는 새언약을 세우는 것으로 보았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해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건이다. 그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가? 속죄의 제사가 드려져서 의로운 백성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간추리면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인자로서 죽는 것은 자기 죽음이 새언약의 제사로서 새로운 의로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이다고 해석해 주었다.

 

 

 

 

이와 같은 예수의 이적이 구원의 사건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사건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성경적인 그림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이다. 아들의 기본적 상징은 상속자라는 말이다. 바울은 로마서8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 이 말은 상속받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이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은 얼마나 부자냐? 5억만 된다 해도 상속자가 되면 좋다. 하나님은 100억짜리냐? 1000억 짜리냐? 무한하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유한성에 있다. 제한성에 있다. 결핍에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부요함과 영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이다. 유한성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병고에 있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함을 상속받는다. 이런 자는 신적인 삶을 산다. 이런 삶은 영생이라 한다. 이런 구원을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다. 자기의 죽음이 이러한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우리는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6장이 해설한 것이다.

 

 

 

 

우리의 영생을 인자이신 예수가 가능케 한다. 어떻게? 자기 몸을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주고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어 바자르를 헬라어 소마와 싸륵스로 번역이 가능하다. 공관복음에는 소마로 번역했고 요한복음에서는 싸륵스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한 소리는 무엇이냐? 떡의 상징성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어떻게 생명을 주느냐? 자기 몸을 십자가의 대속으로 줌이로다. 우리가 어떻게 덧입느냐? 믿음으로 된다. ? 믿음은 우리를 예수에게 연합시킨다. 그것은 요한복음에는 피를 마신다. 살을 먹는다. 먹고 마시면 우리가 예수안에 거하고 예수가 우리안에 거하는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영생을 얻게 된다.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은 자기가 바로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그를 믿고 그와 연합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 풍요로움을 갖다 주는 세상적인 왕으로만 이해를 했다.

 

66절에 보면 예수가 열심히 설명해 주니까 다 도망가고 누구만 남았어요. 제자 몇 명 남았다.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느냐?고 대답한다. 썩어져 가는 양식을 추구하던 유대인들은 떠나감. 영생을 주는 양식을 추구하던 제자들 남아 있음.

 

 

 

 

 

요한복음 7-8

 

 

 

 

오늘은 7, 8장을 하겠습니다. 빛과 생명, 예수가 빛과 생명이라는 주제가 이 두 장의 주제입니다. 예수가 빛과 생명이고 그 계시를 받은 자들이 소수는 계시를 터득하나 다수는 받아들이지 못함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구조를 잠깐 보자. 7:1-10절은 서론에 관한 것으로서 예수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느냐? 마느냐? 그러다가 형제들과는 다르게 비밀리에 초막절에 올라가는 상황이다. 그래서 초막절에 지금부터 기술하는 사건들에 나타난 setting이 기술되어 있다.

 

11-13절은 예수가 아직 당도하지 않은 상황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초막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웅집한 군중들 가운데서 예수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메시야냐? 선지자냐? 하고 웅성거리는 장면이다.

 

 

14-24절 까지는 예수가 나타나서 첫 토론이 벌어진다.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심으로 유대인들 가운데서 이 사람은 정규 랍비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가르칠 수 있느냐? 이제 예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시비함으로 예수가 자기의 가르침은 랍비식의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또 자기의 제자에게 전달하는 식의 그런 가르침이 아니고 직접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계시임을 밝힌다. 곧 자기의 가르침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이다. 때문에 이 가르침은 하나님을 순종하려 하는 자만 이해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만약에 그들의 율법을 의도상 정확히 이해했고 그 율법을 정확히 순종하면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임을 알고 진리임을 알텐데 그렇지 못한다. 곧 율법이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또 그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임을 사실을 보여주는데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한다. 이 말은 그들이 사실은 자기들의 율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종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25-36절은 두 번째 토론, 대화이다. 예수의 메시야적인 주장이 논쟁의 초점이다. 예루살렘 사람들과 군중들, 바리새인들 유대인들과 더불어 예수의 메시야적인 논쟁의 초점. 이들의 생각에 의하면 예수가 메시야 그리스도일 수 없다. 27절에 그리스도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온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잘 안다. 여기에 요한복음적인 역설이 있다. 예수는 사실은 하나님으로 부터 위의 세상으로 부터 오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사실 충족시키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잘 안다고 그런다. 여기에 요한복음적인 역설이 있다. 예수를 죽일려고 하니까 예수가 피하는 것으로 장면이 끝난다.

 

37-44절은 제 3의 대화이다. 37절에 예수의 중요한 선언으로 시작이 된다. 초막절의 마지막 큰 잔치날에 성전에 올라가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도록 해라. 그리고 마시도록 해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말씀한 바와 같이 그 배에서 강물이 흐르고 생수의 강물이 흐른다. 이렇게 아주 신탁 같은 선언을 한다. 이 말이 제 3대화의 빌미가 되어서 토론이 벌어졌다. 아까 제 2대화에 이어서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메시야는 삼하 7:12절 이하의 나단의 전승에 의거할 것 같으면 다윗의 아들로 와야할 것인데 이 자는 다윗의 아들도 아니고 다윗의 동네에 베들레헴에서도 난자도 아니고 갈릴리에서 난 자인데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고 그의 메시야 됨에 대해서 부정적인 판단을 한다. 여기서도 역설이 숨어 있다. 유대인들은 사실 예수가 다윗의 아들로 베들레헴 출생인 것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은 안다고 본다. 예수가 갈릴리 출생이고 보잘 것 없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45-52절은 제 4의 대화로서 같은 주제가 계속된다. 예수의 메시야 됨을 거부하고 예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니고데모가 주의를 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예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니고데모도 더불어 욕하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 거기에서의 그 예수의 적대자들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되어 있다. 곧 유대인들의 관원들이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두고 하는 소리이다. 그 곳에서 피하는 장면이다.

 

 

 

 

753-8:11절은 원래 context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752절에서 812절로 연결되어야 하는 상당한 오래된 전승이긴 하지만 원래 요한복음의 이 맥락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괄호로 제쳐놓고 12절부터 계속해서 보면

 

 

 

 

812-20절은 제 5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5번째의 대화도 아까 세 번째 대화 7:3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중요한 선언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 7:37절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으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그런데 8:12절은 내가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졌다. 이와 같은 중요한 선언으로 시작이 된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9장에 가서 설명이 될 것이다. 9장에서 자세히 해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8장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의 서론격으로서 예수가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증거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자기가 자기에게 대해서 증거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5)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자기주장을 거부한다. 예수가 여기서 답변하기는 사실은 자기의 증거는 자기 혼자의 증거가 아니다. 자기는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을 믿는 분이고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증거는 사실은 하나님의 증거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기의 증거는 받아들일 수 있는 확실한 증거이다. 예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기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그를 말할 수 있다. 증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와 연합해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의 증거는 아버지가 증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증거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다음에 21-30절 까지는 여섯 번째의 대화로서 유대인들이 짤막짤막하게 대꾸하고 거기에 대해서 예수가 설명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 부분은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가 이 세상 밑의 세상으로 부터 난 자가 아니고 위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온 분임을 강조한다. 이 부분에서 예수는 자기가 자기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그 돌아감이 그 영광 받음인데 아무도 그 곳에 오지 못한다고 말한다. 예수가 자기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것이 유대인들에게서는 전혀 이해되지 못하기 때문에 전혀 동문서답적인 대화가 오고가고 있다. 예수는 아버지가 가르치신 것을 행하는 아들이고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서 행한다. 그래서 예수가 말하는 것 예수가 행하는 것을 듣고 보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자로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 “에고 에이미--- '내가 ---- 이다‘”를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2428절에 만약 너희들이 에고 에이미 인 것을 믿지 않으면(우리말 번역에는 내가 그인 줄 믿지 않으면으로 되어 있다. ’라는 보어는 원래 없던 것이다. ) 너희들은 너희들의 죄 가운데 죽는다. 28절에 너희들이 그 사람의 아들을 높일 때에 들을 때에 너희들이 에고 에이미인 줄을 알 것이다. (우리말에는 그때 너희가 내가 그인 줄 알리라). 에고 에이미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 됨,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밝히고 있다.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마지막으로 31-59절까지가 일곱 번째 대화로서 앞의 주제가 계속된다. 덧붙여진 것은 유대인들이 왜 예수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예수를 인식하지 못하느냐? 그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사단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거부하는 그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사단의 자식 살인자의 자식임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래서 지금 예수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것은 살인자,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오는 그런 의미에서 살인자 사단의 자식임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예수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들은 죄와 죽음의 원형인 마귀의 자식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가 가져온 계시를 받아들일 수 없다. 때문에 그들이 예수가 행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깨닫지 못하고 적대한다.

 

 

 

 

자 이 7장과 8장을 보면은 유대인들이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주장, 예수의 메시야 됨,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음에 대한 반대 이유들, 왜 반대하는가를 나열해 놓았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답을 해 놓았다. 그래서 78장은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반영하고 있느냐 하면 유대교가 교회의 예수에 대한 주장 전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들과 그 이유들을 조목조목 나열해 놓고 그것에 대한 그리스도의 또는 교회의 답변들을 조목조목 나열해 놓았다. 78장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눈에 띄는 것은 이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예수가 생명의 위기에 처함이 두드러진 주제이다. (7:1, 13, 19, 25, 30, 32, 44, 8:37, 40, 59 등등)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적대하고 체포하고 죽이려고 한다. 상당히 극적으로 되어 있는데 두 무대를 번갈아 가면서 일어난다. 앞의 무대에서는 초막절의 행사에 참가한 군중들과 토론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뒷 무대에서는 유대의 관원들이 예수를 체포해서 없애려고 음모하는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7: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7: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7: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7: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그런데 위기가 어디서 오느냐면 7:31831절에 온다.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으면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너희가 나의 말에 거하면 나의 제자가 된다. 너희들이 진리를 알 것인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제 이것이 드디어 예수가 군중들과 더불어 적대되게 논쟁을 유발하는 것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관원들이 예수를 죽일려고 한다. 체포하려 한다. 7:31절도 8:31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이제 오시면 이보다 더 많은 표적을 하겠느냐 하는 토론이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을 자극했다. 이러다가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겠구나. 그래서 예수를 적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7: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런데 실제로 turning point7:37절에 있는 예수의 주장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이 말과 8:12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이 두 가지 이야기는 초막절과 관련이 되어 있다. 초막절은 출애굽 당시 시내에서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심,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고 토라 율법을 계시하시고 물과 떡으로 생명을 보존해주심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그래서 초막절에 물 긷는 행사가 벌어졌다. 실로암 못에서 성전으로 물 긷는 ceremony가 있었다. 시내광야에서 헤맬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공급해서 그들의 생명을 지탱하고 생명을 소생하게 한 것을 기념하는 그래서 지금도 비오는 하나님께 비를 기원하는 기원을 덧 붙혀서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로 스가랴서나 에스겔서나 이사야서 등에 나오는 종말에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리라는 예언과 더불어서 종말에 구원을 상징하는 물을 비는 행사가 있었다. 가령 스가랴서 13장에 보면 종말에 예루살렘으로 부터 생수가 넘쳐흐르고 여호와가 온 세상의 주로 군림하게 되고 그러면 온 민족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시온으로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순례 와서 여호와를 예배하게 되어서 종말에 샬롬이 이루어진다. 스가랴서 13장이 전통적으로 초막절에 읽도록 정해진 성경 본문이었다. 그런데 랍비들은 스가랴 13장을 겔 47:1절 이하 사12:3절 이하 등과 더불어서 해석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 메시야 시대가 초막절과 더불어 올 것으로 보고 그때에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하는 물이라는 상징어를 써서 그때에 이루어질 메시야 시대의 축복 또는 구원을 그렸다. 그런 것을 배경으로 했다.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또 하나는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헤맬 때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한 것을 기념하고 또 하나님께서 유대인들과 동행하시면서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것을 기념해서 초막절에는 성전에 여인들의 마당에 불을 밝히는 행사를 했다. 곧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기념하는 불을 밝히는 행사를 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이 물도 출애굽 당시의 광야에서의 물 마심을 종말에 그와 같은 축복 물마심이 이루어진다. 이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현재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셔서 동시에 초막절과 더불어 일어날 메시야 시대의 축복을 기대하는 행사였다.

 

 

 

 

마찬가지로 이 빛도 초막절의 행사인데 여인의 마루에서 밝히는 제등행렬, 촛불을 밝힘도 광야에서의 계시 하나님의 임재함, 하나님의 토라의 계시의 빛을 밝힘을 기념하는 한편 동시에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드러나서 그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할 것을 기대하셨다. 종말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구원사에 첫 구원의 사건인 출애굽의 후형으로서 그것의 완성을 두고 말한다. 초막절이 이와 같은 첫구원을 기념하며 종말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그 곳에서 예수가 바로 자기가 초막절을 진정으로 완성하는 분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자기가 초막절이 기념하며 기대하는 종말에 있을 생명의 물을 가져오는 자이다. 물은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고 생명을 주는 것이다. 또 초막절이 기대했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빛을 가져오는 분이다.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온다. 이것은 빛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져오는 자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하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과 연합함이 생명이다. 결국 세상의 빛이라는 소리로 예수의 생명의 매개체 생명의 전달자임을 나타낸다. 요한복음 서문에서도 빛은 세상의 생명이다고 했다. 로고스가 빛인데 빛이 세상에 생명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예수가 초막절이 기념했던 출애굽과 기대했던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는 분이다고 예수가 설명한다.

 

 

 

 

이런 과정 중에 이제 예수의 정체는 예수가 어떤 분이냐? 예수가 자기가 생명을 주는 분이고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는 분이라고 하는데 그 예수가 어떤 분인가? 그가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시비가 계속된다. 요한복음의 기본주장은 예수가 유대교가 기대했던 모든 메시야 사상을 실제로는 다 충족한다. 78장에 있는 것만 보아도. 메시야가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 메시야의 기원은 알 수 없다. 메시야는 다윗의 아들로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한다. 이적들을 많이 행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메시야 됨을 왜 반대해요? 메시야는 율법의 예언을 성취하는 자여야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가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을 해서 예수의 메시야 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등등이 유대 메시야 사상이다.

 

 

 

 

예수는 실제로는 이 메시야 된 조건을 다 충족한다. 유대인들은 눈이 멀어서 이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예수가 메시야 됨을 충족하는 것을 모른다. 예수의 기원을 모른다. 실제로 안다고 주장을 하나 예수는 위에서 하늘로 부터 온자임을 모른다. 또 갈릴리 출신이라고 해가지고 나단의 신탁 미 5장에 보면 베들레헴에서 나야한다고 한다. 실제로 예수는 다윗의 아들로서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또 예수가 많은 표적들을 행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예수를 보는 자는 메시야가 오면 이 사람보다 더 많은 표적들을 가져올 것인가 하고 말할 정도로 말한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를 자기들의 율법에 근거해서 예수를 반대하나 실제로 예수가 율법의 예언들을 다 성취한다. 그들은 율법을 안다면 실제로 깨달은다면 예수가 율법을 성취한 자임을 메시야 됨을 알 것이다. 그런데 율법을 진짜로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는 율법을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첫째로는 유대인들은 예수가 실제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들을 어긋나기 때문에 예수를 반대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예수가 그 메시야 사상을 다 충족한다. 둘째로는 그러나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은 세상적인 아주 피상적인 사상들이다. 예수는 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실제로 능가하는 분임을 하나님과 하나님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으로서 메시야이다.

 

 

 

 

세상적인 판단기준에 의거해서 예수의 메시야 됨을 거부한다. 그러나 사실은 거기에 역설이 있다. 그들의 메시야 사상은 예수는 하나하나 충족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만 충족하는 메시야는 별것이 아니다. 예수는 충족하면서 그 보다 더 훨씬 능가하는 신적인 존재로서 메시야이다. 그는 선재한다. 세상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아브라함보다 선재하는 분이다. 구원사에서 아브라함보다 뒤에 왔으나 아브라함보다 선재하는 분이다. 또 로고스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동문서답 식으로 너 아직 50살도 못된 녀석이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냐? 전혀 깨닫지 못한다. 예수는 선재하는 신적인 존재이다. 메시야라는 말이다. 또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가지고 있다. 에고 에이미 이것은 출 3장과 연결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것이 직역된 말이 에고 에이미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신 분이셔서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다. 근본 계시의 첫 원칙은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한다.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이 초막절 행사 때 물을 긷는 것과 불을 밝히는 행사에 빗대어서 자기가 하나님을 계시하고 생명을 가져오는 메시야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여기 자세한 요점에 들어가서 824너희가 에고 에이미인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의 죄 가운데 죽을 것이다.” 828너희들이 그를 높일 때 그때 에고 에이미인 것을 알 것이다.” 에 대해 자세히 토론해보면 8:28그 사람의 아들을 높인다들어 올릴 때에 에고 에이미인 것을 안다. “그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림을 받는다. “들어 올린다는 말은 이중의미가 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나무에 들어 올려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말한다.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동시에 높인다는 의미가 있다. 영화롭게 함의 의미가 있다. 그때 너희가 에고 에이미인 것을 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관찰할 것은 공관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특히 마가복음에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여러 번 예고한다. (8:31, 9:9, 12, 31, 10:33, 45, 14:19-, 등등) 죽음을 예고할 때 주어가 인자이다. 그 사람의 아들이다. 요한복음에서의 사람의 아들의 말씀들은 얼핏 보기에 공관복음과 다르다. 적어도 요점에 있어서는 묘하게 일치한다. 누가? 예수가. 어떤 자격으로 죽느냐? 올림을 받느냐? 하면 그 사람의 아들의 자격으로 올림을 받는다. 그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에고 에이미인 것을 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안다.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어떻게 아느냐?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내어주심이다. 기령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셨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힘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계시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는 예수는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이심이 계시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본 것이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이야기 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하는 예수는 누구냐? 하나님이다. 에고 에이미이다. 그래서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면 에고 에이미임을 안다. 예수가 하나님임을 안다. 그렇게 되면 그의 들어 올림은 예수의 하나님 됨이 드러난다.

 

 

 

 

이것은 상호 영광스러움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예수의 고별사에서 나오는 말이다. 자기 죽음을 앞두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상호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서 인류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한다. 그것을 통해서 무엇이 드러나요? 하나님의 사랑이심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요. 이것이 영광이다. 그래서 아들의 십자가에 죽음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본질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 사건은 동시에 아들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자로. 아버지를 계시하는 자로. 그러기 때문에 아버지와 같은 자로. 결국 아들이 영광스럽게 된다. 그 사람의 아들은 십자가에 죽음인데 아들의 하나님 됨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이런 것을 다 깔고 있다.

 

 

 

 

그러면 누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느냐? 믿는 자가 깨닫는다. 믿는 자가 깨닫고 그 사람의 아들이 단 7:13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의 내포적 대표이다. 지난번에 요한복음 1:51절과 더불어 이런 사상을 좀 토론했다. 1:51절은 두 전통 창28:12과 단7장을 반영한다. 28:12절은 하나님의 어좌에 야곱이 앉아 있다. 지상에 야곱이 잠자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거룩한 야곱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금지되어 있는 천사들이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지상에서 잠자고 있는 야곱에게 내려가서 야곱을 봄으로 야곱의 원형인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야곱의 형상 원형을 볼려고 해서 오르락 내리락 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이 지상에서는 야곱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서 이스라엘의 후손의 대표이면서 내포적인 대표로서 어좌에 앉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지상에서는 형에게 쫒기는 야곱과 같은 신세이지만 곧 이방민족들에게 짓밟히는 신세이지만 실제 그들의 숙명은 하나님의 어좌에 높임 받는 것이다. 그것이 단 7장의 내용이다. 핍박받던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9-끝 절)

 

 

 

 

다니엘79-14

 

7:9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11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 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 바 되었으며 12 그 남은 모든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았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래서 여기서 공관복음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메시야 노릇을 한다. 그것은 단 7장과 같은 구원의 노릇을 한다. 곧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참여케 한다. 하나님의 어좌에 높임 받게 한다. 그것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들어 올림을 받음을 통해서이다. 들어 올림은 백성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다. 그래서 백성들을 대표하고 대신하는 죽음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내포적 대표로서 백성들을 대신하는 죽는다. 예수에 의해서 내포적 대신해서 죽는 사람들은 죄가 속해진다. 그래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생명을 얻게 된다. 바로 그러한 대속의 죽음을 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숙명 즉 하나님과 화해하고 연합하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일을 하는 분이다. 이런 의미로서 그 사람의 아들의 자기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 사람의 아들의 들어 올림을 통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기 칭호 하는 예수가 하나님 에고 에이미임을 알 수 있다. 그 분이 하나님적인 존재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느냐면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내포적인 대표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연합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한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덧입을 수 있느냐? 그것을 믿는 사람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분이심을 믿는 사람들이다. 곧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그런 의미에서 들림 받은 그 사람의 아들임을 믿는 사람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 믿지 않은 사람은(24) 그 죄가 속함이 안 되었다. 그래서 24절에 그 죄 속에서 죽는다. 죄 속에 계속남아 있다. 2428절은 아주 짧은 문장으로 이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78장에서 또 하나 두드러지는 형상은 재판의 주제 심판의 주제이다. 심판은 두 가지 의미로 일어난다. 하나는 35장에서 실펴 본 식으로 곧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빛을 주시는 분으로 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그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생명의 세상에 빛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심판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에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말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인데 필연적으로 심판을 일으키는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예수의 빛과 생명에 스스로 합당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심판이 벌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8:15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예수가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 반응하는 자들이 불신앙으로 반응함으로 예수가 가져오는 계시와 생명에 합당치 못한 것으로 스스로 평가하고 그러냄으로서 심판을 드러낸다. 그 의미로 예수는 심판의 agent이다. 그 심판은 진실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심판은 갈라진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빛으로 생명의 중보자로 이 세상에 왔는데 그 예수에 대한 태도가 사람들 가운데 항상 갈라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평가 반응을 해서 불신앙으로 예수의 빛과 생명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로 소수는 예수의 계시를 터득하고 믿는 자들로 구분이 일어난다. 구분이 예수를 믿는 자들이 서서히 줄어들어 가지고 요한복음 9장에 오면 예수 믿는 자들이 몇 사람이 안 된다. 나중에 요한복음 131절 쯤에 가면 소수의 몇 사람으로 줄어든다. 요한복음 2장의 첫 표적을 보고 많이 믿었으나 예수가 그 믿음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6장 마지막에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을 이해 못하고 대부분이 도망간다. 누구만 남았나? 제자들과(대표적으로 베드로와 같이 신앙고백하는 자들만) 몇 명이 남았다. 계속해서 갈라짐의 현상이 나타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이 점점 줄어든다. 나중에 131절에 가면 진짜로 자기 백성 몇 명만이 남는다. 십자가에 못박힐 때는 다 도망가고 여자들 몇 명만 남는다. 이런 갈라짐이 쭉 일어난다.

 

그 다음에 두드러진 주제는 예수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떠난다’‘돌아간다로 이야기 한다. 아랫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다시 남죽음이다 . 그러나 위에서 오시는 예수는 그의 떠남은 곧 위에 세상 곧 그를 보내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감이다(7:33, 8:14, 21-24).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높임 받음이고 그의 아버지와의 연합된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의 영광 받음이다. 이렇게 해서 위에서 오시는 이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감으로 위의 세상과 아랫 세상을 연합시키고 아래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위의 세상으로의 전이 올라감의 길을 튼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의 생명 곧 위에 세상의 생명 영생을 얻게 한다. 이러한 주제들이 78장 초막절을 계기로 한 예수와 유대교의 대표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설명이 되어 있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는 의미는 요 9장에서 구체적으로 해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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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주해) 9-12- 김세윤 신약 신학

2008/02/12 23:45

 

http://blog.naver.com/karamos/8004820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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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9-12

 

 

 

 

김세윤

 

 

 

 

 

 

 

요한복음 9

 

 

요한복음 9장은 8장에 대한 해설이고 10장은 요9장에 대한 해설이다. 9장은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는 표적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서 표적을 행했다. 표적을 행한 것이 안식일이었다. 5장과 같이 안식일의 율법적인 의미에만 집착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서 예수와 시비를 하는 장면이다.

 

 

 

 

시비는 직접 예수와 하는 것이 아니라 병고침을 받은 자와 논쟁, 그 부모와의 논쟁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 논쟁을 통해서 예수께서 병든 아이의 눈을 띄어준 사건이 무엇을 표적하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이야기 되어 있다. 그것은 812절에 의하면 내가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에 대한 주석으로 그 내용이 주어져 있다. 요한복음 9장은 요8:12절의 주석이다. 하나의 삽화이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발견하고 그의 제자들이 사람이 이렇게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죄와 병과의 관계. 우리는 육신적인 질병을 앓으면 죄와 관련이 되었다고 연결하고 질병을 죄에 대한 형벌로 곧장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성경전체를 통해서 질병과 죄는 연결이 되어 있다. 죄에 대한 징벌로 병을 받는다. 그래서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과 병고의 상태로부터 구원해 준다는 것이 동의어로 쓰일 때가 있다. 가령 시1033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이것은 죄용서와 병 고침은 동의어로 한 가지 사건을 두 가지 표현으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103편은 예수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편이다. betz는 시103편을 예수의 18번이었다고 한다. 노래 자리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였다. 왜냐하면 시 103편의 가르침이 예수의 주기도문이 시 103편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예수의 많은 죄사함의 비유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시편 103편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따라서 시편 103편이 예수의 사상의 아주 중요한 배경이다. 여기에 보면 죄사함과 병고침이 동의어로 쓰고 있다.

 

 

 

 

마가복음 2:1-11절에 나오는 예수의 중풍병자 사건에서 병고치는 것을 죄용서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시편 103편에 근거한다. 죄용서하는 것이 곧 병고침이다. 병고침이 주는 것은 바로 죄를 용서해 준 것이다. 이렇게 죄와 병고는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고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 모든 병고는 계속해서 죄로부터 유발한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로부터 병고가 시작이 된다. <예화> 뿌리뽑힌 나무의 비유. 삶의 근원인 대지로 부터 분리됨으로 죽음의 증상이 나타난다. 또 감기증상의 비유.

 

모든 병고는 죄로부터 유발이 된다. 모든 병고는 죄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죽음의 증상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눈먼 자가 누구의 죄 때문이냐? 모든 병고는 죄로부터 유발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까지 밖에 모른다.

 

모든 병고는 죄와 1:1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중요하다. 예를 들면 운전하는 사람들 중에 다른 사람의 실수로 사고날 때 내 죄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연대성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웃의 죄가 나에게 고난을 가져오기도 하고 이웃의 선이 나에게 유익을 가져오기도 한다. 나의 죄가 이웃에게 고난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나의 선함이 이웃에게 복을 가져오고 이렇게 되어 있다. 한 사람 히틀러가 잘못함으로 온 세계가 고난을 당하게 되었고 한 사람 전두환이 잘못해 가지고 온 민족이 고난을 받고 이렇게 된다. 한 사람 선한 사람이 잘하면 온 민족이 온 인류가 복을 갖게 된다.

 

 

 

 

더 나아가 온 피조물이 연대성 속에 있기 때문에 천재지변도 어느 정도 이와 관련시켜 생각할 수 있다. 모든 피조세계가 연대성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고난을 받고 피조물의 황폐함이 인간에게 고난을 주고 등등으로 피조물도 죄와 고난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면 스스로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불교용어로 내가 전생애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곧장 나온다. 꼭 나의 죄 때문에 내가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 주위에 어떤 사람이 고난을 받으면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고난을 받는가 하는데 그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고 혹시 내 죄 때문에 고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고난은 죄로부터 유발이 되나 1:1의 관계는 아니다.

 

이에 대해 예수는 그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자기가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다.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스스로 드러내도록 하기 위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 간에 처음에 논쟁이 붙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기 때문이다. 또 다fms 반응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눈을 띄우는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이 논쟁이 유대인들 간에 붙었다가 나중에 바리새인과 소경과 똑같은 논쟁이 벌어진다. 유대인들이 처음에 부모들에게 갔으나 진짜로 네가 치유함을 받았느냐? 받았다. 너는 이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소경은 17절에 선지자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눈을 띄어주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부모들에게 가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런데 여기서 배경을 이루는 것은 이사야 29:18-19, 35:5-6절 같은 예언에 종말에 메시야가 와서 소경의 눈을 띄우고 절름발이의 병을 고치고 하는 예언들. 예수는 나사렛에서 처음 메시야로 취임설교에서도 사61:1-2절을 인용하면서 주로 설교를 했으나 거기에 바로 두 구절 사29:18-19, 35:5-6절을 덧붙여서 인용했다. 성경에서 안수 받는 자기가 전쟁포로를 석방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소경의 눈을 띄우고 절름발이의 병을 고치고 이런 일을 한다. 이런 일들이 바로 자기를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말하는데 이 인용이 사61:1-256장에 있지만 여기에 소경의 눈을 띈다는 말은 없는 말인데 일부러 사29:18-19절과 35:5-6절을 가져와서 인용한다.

 

 

 

 

29:18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35: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또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오시기로 한 그 사람이요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오 하고 물었을 때 예수가 나사렛 회당에서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사 61장 등의 구절을 인용하고 자기가 그 당시 하고 있었던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에게 하는 일들을 지적하면서 지금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하라 한다. 거기에서도 사29:18-19절과 35:5-6절을 덧 붙여서 인용을 한다. 바로 눈을 띄우는 것을 인용한다. 지금 요한복음 9장에서의 토론의 배경도 이사야서와 같은 예언이다. 종말에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셔서 소경의 눈을 띄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유를 경험한 소경은 예수를 어떻게 고백을 하는가? 신앙고백이 발전한다. 17절에 그는 선지자이다. 그 다음에 33절에 보면 이 사람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지 않았으면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즉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이다. 그런데 그 앞에 부모와의 토론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느냐하면 22절에 부모들이 한 이야기를 보라.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부류를 볼 수 있다. 첫째로 소경이다. 둘째 부모. 세째 바리새인.

 

부모들도 예수가 하나님께로 부터 온 자임을 안다. 왜냐하면 눈을 띄웠으니까.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모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그리스도이다. 이 분은 분명히 하나님으로 부터 오신 자인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아까 이사야 19:18-19 35:5-6절에서 종말에 메시야가 하나님으로 부터 와서 절름발이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띄는데 그가 자기 아들인 소경의 눈을 띄웠다. 그러니까 그가 그리스도이다. 다만 그 부모는 그 신앙고백을 하기를 회피하는 자들이다. 공개적으로 하기를 회피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고 한 자들은 출교하기로 결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 부모는 유대공동체로 부터 쫒겨나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가 분명히 하나님으로 부터 온 선지자로 출교를 당했다. 당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종교적으로는 구원의 가능성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으로 부터 온 선지자 메시야로서 출교당하는 것이 구원의 가능성으로 부터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얻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엄청난 피해가 오느냐면 유대 공동체로 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완전히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팔레스타인도 그렇고 디아스포라 세계에서도 그렇다. 그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출교를 당하면 삶의 터전을 잃는다. 그래서 부모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자들이 있다. 구원은 체험하고 능력을 알고도 공개적으로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출교를 무릎 쓰고 신앙고백을 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가 찾아온다. 찾아와서 대화 가운데서 더 깊은 더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한다. 대화를 잠깐 보겠다. 35절부터 보면 예수가 나음 받은 소경이 쫒겨 났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인자를 믿느냐?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그를 보았고 내가 그 사람이다. 38절에 주여 내가 믿는다. 36절의 주여는 선생이여 정도이고 38절의 주여는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고 신앙고백의 대상이고 자기의 병을 고쳐준 분임을 알기 때문에 38절의 큐리에는 충분한 의미가 있는 주이다.

 

 

 

 

절하였다. 무릎을 꿇었다. 예배했다. 예수가 스스로가 그 사람의 아들임을 그 사람에게 계시하자 소경은 그를 주로 부르고 주에 대한 마땅한 태도는 무릎을 꿇고 예배했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신앙이 점점 발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자기의 눈을 띄운 것으로 선지자 하나님으로 부터 온 그리스도라는 것 까지 고백을 한다. 결정적인 것은 그 사람의 아들임을 스스로 계시했을 때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게 예배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34절 까지는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그리스도 사상의 테두리에 그냥 머무는 것이다. 유대 묵시문학 랍비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종말에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오며 이 민족을 해방하고 모든 감옥에 갇힌 자들 포로들을 석방하고 병자를 고치고 등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메시야이다. 그런데 그 정도의 메시야가 아니다. 예수의 메시야성의 중심은 그의 대속의 죽음에 있다. 요한복음적으로 말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메시야 됨. 구약적으로 말하면 사 53장의 고난 받는 주의 종으로서의 메시야성. 그가 죽어서 죄인들의 죄를 씻고 죄인들을 하나님과 다시 연합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교의 메세야 사상에 머물러 가지고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 정도에서 신앙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풍성한 삶, 영생을 얻게 하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 담고 있는 말이다. 공관복음적인 언어로 하면 그 사람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분이다. 요한복음 언어로는 그 사람의 아들은 들림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 연합시키고 부요함에 참여케 한다. 신앙고백의 중심이다.

 

예수를 유대교의 메시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이것은 소경이 깨달은 것이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그 사람의 아들을 깨달았다. 육신적으로만 본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도 보게 되었다.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빛을 아는 사람이다.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의 빛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진리를 발견했다. 이 사람이 육신적인 눈을 띄은 것은 표적이다. 삽화이다.

 

 

 

 

자 부모들은 자기 아들의 고침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분으로 간접적으로 체험을 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리스도임을 마음속으로 안다. 그러나 신앙고백하기를 피했다. 출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더 깊은 신앙의 단계로 들어가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예수가 죄인이라는 것을 제삼 제사 확인하려고 한 사람들이다. 무엇에 의해서 예수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려 하는가? 모세의 율법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계시인 모세의 율법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빛인 율법에 의거해서 판단한다. 자기들의 율법에 의해서 예수의 하신 일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이다. 즉 마음이 닫힌 사람들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눈을 감아버린 사람들이다. 예수의 계시를 보지 못했고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의 적대자가 되었다.

 

 

 

 

이 사람들을 예수가 무엇이라 하느냐? 39-41절에서 이들은 스스로 본다고 주장함으로 스스로 소경이 되었다. 볼 줄 모른다. 왜냐하면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 눈을 감아 버렸다. 왜 사람들이 예수의 계시에 대해서 못 알아듣느냐? 자기들이 빛이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소경이다. 세상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많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진리를 겸허하게 열려진 마음으로 추구하지 않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지식을 빛으로 삼아서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그 빛에 의해서 진정한 빛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아마 요 9장의 바리새인들의 이야기. 9장 전체의 이야기를 가장 웅변적으로 신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고전 1:18절 이하가 될 것이다.

 

 

 

 

고전 1:18절 이하에서의 바울과 요 9장과는 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다. 세상의 지혜 있다는 자들 헬라 철학자들, 선비 유대서기관 신학자등. 헬라철학자들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입장으로 신에 대해서나 진리에 대해서 다 안다고 주장한다. 세상을 다 안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의 계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안 받아 들인다. 유대 신학자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모세 율법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다 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계시를 가지고 왔을 때 거부한다. 그 결과는 스스로 소경이 된다. 고전 1:18절 이하를 빌리면 이 소경은 미련한 자이다.

 

 

 

 

 

 

 

요한복음 10

 

 

 

 

10장은 선한목자에 대한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서 예수의 구원자되심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양떼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백성의 목자로 부르는 것은 구약의 언약신학의 표현으로서 구약에 흔한 그림이다. 하나님이 목자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 양떼들이다. 또 하나님이 자기 대신 자기 백성을 돌보도록 세운 왕, 선지자, 제사장, 지도자들이 자기 백성의 목자들이다. 그런데 다윗이 훌륭한 목자였다. 다윗과 솔로몬 이라고 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사장들은 거짓목자, 삯군목자였다. 그래서 에스겔서 34장에서 정죄한 것과 같이 이 의롭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목자들이 그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도덕질하고 그들은 진짜 잘먹이고 보호하기는 커녕 그들은 잡아먹고 가죽을 벗겨서 옷을 입고 그들은 방치해서 그 양떼들이 온 땅에 흩어졌다. 에스겔서가 쓰여질 당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의 온 땅에 흩어졌고 짓밝히고 종노릇하고 흩어지고 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온 디아스포라 세계에 흩어져 유리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이들의 목자가 되겠다. 그들을 자기 땅으로 다시 회복하게 하겠다. 다윗과 같은 다윗위 자손의 목자를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겔 34장이다.

 

요한복음 10장이 이 에스겔서 3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수가 바로 그 선한 목자이다. 다웃이 선한목자였는데 가령 랍비들의 주석 Exodus 라바 2:2절에 보면 다윗을 선한목자라 한다. 그런데 다윗과 같은 선한목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런 선한목자이다(34, 37, 5:3, 78:71-72). 또한 하나님이 선한목자인데(23:1, 80:2, 31:9) 예수가 바로 내가 선한목자리고 한다.

 

자신으 선한목자라고 부르면서 어느목자와 대조하고 있나? 삯군목자들과 대조한다. 9장에서 소경에게 바리새인들이 유대성전의 제사장들이 이 사람에게 목자노릇을 해주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목자노릇은 커녕 쫒아냈다. 그래서 유리방황하게 되었다. 반면 예수는 35절에서 이 양에게 찾아 올 뿐아니라 그 양을 위해서 그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 목숨을 내 놓을 분이다. 이렇게 요 9장에 있어서의 소경에 대한 바리새인과 예수의 대조를 요 10장에서 예수께서 주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예수가 선한목자로서 무엇을 하실 분? 양떼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분이다. 대속의 죽음을 하실 분이다. 이것이 자기의 선한목자됨이다.

 

두번째 그림은 내가 양의 문이다. 9절에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서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다. 예수가 문이다. “양들의 문이라는 소리가 무슨 소리냐? 양떼들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말이냐? 아니면 양들이 우리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말이냐? 양떼들이 있는 곳으로 선한목자가 들어간다는 말이냐? 아니면 양떼들이 양우리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냐? 아마 7절은 선한목자가 들어간다는 소리인것 같고 9절은 양떼들이 그 우리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소리이다.

 

그런데 이 문은 분명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연상케하는 그림언어이다. 헬라인들은 하늘에 문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독특하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더물어 쓴 어휘가 독특하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 “온다는 동사이다. 우리말 번역에는 임한다고 되어 있고 또 하나의 독특한 어휘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 “들어간다는 말이다. ‘온다’ ‘들어간다는 말은 숙어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없이도 들어간다고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가령 롬11:25절에 보면 바울이 로마 이방인들에게 이 비밀은 꼭 알게 해야겠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심장이 완악하게 된다. ‘들어온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다는 말이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잘 안 쓰는 사람들에게도 초대교회에서의 들어온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다는 숙어이다. 여기서 예수가 스스로를 문으로 나타내고 들어온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로의 들어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 통로로서 그를 통해서 들어가야 거기에 구원이 있다.

 

여기서 양에 대한 그림으로 두가지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는 선한목자로서 대속의 죽음을 하시는 분, 하나는 양떼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구원을 얻게하는 문이다. 이것이 대충 1-21절 까지의 개념들이다.

 

22-30절 까지는 강력히 예정론적인 언어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24절 부터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도전한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라. 왜 알쏭달쏭하게 말하느냐? - 예수의 가르침의 튿징중 하나가 알쏭달쏭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מילשׁמ이라 하는데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듣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가 그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다 증거한다. 눈뜨고 믿으려고 하는 자에게는 환하게 보여진다. 환한 계시이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했어요? 소경을 하나 고쳐주었다고요. 이 일은 그들이 모세의 성경을 잘 알면 분명히 메시야의 일인줄을 안다. ? 이사야서 29장에 써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렇게 일을 하는데도 오천명을 먹이고 38년된 병자를 고치고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분명히 다 드러낸다고요. 더 분명할 것이 무어가 있습니까? 내가 하는 밀들이 다 하나님의 일들이고 내가 하나님께로 부터 왔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 그런의미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왜 안믿어? 너희들은 내 양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종말에 창조하고 모으는 구원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아니다. 그래서 보고도 못 본다. 깨닫지 못하고 믿지를 못한다. 반면에 내 양떼들은 내 목소리를 듣고 나도 그들을 알고 그들도 나를 따른다. 이렇게 목자와 양떼들 간에는 서로 알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양떼들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따르고 예수의 제자들이 된다. 따른다는 말은 제자가 된다는 소리이다. 그들에게 나는 영생을 주고 이런 관계다. 아주 예정론적인 구원이다.

 

지금 무슨 현상이 벌어지고 있느냐면 예수가 계시를 한다. 세상의 빛으로 계시를 한다. 어쩔수 없이 항상 청중들은 두개로 갈라진다. 다수의 불신자들, 계시를 보지 못하는 부류와 소수의 믿는 자들로 분류된다. 분리현상, 이것이 심판이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되느냐? 어떤 사람들은 계시의 빛을 보고 깨닫고 믿고 어떤 사람들은 계시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되느냐? 궁극적으로 예정론적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들을 예수의 손에 그의 양떼들로 맡겼다. 그 소리는 무엇을 함축하느냐면 그렇지 않는 자들 그들은 예수의 양떼들이 아니다. 이런데서 나온 것이 이중예정, 구원의 예정과 멸망의 예정이다. 그런데 잘 모아야한다.

 

그 다음부터 나온 것은 28절에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치 않는다. 그들을 나의 손에서 빼앗아 갈자들이 없다. 나의 아버지게서 나에게 주신 것은 더 크다. 누구도 아무도 그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28-30절에서 강조되는 것이 무엇이냐?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아주 좋은 perspective를 제공한다. 예정론의 교리는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해서 믿는 자가 되고 믿지 않는 자가 되는가? 하는 믿음의 현재의 상황에 대한 반영에서 출방을 하지만 그것의 궁극적인 관심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예수의 양떼들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예수의 양떼 밖에 멸망의 자식들로 예정하시는가? 거기에 있지 않다. 어디에 있어요? 궁극적인 관심은? 양떼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키신다. 그리스도가 끝까지 지키신다. 거기에 예정론의 관심이 있다. 예정론의 출발은 믿음의 현재이다. 복음이 선포되었을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일어날때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어떤 사람은 불신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부터 관찰이 출발되나 관심은 종말까지 이들을 지키신다는데 있다. 우리 인간의 호기심은 아주 출발쪽으로 가려하나(선택과 유기) 성경은 우리의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자꾸 출발쪽을 생각하면 우리는 예정론을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우리로하여금 불안하게하고 근심걱정하고 불안하게 하는 교리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예정론은 끝까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이다. 선한목자이신 예수가 우리를 끝까지 지킨다. 아무도 우리를 복음의 손길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심지어 사단도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다. 우리의 영생이 확실하다. 그래서 예정론은 우리에게 위안과 확신을 주는 교리이다. 바울이나 요한이나 이점은 확실하다.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예정론을 펼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무나 오래동안 프로테스탄트식의 , 스콜라 철학에서는 구원의 서정이라 해가지고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거기서 부터 출발을 하니까 이해할리 없다.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여러분들 목사고시볼때는 꼭 그렇게 써야 합격시킨다고. 그러니까 목사고시 볼때는 나에게 배운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그렇게 쓰라고. 그러나 이렇게 되었어요. 구조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우리의 선한목자가 끝까지 지키심.

 

그 다음에 31-39절 까지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과의 하나됨. 이것은 30절에 있는 말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으로 인해서 더욱 확대되는 토론이다.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분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하실 수 있다. 이런 이야기로 10장이 마쳐졌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요한복음 11장과 12장을 하겠다.

 

 

 

 

11:1-44절은 나사로를 부활시키는 장면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의 제일 큰 제일 마지막의 표적은 521절에서 이미 예수가 선언한 말씀의 진리 됨을 천명한 것이다. 521절에서 아버지가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생명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원하는 자들은 생명을 준다고 되어 있다. 5:21절의 선언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친 그 표적의 의미를 밝히는 것인데 또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조주로서, 생명의 주로서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분이심, 곧 부활의 주이시듯, 아들도 아버지로 부터 생명과 심판의 권세를 받아서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그 원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진리를 지금 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증명하고 있다.

 

 

 

 

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권세를 위임받은 분이라는 것을 표적하고 증명할 뿐 아니라 또 종말에 있을 부활에 대한 선취를 허락하신 것이다. 이 나사로를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종말에 하나님의 아들에 속한 자들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전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선취로 이미 여기서 주어졌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이 종말에 있을 부활의 축복을 벌써 믿음 가운데서 즐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논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11:1-44절 까지는 그 정도로 요약하고 45-53절을 보다 더 자세히 하겠다. 여기에 보면 예수가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큰 표적을 행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큰일 났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죽일려고 논의했다. 여기서 예수를 죽일려고 논의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들고 있습니까? 예수를 가만히 놓아두면 예수가 저런 표적들을 자꾸 행해가면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다. 그것이 왜 나쁘다는 거여요. 로마인들이 땅을 차지하고 백성들을 해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아주 긴장 속에서의 메시야 운동이 어떻게 어떤 시각으로 보여졌는가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많은 시사를 받는다. 예수 당시에 그리고 그 후에도 예수 이전에도 메시야 운동이 참으로 많이 일어났다.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유다 두다 바코크바까지. 그런데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신명기 1815절에 있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종말의 선지자라고 은근히 주장하면서 제 2모세로서 모세와 같은 메시야적인 행위 새로운 출애굽, 2의 출애굽을 민족해방을 한다고 약속을 했다. 당시 메시야 운동이 이렇다. 당시 제 2 출애굽 민족해방은 로마제국으로 부터의 독립과 해방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런 메시야 선지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출애굽 당시 행했던 표적들을 다 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고 바위에서 물을 일으키고 홍해를 건널 때 물을 가르고 질병으로 애굽의 사람들을 죽이고 한 그런 이적들도 다 자기들이 한다고 주장을 했다. 선지자들의 표적이라고 주장을 했다.

 

이런 메시야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면 또 그들이 한다고 주장하는 표적들에 이제 많은 사람들이 현혹이 되어 가지고 로마 사람들이 어김없이 군대를 보내 가지고 이 메시야 운동을 쳤다. 메시야 운동을 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많이 다쳤다.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했다. 이 열혈당의 역사가 계속 그런 역사였다. 유다와 두다가, 마지막으로 일어난 것이 바 코크바 전쟁이었죠. 주후 132년에 끝난 바 코크바 전쟁이다. 이런 역사가 많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것이 주로 어느 때 많이 일어났느냐면 출애굽의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전후해서 메시야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유월절 쯤 되면 가이사랴에 주둔하는 로마 총독이 증파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와서 주둔해서 백성들을 세밀하게 감시했다. 이런 메시야 운동이 일어나면 즉각 개입을 해서 그 운동을 쳐 없애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니까 지금 그런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로서 성전을 장악하고 있었던 당시의 상층 상류층 귀족층이었다. 바리새파는 사회계층적으로는 중산층이었고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 출신이었다. 사두개파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의 타협으로 성전체제가 유지 되었다. 그래서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의 성전에서의 기득권을 인정하면서 또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의 율법해석을 따른다고 해서 서로 양보하고 타협함으로 성전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야 운동이 크게 벌어져서 로마군대가 이 메시야 운동을 치러오면 그 과정에서 백성이 많이 다치고 자기들의 양보와 타협으로 이룬 성전체제가 흔들리게 된다. 성전체제에 로마 정부는 많은 것을 주었는데 특권을 회수할 수도 있고 자기들에게 많은 손상이 온다. 이런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이 같이 모여서 예수의 메시야 운동을 중단시켜야 하겠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상의했다.

 

 

 

 

이때 대제사장이 51절에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예수가 백성들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대제사장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합니까? 예수 한사람을 없애므로서 이 메시야 운동을 종결시켜서 로마 사람 로마군대가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백성들에게 올 해를 미리 방지하겠다는 말이다.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예수가 할 수 없이 죽어야 하겠다는 말이다. 대제사장은 이런 뜻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사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운영에 의해서는 정확한 제사장직의 성취이다. 예수가 백성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로 대속의 제사로 십자가에 바쳐지는데 속죄의 제사는 보통 누가 주는 것입니까? 대제사장이. ? 온 민족을 위해서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속죄의 제물의 피를 가지고 가서 지난 1년 동안 지었던 하나님의 백성의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속하는 제사의식이 있었다. 온 민족의 죄를 속함 받기 위해서 대제사장이 하는 제사의 일이다. 예수가 이제 곧 십자가에 스스로를 속죄의 대속의 제사를 온 민족들을 위해서 온 백성들을 위해서 바칠 것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바친다고. 대제사장이 자기 직책상 예수를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로 바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커다란 요한복음적인 역설이 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야 운동을 중단함으로서 로마군대에 의한 다침을 방지하려고 한 것이다. 곧 그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을 중단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에 적대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생각에 민족을 보호하고 자기들의 권익을 보호할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제사장과 지도자들의 자기 아들 그리스도의 메시야 운동 곧 자기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반역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뜻을 성취하고 말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빚는 역설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서 대제사장의 예수에 대한 말의 의미에 대해서 51-52절에 그렇게 주석하고 있다. 51-52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 미리 말함이니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요한복음 11:49-52절 까지는 어쩌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18절 이하에서 212절 까지에서 펼치는 십자가의 도의 역설의 가장 좋은 주석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고전 26절 이하 완전한 자들에게 이 세상의 지혜도 아니요 관원들의 지혜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한다고 하는데 이 지혜는 8절에 보면 이 세상의 관원들 가운데 아무도 못 알았다. 만일에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을 해요. 요한복음에 있어서 대제사장의 예수에 대한 태도,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면 지금 바울의 이 말에 대한 좋은 주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인간으로서 짜낼 수 있는 그의 지혜에 따라 예수가 죽어야 한다. 그래서 로마사람들로 부터 민족이 해를 받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를 짜낸 것이다. 인간의 지혜는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적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위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최대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 자기에게 적대하는 인간의 지혜를 역이용하는 지혜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자기의 최대의 지혜를 짜냈지만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이용해서 자기 아들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만민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바치는 자기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고 말았다.

 

빌라도와 예수의 대결도 마찬가지이다. 빌라도는 세상의 왕인 가이사의 대표이다. 세상의 통치자인 가이사의 대표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대표이다. 세상은 암흑 거짓 하나님 나라는 진리의 영역 진리의 체현인 나라 곧 길 진리 생명인 예수를 아믁 거짓 환상에 불과한 세상의 주인 가이사의 대표인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다. 여기 얼마나 큰 역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빌라도와 예수의 재판에서 거짓이 진리를 재판한다. 이 상황속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무엇을 선언하는가? 유죄판결을 내리고 사형언도를 내린다. 이렇게 함으로 스스로 거짓과 불의의 체현임을 드러낸다. 바로 이 빌라도의 재판을 하나님께서 이용해서 세상의 거짓되고 불의함을 드러내고 그의 아들의 진리 됨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의 지혜를 이용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러분들 이 부분 한 번 설교해 보세요. 얼마나 우리에게 큰 용기와 위로가 됩니까? 이 세상이 이 역사가 하나님의 간섭 없이 인간의 꾀에 맡겨진 것이라면 항상 의가 진리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불의 거짓이 승리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아무 소망이 없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이 시사하는 여러 진리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 불의 거짓을 이용해서 자기의 선한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고 자기 진리를 드러내시고 자기 의를 세우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거짓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소망을 주고 새로운 삶의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대제사장이 예수의 죽음을 만민을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서 이야기하는 이 이야기를 나사로를 살린 사건과 결부시켜서 이야기함으로서 또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할려고 하는 것이다. 나사로를 부활시킨 표적이 보여주듯이 예수는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느냐 하면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준다는 말이다. 나사로의 부활의 이야기에 이어서 이 예수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예고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한다 하는 것이다. 즉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이야기가 이 표적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인데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생명을 주느냐? 자기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곧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메세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11: 55- 12: 11절 까지는 예수가 나사로와 그의 자매 마리아와 마르다의 대접을 받는 중에 마리아에 의해서 값비싼 향유로 받을 씻기심, 발에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이다. 유다가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할텐데 왜 이것을 허비하느냐고 했다. 이것은 표적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씻는 것은 하나의 표적이다. 하나의 메세지를 담은 상징적인 행위이다. 항상 이 표적은 믿지 않은 자들에게 오해를 일으킨다. 그래서 여기서 믿지 않는 자의 대표로 유다가 그 표적의 표적성을 이해를 못하고 세상적으로 판단을 해서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일이지 왜 낭비하느냐? 그러니까 예수가 놔두어라. 이 표적의 진정한 의미를 강의해 준다. 이 짧은 이야기에 표적의 전형적인 구조가 나온다. 뭐라고 설명을 하느냐? 표적의 의미는? 나의 장사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예수의 발을 씻긴 행위로 예수의 장례절차가 기름으로 몸을 씻는 것인데 그것을 먼저 행한 것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후에 일어나고 머리에 기름부음 받음이 일어난다. 요한복음에서는 순서가 바뀐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일어나고 또 발이 기름으로 씻긴다. 여기서 두 이야기 두 판을 비교함으로서 요한복음에서 받을 메세지가 무엇인가? 한 두어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가 왕으로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왕으로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다. 재판과장에서의 논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가 그렇다. 세상의 왕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다. 예수가 왕 되심이 강조되었다. 예루살렘 입성에서 부터 수난사 전체에 예수의 왕 되심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기름부음이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일어난 것은 왕으로서, 기름 부음받은 자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이 강조된다.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음은 왕, 제사장, 선지자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주제는 숨어 있는 주제이다. 예수의 유다의 오해에 대한 반응에서 겉으로 드러난 의미는 예수의 장례 치름의 의미이다. 이것이 예수의 발을 기름부은 의미이다. 그래서 장례를 의미한다. 그래서 순서가 대제사장이 예수를 대속의 죽음 제물로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거기에 대해서 마리아에 의해서 예수가 장례됨이 상징되었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 입성이 이루어진다. 순서가 그렇게 된다. 대제사장에 의해서 죽음이 예고되고 마리아에 의해서 죽음이 예고되고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예수가 왕으로서의 등극을 상징하는)이 이루어 진다. 이것이 예수의 고별사와 수난사에서 밝히게 될 예수의 역설적인 하나님에로의 높임 받음에, 그의 왕으로서의 취임, 주로서의 취임과정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들림으로서 그의 낮아짐 그의 죽음이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십자가에 들리고 장사되고 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죽음이 그가 영광 받는 그가 왕으로서 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래서 13절 부터 시작이 되는 고별사에서 예수가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감이 계속 나온다. 이것이 높임 받음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례된 자로서 부활한 예수에게 도마가 뭐라고 고백함으로 나의 왕 나의 주로 고백함으로 요한복음의 클라이맥스인 그의 왕으로서 취임이 일어난다. 그래서 1112장의 이 이야기는 지금 이제 유월절에 펼쳐질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복귀함, 그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가 드러남, 그의 높임 받음의 사건을 표적으로 예고한다. 상징성, 표적성을 갖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복귀함을 나타낸다.

 

마가복음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순서에 있어서 다르다. 예루살렘 입성 이전이냐? 후이냐? 그리고 어느 부위에 부었느냐? 머리에 부었느냐? 발에 무었느냐? 에 따라 크게 다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해석가들은 이 사건이 마가와 요한이 전혀 다른 두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입성전 사건과 또 예루살렘 입성후 사건이 있었다고 해석을 한다. 성경의 무오성, 성경간의 긴장을 좁게 생각하는 자들은 이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지난 번에 가령 요한복음 2장에서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마가복음은 성전소란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성전에 소람을 피워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이 된 것으로 되어 있다. 마가보음과 공관복음의 특수성을 따르면 이렇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성전소란 사건을 요한복음 2장에 공생애의 제일 처음에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많은 보수주의 자들은 예수가 성전에서의 소란사건을 두 번 했다고 해석을 한다. 공생애 처음에 그리고 나중에 했다고 표현을 한다. 그러나 성경 무오성이라는 것을 그렇게 좁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예수의 성전청결도 소수는(J. A. T. Robinson) 요한복음의 순서가 옳다고 본다. 다수의 학자들은 마가복음 순서가 옳다고 본다. 즉 요한이 신학적인 이유로 이 사건을 앞에 갔다 놓았다고 본다. 우리 지난번에 이야기한대로 예수가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해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교제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앞에 갔다 놓았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한 이야기를 마가는 예수가 왕으로서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녹음 안 됨) 요한은 이 이야기가 예수가 왕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장례됨, 예수가 대속의 죽음을 마치고 장례된 후에 부활한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예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죽음의 예고에 바짝 갔다 놓았다. 또 요한복음이 성찰하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주되심은, 왕 되심은 죽음과 장례를 통해서 일어난다. 십자가에 들림 받음을 통해서 일어난다. 역설적으로. 그러기 때문에 순서를 죽음, 장례, 그리고 왕으로서 입성의 순서로, 십자가에 낮아짐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귀환함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자. 이렇게 해서 요한복음은 앞에 갔다 놓았다고 본다.

 

자 여러분들이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어떻게 판단하느냐? 두 번 다 했느냐? 아니면 단지 한 사건을 그 사건의 신학적인 의미를 강조의 차이냐? 서로 보완해서 의미가 있다. 각 개인이 결정을 해야 한다. 마가복음이 더 맞느냐? 요한복음이 더 맞느냐? 둘 다 다 맞다. 이제 곧 나온다. 13장에 들어가자 마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이 또 다르다. 그래서 아주 문자적으로 생각을 하면 전자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다. 성전소란은 사형감이다. 예수가 처음에 소란을 피울 때는 가만이 있다가 두 번째 하니까 아 이 녀석이 지난번에 할 때 가만이 있으니까 또 한다고 붙잡아 왔을 것인가? 가능성이 희박하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우리가 너무 역사 실증주의에 사로잡혀 가지고 큰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사건을 다룬다. 우리가 곧 보겠지만 13장에 가면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가 유월절 전날 닛산 14일 정오에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되어 있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닛산 15일 유월절 날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되어 있다. 공관복음의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만찬이다. 요한복음의 날짜를 따르면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의 장면의 말의 신학적인 의미는 유월절 전날의 만찬이다. 그 대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은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서 제사장들이 유월절 양을 잡는 그 순간이다. 그 순간에 예수가 죽었다. 세례요한의 원래의 증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가 의미하는 것이다. 둘 다가 요한복음의 날짜를 따르던 공관복음의 날자를 따르던지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 출애굽의 성취로서 제 2의 출애굽 사건으로서 해방과 구원의 사건을 의미한다. 크게 차이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뭐냐면 하루 차이라는 것이 역사 실증주의로 보면 큰 문제이다. 여기 사는 우리에게는 큰 문제가 없다. 지구가 시차가 다 있어 가지고 팔레스타인에서 정오(닛산 15일 정오)는 여기에서의 우리 시각으로 15일 새벽 쯤 된다. 우리 주일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토요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상당히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이런 것에 집착을 하냐면 이런 것 하나 차이 가지고 성경의 권위, 성경의 신뢰성, 성경의 하나님 말씀됨이 다 무너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역사 실증주의에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해결방법은 여기 카톨릭 신학자 쥬벧. 우리가 쿰란 문서를 보면 팔레스타인에서 당시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사두개 바리새당의 달력과 다른 달력을 썼다. 그래서 그런 관찰에서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와 다른 달력을 썼다. 그래서 날이 다르다. 혹 이때에 달력 A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닛산 14, 달력 B에 의하면 닛산 15일이 될 수 있다. 가능성이 있다. 요한은 a라는 달력을 사용해서 신학적인 목적을 위해서 예수가 유월절 양으로서 죽음을 강조했다. 이럴 가능성이 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예수가 유월절. 가령 많은 사람들은 요한이 맞다고 본다. 유월절 날 사형집행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유월절 전날 사형 당했다면 최후 만찬은 유월절 이틀 전날로 볼 수 있다(13절에서 14절로 넘어가는 것). 유월절 하루 전에 만찬을 거행하면서 유월절 만찬의식을 따랐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상상할 수 있다. 예수가 자기 체포와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보고 유월절 만찬을 못할 것으로 보고 전날 했다. 유월절 절기 중 일어난 만찬으로서 모세의 출애굽의 전형적인 성취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루 전날 시행하면서도 유월절 의식을 따라 거행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가 유월절 전날 양들이 잡히는 순간에 죽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반면에 유월절 전날 만찬 장면을 기술하지만 만찬이 있는 유월절 의식은 요한이 다 생략해 버렸다.

 

왜 생략했느냐? 신학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왜 요한복음에는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는 없으면서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은 있느냐? 요한에게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유월절 만찬은 유월절 만찬이 아니다. 그래서 유월절 의식을 생략했다. 공관복음의 전승은 유월절 절기 중에 죽었고 그가 유월절 만찬 전날 만찬을 행했지만 그 만찬을 유월절 만찬의식을 따라 행했으므로 유월절 만찬이다. 그래서 그 다음인 닛산 15일에 죽었다. 두 달력설이 맞느냐? 아니면 요한이 날짜가 옳으냐? 마가의 날짜가 옳으냐? 서로 보완하고 예수가 유월절 만찬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12: 12-19절은 예루살렘 입성이다. 여기서 나귀새끼를 타고 군중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입성하는데 스가랴 9:9절이 직접 인용되었다. 요한복음에서는 구약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본문에서는 적다. 예수의 수난사에 들어와서 본문을 직접 인용한다. 여기에 강조점이 두개이다. 하나는 12:13절에 왕 곧 메시야적인 왕으로서 환영받는 것이다. 이 주제가 예수의 수난사에 줄곧 흐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예수, 18:33-40, 19:1-6, 12-16, 19절 등에 줄곧 흐르는 주제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메시야적 왕으로서의 예수이다.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8: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19: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 (히브리 말로 가바다) 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 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강조점은 제자들이 16절에 당시에는 예수의 메시야적인 왕으로서의 입성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나중에 그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 빛에 비추어 봐서 예수의 왕 되심, 왕으로서의 입성을 깨달았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있어서 일관된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왕이 된다. 죽음이전에는 예수의 왕 되심이 감추어져 있고 모른다. 십자가에 들림 받은 후에 드러나서 깨닫고 알게 된다.

 

 

 

 

스가랴 99절을 예루살렘 입성과 결부시켜 나오는 것은 공관복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가랴 9장에서 13장 까지 보면 당시 구약과 유대교의 주된 메시야 사상이 전사적인 전쟁영웅, 정복하는 왕 메시야인데 스가랴 9-13장에서는 평화의 왕으로서의 메시야 사상이다. 이사야에서도 메시야를 평화의 왕이라 그랬지요. 그런데 스가랴에서는 찔림 받는 묵자장으로서의 평화의 왕으로서의 메시야, 이사야에서는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고난 받는 이스라엘의 종으로서의 평화의 왕 메시야, 이렇게 스가랴서와 이아야서의 메시야 사상이 상통한다. 그런데 사53장도 예수의 수난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스가랴 9-13장도 예수의 수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 참으로 중요한데 스가랴 9:9절에 나오는 평화의 왕으로서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했다(전사로서가 아니라). 그러니 세상적인 판단에서 그가 왕인 것을 모른다. 제자들 까지도 모른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류를 화평케 한 뒤에야 그의 왕 되심, 평화의 왕 되심의 정체가 드러난다.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9절에 바리새인들이 냉소적으로 말한다.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바리새인들은 냉소적으로 말하나 사실이다. 사실이 될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평화의 왕 되심이 드러날 때에 온 세상이 그를 따를 것이다. 온 세상이 따를 것이라는 바리새인들의 역설의 성취가 벌써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디서 뭐로 부터 12:20-36절에 헬라인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이다. 여기의 헬라인들이 이방 헬라인들이냐? 헬라 지방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냐?는 주석가들의 논쟁이 있다. 아마 헬라 이방인이 타당한 해석이다. 헬라 이방인들이 빌립에게 와서 예수를 만나겠다. 면담을 신청한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가 23절에서 때가 이른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이르렀다. 24절에 밀알이 죽지 않으면 홀로 가만이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이 말을 일반화해서 한 사람이 희생을 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 하나의 격언정도로 일반화해서 쓴다. 그러나 원래는 예수가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다.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온 유대인들, 하나는 여기 예수를 찾아온 이방인들의 대표가 되는 온 이방인을 구원에로 인도한다. 그래서 첫째 예수의 죽음이 유대인들 뿐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을 의미함을 나타내고 둘째 그를 적대하고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그를 추구하는 이방인들과의 대조가 나타난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죽고 부활 후 초대교회의 선교의 역사에서 실제가 될 사건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야 예수를 거부하고 이방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예수가 유대인들 뿐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자이심이 드러나지만 또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대조가 나타난다.

 

 

 

 

1237-50절 까지는 예수의 공생애의 결론 부분이다. 예수가 피하는 이야기로 시작이 되고 그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피하는 장면, 그리고 1:10-11절의 패턴에 따라 예수가 공생애의 의미를 결론하고 종합한다. “그가 그의 백성에게 왔으나 그의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소망을 두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말과 예수를 거절한 행위는 예수가 계시하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행위로서 그것은 심판 받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예수가 계시하는 하나님을 거절한 것은 인간들의 칭찬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이런 식으로 공생애의 의미를 요약 결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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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주해) 13-21- 김세윤 신약 신학

2008/02/12 23:46

 

http://blog.naver.com/karamos/80048203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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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3-21

 

 

 

 

김세윤 교수

 

 

 

 

 

 

 

책의 두 번째 책인 13장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13-17장 까지의 예수의 고별사를 하겠고 18-20장 까지의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토론함으로 개관을 하려고 한다.

 

 

 

 

2:1-12:50절의 표적들의 책은 예수가 공적으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기술했다. 표적과 표적들을 설명하는 말씀들을 기술함으로서 청중들의 믿음을 유발시키려 했다. 그 책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 부터 와서 사람들에게 많은 표적들과 강론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했는가? 그러나 빛 보다 암흑을 선호한 대다수의 사람들과 유대인들에 의해서 거절이 되었는가를 기술했다.

 

그래서 12: 37절에 예수께서 많은 표적들을 행했으나 그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는 말로서 첫 책의 결론을 맺었다. 예수께서 표적들을 행하셔서 하나님을 계시했으나 그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서시의 1:11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영광의 책은 표적들의 책이 기술한 바와 같이 예수의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의 표적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그를 믿게 된 소수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표적들의 책은 공중에게 대한 표적들과 강론이었다면, 이 영광의 책은 예수의 계시활동을 통해서 믿게 된 소수의 제자들에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영광의 책의 주제는 예수가 세상으로 부터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감이 주제이다. 반면 표적들의 책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으로 부터 온 표적과 계시로 하나님을 계시함이 주제였다. 이 아버지께로 돌아감도 12:32절에 예인된 대로 그 사람의 아들이 들림 받는 것이다. 들림 받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게 되는데 그것은 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지표에서 들림 받음을 시작으로 해서 부활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높힘을 받으심과 성령을 통해서 부활하시고 영광 받으신 주는 그의 백성 가운데 주로 임재하심으로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그래서 영광의 책 13-20장은 십자가에 못박힘을 그의 영광 받으심이라고 지칭하는데 이와 같은 역설 - 십자가에 못박힘이 그의 영광 받으심이라는 - 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 진리가 가장 심오하게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자로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원의 사랑을 계시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인류를 위해서 내어 주심을 나타낸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심이 드러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힘은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 주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다. 이것은 예수가 곧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뜻이다. 계시자라는 소리는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함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낸다.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나타낸다. 그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 됨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수난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나타낸다. 그것이 곧 예수의 진정한 정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광 받음이다.

 

 

 

 

영광의 책의 구조는 (표적의 책은 표적 - 오해가 발생 - 강해의 순서인데) 13-17장 까지는 자기의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은 영광의 사건으로 강해하고, 18-20장까지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이 뒤따른다. 영광의 책에서는 순서가 바뀌어서 강해 - 사건이 일어난다.

 

 

 

 

13-17장 까지는 긴 예수의 고별사로 되어 있다.

 

고별사를 시작하기 전에 13:1-30절에 하나의 표적으로 시작이 된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는 Sign행위로 시작이 된다. 이 표적이 유월절 잔치 때 일어나는 것으로 해서 지난 시간에 날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지금 이제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장면이여요.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의 장면은 있고 또 최후의 만찬의 의미가 요한복음 13장과 요 15장 특히 요 6장에 집중적으로 강해되어 있지만 최후의 만찬을 성만찬으로 되풀이 하라는 그런 institution은 요한복음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institution의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이 이곳 저곳에 나타나고 그 말들의 의미가 요 6, 13, 15장 등에서 해설하고 있다. 이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그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함의 표징으로 식탁을 대하고 둘러앉은 이들의 발들을 씻기는 장면이다. 지난 번에도 우리가 세례요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그런 이야기도 했지만 유대 종들도 상전의 방을 씻기는 의무를 갖지 않았다고 그랬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바로 유대 상전에 대한 종의 위치보다 더 낮아진 행위이다. 한 마디로 낮아진 행위이다.

 

καταβασις, 낮아진 행위, 낮아짐의 극치이다. 예수께서 위세상에서 내려오신 분인데 내려오심의 극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연극으로 이루어진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상태, 이제는 올라갈 수 밖에 없다. 그의 아버지께로의 돌아감, 곧 그의 영광 받음, αναβασις가 시작이 될려는 가장 낮아짐의 상태는 십자가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발 씻김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해설이다. 극이요 드라마다. 이 발을 씻긴 극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구원론적인 의미가 있고 하나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다. 너무나 오랬 동안 많은 사람들은 윤리적인 모범의 범주에 집착을 해왔다. 예수의 겸손, 섬김의 도를 보라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만 해석을 하는데 사실은 이것은 이차적이다. 일차적인 것은 예수가 백성을 죄로 부터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자기는 씻지 않겠다고 할 때 예수께서 씻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게 된다. 곧 그의 백성이 예수로 부터 죄 씻김을 받아서 그들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언제, 어떻게 그의 백성의 죄를 깨끗이 씻기느냐?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서이다. 그래서 발을 씻김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아주 극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해서 그들을 씻기는 행위이고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섬기는 행위이고 그들의 죄를 깨끗이 씻기는 행위 죄를 속하는 행위임을 미리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온통 사랑의 행위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백성을 사랑해서 그들의 죄를 씻어 가지고 속죄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함이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영생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을 예수는 발을 씻기는 행위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십자가에서 속죄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이냐? 새언약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이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는 새언약의 공동체이다. 새언약의 공동체 교회에 언약이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으로 설립이 되느냐면 새계명으로 된다.

 

옛 시내산 언약은 모세율법으로 표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속죄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사랑을 통해서 이제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로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속죄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새언약의 제사이다. 새언약의 공동체에 주어지는 새언약은 무엇으로 표현이 되느냐?면 새계명으로 표현이 된다. 그래서 새계명이 무엇이냐? 서로 사랑하라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탄생되는 새언약의 공동체는 온통 사랑으로 특징 지워지는 공동체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그들을 위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그들을 위한 사랑이 서로 간에 사랑으로 표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새계명을 준다. 이렇게 해서 발을 씻김의 두 번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을 보이셨는데 사랑은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는 모범의 범주가 이제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 13장을 읽을 때 여기만 을 읽는 데 이것은 사실은 보다 근본적인 의미인 구원론적인 의미에서 파생된 두 번째 의미이다.

 

 

 

 

이렇게 해설이 되었다. 그래서 13장의 첫 행위, Sign은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에 대한 해설로 시작이 되어서 그것이 극으로 표현이 된 것이어요.

 

 

그리고 13: 31-16장 까지는 계속해서 발을 씻긴 극을 통해서 표현한 진리, 곧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진리를 계속해서 더 강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소리가 나오느냐 하면 유다가 12제자의 circle에서 밤에 나가는 방면이 있다. 그는 어둠을 빛 보다 더 좋아해서 어둠으로 나가요. 이렇게 해서 그 스스로 어둠을 선택함으로서 319절의 원칙에 의해서 심판이 이루어졌어요. 이렇게 해서 유다의 떠남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만 남게 되었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게 된 하나님의 백성만 남게 되었다. 이들에게 13:31-14:31절 까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에게 돌아감을 의미함을 이제 강해한다. 13:31-14:31절 까지에 간다”“온다는 동사가 무려 14번이나 나온다.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 또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았다. 는 말로 climax에 이른다.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았다는 말이 과거시제로 나오느냐? 이런 것이 선지자적인 과거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계획이 미래에 일어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으로 꼭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을 나타낼 때 과거시제로 쓰는 예가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이 되고 그가 맡은 임무 곧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하는 것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일어난 것이나 진배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았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영광을 받았다.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영광을 받았다는 것은 본질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아들 요 1:51절에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창 28:12절의 유대전승과 단 7:12··의 예언에 따라서 옛 야곱 이스라엘에 상응하는 새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으로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는 그런 분이다. 예수가 십자가의 새언약의 죽음, 대속의 죽음을 함으로서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를 바치면 그 결과 속죄됨,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된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통 무엇이라 말하느냐? 구약의 숙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한다. 요즘 세상의 남녀 평등사상에 의해서 여자도 끼어들어 자녀들이라 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아들은 의로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는 분이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어떤 하나님의 아들? 옛 야곱 이스라엘에 상응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 옛 야곱 이스라엘은 누구? 옛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의 아들 예수는 새로운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 그 사람의 아들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드러난다고요? 내가 누차 설명을 하지만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 곧 다니엘 7장의 예언대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가 그러난다. 이것이 영광 받음이다.

 

 

 

 

또 그 사람의 아들의 영광 받음을 통해서 또 뭐가 나타나요?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사랑이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우리에게 생명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본질이 드러난다. 창조주로서 종말의 풍요로운 생명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본질이 드러난다. 이것을 예수가 설명을 한다.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이것을 좀 다른 말로 해서 14:2절에서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감은 그 곳에 그의 백성이 그와 함께 있을 방을 예비하러 간다. 이 소리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과 더불어 연합해서 교제하고 잔치함으로 하나님의 풍요로움 속에 하나님의 부요함 속에 참여한다는 것을 그림으로 말한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죄인들이 용서함을 받고 의로워져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의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된다. 이것을 그림으로 말하면 이것이 돌아감인데 무엇하러 돌아가느냐면 하나님과 하나님이 있는 곳에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상태에 그의 백성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간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을 아버지 집에 방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는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표적의 책에서도 표적을 행하면 오해가 발생을 하듯이 여기서도 예수의 강론이 아직 믿음이 성숙치 않은 그의 백성들에 의해서 오해가 발생이 되요.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그래서 도마, 빌립, 유다 등이 의아해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긴 설명을 해요. 그의 돌아감이 아버지께로 감, 곧 그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부터 시작을 해서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아버지께로의 돌아감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서 있어서 인간의 근본문제를 생명의 세상, 윗 세상으로 부터 분리되어 가지고 아랫 세상에 사는 것으로 헬라적인 세계관을 빌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이란 무엇이냐? 하면 사건의 세상, 물질의 세상에 속한 우리가 위의 세상, 영원의 세상, 실재, reality, 진리의 세상, 영의 세상, 영혼의 세상에 도달하는 것,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갈 수 없다. 요한복음은 뭐라고 말하느냐면 위에서 오시는 분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위로 데리고 올라 가셔야 우리가 갈 수 있다. 누구만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요? 위에서 오신 분만이 할 수 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다. 그 분이 단 7장의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위의 세상에서 καταβασις 한 분이시기 때문에. 어디까지 낮아지셨나요? 십자가에 죽기 까지 낮아지셨어요.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그의 αναβασις, 올라감의 시작이다. 영광 받음의 시작이다. 다리를 놓은 거다. 위의 세상과 아래 세상을 연합시킨다고도 할 수 있고 아래 세상에 속한 자기 백성을 위의 세상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내가 길이다. 그 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터득할 수 있고 생명도 얻는다. 그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그림을 연상하게 하느냐면 가령 빌립보서 2:6-11절 까지의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를 연상케 한다. 사실은 똑같은 그림이다. 거기 빌 2:6-11절의 찬송시가 어떻게 시작이 되지요? 그의 본체(μορφη)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를 비워서 종의 형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버리고 인간의 죄와 육신과 세상과 율법과 사단의 노에가 된 상태의 인간의 형태로 왔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을 했다. 이것이 καταβασις의 과정이다.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그를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고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가 κυριος이기 때문에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의 대상이 되셔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천사) 땅에 있는 것들이나(인간) 땅 아래 있는 것들이나(악령) 즉 온 우주와 그 속에 있는 것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예배하고) 그를 주라고 고백을 하게 된다는 찬송시이다. 이것이 똑같다. καταβασις는 십자가에 순종,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고 이것이 αναβασις가 시작이 된다.

 

그런데 빌립보서의 찬송시 뒤에는 무슨 그림이 숨어 있느냐면 아담의 그림이 숨어 있어요. 3장에 보면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높은 위상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다. 그 위상을 더 높일려고 했다. 하나님에게 까지 기어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그의 원래의 위상에서 떨어져서 그가 통치를 해야 할 피조물을 섬길 수 밖에 없는 사단의 종이 되고 피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물질을 섬겨야 하는 종의 상태로 전락을 했다. 이 아담의 그림이 빌립보서의 찬송시 뒤에 anti-typology로 숨어 있다. 첫 아담이다.

 

마지막 아담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 빌립보서의 찬송시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느냐면 인간이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을 때는 인간 이하로 떨어져요. 이것이 죄이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의지 이것을 신학적으로 교만이라 한다. 자기주장이다. 이것이 죄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주제파악을 못 하고 하나님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함으로서 위의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여셨다. 그래서 내가 길이다. 어떻게 길을 텄어요. 위의 세상을 보여주심으로.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것이 생명이 아니고 환상이다. 위의 것이 실재이다. 아래의 환상됨. 진리의 빛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상을 알게 함으로 그의 대속의 새언약을 세운다. 그런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예수의 αναβασις는 십자가에서 시작을 해서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우편에 주로 군림하는 위치로 올라감, 높임 받음으로 이해된다. “주로 군림하는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그의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영으로 성령으로 와 임재하심의 관계이다. 그래서 올라감, 아버지께 돌아감의 의미는 예수께서 다시 너희들에게 돌아옴,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돌아옴의 언어로 바뀐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주로 군림하는 상태로 올라감이 영광 받음, 높임 받음의 극치인데 그것은 동시에 성령을 통해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를 통해서 새로 창조된 그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은 예수가 창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됨이 확인이 된다. 성령을 통해서 그의 백성이 됨이 확인이 된다.

 

이렇게 될 수록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면 세상과 구별이 된다. 핍박을 받는다. 세상이 그들을 핍박하게 된다. 그래서 고별사에 예수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 가셔서 그의 백성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 하셔서 그의 백성을 완성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의 백성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 부터 핍박받음의 새로운 주제로 예수의 고별사가 발전한다.

 

 

 

 

그러나 핍박 상태에 너희들을 놓아 두느냐? 그것이 아니고 성령이 이들에게 보호자 노릇을 한다. 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이 세상으로 부터 받는 핍박받는 백성들에게 성령이 보호자 노릇을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령론, 성령이 무슨 역활을 하고 어떤 분인가를 자세히 전개한다.

 

 

 

 

그것이 그 유명한 παρακλητος. 성령을 παρακλητοσ라 부르고 성령을 παρακλητοσ로서의 역활을 예수가 길게 설명을 한다. 성령의 역활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παρακλητος 라 부르는 것이 요한복음의 독특한 성령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παρακλητος로 부르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해서 종교사적인 연구를 많이 했다. 도대체 어떤 종교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령을 παρακλητος라 부르는가? 그런데 그것에 대한 토론이 많았고 아직도 확실히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의견의 일치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다만 구약과 유대교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tandem relationship이라 해 가지고 가령 엘리야와 엘리사, 모세와 여호수아, 세례요한과 예수 등의 이런 것을 tandem relationship이라 한다. 원래 하나님의 구원사에 중요한 역활을 감당하는 사람의 후계자가 그 역활을 완성하는 것, 그런 관계이다.

 

여호수아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혹은 지도자이다. 그래서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의 구원의 역사를 감당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이면서 부관이면서 엘리야와 같은 역활을 감당한다. 요한과 예수도 이런 식으로 해서. 예수와 성령, 예수 그리스도와 παρακλητος로서의 설영이 이와 같은 tandem relationship관계에 있다. 그래서 성령의 하는 일은 예수가 하는 일을 승계하고 완성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여호수아, 엘리사는 어떤 의미로 모세와 엘리야의 재현이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의 재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종교사적인 배경을 가령 묵시문학에서 천사 미카엘, 멜기세덱의 존재의 역활을 요한복음에서 παρακλητος의 역활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토론을 하는데 이런 것은 별로 확실한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을 더 이상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런데 다만 성령이 παρακλητος로 불리움을 받았을 때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원래는 문자 그대로 한다면 종교사적인 배경을 확실히 규명하지 못할 때 종교사적인 배경에 의해서 성령을 παρακλητος로 불렀을 때의 그 의미를 확인 할 수 없을 때에는 그러면 헬라어 자체에서 혹 의미를 암시받을 수 있느냐? 헬라어 자체를 분석해보면 옆에로 불리움을 받은자라는 말이다. 이 말은 돕도록 불리움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이 변호사라는 의미로 보통 쓰인다. 법정에서 재판정에 서서 핍박받는 사람들을 변호하는 자이다. 그래서 높임을 받은 예수가 주의 위치에 도달한다.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대권을 대신 행사하는 주로 높임을 받는다. 그것이 십자가에 죽음, 십자가에 들림으로 부터 시작해서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높임 받음의 절정이다.

 

그런데 주로 군림하는 상태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느냐? 그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성령을 통해서 임재하셔서 그의 백성이 그를 주로 고백을 하고 그래서 그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표징이다. 성령을 받음으로서 비로소 일단의 사람들이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구별이 된다. 그래서 그들의 하나님의 백성 됨이 확인이 된다.

 

동시에 그것은 세상에서의 핍박에 노출되는 상태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이 핍박을 하고 싫어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핍박에 대한 경고를 한다. 이 핍박의 상황에서 παρακλητος가 변호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식으로 변호를 하느냐? 선생노릇을 한다. 또는 설교자 노릇을 한다. 그래서 παρακλητος가 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가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예수에 대해서 증거를 하고 곧 예수가 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터득하게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제자들이 예수가 영광을 받은 후에 ····을 기억을 했다. ”“····을 그때야 깨달았다. ”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가령 예수께서 성전에서 소란을 피운 사건, 2:14절 이하에 보면 영광을 받은 후에 깨달았다고 요한이 comment를 하고 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계시를 했는데 그 계시가 깨달아 지지 않았어요. 그 제자들에게 계시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성령의 선생노릇, 가르치는 역사, 증거자, 설교자로서의 역사에 의해서 깨닫게 되었다. 성령의 역활은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되어 지게 하는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는 객관적인 계시다 할 수 있다. 이 객관적인 계시가 우리들에게 주관적으로 계시되어 지게 하는 분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어떤 새로운 것을 계시하는 분이 아니다.

 

 

 

 

! 새로운 것을 계시한다고도 볼 수 있지. 여기에 선생노릇을 한다.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해서 너희들에게 무엇인가를 선언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계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이 되고 그것이 종말에 구원으로 펼쳐질 것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선언하는 것이니까. 근본적으로 새로운 계시가 아니다. 선지자 역활을 한다.

 

성령의 중요한 역활은 아들을 통한 객관적인 계시를 우리들에게 계시되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객관적인 계시를 깨닫게 한다. 터득하게 한다. 말귀를 알아듣게 한다. 이것이 성령의 역활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고 지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핍박을 이기고 살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법정에 섰을 때 우리가 할 말을 우리에게 주고 이렇게 해서 우리를 옆에서 와서 돕는 변호사의 역활을 한다.

 

동시에 세상에 대해서는 검사 역활을 한다. 세상이 죄에 빠져있음. 세상은 불신하는 인류를 말한다. 불신하는 인류의 죄인 됨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드러낸다. 그러니까 παρακλητος의 역활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는 변호사의 역활을 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검사의 역활을 한다.

 

이것은 사실 예수의 역활이 아니어요?! 예수께서 표적들과 강해를 통해서 예수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계시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는 자임을 계시했다. 그런데 세상은 이 계시를 무시하고 반대함으로서 스스로 죄인 됨을 스스로 암흑 속에 있는 자임을 드러낸 것이다. 세상에 대한 예수의 계시에 대한 반응으로 죄인 됨과 스스로 죄악스러움과 어둠의 자식들임을 드러내는 역활을 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덧입은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는 예수의 계시가 그들의 죄를 드러내게 한다. 이것이 심판이다.

 

 

 

 

성령의 역활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의 궁극적인 역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증거하여 터득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계시되어 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성령의 역활을 힘입어서 예수의 그 계시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으나 세상은 거부하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핍박함으로서 스스로 세상에 속한 자들, 어둠과 암흑에 속한 자들, 하나님의 반대세력에 속한 자들이라고 곧 죄인들이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계시의 역사가 그들의 죄를 정하는 검사의 역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성령의 역사는 tandem relationship로 예수의 계시의 역활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삼위일체론적인 구조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는 분이다. 어떤 계시? 객관적인 계시이다. ? 우리의 참여 없이 이루어지는 계시이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아버지와 같다는 것이다. 계시의 제1원칙은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했다는 것은 아버지와 같다는 말이다. 이것이 객관적인 계시이다. 이 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계시를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계시되어 지게 하는 분이 성령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누구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가? 요한복음의 언어로 하면 나의 것을즉 예수의 것을. 성령은 자기 멋대로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기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고 행하러 왔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자기 멋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계시를 행한다. 이 말은 아버지가 나의 이름으로 보내는 분이라고 성령을 표현한다. 즉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 아버지의 계시를 계시되어 지게 하는 분이다는 말이다.

 

 

 

 

계시가 똑같다는 원리에 의해서 성령은 아들과 같고 아버지와 같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인 계시의 구조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에 의해서만 진정한 계시가 일어난다. 신론이 삼위일체론적으로 이루어 지지 않으면 계시가 발생하지 않는다. 계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 구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이 계시를 가능케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케 한다. 우리가 이것을 보다 확실히 알려고 하면 우리가 이른바 고등종교라는 흰두교, 이슬람교의 신관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신론에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범신론이다. 흰두교와 불교 같은 인도 종교가 범신론이다. 온 우주가 신이다. 온 우주를 초월한 존재가 없다. 신의 내재만 있고 신의 초월은 없다.

 

 

 

 

반대로 이신론이 있다. 이슬람교의 신관이다. 이것은 신의 초월만 강조해서 신의 내재를 약화시키거나 부인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이 세상을 떠났다. 너무 거룩해서 세상에 개입하지 않고 떠났다. 이런 신론을 부재지주적인 신론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기독교적인 신론이다.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천명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은 하나님은 초월하시고 동시에 내재하시는 분이다는 말을 할 때 의 신론이다.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은 아직 확실히 계시되지 않은 구약과 유대교적인 신론은 우리의 신약성경에서 완전히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인 계시에 불과하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그를 계시하신다는 말이다. 어떻게? 사랑으로 계시하셨다. 우리를 구원해서 생명을 주시는 이로 계시하셨다. 그 구원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되도록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즉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천명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초월하셔야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우주보다 커야 고장 난 우주를 고칠 수 있다. 범신론과 같이 하나님이 우주와 같아 버리면 고장 난 우주를 고칠 자가 없다. 그러니까 범신론에서는 우주가 고장 났다는 것을 부인해 버린다. 악과 선이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환상일 따름이라고 취급을 한다. 흰두교에서는 악과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환상의 시각에서만 악과 선이 있을 뿐이다. 벌써 문제의 설정부터가 다르다. 신의 초월이 없다면 우리의 고난은 해결할 힘이 없다. 그래서 고난의 실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선택되 있어요. 우리가 이런 신관을 따르고 이런 종교를 따를 것인가? 그래서 인도 종교, 불교, 흰두교에서는 인간은 옳은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옳은 지식은 환상을 보려고 현상을 보면 삼라만상, 옳은 것, 좋은 것, 악과 선 등은 현상에 불과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본질을 터득하는 것이 구원이다.

 

본질을 터득하는 것을 그들은 그림으로 표현을 한다. 수레바퀴의 그림, 현상은(삼라만상의 현상들)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현상이다. 이것은 원으로 변화의 모습 속에 있다. 변화는 시간을 의미하고 시간은 낳고, 병들고, 늙고, 죽은 영겁의 영원한 모습, 이것을 고난이라 한다. 구원은 이 변화의 세계, 고난의 세계에서 본질을 터득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본질의 세계는 수레바퀴의 기하학적인 축과 같아서 돌지 않는다. 변화가 없다. 여기에 돌입하는 것이 열반이다. 이 세계에 실재로 도달을 하면 거기에는 악과 선도 없고 변화도 없고 고난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자아가 없는 무아의 상태, 적멸의 상태이다. 여기에 돌입하는 방법은 도와 줄 사람이 없다. 내가 해야 한다. 이것이 자력구원이다. 자기 힘으로, 철학을 함으로, 지식을 쌓음으로, 수양을 함으로, 도를 닦음으로, 요가를 함으로, 선행을 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이신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이 초월을 한다. 신이 초월을 하니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은 있다. 우주보다 큰 우주를 창조한 신은 있다. 그러니까 그 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신이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구원의 손길을 우리에게 내밀지 않는다. 내재하지 않는다. 내재의 교리가 약하면 구원할 수 있는 신은 있으나 오지 않으면 구원은 인간 스스로 이 신을 찾아 갈 수 밖에 없다. 자력구원의 종교이다. 아니면 신이 원래 창조할 때 지은 운명에 절대로 복종을 하든가이다. 이슬람에 절대로 복종을 해야 한다.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은 하나님의 초월과 동시에 내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다. 전능하신 분이다. 그 분은 실재로 이 우주 속으로 들어 오셔서 내재하셔서. 어떻게 들어어시느냐? 그의 아들을 통해서 들어 오셔서 성령을 통해서 역사 하셔서 스스로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을 전개했을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신의 계시를 말할 수 있고 신의 구원을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을 전개했을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은 우리 기독교의 모든 진리, 교리의 정박처이다. 신론에 모든 교리가 기초한다.

 

 

 

 

이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이 요한복음 전체에 특히 고별사의 배면에 깔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한 유대인 바울이, 유대인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계시를 체험하게 된 그들이 체험한 하나님을 그릴 때 필연적인 삼위일체론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신 6:4절에 들으라 이스라엘아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는 절대 유일신론에서 낳고 자란 유대인 바울 마태 요한이 하나님을 놀랍게도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으로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구약에서 부터 오는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나님이 드러났다. 하나님의 정체가 드러났다. 사랑이시고 구원자이시고 삼위일체적으로 존재하는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이 드러났다.

 

 

 

 

14, 16장을 주로 살펴보았다.

 

 

 

 

15장에서는 포도나무 비유로 예수가 새로 구성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고 17장에서는 자기가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으로 고별사가 구성이 되어 있다.

 

 

 

 

 

 

 

오늘은 18-20장 까지의 수난사와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살펴 보겠다. 다 할 수는 없고 다음과 같은 5개의 말씀들을 중심으로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요한이 우리에게 해설을 하고 있는가? 거기에 집중할까 해요.

 

 

예수의 동산에서의 체포의 장면.

 

18:9절 말씀을 살펴보겠어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과 같이 동산에 갔을 때 경찰이 예수를 체포하러 와요. 그때에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이 무사히 돌아가는 조건으로 자기가 찾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자기를 체포하도록 해요. 그것에 대해서 요한은 18:9절에 이렇게 해설을 해요.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는 하는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이를 위해서 자기는 체포되고 그 제자들을 무사히 가게 했다고 요한은 그 사건에 대해서 주를 달고 있다.

 

18:9절 말씀은 금방은 17:12절을 두고 한 말이어요. 1712절에서 예수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에서 그렇게 말했어요.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주신 그 사람들 중 멸망의 자식(유다) 외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이어요. 물론 17:12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예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도록 그래서 예수를 믿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도록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도록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구원을 영생까지 보장하다는 포괄적인 의미가 있지요. 포괄적인 뜻을 두고 말하고 있지요.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난 이 사건 곧 성전 경찰과 로마 군병들이 합세해서 예수를 체포하러 왔을 때 예수가 자기를 스스로 체포되고 자기를 스스로 내어줌으로 자기의 제자들을 보낸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의 표적이어요. 이 사건은 시공의 가시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보다 깊고 의미 있는 영원의 세계에 영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표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곧 예수가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주신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까지 지키신다. 그들의 구원을 영원까지 지키신다는 말이어요.

 

 

 

 

이렇게 생각을 해본다면 지금 이 부분 앞에서 예수께서 이런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했어요. 가령 6:37-40절에서 예수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렸어요. 그러나 소수가 이 진리를 깨닫고 예수에게 신앙고백을 하고 남는데 이들을 예수가 무엇이라 하느냐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종말에 생명으로 부활을 시키겠다고 말해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곧 아들을 보고 믿는 자는 곧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를 내가 종말에 부활을 시킬 것이다.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10:27, 28절에도 비슷한 것이 나타나요. 양과 목자의 비유로 목자인 예수가 양을 하나도 잃지 않는다. 목자 예수에게 속한 양떼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아요. 누구도 예수 목자의 손에서 양떼를 도적질 해 갈 수 없다고 말해요.

 

그런데 10:15절에서도 내가 선한 목자로 양떼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는다. ”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10:15절과 10:27, 28절에서 우리는 예수가 그 백성을 어떻게 끝까지 지키시는가의 실마리를 하나 발견을 해요. 곧 예수가 자신의 목숨을 양떼들을 위해서 바침으로서 양떼들이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그래서 그들이 사단의 세력에 의해서 집어 삼키우는 것이 없게 된다고 말해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지금 그러니까 동산에서 예수를 체포하러 온 군대는 세상의 왕인 사단의 앞잡이로 나타나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사람으로 나타나요. 거기에서 이제 대결이 벌어지는 데 이때 예수는 자기 양떼들을 자키기 위해서 목자로서 양떼들에게 달려드는 이리떼에게 목자가 스스로 가서 이리 떼를 만나서 대적함으로 양떼들을 보호하듯이 예수가 로마 군병과 성전 경찰 앞에 나아가서 대적을 함으로 그의 제자들을 보호하는 장면이어요.

 

 

 

 

이 장면은 예수께서 사단의 세력과의 대표적인 대결이었어요. 그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서 그의 백성의 구원을 이루고 그의 백성의 구원을 보장한다. 그런 것에 대한 표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첫째로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양떼의 목자인 예수가 이리 떼 같이 달려드는 사단의 세력에 대신 싸워서 - 그 싸움은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승리를 나타내지만 - 자기 목숨을 내어 주어서 그의 제자들의 구원을 확보하고 영원까지 지킨 것으로 예수의 죽음을 해석을 해요.

 

 

 

 

18:32절에 이제 산헤드린에서 문초를 한 예수를 빌라도에게 정식으로 재판을 하도록 넘겨주는 장면이어요.

 

그런데 산헤드린에서 자기들이 재판을 해서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 그래서 빌라도에 의해서 재판을 받고 그에 의해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에 의해서 처형된 의미가 무엇이냐?

 

요한은 그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을 해요.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8:32).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이것은 1232-33절을 가리켜 한 말이어요. “내가 당에서 들리면 ····보이심이러라내가 땅에서 들려 올림을 받을 때 내가 모든 사람을 내게 이끌겠다고 말씀했는데 바로 이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산헤드린에서 재판이 종결되지 않고 빌라도에게 재판이 넘겨지고 사형언도를 받고 처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것은 물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두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산헤드린에서 사형언도와 집행이 되었다면 돌로 쳐 죽임의 형을 받았을 것이다. 신명기 13, 17, 18장 등에 보면 백성을 오도한 거짓 선지자는 그 형벌이 돌로 쳐 죽임이어요. 그런데 에수가 산헤드린이 아니라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은 로마 사람들의 반란자의 처형방법은 십자가 형이었어요. 그래서 산헤드린에서 빌라도에게로 예수의 재판이 이관된 것을 보고 이것은 예수가 들림 받음으로(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을 것을 말했는데 그것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다.

 

 

 

 

18: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그래서 18:32절의 주석은 일단은 12:32절 이하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요한복음에 여러 번 언급되었던 예수의 높임 받음, 들림 받음에 대한 것을 전부 지적하는 것이어요. 가령 벌써 3:13-16절 까지 이 사상이 나오기 시작을 해요.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높이 든 것 같이 그 사람의 아들이 들림을 받아야 한다. 그 사람의 아들이 들림 받은 것은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인데 올라감, 들림 받음이 일어나야 구원이 있다. 인자는 하늘에서 온 분인데 그 사람이 다시 하늘로 올라감으로 이 사단의 세상, 물질의 세상에 사는 우리가 영원의 세상, 진리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터요. 그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재앙과 고난 받음, 어두움의 세상에서 해방이 되어서 진리의 세상, 생명의 세상으로 올라간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전체에 그 사람의 아들의 내려옴, 들림 받음이라는 그림언어가 여러 번 나타났어요.

 

 

 

 

거기에서 집중적으로 쓰는 언어가 들림 받음이 이중의미로 쓰였다고 그랬지요.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 그러니까 낮아짐의 극치여요. 십자가의 죽음은 낮아짐의 극치여요. 그런데 바로 낮아짐의 극치가 높아짐, 올라감, 예수의 영광 받음이다. 이런 역설을 요한복음은 여러 번 나타낸다.

 

 

 

 

13장에서는 심지어 그림으로도 나타냈어요. 이것의 논리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무엇을 나타냈다고요. 하나님의 사랑을 타나내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는 것인데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예수의 들림 받음은 요한복음의 언어로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음이다.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심,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요.

 

 

 

 

하나님을 계시하는 동시에 자기를 계시해요. 자기를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심을 계시함으로 자기의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나타낸다. 곧 예수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받음, 본질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에 달림, 들림은 하나님의 영광 받음이고 동시에 예수가 영광 받음이다. 십자가에 달림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인식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는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 됨, 하나님의 계시자 됨으로서의 사명, 목적, 임무를 완성한다. 그 임무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다.

 

 

 

 

그래서 인간들로 하여금 완전한 하나님의 상을 갖도록 하고 또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했으니까 하나님을 알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곧 진리를 알게 된다. “알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관찰에 의해서 법칙을 터득하는 헬라식의 앎이 아니라 union, 하나님과 하나됨, 부부간의 하나 됨의 앎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들이 하나가 됨.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상호거함의 상태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는 고별사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들의 하나님의 세계에 신적인 삶에 참여하는 길이다.

 

 

 

 

그러니까 요한은 빌라도에게 넘어간 사건은 곧 십자가에 죽음을 의미하는데 십자가의 죽음은 왜 예수가 돌로 쳐 죽임을 받지 않고 또는 야고보 같이 칼로 목베임을 당하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느냐? 여기에서 아주 오묘한 진리를 발견한다. 십자가의 죽음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도 칼로 목 베임을 당하는 것보다도 더 잔인 한 극악부도한 가장 천한 죽음이다. 사형 중에서도 가장 천한 죽음이다. 그 낮아짐의 죽음은 동시에 지표에서 들림의 죽음인데 여기에서 엄청난 진리를 발견한다. 곧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가 요 13장에서 극으로 나타냈듯이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주장과 반대되는 것이다. 곧 자기를 내어줌이다. 곧 섬김이다. 당시 종들도 하지 않는 일을 자기의 제자들에게 한다. 종보다 더 낮아짐으로 그의 완전한 사랑을 나타냈다. 완전히 사랑한 것을 극으로 나타냈다. 이 섬김은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낮아짐, 섬김을 나타내고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낮아짐이며 가장 깊은 섬김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게시한다. 이 계시를 통해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 상호내재, 연합하여 하나님의 신적인 세계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8:37절에 빌라도와의 재판자체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가 빌라도에게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된 죄목은 메시야로 주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메시야 사상에 의하면 다윗왕조를 재건할 그래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할 그래서 민족의 해방을 이룰 전사 왕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 로마 치하에 있는 유대 땅에서 곧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 대한 반란을 의미했다. 그래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네가 왕이냐?”고 묻게 되었다. 예수가 스스로가 왕임을 시인하고 자기 왕 됨이 무슨 뜻인가를 설명하는데 진리로 다스림, 진리를 나타냄, 진리의 왕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냉소적으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물음으로 빌라도는 스스로 진리를 모르는 자로 나타난다. 곧 진리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자, 어둠에 속한 자, 세상에 속한 자로 스스로를 나타내고 있다. 이 예수의 진리의 왕권에 대한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줄곧 요한복음 내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진리를 나타내고 스스로 진리이시고 진리의 말씀을 하시는 자임을 줄곧 말했는데 우리로 하여금 그런 구절들을 상기시켜요.

 

 

 

 

예수가 진리의 계시자이고 진리 자체이셔서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자체이며, 진리의 계시자라는 말은 예수가 세상의 빛이어요. 이 빛은 그 속성상 진리를 알게 하여서 진리를 터득한 자에게는 구원을 의미하고 진리를 대적함으로서 스스로 어둠을 택한 자들에게는 심판을 의미한다고요. 그래서 3589장 등에서 줄곧 세상의 빛인 하나님의 진리의 계시자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 스스로 구원의 백성으로 아니면 심판의 자식들로 드러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갈라짐이 일어난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예수가 진리의 왕으로서 사실은 예수가 심판자여요. 예수가 심판자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진리를 계시하는 자이기 때문에 진리의 빛을 발하면 필연적으로 구원의 공동체와 어둠의 지식들, 심판의 자식들로 갈라진다고 그랬어요.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반응으로!

 

 

 

 

이것은 요 5장에서 예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에게 주신 심판자로서의 대권이다(5:27)고 하였다. 실제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심판자이다. 그리고 그의 심판이 옳다. ? 그는 진리를 계시할 뿐아니라 진리의 화신이다.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구원을 하러 왔는데 필연적으로 구원과 더불어 일어나는 것이 심판이라고요. ?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반응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큰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음으로서 스스로 진리에 속하지 않고 거짓 세계 어둠의 세계에 속한 자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 거짓과 어둠의 세계의 왕, 세상의 왕은 누구여요. 근본적으로 사단이라고요. 그런데 현상적으로 보이는 왕은 누구여요? 가이사라고요. 가이사의 대신이 빌라도여요. 빌라도가 가이사의 권위로 심판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거짓과 어둠의 세계의 왕 가이사가 그의 대표 빌라도를 통해서 진리의 왕이신 예수를 심판하게 되느냐? 이것이 역사적인 역설이다.

 

 

 

 

여기서 요한이 보여주는 것은 빌라도가 예수를 심판을 해요. 그런데 이 과정이 심판을 통해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져요. 예수에 의해서 빌라도가 사형을 받는다. 빌라도가 그 본질을 드러낸다. 어둠과 거짓의 세계에 속함을 드러낸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판결 유죄판결을 함으로서 스스로 거짓됨을 드러낸다. 이것이 심판이다.

 

 

 

 

표면적으로 빌라도가 예수를 심판하나. 실제로는 이 심판을 통해서 예수에게 빌라도가 심판을 받고 예수의 진리 됨이 드러난다. 이것을 두고 12:31절에 표적의 책 마지막에 예수가 지금 이 세상이 심판을 받는 때다 한 말이 지금 역사적인 사건으로 나타나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빌라도의 처형에 있어서 또 하나의 역설은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해서 처형을 하기를 꺼려해요. 예수를 무죄석방을 하려고 해요. 그때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해요. 당신이 이 사람을 무죄석방하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이것은 굉장한 공갈이지요. 스스로 왕이라 하고 가이사의 왕권에 반역한 자를 당신이 무죄석방을 하면 당신이 바로 예수의 반란에 동조하고 동참한 자다. 그래서 결국 빌라도가 처형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 자는 우리 왕이 아니므로 십자가에 죽여라.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 이것은 숙명적인 선언이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750절에서 본 봐와 같이 대제사장에 의해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처형시켜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또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해서 율법에 근거해서(신명기 17, 18, 13장에 근거해서) 예수를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해요.

 

 

 

 

돌로 쳐 죽임을 당하면 예수의 운동이 종결되지 않고 더 활발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 중간사 시대부터 아주 강력하게 흐르는 사상 하나가 하나님의 진정한 선지자들은, 의로운 종들은 패역한 그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다는 의로운 자들의 고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산헤드린에 의해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하면 이미 예수는 메시야 선지자로 추앙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진정으로 의로운 하나님의 선지자였음이 확인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의 운동이 더 확산될 수 있고 그래서 대제사장이나 산헤드린에 더 골치덩이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 군대에 의해서 백성이 다칠 수도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의 아주 영리한 꾀에 의하면 예수가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런데 당시의 그들의 메시야에 대한 통념은 자기들의 정치적인 왕임으로 다윗왕조를 재건할 왕임으로 예수를 이런 식으로 해서 송사를 하면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밖에 없다. 십자가에 못박으면 예수에게 신명기 21:23절이 적용이 된다. 그러면 성경을 존중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의로운 선지자로서 패역한 세대에 의해서 불의한 방법으로 잘못 재판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을 오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를 받은 것으로 확신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운동은 확실히 종식시킬 수 있다.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렇게 해서 예수를 빌라도에게서 처형이 되도록 보낸 것이어요. 그래서 빌라도를 공갈하기 까지 해서 하는데 이렇게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되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하느냐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고 했다. 이 선언은 무슨 말이냐?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누구여요. 야웨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언약에 의해서 야웨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야웨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서 이 이스라엘의 대표인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이 우리들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서 스스로 언약을 파괴한 것이어요. 야웨와의 언약을 스스로 파괴하고 스스로를 세상의 왕인 가이사의 신민들로 만들었어요.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자기들의 메시야인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스스로 언약을 파괴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으며 세상의 왕,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에 순종하는 행위이지요.

 

 

 

 

그것이 예수를 가이사를 통해서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 드디어 고난을 받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법에 충실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의 공동체로 한답시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데 바로 그런 행위로 자기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서 제거해 버려요. 이렇게 해서 역설적인 선언으로 구약이 끝나요. 옛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는 옛언약의 역사가 끝난다. 대다수 유대인들의 실격으로 끝난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서 거부함으로.

 

 

 

 

그러나 이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은 동시에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는 구약역사의 마침이고 이 구약백성 중에서 극 소수 제자 몇 명, 여자들 몇 명과 더불어 새언약에 의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이 된다. 유대인들의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언약백성의 역사가 시작이 된다.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불순종으로 유대인들의 구약의 역사가 종결되고 그중에 극소수의 사람들이 예수의 계시와 예수가 새언약을 새우는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되는 순간이다.

 

 

 

 

이것은 1:11, 12절에 요약된 말이 이제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에게 왔다. 그러나 그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사람,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 역사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얽힌 또 하나의 역설은 빌라도가 십자가에 예수의 죄목을 쓰지요. 나사렛 예수 유대인들의 왕이라고 써 붙인다. 그런데 몇 나라 말로 씁니까? 로마세계어로, 헬라어로, 문명어로, 히브리어로 쓴다. 그러니까 온 세상 만방의 모든 민족들에게 다 이해되도록 예수의 메시야 되심, 예수의 하나님의 백성의 왕 됨을 선언했다. 빌라도는 이것을 죄목으로 적었으나 그런데 요 11:47절 이하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를 없애기 위해서 한 말이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달성하는 수단이듯이 빌라도가 죄목이라고 쓴 이 말이 실은 하나님의 뜻을 달성하는 것이어요. 곧 예수의 메시야 되심, 하나님의 백성의 왕 되심을 온 세계만방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어요. 누가 선포해요? 빌라도가. 빌라도는 이 세상의 왕인 가이사의 대표이다. 이런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숨을 거두면서 다 이루었다. ”고 하였다. 이룬다는 말에는 17:4절을 연상케 한다. 곧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 성취했다.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계시활동을 다 성취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계시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나게 한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함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임무를 다 이루어서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이심을 완전히 드러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의 사랑을 덧입어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게 된다. 곧 그래서 하나님이 생명의 주되심을 계시한다는 뜻도 있다.

 

 

 

 

또한 이루다.”는 말은 종교의식을 다함. 가령 제사 바치는 과정을 다 마침이라는 의미가 있다. 제사 드리는 과정을 완성함. τελειν이라는 말은 제사 드리는 과정을 완성함. 그러니까 17:4절에서는 동사가 조금 달라요. 같은 어근에서 나왔지만 τελειοω 라는 동사였다. 이것은 어떤 임무를 마침의 뜻이다. 그러나 전자는 임무의 마침의 뜻과 더불어 기술적인 제사 행위 종교의 어떤 입교의식 같은 것을 마침의 뜻으로 전문용어로 쓰였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는 말은 전자이다. 그러니까 17:4절에 나오는 자기가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한다. 계시자의 임무를 완전히 마쳤다는 뜻도 있고 하나는 속죄의 제사 바침을 종결함의 뜻도 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자의 임무를 마친 것이다. 많은 표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의 제사를 마침을 의미한다. 또는 새언약의 제사의 마침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일어나는 것이며 대속의 제사의 마침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라고 표시하기도 하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대속의 제사로 표시하기도 한다. 이들을 분리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2장의 표적이 여기서 완성이 된다.

 

 

 

 

19:34, 35절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몸에 창을 던짐으로 예수의 몸에서 물과 피가 나왔다.

 

피는 요한복음 6:55절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물은 요7:38절을 상기시킨다. 물은 물론 성령을 두고 한 말이다. 성령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영으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생명의 힘으로서 우리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7:38, 39절에서는 물이 생명을 이야기 하면서 예수가 아직 영광을 받기 전이므로 성령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말은 역으로 말하면 예수의 영광 받음과 더불어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져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하게 할 것인데 바로 십자가에 죽음이 영광 받음이지! 즉 영광 받음과 동시에 물이 흘러 나왔다. 곧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요. 예수의 십자가에 달린 몸에서 피가 나옴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속죄의 제사였음을 말한다.

 

속죄와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였다. 이 제사의 피는 우리 죄를 씻는 것이고 우리를 하나님과 새언약의 관계로 하나님과 연합을 시키는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죄가 씻어지고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해서 이런 것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한다. 의의 열매는 생명이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물은 3장에서 부터 줄 곧 나왔어요. 물과 성령으로 인해, 위로부터 나야 한다. 야곱이 주는 물에 대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약속했다. 초막절에 물 긷는 행사와 예수가 영생을 가져다 주는 물, 실로암의 물을 무지에 있는 소경에게 빛을 보게 함, 이 물들이 다 성령에 대한 상징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볼 수 있게 하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이 성령이 예수의 영광 받음으로 주어진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오순절의 이적을 두고 한 말이다. 성령의 계시활동은 지난 시간에 예수의 고별사에서 어떻게 나타나요.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기억이 나게 한다. 가르친다. 계시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앞의 표적들의 책이나 예수의 고별사 말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요점을 시사해 준다. 사실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가장 큰 표적이다. 그가 자기 제자들을 보호함으로서 스스로 내어줌으로 나타난 표적성, 그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이 되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재판을 받고 로마식으로 처형이 된 표적성, 그가 십자가에 들림으로 처형되는 표적성, 재판의 진리와 거짓의 대결의 표적성, 다 이루었다의 표적성, 물과 피가 나오는 표적성, 앞에 나오는 표적들은 이 표적들의 여러 면들을 밝히는 표적들이고 그 앞에 나오는 표적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의미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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