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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요한복음

요한복음강해(1)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생명을 얻게 함(요20:30-31)

by 금빛돌 2023. 4. 22.

집 마당에 핀 라일락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 많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 가운데 7가지의 표적만을 기록하였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가나안 혼인잔치의 표적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입니다. 또 세 번째 표적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표적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표적입니다. 또 다섯 번째는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표적입니다. 또 여섯 번째 표적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고치신 표적입니다. 또 일곱 번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7가지의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0:31. 오직 이것(7가지의 표적)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에서 7가지의 표적을 기록한 것은 너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요한복음에서 7가지의 표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렬 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요한복음이 기록이 될 당시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들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영지주의).

여러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위대한 인간이지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단순히 위대한 한 인간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절대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단순한 인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요한복음에서 왜 예수님께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셨습니까? 여러분 만일 물에 조금이라도 포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표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단순한 인간만이 아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이것은 한 어린 소년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제자들에게 가지고 오니까 여기 저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떡과 물고기를 가져와서 오천명을 먹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을 가지고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신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단순한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심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요한복음에서 7가지의 표적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3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20:31. 오직 이것(7가지의 표적)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래서 이 요한복음 처음 예수를 믿는 분들에게 읽으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은 이미 예수를 믿는 자도 읽어야 합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을 믿음으로 여러분에게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까?

요한복음에서는 생명을 영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음으로 여러분에게 영생이 있음을 믿습니까?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영생)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믿는)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그 동안 우리는 바울 서신을 통해서 구원이란 먼저 신분적 변화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사탄의 자녀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법적인 변화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구원이란 소속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가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구원은 생명이 없는 자가 생명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영생이 없는 자에게 영생을 얻는 것이 구원 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여러분 속에 영생이 있습니까? 생명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이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속에 영생이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 속에 영생이 있다는 것은 우리 육신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 속에 영생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영생이 있으면 이 땅의 삶 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속에 영생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 수 있습니까?

1)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73절에 보면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앎이 아닙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아는 앎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아는 앎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속에 영생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할 때 어떤 일이 생깁니까?

요일1:3 --우리의 사귐(교제)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더불어 교제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하나님과 교제함으로 누리는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제를 나눌 때 우리 안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 속에 영생이 있는 자는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함으로 흘러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 이 기쁨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벧전1:8).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신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 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16편에서는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할 때 그 주님 안에 있는 흘러넘치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맛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영적인 생명이 있는 자로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제를 할 때, 날마다 그 주님으로 말미암은 사랑을 날마다 공급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나님과 교제할 때 날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을 누리며, 느끼며, 체험하며, 공급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사람은 날마다 새 힘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장정이라도 피곤하여 넘어질 수 있습니다. 청년이라도 힘이 들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는 새 힘을 얻습니다. 달려가도 곤비하지 않는 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독수리처럼 하늘을 나를 수 있는 새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서나 하늘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누리는 영생의 삶입니다. 영적인 생명 있는 자로서 날마다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함으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 사랑, 또 새 힘을 얻으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두 번째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명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고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가장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장 사랑스럽고 존귀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체로서 명품입니다.

따라하겠습니다. 나는 나 자체로서 명품입니다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생명 없는 자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봅니까? 자기 자신이 명품을 입어야 존귀한 자로 생각합니다. 좋은 집에 살아야 존귀한 자로 생각합니다. 좋은 차를 타야 존귀한 자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신발이라도 명품신발을 신어야 존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내가 많은 돈을 소유해야 존귀한 자로 생각합니다. 또 내가 어떤 지위에 올라가야 존귀한 자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없는 자의 죽은 삶입니다. 생명 없는 자의 죽은 삶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사람이 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소유 속에 자기 자신을 봅니다. 환경 속에 자기 자신을 봅니다. 그래서 나는 비참하다 아무 것도 아니라 나는 살 가치가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사람이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나는 하나님의 가장 사랑받는 존귀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자로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보배롭고 존귀한 자라고 생각하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또 영적 생명이 있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한13:14,15절에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 속에 영적 생명이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속에 영생-즉 영적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내가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삶을 산다면 내 속에 영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 속에 영적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속에 영적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도 형제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그 속에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절대 계속해서 죽도록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생명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어떤 사람을 얼마든지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미워하는 마음을 계속해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내 안에 진정으로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미워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내 안에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또 그 안에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없습니다. 또 절대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요일4:18요일4:18--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형제를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적인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공급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원수인 나를 사랑하셨듯이, 이 사랑을 매일 받는 사람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조차도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363절에서 이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3.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안에 살리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이라고 해 놓고 나만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거짓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이 세상이 천국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미워해서 죽인 세상입니다. 이 세상가운데, 심지어 교회 가운데서 미움의 영인 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를 미워하게 하고 죽이게 만듭니다.

지금 세상은 사랑과 미움의 싸움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싸움입니다. 예수의 영과 사탄의 영의 싸움입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믿는 사람들입니까?

사랑이 미움을 이길 수 있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이길 수 있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사탄을 이미 이기셨고, 또 이기실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미워하게 하는 사탄을 이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만일 나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인간적인 힘으로 사랑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안 되면 사랑의 수원지인 하나님에게 날마다 가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매일 사랑을 공급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 영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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