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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언약설교8-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창3:5)

by 금빛돌 2012. 9. 20.

 

지난 주에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 즐거운 소식 기쁨의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들어야하는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복음이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복음이란 때가차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나라는 미래에도 임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 땅에 벌써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벌써 임했음과 동시에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벌써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나라가 이 땅이 이미 왔고, 또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도 이미 임했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왔고, 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든지 확인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다스리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심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병이 치유되고, 마귀가 물러가고, 또 새로운 방언을 함으로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나라의 잔치의 풍성함과 기쁨을 맛봄으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내어버려두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이 이미 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죄와 사탄의 고통가운데 거하며, 또 말로서 서로 죽고 죽이는 삶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삶에 참된 평안과 기쁨이 없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이미 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 모든 사실이 이제 공개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하나님나라에 살게 됩니다. 또 이 땅에 이미 임하여진 하나님의 심판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지옥이라 했습니다.

지옥이 어떤 곳이라 했습니까? 지옥이란 하나님께서 영원히 내어버려두신 곳입니다. 또 지옥이란 죄로 인한 모든 고통과 사탄의 압제 아래서 있는 곳입니다. 또 서로 영원히 말로서 물고 뜯고 살아가는 곳이라 했습니다. 그래도 죽고 싶어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 또 지옥이란 평안이라고는 전혀 없고 기쁨이라고는 전혀 없는 영원히 공허하며 허무한 곳입니다.

-고린도 후서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까지는 구원받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과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더 확실히 알고 체험하여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더 널리 증거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고 말씀하실 때, 그에 앞서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때가차매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갑자기 이 땅이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는 창조 때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나라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태초에 에덴동산을 만드실 때 그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나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크게 오해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드신 에덴동산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간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두셨는가? 라고 질문을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게 되었고, 그 죄 때문에 인간의 불행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와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주장은 틀린 말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에덴동산에 왜 선악과를 두었느냐고 우리에게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합니까? 에덴동산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간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왕인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인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 인간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인간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1)비교의식과 열등감이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 만족하면 사는 나라입니다.

창세기 35절을 찾아보겠습니다. “5. 너희가 그것을(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기서 보면 선악과는 무엇을 나타냅니까? 선악과는 이 세상에 선과 악 즉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만족하며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남자로 태어났는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또 나는 얼굴이 왜 이렇게 못생겼는가? 나는 왜 이렇게 뚱뚱한가? 왜 이렇게 키가 작은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벗었지만 그들이 벗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나라가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모든 만물을 보면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분별력은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분별한다는 것과 판단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보면서 뚱뚱하구나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을 보면서 날씬하구나합니다. 그런데 뚱뚱한 것은 나쁘고, 날씬 한 것은 좋다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크니까 좋고,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으니까 나쁘다라고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분별은 하되, 인간이 자기 기준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뱀을 통해서 인간을 시험했습니다. 사탄의 시험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선악을 판단하는데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지 안을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인생과 이 세상의 주인 노릇해보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기가 기준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선악을 판단하면서 살아가게 되니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대로 만족하지 않고--남들과 서로 비교하는 의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남들보다 나아보이면 우월감을 가집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남이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면 끝없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 시기와 질투는 심지어 형제를 죽이기까지 만듭니다. 죄가 들어온 후 최초의 범죄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왜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인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고,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내 동생의 기도는 들어주시고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비교해보니 도무지 미워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제일 많이 느끼는 것이 비교의식이 많다는 것입니다. 지방은 서울만큼 크게 비교하며 살아갈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경제적인 수준도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또 교회도 작은 교회도 몇 십명이고 큰 교회도 몇 백명 단위입니다. 그런데 서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적 수입의 차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교회도 몇 십명에서 몇 십만명 까지 모이는 교회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의 의식 가운데 너무나 많이 서로 판단하고 비교하는 의식이 많습니다.

또 이런 비교의식에서 열등감이 나옵니다. 이렇게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너무 피곤합니다. 어떤 성도님에게 너무 감사하고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같이 감사하고 기뻐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 일을 두고 기뻐하고 감사하다가도 옆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감사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왜 내게는 그런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 일을 두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또 교회에 새 가족이 옵니다. 그중에 보기에 우리보다 더 똑똑하고 잘 나 보이는 사람이 들어옵니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누가 오더라도 반갑게 환영합니다. 우리교회에 참 좋은 분이 오셨다고 감사하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나보다 조금이라도 잘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을 깍아 내리려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사람이 이 교회공동체에 들어올 자리와 틈을 주지 못합니다. 이런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그 교회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교회부흥을 외쳐도 그 열등감이 극복되지 못하면 교회는 부흥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그 어떤 것을 받아도 그것을 가지고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백성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사람들과 비교하면서--자기 스스로를 메뚜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생각했던 단 한 사람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유영철과 같은 인간은 여성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무수한 여성을 이유 없이 죽이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들과 서로 비교하는 비교의식과 열등감에서 구원받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비교의식과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처음 창조 때와 같이 내 모든 삶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교의식과 열등감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가면 우리의 얼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자는 모두 장동건 얼굴이 되고, 여자는 모두 김태희 얼굴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우리의 얼굴의 원형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질병으로 인해서 손상된 얼굴은 모두 치유됩니다. 그런데 원형은 그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는 단 한 사람도 얼굴 때문에 좋다 나쁘다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가지고 남들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얼굴 그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의 얼굴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얼굴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얼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시면 같이 불러보겠습니다.

사랑의 주님이 날 사랑하시니 내 모습 이대로 받으셨네 사랑의 주님이 널 사랑하신 나도 너를 사랑하며 섬기리”.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사도바울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자책할 어떤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 때문에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부족함이 있을 때 그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악간의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다 맡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판단이 아니라 오직 충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의 삶(사역)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실패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공하라 판단해 절대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실패라고 판단해서 절대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모든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십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어떠했든 간에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날마다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선악간의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에게 칭찬과 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만족하시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또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2)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언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까?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지으신 후에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중간에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제 인간은 부족한 모든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살아가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공급해주시고 난 다음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명령을 하시며가 아님)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먹고 사는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고 공급해주시니, 먹고 살아가는 그 어떤 염려나 걱정이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나라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왔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하나님나라 밖에 있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창조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시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시는 그 하나님나라를 믿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기에 충분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그에게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너를 번성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처럼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셔서 내 삶의 모든 것을 다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시는 내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와 같이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나라의 복으로 누리시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3)결핍이 없이 풍성한 나라입니다.

원래 인간은 피조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이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풍성함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제한된 모습으로 살아가보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죄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제한 된 자원으로 살아가려함이 죄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어떻게 이야기를 합니까? 15:17b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바로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있는 집이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죄입니까? 결핍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하심과 충만하심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결핍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항상 인간의 결핍된 사랑으로 살아가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다 우리의 사랑이 항상 결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 지극히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 사랑이 지극히 풍성하신 하나님에게로부터 풍성하신 사랑을 받고 누리며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나의 결핍된 모습으로는 사랑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은혜가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가진 은혜는 항상 제한된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의 풍성함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일 안타까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사랑이 메말라 있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메말라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풍성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은혜가 풍성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한때 제가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은풍이라고 하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은풍이정말 좋은 이름입니다.

결핍은 죄입니다. 메마름도 죄입니다. 날마다 풍성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더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마지막으로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안식과 평안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기뻐하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기뻐하심으로 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123456해서 마지막 날 안식일이 아니라 123456하고 매일 매일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안식의 세계 속에 모든 인간이 동참으로 우리 인간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인간들은 이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이스라엘백성들로 안식일을 제정하셔서 안식일에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도록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주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과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삶으로 매일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하나님나라의 안식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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