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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나는 누구인가?(고전4:1-5)

by 금빛돌 2024. 12. 27.

오늘은 유치부 유초등부 주일 학교와 함께 연합예배를 드립니다. 내년에는 분기별로 연합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번에 새 가족 초청 잔치 때는 새 가족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말씀을 드렸더니 새 가족만 아니라 성도님께서 말씀을 잘 들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중고등학생에 초점을 두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저는 집에서는 아버지입니다. 교회에서는 목사님입니다. 또 중랑경찰서에서는 경목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나는 누구입니까? 친구들 내가 누구입니까?

오늘은 팀 켈러 목사님의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라는 책을 중심으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말할 때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내가 있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는 아들아, 체스 동아리에 들어가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엄마, 저는 정말 체스가 싫어요 라고 대답하면 어머니는 네가 체스를 싫어하는 것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 원서에 체스 동아리에서 활동했다고 쓰면 휠씬 도움이 되지 않겠니 라고 말하곤 합니다.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동아리에서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도심에 있는 노숙자와 굶주린 사람들에게 식사도 제공하는 것 같은데, 너도 자원봉사를 하는게 좋지 않겠니엄마, 저는 정말이지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항상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대학 지원할 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래서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온갖 종류의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일이 보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대학 원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항상 하는 일입니다고 했습니다.

친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인가를 말할 때 항상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말합니다. “너는 이것을 해, 그래야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 엄마는 항상 너를 위해서 말하는 거야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내가 누구인가 라고 말할 때 항상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나를 말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항상 내가 이렇게 하라고 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내가 왜 이것을 해야지라고 고민합니다.

또 내가 누구인가를 말할 때 이제는 내가 원하는 내가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 사전에 보면 지랄 총량의 법칙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네이버 지식 사전에 있는 글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지랄은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지랄 총량의 법칙은 사람이 살면서 평생 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다. 한동대 법대 교수 김두식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에 나오는 말이다. 김두식은 자신의 딸이 중학교 1학년이 되더니 엄마 아빠 같은 찌질이로는 살지 않겠다라고 선언하고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자 시민들을 위한 싱크탱크희망제작소의 유시주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이런 대답을 들었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평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지랄을 사춘기에 다 떨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늦바람이 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죽기 전까진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 이른바 중2병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지랄 총량의 법칙이 주목받고 있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 중2 때 지랄을 떨지 않으면 나중에 엉뚱한 방향으로 분출될 수 있다는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그나마 학부모들을 위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학부모는 그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때 이 난리를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저러는 게 낫다고 위안할 뿐이라고 말했다 고 합니다.

그래서 중2 사춘기의 학생들은 말합니다. 난 엄마가 아니야, 나는 나야, 나는 누구도 아니야,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할거야라고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그때 그때마다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떨 때는 내가 컴퓨터 게임을 잘하니까 컴퓨터 게임을 하는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떨 때는 내가 요리하는 일을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누구인가 라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내가 있습니다.

또 내가 말하는 내가 있습니다.

보통 나이가 있는 세대들은 내가 누구인가 라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나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더 좋은 직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내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 나를 말하면 이 사람은 항상 누구의 판단, 누구의 평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까?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평가할까? 라고 하는 일에 신경을 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내가 나를 보는 관점에서 말하면 이 사람은 항상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내가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만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판단하면 그 사람은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는 우울감입니다.

내가 남들과 비교했을 때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니 항상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관점에서만 살아가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평생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만일 내가 나를 보는 관점에서만 살아가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절대 자기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과연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까? 그래서 평생 그 사람들의 눈치만을 보면서 살아가야 합니까?

아니면 오직 내가 나를 보는 관점에서 살아가야 합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고 오직 나만 좋으면 된다고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까?

여러분 만일 나를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나는 누구의 것입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의 것입니다. 또 만일 나를 내가 보는 관점에서만 살아간다면 나는 누구의 것입니까? 나는 나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알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내가 나를 보는 관점에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내가 누구인가를 말할 때 단순히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여러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나를 보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는 관점을 따라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첫째,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씀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길지어다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그리스도의 것,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 보면 나는 누구의 것입니까? 나는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엄마의 것도 아니고 아빠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나의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내가 하나님의 것입니까?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즉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구속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값을 지불해서 노예된 상태에서 구출하였다는 말입니다. 친구들 따라서 보기 바랍니다. 구속은 값을 지불하여 노예 된 상태에서 구출함이다”.

옛날에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 노예를 시장에서 사고팔기도 했습니다. 노예를 살 때 지불하는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노예를 돈을 지불해서 값을 주고 사면 그 노예는 누구의 것입니까? 값을 지불하여 산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여러분들 원래 우리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 또 우리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이 세상과 사탄의 종 되었던 곳에서 구출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구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는 무엇입니까? 속전(贖錢)입니다.

여러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것이 된 우리를 피 값으로 사셔서 구출하기 위함입니다.

사탄의 것이 된 우리를 피 값으로 사셔서 구출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이 세상의 것이었고 사탄의 것이었던 우리를 사셔서 이제 우리가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것도 아닙니다. 나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5:9--(십자가에서)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세상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우리들을) (예수님의) 피로 (값을 지불하여)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우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사셔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나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일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매우 작은 일라는 말을 공동 번역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여러분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우리는 항상 누구의 판단을 받으며 살아야합니까?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든지 마음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3절 하반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나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면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면 교만합니다. 또 내가 못했다고 생각하면 우울합니다. 그런데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해도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내가 (나를 판단할 때)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자신이 자신을 판단할 때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의롭다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 우리를 판단하십니까? 지금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하나님)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종말)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판단)이 있으리라

주님이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는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볼 때 너는 실패자라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감추어진 뜻을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은 판단하는 것에 마음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자신도 자신을 너무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종말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판단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2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가 할 일은 충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이 이제 정말 하나님의 것입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마음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다 맡기시고, 오직 현실에 최선을 대해서 오직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혹 이 그림에 나오는 친구처럼 17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친구가 왜 17살 밖에 되지 않는데 이번 생은 망했다고 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였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였다면 넌 아직 난 몰라봤어라고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면 더 열심히 하면 되라고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나이가 드신 성도님들도 내 인생은 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안나는 99살까지 건강하게 성전에서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닙니다. 나는 나의 것도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끝이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이것이 내 운명이라고 하며 살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운명이 무언인가를 알기 위해서 무당에게 찾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둘째, 나는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세굴라-특별한 보물)가 되겠고

여기서 소유란 세굴라라는 말로서 특별한 보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이 보시기에 왜 우리가 특별한 보물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별로 값어치 없이 보이는 물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물건을 100억을 주고 샀다고 생각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물건은 얼마짜리입니까? 100억짜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가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짜리입니까? 예수님 짜리입니다. 짜리란 말을 사전에 찾아보면 돈을 세는 단위 명사에 붙어, 그만한 값을 가진 물건의 뜻을 더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얼마만한 값어치가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값어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뭐라고 하면 나는 예수님짜리다고 해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친구들 만일 여기서 100억짜리 금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금화가 약간 그을려 있습니다. 그러면 이 금화는 얼마의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이 금화가 그슬려 있어도 여전히 100억의 값어치가 있습니다.

스가랴 3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예수님)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예수님 앞에 서 있는데, 사탄은 여호수아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합니다. 여기서 오른쪽에 서서라는 말은 약간 높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마치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높은 곳에서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죄인이야, 너는 못났어, 너는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사탄이 대적합니까?

33절에 보면 3:3.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이라도 해도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3: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정죄하고 있는 사탄에게 너를 책망하노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는 불에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비록 더러운 옷을 입고 있지만 불에 그슬린 나무가 아니랴 고 말씀하십니다.

미국 엄마와 한국 엄마는 다르다고 합니다. 아이가 그릇을 깨뜨렸습니다. 이때 한국 엄마는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래 모두 다 깨지, 공부도 못하는 놈이 그릇까지 깨냐 방구석에 들어가 공부나 해 라고 한다 합니다.

그런데 미국 엄마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 괜찮니 혹시 다치지 않았어 괜찮아 그릇은 다시 사면 되 라고 하면서 아이를 안아주면서 아이야 사랑한다라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보물과 같지만, 우리의 옷이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약간 그슬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불에서 그슬린 금화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비방하고 낙심하게 하는 세상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너 혹시 괜찮니 다치지 않았어 넘어졌어도 그래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야 딸이야 너는 내가 보기에 내 보물이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셋째,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올라오실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러면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을 누구에게 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구원의 주님을 믿는 나에게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우리를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까? 우리를 보실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앞으로 친구들이 평생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평생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날 사랑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 합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누가 나에게 무엇이라도 해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시는 친구들, 또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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