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새로운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시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님 지금 우리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며 슬퍼하며 애통하고 있는데,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도 않고, 애통하지도 않고, 왜 그렇게 먹고 마시며, 즐겁고 기쁘게 살아 가고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지금 이 시대는 신랑이 와서 기쁘게 잔치할 때이다. 그러니 어떻게 금식하며 슬퍼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가 있는데, 그때 금식하며 슬퍼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또 잔치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잔치집과 같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애통하며 슬퍼할 수 없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단순히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처음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이미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온 증거로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백부장 종의 병을 고쳐주시고,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문둥병자이고, 또 베드로라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문둥병에 시달려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내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슬퍼해야겠습니까? 아니면 기뻐해야겠습니다.
또 내 가족 중에 죽을병이 걸렸는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낫게 해주셨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마태복음 초두를 보면 모든 질병과 고통으로 시달리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치유되어지고, 그래서 참 기쁨을 회복하는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현상을 예수님은 “지금은 신랑이 와서 잔치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복음이란 무슨 말입니까? 복음이란 복되고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장차 올 하나님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를 현재 이 땅 가운데 미리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 가운데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의 나라입니다(로마서15장).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히 맛보게 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오직 주님과 동행함으로 말할 수 없는 희락의 기쁨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나라의 희락의 기쁨을 ,또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강의 축복을 미리 우리가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그 하나님 나라는 모든 질병이 치유되어지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의 권세가 물러가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이런 것을 완전히 누리게 되지만, 이 땅 가운데서도 미리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를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바로 잔치 집입니다. 잔치 집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배가 부릅니다. 그래서 잔치 집은 항상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땅에 벌써 왔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비록 우리가 이 세상 나라에 살지만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란 무슨 말입니까?
박영돈 교수님은 “교회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땅 가운데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체험하여, 이 땅 가운데 그 나라를 나타내주고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년에 표어도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입니다(눅17).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온다는 것은 매주 잔치 집에 오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울하고 슬프고 힘든 모든 짐 보따리를 주님께 맡겨버리고,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축제와 감격의 예배를 드리고, 또 여러 성도와 함께 기쁨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새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의 기쁨의 잔치를 벌리는 때이기 때문에 애통하며 슬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또 교회 생활하는 것이 이렇게 항상 잔치 집과 같이 기쁘고 즐겁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렇게 마냥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송만 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충격적인 일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가정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삶을 보십시오. imf때보다 더 어렵고 힘이 든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내 년이 무조건 즐겁고 기쁘고 희망차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십니까? 어떤 사람은 막연한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경제적인 위기에 대한 걱정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개인 각자의 삶을 보았을 때—마냥 기뻐하고만 살 수 없는 현실을 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보고 기도하면, 너무 좋고 기쁘다. 그런데 그렇게 좋다가도 금방-- 현실로 돌아오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로 시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아래를 보면 이런 현실을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9: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이 말씀을 하실 때에”란 “지금은 너희가 슬퍼할 때가 아니라 나와 함께 기뻐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하실 때에 예수님에게 무슨 소식이 들렸습니까?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는 것은 그 딸의 아버지에게는 정말 엄청난 슬픔과 고통의 현실입니다.
이런데도 과연 복음의 새 시대가 되었다고 마냥 기뻐할 수 있습니까?
또 죽은 딸을 살리시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누구를 만났습니까?
12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12년씩이나 피가 멈추지 않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그 병 때문에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완전히 절망 중에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과연 하나님 나라가 왔고, 새 시대가 왔다고 기뻐하고만 살 수 있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기독교는 아편이다, 현실에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게 하는 아편과 같다" 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이 말이 맞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믿음이 없이 그냥 인간적인 눈으로 절망적인 두 사람의 상황만을 바라본다면 기독교는 아편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이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도무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주님과 함께 천국 잔치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이 두 사람은 신앙으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남으로 그 절망의 한계상황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절망의 상황을 극복하고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믿음입니다.
한 관리는 그의 딸이 죽었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만일 그 관리가 믿음을 가지지 않고 그냥 절망하면서 자포자기 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왔고, 믿음으로 절망의 상황을 기쁨으로 바꾸었습니다.
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얼마든지 낙심하고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옷 가라도 만지면 낫는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들의 믿음이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죽은 자가 낫는다는 믿음, 옷 가라도 만지면 낫는다는 이들의 믿음은 과거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창조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또 이들의 믿음은 아주 적극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소극적으로 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님께 찾아가 낫게 해달라고 간청한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에게도 이런 새 시대에 맞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복음의 새 시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벌써 베풀어졌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것을 누리고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새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옛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 곁에 왔지만 누리지 못하고 옛 시대의 사고방식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인간의 율법으로 구원받아 보려고 애쓰며 고통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의를 쌓기 위해 금식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새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천국 복음의 참된 능력과 기쁨을 체험해 보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도무지 신나지 않고 기쁘지 않습니다. 억지로 교회에 나오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적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복음의 시대에 합당한 창조적 믿음, 적극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 부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가진 옛 시대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가 뭐래도 절대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안돼, 절대 안돼, 그 사람은 안돼 절대 변화될 수 없어, 내 아이는 안돼 내가 몇 십년이나 지켜봤는데 절대 변화되지 않을거야—난 그것을 한 번도 경험하거나 체험해 보지 않았어 그러니까 절대 그런 기적은 없을거야/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운명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슬퍼게 비참하게 살도록 운명지워졌다-난 불행한 여인이야--그러니 나는 내 운명에 순응하여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시대에 합당한 새로운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백부장처럼 내가 과거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이 얼마든지 말씀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또 우리는 문둥병자처럼 비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할 수 없지만--주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내가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관리처럼 보기에 도무지 불가능한 일들이지만 주님 앞에 나오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또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12년 동안 그렇게 피곤하고 낙심하고 지쳐있지만, 절대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올 수 있는 믿음입니다.
또 소경 바디메오처럼 주위의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결코 기죽지 않고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더욱 간절히 주님께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친구가 중풍 병에 걸려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뜯어서라도 그 친구를 주님께 인도할 수 있는 이런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전에 한 번도 겅험해 보지 않았던 것들도 주님이 함께하시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아무리 사탄과 음부의 권세가 아무리 세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새 시대에 필요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복음의 새로운 시대에 맞게 우리의 믿음의 그릇도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제 복음의 새로운 시대가 되었기에 우리는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되 복음을 담아내는 형식은 얼마든지 바뀌어야 합니다.
이번에 미래 포럼을 통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2050년이 되면 교인 수가 500만이나 300만까지 감소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25년 뒤에는 많은 교회들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 지금은 저출산 고령화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에서 노년목회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노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년이라는 말대신에 완청이라는 말을 쓰라고 합니다. 완숙한 청연이라는 말입니다. 또 노년대신에 나이듦이라는 말을 쓰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노인대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드신 분들이 역동적으로 교회생활을 하게 하라고 합니다.
또 코로나 때 30,40세대가 거의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30,40세대들이 몰리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또 저출산으로 앞으로 아이들이 교회에서 더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큐티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말씀을 변하지 않습니다. 대신 말씀이 생활화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말씀을 듣는 것보다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전교인 큐티 또는 성경묵상이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둘째, 소그룹을 강화해야합니다.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것은 소그룹 모임입니다. 그래서 오후 예배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오후 시간을 전교인 소그룹 시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소그룹을 통해서 큐티한 것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모임을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아이들은 연령 별로 교육프로그램을 가지려고 합니다.
셋째, 전도의 생활화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은 것은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제 전도가 전도주일의 행사가 아니라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새 술은 변하지 않는 복음이고 말씀입니다. 새 부대는 복음과 말씀을 담는 형식입니다. 복음과 말씀은 변하지 않되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은 얼마든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20년 30년 뒤에도 우리 교회 다음 세대가 우리보다 더 많이 활발하게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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