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도 계속해서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 나옵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땅에 시는 인생이란 에노스라는 말입니다. 에노스란 말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4장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합니다. 여기서 에노스란 이름의 뜻은 ‘사람’ (6:4 ; 겔 9:2), 또는 ‘남자’ (13 :8)를 나타낼 때 쓰였습니다. 또 에노스는 흙이란 뜻도 있습니다. 특별히 이 에노스란 성경에서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병든 상태에 있은 인간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렘 15: 18 ; 미 1 :9) 또 재난을 당하거나(렘 17 :16),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사17:11 욥7:1).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셋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치료가 불가능한 인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재난가운데 있는 인간, 슬픔과 고통가운데 있는 인간이란 뜻에서 에노스라 할 때 그때부터 비로소 처음으로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시면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능자라는 뜻을 가진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창 2장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셔서 그가 고통 중에서 부르짖을 때 들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렘33:3).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의 자녀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을 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누가 뱀의 후손입니까?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하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가 없다고 자가 뱀의 후손입니다.
/그러면 누가 여자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내가 흙에서 나온 연약한 사람인 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 이 땅의 삶이라는 것이 고통이요 수고요 슬픔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내가 인간으로 연약하고 부족함을 알기에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살아오시면서 수많은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도 그것으로는 정말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적인 절망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모든 눈물과 고통들이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고난이 있습니까? 창 3장15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습니까? 여자의 후손인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난은 필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고난과 고통을 피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고난을 피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에노스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나가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이 땅에 사는 (고난이 필수인)인생(에노스)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이 땅에 사는 고난이 필수인 에노스와 같은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힘든 노동이란 우리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노동이란 군에서 의무적으로 복역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욥은 말합니다.
“인생이란 결국 고난이 아니냐, 고난이 있어야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느냐, 그러니까 고난은 필수다. 고난은 군 복무하는 것과 같이 의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은 말합니다.
“인생이란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합니다.
품군이 무엇입니까?
품군은 열심히 일하고 일에 대한 보상으로 삯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품꾼이 제일 기다리는 것은 삯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낮에 일하는 종은 밤에 쉬는 그늘을 몹시 바라고, 일하는 품꾼은 삯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아무리 수고해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제일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낮에 힘들게 일하면 밤에 쉴 수 있구나, 내가 이렇게 수고했으면 보상이 있겠구나” 라고 히는 희망이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은 어떻습니까?
욥은 밤에도 쉬지 못합니다.
그래서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욥은 그 고난이 끝이 없습니다. 종은 낮에 일을 하다가 밤에 쉽니다. 그런데 욥은 밤에 잠도 잘 자지 못합니다. 또 품꾼은 일을 하면 보상으로 삯을 받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고난 뒤에 어떤 보상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여러분 지금 욥이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피부병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희망이 없습니다.
품꾼은 일하고 나면 삯을 받는 희망이 있는데 욥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들이 베틀의 북처럼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그런데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욥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7절에서는 욥의 기도가 나옵니다. 항상 시편들을 보면 처음에는 탄식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도 탄식만 하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탄식이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7.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이것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7. (하나님이여) 잊지 마십시오. 이 목숨은 한낱 입김일 뿐입니다. 이 눈이 어찌 다시 좋은 일을 보겠습니까?(공동번역)
하나님이여 이 목숨은 한낱 입김하며 바람뿐입니다. 하나님이여 이제 내 눈이 어찌 이 땅에서 좋은 일을 보겠습니까? 내 인생에는 더 이상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나를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보면 정말 욥에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고 보니까 오늘 본문 17절과 18절을 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욥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여러분 앞에서 욥이 희망을 가지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인생의 고난을 필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희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고난 가운데 그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발견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욥은 어떻게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까?
17절과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7.사람(에노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도 앞에 인생이라는 말과 같은 에노스라는 말입니다.
앞에서 에노스와 같은 인생은 고난은 필수고 의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시고 마음이 두고 계십니까? 라고 합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에서는 17. 사람이 무엇인데, 당신께서는 그를 대단히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그에게 신경을 쓰십니까?(공동번역)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더 크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그에게 마음을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를 신경 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난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찮게 생각하시는 사람에게는 고난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난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신경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난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대단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마음에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신경 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고난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첫째, 고난은 우리를 더 크게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17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7.사람(에노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더 크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큰 사람이 되기 싫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기 싫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내게 고난을 주지 마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이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너로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고난을 허락했어”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도 어떻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까? 그 비결은 육체의 가시 때문입니다.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여러분 사도바울의 모든 능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에게 있는 그 모든 능력이 어떻게 사도바울에게 임하였습니까?
육체의 가시로 인한 고난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는 내가 고난 때문에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고난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그 모든 고난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고난은 우리를 다 단단하게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단련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더 단단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고 합니다.
여러분 고난은 절대 우리를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로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마시기 하나님 안에서 더 단단해 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시34편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마음이 상한 자를 더 가까이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고난이 무엇입니까?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저 멀리서만 들립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머리로만 들립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체험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 우리에게 더 크게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s루이스는 고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없을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작게 들립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으면 우리를 향하신 더 크게 들립니다.
그래서 본문 19절에서 19. 주께서 (고난을 통해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난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고난에는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습니다.
우리를 더 큰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를 다 단단하게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단단 해 지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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