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1절에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바리새인하면 아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대사회에서 바리새인하면 굉장한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종교적으로 세파가 있었습니다. 한파는 엣센파이고 또한파는 사두개파이고, 또한파가 바로 바리새파입니다. 엣센파는 요즈음식으로 말하면 신비주의자들, 혹은 세상을 등지고 사는 도피주의자들입니다. 또 사두개파는 내세와 천국을 부정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자유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파는 구약의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당시로 보면 제일 건전하고 정통적으로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입니다. 또 그는 1절에 보면 산헤드린 공의회회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쯤 되는 사람들입니다. 또 10절에 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유대인의 랍비라고 합니다. 랍비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교수 중에서도 제일 덕망과 지혜가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그가 본문 2절에 보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무언가 남들의 눈에 뛰지 않고 예수님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 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온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 여기서 그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이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행하시는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의 바리새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참 놀라운 말입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당시의 유대교를 위협하고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인정하면 그를 유대사회에서 쫒아버리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예수님이 좋은 말씀을 하시고, 큰 능력을 행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니고데모는 일반적인 바리새인과는 달리 예수님을 하나님께로 온 선생으로 인정해주었고, 또 그의 표적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참 양심이 있고, 양식이 있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이 말은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니고데모야 네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표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너는 아직 너 자신을 모르고 있다. 지금 너는 아직 거듭나지도 않았어, 구원받지도 않았어, 그래서 네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표적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너는 먼저 거듭나 야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와야 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3-7).
--이와같이 니고데모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입니까? 그는 당시 유대교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그런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거듭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7절에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니고데모처럼 정말 내가 거듭났는가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어릴 때부터 습관적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의 행사, 일 등 교회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고, 안 해 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 일에는 전문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 중에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몇 십년 동안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목사님은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가운데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자주 거듭남에 대해서 설교를 해야한다고 합니다. .
--만일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어보셨던 것처럼 내가 과연 거듭났는가? 내가 과연 구원받았는가? 내가 과연 하나님나라에 들어왔는가?를 살펴보시고, 자신에게 물어보아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점검하지 않고 평생 교회를 다니면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섰을 때 “너는 거듭나지 않고 구원받지도 않고 그냥 교회 다녔구나 너는 천국갈 수 없어 나는 너를 모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거듭나지 않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교회의 중요한 일을 맡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한 번도 은혜받는 자리에 있지 않고, 계속해서 밖에서 일만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언젠가는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또 나중에는 신앙생활에 아무 의미가 없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태신앙에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모태신앙으로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신앙은 참 흔들리지 않는 깊이가 있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모태신앙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생활이 지옥과 같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가 자녀들이 거듭났는지를 점검해봐야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정말 우리 자녀들이 영적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해야합니다.
거듭남이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나이가 어리지만 어릴 때부터 거듭난 아이는 참으로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아무리 들고 신앙생활을 수십 년을 해도 거듭남을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거듭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거듭남이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신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거듭난 자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 자가 거듭난 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에 대해서 유대인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어떻게 말합니까?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마치 다시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도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불교를 믿었던 분들은 거듭남이란 환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은 비천한 인간인데, 다시 태어나면 고귀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듭남이란 우리 육신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우리 영혼이 영적으로 다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어떤 행동이 바뀌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단순히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게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났다는 말은 “우리 영혼의 근본적인 중심, 또는 성향이 거듭났다, 또는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영혼의 중심이 어떻게 다시 태어난 것이 거듭났다는 말입니까?
1)거듭난 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입니다. 요일5장1절을 보겠습니다. “요일5:1.예수께서 그리스도(구원자)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거듭난자니) --” 거듭난 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나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철저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거듭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헬라어의 시제를 보면 믿는다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거듭난 자들)이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면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혈통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정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거듭난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좋은 선생 또는 좋은 사람으로는 인정을 합니다. 또 예수님이 행하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착한 일들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라, 그가 나의 유일한 구원자다, 그가 나의 주님이시다 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듭났다는 말은 가장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믿겨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외부적인 강요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진심으로 예수님이 진정한,,,나의 구원자이시며,,,내 삶의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좋아하십니까? 사랑하십니까?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내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또 거듭난 자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자입니다.
요일3장 9절에서 “요일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거듭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거듭났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는 분명히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있다. 그런데 나는 끊임없이 내 마음으로 죄를 짓고 있다. 그러면 나는 거듭나지 않은 자인가” 라고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 일서 1장8절에 “만일 (거듭난)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제일 먼저 우리 양심이 증거합니다. 또 우리 속에 있는 진리의 말씀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듭난 자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을 거듭난 자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마음으로 미워하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자는 그렇게 마음에 남을 미워하는 죄를 짓다가도 반드시 그 죄를 회개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요일1장 8절과 10절에서는 분명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8절과 10절 사이에 9절에서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만 반드시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회개를 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왜 회개기도를 합니까? 대표기도하시는 분들도 왜 항상 회개기도를 먼저 합니까? 우리가 거듭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자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항상 죄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거듭난 자는 그 죄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 무엇보다 거듭난 자는 죄에 대해서 반드시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키려고 힘을 다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죄에 대해서 넘어졌는데, 이제 끊임없이 돌이키고 회개함으로 그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는 자가 거듭난 자입니다.
또 거듭난 자는 의를 행하는 자입니다. 요한일서 2장 29절에 “요일2:29.너희가 그(하나님)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하나님)에게서 난 줄(거듭난 줄)을 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의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로운 분인 줄 알아 의를 행하는 자마다 거듭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의란 항상 파당에 따른 의입니다 즉 자신의 파당이면 무조건 옳고 상대 파는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세상의 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누구편에 따란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한 의입니다. 또 세상이 말하는 의는 자기 기준에서 옳은 의입니다. 그래서 내 개인의 기준에 옳다고 하면 의이고, 내 기준에서 잘못되었다고 하면 불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사시대의 의입니다. 사사시대에는 자기가 옳다 생각하는 것을 의로 생각하고 자기 개인적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의는 공의입니다. 공의란 내 기준에 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볼 때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공적인 의를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불의가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사람들이 말하는 상대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또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우리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편이고, 의의 편입니다. 그리고 공의가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은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자입니다.
또 거듭난 자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에서도 우리가 만일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면 그 사람 속에는 영생이 없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형제를 미워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거듭난 자가 아닌가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형제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 형제를 끊임없이 계속해서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계속해서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다시 출생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미워하는 것이 쉽습니까? 우리들은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구원받았고, 거듭났습니까? 그렇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한일서에 의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거듭난 증거로 형제를 사랑하는 증거가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구원파에서는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몇 날 며칠에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구원파는 이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거듭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고 난 후 낙엽이 날리고 먼지가 일어나면 그것을 통해서 바람이 불었구나 라고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거듭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수없는 말씀을 듣습니다.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내가 완전히 거듭난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같은)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또 벧전 1장 23절에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시면 우리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기만 하면 무조건 거듭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성경공부만 하며 거듭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지식적으로 공부하고 깨닫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파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관한 지식을 공부하고 깨닫고 알기만 하고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던 한 편 강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두 강도는 말씀이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한 편 강도만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왜 한 편 강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가까이 보고도 못했습니까? 그 이유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말씀을 들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사람이 거듭날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가 절대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특별히 복음에 관한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여 믿을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합니다.
스펄전은 영국의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부흥사요 설교가. 그는 할아버지가 목사여서 여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는데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어느날 눈이 많이 와서 가까운 작은 교회로갔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목사님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구두수선공인 어떤 집사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5분하고 나니까 그분 설교재료가 다 떨어졌습니다. 그때 스펄절은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저런 초라한 구두수선공이 설교를 한단 말인가? 그런데 갑자기 그 구두수선공이 젊은 스펄전을 보더니만 만일 청년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평생을 가련하게 살것이요, 또 죽어서도 가련하게 살것입니다--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청년이여!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지금 바라보십시오." 이 소리는 마치 전광석화와 같이 그의 가슴을 때렸습니다-사실 예수님에 관한 말씀은 스펄전이 다 알고 있었습다-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영의 눈이 밝아 이제 형식적인 종교생활이 아니라--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남을 경험했습니다-그날 이후로 목사가 되어 가장 영 국역사상 가장 큰 부흥을 일으킨 인물이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체험 때문에 스펄전목사님이 가장 많이하는 설교가 복음에 관한 설교고,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이 거듭남이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설교자가 위대했기때문이 아닙니다-성령의 역사로 가능했습니다-어떤 청년은 새가족예배에 나와서 1년을 복음을 듣고 울었습니다-왜냐고 물었습니다-목사님 도무지 예수님이 믿겨지지가 않아요 라는 것이었습니다-그떄 제가 말했습니다-계속 들어보십시오-그러면 어느 순간 믿게된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그 후 그 청년은 지금 너무 잘믿고, 완전히 변화되고 거듭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중에서 만일 아직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 없으신 복음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 가운데 새로운 생명이 생깁니다.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내 삶의 모든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과 열망이 생깁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몇날 며칠에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내가 몇날 며칠에 어떻게 거듭났는가를 정확하게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지나가면 우리가 분명 그 바람이 지나간 흔적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여 우리 속에 우리가 분명 거듭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와 같은 우리에게도 성령을 통한 거듭남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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