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곳과 기독교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곳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기독교문화가 발달한 곳에는 항상 무덤을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구 유럽에는 무덤이 동네 가까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건물 안에 무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같이 기독교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곳에는 무덤을 가까이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곳에는 무덤을 가까이 둡니까? 살아가면서도 항상 죽음을 생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절대 삶을 가볍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도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곳에는 죽음을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고 하는 죽음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정현채 교수님은 본격적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고 하는 죽음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 교인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죽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이 땅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죽음을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만일 죽음이후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됩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 세상이 있습니다. 또 죽음 이후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항상 생각하면 우리는 한 순간도 가볍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또 왜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이 죽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인가 하면 죽음이란 우리가 그 동안 살아온 삶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한 평생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성도님들을 보면 돌아가실 때 그 얼굴이 너무 평온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한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평온하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합니까? 마지막 죽을 때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죽어야겠습니까? 우리가 기본적으로 마지막 죽을 때 병들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단순히 육신적으로 병들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을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인간적으로 보면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누가 스데반의 죽음을 단순히 고통스러운 죽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육신적으로는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히 고통스러운 죽음이라고 하겠습니까?
스데반의 죽음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죽음도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또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1. 첫째, 스데반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 대부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데반은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 죽을 때까지 젊은 사람들에게 직분을 내 놓지 않고 끝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직분을 가지고 일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되면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분에서 은퇴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직분에서 은퇴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진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직분에서 은퇴를 하면 우리는 진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은퇴를 하고도 눈에 보이는 교회 일을 다시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 죽을 때까지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까?
요6장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면 “요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6장 29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예수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유대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일이 너희가 할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합니까? 우리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일을 하다가 죽어야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엇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할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를 하시고 찾아온 목사님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십시오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죽을 때 어떤 모습을 하고 죽어야합니까?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믿는 일을 하다가 죽어야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젊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또 자녀들도 어려움이 있을 때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연세 드신 분들에게 물어봅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했을 때 어떻게 말씀을 해 주어야합니까?
내가 평생을 살아보니 나도 그런 일을 수없이 격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그것 아무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다 맡기고 사니 예수님께서 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셨다. 그러니 사랑하는 내 아들이 사랑하는 내 딸이 사랑하는 집사야 사랑하는 성도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겨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실 것이다 고 말씀을 해주어야합니다.
이번에 어머니를 만나고 왔는데, 어떤 친척분이 전화를 하는데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야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다. 예수 잘 믿는 것이 최고다. 그리고 누가 예수 잘 믿는다고 하니까 내가 너무 기쁘다. 예수 잘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분들은 그렇게 잘 믿으시다가 마지막 죽을 때 믿음이 흔들리는 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죽을 때 어떻게 죽어야겠습니까? 끝까지 예수님을 잘 믿는 일을 하다가 죽어야겠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잘 믿다가 주님께로 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스데반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2.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게 죽었습니다. 54절과 55절을 보겠습니다.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면 회개를 해야하는데 이를 갑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때 스데반이 어떻게 하여 죽었습니까?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죽었습니다.
마지막 죽을 때 모습은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결론입니다. 한 평생 성령 충만하지 않다가 죽을 때 성령 충만 할 수 없습니다. 한 평생 성령 충만으로 살면 그 사람은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죽었다는 것은 그동안 스데반의 삶이 성령 충만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살면서 어떻게 성령 충만했습니까?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습니다. 또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죽을 때만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오면서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죽을 때도 성령이 충만하여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성령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바울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말하고 난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니까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내 안에 내가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성령하나님만 계시는 것이 성령 충만 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스데반이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로 쳤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스데반 안에는 더 이상 스데반이 없습니다. 그 안에는 오직 성령 하나님으로만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돌이 날라 와도 그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성령 충만함으로 마지막 죽을 때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그 얼굴이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행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죽을 때 어떻게 죽기를 기도해야합니까?
하나님 내가 마지막 죽을 때 스데반과 같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얼굴은 얼 꼴에서 나왔습니다. 얼이란 그 사람의 정신을 뜻합니다. 또 정신이란 영혼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꼴은 무엇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정신을 담은 그릇입니다. 또 그 사람의 영혼을 담은 그릇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 보입니다. 그 사람의 정신이 보입니다. 또 그 사람의 영혼이 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내가 지금 과연 내 안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 얼굴 속에 그 동안 살아왔던 삶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비록 우리의 얼굴에 주름이 있지만 우리의 얼굴이 마지막 죽을 때 천사와 얼굴과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데반과 같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 안에 내가 없고, 오직 내 안에 성령으로만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천사의 얼굴로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스데반은 마지막 죽을 때 예수님을 보고 죽었습니다. 5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은 죽을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서 계셨습니까? 이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스데반의 영혼을 맞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도 고통당하는 스데반을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서서 계셨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스데반이 마지막 죽을 때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스데반에 그동안 어떻게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스데반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듣지 않는 유대인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또 그에게 날아오는 돌도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하늘에 서서 계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우리도 마지막 죽을 때 하늘의 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겨주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살아 있을 때도 사람만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환경만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 죽을 때도 하늘의 문이 열리고 우리를 반겨주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님께서 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스데반은 예수님의 모습을 하고 죽었습니다. 59절과 6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죽으실 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고 하시고 하시고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데반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돌아가실 때 “노회 원들 중에서 어떤 분은 오시지 말고, 어떤 분은 오실 수 있다고 유언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대전에서 큰 교회를 목회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그 목사님의 마지막 모습이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그분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전에서 간사 사역을 하시는 분들은 모두 그분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도 모든 사람들을 다 용서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과연 그 목사님이 예수님 앞에 서서 어떻게 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큰 교회를 목회하셨다고 해서 그 목사님이 예수님에게 칭찬을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과연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단순히 큰 교회를 이루는 모습입니까? 또 큰 업적을 남기는 모습이겠습니까?
스데반을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베드로와 같이 설교를 해서 하루에 몇 천 명씩 돌아오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스데반이 실패한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스데반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또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의 모습이 가장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행1장 8절에 성령이 임하시며 능력을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증인이란 입술만 아니라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증인이란 순교자입니다. 그러니까 입술만 아니라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죽는 자가 증인입니다. 그러니까 이 스데반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가장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스데반이 이렇게 죽었지만 죽음으로 끝이 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왜 본문에서 스데반을 죽이는데, 사울이 앞 장 선 사람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스데반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나중에 바울을 탄생시키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절대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스데반과 같이 죽더라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스데반의 순교로 율법사인 가말리엘이 돌아왔다는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에 있는 스데반의 순교교회에는 스데반의 순교로 예수님에게로 돌아온 율법사 가말리엘의 그림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는 이후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순교를 할 때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순교자가 죽으면서 했던 기도가 있습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더욱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 낼 것입니다.
나를 때리십시오.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죽어야합니까? 오 주님 내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합니다. 오 주님 그러하오니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그래서 마지막 죽는 순간 오직 가장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주님께 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국 이런 모습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합니다.
또 오직 성령 충만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나는 없고 오직 예수님으로만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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