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3-45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쉴 곳 구합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쉴 곳을 얻지 못하여 다시 자신이 나갔던 사람에게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의 집에 비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그 사람에게 들어와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형편에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물론 이스라엘을 두고 한 말씀이지만, 우리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 마음 속에 마귀가 지배하고 점령해 있습니다. 그래서 엡2장에도 "그때에 너희가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를 쫓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니 이제 마귀가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물러간 우리 마음의 자리가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 우리에게 더 악한 마귀가 우리를 점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형편에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더 좋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경우를 보신 적이 있습니다. 한때 예수를 잘 믿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교회를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좋지 않게 된 사람의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초신자인데 강남에 있는 다른 교회를 등록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거리가 멀어서 한 번씩 기도회만 나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우리교회로 등록하신다고 해서 심방을 간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정말 매일 귀신에게 시달리시는 분이었습니다. 정말 귀신이 그 몸속에 들어오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믿지 않는 친구는 무당을 찾아가라고 그 분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우리교회 기도회에 와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등록한 교회 성도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자가 왔는데, 결국 무당을 찾아갔으니 더 이상 연락을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되어야합니까? 우리 안에 마귀가 물러간 것만 가지고는 만족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마음의 빈자리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져야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 져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비워있는 마음으로 죄와 사탄이 틈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다가도 얼마든지 더 좋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사도바울의 기도의 결론이 바로 이것입니다.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 져야하는 이유는 충만해져 있지 않으면 그 틈으로 마귀가 틈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충만해져야하는 이유가 이런 부정적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가 어떤 곳인가를 생각하면 충만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야합니다. 또 교회는 그리스도로 충만해야합니다.또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합니다. 또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충만해야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져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져야 이 땅에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축복된 통로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바울은 교회가 모든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먼저 14,15절입니다.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먼저 여기서 보면 바울은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늘과 땅의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란 하늘의 영적 세계와 땅의 모든 세계에서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지금 이 세상의 모든 권세자들의 권세는 누구에게서 나왔습니까? 국민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바울은 누구에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어떤 자세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릎을 꿇는 다는 말은 실제로 무릎을 꿇는 것도 되고, 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이 이렇게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그 빈틈으로 마귀가 틈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충만하신 복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교회와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충만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지금 무엇을 충만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첫째, 사도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여기서 보면 사도바울은 무엇을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속사람입니다. 우리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속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우리 안에 겉 사람이 있고, 속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겉 사람은 육신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겉 사람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질그릇과 같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 겉 사람은 점점 나이가 들면 늘고 병들어 쇠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육신의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하고 쇠약하나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육신의 겉 사람이 나이가 들고, 쇠약해지고, 심지어 병에 드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겉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 육신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내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롭도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낡아지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래서 연세드신 성도님들 절대 여러분 육신의 겉 사람이 쇠약해지는 것에 대해서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겉 사람은 쇠약해 지지말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롭고 강건케 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겉 사람은 쇠약해지지만 우리 속 사람이 강건해 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첫째, 속 사람이 강건해지면 절대 상황과 환경에 얽메이지 않습니다. 속 사람이 강건한 사람은 아무리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또 속 사람이 강건해 지면 이 세상 속에 살지만 이 땅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맛보며 살아갈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겉 사람이 강해지면 자꾸 세상나라가 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화려함과 영광을 쫓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강건해지면 이 세상보다는 이 땅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가 보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38장을 불러보겠습니다.
(1)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후렴: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2)주의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후렴: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3)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예수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우리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됨으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도 맛보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또 속 사람이 강건해지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속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싸웁니다. 속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이해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겉 사람은 육신의 생각대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며 다투며 분내면 거짓증거하면서 살아가도록 합니다.
우리 안에 항상 겉 사람과 속 사람이 두 사람이 싸웁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육신의 겉사람과 속 사람이 서로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100번 싸우면 100번이나 우리 육신의 겉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속사람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지만 자꾸만 육신의 사람의 뜻대로 살아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될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우리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져야지만 육신의 겉 사람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 지면 상황과 환경을 초월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면 이 땅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두번째로, 우리가 무엇으로 충만해져야합니까?
그리스도로 우리 마음이 충만해 져야합니다.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여기서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하겠습니까?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을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런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 교인들도 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마음 문 밖에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는 부요한 자라 고 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이런 경우가 있겠습니까?
예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경우입니다.
제가 잠시 집을 나간 사이에 집이 잠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집의 소유권은 분명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집에 주인으로 들어가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되어 예수님의 것이 되었고,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분명 이론상으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삶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진정으로 우리의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말할수 있습니까?
정말 우리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이 주인으로 들어와 살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는데 우리의 삶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닌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릴때는 당연히 예수님이 우리 예배의 주인으로 믿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물질을 사용하는 부분에 있어서 과연 예수님이 주인입니까?
내가 가정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과연 예수님이 주인입니까?
내 직장생활에 있어서 과연 예수님이 주인입니까?
특별히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내 말과 입술의 주인입니까?
내가 차를 운전할 때 과연 예수님이 주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예수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내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나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내 삶을 드리면 과연 어떻게 될까 우리는 나름대로 계산을 합니다. 그래서 내 삶의 전공분야에 있어서는 여전히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서에서 왜 풍랑이는 바다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옵니까? 바다는 제자들의 전공분야입니다. 그래서 바다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는 제자들은 절대 예수님을 먼저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까지 끝까지 합니다. 그러다나 나중에 바다에서 거의 다 죽게 되었을 때 주여 우리를 살려 달라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만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그런데 내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주인으로 섬기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으로 항상 내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경우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이런 경우라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실까? 하면서 항상 내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어야합니다. -또 내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속에서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을 말더라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누구를 대하더라도 예수님의 심장으로 사람을 대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것을 생각할 때도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가운데서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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