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를 청소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청소를 하는가? 정말 하기 싫어 죽겠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억지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의 한 부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다. 그래서 아 나는 지금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냥 청소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또한 사람은 이 세상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해 있는 영광스러운 사람입니다.
/홍천에 어느 초등학교에 수련회 답사를 간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초등학교였습니다. 여자 교장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니까 얼마나 행복하시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말 지겨워 죽겠습니다. 이런 촌구석에 있는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가 처해 있는 환경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있던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에 따라서 나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자아상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도바울에 대해서 낙심하고 있습니다. 또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했습니까?
내가 갇힌 것에 대해서 낙심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또 내가 갇힌 것은 너희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도바울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있는 것이 단순히 감옥에 갇힌 자가 아니라 주 안에 갇힌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단순히 로마황제의 포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포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주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의 포로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주님의 사랑의 사슬에 메여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안에 있다 주안에 갇힌 자란 무슨 말입니까?
지금 내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던지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속에 있기 때문에 절대 이 세상의 악한 자가 나를 괴롭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자들이 순간적으로 우리의 육신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절대 우리 영혼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주안에서 갇힌 자로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주 안에 갇힌 자라는 말은 내가 아무리 주님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주님의 포로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나는 주님의 사랑의 포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의 사슬을 끊을 자가 이 세상이 아무도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나는 주 안에 있는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주안에 갇힌 자가 되고 주님의 포로가 되었다는 말은 이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메이지 않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는 주안에서 갇힌 자라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 분들입니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다고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나는 감옥과 같은 곳에 있을지라도 나는 지금 주안에 갇힌 자라고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비록 누추한 곳에 있더라도 그것이 낙심이고 수치가 아니라, 기쁨이요 영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사도바울이 단순히 개인적인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갔다면 결코 영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명자로서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7절과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엡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복음의 일꾼이 된)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8절에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복음의 일꾼이 되는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음의 일꾼이 된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구원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의 일꾼이 된 것도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비록 감옥에 있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명자로 있기에 자신은 영광스럽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우리가 어떤 처지와 환경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떤 처지와 환경에 있던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금 어떤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사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힘이 들어서 어떤 일을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그만두려고 했을 때 그 일을 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사명입니다.
예레미야도 말씀을 전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합니까?
렘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말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듣든 듣지 않든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또 내게 주신 사명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것을 생각하면 내가 살아야겠다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도바울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어머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을 돌보시는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님이 아들을 보니까 너무 힘이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어머님이 힘이 있으신 것은 처음 봅니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 이름만 들어도 힘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이름만 불러도 내가 살아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대부분 자녀들일 것입니다. 또는 손주들일 것입니다. 또 우리 동부제일 교회 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녀들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믿음 생활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자녀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손주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명이라 생각할 때 거창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에서 앞장서서 봉사하는 것만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자녀들을 잘 기르는 것도 사명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35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35: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여러분 여기서 보시면 야곱이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드보라라고 하면 누가 떠오릅니까? 사사기에 나오는 여 사사 드보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드보라는 그 드보라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여성이 죽을 때 장례식을 치렀다고 이름이 기록된 것은 많지 않습니다. 이 성경 앞에 보면 사라의 경우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의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리브라의 유모의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기록이 되었겠습니까? 이 리브가의 유모는 야곱이 집을 떠날 때 리브가가 야곱을 돌아보라고 한 유모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 드보라가 그동안 야곱을 아들처럼 옆에서 돌본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야곱의 아들들을 할머니처럼 돌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드보라는 그 동안 야곱만 아니라 손주들을 지금까지 할머니처럼 돌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리브가이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고 했습니다. 알론바굿은 통곡의 상수리라는 말로서 야곱의 가족들은 드보라가 죽었을 때 크게 통곡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들이 할머니로서 자녀를 잘 돌보시고, 또 손주들을 잘 돌보는 것도 사명입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하시면 성경에 드보라의 이름이 기록이 된 것처럼 여러분들의 이름도 하나님나라에 기록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명이 있는 자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사명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날은 내게 주신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이, 손주들이 잘 되기 위한 기도를 쉬지 않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만일 청소하는 일을 한다면 그 일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교회의 공적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시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너무나도 귀한 사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교회당에 나와서 예배하기를 주저하는 이때에 예배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가면 주님이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는 얼마나 내가 네게 준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 고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내 사명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사도바울은 감옥에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과 계획속에서 한 부분을 감당하는 자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계획)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비록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지만 그 자신은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세우신 비밀의 경륜 즉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가운데서 하나님의 충만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어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충만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도 그냥 아무 계획이 없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세우신 그 계획가운데서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특별히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우주적인 계획을 알게 될 때 지금우리가 이 교회에서 아무리 초라하게 보이는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자리가 영광스러운 자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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