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1절 상반 절을 보시면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단순히 숫자만 많이 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까?
행5: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고 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절대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주님을 위해서 능욕을 받는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행5장 42절을 보시면 “행5: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시면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제자의 수가 많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더 심히 많아졌습니까?
그 이유는 초대교회가 문제를 지혜롭게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행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초대교회에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사도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가난한 과부들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달에 얼마의 구제금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매일 가난한 과부들의 생활을 도와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매일의 구제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은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초대교회로서는 심각한 내부적인 위기였습니다.
사실 교회의 문제는 큰 곳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구제가 이루어졌는데, 누구는 빠진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단순한 실수 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누가 형편이 어려운가 하는 것은 자기들과 관계된 사람들만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파 사람들은 원래 예루살렘교회에 있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파 사람들은 예루살렘교회에 원래 있던 유대인들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으로 다른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니 히브리파 사람들이 헬라파 과부들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제에 빠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수라고 해도 작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일로 인해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일이 생겼는데, 결국 그 책임을 누구에게로 돌아갔겠습니까? 당시 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사실 교회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구제입니다. 특히 초대교회는 지금 국가에서 연금을 주는 것처럼 가난한 성도들을 물질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주고 누구는 주지 않아서 원망이 생겨서 사도들은 말씀에 집중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내부적인 일로 구제하고 사람을 접대하는 일에 빠져서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일곱 사람을 택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제하고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을 그 사람에 맡기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왜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성령 충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혜 충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필요합니다. 그래서 직분 자를 택할 때 단순히 성령 충만 하기만 사람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사람을 택해야합니다.
그리고 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옛날 번역은 오직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사역자가 성도들을 위한 최대의 봉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여 위로하는 일이 성도를 위한 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물질로 어려운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도 성도를 위한 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개인을 돌보는 사역도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사역자가 성도들을 위한 최대의 봉사는 한 주간 동안 성도들을 위하여 말씀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또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가 성숙한 교회입니까?
목사님 우리 가정은 찾아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 한 주간 동안 열심히 말씀준비만 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기도와 말씀에 집중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교회입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의 사역자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말씀으로 살 수 있습니다. 또 사역자가 말씀으로 살면 성도들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역자들이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그래서 저는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사역자가 한 주간 동안 무엇을 하나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는 한 주간 전에 그 다음 주에 할 성경본문을 미리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참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듣기도 하고 봅니다. 그리고 주일예배가 끝이 나고부터 그 다음 주 설교를 준비합니다. 먼저는 그 본문의 문자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왜 수 백 년 동안 끊임없는 주석들이 나오는 줄 아십니까?
성경에 대한 주석은 한 사람만의 주장이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주석들을 참고해야합니다. 그래서 고전적인 주석도 필요합니다. 또한 최근에 나오는 주석들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만 끝이 나면 성경공부의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그 본문에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합니다. 어떤 본문은 주는 메시지가 명확합니다. 그런데 어떤 본문은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는가 정말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족보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누구를 낳고 또 누구는 누구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는가 정말 파악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밤낮으로 그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보고 하면서 그 말씀에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옥한흠목사님이 마지막에 은퇴를 하실 때 하신 말씀이 설교 준비하는 것이 피가 마르고 뼈를 깎는 것 같이 어려워서 은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떨 때는 수요일까지도 그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파악하지 못해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며칠 동안 그 본문의 메시지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면 깨달은 것을 바로 기록을 합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깨달으면 적고, 또 기도하다가 깨달으면 적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설교의 메시지는 기도하는 동안 적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제 설교 원고를 적어야합니다. 적으면서 먼저 이 말씀이 먼저 나에게 어떤 것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저 이 말씀을 누구에게 전하기보다는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것은 제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 말씀을 가지고 나 자신에게 적용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을 매번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시의 충족성을 믿습니다.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이 말씀이 성도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묻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듣는 설교와 방송설교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방송설교는 설교자가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설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설교준비를 합니다.
이번에 동기회 총회에서 어떤 은퇴하신 목사님이 오셔서 강의를 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목사님이 설교준비를 어떻게 하시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루 세 시간 기도하면서 설교 준비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설교는 성도님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목요일이나 금요일 오전에 말씀 준비가 끝이 나지만 어떨 때는 주일 새벽까지 새롭게 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 설교가 끝이 나면 반드시 저는 제 설교를 듣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에 실수를 했는가? 또 무엇이 부족한가? 를 생각하고 반성합니다.
/여러분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욥기를 보면 그 사탄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사탄을 조종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도 절망하게 하기 위함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도 더 기도에 집중하고 말씀에집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욥기에 나오는 탄원은 시편에 나오는 탄원과 내용이 같습니다. 또 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시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절대 그 시험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그 시험 때문에 절대 분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험을 허락하신 것은 여러분들로 오직 기도에만 힘쓰게 하기 위함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모든 문제가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풀리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교회에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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