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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사도행전

사도행전강해(7)오순절 성령강림(행2:1-13)

by 금빛돌 2022. 3. 25.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여러분 왜 오순절 날에 성령에 강림하셨습니까?

원래 오순절은 처음 익은 소출을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에서 50일이 지난날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습니다.

그래서 고전 57절에 고전5:7.-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란 유월절의 열매이고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까? 저는 몇 주 동안 계속해서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오순절 날에 보내주셨는가? 왜 오순절 성령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순절은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의 결과를 나타내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보통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많이 기도해야하는가를 생각합니다. 물론 초대교회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 있기 전에 1장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순절 성령강림이 열심히 기도한 결과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오순절 성령을 체험하기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합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당연히 약속하신 성령을 체험하기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합니다. 그런데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왜 성령하나님은 오순절에 오셨습니까?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없으면 성령하나님은 절대 우리에게 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 810절을 보시면 8:10.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성령)은 의(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의 때문에 우리에게 오실 수 없습니다. 단순히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오시지 않습니다. 성령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인하여 우리 안에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성령충만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붙으시기 바랍니다. 내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만을 붙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우리의 의를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첫째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순히 심리적인 하나님의 임재만 아니라 공간적인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때 마음이 열린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느껴지고, 느껴지지 않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누구나 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오순절 성령강림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함을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바람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마음에 성령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성령이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의 눈에 보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심령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령의 불이 각 사람위에 하나씩 임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사6장에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날 때 장면과도 비슷합니다. 그때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였습니다(6:4).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도 24: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선교지에서는 성령이 강하게 임하여 그 곳이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방서에서 그 불을 보고 불을 끄러 왔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순히 심리적으로만 느끼는 그런 성령의 임재가 아니라--기도하는 그 사람들의 공간에--또는 각 사람 각 사람의 머리위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직접 임재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여러분 부흥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우리의 심리적인 흥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직접 우리가운데 임하시는 그 영광스러운 사건을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 단회적이냐 연속적이냐는 논쟁이 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 2장과 같은 성령강림이 지금도 계속 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대마다 가장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친히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이 자리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기도하고 간구 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충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합니다.

4절에서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고 합니다.

그런데 7절과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고 합니다. 여기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인데,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복음)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그러니까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 언어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각기 자신들의 언어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우리가 보통 경험할 수 없는 방언입니다. 그래서 각기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서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방언이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지금 방언이 아니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 성령의 역사로 방언을 했는데 그것이 어떤 방언이었느냐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방언은 복음을 전하고 또 듣는 수단이었습니다.

방언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또 알아듣게 된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엇이 진정한 성령충만입니까? 성령이 우리가운데 임하시면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그것은 복음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에 보시면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함께 방언으로 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방언으로) 소리를 높여 이르되라고 합니다.

이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의지적으로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은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은 의지적이고 고의적인 부인입니다. 또 십자가와 부활을 보고도 다시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간 사람입니다.

그만 아니라 다른 열 제자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을 때 어떻게 합니까?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죄에서 승리한 사건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그 십자가가 나를 위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오르시게 된 사건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온 세상의 주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가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십자가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십자가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시고, 주이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예수님의 십자가가 떠올랐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통해서 죽으신 것만 내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감사했습니다. 그 이후로 빨간색만 봐도 마음에 감동이 되고 흥분이 되었습니다. 방을 치우다가 방에 십자가 그림만 봐도 흥분이 되고 감격이 되었습니다. 고민이 되어 잠이 오지 않을 때--십자가만 생각하면 모든 번민이 사라졌습니다. 그전까지는 신학으로 십자가를 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체험한 후 정말 예수님이 생명이고, 우리는 예수의 피를 먹고 사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입니다.

오늘도 성령 충만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금 나를 위한 십자가로 마음속에 다시 와 닿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드러내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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