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장은 로마교회 안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것이냐 먹지 말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특정한 한 날만을 강조한 것인가? 아니면 모든 날을 다 같게 여길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상숭배는 절대 하지 말아야하는 본질적인 문재입니다. 그러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는 비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한 말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를, 모든 것에서는 사랑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은 문제 있어서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대가 되면 정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또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은 문제에 있어서 내 생각이 절대적이라고 하면서 내 생각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문제를 아디아포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면 제사음식을 먹을 것인가 먹지 말아야하는 하는가 하는 것이 아디아포라입니다. 아디아포라에 대한 사도바울의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양심의 자유대로 하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양심은 제사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제사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야한다는 양심을 가진 내가 먹는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그 음식을 먹는 것이 죄가 아니라 양심을 어긴 것이 죄가 됩니다. 그런데 양심이라는 것은 내 양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양심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람의 양심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아디아포라에 대한 두 번째 사도의 가르침은 나와 다른 양심을 가진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입니다. 왜 우리가 나와 양심의 생각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나와 양심이 다른 사람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월권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을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면 주님의 종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주님의 종입니다. 절대 우리가 그 사람의 주인이 아닙니다. 또 나만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의견이 다른 그 사람도 주님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하지만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서로 비판한다면 마지막 주님의 심판대에서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합니다.
오늘은 아디아포라에 대한 세 번째 사도의 가르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디아포라에 대한 사도의 세 번째 가르침은 형제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먹어도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양심의 자유가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상처를 입는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제에게 상처를 주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8: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합니다.
또 고전 8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지식도 중요합니다. 또 양심의 자유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인하여 사도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도 포기하고, 양심의 자유도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어떤 지식이나 자유보다 더 중요하고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인하여 우상의 제물을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술 문제에 적용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손주가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 고 했지 술을 먹지 말라 고 하지 않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술을 먹지 말아야합니까? 이럴 때 어떻게 대답을 해 주시겠습니까?
사도바울이 말하는 아디아포라에 대한 3가지 원리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첫째 각자의 양심의 자유대로 하라 입니다. 둘째, 서로 비판하지 말라 입니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술을 먹어도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형제 사랑의 원리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기독교 문화에 있어서 만일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술을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입니다. 그래서 술을 먹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고전 8:11). 그래서 사랑의 원리에 따라서 영원히 술을 먹지 말아야한다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롬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술)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상처를 주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롬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우리가 다시 서로 비판하지 말라 고 합니다.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부딪힐 것이란 부딪쳐 넘어지게 하는 것이고, 거치게 하는 것이란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로 형제를 넘어지게 하거나 그에게 상처를 주어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14절입니다.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이것도 우상의 제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 자체가 스스로 속되거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상의 제물이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는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15절입니다.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만일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때문에 형제를 근심하게 하고 시험 들게 하면 이는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우상의 제물로 인해서 망하게 하지 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지만 사랑을 인하여 먹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6절입니다.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여기서 너희의 선한 것이란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행해서는 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야지만 형제들에게도 칭찬을 받고 하나님에게도 영광이 돌아갑니다.
17절입니다.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평화/화평)과 희락(기쁨)이라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을 것인가 먹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의 본질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의란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무엇보다 옳은 것을 추구해야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성경에는 평강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표준새번역은 평화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옳은 것만을 추구하다가 사람들과의 평화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또 평화를 추구하다가 의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85편 10절에 “시85:10. 인애(사랑)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평화)이 서로 입맞추었으며”라고 합니다.
에베소교회를 진리를 주장하다가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교회는 사랑을 주장하다가 진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진리와 사랑이 서로 입 맞추고, 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행해야합니다. 그래서 진리와 의를 주장하더라도 성령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또 사랑과 평화를 주장하더라도 성령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을 따라서 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출 때 무엇이 옵니까? 하나님나라의 희락이 옵니다. 기쁨이 옵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옳은 것과 함께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어 기쁨이 올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18절입니다.
18. 이로써(의와 평화와 기쁨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영광을 돌리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절입니다. 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평화)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상. 음식으로(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일)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여기서 화평의 일이란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일입니다. 또 덕을 세운다는 것도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업,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로 서로 비판하지 말고,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씀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더욱더 든든히 세울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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