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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이사야의 소명(사6:1-10)

by 금빛돌 2018. 8. 15.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즉 이사야의 소명장면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고 합니다. 이것은 유다왕 웃시아가 죽기 직전이라는 말입니다. 유다 왕 웃시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씀을 잘 들음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가 다스리던 유다나라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대하26). 그런데 항상 그러듯이 사람은 무엇이든지 잘되면 금방 교만합니다. 웃시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부강하니까 웃시아는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아론 집안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일까지도 넘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번영과 그에 따른 위세를 믿고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웃시아를 치셔서 문둥병이 들게 하셨습니다(대하26).

여기서 우리는 왜 웃시아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만나 주셨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웃시아왕이 겸손히 하나님을 잘 섬길 때가 아니라, 교만하여 문둥병으로 죽기 직전에 이사야를 만나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사야1장에서 5장까지 유다나라의 심판을 선포했던 이사야도 잘못하면 얼마든지 웃시야와 같은 교만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언제 교만해지기 쉽습니까? 나라가 잘 될 때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언제 교만해지기 쉽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지적하고 그들의 심판을 선포할 때 선지자는 교만해지기 쉽니다.

그래서 교만에 대해서 다시 묵상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교회에 제일 교만해지기 쉬운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말씀을 선포하는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어느 한 순간이라도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은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권세로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에게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거가십니다. 저는 목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그때가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교만이라고 했습니까?

교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지 않고 남에게 주는 말로만 듣는 것입니다. 또 교만이란 하나님의 말씀만 아니라 사람의 말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또 교만이란 근심걱정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왜 근심걱정을 많이 합니까? 근심걱정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만하여 근심 걱정이 많으면, 근심 걱정이 가시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도 내 속에서 계속해서 자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제가 제일 교만해지기 쉬운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제가 이 말씀을 내게 전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할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에 강단에서 내려와서도 내가 하는 모든 말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화시키고, 그래서 제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이 교회에서 교회를 두고 제일 근심과 걱정이 많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저 자신입니다. 그래서 제가 마치 이 교회의 주인인 냥 교회에서 대해서 지나친 염려 때문에 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자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왕만 아니라 선지자도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사야는 교만을 극복한 선지자가 되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온 주와 교회의 왕이신 것을 보아야합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여기서보면 내가 본즉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말은 환상이나 꿈이 아닙니다. 있는 사실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즉 저 하늘의 보좌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광경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에도 함께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성전에도 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사야 너 착각하지 마라, 이 성전의 주인은 말씀을 선포하는 네가 아니라 나다, 내가 이 성전의 주인이다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네가 마치 주인이신 하나님의 위치에서 말씀을 선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너는 단지 내가 전하려는 말을 대변하는 자이지, 네가 하나님은 아니다 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떻게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제일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듯이 정말 겸손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겸손해질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엄위로우시고 엄위로우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교회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신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리교회의 주인이시고, 우리 가정과 내 삶의 주인이신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에 대한 교회에 대한 가정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너무 지나친 염려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 자신도 이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오직 충성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 모든 삶의 주권을 주님께 다 내려놓고 더욱 겸손히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먼저 왕이신 하나님을 보고 그 다음에 나 자신을 보아야합니다.

이사야가 왕이신 하나님을 보고 난 첫 반응이 무엇입니까?

5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그전에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유다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망하게 되었다. 이 세상의 열방이 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보고 나니까 이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그가 회개와 심판을 선포했던 죄악 된 백성 중에서 그 자신이 포함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 하나님 그 동안 저는 유다백성이 망하게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알고보니 내가 망하게 되었습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죄를 먼저 회개합니까? 입술의 죄입니다. 그 입술은 백성들의 죄를 정죄했던 입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보고 나니까 그 자신도 그가 전했던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도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안희완 목사님이 쓴 글이 있습니다.

나는 자칭 교회개혁자들이 싫다. 그냥 싫은 게 아니라 많이 싫다. 그 이유를 말하려고 한다.

1) 자칭 교회개혁자들은 교회를 난도질 한다. 개혁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난도질 자체가 상당한 흥미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뭔가 난도질 할 것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찾아다니는 이들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가학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2) 자칭 교회개혁자들은 정말로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한다면 증오를 담아서 비난할 것이 아니라 눈물을 담아서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움으로는 개혁을 이룰 수 없다. 또 다른 미움을 낳을 뿐이다.

3) 자칭 교회개혁자들 치고 정말 한국 교회를 위해서 목숨 걸고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묻고 싶다. 개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깊은 기도 없이 구호만 요란한 경우가 많다. 정말 장시간에 걸쳐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자칭 교회개혁자들이 있다면 말해 달라. 기도는 양이 아닌 질이라는 엉뚱한 소리는 사양한다.

4) 자칭 교회개혁자들 치고 한 영혼을 전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경우도 본 적이 없다. 절대로 전도하는 법이 없다. 자신들의 비판적인 여론몰이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데도 가슴 아파할 줄도 모른다. 진짜 안티는 사고치는 유명목사들이라고? 맞다. 동의한다. 그러나 자칭 교회개혁자들도 마찬가지이다.

5) 자칭 교회개혁자들 치고 자신이 먼저 회개하는 이들도 못 봤다. 에스라나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똑바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백성들의 죄를 알았을 때 보인 반응은 자신들이 먼저 회개하는 것이었다. 다 썩었다고 공동체 향해 혈기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를 향해 화살을 겨누는 것보다는 자신의 가슴을 찢는 것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6) 자칭 교회개혁자들을 보면 자기 의가 충만하다. 자기들은 의인, 다른 사람들은 죄인 혹은 개혁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아주 단호하게 판단하고 정죄한다. 그럴 때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재판 자리에 앉아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7) 자칭 교회개혁자들은 자기 홍보도 참 잘 한다. 온라인을 통해, 각종 모임이나 세미나를 통해, 자신들이 운영하는 언론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의롭고 훌륭한지를 끝없이 홍보한다. 다양한 통로를 통해 보이는 자칭 교회개혁자들은 그들이 이 시대의 등불이라는 착각을 유발시킨다.

8) 자칭 교회개혁자들은 넓은 마음을 가지라고, 열린 자세를 견지하라고 충고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 편이 아닌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한다. 조롱, 비난, 여론몰이, 악담, 저주 등 온갖 상스러운 말이나 태도도 얼마든지 사용한다. 상대방이 상처를 받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한 배려가 없다.

9) 자칭 교회개혁가들은 편 가르기가 확실하다. 보통은 상대 진영 쪽에는 매섭기 그지없으나 자기와 같은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기가 태평양보다 더 하다. 남이 하면 불륜이지만 자긴 편이 하면 로맨스가 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똑 같은 실수가 벌어져도 자기 진영 사람에게는 침묵하는 이중성을 드러낼 때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든다.

10) 자칭 교회개혁자들은 한국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며 그런 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다 썩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위해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여전히 다양한 곳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도 많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아직 버리지 않으셨으며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소망이다.

/박영돈 교수님은 정말 한국교회를 향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박교수님을 비난하기도 하고 또 열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많은 사람들이 박영돈 교수님의 진정한 의도를 간과한채 , 그 글을 오히려 한국교회를 비판하는데, 이용하는 것을 봅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박교수님의 글을 보면 화살표는 항상 목사님 자신에게 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탐욕에 물든 기독교라고 하면 목사님 자신에게 있는 탐욕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대화를 하면 항상 교회에 대한 사랑과 인내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물론 잘못된 말씀을 전하는 자도 거짓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참 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는 입술이 아니라 삶입니다.

예수님은 마715절에서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시고,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가능하면 오직 성경대로만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만일 성경대로만 설교를 한다고 해서 참 선자지가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성경대로 설교를 해도 그렇게 살지못 하면 저도 얼마든지 거짓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코람데오닷컴에서 이보민 박사님이 마태복음 7장을 가지고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는 설교가 올라와 있습니다. 그 교수님은 제가 학교를 다닐 때 윤리학과 조직신학 교수님이었습니다. 그 교수님이 마태복음 7장을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는 설교를 하시면서 결론적으로 그러면 누가 거짓선지자인가? 하시면서 바로 나 자신이다 고 하셨다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 거짓 선생이 바로 나였더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할 때 마치 다 실천하고 있는 듯 말하지만, 실상은 나는 엉뚱한 이익을 챙기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는 않으니 그 거짓 선생이 내가 아니고 누구이던가? 우리는 부단히 내가 거짓 선생인지를 살펴야 합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가 진정한 선자입니까? 누가 진정한 개혁주의자입니까?

누구의 죄를 지적하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발견하고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오늘도 회개하는 상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숯불 앞에 나가서 내의 죄악 된 마음을 성령을 불로 태우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마지막으로 어떻게 우리가 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내가 무언가 하겠다 할 수 있다는 모든 마음을 다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가야 겸손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우리는 먼저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먼저 보내소서 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고 합니다.

보내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셔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내가 주를 위해서 일하려는 자와 주님이 보내셔서 일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내가 주를 위해서 일하려는 자는 그 일의 열매가 없으면 낙심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열심히 말씀을 전했는데,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가 하면서 이제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시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셔서 일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일의 열매가 없어도 절대 실망하지 않습니다. 또 말씀을 전했는데도 사람이 변하지 않아도 절대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계속해서 격려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까?

9절과 10절을 보시면 이사야가 네가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이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의 귀를 막히게 하고 눈을 감기게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의 소명이 무엇이니까? 이사야는 아무 열매가 없는 사역을 하는 것이 이사야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사야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도 유다나라는 망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사야가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이런 사역을 했더라면 열매가 없기에 금방 실망했을 것입니다. 또 나중에는 말씀을 듣지 않는 유다와 이스라엘백성들을 저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절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백성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는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 열매가 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나라가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망해도 이사야는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멸망을 당하여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고도 절대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사야 40장 이후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 포로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격려합니다. 또 하나님이 절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장차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또 성령을 약속하면서 이제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이제 너희들이 비로소 그 말씀대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줍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요즘 전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도 귀가 막혀지고 눈이 어두워서 복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수도 없이 복음을 전하고 먹을 것을 주어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오늘도 태신자에게 문자를 보내니까 주일에 결혼식이 있어서 못가게 되었다고하고 다른 분들은 아직 답장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전도의 일이 내가 하는 일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보내서 하신 일입니까?

주님이 보내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정말 눈에 보이는 열매가 몇 년째 없어도 계속해야합니다. 그리고 아무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절대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낙심하고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셔서 하는 일은 아무 열매가 없어도 절대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절대 책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하기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면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절대 안되니까 쉽게 저 사람은 택하신 백성이 아니라고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만 최선을 다해서 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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