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범과 경계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본받을 만한 좋은 모범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예를 들면 여호수아서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나안 땅 앞에서도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수아를 따라서 순종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주심으로 가나안 땅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에서 좋은 모범은 따라서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경계입니다. 경계(鏡戒)란 거울 경자에 계율(戒律)할 때 계자를 써서 “지나간 잘못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약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백성들의 지나간 잘못을 거울삼아서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모범과 경계 이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목장모임에서 겸손에 대해서 나눔을 하면서 겸손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의 예를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권사님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 권사님을 보면 “아 저 모습이 겸손의 모습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또 하나는 경계입니다. 어떤 제자가 교수님에게 “교수님 지금 제가 이곳에서는 배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좋지 않은 모습들 밖에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때 교수님은 “bad example” 이라고 하면서 좋지 않은 모습에서도 “이러면 안 되겠구나” 하면서 배우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모습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좋지 않을 모습을 통해서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백성들의 잘못을 거울삼아서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쓰여 진 성경이 바로 사사기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에 좋지 않은 예를 두신 것은 이런 잘못을 경계로 삼아서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범하는 제일 큰 실수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 경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지금 우리를 비추는 거울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이스라엘백성들처럼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구약시대 이스라엘 특별히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삿21장 이스라엘역사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인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11지파가 연약한 베냐민 지파를 모두 죽인 사건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 지파 사람들 모두 죽여서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가운데서 거의 없어지게 하고 난 다음에 삿21장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삿21: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라고 합니다.
처음에 이스라엘백성들은 베냐민 지파가 없어지게 된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하셨나이까” 라고 합니다. 강도사님이 새벽시간 말씀했던 것처럼 고생과 고난은 다릅니다. 고생은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고난은 우리가 잘못하지 않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생을 고난을 착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잘못을 하고도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와서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어떻게 말합니까? “삿21:6.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은 베냐민 지파가 거의 없어지게 된 것을 자신을 잘못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다 죽여서 없어지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마치 사사시대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거울삼아서 우리가 사사시대와 같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서울포럼이 있었습니다. 주제가 “통일 시대, 한국교회가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였습니다.
포럼 때 마지막 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북 간의 통일에 앞서서 우리 안에 하나 됨이 이루어한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회를 배워야한다. 예수님의 목회는 통큰 목회”라고 했습니다. 통 큰 목회란 “원수까지 사랑하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는 목회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목회를 가장 많이 닮은 사도바울의 목회를 본받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목회는 “엡1장 10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 됨의 목회, 통일 목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북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서로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사시대가 어떤 시대였기에 자신들의 동족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까? 이 말씀을 거울로 삼아서 어떻게 하면 통 큰 목회, 하나 되는 목회, 통일을 이루는 목회가 될 수 있는가? 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사사시대는 인간이 스스로 왕 노릇하는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이후에 이스라엘의 특정한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수아서 죽으면서 남긴 것은 “수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만을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절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위기가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임시방편적으로 사사를 세우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위기가 있을 때 마다 사사를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사사를 그래도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세우실 때 모두 인간적으로 약점이 있는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한 쪽 손이 문제가 있는 에훗을 사사로 세우시고, 또 출신이 좋지 않은 입다를 사사로 세우시고, 또 가장 겁이 많은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사사들이 자기 일이 끝이 나면 왕이 아니라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잘못 이해한 사람이 기드온과 그 아들 아비멜렉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이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이 자기 아들을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왕인 것처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받았던 아비멜렉도 나의 아버지는 왕이니까 나는 왕의 아들 즉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서 자기 형제 70명을 다 죽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삿9장에서 이런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감람나무에게 우리 위에 왕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람나무는 나는 감람나무 기름을 만들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쓰임을 받는 일을 하는데 만족한다. 그래서 나는 절대 너희들의 왕이 되어서 우쭐대지 않겠다고 합니다. 또 무화과나무에게 네가 우리 왕이 되라고 하니까 무화과나무도 나는 무화과나무 열매를 내는 일에 만족한다. 그래서 절대 너희 왕이 되어서 우쭐대지 않겠다고 합니다. 또 포도나무에게도 우리의 왕이 되라고 하니까 나는 포도주를 만드는 일만 하지 절대 너희들의 왕이 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가시나무가 스스로 나서서 내가 너희 위에 왕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시나무인 내가 너희들의 왕이 되어 그늘을 만들겠는데, 내 그늘 아래 있지 않으면 내가 너희들을 다 불살라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삿9:16에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간이 절대 스스로 인간 위에 서 있는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시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왕 노릇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사사시대였던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사도바울의 편지와 눈물의 권면이 있음도 불구고 끊임없이 분열하고 다투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내가 이 교회 주인이다”고 생각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4장 8절을 이것을 표준새번역성경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전4: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놓고 (스스로) 왕이라도 된 듯이 (군림하듯이) 다스리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왕처럼 (섬김으로) 다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진정한) 왕처럼 (섬김으로) 다스리면 좋겠습니다”
/고린도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는 서로 “내가 이 교회의 주인이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23장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서로 “내가 이 교회의 주인이다” 하면서 섬김이 아니라 군림하듯이 교회를 다스렸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사시대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합니다.
그러면 겸손이 무엇입니까?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러니까 겸손이란 예수님 때문에 어리석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비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모든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서도 축복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서도 참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비방을 받으면서도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거기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이 아니라 높임을 받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서로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예수님 때문에” 라는 말이 원어로 ‘예수님을 위하여(디아 크리스톤)’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 여기서 “예수님을 위하여” 란 문맥을 보면 “교회 위하여” 라는 의미로도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겸손입니까? 교회를 위하여 어리석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비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참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비방을 받으면서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의 더러운 것(페리카다르마타)이란 “다른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더럽게 되는 것”이란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더럽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걸레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걸레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도 한평생 걸레목회를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걸레목회가 무엇이냐고 그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은 성도들의 죄와 허물이 생각 날 때마다 자신이 마치 걸레가 되는 듯이 “오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또 만물의 찌꺼기(페리프세마)란 말은 사람 몸의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 몸의 때는 몸 가운데 제일 비천하고 하찮은 존재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바울은 교회를 위해서라면 몸의 때와 같이 가장 하찮고 비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어떻게 스스로 왕이 되려는 사사시대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교만이 아니라 겸손해야합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한 없이 끝까지 낮아짐으로 온전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사사시대는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이 있는 삿22장에 이스라엘이 자신의 동족 베냐민지파를 거의 죽이게 된 사건의 발단은 삿19장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삿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고 합니다. 레위인의 생명은 거룩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첩을 두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회개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의 첩이 음행을 하여 도망을 갑니다. 이때 이 레위인은 그 첩을 데리러 갑니다. 그리고 그 첩을 데리고 오는 길에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이릅니다. 거기서 동네의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첩을 성적으로 관계하려고 달라고 합니다. 그리니까 그 집은 주인이 네 아내와 딸을 줄테니 레위인의 첩을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에게 줍니다. 그래서 레위인의 첩은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에게 겁탈을 당하여 죽습니다. 그러니까 이 레위인은 죽은 첩의 시체를 12덩이를 만들이 이스라엘 전체에 돌립니다. 이것에 대하여 “삿19: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볼 수 있는 사사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모든 옳음의 기준은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레위인은 첩이 음행하여 도망갔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회개했어야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그 첩을 찾으러갑니다. 또 오는 길에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이 첩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레위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어 그들의 죄를 책망했어야했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간음죄를 지을 수 있느냐 했어야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첩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첩이 죽었습니다. 이때도 정말 레위인이 하나님의 말씀대의 기준대로 살았다면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어야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이런 모습이 신약시대의 사사시대였던 고린도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고후10:12절입니다. “고후10: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거짓사도)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평가하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거짓사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자기라는 단어입니다. 다섯 번 나옵니다.
/여기서 거짓사도들은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칭찬하는 자들입니다. 이 거짓사도들이 자기를 내세우고 칭찬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오직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내세우고,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를 평가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에 제일 잘 났고 똑똑한데, 그 기준에서 나를 보았을 때 내가 제일 잘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기가 제일 잘 났다고 자기를 평가하고 자랑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만 옳고 나만 똑똑하고 나아닌 다른 사람들은 다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사도들은 모든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도 그들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참사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참 사도인 사도바울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까?
고후10:13.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하나님의 말씀)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거짓사도들은 모든 기준이 자기 자신이지만, 참 사도인 사도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시시대와 같이 되지 않고, 고린도교회와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내 소견에 옳은 대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사사시대는 스스로 심판자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온 이스라엘 지방에 돌리고, 미스바 구국 대성회를 소집합니다.
삿20:1을 보시면 “삿20:1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라고 합니다.
이렇게 처음에 이스라엘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인 목적은 베냐민 지파사람들이 행한 음행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사람들에게 “삿20:13. 그런즉 이제 (베먀민 지파의)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고 합니다. 이때 만일 베냐민 사람들이 그 불량배들을 넘겨주었다면 문제가 크게 확대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사람들은 “우리가 남아가”라고 하면서 그 음행의 죄를 지었던 사람들을 넘겨주지 않습니다(삿20:13). 그러니까 이제 이스라엘 11지파에 속한 전사 40만명이 모여서 베냐민 한 지파와 싸움을 벌입니다(삿20:17). 이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가 베냐민 지파와 싸우는 맞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싸우러 가라고 하시고 유다지파를 먼저 보내십니다(삿20:18). 그런데 베냐민 지파가 이깁니다(21).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우리가 싸우리이까? 하니까 하나님께서 싸우라고 하십니다(23). 그런데 이 싸움에서도 베냐민 지파가 이깁니다(25). 그러니까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이 울며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정말 우리가 싸우리이까? 말니이까? 라고 합니다(28). 이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이기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와 싸움에서 처음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기게 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삿20: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여기서 보시면 싸움은 이스라엘백성들이 했는데, 누가 죽였다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베냐민을 치시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심판자가 되어 도망하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완전히 몰살합니다.
“삿20:48.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삿22: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라고 합니까? 여러분 과연 이렇게 베냐민 지파를 완전히 몰살시킨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삿20장 35절까지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치신 이유도 베냐민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이제 베냐민 지파를 완전히 몰살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해야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이 하시도록 해야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하게 하셨습니까?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죄를 미워한다고 하면서 사람조차도 미워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심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 한 지파를 완전히 몰살시키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왜 사사시대가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죄의 심판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기록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더디지만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은 나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죄에 대해서 반드시 분별해야합니다. 그런데 심판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사시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로마시대 초대교인들은 로마정부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만일 초대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서 로마정부를 심판하려 했다면 초대교회는 없어졌을 것입니다.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직 사랑만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로마정부를 물리치시고, 사랑으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사시시대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통큰 목회 하나 되는 목회 통일 목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가 됨으로 남북이 진정으로 하나 되는 통일 시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으로 통일 시대를 앞당길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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