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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시18편1-6)

by 금빛돌 2018. 6. 2.

우리의 인생은 마치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담장놀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걸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팔아도 위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슬아슬한 담장놀이와 같다고 했는데, 다윗의 인생도 그러했습니다.

다윗도 매 순간 마다 아슬아슬한 담장놀이와 같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사울 왕에게서 끊임없는 모함과 죽음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또한 왕이 되고 난 다음에도 끊임없이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만일 그 많은 전쟁 중에서 화살하나라도 잘못 날라 왔다면 다윗의 인생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전쟁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인생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질병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얻어도 건강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질병의 위협이 있었습니다(시편6). 그런데 다윗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영적인 위협이 있었습니다. 이런 인생의 위기들 가운데서 다윗의 마음에는 항상 영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상황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과연 지금도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과연 이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과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평생 동안 다윗을 따라다녔던 영적인 전쟁이었습니다. 만일 어느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사탄에게 빼앗기면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입니다.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 스올(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여기서 사망의 줄이란 다윗이 전쟁터에서 있었던 죽음의 위협을 말합니다.

또 불의의 창수란 악한 사람들로 인한 위협입니다.

또 스올 즉 음부의 줄이란 영적인 위협을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죽음의 위협, 사람의 위협, 질병의 위협, 사탄의 위협이 있지만, 다윗은 무사하고 안전했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표제를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윗이 담장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죽음의 위협가운데서도 안전하게, 승리하면서 살게 된 그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1절에 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한평생동안 담장 위를 걷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다윗의 힘이 되었고, 능력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 마치 내 인생이 담장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은 위험한 순간순간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오주여 항상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처럼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될 때 어떤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고 능력이 되면 우리도 얼마든지 담장을 뛰어넘어도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윗의 힘과 능력이 되어주셨습니까?

그것이 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다윗이 한평생 삶의 모든 위협가운데서 체험했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구절 한 구절을 의미 없이 읽을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읽어 나가야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다윗의 반석이 되어주셨습니다.

사울의 무리가 다윗을 죽이려고 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 앞에 피할 반석을 보여주십니다. 그때 다윗은 반석에 몸을 피하여 살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울의 무리가 악한 말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도 하나님께서 친히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피하여 안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요새도 반석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요새가 되어주셔서 원수들의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다윗의 바위가 되어주셨습니다.

반석은 몸을 숨길만한 작은 바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위란 큰 산을 의미합니다. 유대나라에서 는 다른 중동지방과 다르게 지진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다나라에서 산이란 절대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다나라에서 큰 산이란 사막과 대조를 이루는 말입니다. 사막이란 큰 산처럼 보이지만 금방 있다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큰 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위에 사막들이 있다가 없어지지만 큰 산은 불변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큰 산이 되어주셨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윗주위에 마치 모래 산처럼 있다가 사라졌다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큰 산과 같은 영원토록 다윗과 함께 해주셔서 다윗의 피할 큰 산이 되어주셨습니다.

/이사야서에도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할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의지할 우리의 변치 않는 큰 산이 되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위에 넘치되 두렴잖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변치 않는 우리의 큰 산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다윗의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전쟁에서 화살이 날라 옵니다. 그때 모든 방패가 화살을 다 막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방패를 빗겨간 화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방패가 되어주셔서 다윗이 화살의 위협 가운데서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화살이 눈에 보이는 화살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쏘는 말의 화살이 있습니다. 또 사탄이 쏘는 불화살도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탄의 불화살들이 이 날라 옵니다. “너는 낙심해라,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해라, 말씀에서 떠나라, 정직에서 떠나라, 너도 인간적인 방법대로 살아라”.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영혼을 죽이려고 불화살을 쏩니다. 그때 하나님만이 친히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셔서 모든 불신앙적인 화살들을 막아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언제든지 불신앙인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여전히 믿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다윗의 구원의 뿔이 되어주셨습니다.

법궤의 모퉁이에 뿔이 있습니다. 이 뿔은 법궤를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이 뿔을 잡고 있으면 어떤 사람도 그를 죽이지 못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이라고 한 것은 구원의 뿔이신 하나님만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을 물리쳐주심으로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 구원의 뿔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루 종일 24시간 구원의 뿔인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는 모든 대적의 손에서 구원해주시고 보호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은 다윗의 산성이 되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산성이란 적이 침입을 했을 때 최후의 방어선이 되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을 때 유일하게 남아서 우리를 지켜주는 산성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에 실패하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우리의 최후의 방어선이신 하나님만은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우리 삶의 최후 방어선이신(산성이신)하나님만 붙들고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 모두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산성이시라고 하면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말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윗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개인적으로 직접 체험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 반석이시고 방패시고 산성이시라고만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진열장 속에 있는 보석과 같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이고 값어치 잇는 보석이라도 진열장속에 있으면 그것은 내게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내가 체험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윗처럼 이런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체험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다윗보다 더 큰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계시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전혀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분이었는데,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함께 하셔서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게 하셨다는 간증이었습니다. 그 분이 체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의 가족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직 가족이 모두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의 가족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사업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큰 실패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 사업을 다시 일으켜주시면 이 사업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사업을 놀랍게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사업에 주인이십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장 그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셨지만 다른 방향으로 그 분을 위로 해 주셨습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나의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다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그 말씀을 풀어주시고 열어주십니다. 그러면 저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의 성경해석자십니다 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책상머리에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윗처럼 어떻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의 나의 삶의 현장 속에서 직접 체험 할 수 있습니까?

1)그것은 첫째 기도입니다. 기도로서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이렇게 기도한 결과가 어떠합니까?

그 결과 7-1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처음에는 여호와께 아뢰며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으며기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다윗은 기도가 처음에는 그냥 아뢰는 기도였다가 나중에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로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위험이 닥치면 더 간절하게 부르짖고 기도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에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가 더 큰 어려움이 있으면 금방 낙심해서 기도를 포기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다. 평상시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도하는 하는데도 더 큰 어려움이 있을 때 다윗은 가만히 있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평상시에도 기도하지만 삶의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께 더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기도해야합니까? 다윗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삶속에서 체험 될 때까지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내 삶 가운데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떻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만을 의지해야합니다.

17,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7.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18. 그들이(나보다 강하고 힘이센 원수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여기서 보시면 다윗을 위협하는 원수들이 다윗보다 더 강하고 힘이 세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도 다윗은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아사왕의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대하 1411“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대적을 가리킴)와 약한 자(나를 가리킴)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까? 그 문제는 여러분들보다 강하고 더 셉니다. 그래서 내가 그 문제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까? 그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합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나보다 강한 저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약한 나 사이에 그 문제보다 강한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십시오, 그래서 이제 나보다 강한 그 문제가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이기지 못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엇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까? 문제보다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그 어떤 문제가 닥친다 하더라도 그 문제가 여러분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을 이기지 못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보다 강한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심으로 얼마든지 그 모든 문제들을 이길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위기가운데 우리보다 강한 사람들보다 더 강한 하나님만을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주십니까?

18절에 하나님만을 의지했을 때 19절에 보면 “19. (하나님께서)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넓은 곳이란 구약성경에서 안전과 자유와 기쁨과 축복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좁은 곳(차르)은 반대로 재앙과 고통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환난을 주시고, 재앙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런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더 크신 능력을 체험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서 삶의 위기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환난과 재앙의 날에도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면--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전과 자유와 기쁨과 축복이 있는 넓은 곳으로 인도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아픔을 주신 것은 내게 더 큰 기쁨을 주시기 위함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좁은 곳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더 넓은 곳으로 가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통이 축복이 되게 하옵소서--상실과 잃어버림의 아픔이 체움의 축복이 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는 어떻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0-24절인데 20절만 보시기 바랍니다.

20.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이것에 대해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주석을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의나 공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받는 하나님의 상(), 즉 보호와 환난에서의 구원은 우리의 의를 따라서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불의를 행하고도 하나님이여 나와 함께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어주십시오라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은 의롭고 정직한 자의 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시편 171절에서도 17:1. 여호와여 나의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정직한 자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정직한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우리가 완전하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와 하나님이여 나는 죄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눅18장에서도 나는 죄가 없다고 하는 바리새인보다 나는 죄인입니다 고 하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하셨습니다(18:13,14).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정직하게 살았을 때,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주십니다.

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고백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의지했을 때,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29절에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주셔서 적군에 향해 담대히 달리며, 담장을 위를 두려움 없이 뛰어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난 후 다윗이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1)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정미하니/개역성경)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러운 경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체험하고 난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구나 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두 체험하고, 하나님말씀의 정미함을 날마다 확인하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하나님의 온유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35절에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여기서 온유함이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낮아져 주심을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저 천상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의 가정의 구원자가 되시고, 내 사업의 주인이 되시고, 또 나의 위로 자가 되시고, 나의 성경해석자가 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주의 온유하심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저 천상에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낮아지셔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마지막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깨닫게 됩니다.

“46.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나의 힘이 되신 그 하나님을 우리가 체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살아계심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나의 힘이신 하나님을 날마다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힘이신 하나님을 찬송하시며 살아가기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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