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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연구/시편

종일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시편44:1-26)

by 금빛돌 2017. 12. 9.

오늘 시편은 고라자손의 시입니다. 이 시의 역사적인 배경은 히스기야 시대 때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한 공격으로 유다민족이 위기에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먼저 1절부터 3절까지는 과거에 이스라엘에 은혜를 베푸셨던 때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부터 8절까지는 과거에 이스라엘에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9절부터 16절까지는 현재에 당하고 있는 극심한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절부터 2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가운데 회복시켜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모든 일은 유다백성들이 전쟁에서 앗수르에 패하여 수치를 당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주님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가운데서도 우리가 주의 언약 즉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8.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함께 하지 아니하므로 전쟁에서 패하였지만 우리 마음이 위축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9.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잊지 아니하고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않고 주의 길을 떠나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저 승냥이와 같은 앗수르의 처소에 밀어 넣으셨고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20절과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21.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이방신에게 손을 폈다면 주님이 다 알아내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고 합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이 구절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 육신의 질병이 있는 어떤 집사님의 집에 심방을 갔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집을 나가지 못해서 하루 종일 설교방송을 듣고 있는데, 모든 이야기가 예수 믿으면 잘 된다 복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이 자신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이제는 잘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분명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그 어떤 고난과 고통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이 고라자손의 시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입니까? 주를 위해서입니다. 즉 주님 때문에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아프칸에서 선교를 하다가 순교를 당한 샘물교회 팀원 중에서 어떤 선교사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당시에 전도사님으로 제일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배형규 선교사님 대신에 자신이 텔레반에게 넘겨지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텔레반은 배형규 선교사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선교사님은 다시 아프칸에서 선교를 하다가 잠시 국내에 들어오셨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텔레반에 의해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배형규 선교사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정말 이 말씀대로 주를 위하여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도살할 양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오늘 시편 22절에 보면 고라자손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고 합니다.

또 바울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도 종일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합니다.

도살할 양은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끝이 납니다. 그런데 고라자손은 자신이 종일 주를 위하여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 즉 종일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 이 모든 일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의 위협이 있다하더라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사랑을 절대 끊을 수 없다고 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그 어떤 고난과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는 여기서 왜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 왜 주님을 위해서 일을 했는데, 종일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확한 답을 주지 아니하실 때가 더 많습니다.

욥의 경우에도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왜 배형규 선교사님이 순교를 당하셨는가? 왜 그 선교사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가? 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또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은 우리에게는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없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서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 것이 정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저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그 천국에 가면 우리가 이 땅에서 알지 못하는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다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저 영원한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 우리가 주를 위해서 당했던 모든 고난에 대해서 충분한 위로와 보상이 반드시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상황가운데 회복을 위한 기도를 읽어보고 마치겠습니다.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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