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예후가 이세벨을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30절에 보시면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라고 합니다.
이때는 이미 예후가 북이스라엘 왕인 요람과 남 왕국 유다 왕인 아하시야는 죽인 후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세벨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세벨은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있습니다.
여기서 왜 이세벨이 예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화장을 하고, 단장을 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자신의 불안한 모습을 감추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전히 태후로서 지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실 이세벨은 그전에도 그랬습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알의 제사장들을 갈멜산에서 죽이셨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야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에게 여러번 회개의 기회를 죽었습니다. 갈멜산 사건에도 그러했고, 또 아합이 순간적으로 회개했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정말 이세벨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화장을 하고 단장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회개했어야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회개하기는커녕 불안하고 두려운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도리어 단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외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된 모습으로 그대로 나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혹 우리가 잘못을 하고 실수를 하고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이세벨은 모습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날마다 회개하는 자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회개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던 이세벨의 최후가 어떠합니까?
32절과 33절입니다.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고 합니다.
지금 이세벨은 자신의 신하들에게서 버림을 받아 내려 던져짐을 당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예후는 그래도 한 나라의 왕비였고, 지금은 태후였던 이세벨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그의 시체를 찾습니다. 그러니까 35절에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고 합니다. 결국 이것은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이것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봅니다.
이세벨이 그러했듯이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또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이 세상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한 순간에 찾아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닙니다. 아직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은혜 받을 때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은 기회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직 완전히 심판하지 아니하시는 이유는 구원 얻을 자를 찾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되기 전에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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