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편은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가는 자가 자신이 예배를 드리기에 합당한자인지 물어보는 시편입니다. 그래서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여기서 주의 장막이나 주의 성산은 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 하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성전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거하기에 합당한 자가 누구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때 그 대답이 2-5까지 있습니다. 2-5절까지에 10가지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은 예배를 드리기에 합당한 10가의 계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나서 그와 함께 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의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예배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요즘 여호수아서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요단강이 있고, 또 여리고 성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갈렙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나이가 85세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아낙자손의 산지를 그에게 달라고 합니다.
수14장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 불의를 행한다 하더라도 무조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동행해 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이성의 싸움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동행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이렇게 물어야합니다.
하나님이여 누가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삶을 살 수 있는 자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 물어보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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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크게 기도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기도에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기도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물어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이여, 누가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사람이며, 누가 과연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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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무조건 믿음으로만 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막연하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합니다. 그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믿음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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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자와 함께 하시며, 어떤 자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가? 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와 함께 하지 않는가? 어떤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다.
또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만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을만한 모습이 있으면 돌이키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늘 주님이 우리 삶에 동행해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능력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누가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동행해 주시는 자입니까?
2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1)첫 번째로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입니다(2).
2)공의를 일삼는 사람입니다(2).
3)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2).
4)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는 사람입니다(3).
5)또 그 벗에게 행악치 아니하는 사람입니다(3).
6)또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는 사람입니다(3).
7)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는 사람입니다(4)
8)또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 찌라도 반드시 지키는 자입니다(4).
9)또 변리로 대금치 않는 자입니다(5).
10)또 뇌물을 받아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않는 자입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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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영히 요동치 않는다는 말은 단순히 그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요동치 않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장막에 거하여,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시는 삶이기에 결코 요동치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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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해 주십니까?
1)먼저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정직하게 행한다는 거짓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겉과 속이 같은 투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거짓된 삶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체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체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체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주여, 주여” 하고 거룩한 체 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실수해서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솔직히 시인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과 함께합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과 동행해주십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의인의 기도와 간구에 하나님은 역사해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달라고 하는데, 혹 우리의 삶이 정직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까? 거짓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속인 부분이 있습니까?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또 그 다음은 공의를 일삼는 자와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공의는 공적인 의를 말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개인적인 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소한 인간관계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할 의가 단순히 개인적인 의만 아닙니다. 우리는 공적인 부분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의로워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것이 내게 어떤 이익이 있는 가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입장에서 옳으냐를 가지고 판단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개인적인 의만 아니라 공적인 의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의롭고 정직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의 입장만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의로운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봤을 때도 의로워야합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아모스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모스5:24에 보면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러가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세상 사람들 앞에서 불의를 행하고도 무조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달라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 함께 하십니다. 그런 자가 주의 장막에 거하며, 거룩한 성소에 거할 수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목회자 세금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았습니다. 교회는 비영리 공익단체이므로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에서도 교회는 면세지만 목회자는 세금을 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성직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말아야한다는 말은 공의의 차원에서 설득력이 없는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종교개혁의 정신에서는 만인제사장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직업이나 일반 직업이나 다 하나님 앞에서 성직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이 내는 세금을 목회자가 내지 않는 것은 공의에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동안 저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언론토론을 통해서 다시 생각해보니 목회자가 세금을 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늦게나마 저 개인적으로라도 세금을 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목회자를 세금을 내지 않는 탈세범으로 다 매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교단이나 나라에서 세금을 내라고 법으로 규정하면 세금을 내지 않을 목사님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목회자들 양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목사님들의 양심을 믿어줄 수 있어야합니다. 목회자 양심으로 생각했을 때 세금을 내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런 차원에서 이제는 세금을 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라고 생각이 됩니다.
3)또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십니까?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와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여기서 진실이라는 말은 '믿을 만한 말', '신뢰할 만한 말' 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절은 진실한 말과 대조되는 거짓된 말들이 나옵니다.
“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이 말씀은 모두 말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그 혀로 참소한다는 말은 원어로 발을 의미하는 말로서, 발을 가지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말로서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펄전은 말하기를 “남을 해롭게 말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자의 혀에는 마귀가 있고, 그 말을 잘 들어주는 자의 귀에도 마귀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 그 벗에게 행악한다는 말도 거짓된 말로 벗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그 이웃을 훼방한다는 말도 이웃에게 말로서 상처를 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벗이란 가까운 사람으로 내가 잘 아는 사람을 말하고, 또 이웃이란 내가 잘 모르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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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에 모 연예인에 관한 거짓된 말들 때문에 홍역을 치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프로에서 태안에 봉사를 하러 갔는데, 그것이 조작이 되었다고 인터넷에 돌았습니다. 그 출처를 알고 보니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학생이 장난삼아서 한 말이 씨가 되어 엄청나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의 성소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입니까?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입니까?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확인되지 않은 말은 퍼트리지 않는 자입니다.
요즘 우리는 너무 쉽게 누가 무엇이라 “카더라”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멀리 있는 사람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확실한 진실이 아닌 거짓된 말로서 가까운 이웃이나, 다른 사람에게 말로서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은 주의 성소에 들어오기에 합당치 아니한 자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 입술에서 진실 아닌 거짓된 말을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에 하나님이 함께 거하고 계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18장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확인되지 않은 말들이 있으면 먼저 그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서 일대일로 대화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 되면 두 명의 증인들을 통해서 대화를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확실한 사실이면 여러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도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십니까?
그것은 만일 우리의 말들이 진실된 말이 아니면 예배를 드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말들이 진실된 말이 아니면 하나님이 더 이상 그 사람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진실한 말만을 이야기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십니까?
4절에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여기서 망령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망령된 자를 멸시한다는 말은 그런 사람을 본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한다는 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본받는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십니까? 하나님일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존경하며, 본받으려고 하는 자와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십니까?
4절에 그 마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서원하고 약속한 것은 그에게 해로울찌라도 반드시 지키는 자와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5절에 보면 변리로 대금치 않는 자와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또 뇌물을 주고, 받지 않는 자와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변리로 대금한다는 말은 비싼 이자로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구약 시대에 완전히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형제나 동족에게 이자를 취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레 25:35-38; 신 23:19).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율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였다고 합니다. 바벨론에서는 33.3%가 요구되었고 앗수르에서는 심지어 50%까지 요구되었다고 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에 대해 고리 대금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가난한 자를 어렵게 하면서 하나님이여 나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늘 가난한 자를 생각하며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주 구체적인 부분까지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문제, 공의에 해당되는 문제, 또 남에게 거짓된 말로 상처를 주는 말에 관한 문제, 또 약속을 지키는 문제, 또 가난한 자를 대하는 문제, 또 뇌물에 관한 문제 등입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이런 것과 예배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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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 한 시간 예배를 어떤 형식으로 드리는가 하는 문제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 순서에 하나라도 문제가 있으면 온통 거기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불의를 행하고도, 우리의 입술이 거짓된 말을 하고, 또 가난한 형제를 무시하는 삶을 살고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옵소서,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복을 주옵소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음악의 기법과 세련되고 경건한 예배의 형식으로 조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아니하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형식적으로 완벽하고 경건한 예배를 드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예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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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마다 하나님께 물어봐야합니다.
하나님 누가 주의 성소에 들어가며, 누가 주의 성산에 오르기에 합당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시며,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까?
그때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과연 정직한 삶을 살았습니다. 공의의 삶을 살았습니까? 진실한 말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일상적인 삶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또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들을 목숨 다해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또 가난한 자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습니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한 또 하나의 율법과 계명으로 생각하지는 말아야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말씀들을 완전히 100프로 하나도 어김없이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얼마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십니까?
여러분 삶 가운데서 얼마나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단순히 내 삶의 악세사리 라면 우리는 대충 아무렇게나 살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어떻게 찾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아니하시면 한 순간도 살수가 없습니다. 사방에 대적이 있습니다. 위기가 있습니다. 힘든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돕지 않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아니하시면 살수 없는 상황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배의 자리에 나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절대 절명의 문제입니다.
만일 그 예배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아니하시면 다윗은 곧 죽을 수도 있는 상황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 불필요한 모든 죄들을 날마다 떨쳐 버리는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드린 10가지를 지키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 이 말씀에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내 삶속에서 정말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든지 이 모든 말씀들을 다 지켜 행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반석이시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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