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성경연구/로마서

양심의 기능과 한계(롬2:14-15)

by 금빛돌 2016. 3. 12.

지난주에 이세돌9단과 알파고라는 컴퓨터의 세기의 바둑대결이 있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제 앞으로 인간을 능가하는 컴퓨터가 나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현실적으로 그런 인공지능컴퓨터들이 나오면 사람이 그동안 감당했던 일자리들이 많이 없어질 것이 예상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과 컴퓨터가 어떻게 다른 가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보았습니다.

나는 오늘 바둑 생중계를 보고나서 허탈하고 우울했다. 막 울고 싶을 정도였다. 나도 이런데 이세돌 사범은 어떴겠나. 난 그가 돌을 던지고 일어서서 그냥 가 버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복기를 시작했다. "여기서 왜 이렇게 뒀나"를 물어도 대답해 줄 이 없는 고독한 복기였다. 순간, 나는 이세돌의 승리를 선언했다. 저게 인간의 위대한 점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계는 복기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복기한다. 졌지만, 졌기에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묵묵히 패배를 인정하면서 답해 줄 사람도 없는 반면 위에 다시 수를 놓아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이세돌은 승리했다. 남을 이기는 것은 힘이지만 자신을 이기는 것은 명철이므로...(명로진)”

/컴퓨터가 만일 게임에서 지면 절대 자신을 반성하지 않습니다. 컴퓨터는 단순히 데이터를 분석해서 무조건 그 다음에 이기는 데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왜 졌는가? 혹시 내가 방심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내가 너무 쉽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인간이 실패를 했을 때 자신을 돌아보며 끊임없이 반성합니다. 이와 같이 컴퓨터와 인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컴퓨터는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끊임없이 반성하고 또 반성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인간에게 동물과 기계와는 다른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31일에 동주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부러운 것이 아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워할 줄 모든 것이다였습니다. 이와 같이 또 사람이 기계와 동물과 다른 점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 양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말씀해주지 아니하시고, 나중에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맞느냐고 ,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듣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듣지 않았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율법이 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따라서 부모를 공경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도적질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양심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부끄러워할 줄 알게 하시고, 희미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양심을 잘 지키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위해서도 양심을 잘 지켜야합니다.

/딤전119절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딤전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단순히 믿음과 함께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양심을 버림으로 그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후메네요와 알렉산더를 말다. 그들은 양심을 버림으로 믿음에서 파선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여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딤전15절에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여기서도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을 경계하려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양심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믿음만이 아니라, 선한 양심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양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먼저 양심의 기능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양심을 마음속에 새겨진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는 단순히 성경책에 기록된 율법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양심에 율법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이방인들도 그들 마음가운데 양심이 있어서---하나님의 율법을 듣지 못했지만-그들 양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도 부모를 공경해야한다-거짓말하지 말아야한다-간음하지 말아야한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의 양심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양심으로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양심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양심으로 말씀해주십니다. 양심에 경종을 울려주십니다. 양심을 아프게 하십니다. 그래서 양심은 우리로 죄를 짓지 않게 합니다. 예를 들어 갑자가 교통법규를 어기고 싶은 상황이 벌어집니까? 아무도 보지 않는데 그냥 빨리 지나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 양심으로 경종을 울려주십니다. 그래서 사소한 죄라도 짖지 않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시16:7절에 시편기자는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고 합니다. 밤이겠습니까? 낮 동안에는 우리가 사람들을 의식하다보다니까 양심을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밤에 가만히 나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은 내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무리 바른 말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너무 심하게 말 했구나 네 말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이 상처를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렇게 양심은 우리로 죄를 짓지 않게 하심으로--앞으도 닥칠 재앙을 미리 막아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양심으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나중에 우리 현실의 삶 가운데서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채찍을 맡기 전에 양심으로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민감하게 들을 줄 알아야겠습니다.

-또 우리 안에 양심으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니다. 오래 전에 수련회를 다녀 온 사과가 반 박스 남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분이 그 사과 반 박스를 제 차에 넣어주셨습니다. 무심결에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 양심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사무실에 가져가라-그리고 같이 나누어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문자로 사과를 나누어 먹으라고 문자로 기록된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양심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기도 합니다.

또 우리에게 있어서 양심은 우리 자신을 보게 하는 거울이 됩니다.

만일 사람에게 있어서 양심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잘못하고, 외식되고, 거짓됨에도 불구하고 양심이 문제가 있으면-그런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은 감추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을 들추게 됩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남의 티만 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양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내면적으로 듣게 하시고, 또 우리 자신을 똑바로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어야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갖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왜 믿음을 저버리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선한 양심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선한 양심이 없으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조차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선한양심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도 온전히 지켜질 수 있습니다.

--또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선한 양심이 있어야 우리로 하여금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고, 또 선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사회지도급 인사 중에서 부정을 행하여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들이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만 가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양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죄를 지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차 조롱거리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벧전316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믿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양심을 가져야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선한 양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 양심이 선한 양심에서 악한 양심-더러운 양심이-나중에는 화인 맞은 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딤전 4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양심이 화인 맞았다고 하는 것은 옛날에 노예나 가축에게 화인, 즉 불도장을 찍어줍니다. 이렇게 불도장을 찍으면 절대로 바꾸거나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고 하는 것은 양심이 불도장을 맞은 것처럼 이제 타락해서 바꾸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2. 그러면 왜 우리가 선한 양심을 잃어버리게 됩니까?

1)딤전41절에 보면 잘못된 이단의 가르침을 받으면 양심이 화인을 맞게 됩니다.

당시에는 영지주의 이단이 있어서 영만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혼인도 육신적이라 해서 금하고, 음식도 육신적이라고 해서 잘 먹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주위에 잘못된 가르침(특히 이단)에 빠지게 되면 우리 양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양심이 타락하게 되고 양심이 화인 맞게 됩니다.

--요즘 가장 대표적인 이단이 신천지가 있습니다. 무료 성경신학이라고 해서 일주일에 네 번씩 모임을 합니다. 그런데 그 신천지는 자녀들을 가출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부모가 와서 말해도 절대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단의 가르침에 빠지게 되면 양심에 화인 맞아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들어도 양심이 찔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양심이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2)또 어떻게 할 때 우리가 선한 양심을 잃어버리게 됩니까?

우리 안에 더러운 욕심과 욕망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가지거나 명예와 자리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선한 양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3)또 어떻게 할 때 우리가 선한 양심을 잃어버리게 됩니까?

사소하게 짖는 죄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9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죄의 작은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두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처음부터 타락하게 되고, 화인맞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소한 죄를 용납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아무 것도 아니겠지 라고 하면서 우리 양심에 꺼리는 사소한 죄를 자꾸 짖게 되면-나중에 더 큰 죄에도 무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죄라도 짖지 말고, 작은 우리 양심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4)또 어떻게 할 때 우리가 선한 양심을 잃어버리게 됩니까?

양심에 꺼리는 행동을 할 때입니다. 양심에 꺼리는 행동을 자꾸 하게 되면 양심이 마비가 되고 병들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아울러 선한 양심을 잘 지켜 나가야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양심대로 잘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도 잘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과 함께 선한 양심을 가져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인간의 양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져야하지만 양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에는 어떤 한계가 있습니까?

첫째는, 우리가 양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데, 내 양심을 가지고 남을 비판하고 판단다고 정죄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양심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주신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보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양심을 가지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래서 롬2:15에서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양심의) 생각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자신에 대하여는) 변명하여 그 마음(양심)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합니다. 양심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정죄하려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변명하려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윤동주시인의 서시를 다시 읽어야합니다. 윤동주시인은 크리스찬입니다. 그는 서시에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양심이라 무엇인가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서시 (윤동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는 날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윤동주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날까지 하나님을 향하여 양심에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살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워하고 또 부끄러워했습니다. 친구인 몽규가 일제에 대해서 행동으로 저항할 때, 그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또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으로도 그는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했습니다. 여기서 윤동주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양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양심대로 바르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양심을 가지고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야합니다. 내가 누구의 눈에 티를 보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내 안에 있는 들보를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마다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인간이 가진 양심의 한계는 내 양심만 옳으면 다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내 양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도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바울 자신이 가진 양심으로는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인간이 만든 것으로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바울이 가졌던 양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양심을 가졌습니다.

이때 사도바울은 자신의 양심으로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생각해서 절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내 양심에 무조건 옳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내 양심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양심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양심에는 옳은데 그것이 다른 사람의 양심에 상처를 주는 것이라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인하여 내 양심의 생각을 양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양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내 양심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양심도 생각해 줄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마지막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가장 큰 한계는 아무리 선한 양심이라도 그 양심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느 정도 양심적이라야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설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최대한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또 내 양심에 있어서도 정직해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양심도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양심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해야합니다. 런데 우리가 어느 정도 양심적이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에서는 인간이 가진 그 어떤 양심으로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죄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이 가진 양심조차도 심히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17:9). 그런데 인간은 끝까지 자신의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날마다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느냐, 너의 그런 더럽고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고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느냐, 그런 죄악 되고 부끄러운 모습이라면 아예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래서 도리어 하나님께 나아가지 마라, 하나님께 피하라 도망하라, 그리고 네 양심상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될 때까지 예배도 참석하지 말고,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히브리서에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10:22 우리가 마음에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합니다.

여기서 양심의 악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양심의 악입니까? 내 양심의 선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좋은 것입니다. 양심은 필요합니다. 양심은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양심이 없으면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양심으로는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한때 새벽기도회에 나갈 때마다 양심에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밤늦게 까지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라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면 항상 내 양심이 나를 고발합니다. “네가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나고 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그 양심의 괴로움 때문에 새벽기도시간에 나가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내가 나의 양심으로 하나님께 나가려고 하는 것이 양심의 악이구나. 그래서 그 다음 부터는 새벽기도회 나갈 때 마다 예수님의 피를 생각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가는 길에 예수님의 피가 뿌려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양심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양심으로 생각하면 누가 과연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