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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고린도후서

사도의 증거(고후3장1-18)

by 금빛돌 2015. 11. 11.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31-3절에서는 사도바울에게 종이로 만든 추천장이 없어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우리의 추천장이라고 합니다. 32절에서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는 말은 너희가 우리의 추천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종이로 만든 추천장이 없었으나 복음을 받고 변화된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이 사도인 것을 나타내는 추천장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 사도인 증거로서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앞 6절에 있습니다.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사도바울은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사도인 증거로서 그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이라는 말은 구약의 옛 언약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구약의 옛 언약은 율법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새 언약은 율법과 대조가 되는 복음을 말합니다.

즉 이제 우리는 구약시대처럼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시대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여 이제는 새로운 언약의 시대 즉 신약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율법을 전하는 것도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더 영광스러운 직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7절에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라고 합니다. 돌에 새겨서 사람을 죽게 하는 율법을 전하는 직분도 영광이 있는데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8절에 하물며 영의 직분(즉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 합니다.

9절에 정죄의 직분(즉 율법으로 사람들의 죄를 정죄하는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즉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하는 의의 직분, 즉 복음을 전하는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옛 언약 즉 율법을 전하는 직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새 언약 즉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가졌기에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참 사도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누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사도입니까? 율법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사도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그 죄를 이기게 해주고 씻어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참된 사도로 전하는 복음에 대한 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고후312절에서 우리가 이같은 (복음에 대한)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라고 합니다. 즉 사도바울은 복음에 대한 아래와 같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영원히 없어질 소망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율법은 없어질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예수그리스도앞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는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 얻은 이후에 성화의 삶을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는 율법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제 없어질 소망이 아니라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출애굽기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올 때 그 얼굴에 수건을 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율법)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즉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올 때 얼굴에 수건을 쓴 것은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구원얻기 위한 수단으로 장차 없어질 율법에 주목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라고 말합니다.

즉 모세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에 바라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수건을 썼는데, 유대인들은 구약을 읽을 때마다 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구약을 읽을 때마다 수건을 쓰고 있다고 하는 것은 실제 수건을 쓰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진 편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그래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지 않느냐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16절에서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지금이라도 언제라도 예수님에게로 돌아가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주의적인 편견들이 벗겨지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복음에는 참된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율법을 지켜야겠습니까? 그리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면, 내가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항상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혹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못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안에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자유하게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더욱더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혹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실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용서주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로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제공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는 대조가 되는 복음의 영광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사도인 증거로서 율법보다 더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율법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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