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강의
97년 2학기 강의
우리가 흔히 지혜문이라고 하면 이렇게 라벨을 붙이는 것 자체가 특정 신학입장을 내거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분류를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명칭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욥기, 시편, 잠언 등의 책들은 다른 책들과 분명히 구별된다. 특별히 붙일 명칭이 없으므로 이 명칭을 사용하나 마음으로는 좋지 않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가 다른 책들과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가?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전선지서와 비교해보면 분명히 차이가 난다. 협의의 선지서들은 오경, 역사서와 성격이 다르나 욥기, 시편, 잠언과 비교하면 확연히 구별이 간다. 여기서 욥기, 시편, 잠언, 전도는 역사를 서술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 책들의 전체 성격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것인가 저 자신도 준비가 없다. 여러 독특한 성격중의 하나가 신앙인으로서는 매우 터부시하는 것들이 많이 나온다. 왜 인생살이가 이 모양입니까? 왜 세상이 이렇습니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 믿어지지 않을 때 믿어라 라고 한다. 욥기, 전도서를 보면 이단처럼 느껴진다. 다른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신앙인으로서 우리를 당혹케 하는 인간의 모습, 생각들을 강력하게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전도서이다. 전도서는 제일 해석하기 어려운 책이다. 아직도 전도서는 제대로 번역한 번역이 없다. 제대로 번역도 되지 않았다. 단어자체가 어려워서라기 보다도 내용이 너무 이상해서이다. 생각해보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는 짤막한 내용이후 나오는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하는 이 말을 보라. 또 한 장을 넘어가니 또 헛되다고 한다. 계속 넘겨도 허무하다고 한다. 마지막 장에 가도 청년들아 젊어서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하는데 결국 뒤에 가면 허무하다고 한다. 허무하다고 시작하더라도 마지막에서는 다른 말이 나오면 좋은데 시종일관 허무하다고 한다. 이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도서에 관한 주석을 보면 옛날 유대인들의 랍비주석이나 최근의 주석이나 보수 자유주의신학자들을 물론하고 전도서 앞에서는 모두가 다 당혹스러워한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한가? 허무를 가르치는데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확실히 붙잡고 믿어야 하는데 자꾸 허무하다고 하면서 낙망을 시키는데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전도서에 대한 해석을 보면 천차만별이다. 또 자주 나오는 말 중에 그래도 해아래서 사는 최선의 길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올데갈데 없이 이단이다. 바울서신에 보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세상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요즘사람만 느끼는 당혹감이 아니다. 랍비들도 그랬다. 오경과는 너무나 다른 책이기 때문에 그렇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왜 그런가? 라고 하면 답이 없다. 원래 랍비들의 글은 그렇다. 우리로서는 상상이 안가는 해석들을 제시하면서도 왜 그런가하면 대답이 없다. 사해사본에서 발견되는 주석서들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근거를 대지 않는다. 그들의 이유가 무엇이든 랍비들이 영해하고 비약적인 해석을 했다고 하는것은 간접적으로 그들이 전도서앞에서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느꼈는가 당혹감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죄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한동안 전도서가 유대인들에게서 정경성이 없다고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본래 이것이 이단적인 서적이었는데 말미에 묘한 에필로그를 붙여서 성격을 바꿔서 정경에 넣었다고 한다. 똑똑한척하지만 옳은것 같지 않다.
첫번 문제로 되돌아가서 전도서는 순 허무를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고 하낟. 전도서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허무에 대해서 의심,낙심, 허무 이런 것들이 과연 신앙인들에게서 자리잡을 여지가 있는가? 이단이 아닌가? 조금만 의심하고 믿지 못하면 믿으라고 윽박지름을 당했는데 성경자체가 자꾸 허무하다고 부르짖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읽은 책이 아니라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을 때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읽지 말라고 권하는 대표적인 책이 아가서이고 또 조금 머리가 큰 아이들에게는 전도서를 읽지 말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너무 쏙 드는 말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기에 너무 좋은 말들을 하고 있기에 읽지 말라고 한다.
허무라고 하는 것이 신앙인들이 믿음 안에 수용될 여지가 있는가? 아니면 철저히 배제될 것인가? 이 문제를 잠깐 다루고 싶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다 암시를 받아서 신자들에게는의심이나 허무적인 감상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한 눈치는 다 있겠죠. 그럼 신앙인도 허무를 느끼고 의심을 해야 하는가? 처음부터 믿음을 깨뜨리는 소리를 해야 하는데 한학기 동안을 계속해서 이런 말을해야 하고 여러분을 계속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다. 허무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는가? 세상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보고서 허무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느끼고 생각하는 기능이 잘못된 사람이다. 세상에 허망한 일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앞으로 하나님 나라의 나타날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현재상태를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전창조계는 허무한데 굴복하고 신음하고 있다. 허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시각의 차이에 따라 기쁨과 슬픔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다 현재 피조계는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다. 그 피조계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역사, 사건들을 보면서 허무를 느끼지 못하면 잘못된 사람이다. 정상적인 감각이 없는 사람이다. 이것은 허무한 사실들을보고 허무감을 느끼는 것이야 누가 뭐라겠는가? 성경을 보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헛되다는 것을 많이 말한다. 수없이 있다. 헛된 세상을 보고 헛되다고 느끼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하다. 이런 본질적인 정당한 허무 외에도 다른 종류의 여러 허무함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워낙 안믿고 불신앙하니까 의심의 꼬리만 보여도 자르라고 야단했지만 허무함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것도 있고 필욘적인 것도 있고 불가피한 것도 있다. 따라서 신자에게 있어서도 신앙안에 허무감이라고 하는 것은 차지할 자리가 있다. 대표적인 예를 보자. 욥기를 보자. 욥기를 보면 너무 복잡해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 집어 치우고 42장만 보면서 이제는 귀로 듣기만 하다가 눈으로 본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러면서 첫장과 마지막 장만 보고 욥의 인내만 기억한다. 그런데 실상 성경을 보면 욥기의 대부분의 장을 욥의 참담한 갈등과 회의와 허무감을 서술하는데 할애한다. 그가 그 시험가운데서 어떤 고통과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국 이런 한단계 높은 믿음에 이르게 되는가 서술하는데 거의 다 할애한다. 한가지 물어봅시다. 욥이 느낀 허무감이라고 하는 것이 신자들에게 불필요한 것인가? 욥의 불신앙과 관련된 것인가? 욥의 낙심을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볼 것인가? 욥에게 닥친 시련이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보아야 하는가?욥에게 임한 시험이 욥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은혜라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욥이 밝히 허무와 낙심은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긍정적인 결과를 위해서 필요한 요소로 볼 수 밖에 없다. 낙심, 의심 허무가 신앙인에게 있어서 믿음에 정상적인 자리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허무함이나 이런 것들에 관한 것은 시편에도 수없이 나온다. 그런데 시편 전체에서 신자가 느끼는 허무에 대해서 취급하는 시편이 73편이다.
시 73: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시 73: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시 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 73: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시 73: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시 73: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시 73: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시 73: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시 73: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시 73: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시 73: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시 73: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 73: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 73: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시 73: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시 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 73: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시 73: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시 73: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시 73: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시 73:22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시 73: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시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 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 73: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헛되이 나를 깨끗게 하였다고 한다. 좌절과 허무를 표현한다. 허무의 깊이에 대해서 심각함에 대해서 우리가 지나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기자가 겪은 참담한 고통, 실족할 뻔했다고 하는 영적 위기의 심각함을 놓친다. 우리가 실제로 영적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래서 대처능력을 잃어버린다. 이미 믿음의 선진들이 이런 일들을 얼마나 무서운 영적 위기를 겪었는가를 눈여겨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하게 된다. 그래서 정말 실족할 수 있다. 시편에 보면 신자들이 느끼는 회의 허무감이란 내용이 많음에도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것은 그 결론이 소망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낳은 여인이 낳고 나면 해산의 고통을 다 잊듯이 그렇다. 사실 부조리도 피조계가 죄의 악의 결과로 허무한데 굴복한데로 나오는 현상중의 일부이다. 따라서 우리가 피조계를 보면서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필연적이다. 다만 성경의 경우는 시편 73편에서도 보듯이 허무가 허무로 끝나지 않는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피조계가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을 말할 때에 동시에 무엇을 말하는가?소망중에 굴복했다고 말한다. 허무한데 굴복하는 순간에 마지막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대한 소망이 주어진 전제하에서 그들이 허무한데 굴복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성경이 말하는 허무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접근해야 하겠는가에 대한 개괄적인 원칙을 제시했다. 그런데 전도서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시편 73편처럼 허무를 말하다가 마지막에 주밖에 내게 없다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마지막에도 허무하다고 한다. 그래서 우선 느끼기에는 전도서에서의 허무는 좀 특별해 보이니까 어떻게 보는가를 보자. 글의 흐름으로보면 끝까지 허무로 끝나는 것 같은데 과연 그런가? 아니면 어떤 모양으로든 허무가 극복되고 있는가?그렇다고 하면 어떤 모양으로 극복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봅시다.
허무라는것이 어떤 면에서는 정당한 면이 있고 불가피한 면이 있을지라도 바람직한 면은 아니다. 신앙의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정상적인 바람직한 무엇을 본다기보다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에 주의하는 별다른 상황, 내용을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미리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전도서가 특수하다는 사실, 흔히 사람에 따라 직선적으로 좋은 말만 하는 사람만 있는가하면 비비꼬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분별을 못하는 사람이 있다. 비비꼬인 사람일 수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가 복잡하다. 그래서 전도서를 읽어가면서 의외의 상황에 많이 부닥치게 된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곶이 곧대로 들으면 큰일난다. 최선의 길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아무래도 진심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글이 단순치 않다는 것이다. 전체 글의 내용의 흐름, 문맥을 의식하지 않으면 해석이 오해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말씀드린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전도서에 대한 정확한 견해나 주석들이 없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iflf$UryiB |elem diwfD-}eB telehoq y"r:biD 1.1
전도서는 우선 위와 같은 짧막한 서론으로 시작한다. 다윗의 자손이요 예루살렘의 왕인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한다. 우리가 선지서에서 이와같은 서언을 보았다. 어떤 시대에 누구누구 시대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선지서와 성격이 다른데도 선지서의 서론과 같에 비견될 수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선지서에 그와같은 서론이 예언서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서도 이 말도 같은 기능을 가질 것이다. 전도서의 내용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예언서의 글의 본질을 암시한 것을 봄녀 대개 누구누구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것이 무엇인가? 전도자라는 말,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 왕이라는 말이 있다. 단순히 다윗의 아들 왕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려고 지면을 할애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내용과 본질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diwfD-}eB이라는 말은 어떤 말인가?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어떤 말인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말에서 그 내용은 어떤것을 갖고 있는가? 다윗의 언약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다윗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표현이 diwfD-}eB이다.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말은 1장 11절에 보면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한다. 이 말은 그저 여러 민족들 가운데 최고 통치권자의 직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치리자라는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 교회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telehoq을 어떻게 번역하든지 diwfD-}eB이나 {iflf$UryiB |elem이라는 말은 단순한 현자의 말이 아니라 교회를 다스리는 그것도 다윗의 약속과 관련된 일입니다. 교회의 수장, 교회를 다스리는 자로서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하의 내용이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야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니까 문제가 없지만 여러책들 중에 이 전도서를 가지고 있다면 하면 이것을 보고 당장에 어떻게 이 책을 볼지가 달라질 것이다. 교회의 치리자의 책임자로서 말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코헬렛에 대해서 봅시다. telehoq 우선 문법적으로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가? 칼 여성 분사 단수이다. Qal. 여성분사는 두가지가 있다. ה???와 ת??? 두가지이다. 그런데 telehoq이 다윗의 자손 예루살렘의 왕과 동격으로 되어 있다. 여성과 남성이 동격으로 되어 있다. diwfD-}eB이 남성임이 분명하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가 말이 많으나 대개 솔로몬이라고 한다. 실제성이 남성인데 왜 여성을 사용하는가? 실제로 남성임에도 여성성을 사용하는 이유를 말한다면 어떤 직분자로서 이야기할 때는 흔히 여성형을 쓴다고 되어 있다. 비슷한 예로 에스라서 2장 55절 보면 브네 소페렛이라고 되어 있다. 남성인데 여성으로 되어 있다. 이사야서 40장 9절에 보면 높은 산위에 올라가라 시온에 복음을 전하는자여라고 되어 있는데 여성분사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만일 직분자를 가리키는 성으로 보지 않고 실제성으로 보면 여성만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telehoq도 이에 준해서 이해해야 한다. להק(카할)의 의미가 무엇인가? denominative verb라고 한다. 본래 명사가 있고 거기에서 동사가 파생된 것을 말한다. להק은 회중으로 쓰인다. 이런 명사의 뜻이 동사가 되어서 불러 모으다, 회집하다는 의미를 갖게된다. 이런 뜻이 되었다고 하면 telehoq은 분사형이므로 부르는자, 소집하는 자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이 뜻에 적하하지 않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 telehoq을 어떤 모임에서 회중이 모인자리에서 말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회집한 회중에게 무엇인가 말하는 사람의 뜻으로 해석해서 전도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대개 전도서의 명칭이 ecclesiastes로 되어 있는데 ---에는 설교자라는 제목을 붙여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것은 아직도 불분명한 구석이 많아 무엇이라고 꼭 집어서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이 말하는데로 전도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그렇게 본래의 뜻에서 멀리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와서는 전혀 엉뚱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집자라고 한다. 왜 그런가? 전도서 12장에 보면 이것들을 수집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집자, 편집자라고 한다. 그런데 카할이라는 동사가 문서, 글을 수집하는 것으로 사용된 예가 없다. 대상이 언제나 사람이다. 그리고 문맥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너 나아가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나아간 사람을 불러 모으는 자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전도자라는 말이 더 맞아 떨어진다. 우리 말 번역과 맞아 떨어진다. 어디로가는지 잘 모르겠죠? 처음에는 허무에 대해서 말하다가 이제는 엉뚱하게 코헬렛으로 말하니까 여러분 긴장도 이완시킬겸 좋잖아요? 이런 작업들도 일일이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이런 부분까지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코헬렛이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1장 16절에 보면 이 전도자 자신의 지혜의 탁월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내 앞서 예루살렘에 지배하던 모든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다고 하고 있어 이는 자기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치리자들을 말하고 있다. 모든(콜) 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여러 왕들을 가리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2대왕입니다. 자기 아버지 한 사람 놓고 모든 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보면 솔로몬이 아니고 다윗으로부터 여러대를 거쳐 즉위한 왕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라고 하기에 이것이 결정적으로 장애가 되는가? 자기 아버지 한사람 놓고 모든 왕이라고 할 수 없는가? 12장 9절에 보면 자기를 많은 잠엄을 수집하고 편찬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이 솔로몬 이외에 또 있는가? 물론 잠언 25장에 보면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잠언을 수집편찬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아직 수집되지 않은 솔로몬의 잠언을 수집편찬한 것이므로 이들은 전도서 12장에서 말하는 telehoq과는 성경이 다르다. 그러므로 12장 9절의 내용을 감안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여기서 이야기되는 모든 것으로 봐서 자기의 지혜를 특수하 것으로 말하는 것을 봐서 이것이 자기 과정이 아니라고 한다면 솔로몬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와 다윗의 자손 전도자의 말씀이라는 짧막한 말 다음과 같은 일성을 듣게 됩니다.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자가 이르기를 헛되고 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lebfh loKah {yilfbAh l"bAh telehoq ramf) {yilfbAh l"bAh 1.2
복수 단수
l"bAh은 허무라는 말이다. 같은 명사를 단수와 복수와 연이어서 연계형으로 이은 것은 최상급의 표현이다. {yilfbAh l"bAh은 허무중의 허무이다. 아가서도 노래중의 노래라고 하여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한다. 여기에서 l"bAh이란 말은 본뜻이 “입김(breath)”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입김과 증기와 같다는 것이다. 입김과 증기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이 무엇인가? 견고한 속과 본질이 결여된 것이다. 훌나라가 버리는 것이다. 왜 덧업다, 찰라적이다, 잠정적이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보면 loKah {yilfbAh이라고 되어 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되어 있다. 아무것도 없다. 알멩이가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 허무중의허무 가장 극단적인 허무, 최고의 허무라고 한다고 한다면 이 문장은 두가지 이해를 할 수 있다. 허무중의 허무다. 모든 것이 허무다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이 구조는 그가 느끼는 허무의 감정에 대해서 허무함 그 자체에 대해서 이중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가능성은 허무중의 허무라고 말하고 나서 그 구체적인 내용이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적절해 보이는가? 성경을 찬찬히 보면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것이 더 은혜가 되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움직이죠? 뒤엣것이 더 은혜로운가? 만일 첫번째 것이 맞다고 한다면, 전도자가 그가 느끼는 허무함을 두가지로 이중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면 loKah {yilfbAh은 허무중의 허무이니까 허무의 정도가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사람이 해아래서 수고하는 그 모든 수고의 유익이 무엇인고? 그가 느끼는 허무의 깊이와 넓이를 말한다음에 그가 왜 그런 깊고 넓은 허무에 빠지게 되었는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emf<ah taxaT lomA(Ye$ wolfmA(-lfk:B {fdf)fl }wor:tY-ham 1.3
여기에서 }wor:tY은 여러가지로 번역되는데 남는것, 이익이라고 번역되는데 본래 뜻은 무엇인가 나은 것, 초래되어지는 것, 결과입니다. 말하자면 결과가 무엇이냐? 남는게 무엇이냐? 인간이 남는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해아래서 그가 수고하는 모든 수고에서 거두는 것이 무엇이냐? 얻는게 무엇이냐? 전도자는 전도자의 허무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해아래서 수고한 수고의 결국 얻은것이 무엇인가라는 말로 그의 허무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반응, 이와 같은 그와 그의 결론은 그가 이전에 시도한 것이 무엇인가? 그가 해아래서 수고한 모든 시도 즉 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전도자의 허무는 그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건질것이 없다는 사람의 허무입니다. 인생을 돌아보니 일장춘몽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없고 알멩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말 큰일날 소리죠? 의미가 없다니! 전도자는 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될지 궁금하실지라도 저는 앞으로 여러분들을 계속 허무속으로 빠뜨리는 말을 해야 하는데 여러분을 낙담시키지 않으면서 끌고갈 것인지 암담합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흐름의 특성을 알면 허무를 말한다고 해서 전도자의 참된 의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허무하다고 결론내릴 수 밖에 없는 불신앙속에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고서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얻고자 함에 있어서 반드시 얻어야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전도서는 말 그대로 전도하기에 제일 적합한 책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삶은 허무하다고 한다. 전도하기에 좋은 책이다. 그렇다고 하면 관심이 좀 생기는가요?
예루살렘의 왕 다윗의 자손이란 말이 그저 이스라엘의 한 왕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선지서들을 보면 이 말이 의미심장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일반 세상 왕이 아니라 특별히 이스라엘의 왕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로서 메시야라고 하기도 한다. 교회의 치리자이다. 교회를 다스리는 자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루살렘 왕 다윗이 자손 전도자의 말이라는 것은 교회의 치리자로서 주는 말이다. 물론 전도자가 여기서 하는 말슴은 선지서의 말씀과 성격이 다를른지 모릅니다. 선지서는 “하야 엘 누구누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전도자의 말과 이 전도자와 관계가 무엇인지 애매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12장에 가면 알게 됩니다. 전도자가 생각하고 사색하는 중에 그것과 함께 더불어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형식이 다르다고 본질이 다르지 않다. 누가복음도 보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받은 것같이 천사가 나타나서 환상으로 계시한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은 여러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썼는데 그것을 다 살피고 재보고 사료를 다 모아서 정리하고 평가해서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처럼 기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형식으로 썼다고 해서 누가복음이 계시가 아닌가? 성경의 영감이 작용하지 않았는가?형식상의 차이가 계시의 본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전도자의 말이라는 것이 12장에 가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역시 교회의 치리자를 통해서 주어진 계시라는 성격은 변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적고 있는 글의 성격을 초두에서 밝힌 다음 또 다른 우리에게 아주 너무 생소한 두려움까지 느끼게 하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가 느낀 허무의 깊이와 허무의 넓이를 표현하는 말 “허무중의 허무”라고 한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가 느끼는 이와같이 깊고 넓은 허무감이 무엇과 관련된 것인가?어디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인가를 밝혀주는 내용이 3절입니다. “사람이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에 있어서 사람에게 결국 남는 것이 무엇이냐?얻는 것이 무엇이냐?” 이런 반문은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고백한 고백의 전제가 되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사람은 사람이 해아래서 해아래서 수고하는 남는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을 역으로 풀면 해아래서 사는 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아무곳에서도 가치를 못찾고 허무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생애서 얻는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해아래서 수고하는 그의 모든 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למע은 too labour이다. 히브리어에는 일이라는 말이 여럿 나온다. 전도서에 보면 השׁר?라는 말이 있다 손으로 하는 일이다. 또 10계명에서도 일이라는 말이 나온다. הכאלמ(멜라카)이다. האל에서 왔다. 이 말의 근본적인 뜻이 무엇인가? ךאלמ가 여기에서 나왔다. כאל는 보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הכאלמ 는 보낸 일, 맡긴 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맡겨서 보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10계명에서 안식일에 네 일을 하지 말라는 것에서 그 일이 부정적인 일이 아니다. 그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일이라는 여러가지 단어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여기에 המע라는 말을 썼을까? 이는 전도자가 그의 행하는 모든 일들을 보는 시각, 그의 평가를 반영하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니까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은 결국 “고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이 또는 수고에는 어떤 수식어가 있다. $emf<ah taxaT lomA(Ye$ 가 나온다. lomA(Ye$ 를 미완료로 사용한 것은 지속적으로 계속 행해지는 것을 말한다. $emf<ah taxaT“해아래서”는 전도서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이 무슨 역할을 하는가?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는 인간이 행하는 모든 수고를 제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해아래서 하는 일이라고 해서 인간의 일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해아래서”라는 말이 무엇인가? 이말은 다른데서는 안나온다. 이것을 전도자가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구절이 5장 18절(히브리어로는 5:17)에서 나온다. 우리말에는 “해아래서”라는 말과 “평생”이라는 말이 떨어져 있으나 히브리어로는 같이 붙어 있다. 평생은 해아래서를 동격으로 설명하는 기능을 한다. “해아래 곧 그의 적은 생명의 날수, 살아 있는 잠간 동안에”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 그에게 허락하신 짧은 생애 기간, 생애 날들이라는 말이 해아래서라는 말의 설명이다. 6장 12절에 보면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라” 고되어 있는데 신후에 해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지라는 말이 죽은 자는 나중에 분깃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에서 해아래서가 무슨 말인지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개인으로 보자면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일반화해서 말한다고 하면 현창조질서 내에서의 일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도자가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려고 한 그 삶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과 공간적으로 제한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아래서, 이 땅에서, 현창조질서에서입니다.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이 창조질서에 참여하는 자로서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삶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려고 한 것이다. 이 아래서서, 전창조질서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죄악에의해 오염되고 저주와 심판아래 있습니다. 지금 전도자가 염두해 두고 있는 것은 초월영역이 아니라 죄악이 있고 온갖 부조리가 만연한 해아래서 이루어지는 일들의 가치를 찾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에서 얻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에서 사람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ם?אָ?이라고 되어 있다. 정관사를 통해서 대표단수를 나타낸다. 집합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해아래서의 일도 모든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다. 모든 수고라는 말은 무슨 말로 일반화할 수 있는가? 역사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아래서의 역사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개개인의 생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의 의미를 염두해두고 이런 반문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한다고 하면 전도자의 반문은 현창조 질서속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의 살, 또는 현창조실서 속에서의 역사, 철저히 세속속에서의 삶과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이 역사가 인간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에 이 삶과 역사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인간이 역사의 주체이든 아니든 역사에 참여하는 당사자임이 분명할진데 이 해아래서 또는 그의 삶속에서이루어지는 생애가 역사가 그 당사자에게 있어서 나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철저히 현세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개인의 생이나 역사의 의미를 발견하겠다고 하는 그것밖에 보지 못한 전도자가 참으로 허무하다고 선언하고 나서 4절부터는 왜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가?의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전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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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가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서 있도다. 어떤가? 선문답 같지 않는가? 성경은 풍류들이 하는 선문답같을 때가 많이 있다. 그래서 그냥지나치기 쉽다. 여기보면 세대, 땅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다음에는 하늘에 있는 천체를 대표하는 해가 나오고 바람이 나오고 물이 나오고 이런 것들의 움직임에 함축된 뜻이 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깊이 사유하는 사람에게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헬라철학과 조우한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이 쓴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특별히 순환적역사관과 뗄수 없는 관계가 있으므로 솔로몬이 지은 것이 아니라 포로후 헬라문화가 발현한 곳에서 연구하고 쓰여진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헛소리들이다. 몇천년 전에 일어났는데 어떻게 그리 잘아는지 모르겠어요. 허기야 떨어지는 물방울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사람도 있으니까! 여기에서 지금 전도자는 무엇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요? 본래 창세기에 표현된 피조계는 어떤 말로 표현되어 있어요? 하늘과 땅이라고 하고 있어요. 여기서는 땅만 언급되고 있다구요. 왜 그럴까요? 왜 하늘과 땅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을까요? 전도자는 관심의 대상을 해아래로 국한시키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아래 보니까 해가 나오죠. 해는 하늘에 속한 것인데라고 생각이 들 것인데 여기서는 해를 땅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예요. 여기서는 땅을 포괄적으로 보고 있는 거예요. 물리적 실제 전체, 우주공간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땅으로 보는 거예요. 이것은 역으로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하늘도 물리적 공간의 하늘이 아니라 땅과 구별되는 초월영역을 가리킬 가능성이 많아요. 단순히 우주공간을 가리킨다고 하면 앞뒤의 연결이 잘 안될 때가 많고 그러면 하늘을 무엇과 동의어로 사용해요?궁창과 동의어로 사용해요. 여러가지 복잡해요. 그래서 다수의 학자들은 창세기 1장 1절의 하늘을 초월영역을 영적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요. 영적 세계조차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도는 해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역사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그의 시선을 피조계 전체로 돌렸습니다. 땅 그 안의 모든 피조물들을 바라봤습니다. 또 달리 말하면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해아래서라는 말고 같다고 하면 바로 전도자가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역사가 펼쳐지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영역을 본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의 틀이요 환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땅을 살펴본 전도자는 한마디로 땅의 본질을, 땅에서 일어나는 본질을 말하기를 “한세대가 가고 한세대가 오나 땅은 영원히 서 있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함축된 의미가 무엇인가? 한세대 한 세대가 온다는 것은 그대상을 어떤 관점에서 본 것인가? 시간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역사를 짧은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대라고 하는 말, רוד, 세대는 통속적으로 어떻게 정의되는가? 사전적 의미는 대개 한사람의 출생에서 그 다음대의 출생까지의 기간을 한 세대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사람이 출생해서 그 다음대의 출생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에 포함되는 동일한 시간대에 속하는 사람들을 총칭해서 세대라고 해요. 이렇게 어떤 일정기간에 포함되는 무리는 그 기간을 공유하는 집단입니다. 그 시간에 함께 태어나서 공유하고 죽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한세대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슨 말인가? 인생의 한주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대의 세대를 비교해보면 어떠해요? 거의 다 비슷한 과정을 겪잖아요? 태어나고 죽는 기본적인 틀은 세대마다 같아요.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이예요? 그것이 반복된다는 거예요. רוד 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명사형은 빙빙도는 주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반복성을 말해요. 그런데 한 세대가 가면 한세대가 온다고 해요. 이것이 무엇이예요? 반복된다는 의미를 갖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하면서 같은 세대는 아니지요. 역사의 진행성, 우리가 매년 4계절이 있으나 동일한 것의 반복은 아닙니다. 작년의 봄과 올봄은 다릅니다. 순환하면서 새로운 진행성, 역사의 직선적 흐름입니다. 한점은 다른 점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직선적 흐름이라고 합니다. 시간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 역사의 모습을 이렇게 한마디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땅위의 역사는 순환 반복성을 갖는 동시에 직선적 흐름의 성격도 갖고 있습니다. 순환성은 어떤 사회에서 나타나기 쉽습니까? 농경사회입니다. 계절을 봐가면서 계절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므로 역사의식이 순환적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매우 독특한 민족이다. 최초로 역사를 직선적으로 이해한 민족이었다. 나중에 농경적 순환적 역사관이 수입되어 두가지가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다 헛소리이다.” 옳은말 같은데 다 헛소리이다. 일반 역사에서는 그렇게 본다. 성경은 역사는 순환적이며 직선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해아래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땅은 서있다고 하고 있다.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있다. 그 전체로서의 역사의 틀, 질서는 견고히 서 있어 흔들림이 없다는 말이다. 이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세대들이 끝없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한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면서 변화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전체를 포괄하는 땅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견고히 서있다.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다른말로 이런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 않겠는가! 땅을 지탱하는 땅아래 있는 모든 것을 지탱하는 틀이 견고히 서 있다. 불변의 것이다. 땅의 이런 성경, 역사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땅을 전체적으로 볼 때는 시간의 흐름에서 흘러가는 것 같지만 변함이 없다. 전체적인 시각에서 포괄적으로 이야기를 한다음에 구체적으로 땅의 역사의 성격을 이렇게 보게 된 근거를 말한다. 그것이 해와 바람과 물의 움직임입니다.
전 1: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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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바람, 물이 언급되는데 해는 천체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천체를 대표해서 하나의 구체적인 예로 언급된 것이다. 해의 거주, 활동영역이 어디입니까? 하늘 영역입니다. 그런데 이 해의 움직임을 보니까 해가 떠서 해가 지는데 이것이 한 주기입니다. 이것만 보면 이것으로 끝나버리면 떠서 져버리니까 단회적이서 반복이 없어요. 그런데 떠서 져버리는가 했더니 그 다음날에 또 뜨드러는 것입니다. 반복이 된다는 것이죠. 주기적 순환적 운동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같은 일을 반복하게 하는 질서, 법칙의 존재를 전제합니다. 우리가 찾아내는 자연계에서 찾아내는 모든 법칙의 추론은 반복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규칙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같은 것이 반복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법칙이란 말을 사용하고 찾아냅니다. 천체라고하는 것은 우리와 가장 멀리 높은 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한한 하늘, 활동공간을 가진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람의 손이 다을 수 없는 가장 높은 먼 영역입니다. 초월영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무한한 활동공간에서 가장 큰 활동의 자유가 허락된 존재입니다. 이 천체를 예부터 신적존재로 믿어왔고 우상종교에서는 신격화되기도 했습니다. 신격화되기까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천체의 움직임이 지상역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역관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신비롭고 무제한의 활동공간과 자유가 주어져 있고 허공에 떠 움직이는 그 무한한 공간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것도 질서가 있어서 제곳을 향해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제 본자리 정해진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axUrfh bf$ wyftobyib:s-la(w axUrfh |"lOh b"bos b"bOs }wopfc-le) b"bOsw {worfD-le) |"lOh 1.6
바람의 부는 모습을 가리키는데 남쪽으로 가다가 휙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람이다. 제마음대로 갑니다. 바람의 움직이는 것이 자유분방하듯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포착하기 어려운 존재의 움직임이 바람의 움직입니다. 여기에서 성령님의 포착함의 신기함을 바람의 움직임에 비유하고 있어요. 바람이 한방향으로 움직이다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임의의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이 움직임을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기록했어요. 그러나 가장 자유분방하고 예측불허의 임의의 운동을 하는 것 같은 바람의 움직임도 돌아가서 반복하는 다양한 방향전환속에서 움직이는 그 자유분방한 움직임의 풍로로 되돌아간다. 바람도 길이 있다. 그 자유로운 바람도 되돌아가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tekflfl {yibf$ {"h {f$ {yik:loh {yilfxNahe$ {woq:m-le) )"lfm UNeny") {fYahw {fYah-le) {yik:loh {yilfxNah-lfK 1.7
물의 운행을 살펴봅니다. 지하수가 아니라 지표수를 염두해 두고 있습니다. 모든 시냇물이 바다 한곳으로 흘러간다. 든든한 지표에서 일정한 방향과 일정한 목표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허공에 떠서 움직이는 천체의 움직임과도 다르고 자유분방한 바람의 움직임과도 다르고 바다로 계속 흘러들어가니까 바다가 넘쳐야 하는데 바다가 넘치는 일이 없다. 이것은 제자리로 되돌아가서 그와같은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방향, 한장소에서 움직이는 단회적인 움직이도 실상은 반복적이요 순환적이라는 것이다. 시냇물이 흘러나온 바로 그 자리 본래의 위치대로 되돌아와서 또 다시 흘러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피조계의 모든 움직임, 땅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움직임을 보니 인간의 삶이 외부적 틀이라고 하는 땅의 움직임을 보니 순환적이고 반복적이라는 것이다. 땅의 모든 움직임은 순환적이고 반복적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고 그 한계뒤에는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적 자유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렇게 이야기한 다음에 전도자는 피조계의 삶의 장소,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살핀 다음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고 있다. 8절에 보면
전 1: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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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아 만족함이 없고 귀로 만족함이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만물의 피곤함을 말로다 할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만물({yirfb:Dah-lfK)이 피곤하다고 하는데 어떤 관점에서 볼 수 있는가?이것이 우리에게 피곤한 느낌을 준다는 것인가? 아니면 사물자체, 해아래서의 모든 일들 자체의 성격을 표현하고 하는 거예요? 움직임 자체가 피곤하게 하는 진을 빼는 자기 자신의 진을 스스로 빼는 어떤 움직이 자체를 묘사하는 것인가? 둘이 상반되지는 않으나 앞의 내용을 볼 때는 만물의 모든 일들의 상태 자체를 묘사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혹사하는 움직이는 그 상태를 표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끊임없는 움직임, 움직임 자체는 항상 무엇을 초래하는가? 변화를 초래한다. 끊임없는 변화, 변화는 새로움이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움직임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시도이다. 이것을 말로 다할 수 없다. 만물이 얼마나 변화, 새로움을 위해 부산하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그것을 우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눈이 다 볼수도 없고 귀가 다 들을 수도 없다. 근본적인 한계, 질서 틀에서 벗어나 변화가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표현과 상상력을 초월하는 것이요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은 경험의 범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러한 해아래서의 사물의 모습, 성격은 어떤 것에 제한된 부분에서 제한된 현상에서만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들의 원칙적인 틀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틀이 국지적, 부분적인 틀이라고 하면 경험으로 일일이 확인할 수 밖에 없죠. 그러나 모든 현상에 적용되는, 이것이 국지적이고 부분적이라고 하면 이런 말이 적용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확인하는가? 경험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초월하는 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이런 원리가 보편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내가 확인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지 않은 것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끊임없는 변화와 시도, 새로움을 시도하는데 그에 대해서 9절에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이미 있던 과거의 일이 미래에도 일어날 것이다. 과거에 행해진 것이 또한 미래에도 행해질 것이다. 모든 미래는 과거의 반복일 뿐이다. 세계안에서 존재하는 상태나 일들과 사건들은 과거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해아래는 새로운 것이 없다. 근본적으로 새로움이라는 것은 해아래의 역사에서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움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새로움은 없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움을 시도할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그래서 근본적인 본질적인 새로움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항상 어떤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의 생이나 역사가 무제한의 자유에 의한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제한이 있다. 한계가 있다. 이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해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그렇다. 무한한 가능성, 개방성, 우주 안에 새로움을 향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계의 성격이다. 세계내에 존재하는 이 근본적인 상태,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전도자로 하여금 해아래서 일어나는 것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허무하다고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헐핏보면 순환적 역사관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의 근본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이 전도자는 반대로 끊임없는 무제한의 자유, 절대적 자유와 무제한의 가능성을 가진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가? 끝에 가봐야 한다. 이 사람의 진의가 무엇인가 끝에 가야 알 수 있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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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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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p hfnorAxa)fl Uy:hYe$ {i( }worfKz {ehfl hey:hy-)ol Uy:hYe$ {yinorAxa)fl {agw {yino$)irfl }wor:kz }y") 1.11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 새로운 것인양 그러는 것이다. 이처럼 이전것을 망각하기 때문에 항상 새롭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느낄 뿐이지 실상은 반복되고 순환된다. 여기서는 새로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것이 있다. 이전 세대가 기억에 잊혀진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잊혀진다는 것은 그 이전 세대가 뒤세대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허무감을 느끼게 한다. 시간의 흐름속에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역사 그것이 계속 잊혀짐으로써 시간속에서 그 의미가 퇴색하고 의미를 상실해버리는 그것이 언제까지나 기억될 의미있는 것으로 남아있지 못하고 잊혀진다. 이것이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전도자의 말이 옳은가? 틀린가? 우리가 이런 것을 다 느껴야 한다. 이런 것을 형식으로 느끼려 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하고 외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지 말고 이런 문제와 마딱뜨려서 해결을 제시해야 한다.
해아래서 사는 생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였던 전도자가 그가 의미를 발견하려는 모든 노력들이 참으로 허망하다. 단한군데도 없고 전체가 허무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깊고 광범한 허무를 고백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가 생의 의미를 찾고 애스고 연구한 과정에 대해서 해아래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는 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해아래서 땅, 또 달리 표현하면 피조계라고 할 수 있겠죠. 모든 역사가 펼쳐지는 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피조계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일들을 보면서 그가 발견한 것은 세계내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 틀, 공간이 지니고 있는 성격을 보면 동일한 것이 반복되기도 하고 거기에서 순환반복이 있고 순환반복이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고 새로운 주기, 세대가 연이어 오고 그 역사의 직선적인 흐름, 어느 한곳에서 출발해서 결코 반복되지 않는 목표로 나아갈 수 있는 모습을 보이는데도 그런 기대를 가지고 봤지만 어떤 한계를 벗어자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천체의 움직임도, 광활한 공간에도 무한한 자유를 누릴 것 같은데도 어떤 질서에 얽매이고 그래서 아침에 해가 떠서 지는 똑같은 것의 반복이다. 바람도 보면 그 움직임을 종잡을 수 없어 자유로운 것 같은데 그것도 길이 있다. 시냇물로 근원에서 출발해서 바다로 가는데 이것만큼음 직선적인 흐름에서 바다로 가는 끝이 날 것 같은데 바다가 모든 냇물을 받아들이면서 넘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시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기를 해아래서 벌어지는 만물의 모습이 끊임없이 자기를 소진하면서 무엇인가를 애쓰고 움직이고 변화와 새로움을 모색하고 시도하는데 결론적으로는 과거의 행했던 일들이 계속반복될 뿐이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고 어떤 한계와 둘레가 있어서 결코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해아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새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굴레 씌워진 틀에서 절대적인 자유가 불가능하다. 항상 해아래서 일어나는 일들이 한계에서이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 유사이래 최초의 것이 아니냐라고 해도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예전에 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 잊어버려서 그렇다. 이 망각의 문제가 이전의 역사를 잊어버리는 문제가 전도자로 하여금 해아래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허무감을 느끼게 한다. 한세대 사람이 그 안에서 무엇을 했던지 그가 행한 모든 것, 그 자신은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행한 일이지만 그것이 그 다음 세대에 전달이 안된다. 잊혀진다. 한세대는 한 세대에서 끝나고 계승이나 전승이, 시간의 벽을 넘어서 어느 한 세대의 의미, 역사의 의미가 전달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의 생의 의미와 가치가 시간에서 잠간 나왔다 사라져버리는 모든 의미를 상실해버렸다. 이것이 해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허무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인간이 사는 삶의 환경 활동 공간이, 넓은 의미에서는 피조계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을 관찰해 보니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관찰해 보니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 내기 힙들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사람이 허무감을 느끼는 근거를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한계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나오는데 이 한계의 존재에 대해서 허무함을 느낀다. 이 한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허무감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가?한계의 존재가 과연 생애의 의미를, 해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이 정당한가?
이때까지는 시야를 넓혀서 장이라고 하면 넓은 공간을 관찰하였다고 하면 12절부터는 그 범위를 좁혀서 피조계내에 또는 세계 내에 가장 독특한 존재인 인간으로 시선으로 옮깁니다. 인간 자신을 관찰의 대상으로 한다. 인간은 전도자의 관심에서 그는 무슨 질문으로 시작하는가? 해아래서 인간자신이 만드는 역사가 인간 자신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의 질문으로 시작하여 인간삶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피조계 전체로 가지만 다시 인간 자신으로 관심이 돌아온다. 관심의 폭이 좁아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전도자의 본래관심 대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의 관심의 초점의 대상으로 돌아왔다. 인간에 대해서 살피면서
전 1: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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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노라. 이 사람은 예루살렘의 왕이다. 그 통치 대상을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있다. 유다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열왕국 이전임을 암시한다. 분열왕국이전이면서 예루살렘에서 왕이 된 사람은 다윗이나 솔로몬인데 솔로몬일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이것은 재쳐놓고, 본래의 흐름으로 돌아와서 전도자는 지금 피조계에서 시선을 돌려 인간에게로 향하면서 왜 자신을 이와같이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언급할까? 왕이라고 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인간의 이상적인 존재이다. 인간으로 모든 가능성, 최대의 가능성을 손에 쥔 사람이다. 절대 권력자이다. 따라서 이런 신분을 그가 일부러 밝힌 것은 무슨 뜻인가? 지금 인간 자신에 대해서 살피면 그의 경험범위에 제한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의 왕의 신분을 밝혔다는 것은 그가 최대의 가능성을 인간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그가 인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 인간에 대해서 탐구하려는 것이 얼마나 완벽하고 최선의 것인가 내가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 이상을 아무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솔로몬이 일반적인 왕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 교회의 치리자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말하고 있다고 하면 여기서 그의 결론의 무게는 더 무겁다. 왕으로서 교회의 치리자로서 인간에 대해서 깊이 살펴 내린 결론이다. 이는 그의 연구, 드러내는 결론의 무게가 훨씬 무겁다는 것이다. 지게꾼이나 왕이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만 촌부가 인생은 이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인간이 해볼 것은 다 해본 사람이 인생은 이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무게가 다르다. 어린 아이가 경험한 결론과 모든 곳을 다 다녀본 사람이 내린 결론은 같을 수가 없다. 또 여기에서 자신을 왕이라고 그 신분을 밝힌 것은 이런 의미도 있을 수 있다. 왕은 국가 내에 공동체의 최고 권력자로서 모든 능력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지위와 권세를 소유한 자이다. 그러므로 이하의 노력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노력한 거국적, 교회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적 노력이었음을 암시한다 . 물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지혜로 모든 것을 지휘하여 학자들의 노력을 종합, 판단, 정리했을 것이나 그가 모든 것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을 다 동원해서 얻은 결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전도자의 이하의 노력과 시도는 유래없는 지혜를 물려받은 한 개인으로서 뿐 아니라 국가적 교회의 능력을 동원한 집단적인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시험한 사람일 뿐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 인류전체의 모든 가능성을 시도해본 후에 기록한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전도자가 시도한 것, 인간에 대해서 궁구한 인간에 대해서 살핀, 내용을 구체적으로 봅시다.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atn (fr }ayni( )Uh {yfmf<ah taxaT hf&A(n re$A)-lfK la( hfm:kfxaB rUtflw $wor:dil yiBil-te) yiTatnw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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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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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관찰의 대상, 연구의 대상에 대해서 나오는데 해아래서 행하여진 모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השׂה와 היה를 비교해보면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였는가를 염두해두고 이 동사를 비교해본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היה는 εγενετο이다. 이는 행위의 주체가 없다. השׂע는 ποιεω이다. 이는 행위의 주체를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므로 해아래서 행하여진 모든 것(hf&A(n re$A)-lfK)은 좁은 의미에서 역사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 싶다. 행위의 주체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hf&A(n가 니팔형으로 되어 있다면 어떤 행위의 주체를 의식함 없이 그저 행하여진 것들, 만들어진 것들, 존재하게 된 것들의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하면 해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해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 역사, 그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을 보면 이럴 가능성이 많다. 해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마음을 기울여한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rUt $wor:d라고 한다 שׁרד는 pursue 이고 רות는 어원의 뜻이 turn이다. 이 사람이 기울이는 심적 움직임을 기울여서 하는 작업은 연구이다. 그런데 두 다른말을 사용함으로써 지적작업의 성격을 말하려고 한다. שׁרד는 깊이 파헤치는 연구이다. רור는 두루두루 살피는 것이다. 이 사람이 파악하려고 하는 지적작업의 깊이와 넓이를 말하는 것이다. 헤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깊이 넓이 살폈다. 숲과 나무를 다 살핀 것이다. 철저하게 완벽하게 살핀 것이다. 어떤 대상을 살필 때 지적작업의 전제가 무엇일까? what is this이다.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갖는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것이 무엇인가의 의문을 가지고 접근한다.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고자 하는 노력과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바꾸어 이야기한다고 하면 세계 역사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본질규명에 대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 내의 모든 현상에 대한 본질 규명 노력에 대해서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세계와 인간이 맺는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ayni( 라고 한다. הנע(occupy, occupy with)에서 왔다. 인간이 무엇인가 자신을 깊이 개입시킬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대개 }ayni(를 aufgaber로 되어 있다. 인간이 탐구하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과업이요 그렇게 만드신 것이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일종의 본능이다. 인간이 세계 냉서 일어나는 그 의미와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이다. 대상에 대해 의미와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하면 이것은 철학적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과업이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봅시다. 대상에 대한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실 실상 피조계 또는 세계의 대리통치자로서의 인간의 lordship이 주권행위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계에 대해서 주권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이 소유한 가장 강력한 능력이 무엇인가? 힘인가? 지적인 능력이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지배하는 형식은 어떤 것인가?우선 그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내밑에 둘 수 있는가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컴맹들이 컴퓨터앞에 서면 어쩔 줄 모른다. 그러나 사용법을 알면 내 종이 된다. 대상의 본질을 모르면 두렵다. 내가 제어할 수없다. 그러나 대상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그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인간이 역사 피조물과의 관계를 설명한 다음에 다스리라라고 한다. 인간의 피조계에 대한 최초의 행위가 이름을 짓는 것이다. 본질을 규명하고 규명하는 것이 이름짓는 행위이다. 최초의 주권적 통치 행위의 성격이 본질파악이었다. 인간의 지적능력이야말로 피조계의 대리통치자로서의 인간의 주권행사를 하는 능력이다. 이런 본능, 이것은 세계내의 모든 일을 파악하려는 본질을 파악하려는 본능과 수행하기 위해서 주신 수단이 무엇인가? 지혜이다. 지혜가 무엇인가? 알기 위해서 성경사전을 보면 더 몰라진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신학사에서 언제 나온 것이고 어쩌고 저쩌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전도서 자체 내에서 지혜를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2장 14절에 보면 단서를 제공한다. 지혜의 본질을 비유로 말한다. 머리속에 있는 눈이라고 한다. 빛이라고 한다. 이는 지혜가 빛처럼 대상을 밝혀서 실상이나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지적인 능력인가 싶다. 흔히 사용하는 이성이란 말로 번역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 살피면서 이성의 능력에 관심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다. 인간의 독특한 것, 가장 강력한 능력, 다른 존재와 구별되게 하는 것이 이성에 있다고 하면 인간의 여러 모습중에 이 부분에 집중해서 다루는 것이 이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아래 보면 이와같은 지적탐구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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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다. 이것을 ער라고 한다. 악하다고 한다. 역사적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악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다른 의미의 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무엇인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여기서 ער는 어떤 의미에서의 ער인가? 전도자가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할 밖에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과업, 본능이 ער라고 한다면 이 ער의 의미는 무엇인가? 채울 수없는 본능, 해답이 없는 노력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지적능력으로는 해답을 얻을 수 없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궁극적 대답을 얻는 것은 이성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성이 전혀 기능을 하지 않아서 세계나 대상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이나 정보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ער라고 하는 것은 의미나 느낌이 다르다. 이성으로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해결을 바랄 수 없는 시도인데 그것을 가리켜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바람과 같이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노력이다. 세계본질 규명 노력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성의 한계를 의식한 결론이요 이 때문에 초래된 결론이다. 이성에 대한 실망은 이성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왜 전도자가 이성으로 대상에 대해서 파악하려는 것이 허망할 수 밖에 없는가? 그가 제시한 이유가 이것이다.
전 1:15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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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q:til lakUy-)ol tfUu(:m 라고 한다. תועמ는 twist, bend 구부러져 있다. 뒤틀려 있다는 말이다. ןקת이란 말은 be ordered, make straight 정리되다, 바르게 만들다는 뜻이다.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 세계나 세계 역사를 바라보면 이성의 눈에 비치는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은 다 구부러져 있고 뒤틀려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바로 되어질 가능성이 있으면 문제가 다른데 그런데 그 뒤틀려져 있는 정도가 도저히 바로잡을 수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다. 전도자가 이성을 통해서 세계를 보면 뒤틀려져 있고 바로잡을 방법이 없이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도자가 느끼는 이성의 한계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이성의 한계의 성격이 복잡하다는 것을 이렇게 풀어보자. 이성의 눈으로 보면 세계가 뒤틀려지고 구부러져 있다는 것은 사실인가?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느끼는 허무가 세련되고 높은 허무라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볼 때 올바르고 뒤틀려 있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허무의 성격을 암시하는 것은 그 뒤틀려있는 것이 정리되고 올바로 될 수 없는 왜곡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뒤틀려있는 현상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뒤틀린 것에서 무엇인가 근본적인 것을 끌어낼 수 없다는 데서 나오는 이성의 한계이다. 왜곡된 뒤틀린 현상 넘어에 있는 우리에게 주는 그 의미,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으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철학자들이 대표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너무 부족한데 달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라고 한다. 이성으로 본질을 파악하려고 할때 왜곡된 것 넘어있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파악하려는 이 모든 노력은 뜬구름잡으려는 노력이나 마찬가지로 헛된 노력에 불과하다. 인간에게서 가장 독특하고 강력한 능력인 이성적 능력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인간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16절을 보면
전 1: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yiBilw {iflf$Ury-la( yanfp:l hfyfh-re$A)-lfK la( hfm:kfx yiT:pasOhw yiT:laD:gih h"Nih yinA) rom)"l yiBil-{i( yinA) yiT:raBiD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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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스로 심중에 이르기를 나는 참 위대하고 누구보다 많이 가진 것(지혜)이 있다. 비교의 대상이 누구인가?예루살렘의 치리한 왕들, 지혜있는 모든 왕들이다. 따라서 이 사람의 지혜로 무엇인가 발견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무엇인가 자꾸 말하는 것은 자기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기 내린 결론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이이상의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보았음이라, 경험하였음이라. 이성의 능력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사람보다 탁월한 사람임을 밝히고 그가 두번째로 시도한 시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마음을 기울여 그가 하려고 한 것은 무엇을 알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알려고 하는 대상이 조금 다르다. 지혜와 어리석음을 알려고 했다고 한다. 조금 전에는 파악의 대상이 세계였다.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었는데 여기서는 연구의 대상이 지혜와 어리석음이다.
전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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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의 지혜와 어리석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기서 지혜와 어리석음을 알려고 했다는 것은 두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 의미가 차이가 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무엇인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할때, 무엇을 기준으로 이것을 하겠다 않겠다 하느냐? 이것이 지혜로운 일이냐? 어리석은 일이냐로 판단한다. 지혜와 어리석음을 안다는 것은 행동에 옮기기 위한 실천적인 이상형이다. 반면에 여기에 또 다른 의미의 내포가 들어 있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이성이 제대로 올바로 기능할 때 얻어지는 결과이다. 이성의 올바른 사용이 지혜요 잘못된 사용과 기능이 어리석음이다. 모든 행동에서 이성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행동에는 이성의 사용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지혜로울 수 있고 어리석을수 있다. 지혜로운 행동은 이성이 제대로 기능한 것이고 어리석은 행동은 이성의 올바른 사용이 안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와 어리석음을 이성의 올바른 사용과 실패와 관련있다. 이것을 알려고 했다는 것은 재미 있다. 여기서는 이전에는 이성의 연구 대상이 사람밖에 있는 무엇이었다. 세계와 그 안의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인간 중에서도 인간의 이성 자체가 연구의 대상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성의 한계나 올바른 사용의 규범을 찾아내려는 철학을 비판철학이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다. 칸트의 할아버지가 이미 여기 계시다. 어떻게 하면 이성을 바로 사용하고 이성을 잘못사용하는가하는 이성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것도 바람을 좇으려는 것이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전 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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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고통이 많다는 것이다. 사람의 부화를 돋구는 것이다. 왜 그러는가? 판단이 제대로 서고 이성의 옳바른 사용이 된다고 하면 이럴 수가 없다. 화만 돋구어진다는 것은 아무리 지혜를 많이 쌓아봐야 이성적 능력을 훈련해서 발전시켜봐야 그럴수록 더 몰라지고 오리무중이 된다는 것이다. 지혜를 더하면 더할수록 고통도 더해질 뿐이다. 지혜가 많을 수록 신경질많다는 것은 이성의 능력이 아무리 최고조에 달한다고 해도 이것으로는 무엇이 옳은것이고 지혜로운 것이고 어리석은 것인가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성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혜가 더하면 더할수록 고통이 경감된다고 하면 이성에 대해서 소망이 있지만 더한다고 하면 이것은 이성의 무용론이다.
사람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피조계의 수장인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 세우신 인간이란 존재를 볼 때 인간에게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발견을 위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가 시도해보았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성의 능력을 볼때 이성을 살펴보았다. 이성으로는 세계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이성의 바른 사용은 가능할 것인가? 그것도 불가능하다. 최고의 지성, 최고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자기로서도 다 시험해보았으나 인간으로서 가진 가장 독특하고 강력한 능력인 이성도 한계지워진 것이다. 무엇인가 안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이성을 바로 사용한다는 것조차도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허무할 수 밖에 없다. 전도자의 말은 옳다고 할 수 없다고도 또 틀리다고도 할 수 없다. 맞다고만 할수도 없고 틀리다고만 할수도 없다. 복잡하다. 조심해야 한다. 전도서를 허무주의라고 하는 학자들은 전도서를 너무 피상적으로 본 것이다. 이면에 숨은 전도서의 의도를 보지 못한 것이다. 전도서가 허무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고 전도자의 진심이 어느정도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를 본 것은 아니다.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를 밝히는 것에서 우리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개인적 일상생활에서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말하기보다는 보편적인 삶의 의미의 가치를 찾으려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최초의 시도가 해아래서 , 세계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에서 삶의 영역에서 세계를 봐도 끊임없는 변화의 시도가 있는 것 같지만 새로운 것이 없다는 근본적인 굴레가 있어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삶의 회의를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인간의 삶의 영역이 제한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생의의미를 무의미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해아래는 근본적으로 새로움이 없고 이전 과거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나 그것도 어떤 의미의 경험이 역사 자체가 축적되고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망각속으로 사라짐으로서 한세대의 삶의 의미와 역사적 가치가 사라져간다. 이것에서 허무를 느낀다. 그 다음에 피조계내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 전도자의 가장 주된 관심인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인간의 여러 부분,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볼때 가장 중요한 부분, 그의 지적인 부분, 이성으로 시선을 향해서 이것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인가 봅니다. 그런데 우선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사물에 대한 본질파악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 달리 말해서 이성의 비친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은 도저히 바로 할 수 없이 뒤틀려 있는 모습이다. 그런 뒤틀려 있다고만 하지 않고 바로 교정할 수 없을정도로 뒤틀려 있다는 것은 결국 이성으로서는 뒤틀려 있는 세계, 역사를 제자리로 정상적인 그런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이성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세계에서 긍정적인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절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뒤틀려있는 모습인데 그것을 내 힘으로 돌려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보이는 세계에서는 의미가 없고 또 도저히 다룰 수 없을만큼 결핍됨을 본다. 왜곡과 결핍의 한계를 넘어서 어떤 궁극적인 긍정적인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달리 이렇게 표현할 수 도 있다. 세계와 관련해서 그 존재 의미와 가치를 느끼거나 가리는 무엇을 찾아내려고 하는 이성만으로는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왜곡된 것을 바로 잡을 도리가 없다.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세계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궁구하고 살피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세계든 인간 자신이든 존재의 의미를 느끼게 할만한 어떤 본질적인 것, 이세상 그래도 살만하다는 그 무엇을 발견하도록 만드셨고 인간은 그런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성으로 그와같은 시도를 할 경우에 전혀 그 바라는 결과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본능인데 체울 수 없는 본능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으니 어떻게 하기는 하는데 결과에 대해서는 절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수 없는 채울 수 없는 본능이다. 그다음에는 인간의 이성을 다른 관점에서 시험해 본다 .이성 자체에 대해서 시험해 본다. 이성의 한계, 이성의 바른 사용을 시험해 보려고 한다. 이성의 올바른 사용과 오용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와 어리석음라고 할 수 있다고 할수 있고 실천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이고 어떤 것이 어리석음인가? 이성의 바른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이성이 가르쳐주리라 기대하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결과는 고통만 더 크고 지혜가 더하면 더 마음이 참담해지고 더 마음이 고통스러워진다.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 그것조차도 이성은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이성, 가장 인간에게서 가장 강력한 힘, 최대의 자산인 이성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능력으로 세계와역사를 파악하려고 해도 실패하고 범위를 좁혀서 이성을 어떻게 바르게 사용할 것인가를 봐도 대답이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궁극적인 해답을 줄 수 없다.
오늘 2장에서는 조금 더 다른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전 2: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lebfh )Uh-{ag h"Nihw bwo+:b h"):rU hfx:mi&:b hfk:SnA) )fN-hfk:l yiBil:B ynA) yiT:ramf) 2.1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bwo+:b h"):rU // hfx:mi&:b hfk:SnA) )fN-hfk:l라고 한다. הכל가 무엇인가? ךלה에서 온 것으로 명령형 ךל의 강세명령이다. 오라는 것이다. hfk:SnA)은 기쁨이다. pleasure이다. 접속사 ו를 중심으로 parallel이다. 그러므로 하반절에서 hfk:SnA)가 생략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데도 천차만별이다. 역본들을 보라. 전도서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해가 안된 책이므로 주석마다 성경번역에서도 매우 다양하다. 그런만큼 더더욱 히브리어를 할 수 밖에 없다. 히브리어로 원어로 성경을 공부하는 장점은 그것이 성경에서 쓰여진 것을 깊이 있고 정확하게 밝혀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러 많은 경우에는 무엇을 모르는가를 알 수 있다. 아직 불명확하다는 부분에 가면 조심하고 더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원어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도움이 그것이다. 번역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은 불명확한 것이다. 성경중에서 가장 그 뜻이 모호한 전도서야말로 히브리어로 보아야 한다. hfk:SnA)이것도 참 어렵다. ךסנ의 피엘이다가 ך를 붙인 것이다. כסנ는 시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시험하리라는 말이다. 무엇으로? 쾌락으로 시험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를 시험하리라는 말에서 너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구체적으로 이것이라고 하기 어려우나 “너”가 누구인지 막연하게 하나 흐름으로 보면 인간 자신도 될 수 있고 삶도 될 수 있고 세계와 역사도 될 수 있다. 여기에는 막연하게 “너”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히 쾌락으로 시험한다고 되어 있다. 넓은 이성의 일도 포함될 수 있다. 옳고 그름의 행위보다 욕망, 감정이 인간에게 더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사람은 하고싶은 것을 한다. 욕망에다 자기를 맡긴다. 여기서 제3의 시도, 수단을 가리켜 좋은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 좋은 것은 병행이라고 하면 윤리적인 선은 아닐 것이다. 좋은게 좋은 것 아니냐할 때 그런 의미이다. 기쁨을 주는 것,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 감정, 우리 욕망에 합한 것이다. 우리 감정에 합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끼고 좋다고 한다. 이와같이 느낌, 감정 욕망에 따라서 행동하여서 본질파악이나 옳고 그름을 판단 결정함으로썩 아니라 내 감정이 원하고 좋게 느끼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삶의 의미를 느끼려고 한다. 삶에 옮겨봄으로써 시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도의 결과, 결론에 대해서 말하기를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다. 찬라적이고 잠정적이고 영속적인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보람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를 표현하기를
전 2:2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hf&o( hoZ-ham hfx:mi&:lU lflOh:m yiT:ramf) qwox:&il 2.2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리는가? lflOh:m은 아직도 뜻이 분명치 않으나 어림잡아 짐작하면 ללה은 빛을 내다는 말이다. 달과 관련시켜서 말하는데 정신이 이상해진 것을 말한다. 즐거움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미친짓이라는 것이다. 쾌락에 대해서 내가 말하는데 지금 뭐하는 짓이냐? 웃고 즐거운 것이 돌아보면 허망하고 미친짓이다. 뭐 웃을 일이냐?라는 것이다. 인간이 기뻐하고 좋다는 것, 이것이 그가 원하는 것을 하면 이것이 자기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주는 것인가?시험해 봤으나 결론은 참 허망하다. 입김을 내면 순간있다 사라지는 입김과 같은 것이다. 미친짓이다. 그가 이런 쾌락으로 그의 삶의 의미를 시험해 본 것은 또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 2:3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bwo+ hez-y") he):re)-re$A) da( tUl:kis:B zoxE)elw hfm:kfxaB g"hn yiBilw yirf&:B-te) }yaYaB |wo$:mil yiBil:b yiT:raT 2.3
;{ehyYax y"my raP:sim {yamf<ah taxaT U&A(y re$A) {fdf)fh y"n:bil
yirf&:B-te) }yaYaB |wo$:mil yiBil:b yiT:raT
········· tUl:kis:B zoxE)elw hfm:kfxaB g"hn yiBilw
yiT:raT 은 넓게 살피고 조사하는 것이다. 광범하게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내 마음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시도한 연구인데 |wo$:mil은 끌고 오다는 뜻이다. 내 육체를 술속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ל라는 전치사는 분사구문적인 것이다. 앞에 나온 행위를 좀더 선명히 밝히는 역할을 한다. 마음으로 행하는 시험을 구체적으로 내용을 밝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음으로 시험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험했는가? 내 육신을 포도주 속에 술에 담궈놓는 것이다. 포도주 술이라는 것은 쾌락에 탐닉하는 삶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술독에 빠진다 등등 쾌락행위에 사용된다. 그런데 yirf&:B-te)(나의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 자신을 그저 뜻하는 평범한 의미라기 보다는 부패한 육적 성품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런 경우라고 하면 내 육체로 술에 잠기게 하였다는 것은 육적 성품을 따라 쾌락에 탐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쾌락의 시도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파악하기위한 시도라는 것을 tUl:kis:B zoxE)elw hfm:kfxaB g"hn yiBilw이 보여준다. 내 마음이 여전히 지혜로 인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저 술독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빠져가는 순간부터 마음에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탐닉이 삶의 의미파악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쾌락에 탐닉하고 그것에 의해서 그것이 시키는대로 삶의 목적과 삶을 지배하는 쾌락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시도에서 그 가운데서도 지혜로 전과정을 추적하고 인도하였다고 한다. 또 한가지가 있는데 tUl:kis:B zoxE)elw은 어리석음을 붙잡았다는 것이다. 지혜로 술독에 빠지면서부터 인도하였으나 동시에 어리석음을 붙잡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지혜는 붙잡고 행해야 하는 것이고 어리석음을 버려야할 것이다. 당연히 해야할 것과 버려야할 것은 규범과 같은 것으로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을 붙잡았다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놓치지 않고 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도자가 한 이 행동은 쾌락에 맡겨서 행동하는 것에 있어서 그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히 감정과 욕망에 따라서만 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묻지 않고 그저 감정이 흐르는대로 갔다는 것이다. 이성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이성에 얽매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붙잡았다는 것은 이성이 결론해준 이성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인데 이것도 놓지 않도 다 시험해 보았다. 이성을 초월해서 감정을 따라서 시험을 해봤다. 모든 가능성을, 이성에 제한받지 않는 감정의 모든 가능성을 다 시험해봤다는 것이다. 인간의 실천이성이 우리에게 명하는 것, 우리 행동에 제한을 주는 그런 제한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정이 시키는대로 감정의 모든 가능성을 다 시험해 봤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것은 해보지 않았다고 하면 그의 시도범위가 제한받았다는 것이지만 이런 어리석음도 붙잡음으로써 모든 감정에 충실하여 전체를 다 시험해 봤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험한 목적이 무엇인가?무엇을 발견하기 위한 실험이었는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내가 확인하였다고 한다. 인간이 해아래서 그 얼마되지 않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 무엇이 좋겠는가? 그것의 좋은 일이 무엇인가? 최선의 일이 무엇인가? 해아래서 사는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실험을 해봤다는 것이다.
제3의 시도, 욕망이 원하는대로 살아봄으로써 자신의 뜻대로 삶을 창조하는 일을 통해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좁은 의미로는 세계를 재창조해가는 창조주요 자신과 세계의 주인이다. 이런 모습이 인간에게 있다. 자신이 원하는 감정을 실현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4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다.
전 2: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yimfr:K yil yiT:(a+n {yiTfB yil yityinfB yf&A(am yiT:laD:gih 2.4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 뜻대로 하는것은 자기 뜻을 이루고 성취하고 실현하는 것이 일이다. שׂעמ이다. 자기의 감정과 욕망대로 살려는 것은 결국 일에서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자는 자기가 무엇인가를 실현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시도하는 자신이라든지 일의 규모에 대해서 대단한 것이었다고 큰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이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계속해서 설명한다. 나를 위해서 집을 짓고 포도원을 심고
전 2: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yireP-lfK j"( {ehfb yiT:(a+nw {yis"D:rapU twoNaG yil yityi&f( 2.5
그 다음에 계속해서 יל라고 한다. 내 영광과 내 행위를 위해서 되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가? 이 일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의식하였다고 하면 그것이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첫번째 일은 집을 짓고 포도원을 심은것을 말한다. 집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공간이다. 포도원은 일터이다. 생존수단전체를 위한 일터이다. 이런 것을 창조하는 일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조금 더 넓은 생존공간인 동산을 만들고 그리고 이곳에 모든 종류의 과목을 심었다.
전 2: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yic"( ax"mOc ra(ay {eh"m twoq:$ah:l {yfm twok"r:B yil yityi&f( 2.6
그리고 그 속에 샘을 마련하였다. 나무들이 싹트는 공간에 물을 대기 위해서 샘을 만들었다. 어디가 생각나는가? 창세기 2장이 생각난다. 하나님의 모방자로서의 모습이 나온다.
전 2: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loKim yil hyfh h"B:rah })ocw rfqfb hn:qim {aG yil hyfh tyab-yn:bU twoxfp:$U {yidfbA( yityinfq 2.7
;{iflf$UryiB yanfp:l Uyfhe$
그리고 남종과 여종을 획득(창조)했다. 인간창조는 하나님의 종의 창조라고 보고 인간창조를 빗대는 것이다.
전 2: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fdf)fh y"n:B togUnA(atw tworf$w {yirf$ yil yityi&f( twonyid:Mahw {yikfl:m taLug:sU bfhzw veseK-{aG yil yiT:sanfK 2.8
;twoDi$w hfDi$
8절에 보면 축적하는 내용을 말하면서 금과 은을 말한다. 모든 지역, 민족의 나라의 보물을 모으고 남녀 가수들,고귀한 신분의 여자들을, 세련되고 멋지고 섬세한 미적감각을 알 수 있는 그런 보물을 많이 얻었다.
전 2: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yiL hfd:mf( yitfm:kfx va) {iflf$UryiB yanfp:l hfyfhe$ loKim yiT:pasOhw yiT:ladfgw 2.9
이런 것에 있어서 예루살렘의 그 이전 누구 보다도 능가하였다. 모든 왕들보다 더 능가하였다. 일에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바를 실현성취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 일의 모든 가능성을 다 실현해 봤다는 것이다. 인간이 해볼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봤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지혜가 서 있었다. 내 감정이 시키는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다 해보면서도 그와 동시에 이성도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욕망과 야심 그것을 성취하는데 전신전력하는데 발견되기 쉬운 무모성, 자기 절제 상실, 이성상실, 판단력상실, 제어력 상실, 광기, 침착함, 평등 고요등을 읽는것과는 달리 전도자는 이 모든 실험에서 냉정과 이성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무엇이 삶을 의미있게 하는 것을 관찰, 판단, 확인하는데까지 냉정침착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전 2: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eh"m yiT:lacf) )ol yany"( UlA)f$ re$A) lokw 2.10
;yilfmA(-lfKim yiq:lex hfyfh-hezw yilfmA(-lfKim ax"mf& yiBil-yiK hfx:mi&-lfKim yiBil-te) yiT:(anfm-)ol
내 눈이 요구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냉철하게 이성이 명하는 것에 의해서 제한되거나 구해받지 않고 원하는것은 무엇이든지 행함으로써 어느 하나도 실험대상에서 누락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 무엇이든지 다 해봤다. 만일 내 이성이 없었다고 한다면 탐하기 위해서 자기 욕망대로 사는 방탕한 삶에 지나지 않으나 내 이성이 여전하였다고 하는 한 마디가 있으므로서 냉정한 이성의 판단, 관찰, 평가 가운데서 행하여진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삶의 가능성을 하나하나 따져본 실험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종류의 쾌락, 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면 내 마음에 금하지 않고 원하는대로 행하였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내가 하는 모든 일을 기뻐하였기 때문이다. 일로 인해서 일에서 만족을 얻었기 때문이다. 일이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은 내가 원하고 기뻐하는대로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에서 이 일에서 얻은 기쁨, 일에서 얻은 만족이야말로 일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당연한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원하는대로 뜻하는대로 다 실현하는 성취하는 일에서 얻는 기쁨, 보람 이것이야말로 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당연한 것이다. 이 말은 맞는가? 틀리는가?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일에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셨으니 될만하죠? 그러나
전 2: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y")w axUr tU(:rU lebeh loKah h"Nihw two&A(al yiT:lamf(e$ lfmf(ebU yady U&f(e$ ya&A(am-lfk:B yinA) yityinfpU 2.11
;$emf<ah taxaT }wor:ty
그러나 내가 돌이켜 보니 다해놓고 돌이켜 생각하니 내 손이 행한 그 모든 일들, 내가 수고, 훅불면 없어버리는 바람을 좇으는 것과 같은 부질없는 짓이며 아무 건질것이 없다. 남은 것이 없다. 이루어놓았지만 그게 내게 남는게 아니더라. 세상 어떤 사람보다 좋은 조건에서 어느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해봅니다. 그자신이 왕이었고 모든 왕중에서 뛰어난 일을 해본 사람, 원없이 해본 사람,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본 사람의 고백이 다 부질없고 남는게 없더라. 왜 그러느냐? 12절에서 이유를 말하기를
전 2: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rfb:K-re$A) t") |eleMah y"rAxa) )ObYe$ {fdf)fh hem yiK tUl:kisw twol"lOhw hfm:kfx two):ril ynA) yityinfpU 2.12
;UhU&f(
내가 돌이켜 지혜와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보려 하였나니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할 것이고 어리석음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실패의 의미이다. 이것이 아주 대조적인 전혀 상반적인 평가를 받는것과는 달리 이것을 돌이켜 곰곰히 살펴보았다.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도대체 무엇이뇨? 이미 행한 것을 행할 뿐이다. 이전에 있던 자는 솔로몬 자신보다 못한 자이다. 왕의 뒤에 오는자, 솔로몬 뒤에 오는자는 솔로몬을 능가할 가능성이 없다. 해본것 이상을 해볼 수 없다. 이것은 물론 솔로몬의 탁월함, 내가 인간의 최고의 가능성을 실현해봤기 때문에 나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해봤기 때문에 나 이상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말도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일의 가능성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일의 한계, 역사적 실례가 바로 솔로몬 자신이라는 것이다. 지혜와 미련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 일에 있어서 외적 내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의 상이한 결과에 가장 직접 주는 것이 지혜롭게 한 것과 미련하게 한 것이다. 지혜와 미련함이 일의 결과의 가장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인간이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은 이미 한계지어져 있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 미련함의 자이도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지혜라고 하는 것이 어떤 근본적인 인간의 일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초월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 2:13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e$oxah-}im rwo)fh }wor:tyiK tUl:kiSah-}im hfm:kfxal }wor:ty $"Ye$ ynf) yityi)frw 2.13
내가 보니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나은점이 무엇인가 있다. 어떤 나은점이 있는가? 마치 빛이 어두움보다 나은것보다 낳다.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지혜자와 어리석은자의 차이가 빛과 어두움의 차이와 같다는 것이다.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지혜의 무용성을 말하지만 그것은 독특한 성격의 것이다.
전 2:14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fLuK-te) her:qy dfxe) her:qiMe$ ynf)-{ag yiT:(adyw |"lOh |e$oxaB lyis:Kahw wo$)or:B wyfny"( {fkfxeh 2.14
지혜자의 경우는 그의 머리에 눈이 달려 있다. 머리에 눈이 있는 것과 같이 마음에 마치 눈이 달린 것처럼 모든 것을 잘 헤아리고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어리석은자는 흑암가운데 맹인과같이 달려가는 자와 같다는 것이다. 지혜와 어리석음은 이런 실제적으로 빛과 어두움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틀림없는데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한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지혜와 미련의 차이가 사람의 삶의 결과의 모습을 상반적 모습을 만들어 낸다. 현실에서 우리가 이것을 본다. 엄청난 결과가 올 수 있는데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다 공히 다같이 임하는 일이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당하는 것은 결국 같다는 것이다.
전 2:15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yiBil:b yiT:raBidw r"tOy zf) yinA) yiT:makfx hfMflw yn"r:qy yinA)-{aG lyis:Kah h"r:qim:K yiBil:B yinA) yiT:ramf)w 2.15
;lebfh hez-{aGe$
어리석은 자에게 임하는 일이 내게도 임하리니, 어리석음과 지혜가 절대적인 차이를 만든다면 지혜로운 자는 당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리석은자나 지혜자가 당하는 일이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혜로워서 얻는것이, 유익이 무엇이냐? 지혜롭다고 해서 나은게 무엇인냐? 그런즉 지혜자도 어리석은자와 같이 영원히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진다.
전 2: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fkfxeh tUmy |y")w xfK:$n loKah {yi)fBah {yimYah rfb:Ke$:B {flO(:l lyis:Kah-{i( {fkfxel }wor:kz }y") yiK 2.16
;lyis:Kah-{i(
앞으로 다 잊여지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임하는 것이 있다. 무엇인가? 죽음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우리는 죽음을 무엇의 대명사처럼 말하는가? 죽음의 공평성을 말한다. 가난한자나 많이 배운자나 다 죽은 방은 네평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죽음의 공평성이야말로 불공평일 수 밖에 없다. 지혜로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이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을 말한다. 어리석게 살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는데 마땅히 살아야 할 것대로 산 사람과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과 궁극적인 차이가 있어야 올바르고 공평한 것인데 죽음은 지혜롭게 산사람이든지, 미련하게 산사람이든지, 제대로 산사람이든, 악하게 산사람이든 다 죽으니까 이것처럼 불공평한 것이 없다. 결국 똑같은 결과가 온다면 결국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로워도 좋을 일이 무엇인가? 그래서
전 2: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axUr tU(:rU lebeh loKah-yiK $emf<ah taxaT hf&A(Ne$ he&A(aMah yalf( (ar yiK {yiYaxah-te) yit)"nf&w 2.17
전도자는 생을 혐오하게 됩니다. 미워하게 됩니다. 사는 것을 혐오합니다. 아둥바둥 옳게 바르게 살아보려고 하면 뭐하나? 끝은 마찬가지인데.
전 2:18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yfrAxa) hey:hYe$ {fdf)fl UNexyNa)e$ $emf<ah taxaT l"mf( yinA)e$ yilfmA(-lfK-te) ynA) yit)"nf&w 2.18
내가 해아래서 수고한 이 모든 수고를 혐오한다. 내가 수고한 모든 수고를 내 뒤에 오는 사람에게 끼쳐두고 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이라고 하는 것, 성취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것이냐? 허무함을 하기위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근본적으로 내 일의 결과를 내 뒤에 오는 사람에게 넘겨주고 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뜻에서 우리의 일을 무의미하게 허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첫째는 내가 해온 일의 결과 업적의 결과를 뒤에 남겨놓고 가는데 문제는 내 뒤에 오는 자가 누구인지, 지혜자인지 어리석은자인지 알 수 없고 내가 정할 수도 없다. 내가 시작한 일, 내가 이루어놓은 일이 다행히 지혜로운 사람이어서 그것을 더 발전시키고 목적대로 발전시켜 나간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나 어리석은 자가 이어가면 평생이루어놓은 것은 잠간동안 말아먹는다. 그러니 일해봐야 무엇하느냐? 그저 죽고 나서 그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일을 이어받을 사람이 지혜자일지 말아먹을 어리석은 자인지 모른다. 그런 일이라고 한다면 해서 무엇하겠느냐!
전 2:19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al:$yw lfkfs wo) hy:hy {fkfxeh a("dOy yimU 2.19
;lebfh hez-{aG $emf<ah taxaT yiT:makfxe$w yiT:lamf(e$ yilfmA(-lfk:B
내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절망해 볼 일이 있다. 사람이 온갖 재주를 다 이루어놓은 일이 있는데 그 일을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사람에게 넘겨주니 수고는 내가 했으니까 그 수고도 몫도 내가 차지해야 하는데 그것을 손하나 까닥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려니 아깝다. 그래서 일할 맛이 안나고 일할 생각이 안난다. 평생 온갖 고통을 다 참으면서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을 했지만 그 일이 이모양이니 해서 뭐하냐? 그래놓고 생각해보니
전 2: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emf<ah taxaT yiT:lamf(e$ lfmf(eh-lfK la( yiBil-te) $")y:l yinA) yitwoBasw 2.20
전 2: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fdf):lU }wor:$ik:bU ta(ad:bU hfm:kfx:B wolfmA(e$ {fdf) $"y-yiK 2.21
;hfBar hf(frw lebeh hez-{aG woq:lex UNen:Ty OB-lamf( )oLe$
전 2:22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emf<ah taxaT l"mf( )Uhe$ woBil }woy:(ar:bU wolfmA(-lfk:B {fdf)fl heOh-hem yiK 2.22
전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Uh lebeh hez-{aG woBil bakf$-)ol hflyaLaB-{aG wonyni( sa(akw {yibo):kam wyfmy-lfk yiK 2.23
전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bwo+ wo$:pn-te) hf):rehw hftf$w lak)Ye$ {fdf)fB bwo+-}y") 2.24
;)yih {yiholE)fh daYim yiK ynf) yityi)fr hz-{aG wolfmA(aB
그러니 내가 먹고 가는 것이 낳다는 것이다. 일하는 동안 일의 보람을 누리고 가는것이 그저 최선의 길이다. 비록 끝까지 보면 아무리 이세상에서 별다르게 살아봐야 죄인이나 의인이나 죽기는 마찬가지이고 내가 죽도록 일한 것 남겨둬야 남이 가져가고 남이 그 결과를 맛보는 것이지만 그래도 최선의 길은 일하는데서 얻는 기쁨과 그 일의 수고한 결과를 최대한으로 누리는 것이 최선이 아니냐?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내가 행한 일의 수고한 결과를 내가 누리려고 해도 문제는 이것이 내 마음대로 안되더라는 것이다. 일결과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더라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먹고 즐기는가? 그것은 내 밖의일이다. 내 소원 밖의 일이다. 내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 2:25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yNeMim jUx $Uxy yimU lak)y yim yiK 2.25
전 2: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t"tfl swon:kilw vwosE)el }fyni( }atn )e+Oxalw hfx:mi&w ta(adw hfm:kfx }atn wyfnfp:l bwo=e$ {fdf):l yiK 2.26
;axUr tU(:rU lebeh hez-{aG {yiholE)fh y"n:pil bO+:l
하나님 앞에 잘보이는 사람에게는 지혜로 주시고, 기쁨도 주시고 즐김도 주나 죄인에게는 하나님 앞에 잘못보인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즐기지 못하게 하시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잘보이는 것과 잘못보이는 것과 내 손으로 수고한 것을 누리는 것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러니 일할맛도 안나고 살맛도 안난다는 것이다. 다 헛되고 바람을 좇는 것처럼 부질없는 것이다.
일을 통해서 성취해보는 것이 다 헛된 일이다. 사람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 특별히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가 삶의 절대적인 차이를 가져와도 하지만 모두가 다 죽음으로 끝나고 마니까 일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내가 이렇게 열심히 수고하지만 그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고 또 일의 수고도 남에게 끼쳐두고 내가 누리지 못하는 일이라는 것도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에서 찾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3장에서는 매우 중대한 전환이 있게 된다.
전도자는 왜 생애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되는데 결론이 허무여서 그의 출발점이 허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돌아보고 살펴본 결과 근본적인 새로움이 없다. 그 다음 그 생애에서 독특한 존재요 피조계의 대리통치자인 인간을 보고 인간의 모든 것을 시험해본다.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이성, 신적 능력들을 시험해본다. 인간은 과연 세상을 어느만큼 바로 파악할 수 있는가 이성에 비친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은 도저히 바로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있는 모습이 어찌 바라볼 수 조차 없는 모자란 모습으로 있고, 우리 이성에 비친 세계의 모습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라할지라도 우리가 그 속에 존재하는 모습이 적어도 이성은 거기에서 그 뒤틀려있는 것을 극복하여 바로 잡고 아무것도 건질 것없는 이 세상에서 알맹이 있게 만드는 어떤 면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말하자면 이성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 뒤틀려있고 모자란 것 투성이의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만물들, 그것을 극복하는 한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이성의 이면에 있는 건질것 없는 세계, 배후에 있는 이런 모습이라도 의미있게 만드는 어떤 무엇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지혜와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이성과 관련해서 나오는 산물이죠. 이성이 제대로 파악하고 제대로 가르쳐 준다고 하면 지혜로운 것이서 긍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지만 미련한 것은 이성이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미련한 것이지요. 문제는 어떤 것이 지혜이고 어떤 것이 미련한 것이고 어떻게 하면 이성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가하는 이성 자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물음에 대해서 이성 자체는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무엇이 참으로 지혜로운 것인지에 대해서 이성은 궁극적인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성으로서 이성의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가망없는 일입니다. 칸트의 비판철학이라는 것 자체가 이성으로 이성의 오류를 피해보자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미 다 결론을 깨닫고 말하기를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성이 이성을 제대로 통제해서 참된 진리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한다.
2장에서는 인간의 정서, 감정, 욕망, 바램, 이것에 따라 또 행한 일로서 생의 의미를 채워보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따라 그 감정의 흐름, 그 원하는대로 무엇이든지 해보고 성취해봄으로써 우리의 의미있는 삶이 가능한가를 발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지난 번에 이정도까지 했습니다.
이성의 본질파악 능력을 시험해 본 결과 절망하고 이성 자체의 기능에 대해 시험해본 결과 절망하니까 이제는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원하는대로 무엇이든지 해봄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에 인생의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발견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육신을 술독에 빠뜨리기도하고 포도주속에 몸을 담근다고 할만큼 쾌락에 자기를 완전히 맡긴다든지 하는 가운데서도 그 마음이 지혜로 인도하였다고 하여 냉철한 이성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과연 이렇게 사는 것에서 쾌락에 나 자신을 완전히 ㅂ맡긴 삶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살펴 보았다. 이 시도가 얼마나 포괄적이었는가하면 지혜로운 것, 이렇게 해야 마땅하다는 도리라는 부분만 시험한 것이 아니라 소위 사람들이 어리석음이나 그런 일 하면 안된다고 하는 거기서는 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고 제외시켜 버린 부분도 버리지 아니하고 역시 이전의 사람들이 잘못 생각했던 이 속에 깊은 생의 의미가 들어 있을 수 있는데 잘못 보고 지나쳐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어리석은 일도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면 다 해보고 그 속에서 생의 의미가 있는지 발견하려 해 보았다. 이것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실험을 해보았다. 그가 시도한 이 시험의 방대함에 대해서 철저하고 광범함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고 샘을 만들고 남녀 종들을 만들고 내게 기쁨을 주는 성장, 아름다운 것,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빼놓지 않고 다 해보았다고 하면서 9절에 말하기를 내 앞서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더 컸고 더 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내 욕망을 따라 뭐든지 해보는 성취해보는 이점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예루살렘의 내 앞에 있던 모든 자보다 더 하였다. 능가하였다. 예루살렘의 내 앞에 있던 자의 의미가 무엇인가? 내 앞서 예루살렘에 있던 자는 솔로몬 앞에 있던 왕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윗을 두고 말했는지, 그 이전에 다스리던 이방왕들까지 포함하는지 알 수 없으나 왕의 신분들을 그 앞에 있던 최고 권력자들을 능가하였다는 것이다. 왕이라는 것은 사람들 중에 최고 권력자이다. 가장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것, 사람 중에서는 뭐든지 해볼 수 있는 더 큰 가능성을 지닌 권력자입니다. 솔로몬은 거기에서부터 더 나았다고 하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 중 모든 최고권력자들을 능가하였다는 말은 모든 사람을 능가하였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고의 가능성, 모든 가능성을 다 실험해 보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욕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긴 생활을 하면서도 지혜가 여전하였다고 하는 것은 맹목적인 쾌락탐닉이나 욕망추구의 삶이 아니었고 냉철한 지혜, 이성의 판단과 평가가 진행되는 가운데 행하여진 일종의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내 눈이 요구하는 것은 금하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인간의마음이 욕심이 가 닿는데까지 극에 이르기까지 다 시험해 보았다는 말이다. 내 마음으로 하여금 어던 기쁨도 금하지 아니하였다. 내 수고 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기뻐하였으므로 또 이것이 내 수고의 몫이다. 내가 일에서 기대하는 당연하 몫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는 내 수고에서부터 얻은 기쁨과 쾌락과 즐거움을 느끼는데 있어서 어떤 제한도 받지 않았다. 일의 보람과 성취기쁨을 만끽하였고 그 일의 결과로 얻어진 것을 가지고 나를 즐겁게 하는 일에 제한을 가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나의 수고에서 당연히 기대할 수 있는 내 몫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이 모든 사람을 능가하여 내 마음의 욕망,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도하여 성취를 보았으며 또 이렇게 하는데서 보람과 기쁨과 쾌락을 만끽하였지만 그러나 내가 이 모든 일을 돌이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행한 일, 성취한 일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헛된 것 뿐이요 아무 건질 것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만 읽으면 내 마음대로 다 해보았는데, 일로서 얻은 것을 나를 즐겁게 한 그것이 내가 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내몫이라고 말하고 결론적으로 그러나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른 그가 왜 그러한 생각에서 허무를 느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왜 허무한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어느 누구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해보고 성취해보았지만 그것으로 보람과 쾌락과 기쁨을 느껴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헛되다는 이 말에서 그렇게 일을 많이하고 그것으로부터 보람과 가치를 느끼고 기쁨을 얻고 수고의 결과를 가지고 자신을 즐겁게 하고 쾌락을 누리는 것이 그의 삶을 결코 의미있게 못하고 허무를 매꾸어주지 못한다느 것이다. 그러나 왜 그런 삶이 허무한지에 대해서는 어떤 이유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유는 왜 이와같이 내 원하는대로 다 해보았는데도 해보면서 보람과 기쁨과 쾌락도 느껴보았는데도 왜 결국은 허망함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12절 이하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어리석음을 살펴보니 왕의 뒤에 오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이며 이미 앞의 사람이 행한 것을 행할 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지혜와 미련한 것을 돌이켜 살펴 보았는데 그것이 왜 왕의 뒤에 오는 사람은 그저 그가 이미 행한 것을 행할 뿐이라는 말로 했는지 두 내용이 어떤 관계가 있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12절에 지혜와 어리석음을 살펴보려고 하고 13절에도 지혜와 어리석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라는 말이 숙어로 계속 나옵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여러번 이야기했듯이 지혜와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규범에 따라 옳고 그름을 구별해서 판단선택하여 행동하는 것에 대해 숙고해 보았다. 회의를 해보기도 하고 의문을 품고 재검토 해보겠다는 것이다. 규범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도 몰두해보았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것과 어리석은 것을 구별해서 지혜로운 것을 선택해서 행하는 행동방식은 두가지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 따라 삶의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지혜로운 행동이다. 저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우리가 지혜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지혜로운 행동이 무엇인가 판단해서 선택해서 행동하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내가 지혜를 따라서 행할 때와 어리석은 일을 따라 행할 때와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 어리석게 행하거나 지혜롭게 행하거나 결과가 똑같다든지, 지혜롭게 행했는데 결과가 허망하게 나오면 따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든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별하고 지혜를 따라는 것은 지혜롭게 사느냐 어리석게 사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사람의 삶의 질을 완전히 서로 다르게 결정지을 것이라는 기대가 전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지혜롭게 살면 참으로 이럴 것이고 어리석게 삶면 참으로 저럴 것이다고 자기의 판단과 삶이 상태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려고 하는데 이것이 이런 기대가 사실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첫째가 왕의 뒤에 오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이미 있는 것을 행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의 한계,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내 이전의 사람들보다 내가 뛰어났기 때문에 물론 이런 사람보다는 못했지만 앞으로 오는 사람도 결코 내가 시험해보는 성취해보는 일의 범위와 한계를 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실험해본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일과 능력의 한계이고 인간의 창조적 능력의 원동력 근원과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 창조의 가능성을 약속해주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이 해본 일이 한계이다. 이것은 이간의 일, 인간의 이성, 인간 자체의 한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해주지 못하는, 어떤 한계에서는 어쩔 수없는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움을 주지 못하는 이성이 결국 우리의 삶이 공통의 한계 내에서 머물 수 밖에 없다고 하면 더 나아가서 상반된 이성활동,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삶의 질의 차이도 상대적인 근본적인 한계 내의 상대적인 차이에 불과하다면 이성의 판단능력이나 그 능력에 대해서 재검토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옳게 살던, 그르게 살던 어던 한계에서 살면 규범이나 도덕적인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인간의 한계라고 하면 어떻게 살던 이 한계를 넘지 못한다면 그 한계를 넘지 못할바에야 구지 바르게 살필요가 뭐 있느냐는 것이다. 거기서 거기니까 뭐 별다르게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이냐는 것이다. 어느것이 지혜롭고 어느것이 옳고 어느것이 그른지 따져서 무엇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결론은 이성이 우리 삶의 질의 상대적인 차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분명 어리석음보다 어떤 유익이 있습니다. 마치 빛이 어둠보다 낫고 유익을 주는 것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자의 경우 지혜를 마음의 빛을 소유한 자에게는 마치 머리속에 눈을 가지고 있어서 사물을 밝히보고 사리를 판단하고 옳은 일을 선택하여 사는 반면 어리석은 자는 흑암속에서 행하는 것처럼 세상을 의식하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하고 사리를 발견할 수 없어 행해도 어리석습니다. 옳바른 이성은 마치 우리 영혼의 빛과 같은 이성을 바로 사용함으로써 이런 실제적인 유익, 따라서 삶의 질적 차이가 주어지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지혜의 무용성에 인간의 이성의 무용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 인간의 이성이 옳게 사용하느냐 그르게 사용하느에 따라서 무슨 질적 차이가 상대적인 제한적인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나 14절 보면 전도자가 확인한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어느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만인 공통의 사건을 두고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지혜와 어리석음에 따라서 차이가 생기는 것은 사실인데 가만히 보니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닥치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닥치는 일이 내게도 닥치리니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어떤 일인가? 인간의 지혜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지혜로우냐 어리석으냐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은 그 앞에서 이성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이다. 지혜로우냐 어리석으냐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럼 내가 지혜로워서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를 의문을 갖게 한다. 이것도 역시 헛된 것이다. 지혜로운 자든지 어리석은 자든지 다 똑같이 영원히 기억되지 못한다. 때가오면 모두가 지혜자이든 어리석은 자이든지 잊혀지게 마련이다. 이 사실을 곰곰히 생각하니 기가막히다. 어찌하여 지혜로운자가 어리석은자와 똑같이 죽게 되는가? 죽음으로 잊혀지는가? 죽어서 잊혀진다는 이 사실은 어리석은자든 지혜로운자든 상관없이 공평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어떻게 지혜자가 어리석은자와 더불어 생을 마칠 수가 있다는 말인가?삶의 중지,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종국의 문제가 사는 과정에서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의 운명이 업치락뒤치락 하는 것은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가능성이라도 바라보며 위안을 받을 수 있으나 우리 삶을 돌이킬 수 없이 최종적 평가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이 똑같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은 절대적 허무를 가져온다. 우리의 이성이 인간의 삶의 아무런 근본적인 영향을, 질적 차이를 만들지 못하는 것 때문에 허무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대상을 파악하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 하여금 어떤 것이 지혜롭고 어떻게 하는 것이 어리석고 그른 것이라는 판단하게 행하게 하는 능력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시키는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이 이성이 어떤 근본적인 질적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면 그래서 17절에 보면 내가 해아래서 하는 일들이 악하다고 한다.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윤리적 악이 아니다.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그 기대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악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이 내게 악하다는 것은 기대되는 그 모든 일이 내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는 것을 혐오하게 된다. 인간이 그 욕망과 그 원하는 뜻에 따라서 그 뜻과 계획을 이루는 일, 업적이라는 것이 공허하고 찰라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 행위 모든 배후에 있는 이성이, 사물과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고 규범과 당연히 행해야 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지혜를 제공하는 이성조차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질적인 차이를 주지 못하고 한계내에 머무르게 하며 우리 인간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 누구나 죽을 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인간의 최고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한 절대적 회의와 삶에 대한 허무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나 나 자신 밖에 대상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나 있는가? 제대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행할 것이 무엇이고 행치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인간은 이성으로 참된 해답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든 이런 노력에 따라 힘을 다해서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이루어본다고 하여서 인간이무엇인가 일을 통해서 성취한다고 하여서 그 일로서 인간에게 굴레지어진 근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가? 그 일이 인간의 삶을 근본적인 질적 차이를 만들 수 있는가?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해서 전도자는 아니라는 대답을 얻게 됩니다.
그의 모든 신적 능력, 온갖 힘을 기울여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애써온 그의 삶을 두고 허무하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왜 그런가 하면 어떻게 살든간에 그것이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차이를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다. 사소한 미미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삶의 공통된 일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질적인 차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발견되자 삶을 혐오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 무엇인가를 이루어보려던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내 일을 하는 이 모든 일을 협오한다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모든 업적, 수고와 일을 통해 이루어놓은 것을 내 뒤에 올 사람에게 후계자에게 넘겨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 나온 것을 전제로 한다.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끝나게 될 때이다. 죽어버리기 때문에 한세대가 끝나면 그 세대는 그 세대의 일을 다음 세대에 넘길 수 밖에 없는데 왜 허무한가? 내 후계자 지혜로운자일지 어리석은자인지를 알 도리가 없기 때문에, 지혜로워서 내가시작하고 이룬 업적을 계속 발전시킬 것인지 아니면 어리석은 자여서 다 망칠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어쨌든 지혜로운자이든, 어리석은자이든 그가 내가 평생 이룬 것을 가지 주장대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허무한가? 끝이 좋으면 다 좋은데 끝이 나쁘면 중간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 일을 다음세대에 넘겨주고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자기가 시작한 자기의 일인데도 자기가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해놓은 일에 대한 계획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질 수도 주장할 수도 없다. 다음 세대에 넘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내 뒤에 오는 내 일을 이어받는 사람이 참으로 내 일을 내 의도대로 더 잘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보장만 된다고 하면 그저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것이 하등의 유감이나 별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 일을 이어갈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인지 어리석은 자인지 모른다는 것은 그 일의 결과를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다 망쳐놓으면 소용없어진다. 이것이 그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허무감을 느끼게 된 원인이다. 내가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에 대해서 내 마음이 절망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돌이켜 돌이켜 따져보니 절망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사람이 그 수고와 온갖 지혜와 기술을 가지고 수고하는 사람이 한편에 있는가하면 전혀 수고하지 않는 사람, 그 일 그 업적을 이루는데 아무런 관계나 참여가 없었던 사람이 일한 사람의 몫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주는 누가 부리고 돈은 누가 먹는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는 일에 대한 정당한 몫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일을 시작하면 좋은 결과를 맺고자 하고 좋은 결과를 맺어야 보람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가 기대하는 최대의 몫은 자기가 의도한 대로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의 몫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수고는 내가 했는데 수고의 결과는 다른 사람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온갖 지식 수고를 했는데 일한 사람이 차지해야할 당여한 몫을 전혀 수고하지 않는 사람에게 넘겨주고 끼쳐두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이것이 일에 대해서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다. 평생 아둥바둥 일하고 수고와 어려움을 다 겪으면서 해봐야 그 결과를 내가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도자가 하는 말이 옳은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가는 것이 정말 내 몫을 잃어버리는 것인가? 본래 세상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세상은 혼자 살게 되었는가?하나님께서 인간은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다. 사는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사는 존재이다. 내것으로 남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든지, 그런 동역자 원리가 전제된다고 하면 내가 수고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유익을 얻는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전도자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면 사실이나 무엇인가 근본적인 것은 남겨놓고 솔로몬이 깔아놓고 있는 것이다. 전도서를 피상적으로만 읽으면 세속철학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앞의 말한 것도 다 마찬가지이다. 전도자가 한 말이 일면 사실이나 다 옳은 것이 아니다. 전도자가 일면 의미있는 말을 하나 그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배후에 깔아놓고 말하는 것이다. 허무하다 허무하다 고백하는 말 배후에 있는 것을 헤아려 보라. 전도서는 직설적인 책이 아니다. 말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표현이 복잡하다. 복선을 많이 깔아요. 소설가들이 인물 하나하나 사건 하나하나에 복선을 깔고 있고 겉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 전도서도 그런 성격이 강하다.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인 의미만을 따라가면 전도서는 이단에 속한 책이 된다.
일의 의미를 이런 시각에서 밖에 볼 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한 이성의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이라는 것을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한편으로는 이웃을 위한 것이요 공동체중심적인데 나 중심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그렇다.
24절에서 26절을 매우 독특하다. 앞의 것을 반복하면서 내 수고의 결과를 다른 사람이 취하는 것을 말하면서 더 근원적인 시각에서 취급하면서 3장과 연결되는 고리역할을 한다. 앞에서는 나의 수고로 이룬 것을 후세에 끼쳐두고 갈 수 밖에 없다는 것, 즉 죽음이 일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 내 수고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된다는 것, 일하는 사람 따로, 댓가를 차지하는 사람 따로라는 부조리가 일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절망하게 만든다면 여기서는 죽음이 우리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전에 살아 있는 동안 철저히 즐기라고 하면서 여기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합니다. 적어도 이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즐기는 것이 일에서 받을 수 있는 정당한 몫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몫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한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것조차도 일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기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그것 자체가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수고하여 일하여 얻은 것을 내가 누리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누가 먹을 수 있는가?누가 즐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내 밖의 일이요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고 한다. 먹고마시는 것도 우리 밖의 일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그에게 좋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신다. 바로 깨닫고 선택하여 그 일의 결과를 선하게 하셔서 그것을 즐기고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적이다. 하나님 앞에 좋은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에게 이것이 주어진다. 이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허락되나 죄인에게는 모으고 축적하는 과업을 맡기나 모아놓은 것을 누구에게 주는가하면 하나님 앞에서 선한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다. 새로운 요소가 덧붙여졌으나 근본적인 것은 일한 사람 따로 누리는 사람 따로이다. 새로운 요서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일한 것을 누리고 기쁘게하시나 죄인들에게는 모으고 축적하게는 하시나 그것을 선한자에게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요소라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질서와 틀, 이성과 일 그리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과된 죽음에 의해서만 인간의 삶과 활동이 한계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24절에 보면 해아래서 잠간 즐기는 그 일에서조차도 인간은 철저히 한계지어있음을 말한다. 문제는 바로 그 모든 한계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신다고 하면 더큰 일, 죽음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한계의 궁극적인 근원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전도서는 새로운 차원의 논의로 들어갑니다. 전도서의 방식은 그저 히브리적 특성이라고 할지 적어도 성경서술의 특성인 것 같아요. 규범적인 사실이 있으면 이것을 말해놓고 똑같은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거론하고 취급하고하는 이런 구조적인 것인데 이것을 얼핏보면 반복되는 것 같아 보이는데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취급함으로써 이전에 취급되지 않은 점을 취급하는데 전도서도 그렇다. 지금까지 논해졌던 문제들이 다시 재론이 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재론이 된다. 새로운 차원에서의 논의, 도입하는 도화선,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축과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모든 한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전도자로 하여금 그처럼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모든 노력을 무미하게 만드는 그래서 인간의 삶에서 아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한계들인데 그 한계들의 근원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어설픈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면 인생을 참으로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실제로 이런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을 몰아내버린다. 하나님이 있으면 될일도 않된다고 하나님을 몰아내버린다.
인간의 이성을 비롯해서 인간에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제실천을 다 동원해서 인간의 가능성을 다 실험해본 결과 그런것들이 우리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하는 것은 우리의 생을 무의미하게 하는 한계들에 부닥치게 됐다 이성도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에 있어서 지혜와 어리석은 삶을 구별하는데도 무력하고 원하는 것을 다 해보았으나 그 어느것도 삶의 근본적인 변화나 질적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외에 여러가지 인간의 삶이 부딛히는 한계에 대해 언급하다가 마지막에 부딛히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이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안되고 자꾸 한계에 부딛힌다. 그래서 제일 마지막에 가서 무엇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되는가? 하나님 때문이다. 왜 사람이 자기가 수고한 제몫을 찾아 먹지 못하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과 관련해서 언급되지만 결국 모든 한계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인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세계가 부딛히는 모든 한계가, 제한계의 궁극적으로 오는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존재함은 전도서의 모든 일에 있어서 극적인 전환점을 가져온다. 논의가 도약하는 그런 것으로 진행하여 나아간다. 앞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피조계를 보다가 거기에서 피조계의 대리통치자, 피조계의 제안적인 의미에서의 주권자, 치리자인 인간에게로 옮겨졌었다. 피조계에 있어서 최고의 존재, 인간에게 옮겨져서 세계 전체로서는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세계 내의 독특한 존재인 인간을 바라보면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문제는 2장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가 하나님으로 갔다. 하나님께서 논의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세계와 그 속의 인간, 인간을 둘러싼 모든 일들과 이 속에 있는 하나님이란 요소가 보여지기 시작한다. 이 속에 하나님이란 요소가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논의의 발전이 이런 의문을 의식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에서 2장 24절 이하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언급될 때 무엇과 관련해서 언급이 되는가? 구체적으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수고의 열매를 먹게 하는 것이 인간자신의 의지나 뜻이나 능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뜻에 따라 정하신다고 하는 맥락에서 하나님이 언급이 되었다. 앞에서는 그저 그런 맥락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수고의 열매를 누리게 하고 즐기게 하는 부분과 관련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된다고 한다. 그런데 3장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범위가, 사람의 삶에 있어서 또는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능이 하나님이라는 요소가 어느정도까지 작용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몇가지 주의해야할 새로운 요소들이 발견된다. 바로 이제 하나님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s {yfmf<ah taxaT jep"x-lfk:l t"(w }fmz loKal 3.1
만사에는 때가 있고 해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되어 있다. ן??은 정해진 날짜, 시간을 의미합니다. 아랍어에서는 ---의미가 있다(사전을 찾아보라). 대개보면 “정해져있다”는 뜻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ת?은 그저 시간을 나타낸다. ןמז과 구별해보면 시점을 나타낸다. 만사에도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사들을 말하면서 시간을 말했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시간의 틀, 시간의 흐름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존재는 즉각적으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삶을 구성하는 모든 활동과 행위에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조금전에 말했듯이 이것은 인간존재, 그의 삶의 모든 활동을 시간이라고 하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존재, 전 존재, 모든 삶이 시간의 틀, 시간의 흐름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할 수있다. 바꾸어 말하면 전도자의 역사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 역사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 내지 역사의 정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질서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만사에는 정한 때가 있다고 포괄적으로 말한 다음에 구체적으로 막연하게 말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가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a(U+n rwoqA(al t"(w ta(a+fl t"( tUmfl t"(w tedelfl t"( 3.2
출생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무너뜨릴 때가 있고 한다. 궁극적 속성이라고 하면 앞의 것과 서로 상반되는 두가지가 있다. 출생과 죽음이라는 것은 해아래서 인간존재의 시작과 종말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출생과 죽음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어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 성격에 따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각 행에서 전반부와 후반부는 서로 상반되는 활동이다. 상반된 것이 짝을 이루게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양극단을 언급함으로써 그 사이에 포함되는 다양한 것들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양극단을 언급하는 것이다. 출생과 죽음이라는 것은 출생에서 죽음 사이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인간의 온갖 다양한 삶의 모습과 활동들이 그 다양성과 상반성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성과 상반성까지도 정해진 시간의 흐름속에서 이루어진다. 시간속에 용해, 배열된 질서가 존재한다.
맨처음 언급된 것이 출생과 죽음인데 일반화시키면 생성과 소멸, 창조와 파괴까지 포함될 수 있다. 인간존재의 시작과 마침도 정한 때에 일어난다. 인간의 존재의 시작도 정한 질서를 따라 난 것이지 내가 낳고 싶다고 내가 태어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twon:bil t"(w jwor:pil t"( )woP:ril t"(w gOrAhal t"( 3.3
심는 때와 심은 것은 뽑을 때, 파종과 추수인데 이것이 아까 말씀드린 그런 범주에 포함된다. 생성, 소멸, 창조, 파괴 죽임 소멸 이런 것들이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모든 것을 다 결정, 자기 판단에 의해서 이런 일들을 행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어떤 질서, 정한 한계, 규범이 있어 그것을 따라서 일한다.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dwoq:r t"(w dwop:s t"( qwox:&il t"(w tOK:bil t"( 3.4
슬픔과 기쁨, 울음과 웃음 울음과 웃음의 극단적인 형태가 애곡과 춤추는 행위이다. 슬픔과 기쁨이라는 두 사이의 모든 인간의 감정을 다 말한다. 이런 것들도 내 마음대로 웃고 내 마음대로 울수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 역시 정한 때가 있어서 그에 따라 이루어진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모을 때가 있다. 돌과같이 흔해빠진 가치 없는 것도 버릴 때가 와 모을 때가 있다.
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q"Bax"m qox:ril t"(w qwobAxal t"( {yinfbA) swon:K t"(w {yinfbA) |yil:$ah:l t"( 3.5
생명과 같은 아내를 안을 때와 멀리할 때가 있다. 돌과같이 흔해빠진 것을 버릴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yil:$ah:l t"(w rwom:$il t"( d"Ba):l t"(w $"Qab:l t"( 3.6
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r"Bad:l t"(w two$Axal t"( rwoP:til t"(w a(wor:qil t"( 3.7
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wolf$ t"(w hfmfx:lim t"( )on:&il t"(w bohE)el t"( 3.8
이렇게 세세하게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정한 때가 바로 이렇게 구석구석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느 한 구석도 그 정한 때라고 하는 틀을 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인간의 개별적인 일에 대해서 말했는데 그 연장으로 이렇게 세세하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이 이와같이 철저하게 어느 한 부분도 우리의 감정조차도 하나님의 간섭에서 하나님의 통치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극적으로 말하려면 말을 여기서 끊고 말을 해야 하는데···
이런 것, 우리 삶의 모습을 보고, 그저 태어나고 죽는 것, 생의 여러부분이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는 실상을 보면서 전도자는 이런 의문을 던집니다.
전 3:9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l"mf( )Uh re$A)aB he&O(fh }Or:tY-ham 3.9
השׂועה는 השׂע의 ptc이다. 이것은 독립용법으로 명사적으로 사용되었다. 행위자라는 말이다. “그가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행위자가 얻는게 무엇이냐?”는 뜻이다. 그의 삶이 어느 한부분도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일이 그가 정하신대로 움직인다고 하면 행위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실제로 그것을 행한 인간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독자적 의미가 없고 꼭두각시라는 것이다. 그가 영위하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이 여러분 스스로가 그랬고 초신자들에게서 많이 듣는 질문들이 여기 다 나와 있다. 이런 큰 질문을 던져놓고 인간의 삶이 이와같이 그 삶을 사는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 주장이 된다고 하면 과연 인간은 그의 삶의 주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삶의 주체로서 인간이 자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의 의문을 던져놓고 시작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전 3: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woB twonA(al {fdf)fh y"n:bil {yiholE) }atn re$A) }fyni(fh-te) yityi)fr 3.10
이 표현은 인간의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 표현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어 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과업, 이것을 본능이라고 했다. 그것을 내가 보았는데 그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fBil:B }atn {flo(fh-te) {aG woTi(:b hepy hf&f( loKah-te) 3.11
hf&f(-re$A) he&A(aMah-te) {fdf)fh )fc:my-)ol re$A) yil:Bim
;vwos-da(w $)or"m {yiholE)fh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때에 아름답게 행하신다고 한다. 역시 또한 영원을 그 마음 속에 두셨다. 이것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세밀하게 간섭하시고 주장하신다면 도대체 인간이 설자리가 어디인가?라고 물음을 던진 다음에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할 수 밖에 없는 무엇이 있다고 하고 제일 처음하는 이야기가 하나님께서는 만사를 그 때에 따라 아름답게 행하신다고 한다. 우선 הפי의 의미가 무엇인가? 아름답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지금 그가 시도하는 실험 전체를 두고 근본적으로 품는 것이 무엇인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하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있는가? 저렇게 되는가하는 질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아름답게 비치는 것이라고 하면 의미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의 부분부분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따라 양극단에 존재하는 무한한 것들을 서로 상반되는 것까지도 긍정적으로 참된 의미를 가지고 시간 속에 배열, 정리, 발생하게 하신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 마음 속에 영원을 주셨다({fBil:B }atn {flo(fh-te))고 말씀한다. 그 아래 CP를 보면 םבלב가 본래는 וב인데 이것을 중복해서 쓰다보니까 이렇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만일 복수로 보면 10절의 사람 마음속에 영원을 두셨다고 된다. 그런데 וב로 보면 만사 안에 영원을 두셨다고 하게 된다. 이상하게 된다. CP에는 단수로 보라고 해놓았는데 이렇게 보면 범신론적으로 가서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때에 따라 의미있게 행하시면서 사람에 대해서는 영원을 주셨다고 한다. 영원을 랍비들은 세계, 세상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사람 심중에 세계를 주셨다는 것이다. 일종의 작은 세계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םלע은 14절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달리 특별한 뜻으로 볼 필요가 없이 영원으로 보면 된다. 앞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사 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신 과업을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만사를 아름답게 행하시나 그 마음속에 영원을 두셨다고 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어 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본능이 인간의 심중에 두신 본능을, 의식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영원과 관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이란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영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 문맥에서는 םלעה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영원하리라. 그것을 행할 수도 없고 ---, 여기 영원히 14절과 연관이 있다고 하면 14절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불변적이고 더할 수 없는 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영원에 대한 의식을 심어 주셨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심에 따라 배열된 흐름속에서 영원한 것, 시간의 흐름속에서 항상 변화는 변화, 역사속에서 불변의 것, 궁극적인 어떤 무엇을 사람의 마음속에 두신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일시적이고 변화무상하며 역사의 겉모습, 피상적인 모습 배후에는 역사의 흐름 배후에 그것을 초월해 있는 단순한 역사적 흐름 그자체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배후에 있는 것을 보는 의식을 부여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의 표피적 흐름 자체보다는 항상 변화하는 흐름 자체보다는 근원에 있는 무엇, 역사의 궁극적 기반에 대한 의식, 신적 본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럴 때 3장 11절 전반부는 의미를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것을 간섭하신다면 행위의 주체인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만사를 의미있게 행하시며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두셔서 역사 자체를 바라봄으로써 만족할 수 없는 그 배후의 궁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본능을 심어주셨다는 말이다. 이 말을 조금 정리해 봅시다. 앞서서는 처음 하나님의 존재가 언급될 때 하나님은 인생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분으로 말했습니까? 무의미한 분으로 보였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한계의 궁극적인 원인자로 긍극적인 한계로 제시되었다. 하나님이 다하시니까 내 할일이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할 의미가 없는 분, 의미없게 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그렇게만 보면 하나님은 세계내의 존재가 아니다. 내재하시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초월적 존재이시다. 초월적 존재가 세계내에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세계의 의미를 의미있게 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11절의 전반부, 그 때에 따라, 시간이라고 하는 역사속에서 모든 것들이 의미있게 안배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배하시면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설자리가 없다는 의문에 대한 부정이다. 아니다 하나님께서야말로 만사를 의미있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 하나님의 위치와 어떻게 조화가 될 수 있는지 토론이 되지만 여기서는 강하게 긍정한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역사의 모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선언에 따라 앞서 전도자가 말했던 허무의 고백을 재검토 해보자.
우선 세계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고 무의미하게 느낀 것이 무엇인가?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 정한 한계가 있다. 질서가 있다고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에게서도 모든 면에 있어서도 한계가 있다. 이성에 있어서나, 일의 성취에 있어서나, 결과를 누리는데 있어서나 한계가 있다. 이것이 세계나, 인간이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하는 무엇인데 그것이 바로 3장에 와서는 하나님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질서나 한계 이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의 통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인으로서 뜻대로 통치한다고 하면 모든 피조물, 인간을 포함해서 한계지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이 어디서 출발하든지 항상 한계에 가서는 하나님과 만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모든 것, 세계의 모든 것을 한계지으는 하나님의 통치가 정하신 때에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통치라고 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삶의 각 부분에서 부닥치는 한계라는 것은 그의생을 허무하게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세계 역사의, 삶의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하는 한계들이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의미있게 하는 토대가 되는가? 사실 이 두가지 상반된 말 속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변화가 개입되어 있다. 신앙과 불신앙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와 인정하지 않는자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는 그가 경험하는 모든 한계가 절망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한계들이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 것, 참으로 가치있고 보람있게 하는 것이다. 쉬운 예를 하나 듭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불신상태에 있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하나님을 믿게 될 때,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옮기울 때에 , 그 과정에서 영적인 근본적인 변화가 있으나 대개의 경우 우리의 외형으로 큰 변화가 있습니까? 대단한 변화가 초래됩니까? 전도자가 말한 제한계는 그 이전이나 그 후나 별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죽음까지도 더이상 내 삶을 허무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절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사를 그 뜻대로 아름답게 행하신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 없이는 세계나 역사나 인간의 삶이나 결코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허무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해아래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존재와 삶이 진정한 보람과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그 시선이 해아래 머물러서는 안되고 세계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 하나님 안에는 만사를 그 때에 따라 의미있게 하시는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하나님 안에 이와같이 세계의 의미는 세계내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고 세계를 초월해야,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어떤 본능을 주셨는가? 영원을 사모하는, 영원을사모하는 의식, 역사자체로서 만족하지 않고 역사를 뛰어넘어 계시는 그 무엇을 항상 추구하고 사모하는 본능을 심어주신 것이다. 이 간단한 두마디가 전체 흐름에서 의미를 갖는지 이해가 되는가? 만사를 의미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직 역사속에 보일 때이다. 그런데 전도자가 이 말을 할 때에는 나 자신이 하나님을 발견하면 모든 것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하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있더라라는 것을 유보하고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이 감격속에서 한절도 못가서 다시 절망으로 추락하게 된다. 11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사를 의미있게 행하시고 사람에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역사의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서나 세계내에서 발견하지 않고 궁극적인 초월적인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려는 의식을, 이것을 종교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세계 내에서 찾는의미로는 영혼의 만족을 못하므로 세계를 초월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왜곡되고 잘못되서 탈이다. 그런데 우리 삶이나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려는 강한 열망, 본능을 심어주셨는데 문제는 ;vwos-da(w $)or"m {yiholE)fh hf&f(-re$A) he&A(aMah-te) {fdf)fh )fc:my-)ol re$A) yil:Bim 에 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행하시는 일들을 사람으로 그 일의 시종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시종을 발견한다는 말에 비추어볼 때, 역사의 궁극적 기반에 대한 의식, 본능이 궁극적 근원과 관계되는 것이라는 알 수 있다 .역사는 무엇에서 생겨나며 시간과 상황에서 행위나 역사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를 궁극적인 인과율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역사의 동인 또 어떤 무엇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인가 하는 의미가 역사내에 머물지 않고 근원에 까지 열려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발견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역사의식을 두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섭리하시는 역사의 궁극적인 근원과 종국을 발견할 수 없게 하셨다고 한다. 역사의 궁극적 기반에 대한 의식,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능인데도 불구하고 그 해결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대개의 이것은 역사의 투명성을 전제로 한다. 역사의 의미는 투명해서 인간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식, 역사학은 무의미하다. 판넨베르그 같은 사람도 역사의 투명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근본적으로 역사의 의미는 인간이성의 지적탐구에 열려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도서는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의 불투명성을 말한다. 역사의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없다. 역사는 인간에게 있어서 불투명하며 불가불능의 벽이다. 인간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의 궁극적 의미는 인간에게 열려 있지 않고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데 우리의 역사를 의미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따라서 우리의 삶이나 역사의 참된 의미, 의미있는 내용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의미를 발견하도록 본능까지 주셨는데 알 수 있게 하지 않으셨다. 그럼 어떤 질문이나오는가? 하나님께서 의미있게 다스려도 내가 내 삶을 의미있게 하는 그 의미있게 하는 뜻을 알지 못하면 그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것이다. 역사의 불투명성을 다른 각도에서 다루어보자. 역사의 불투명, 역사에서,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이것이 인간 본래적인 것인가? 아니면 타락으로 인한 손상인가? 창조시에 인간은 역사에 대해서 꿰뚫어볼 능력을 소유하였는가? 아담이 짐승들을 불어올 때 다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의 본질을 규명했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뜻을 파악하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담이 능력이 없었을까? 롬1:20에 보면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이 인식된다고 하고 있다. 이런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과 그가 행하신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인간의 궁극적 역사기반, 의미파악은 타락후에 초래된 결과요 보래는 아니었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타락전에는 역사는 투명한 것이요 참된 의미가 파악된다고 해야 한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전도서는 타락후가 아니라 창조 본래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도 그가 얻은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19:29편에 보면 전반부에는 보이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며 후반부에는 율법을 통한 계시를 말씀한다. 동일점을 말하나 차이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자연계와 만물을 통해서 주어지는 계시, 율법을 통해서 주어지는 계시가 구별된다고 하는 것, 내용에 있어서 완전히 coextensive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근본 창조된 후에는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부여받은 능력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한도 내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타락후에는 일반계시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도 왜곡되고 무용지물이 되엇 우상숭배로 가게 된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아무리 만사를 다스리게 하시고 우리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았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는 12절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전 3:12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wyfYax:B bwo+ two&A(alw axwom:&il-{i) yiK {fB bwo+ }y") yiK yiT:(ady 3.12
내가 깨달았노니 사람이 즐기고 그 생의 좋은 것을 행하는 것 외에는 좋은 것이 없다. 이것이 인생의 인간의 전부이기도 하다. 인생의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의미잇게 다스리시게 하시며 인간으로 역사의 근원적 의미를 추구하게 하셨으나 동시에 그것을 알 수 없게 하셨다고 하면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인간을 초월하여 일하고 인간은 땅에서 자기의 최선이라고 하는 것을 추구하면 이것이 인생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 인간은 땅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우리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살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살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피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살펴볼 때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다. 피조계의 독특한 존재인 대리통치자인 인간을 관찰하면 세계와 역사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보았지만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세계와 역사 내에 개입시킴으로써 하나님을 통해서면 세계와 그 역사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개입시켰을 때, 그의 전포괄적 주권성이 오히려 행위 주체자로서의 인간을 유명무실한 존재로, 인간의 모든 행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혀 모든 종류의 활동을 다 열거하면서 이것들이 다 때가 있다. 때가 되니까 인간의 의지나 어떤 바램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것을 초월하여 있는 질서가 있다고 하면서 묻기를 그렇다고 하면 이것을 행하는자도 엄밀히 보면 행위자가 그것을 행하는 것, 일하고 태어나고 모든 것을 행하는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가? 행위주체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전포괄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을 고려할 때 행위주체자인 인간의 의미가 없다. 이것을 지난번에 자세히 다룬 내용을 다루었다. 하나님은 만사를 때에 따라 아름답게 하시고 시간의 흐름속에 역사이 흐름속에 개별사건들을 의미있게 각각 배치하시고 거기에다가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을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땅 차원의 것으로, 해아래, 땅 차원에 만족치 못하고 땅 차원 이상, 역사의 궁극적인 기원을 땅에서만 찾아서는 성이 안차는 것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땅에서 찾지만 기반은 항상 영원한 것에서 찾으려는 본능을 심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본능을 따라 인간은 역사의 궁극적 깁나에 대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본능을 펼치려고 하고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의미있게 다루므로 역사는 객관적 의미가 있고 또 사람에게 본능을 심어주셨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의미있게 하시는 그 의미를 발견하려는 그리고 깨닫기 전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그 본능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계속해서 찾을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시종을 깨달아 알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게 무슨 심술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찾게는 하셨으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을 알게 못하셨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만사를 의미있게 다스리시지만 개별적 사건, 다양한 사건, 양극단을 포함하여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건들을 역사의 흐름속에 의미있게 배열하시든간에 모든 역사를 의미있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 하나님께서 각 사건에 부여하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의 시작과 끝을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하면 인간에게 남은 선택은 무엇밖에 없는가? 사람이 그 사는 동안에 선한 것을 기뻐하며 즐거움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는데
;wyfYax:B bwo+ two&A(alw axwom:&il-{i) yiK {fB bwo+ }y")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것이란 없다. 기뻐하고 행하는 것(two&A(alw axwom:&il)은 hendiadys(이사일의 ἑν δια δυο)이다. 기뻐하여 행하는 것이다. 둘이 합해서 하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가 사는 동안에 그 생애에 있어서 기뻐하여 행하는 것 외에 좋은 것이라는 것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서두의 בוט가 의미가 무엇인가? 어떤 주석가들은 그저 편안게 지내는 것, 윤리적 의미를 전혀 부여하지 않고 그저 일반적으로 좋게 잘 지내는 것으로 그런 내용으로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뭐가 좋으냐? 그저 생애 가운데 좋은 것, 자기에게 좋은 것을 행하고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좋은게 좋다는 것이다. 너 누구냐?우리 아버지의 아들이요.하는 것으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בוט 가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앞에서 세계의 의미를 주는 것이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 안에서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나 발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남은 선택이 그럼 무엇인가?그저 좋은 것을 행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 먹고 마시고 수고에 대한 좋은 것을 경험하고 누리는 것으로 나와있기 때문에 그저 윤리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좋은 것, 기쁘게 하는 것, 즐겁게 하는 것 이런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만은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할때, 남은 선택은 결국 이것 밖에 없지 않느냐 하며 의식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을 전제함으로 여기서 בוט라는 것은 세속적인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있지 않는가 한다. 그저 의미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전제에서 그저 즐겁게 하는 것이 בוט라고 하므로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내게 가치있고 의미있다고 판단되는 것, 참 이것이 가치있고 의미있다, 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원해서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가치관대로 사는 것이 의미있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께서 각 사건마다 부여하시는 의미를 알 수 없을진데 인간이 각기 자기 소견대로 자신의 판단대로 옳고 선한대로 가치있고 보람있는 것, 자기가 기뻐하는 것을 따라 행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하고 이해할 때 앞의 내용과 더 잘 부합이 된다.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은 결국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전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yih {yiholE) taTam wolfmA(-lfk:B bwo+ hf)frw hftf$w lak)Ye$ {fdf)fh-lfK {agw 3.13
내가 한 모든 수고에서 얻은 것을 먹고 마시고 그 좋은 것을 즐기는 것 이것이 바로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표현이 하나 나온다.
;)yih {yiholE) taTam wolfmA(-lfk:B bwo+ hf)frw hftf$w lak)Ye$ {fdf)fh-lfK {agw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איה가 주어이고 תתמ가 술어이다. לכאישׁ에서 שׁ은 רשׁא에서 왔다. 먹고 마시고 그 수고에서 좋은 것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이 된다. תתמ앞의 전체를 하나로 보기도 한다. 먹고마시고 선한 것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또 한가지 가능성이 있다. 12장 13절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fdf)fh-lfK hez-yiK rwom:$ wyftw:cim-te)w )fry {yiholE)fh-te) (fm:$n loKah rfbfD vwos 12.13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리고 그 계명을 지키라. 그것이 인간의 전부다라고 한다. 12장 13절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לכאישׁ부터가 주부이고 그 앞에 술부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이 인간의 전부라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나름대로 인간이 자기가 판단하기에 가치있고 의미있게 행한다고 하는 그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이 먹고 마시고 그 수고의 선한 열매를 즐기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쁘게 생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당연하고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사를 의미있게 행하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사모하게 하셨는데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럼 남은 선택은 무엇인가? 내 스스로 가치있고 좋아하는 데로 행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이냐? 수고한 바를 즐기는 것이다. 이런 전도자의 결론은 하나님은 하늘에, 나는 땅위에, 하나님은 하늘위에 계셔서 우리의 생각과 지혜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나와 상관없다. 그래서 각각 살아간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나는 땅에서 내 좋은대로 살 수 밖에 없다 내게 그 뜻을 알리지 않고 그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통치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나님은 하늘에서 뜻대로 행하시고 나는 땅에서 내 뜻대로 살아간다고 하고서 또 14절에
전 3:1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a(or:gil }y") UNeMimU vyisOh:l }y") wyflf( {flO(:l hey:hy )Uh {yiholE)fh he&A(y re$A)-lfK yiK yiT:(ady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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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모든 것, 그것은 영원하다는 것을 내가 깨달았다. 거기에 더할 것도 없고 감할 것도 없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영원하다고 하고 거기에는 더할 것도 감할 것도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누구도 변경할 수 없고 간섭할 수 없고 왜그러느냐고 할 수 없는 주권적인 성격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행하시는 것의 절대성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절대성을 다른 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완전하고 불변하고 궁극적인 것이어서 더할 것도 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둘을 합해서 말하면 누구도 변개도 이의할 수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요 완전하고 완벽하고 궁극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그 앞에서 경외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 완전하신 행하심, 그 주권적인 행하심 앞에서 머리를 숙일 뿐이다. 은혜로운 말인데 이것이 생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가진 자에게는 이것이 다르게 비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완전한 역사 앞에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완전한 역사에 인간이 더할 수도 감할 수도 없으니 외견상의 행위자인 인간이 역할이 무엇이냐? 꼭두각시냐? 맹목적 순종과 절대통치자 앞에서 인간은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행위의 주체, 내 삶의 주인, 역사의 주체로서의 지위와 가능성이 완전히 상실하고 하나님의 절대통치만이 부각될 뿐이고 인간이 설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 뜻대로 다 하시고 알려주시지 않고 그 밑에서 사는 내가 그 하나님의 완벽한 통치 앞에 설자리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1,2장과 3장 이하는 차이가 있다. 1,2장은 세계와 인간에게만 시야를 고정해서 보려고 했다. 그래서 거기에 느끼는 허무와 문제점은 불신자,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느끼는 것과 가까운 반면에 3장 이하는 하나님께서 역사에 가장 결정적인 분으로 내재된 다음에 보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상황에서 느끼는 허무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가 느끼는 허무이다. 그래서 그 성격상, 형태상 우리가 느끼는 문제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어쨋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그 뜻대로 행하시지만 그것을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므로 우리 나름대로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나름대로 살아간다고 그것이 되는것 아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주권 안에 있다.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 설자리가 없다.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최고의 사람을 구하는데 그럼 피곤할 수밖에 없다. 그 앞에 서면 외소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말한마디 꺼내면 욕만먹고 설자리가 없다구요. 그저 적당한 자, 서로 돕고 도움받고 사는 사람이 가장 좋다. 물론 이것이 완전한 정상적인 신앙인의 자세는 아니다. 전도서는 복잡한 책이다. 무엇이가 옳은 것 같은데 뒤에 또 무엇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또 다른 성격을 15절에서 말한다.
전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vfD:rn-te) $"Qaby {yiholE)fhw hfyfh rfb:K twoy:hil re$A)w )Uh rfb:K hyfhe<-ham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도 있었고 장래에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반복성을 말한다. 해아래 전혀 새로운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왜 해아래서 일어나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하는가? ;vfD:rn-te) $"Qaby {yiholE)fh 하나님께서 날마다 찾으시기 때문에, 한번 밟고 지난 것을 늘 반복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왜 역사가 반복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밟고 반 자취를 반복해서 밟고 가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한번 행하신 일을 반복하신다는 것을 앞에서는 한계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전도자의 느낌만을 말했지만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한번 행하신 것은 반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번 행하신 것을 다시 행하시지 않는다면 정말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오늘은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상주시다가 내일은 다르면 변화무쌍하면 더 곤란해지겠지요. 근본질서와 한계를 정하시고 그가 정하신 질서와 한계를 따라 행하신다는 것, 일관되게 반복해서 행하신다는 것이다. 이 반복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가 있고 누구도 그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면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완전성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한다. 완전한 것은 반복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다. 물론 완전성이 그 안에 어떤 변화도 수용하지 못하는가는 별문제이지만 적어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질서 한계 이런 것은 우리는 전도자는 나의 가능성을 축소하고 제한하는 것으로 보아서 내 생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으나 긍정적인 것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나 한계가 그의 완전성과 관계된다고 하면 이 질서, 한계는 우리에게 오히려 우리의 삶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서 나를 구속하고 얽매는 것이 되는가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성경에서는 율법을 완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것은 전도자가 말하지 않고 있는 다른 결론까지를 염두해두고 조금 나가본 것이고 현재로서는 전도자는 뭐라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우리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시니까 그리고 우리를 꼼짝못하게 하시니까 그가 우리 내에서 세계창조내에서 행하시는 일이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 아니라 다 막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에서 살맛이 없다는 항변이 숨어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요인을 역사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전체적인 우리의 삶, 의미를 무의미있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끝까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자의 마음속의 진정한 의도를 알아야지 이것이 전부라고 끌려가면 안된다. 그것이 우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이때까지 모든 문제제기는 이런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뜻을 알수 없다고 하면 하나님은 하늘에서 자기 뜻대로 하고 나는 밑에서 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는체 하나님의 독단적인 통치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다고 하면 내 인생의 주체로서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서 어떤 의미를 내가 찾을 수 있겠는가? 나는 꼮두각시가 아닌가. 꼭두각시라고 하면 나는 과연 내 삶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그 다음에 16절 이하에서는 조금 하나님의 통치의 문제점을 다른 시각에서 발견합니다.
전 3:16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a$frfh hfMf$ qedeCah {woq:mU (a$erfh hfMf$ +fP:$iMah {woq:m $emf<ah taxaT yityi)fr dwo(w 3.16
하나님이란 요인을 역사에 개입시킬 때 나타나는 복잡한 요인을 하나 또 상정하고 있다. 해아래서 내가 살피니 공평의 자리에 그곳에 악이 있고 의의 자리에 악이 있는 것이라. 공평과 의의 자리에 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의와 불의와 전도되어 있다는 것이다. 선악의 질서가 전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하면 만일 역사라고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내 삶이 순전히 나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라고 하면 그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 내가 지면 된다. 거기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 내가 책임진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 개인의 삶이나 전체 역사의 실제 주인이 그것을 시행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부조리의 문제가 된다. 선악질서의 문제가 된다.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하니까 문제가된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세상이 역사가 왜 이모양이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역사 내에서 선악의질서가 전도되어 있다는 것이 좁은 소견으로 보면 하나님이 악한 분이라는 결론이 나는 것이다. 그가 내린 결과로 그 사람의 존재를 알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결과가 악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악한 분이라는 것이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그 스스로에게 이르기를 이라고 하니까 잠정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말한다.
전 3:17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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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과 악인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 지금은 선악의 질서가 전도되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이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과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각기 그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양극단의 전혀 상반되는 일까지도 시간에 따라 안배가 되어있다고 할 때 각각은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기를 하나님께서 의미있게 행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전도된 선악의 질서를 바로 잡을 것이라는 기대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때를 말했다면 일반적인 말로 바꾸면 어떤 뜻인가?선악 질서의 전도의 문제가 시간의 흐름속에서 역사 내에서 정리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자의 결론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아주 냉혹한 현실이 있음을 그는 18절 이하에서 밝힙니다.
전 3:18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ehfl hfM"h hfm"h:B-{eh:$ two):rilw {yiholE)fh {frfb:l {fdf)fh y"n:B tar:biD-la( yiBil:B ynA) yiT:ramf) 3.18
내가 또 심중에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서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전도된 질서를 바로 잡으리라고 했는데 이런 결론을 뒤집는 심정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예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마치 시험코자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 짐승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는 것 같다. 인간이 자기자신이 가지고 있느 환상, 교만을 다 걷어내고 결국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가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짐승과 아무 다를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전도자가 하는가?
전 3: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axUrw hez twom }"K hz twom:K {ehfl dfxe) her:qimU hfm"h:Bah her:qimU {fdf)fh-yn:b her:qim yiK 3.19
;lebfh loKah yiK }yf) hfm"h:Bah-}im {fdf)fh ratOmU loKal dfxe)
הרקמ는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이 당하는 일과 짐승이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동일한 하나의 일이다. 짐승이 일어나는 일이나 사람이 일어나는 일이나 일반이다. 어떤 관점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는가? 사람과 짐승이 다름이 없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사람도 죽고 짐승도 죽는다. 다 똑같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는 영도 같은 것이 아니냐? 여기서 חער가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담을 만들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네페쉬 하야가 되었다고 한다. 네페시 하야가 동물에게도 사용된다. 생명의 원리가 어디에 있는가? 영에 있다 영혼이 생명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일반적 의미에서의 죽음을 영혼이 떠났다고 한다. 영혼이 떠나면 육체는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인데 이는 생명의 원리가 우리의 영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적인 원리에서 영은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바울사도께서도 다같은 육체지만 다 질이 다르다고 했다. 사람도 영이 있을 때 살아 움직이고 동물도 영이 있을 때 살아 움직이는데 둘다 죽으니까 짐승의 영혼이나 사람의 영혼이나 같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놓고 묻습니다. 인간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여기서 선악질서 전도의 문제의 해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뒤엎어 버린다.
전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rfpf(eh-le) bf$ loKahw rfpf(eh-}im hfyfh loKah dfxe) {woqfm-le) |"lOh loKah 3.20
왜냐하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 한곳으로 간다. 그것을 설명하기를 모두가 다 흙의 티끌에서 나온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 땅의 티끌로 만들었다. 그리고 돌아갈 곳이 티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아담에게 티끌로 돌아가라고 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전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jerf)fl hf=am:l )yih tederYah hfm"h:Bah axUrw hfl:(fm:l )yih hflo(fh {fdf)fh y"n:B axUr a("dOy yim 3.21
물론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고 짐승도 흙으로 돌아가지만 사람의 영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혼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같은 영이라고 사람의 영과 짐승의 영이 근원이 다르다고 한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짐승의 영은 땅으로 내려간다는 말은 짐승의 생명의 원리는 땅차원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발전시킨다면 이런 결론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땅에 근원을 두고 있는 영혼은 불멸의 것이 아니라 소멸의 것이라는 결론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잘알려진 전도자는 무엇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것을 누가 아느냐고 한다. 짐승의 영혼은 땅으로 가고 사람은 하늘로 간다고 하나 누가 그것을 아느냐는 것으로 둘의 질의 차이를 영적 질의 차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전도자는 그가 관찰하는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존재를 의미없게 하는 것인가? 말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짐승과 다를바 없게 만드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과연 영적 질의 차이를 알 수 있겠는가하는 것을 말한다.
전 3:22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two):ril UNe)yiby yim yiK woq:lex )Uh-yiK wyf&A(am:B {fdf)fh xam:&y re$A)"m bO+ }y") yiK yityi)frw 3.22
;wyfrAxa) hey:hYe$ hem:B
내가 보니 사람이 그 일을 기뻐함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것이 그의 분복이다. 누가 나를 데려가서 신후사를 보게 하겠느냐? 죽은 후에 누가 나를 이 세상의 역사에 참여하게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고 의미있게 하시는 분이라면 왜 인간의 삶, 개인의 삶이든 집단적 삶이든 왜 선악의 질서가 전도되어 있고 그것이 역사 내에서 개인적 생애 내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해결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지만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무산이 되고 만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의미있게 한다고 하시는데 이렇게 짐승과 다름없이 이렇게 하시는가? 그런데 사실은 앞부분에서 믿지 않는 사람이 여러가지 문제를 허물르 참 잘 정리해놓은 것을 볼 수 있어요. 3장 이하에서는 신자가 시험에 빠졌을 때의 문제를 잘 표현해주었다고 봅니다. 이런 문제, 이런 느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욥과같은 지혜로운 사람도 풀리지 않아서 참담해하고 오랜 시간을 걸렸는데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의 시험이라고 하는 문제, 우리가 자꾸 믿음만을 강조하는데 바로 그 믿음을 위해서 그런 문제와 시험 가운데서 그 믿음을 견고히 하시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시험의 문제로 깊이 다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서는 그런 면에서 매우 유익한 책입니다. 전도서나 욥기나 형식은 조금 다르지만 같은 책입니다.
세상과 역사를 보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거기에 인간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허무이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을 바라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격과 의미는 다르지만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너무나 문제가 많다. 첫째가 하나님을 세계와 역사의 주체로서 인정할 때, 생기는 첫번째 문제는 그럼 인간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행위의 주체로서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의미있게 이루어가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알 수 없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역사 속에서 그 시종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를 의미있게 다스린다는 것 그 자체가 적어도 인간에게 의미를 줄 수 없다. 오히여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의미있게 다스리고 인간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채로 살아간다면 오히여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스린다는 것이 더 큰 부담과 짐을 주고 인간의 삶으로 무의미하게 허망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된다. 그저 하나님은 하늘에서 다 역사를 다스리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으니까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대로라는 것도 내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한다는 것을 보면 내 뜻대로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불가항력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하나님께서 행하는 것이 영원하다고 하면 인간이 거기에 손을 써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고 거기서 인간의 책임도 없고 항변할 수도없고 그저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그저 경외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는 것 안에서 자기 나름대로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안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내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고 그저 끌려다니는 것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 한계속에서 인간이 뜻도 모르고 내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나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역사의 궁극적 원인자로 상정할 때 생기는 첫번째 바로 이 문제였고 두번째 문제는 현실을 그런 가정을 할 때, 현실이 설명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면 왜 이 세상이 역사가 이 모양이냐는 것이다. 왜 공의와 의가 있어야할 자리에 악이 횡횡하는가? 하나님이 궁극적인 원인자라고 하면 이 문제의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는 홀로 심령에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양극단의 사건들 사이의 모든 사건들조차도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제대로 안배를 하시는 분이므로 때가 되면 역사 내에서 시간의 흐름 안에서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악인은 악인의 보응을 받고 의인은 의인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것이 있다. 냉엄한 현실이 있는데 역사 내에서 이 모든 부조리들이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완전히 꺽어버리는 냉험한 현실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흔히 공평하다고 한다. 가난한 자도 비천한 자도 권세자도 신분의 고귀외 귀천의 차이없이 다 동일한 똑같은 평등한 죽음을 맞는다. 바로 이 사실 자체가 바로 전도자에게는 큰 벽이 된다. 인간의 삶을 참으로 허물어 버리는 폭탄과 같은 것이다. 누구나 다 똑같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각자가 살아온 삶의 차이들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의인으로 살아서 뭐하고 악인으로 살아서 뭐하냐는 것이다. 다 똑같은 종말을 맞으니까. 게다가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의 종말이라는 것이 굉장히 행복하고 복된 것이라면 괜찮다. 다같이 죽는 것보다 다 같이 복을 받으니까 봐줄 수 있는데 맞는 종말이 비참하기 짝이 없다고 하면 허망하다. 마지막이 끝이 종말이 비록 평등하고 동일하다고 해도 그것이 아름답고 선하고 완전한 것이라고 하면 삶을 가치있게 사는 사람은 좋은 결과를 얻고 나쁜 사람도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결국 좋은데 가니까 그 정도이다. 그러나 끝이 비참하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앞의 경우는 악한 사람이 덤으로 좋은데 가는 것이나 끝이 비참하면 살아서 선하게 사는 것이 다 의미 없게 된다. 그래서 죽음의 비참함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비교하는가?인간의 죽음이나 짐승의 죽음이 차이가 무엇이냐고 한다. 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역사내에서 살아온 삶에 대한 적절한 평가, 보상을 기대하는 것, 정당한 평가와 보상을 받으려는 기대가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22절에 보면 내가 보니 사람이 그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음을 보았다. 그것이 그의 분복이다. 그의 몫이다. 누가 그를 데려와 그의 신후사를 보게 하겠느냐? 라고 한다.
woq:lex )Uh-yiK wyf&A(am:B {fdf)fh xam:&y re$A)"m bO+ }y") yiK yityi)frw
우리 인간이 인간의 종말이 이러하다고 하면 짐승이나 다름없이 우리 삶이 끝나고 난다면 좋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인간이 그의 행한 것을 기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행한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에서 어떤 보람과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일 자체에서 느끼는 기쁨은 일의 가치를발견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손으로 하는 일이, 그가 이루어놓은 일에서 하나하나 쌓아올린 그의 역사에서 보람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것이 그의 분복이다. 그의 몫이다. 애쓰고 수고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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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의 신후사, 그의 후(죽고 난 후)에 되어질 일을 보도록 누가 그를 데리고 오겠느냐? 누가 그를 데리고 와서 보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한번 이 땅에서 삶의 과정을 거치고나면 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삶의 단회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단회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저 이 전도자의 정서를 이렇게 요약하 수 있다. 우리의 생은 이러한 죽음으로 종결되고 한번 가면 다시 이 세상 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 하면 최선의 길이 무엇이겠느냐? 내 손에서 하는 일에서 기쁨과 보람과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 뿐 아니겠느냐? 그 종말이 어떻든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우리 종말이 그러니까 다 팽개치고 살 것인가?아니라는 것이다. 최선은 무엇인가? 최선은 아니고 차선은 무엇인가? 최선인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못하면 차선이 무엇인가? 비참하게 죽더라도 거기서 최선은 무엇인가? 자기의 일에서, 하나하나 쌓은 일에서 가치와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삶이 허무해도 그 가운데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독재정권 하에서 참 정의와 불의와 자리 바꿈한 현재속에서 무엇인가 역사 내에서 해결을 기대하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 종말이 결국은 짐승과 같이 비참한 것으로 똑같이 끝나고 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우리 인생이 이런 것이라면 최선의 삶의 방법은 무엇일까?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내 인생 내 것이고 그것이 내 손에 있는 전부이니까 보람과 기쁨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비장한 도적주의이다. 그런데 이 비장한 도덕적주의가 부딛히는 한계가 또 있다. 오늘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다보니 그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
전 4: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taxaT {yi&A(n re$A) {yiqu$A(fh-lfK-te) he):re)w yinA) yiT:ba$w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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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n:m {ehfl }y")w axoK {ehy"q:$o( daYimU
내가 돌이켜 보니, 해아래서 행하여지는 학대를 보았노라. קשׁע은 일반적인 의미로 짓누르다. 억압하다는 것이다. 해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억압을 보았다는 것이다. 억압이라는 말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있는데 억울함이 있다. 억압을 당하면 억울하다. 억압을 다른 말로 바구면 폭력이다. 그와 련관된 여러가지 유사개념이 있다. 폭력, 착취 등이 있다. 원문의 의미를 잘 살리면 학대는 너무 강한 해석이고 내가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억울한 일들을 본다는 것이다. 내가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보람과 기쁨을 발견하려고 하니까 해아래서 사는 삶이 왜 이리 억울한 일이 많은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억울한 자가 눈물을 흘리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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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n:m {ehfl }y")w axoK {ehy"q:$o( daYimU
תהמד 는 억울한 자의 눈물이여, 그들을 위로할 자가 없도다.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으면 위로자가 있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권세라고 하는 것이 이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원문으로 해석할 때, 히브리어에서 어려운 것이 이런 것들이다. 네러티브 섹션은 비교적 덜하나 시문에서는 너무 표현이 함축되고 간결하여서 어렵다. 앞뒤말을 어떻게 유연하게 연결시킬 것인가가 해석의 관건이다. 히브리어는 접속사가 거의 없다. 그래서 하나의 접속사로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한다. ו는 모든 접속사의 뜻으로 다 쓰인다. 모든 접속사로 다 쓰인다. 그래서 문맥을 살 살펴서 제대로 그 뜻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전치사가 중요하다. 복합전치사가 많다. 몇개가 합쳐서 하나의 뜻을 이루는데 이 전치사의 뜻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치사의 중요성은 현대어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가 있으나 위로자가 없다. 왜냐하면(ו)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부터 힘이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억압자에게서 힘이 나온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나온다는 것은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권력자의 손으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런 한가지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간단계가 생략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권력, 힘은 정당한 제도와 질서에 따라서 힘을 행사하도록 세워진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에서의 것이고 권력이 착취나 폭력자의 손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은 정당하게 세워진 권력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해서 폭력자들로 바뀌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권력을 그 손에 쥐어주었더니 하나님께서 맡기신 의도대로 행사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여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그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해석하는가하면 이 두 행 중간에 숨은 여러가지 것에 대해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억을함을 당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할 때, 억울함 당한 자가 눈물을 흘릴 때 위로할 자는 정당한 권력자, 보호자로 세움받은 권력자이다. 그런데 왜 이들이 우는가? 권력자들 자체가 부패하고 타락해서 남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가 되었으니 위로자가 있을리가 없다. 폭력이 난무한다는 것은 폭력사라는 것은 한마디로 힘이 오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힘이 정당하게 상용되는 곳은 약한자를 도와 일으켜주고 그들의 억울함을 신원하고 돕는 것이다. 그것이 힘의 정당한 사용이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폭력이 있으면 정당한 권력이 그 폭력을 제어하는 것이 마땅한데 폭력이 난무하고 횡횡한다는 것은 그 권력이 기능을 상실했거나 권력이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의 오용이라는 것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것이다. 권력이 부패한 사회에서 힘이 오용되었고 약하고 억울한 자를 일으켜 세워주고 신원하는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자체가 약한 자를 핍박하고 착취하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는 그런 것에 너무 익숙해서 그런 삶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지만 그러나 정상적인 상황을 생각한다고 하면 권력의 부패라는 것, 폭력이 행해지고 억울한 자의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인가를 이렇게 표현한다.
전 4:2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hnedA( {yiYax hfM"h re$A) {yiYaxah-}im Ut"m rfb:Ke$ {yit"Mah-te) yinA) ax"Ba$w 4.2
나는 아직 살아 움직이는 산자로 죽은자를 칭송한다.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는 것은 죽기보다 못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꺾어 놓는 것으로 죽는것 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폭력이라는 것은, 총, 칼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가진자들의 경제적인 폭력, 지식인들의 교만의 폭력 등 모든 종류의 폭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의욕을 꺾어 놓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것이다.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산자나 죽은자나 더 낳은 것이 무엇이냐?
전 4:3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re$A) hfyfh )ol }edA(-re$A) t") {ehyn:<im bO+w 4.3
;$emf<ah taxaT hf&A(n re$A) (frfh he&A(aMah-te) hf)fr-)ol
이 둘보다 낳은 것이 무엇이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아서 이 꼴 보지 않는 것이 좋다. 사회의 폭력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전도자는 글의 형식은 주장으로 끝나나 실제로는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책이다. 최종적인 대답은 나중에 제시한다. 분명이 여기서 전도자가 현실을 보고 느끼는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느낀다. 다만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이런 폭력앞에서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 낫다는 것에 대해서는 참으로 정확하게 말했지만 그런 폭력속에서도 우리가 살 수 있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빠져 있다. 그러니까 전도서라는 책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오해하기 딱 알맞은 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이 책은 허무주의자의 신앙, 허무주의 고백서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위협을 느낀 보수주의자들은 영해해서 허무한 말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전도서의 전체적인 구조나 어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힘의 오용, 폭력, 권력의 부패 앞에서 우리가 부닥치는 현실에서 이런 것이 너무나 많다. 힘의 오용과 부패가 만연되어 있어서 이것은 살아가면서 하루 살아가면서 일의 가치가 의미와 보람을 발견하려는 사람에게 벽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하면 해결되지 않을까하고 시도를 해보면 또 벽에 부닥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일로 시선을 돌린다.
전 4: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yiK he&A(aMah }wor:$iK-lfK t")w lfmf(-lfK-te) yinA) yityi)frw 4.4
;axUr tU(:rU lebeh hez-{aG Uh"("r"m $yi)-ta)niq )yih
내가 힘들여 일한 수고를 보았다. 내 손으로 이룩해 놓은 모든 것, 내가 온갖 수고를 해서 이루어놓은 업적을 내가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처럼 수고해서 이루어놓은 것을 보니까 그것이 결국은 무엇인가?
Uh"("r"m $yi)-ta)niq )yih
사람이 수고해서 이뤄놓은 것이 결국 무엇인가하면 이웃으로 말미암은 질투의식이다. 사람이 수고하여 이루어놓은 것이 결국은 이웃에 대한 시기라는 것이다. 사람이 모든 힘을 기울여서 이룩하려는 것이 노력이 그 배후를 보면 근본 동기를 보면 이웃에 대한 시기심이라는 것이다. 경쟁심이라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할 것이 무엇이냐 저 놈보다 더 나아야겠다. 더 가져야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이라는 것이 밤낮없이 잠도 안자고 밤낮없이 일하는데 일의 동기가 일의 의미가 이웃보다 높아지려는 더 많이 차지하려는 이기심, 경쟁심 정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이라는 것이 온갖수고를 다해서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는 이것을 허무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 4:5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worf&:B-te) l"ko)w wyfdy-te) q"box lyis:Kah 4.5
ליסכ은 어리석은 자라는 것이다. קבה는 잡다, 품에 앉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팔짱을 낀다는 것이다. 팔짱을 끼고 제살을 먹는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팔짱을 끼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모든 일에 대해서 팔짱을 끼고 눈을 지긋이 감고 말하기를 해봐야 뭐하노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리석은자가 팔짱을 끼고 제 살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게으른자가 팔짱을 끼고 제살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전 4:6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axUr tU(:rU lfmf( {yan:pfx )ol:Mim taxfn vak )ol:m bwo+ 4.6
한 손에 쉼을 채우는 것이 양 손에 수고를 채우는 것보다 낮다는 것이다 일의 무의미성을 말하는 것이다. 일해서 뭐하냐는것이다. 왜 그런가?사람이 일하는 것을 살펴보니까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 하나 더 차지하기 위한 경쟁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게으른 자처럼 제 살을 먹어도 팔짱을 끼로 쉬는게 낫지 뭐하러 일하느냐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단락들이 상호 연관성이 없는 것 같지만 연관성이 있다. 앞에서는 힘의 오용, 폭력사회에 대해서 말하나 여기서는 경쟁사회에 대해서 말한다. 폭력과 경쟁심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경쟁심이 폭력의 원인이다.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것에서 힘을 가진자가 폭력을 사용한다. 경쟁사회에서는 폭력이 불가피하다. 요즘은 경쟁의 원리를 도입해야 살아남는다고 말하는데 세상살아가는 원리이다. 나중에 얼마나 대단한 기업이 나올지 몰라도 삶은 굉장히 각박해질 것이다. 경쟁은 결국 폭력을 낳는다. 남을 짓밟고라도 올라서려할 때 삶이 허막해진다. 신학교에서도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자고 하는데 그럴까? 경쟁사회의 이면을 파해쳐 보십시다. 경쟁심이라는 것은 본래 힘을 모아 협력하는자로 세우신 아담의 경우나 하와의 경우에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래는 인간관계를 서로 돕는 자로 세우셨다. 그런데 서로 협력하는 자를 경쟁상대로 의식하는데서 경쟁심이 생겨난다. 너의 이익이 내 이익에 도움이 되는, 너의 길과 나의 길이 상충될 수 없고 일치하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공동목적에 있어서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너의 이익이 나의이익과 일치할 수 없다는 상호배타적인 이웃관계를 이해관계로 이해하는데 출발한다. 여기서는 당연히 적대의식이 생겨나고 서로 착취하고 억압하고 빼앗고 폭력이 나오게 되어 있다. 전도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다 옳지만 어느때나 세상은 경쟁사회이다. 그러나 한가지를 빠뜨리고 있다. 경쟁사회가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웃을 결코 경쟁상대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도와 공동의 이익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이웃의 본래의 관계이다. 이것을 전도자가 지금 빼놓고 있다. 밤샘안자고 일을 했는데 나중에 일할 힘도 떨어지고 머리가 허예지니까 내가 해놓은 일이 무엇인가? 남보다 아파트 평수 좀더 넓고, 돈좀 모았고 그래서 아둥바둥해놓아야 그정도밖에 안된다. 그것 얻고자 아둥바둥 살았다고 하면 피곤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나이 60되어서 낚시대 메고 살자고 일했구나 결국 그럴바에야 젊을 때부터 먹고 놀 것인데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전도자는 논리를 진행시킵니다.
전 4:7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emf<ah taxaT lebeh he):re)w yinA) yiT:ba$w 4.7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허망한 일을 보았노라.
전 4: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aB:&it-)ol wony"(** wyny"(*-{aG wolfmA(-lfk:l j"q }y")w wol-}y") xf)w }"B {aG yin"$ }y")w dfxe) $"y 4.8
;)Uh (fr }ayni(w lebeh hez-{aG hfbO=im yi$:pn-te) r"Sax:mU l"mf( yinA) yim:lU re$o(
wol-}y") xf)w }"B {aG yin"$ }y")w dfxe) $"y
דחא와 ינשׁ가 나오는데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9절에도 보면 םינשׁ과 דחא가 나온다. 10절에 나오고 11절에도 나온다. 12절에 나온다. 하나와 둘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ינשׁ은 서수이고 מינשׁ기수이다. 왜 전도자는 이 둘을 번갈아가면서 사용하는가? 나름대로 이 둘의 차이를 의식하고 사용하는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해석하는데 연관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가 있고 어떤 사람은 둘째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 말에는 형제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것으로 말하는데 그런가? 하나와 둘 하는 것과 하나와 둘째라는 것에는 어떤 뉴앙스의 차이가 있는가? 수사라는 것은 하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으나 둘째라는 것은 첫째를 의식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 그러므로 해석을 하면 하나만 존재하고 둘째는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만 존재하고 둘째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홀로된 allein sein에 대한 철저한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오직 자기 혼자이고 철저히 혼자라는 것이다. 타인이 완전히 배제되어버린 것을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사람에게는 두번째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아들과 형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아들도 형도 관심 밖이고 들어오지 않는 가족까지도 배제해버리는 철저히 혼자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것은 무엇인가? 모두가 홀로 저 혼자이고 함께(Mitsein)이 없다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어떤가? 아담이 독처함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의 존질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더불어 존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상적인 모습이 다 파괴되어 버리고 각각 하나로 존재하게 된 인간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사회의 공동체의 파괴, 하나됨의 상실, 이기주의가 그 전제요 근원이요 그래서 여기서는 사랑이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살아간다. 자기 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로 인식하지 않고 타인,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전도자는 그저 단순하게 우리가 느끼는 사회적인 인간사회의 모습을 서술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의 가장 깊은 본질을 꿰뚫어보고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 인류에게 정하신 이상적인 모습에서 어떻게 벗어났는가를 심오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홀로존재하는 것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8절 하반절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끝없이 한없이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을 하면서도 그리고도 만족을 모르는 일벌레라는 것이다. 본래 협력하여 함께 이루려는 것을 저홀로 이루려고 하니 일이 끝이 없을 것이 뻔하다. 이처럼 끝없이 수고해도 눈에 만족할 만한 것을 얻지 못한다. 끝없이 수고하고 모으고 축적해도 그는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 일을 통해 부를 얻고 축적하려는 끝없는 욕망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에서 홀로 존재하는 자라고 하는 이런 반문을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렇게 수고를 하는가?하는 것이다. 내가 내 스스로 좋은 것을 즐기는 것을 삼가하고 끝없이 수고하는데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일을 하고 부를 축적하는가? 자기 홀로만을 위한 삶에서는 피할 수 없는 회의와 의문입니다. 독처라는 것인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안식과 만족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런 의문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까 홀로 각각 존재하는 사람은 끝없이 모든 이웃을 가상적으로 삼고 언제 내게 돌아설지 모르는 적으로 상정하고 끝없이 일을 한다 그런데 거기서 생겨나는 회의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내가 이 야단을 치는가 하는 회의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전도서가 조금 그의 진정한 의도를 9절에서 살짝 비추고 있다.
전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flfmA(aB bwo+ rfkf& {ehfl-$y re$A) dfxe)fh-}im {yan:<ah {yibO+ 4.9
둘이 하나보다 좋은 법이다. 홀로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이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수고에 있어서 좋은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함께 살 때는 좋은 일이 많다는 것이다. 한가지 예만 들어도
전 4: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womyiqAhal yin"$ }y")w lwoPYe$ dfxe)fh wolyi)w wor"bAx-te) {yiqy dfxe)fh UloPy-{i) yiK 4.10
그들이 넘어질 때 그 동료가 이웃을 일으켜 줄 수 있다 상부상조의 일이 있다. 그러나 오직 홀로 존재하는 자는 그 사람은 넘어지면 누가 그를 일으켜 줄것인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에게 정하신 존재의 질서, 독처하지 말고 함께 더불어 존재하라 하신 인간의 본래의 뜻을 슬쩍 비치고 있습니다.
전 4: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fxy |y") dfxe):lU {ehfl {axw {yan:$ Ub:K:$y-{i) {aG 4.11
홀로존재하는 것보다 함께 존재함이 유익함을 또 다른 모양으로 이야기합니다. 둘이 함께 누우면 서로에게 따듯함을 준다. 글나 홀로 있으면 어떻게 함께 지내는 따뜻함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여기서 따뜻함은 살을 맞대는 부부관계 이상이다. 함께 살아가는 내적 외적인 인간의 정을 포함해서 그 따뜻함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q"tNy hfr"h:mib )ol $fLu$:mah +Uxahw woD:gn Ud:ma(y {yan:<ah dfxe)fh Op:q:ty-{i)w 4.12
그리고 하나는 쉽게 굴복을 당하지만 둘이 함께 힘을 합하면 그 어떤 힘 앞에서 능히 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삼겹줄이 쉬 끊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말한다. 이것이 본래 모습이다.
사람들이 요즘도 힘을 합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냐가 문제이다. 의리가 좋은 것인데 깡패의 의리는 아니다. 힘을 합하는 것은 좋은데 목적이 무엇인가?잠언에 보면 우리가 힘을 합하고 꾀를 합하자 그래서 털어먹자하는 협력은 서로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솔로몬이 유래없는 지혜를 받아서 그가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보고 느낀 것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할 수 없다. 깊이 있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이와 같은 모습은 공동체의 회복을 말한다. 서로 상대를 사랑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적으로 생각하는 서로 하나되지 못하는 분열의 모습, 자기 하나밖에 모르는 분열의 모습 이런 것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에 있어서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살맛을 잃고 허무하게 된다. 폭력을 보고 위로자가 없고 서로 증오하고 싸우고 이런 곳에서 살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짓밟느냐 내가 밟히는가 하는 너무나 위험하여 우리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본능적으로 느끼고 나 밖에 모르니까 심각히 여기지 않지만 우리 안을 들여다 보면 누구도 다 이렇다. 남편과 아내도 내 이웃이라고 하는 생각보다는 경쟁심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 죽음으로 끝난다고 하면 악하게 산자나 선하게 산자나 차별이 없이 마찬가지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버린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우리에게 남은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가? 보람과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면 그 속에서 보람과 가치를 얻으려고 하면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너무 억압이 많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에게 위로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제 병아리를 키워봤는지 모르겠어요. 한두마리가 아니고 여러마리를 키워보면 알을 낳다가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다. 피가 보이면 모든 닭들이 죽여요. 병아리가 얼마나 귀여워요. 그런데 상처난 것이 있으면 전부가 가서 쫓아가서 쪼아서 죽여버려요. 인간 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싶어요.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달라붙고 힘이 없는 사람을 보면 너도나도 쪼아서 살점 하나라도 뜯어먹으려고 하는 것이예요. 우리가 사는 실상이지요. 바로 권력을 잡은 자가 힘있는 자가 이렇게 약한 자를 착취하고 위로하는 자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억울함을 당하는자에게 눈물을 씻어주고 일으켜 세워주어야할 사람이 힘있는 자이다. 힘을 주신 목적은 그것이고 그것이 힘의 정당한 사용이다. 그런데 바로 억울한 자를 위로하고 도와주어야할 권력자가 부패해버리고 타락해버렸을 때 위로할 자가 있을리 없다. 폭력사회, 약육강식의 사회, 권력의 타락, 힘의 오용이 횡횡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가에 대해서 참 절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있다. 그러므로 내가 아직 살아있는 자보다 죽은자가 낫다고 한다. 이런 세상에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살 가치나 의미를 전혀 확인 못하고 죽고만 싶다는 것이다. 더 좋은 사람은 아예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 험한 꼴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힘이 악용되고 폭력아래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 삶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흔히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자주 듣는 것이 인간성 말살이란 말이다. 인간이 인간의 대우를 못받는다. 그 다음에 일이라는 것도 보니 그저 거기서 무엇인가 대단한 보람과 가치를 찾으려고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는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니 일에 대한 가치보다 전부다 이웃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내가 남보다 조금 더 낫고 잘살고 좀더 높은 지위와 명예를 위해서 아둥바둥살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한평생 일을 하고 사는데 그 일의 목적이 그 일을 해서 얻는 결과가 그저 내 옆에 있는 다른 사람보다 한두발짝 앞서서 잘 먹고 좀더 존경을 받고 나은 지위와 권력을 누리는 것이라고 하면 일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흔히 사회를 가리켜 경쟁사회라고 하는데 경쟁사회라는 것이 이것이다. 남보다 좀더 얻기 위해서 애쓰고 힘쓰는 사회이다. 일이 고작 그런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하면 게으른 자가 팔짱을 끼고 제살을 먹는 어리석은 일을 할지라도 한운쿰의 안식 쉼을 얻는 것이 양손에 허망한 수고와 고역으로 채우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일이 보람을 주지 못하고 시기 질투에서 유발되어 나온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단락단락 전혀 다른 주제를 취급하는 것 같지만 이 주제들이 다 연결이 되어 있다. 왜 폭력사회가 되는가?남을 억울하게 해서 착취를 해서 자기가 취하려고 하는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남보다 하나 더 차지하려고 하고 내가 더 높아지기 위해서, 더 많이 차지 하기 위해서 남의 것도 빼앗기까지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쟁사회는 필연적으로 폭력사회가 될 수 밖에 없다. 주먹같은 폭력은 법에 의해서 철저히 배제되므로 그런 폭력은 제거될 수 있을지 모르나 폭력은 더 간교한 폭력이 많다. 남을 억울하게 하는 방식의 폭력은 얼마든지 있다. 남을 험담하고 가지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왜 사람이 서로 경쟁하게 되는가? 적어도 경쟁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타인을 무엇으로 인식한다는 것인가? 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전부다 다른 사람을 잠재적인 적으로 언젠가 내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도 배신을 당해보고 무엇보다도 내가 남을 배신해봐서 안믿는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배신을 배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고 다 자기 속에 배신이 있기 때문에 배신을 배운다. 나중에 전도서도 그 말이 나온다. 남의 말 자꾸 귀길이지 말아라. 남의 평 자꾸 귀길우지 말라. 그래봐야 남 욕하게 된다. 너도 남에게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니 마음속에 다 거짓과 배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면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사람을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믿는 것이다. 내가 악한 것을 알기 때문에 남을 못믿는다. 남을 못믿는 사람을 보면 그가 다른 사람에게 크게 배신을 당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가장 큰 배신의 성품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못믿으니까 남도 못믿는 것이다. 왜 남을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가? 모두가 저 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 뿌리깊은 분열이 있다. 모두가 알알이 흩어져 있다. 모두가 하나하나씩으로 있고 나 외에 다른 사람은 함께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이웃사랑을 강조하는가? 내가 아쉬울 때이다. 그 때는 이웃 사람을 이용해 먹는다. 전부다 자기홀로 있고, 자기 혼자 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다 적으로밖에 생각이 안된다. 함께 협력할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경쟁상대로 의식하게 된다. 경쟁을 하니 사랑의 관계가 되지 않고 착취, 폭력, 그것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다. 사람을 지으실 때 홀로존재하지 않고 더불어 존재하도록 지으셨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하고 모든 것이 정상적이게 하셨다. 전도자는 이 함께 하는 것, 더불어 사는 것의 유익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어느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일으켜줄 수 있고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듯하고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하나하나의 힘보다 더욱 강해져서 삼겹줄도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더불어 사는 삶의 유익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더불어 사는 삶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한 것들, 하나가 넘어졌을 때또 다른 사람이 일으켜주는 것, 서로가 함께 있을 때 따뜻한 온정, 그리고 힘을 합할 때 강해지는 것 이런 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개념이 무엇인가? 사랑이 나타내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질서, mit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총체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으면 함께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사랑없는 사람을 둘 같다 붙여놔보세요. 지옥이지요. 소닭보듯이 멀뚱멀뚱보고 밖으로 나가버려요.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면 다 그래요. 가정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그렇게 하지요. 남편도, 아내도 애도 자꾸 집밖으로 나돌아요. 그런데 이 사랑이라고 하는 이 사랑이 있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사랑 뿐 아니라 모든 참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면 참된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 나타내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없는 것이다. 진실성이 있어야 신뢰할 수 있어야 사랑이 싺틀 수 있다. 참된 인간관계가 가능할 수 있다. 거짓중에서 시작한 모든 인간관계는 다 아니었구나하고 끝나고 만다. 사랑도 신뢰가 필요하다. 신뢰가 없으면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 신뢰없이 사랑하는 척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다 안다. 나도 당신 사랑않하고 당신도 사랑않아는 것 다 않다. 그러면서 사랑하고 웃고 한다.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괴롭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겠는가! 신뢰가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신의가 있어야 한다. 믿을 수 있어야 믿죠. faithness가 있어야 한다. 믿을 수 없는데 믿는 것은 바보 멍텅구리라고 한다. 다음 속여먹는 것을 기다려주는 것과 같다. 왜 사람들이 다 각각 혼자 저 홀로 따로 따로 존재하고 상대방을 잠재적인 적으로 다 인식하고 서로 경쟁하며 서로 짓밟고 그렇게 되느냐?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가 없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신뢰가 불가능하면, 신의가 없으면 어떤 의미있는 인간관계가 성립이 안되니 그러니 각각 따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여기 마지막에 4장 13절 이하에 보면 첫시작은 우리가 살펴본대로 왜 신뢰가 믿음이 불가능한가 왜 우리는 서로 믿을 수 없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 4: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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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보면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소년이 나이 많고 어리석어 도저히 경계를 일깨워줘도 깨닫지 못하는 미련한 왕보다는 낫다고 한다.
םירוס? תיבמ 에서 하수림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이것은 정관사가 붙은 것은 아니다. 만일 히필이라면 하시림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또 복수도 못한다. 그러므로 이해하기 어렵다. 맛소라학자들이 분명히 하텝파타로 시작하므로 정관사도 아니다. 또 분사도 아니다. 까다롭다. 설명이 어렵다. 그래서 몇 개의 사본, 칠십인역등에서는 하아수림으로 읽으라고 되어 있다. 칼, 분사, 수동 복수로 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맛소라 학자들이 무엇인가 생략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텝파타를 붙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해석하기가 까다로운 표현이다. 그러나 반역자의 집안이든 무엇이든 아수림이라고 하면 갇힌자의 집이니까 감옥이라고 대개 번역한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서 왕이 된자다. 그는 태생이 비천한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아래서 하는 모든 자들이 이 둘째 소년과 함께 행하는 것을 보았노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꿩잡는 것이 매라고 여기 어떻게 보면 이것은 긍적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출신이 무엇이냐? 통치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왕을 세우자는 것이니까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능력있는 자가 왕이 된다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렇게만 이해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ליסכו ןקז ךלממ םכחו ןכסה חלי
옐레드는 자켄과 상응하고 멜렉는 미스켄과 상응하고 하캄은 케질과 상응한다. 자켄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는 옐레드와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옐레드라는 말과 자켄이 대조될 때는 옐레드는 미숙한 사람이고 자켄은 오랜 연륜이 쌓이 지혜로운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첫째 사람은 두가지 핸디켑을 안고 있다. 우선 어리다는 것과 신분이 미천하다는 것이다.다른 사람은 신분도 최고의 신분이고 나이많아 인생을 다 경험하고 노련한 사람이다. 단 한가지 부정적인 요소는 그가 어리석다는 것이다. 출생신분에 있어서 고귀하고 나이많아 경험함으로 노련한 사람과 미천한 신분 출생이고 나이라 어려서 경험이 없으리가 생각되었다. 상식적으로는 나이많은 사람이 집단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전혀 다르게 전자는 어리석어서 깨우쳐도 못깨닫는 어리석은 사람이나 후자는 지혜롭고 미천한 계급출신이기는 하지만 신분과 출신과 연륜을 갖춘자보다 통치자로서의 자질, 지혜를 갖추고 있다. 결국 나중에 사람들이 소년을 통치능력을 갖춘 소년을 좋아하지만 이것을 전도자가 이것을 말하면서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가? 단순히 나이늙고 어리석은 왕보다 중요한 것은 통치자질이라는 것을 택한 잘한 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닌지. 그러나 대개 여기서 전도자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물론 이런 인물을 택했다고 하는 것은 이런 두 예를 택한 의도는 상식과는 상반된 인간사회실상을 이야기하려고 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연히 나이많은 사람에게서 통치자의 자질을 발견할 것을 기대하고 젊은 사람에게서 통치자의 자질을 발견하기 쉽지 않은데 실제로 상식밖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왕손으로 태어난 자는 통치자의 자질을 못갖추고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춘자는 신분이 비천한 자라는 것이다. 출생과 신분, 사회적 여건 이런 것들이 순리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다. 왕가에 왕손다운 왕손이 태어나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기대와 예측이 불가능한 사회임을 말하고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사회, 상식적인 기대가 통하지 않으면 그런 사회는 불안하다. 항상 불안하다. 따라서 그런 때는 투자도 장기투자는 않하고 오늘 풀어서내일 거두는 투자만 한다. 상식이 통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나라이다. 미래의 예측이 불가능한 불안 속에 살며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철저히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이다. 그래서 나중에 나온다. 어느 한가지 가능성에 목을 메단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적으도 7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이것이 안되면 저것을 잡고 한다. 어떤 결과가 올지 모르니까 이런 저런 가능성을 많이 뿌려놓으라는 것이다. 쉽게말하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믿을만한 사회가 못된다. 예측도 불가능하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예측이 불가능하고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기대밖에 나타나는 가능성에 대해서 사람들은 외적 자격보다는 실제적인 것을 중요시해서 통치자의 자격을 갖춘 소년과 함께 합니다. 사람들은 명분을 찾고 그러는데 대개의 경우 어떤 때 명분을 찾는가? 자기에게 불리할 때 명분을 찾는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있으면 명분같은 것 생각도 않한다. 덥썩 먹고 본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니까 백성들이 실제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자기입에 먹을 것 물려주니까 좋다고 한다. 그러니까 소년을 왕으로 세운다.
그리고 보니까 이 사람이 둘째 능력있는 소년왕을 따르는 사람이 수도 없다. 좋아하고 환호하고 야난이 낫다. 그런데 그 다음 세대는 그 소년왕은 기뻐하지 않는다. 백성들이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로 하여금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조건,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답지 못한 자, 신분은 갖추었으나 실제가 따르지 못하는 자들 그런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지도자를 적극적으로 따르고 신뢰하도록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면 지도자만 잘못되고 백성들은 잘하는 것인가? 백성들은 어떤가? 자기들의 입에 무엇인가 물려주면 다 좋다고 하나 나중에 보면 이익이 없으면 헌신짝처럼 차버리는 것이 백성들이다. 신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휴지조각이 된다. 이 전체가 결국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불신사회를 말한다. 믿음이 불가능한 사회의 모습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믿을 수없고 믿지도 않고 신의가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의미있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각각 홀로 살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이 언제 나를 배신할지 모르고. 죽음으로 비참하게 끝나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우리 삶에서 가치와 보람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것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삶의 실상이 이렇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으니 각각 홀로 따로 존재할 수 밖에 없고 상대방을 항상 가상 적으로 놓고 밤낮 짓밟고 짓밟히고 살아가는 것이 사회인데 여기서 무슨 가치와 의미를 찾겠는가? 허무한 생각이 들죠? 신자에게는 이 이상이 필요합니다.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분명히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는 답을 갖고 있다. 겉으로 인생을 무의미하게 보이는 이런 부조리 이면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허무를 극복하게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사실이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묻고 있는 것이고 느끼고 있는 것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발을 하나님의 집에 갈 때 조심하라고 되어 있는 것이 우리말에는 5장 1절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4:17로 되어 있다. 조금전에 4장 전반부에서는 인간이 처한 상황,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영역, 공간, 세상이 어떠한가를 이야기했다. 세상이 참 힘든 곳이다. 5장에서는 이런 부조리, 이런 현실 앞에 처하여 있는 인간은 어떠한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 삶에서 보람이나 가치를 발견하려고 하다보니 그 삶이 이런 모양이라는 것이다. 그런 현실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상태가 어떨 것인가?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전 4:14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fr dalOn wotUk:lam:B {aG yiK |ol:mil )fcy {yirUsfh ty"Bim-yiK 4.14
전 4:15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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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4:16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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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5:1(BHS 4:17)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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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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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런 말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집에 갈 때에 네 발을 조심하라. 어리석은 자의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가까이 하고 귀를 기울이라. 왜냐하면 저들은 자기들이 악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할 마땅한 자세를 말하고 있다. 발을 조심하라. 삼가는 자세. 가까지 가는 자세, 귀를 귀울이는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리석은 자가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제사드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의미는 분명하지 않으나 나아가 경청하라는 말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의 자세가 경청하는 자세가 아니라 그 반대되는 자세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설쳐대로 하나님 앞에 오만한 자세이다. 그런 자세로 짐작이 된다. 자세히 설명이 안되있으나 그들은 스스로 죄악을 행하면서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죄악을 행하는 것을 모르고 제사를 드리는데 그런 것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까이 하여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라고 한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세가 경청하는 자세와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다음의 내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너는 네 입에 급히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에 있는 것을 이렇게 말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삼가는 태도로 나가서 깊이 경청하는 자세와 대조되는 자세이다. 서둘러 성급하게 말을 하는 것은 경청하는 것과 대조된다. 왜 하나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할 것인가? 내의사를 표명하는 것을 삼가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고 너는 땅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네 말을 적게 할지니라. 절대통치자인 하나님 앞에서는 성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말라. 말은 의사의 표현이다.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는 것인데 마치 자기 뜻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의 영역, 영광의 영역에 있는 반면에 인간은 땅에 속한 영역,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절대통치자와 그의 다스림 아래 있는 엄청난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낮은 자로서의 자세를 한순간이라고 잃지 말라는 것이다. 어찌 이것을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성급히 말할 수 있겠는가?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만이 교만해서 하나님 앞에서 말을 내어 악을 행한다. 따라서 당연히 너는 말을 적게 할지어라. 네가 이것저것 하리라는 오만한 자세를 아예 버리라는 것이다.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많으면 어리석은 말이 나오느니라. 이것저것 하려고 하면 사람이 비현실적이되고 꿈이 된다. 꿈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이것저것 하려고 하면 사람이 비현실적이 되고 말을 많이 하면 어리석은 소리가 나오게 되어있다. 하나님께 서원을 할 때에는 서원갚기를 지체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자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네 서원한 것을 서둘러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않은 것보다는 아예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서원을 한다는 것은 그의 바램을 하나님께 소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서원을 못갚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평생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몸만아프면 서원을 갚지 않아서 그런가?하고 해요. 웃지 마세요. 자기도 당하면 그렇게 되요. 자기는 아닌것처럼 웃지 마세요.
만일 서원을 해놓고 못갚으면 어떻게 되는가?괜히 말한번 잘못했다가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서원을 해놓고 나중에 갚을 수 없을 경우 그때 가서 사자앞에가서 제사장 앞에 가서 그 때 가서 내가 한 것은 비친생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찌하여 네 말로 하나님께서 진노하게 하느냐? 그로 하여금 네 행사 네 손에서 행하는 일을 파멸케 하겠느냐? 꿈이 많다보면 이것저것 하겠다고 하는데 헛꿈일 때가 많아요. 말이 많을 때도 그래요. 여기서 결국 하는게 무엇인가?제발 저는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헛꿈을 꾸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다 하시는데 뭐 네가 하겠다고 하느냐? 하겠다고 해봐야 괸히 죄만짓고 헛꿈만 꾸고 만다는 것이다. 너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한다. 이것만 빼서 들으면 어느정도 신앙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글의 흐름을 따라 보자. 앞에서 전도자는 자기가 살아가는 이 땅위의 삶에서 보람과 가치를 발견하려고 하는데 이 사회는 믿을 수 없는 사회이고 서로 잡아먹을려고 하고 경쟁하는 사회이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보통같으면 안되겠다고 하는데 여기서 하는 말씀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려는 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고 있다. 무엇인가 한 번 내가 해보겠다고,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해봐야겠다고 결심을 하는 순간에 뿌리부터 무너뜨린다. 도저히 않되겠습니다 손을 써봐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조용히 해라. 입닫아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절대통치라는 큰 벽에 갖혀있기도 하고 짓눌려있기도 하고 그렇다.
두 번째 7절 이하에서는 인간 자신이 어떤 이런 부조리한 현신을 타개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우선 권력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고 착취하고 의와 공의를 박탈당한 그런 것을 다 보거든 너무 경악하지 말라. 여기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높은 자위에 권력자 위에는 그보다 더 높은 자가 지키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람보다 더 높은 자가 그들위에 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어떤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권력 분점이라고 할수 있다. 권력은 독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권력은 다 나눠갖게 되어 있다. 궈력구조가 이렇다. 이 사람은 이 사람이 제어하고 저 사람은 또 저 사람이 제어하고 다 맞물려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한다고 하면 절대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아직도 해석이 안되는 말이예요.
דבענ החשׁל ךלמ אוה לכב ץרא ןירריו
땅에서 얻는 것은 모든 사람 안에 있다. 왕은 들판에서부터 얻어낸다. 네바드도 해석이 어렵다. 이것을 대충해석해서 땅에서 나는 것은 모든 권력이 나눠먹는다. 왕도 땅에서부터 무엇인가를 얻는다고 해석한다. 앞에 한 내용에 비춰봤을 때 대개 권력을 독점하는 것, 절대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나눠먹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왜 여기서 권력의 독점불가능성, 분산을 말하는가? 왜 이것을 언급하는가? 하나님의 절대통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세우신 모든 권력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함인가? 아니면 이것이 4장에서 하는 이야기가 부조리한 사회에서 보람과 가치를 찾을 수 없는데 여기서 무엇인가를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어떤가 하면 첫째로 하나님의 절대통치로부터 한계되어 있고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권력도 한계가 있고 절대권력이 아니라고 한다면 인간이 초래할 변화의 가능성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게 주어진 힘이나 권력으로 이 사회의 부조리를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것은 망상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부조리를 치유할 권력이 인간에게는 주어져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권력 하에 예속된 권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속수무책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이 소유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첫째는 권력이고 둘째는 돈이다.
돈을 사랑하지만 돈으로 만족하게 되는 법은 없다. 이말은 돈을 원대로 돈을 번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 더벌려고 한다. 솔로몬도 만족을 못했다. 최대갑부인 솔로몬도 만족을 얻을 만큼 재물을 못모았다는 것이다.
재물은 사랑하지만 그러나 재물을 얻는 것은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은 갖고 싶은데 돈갖고 싶다고 다 돈을 벌 수 있는가? 없다. 이것도 역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경제력, 그가 휘두를 수 있는 경제력에도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경제력의 한계를 여러측면에서 말한다. 첫째는 그가 얻고싶은대로 다 된다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좋은 것이 많으면 먹는대도 많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쓰는데도 많다는 것이다. 냉소적인 사람은 재벌이라고 네끼먹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많이 쓰는 것은분명하다. 갖다 바칠데도 많고 돈이 많으면 먹는데로 많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얼굴도 안비치던 사돈의 팔촌까지 와서 손벌리고 교회에서 자선단체에서 정치가도 손내밀고 다 먹는 사람이 많다. 이렇다고 하면 돈의 손유자에게 유익한게 무엇이냐? 눈으로 보는것밖에 더하냐? 통장에 돈을 확인하는 눈요기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노동자는 참 잠을 달게 잔다. 많거나 적으나 먹고 산다. 그러나 부자는 잠을 못잔다. 내일은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더 벌까?어떻게 해야 이 돈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부자의 패단이다. 돈을 꽉 움켜지고 있으면서 돈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을 만난다. 강도만나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고 아픈 것 중의 하나가 가난할 때는 우애있던 형제가 돈이 많으면 싸우게 되요. 돈은 재물은 언제 없어질지 몰라요. 사업한번 잘못 벌리면 순식간에 날라가요. 재벌이 휘청휘청해요. 어제까지 수많금 쌓아놨던 재물이 사업한번 못해서 쫄닥 망하니 자식에게 하나 쥐어줄 것이 없게 되지까 그러니 모태에서 나온대로 그래로 벌거벗고 갈 뿐이라는 것이다. 눈앞에 많이 있어도 죽을 때는 다 두고가야 한다. 돈이 많다고 해도 그게 행복하게 사는것도 아니고 돈으로 생기는 많은 고통과 슬픔과 마음의 아픈것들이 많다. 그런 고통당한 후에 살다가 갈때는 벌거벗고 가더라는 것이다.
전 5:3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lyis:K lwoqw }fyni( bor:B {wolAxah )fB yiK 5.2
;{yirfb:D bor:B
전 5: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yiK wom:La$:l r"xa):T-la) {yihol)"l reden roDiT re$A)aK 5.3
;{"La$ roDiT-re$A) t") {yilyis:KaB jep"x }y")
전 5: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La$:t )olw rwoDiTe<im roDit-)ol re$A) bwo+ 5.4
전 5:6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f):laMah y"n:pil ram)oT-la)w !erf&:B-te) )yi+Axal !yiP-te) }"TiT-la) 5.5
!elOq-la( {yiholE)fh voc:qy hfMfl )yih hfgfg:$ yiK
;!yedy h"&A(am-te) l"Bixw
전 5:7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yiK h"B:rah {yirfb:dU {yilfbAhw tOmolAx bor:b yiK 5.6
;)fry {yiholE)fh-te)
전 5:8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hfnyid:Mab he):riT qedecw +fP:$im lz"gw $fr qe$o(-{i) 5.7
r"mo$ aHobfG la("m aHobfg yiK jep"xah-la( Ham:tiT-la)
;{ehy"lA( {yihob:gU
전 5:9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hedf&:l |elem )Uh** )yih* loKaB jere) }wor:tyw 5.8
;dfbE(n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ol }womfheB b"ho)-yimU veseK (aB:&y-)ol veseK b"ho) 5.9
;lebfh hez-{aG hf)Ub:t
전 5:11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yiK fhyelf(:bil }Or:$iK-hamU fhyel:kO) UBar hfbO=ah tOb:riB 5.10
;wyfny"( tU):r** tYi):r*-{i)
전 5: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fbf>ahw l"k)y h"B:rah-{i)w +a(:m-{i) d"bo(fh tan:$ hfqUt:m 5.11
;}wo$yil wol axyiNam UNeny") ryi$f(el
전 5:13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re$o( $emf<ah taxaT yityi)fr hflOx hf(fr $y 5.12
;wotf(fr:l wyflf(:bil rUmf$
전 5:14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B dyilOhw (fr }ayni(:B )Uhah re$o(fh dabf)w 5.13
;hfmU):m wody:B }y")w
전 5:15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tekelfl bU$y {worf( woMi) }e+eBim )fcy re$A)aK 5.14
;wody:B |"lYe$ wolfmA(ab )f>y-)ol hfmU):mU )fBe$:K
전 5:16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ly }"K )fBe$ taMu(-lfK hflOx hf(fr hz-{agw 5.15
;axUrfl lomA(Ye$ wol }wor:tY-hamU
전 5:17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woy:lfxw h"B:rah sa(fkw l"k)y |e$oxaB wyfmy-lfK {aG 5.16
;vecfqw
17절에 보면 그래도 최선의 길은 무엇이냐? 먹고 마시고 수고한 것의 좋은 것의 결과를 누리는 것이 최선이 아니냐고 한다. 앞에서도 계속 이 말이 나왔다. 같은 말이 반복되지만 의미는 다르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 선물이다. 분복이라고 하고 19절에 가서 보면 여기서는 먹고 마시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아까 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했는가?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말했는데 이런 속에서 먹고 마시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런 고통속에서 사는 삶 속에 이런 기쁨이라도 주어서 고통스런 세월을 잊게 하려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같은 말이라도 거기에 주는 의미는 상당히 소극적이다. 고통슬거운 세월을 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의 생활태도는 아닌데 신자가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고 이렇게 안하면 어떻게 해요라고 물으면 할말이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고통스러운 생활을 잊고 살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냐고 전도자가 말한다. 여러분이 전도하려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많다.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전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two):rilw tOT:$ilw-lOke)el hepy-re$A) bwo+ ynf) yityi)fr-re$A) h"Nih 5.17
wyfYax** wfYax*-y"my raP:sim $eme<ah-taxaT lomA(Ye$ wolfmA(-lfk:B hfbO+
;woq:lex )Uh-yiK {yiholE)fh wol-}atfn-re$A)
전 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yisfknU re$o( {yiholE)fh wol-}atfn re$A) {fdf)fh-lfK {aG 5.18
wolfmA(aB axom:&ilw woq:lex-te) t)"&flw UNeMim lokE)el wo+yil:$ihw
;)yih {yiholE) taTam hoz
전 5:20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yiK wyfYax y"my-te) roKzy h"B:rah )ol yiK 5.19
;woBil tax:mi&:B henA(am {yiholE)fh
하나님이라고 하는 요인을 도입한다고 할 때, 여전히 우리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만사를 법대로 아름답게 다스리시는 세계와 역사의 현실을 들여다면 너무나 부조리하고 오히려 부패하였고 ㅅ람ㄷ르은 서로를 전부다 적으로 인식하고 질시하는 모습이 단 두 사람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사회 속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하자면 전혀 의리와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사는 모습을 보면서 불신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현실앞에서 느끼는 솔직함의 정도를 표현하기를 이럴바에는 사는 것보다 죽는게 낫고 태어나지 않는게 낫다. 일해서 뭐하냐 팔짱을 끼고 편히 쉬는 게으른 자가 낫지 아니한가! 하나하나 흩어져서 홀로 존재하는데 서로 힘을 합하면 넘어졌을 때 일으킬 수 있고 따듯할 수있고 강할 수 있는데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신의 없는 사회이다. 사람들 사이에 하나가 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고 그래서 살 의미도 없고 그 안에서 일할 가치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 앞에 인간은 어떤 처지에 있는가?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안할 수 없는 그런 처지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무엇이든지 절대성이 없다. 권력도 나눠가진다. 절대적인 의미의 독점이 없다. 제물에 있어서도 절대 독점이 없다. 자기가 원하느 만큼 가질 수도 없고 원한다고 가질 수도 없고 가져도 다 나눠갖지 혼자 갖지 못하며 재물도 또 우리가 원하는대로의 결과가 오지 않는다. 재물을 지켜봐야 내게 해가 되기도 하고 지키기도 어렵다. 근본적으로 벌거벗고 가기 때문에 결국 우리에게 절대소유라는 것은 없다. 잠시 맡을 뿐이지 소유가 없다. 공수래 공수거이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인간이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인간이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절대권력아래 있고 부패한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속수무책의 무력한 존재이다. 속수무책이다. 남아있는 가능성도 그저 먹고 즐기면서 괴로운 세월 잊어보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매우 소극적인 것이긴 하나 부조리한 현실속에서 먹고마시자는 것, 단지 괴로운 세월을 잊기 위한 그정도의 의미만을 갖지 못하는 것이라고 최선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실 현실은 냉혹하여 이것도 우리 마음대로 되지않는다. 6장에 보면 어떤 패단이 있는가 하면
전 6:1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hfBarw $emf<ah taxaT yityi)fr re$A) hf(fr $"y 6.1
;{fdf)fh-la( )yih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과 영광과 권세와 모든 좋은 것을 허락하시되 그가 원하는 것 중에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이 주신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준 사람인데 그것을 그 자신이 누리고 즐기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님을 본다고 한다 주기는 주셨는데 즐기는 것은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는 실컷 모아놓고 획득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 상관없는 사람이 즐기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야말로 크나큰 평패가 아닌가 말한다. 그래서 3절에서 말하기를
전 6:2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dwobfkw {yisfknU re$o( {yiholE)fh wol-}eTy re$A) $yi) 6.2
{yiholE)fh UNe+yil:$y-)olw heUa):ty-re$A) loKim wo$:pn:l r"sfx UNeny"):w
hez UNelAk)oy yir:kn $yi) yiK UNeMim lokE)el
;)Uh (fr yilFxw lebeh
전 6:3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barw hey:xiy twoBar {ynf$w hf)"m $yi) dyilOy-{i) 6.3
hftyfh-)ol hfrUb:q-{agw hfbO=ah-}im (aB:&it-)ol O$:pnw wyfnf$-y"my Uy:hYe$
;lepfNah UNeMim bwo+ yiT:ramf) woL
어떤 사람이 100의 자녀를 낳고 여러해를 산다고 할지라도 그의 많다할지라도 그가 좋은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그의 원하는 것을 채울수 없다고 한다면 그리고 결국은 무덤에도 제대로 묻히지도 못한다고 한다면 결국 나로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낙태된 자가 이 사람보다 차라리 낫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전 6:4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heSuky wom:$ |e$oxabU |"ly |e$oxabU )fB lebehab-yiK 6.4
낙퇴한 자라고 하는 것은 배속에서 생명이 사라지는 이 아이는 헛되이 왔다가 어둠속에 가버리나 그리고 그의 이름이 어둠속에 묻혀진 자라.
전 6:5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heZim hezfl taxan (fdy )olw hf)fr-)ol $eme$-{aG 6.5
그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밝은태양도 경험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라. 그러나 저가 적어도 쉼에 있어서는 쉰다고 하는 일에 있어서는 낙퇴자가 오히려 이 세상에서 오래 살면서 수백명의 자녀를 낳은 사람보다 낳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쉼이 없는 고역의 삶으로 보는 것이다. 험한 꼴 고통스러움은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6:6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ol hfbO+w {yamA(aP {ynf$ vele) hfyfx ULi)w 6.6
;|"lOh loKah dfxe) {woqfm-le) )olAh hf)fr
비록 천년을 두번을 산다고 할지라도 두천년을 산다고 할지라도 좋은 것을 보지 못한다거나 삶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다고 하면 결국 그는 모든 사람은 결국 한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낙퇴된 자나 태속에서 죽은 사람, 햇볓도 못보고 죽어 버린 사람 그러나 두천년살면서 자식을 낳은 사람이나 실제로 가는 곳, 죽는 곳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수천년 사나 배속에서 잠깐 있다가 가나 가는 곳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전 6:7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lfMit )ol $epeNah-{agw Uhyip:l {fdf)fh lamA(-lfK 6.7
인간의 모슨 수고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 입을 위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먹는 것, 먹어 배부른 것, 욕망을 채우고 만족을 위한 것, 애써 일하는 것이 자기 만족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다. 성취욕이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이루어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원함,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는 그저 한가지예를 들었습니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것을 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앟는 경우를 말했고 이런 사람은 아무리 오래살고 자식을 많이 나아도 낙태한 자보다 낫지 않다는 것이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낫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인간이 기뻐하는 것을 누릴 수 없는 것을 특수한 경우에서 말한 것이라고 하면 이 7절은 일반적인 사실로 원칙으로 보편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의 모든 수고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 만족을 채우고자하는 것이나 그러나 그 욕망은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것으로 말한다. 인간의 욕망은 절대 채워질 수 없다. 인간의 절대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이다.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가난한 상태,인간의 절대적인 가난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이 이처럼 가난하다고 하면, 결코 그 욕망을채울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지혜자가 어리석은 자보다 나은게 무엇이냐? 인간의 수고가 자기 입을 위한 욕망을 위한 것이고 이것이 인간의 존재목적이라고 하면 자기 만족을 채우기 위해서 그렇게 수고하는데 근본적으로 욕망을 채울 수 없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자기 원대로 다 채울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혜자나 어리석은자나 차이가 무엇이냐? 결국 둘다 가난하고 채우지 못할 것인데 별다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전 6: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olAhal a("dOy yinf(eL-ham lyis:Kah-}im {fkfxel r"tOY-ham yiK 6.8
;{yiYaxah degen
삶 앞에서 행하는 것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 있어서 무엇이 나은게 있겠는가? 삶 앞에서 행할 줄 아는 자라는 것은 지혜자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줄 아는자가 지혜자이다. 삶 앞에서 행할줄 아는 자란 말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가를 아는 자라는 말이다. 그러나 지혜는 가졌으되 가난한 자이다. 인생은 이런 것이고 이렇게 살아야 참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알지만 가난한 자라고 한다. 그런 삶을 실현할 능력이 없다고 하면 더 나을게 무엇이있겠는가? 인간은 가난해서 그 원하는대로 그 욕망대로 성취할 능력이 없는 절대적인 가난한 상타에 있담녀 알아야 뭐하느냐? 이렇게 살아야 보람있는 인생이란 것을안다고 무엇이 나은가?
전 6:9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tU(:rU lebeh hez-{aG $epfn-|flAh"m {yany"( h"):ram bwo+ 6.9
;axUr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가난에 찌들어서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가난에 찌들어서 인간답게 살아야하려면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능력이 없이 가난하다면 그렇게 살바에는 눈요기라도 하는게 좋다. 많이 재물을 얻는다고 해서 자기가 다 갖는 것은 아니고 나눠가져야 하는데 그러더라도 눈요기라도 하는게 낫다. 인간의 제한, 절대적인 가난함에 대해서 말하는것이다.
전 6:10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fdf) )Uh-re$A) (fdOnw wom:$ )fr:qn rfb:K hfyfhe<-ham 6.10
;UNeMim vyiQaT**e$** vyiq:tah*e$* {i( }yidfl lakUy-)olw
인생을 즐기는 일이 허락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일반화해서 보편화해서 이야기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그 원대로 그 욕망을 다 채우고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 근본적으로 가난한 자이다. 10절 이하에 보면 결론짓기를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존재하는 것은 이미 그 이름이 불리워졌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최초로 나타나는 곳이 어디인가? 짐승들과 새들을 주시고 뭐라고 부르는지 이름을 부르는지 알아보셨는데 아담이 이름짓는대로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데 거기서 이름짓는 것은 본질규정의 의미다. 존재하는 것은 이미 이름이 불려졌다는 것은 본질규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가도 다 알려졌다.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이냐가 다 알려졌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기를 누구든지 자기보다 강한사람보다는 싸울 수 없는 법이라고 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초월해 계셔서 절대자인데 그 앞에서 그 분과 다툴수 없는 법이다.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무력하고 속수무책인자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놓으신 것인데 그가 만드신 이 피조계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어쩔 수없는 형편이다. 그런 우리의 처지를 말한다.
전 6: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fdf)fl r"tY-ham lebfh {yiB:ram h"B:rah {yirfb:D-$y yiK 6.11
말을 많이 해봐야 이것은 헛된 것을 더할 뿐이다. 사람이 아무리 말을 많이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요. 말이 많을 수록 결과는 신통치 않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것 저것 하겠다고 해봐야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헛될 뿐이다. 강한자 하나님 앞에서 속수무책인데 말해야 뭐하는가?
전 6: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y"Yax-y"my raP:sim {yiYaxaB {fdf)fl bwo=-ham a("dOy-yim yiK 6.12
hey:hY-ham {fdf)fl dyiGy-yim re$A) l"CaK {"&A(yw wol:beh
;$emf<ah taxaT wyfrAxa)
그러나 이런 그림자같은 인생에서 최선의 길을 누가 말하는가? 인생이 이런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누가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질문과 더불어 또 다른 하나의 질문이 함께 나타난다. 해아래서 그의 후에 되어질 일에 대해서 누가 말해주겠는가? 이런 그림자와 같이 헛되이 지나가는 이 짧은 인생동안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 앞에서 속수무책인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그래도 최선의 길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라고 반문한 다음에 누가 해아래서 우리 이후의 일 미래에 대해서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해줄 수 있는가라고 한다. 이는 두개의 질문이 내적인 연관을 갖는다고 볼수 있다. 그러므로 두개의 질문이므로 앞의 것이 질문이고 뒤의 것은 질문의 형식을 띤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어떤 성격의 어떤 방향의 해답을 모색하고 있는가? 미래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하는 현실을 보면서 부조리한 존재라고 하고 이런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꼼짝못하는 무력한 존재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나 능력이 없는 존재 속수무책인 존재가 인간이고 우리가 처한 현실이요 우리의 모습인데 여기에서 이런 것을 말하면서 이런가운데서 우리에게 삶의 지침 방향을 말해줄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누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런 옴짝달싹 못하는 현실의 탈출구를 미래에서 찾는 것이다. 그런 전도자의 의도를 미춰주는 말이다.
7장에 들어가보면 앞에서 암시한 미래의가능성 모색에 대해서 새로운 시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다.
전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woYim twfMah {woyw bwo+ }eme<im {"$ bwo+ 7.1
;wod:lUih
이름이라는 것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향기로운 기름보다 명성이 낫다는 말인가? 좋은 평판, 이름을 의식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내가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하는 명예 이런 것을 의식하며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평판을 이런 이름이 좋은 향기름보다 낫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됨의 깊은 관심을 가진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삶의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죽음의 날이 죽는날이 태어난 날보다 낫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re$A)aB heT:$im ty"B-le) tekeLim leb")-ty"B-le) tekelfl bwo+ 7.2
;woBil-le) }"Ty yaxahw {fdf)fh-lfK vwos )Uh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전 7: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b"l ba+yiy {yinfP a(or:b-yiK qox:>im sa(aK bwo+ 7.3
슬피우는 슬픔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연락이 있는 곳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이게 무슨 말인가? 죽음이 태어나는 것보다 낫다고 하고 초상집이 잔치집보다 낫다고 하는가? 죽음이 태어나는 것보다 나은 것은 그것이 인간의 종말, 마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삶을 나타내는가? 왜 죽음이낫다고 하는가? 인간의 마지막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죽음이 인간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삶의 자세를 말하는가? 항상 마지막을 의식한 종국을 의식한 태도이다. τελος라는 말이있다. 여기서 나온 역사관이 있다. telelogical이란 것이다. 마지막을 중히여기는 역사관이다. 두가지를 합해보자. 이름이 향기롬보다 낫다는 것은 사람됨, 삶의 질, 나란 존재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 인격이나 삶의 질에 큰 비중을 두는 자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지막에 종국에 큰 비주을 두는 삶의 자세이다. 이 둘을 합하면 어떤 뜻이 되는가? 지금 이 순간이 아니고 미래의 마지막 종국을 항상 의식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항상 의식하고 그 마지막을 위해서 순간순간을 준비해가는 진지하게 사는 삶의 자세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름이 향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것이 낳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이것이 종국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 웃어넘기는 것보다 낳다.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는 유익하기 때문이다. 얼굴을 찡그리는것이 마음에는 좋다.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것이 마음에는 좋기 때문에 좋다는 이야기를 보면 비본질적인 것에서의 슬픔과 고통이 본질적인 것에 유익하기 때문에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감내하는 태도이다. 진지하게 특별히 지금보다 미래를 내다보고 살아가는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근본적인 해결이나 기쁨이나 보람이나 가치를 얻고자 비본질적인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는 삶의 자세이다.
전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ty"b:B {yilyis:K b"lw leb") ty"b:B {yimfkAx b"l 7.4
;hfx:mi&
지혜로운 자의 마음음 초상집에 있고 마지막을 생각하는 곳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즐기는 일에 있다. 종국을 의식하지 않고 순간순간 사는 삶이다.
마지막을 의식하고 진지하게 살고 명예를 의식하며 사는 자는 책망을 달게 받는다.
전 7:5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ryi$ a("mo$ $yi)"m {fkfx tarA(aG a(om:$il bwo+ 7.5
;{yilyis:K
어리석은 자의 노래를 듣는것보다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기꺼이 듣는다.
전 7:6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qox:& }"K ryiSah taxaT {yiryiSah lwoq:k yiK 7.6
;lebfh hez-{agw lyis:Kah
어리석은 자의 웃음은 솔잎이 타는 것과 같이 무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웃고 즐기는 것은 그만큼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종국을 마지막을 보고 어떻게 하든지 삶의 질을 높이려고 하는 그런 삶의 질을 의식한 진지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 이런 태도는 오늘 모든 것을 끝장보자는 사람에게는발견되지 않는 태도이다. 미래를 중히여기는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자세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전 7:7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hfnfTam b"l-te) d"Ba)yiw {fkfx l"lOhy qe$o(fh yiK 7.7
억압이 폭력이 지혜로운 자를 미친자로 만들고 뇌물이 마음을 오도한다. 지혜로운 자는 폭력앞에서 꼼짝못하는 똑똑하다고 하는 자도 힘가진 자가 있다고 하면 아무말도 못한다. 권력을 가진 자의 입밧에 맞도록 말하는 것이 소위 많이 안다고 하는 지혜자의 모습이다. 권력에만 약한 것이 아니다. 돈에도 약하다. 뇌물을 주면 마음이 그렇게 쉽게 돌아서서 잘못된 길로 간다. 인간의 도덕성의 한계를 나타내려고 한다. 결국 삶의 질을 의식하고 종국을 의식하고 진지하게 살려는 이런 삶은 대개 도덕적인 삶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것은 권력앞에서는 지혜가 없고 돈좀 집어주면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인간의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고 종국을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결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더 치명적인 말이 없다. 아주 찬물을 끼얹어버리는 말이다. 너 주제를 알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도덕성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말한다 .권력자가 소리만치면 쏙 들어간다. 돈좀 집어주면 언제든지 말을 바꾸는 것이 인간의 도덕이다. 니가 뭐 그렇게 별다르게 살아보려고 한들 뭐 대단한게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사실이다.
전 7: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axUr-Hab:Gim axUr-|ere) bwo+ wotyi$)"r"m rfbfD tyirAxa) bwo+ 7.8
소망을 주는 말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다시 여지 없이 꺾어 놓는다. 어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도덕성이 도저히 신뢰할 것이 못된다. 따라서 미래에 과연 미래에 소망을 두려는 것에 대해서 의문부호를 달아놓고 그러나 그 한마디에 좌절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주장하기를 8절에 보면 미래의 마지막이 시작보다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래의 마지막에 시작보다 좋은 것이다. 더 중요한 법이다. 시작이 어떻든 마지막이 좋은 것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이처럼 마지막을 붙들어야겠다는 어떤 시작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 타격을 한번 줬다. 인간의 도덕성이 이정도인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하였는데 거기에 대해서 시작보다 끝이 좋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연약하고 도덕적으로 한계를 가진 것을 인정하지만 시작보다 끝이 낫다고 하는 것은 시작은 이러더라도 발전과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 도덕성이 한계가 있어도 끝에가서는 우리 연약한 모습이 바뀔 수 있다면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그 다음날이 나을 것이라는 삶의 태도에 있어서는 무엇이 중요한가? 오래참고 기다리는 태도가 중요하다. 오만한 마음, 높음 마음이 아니라 오래참고 인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전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yilyis:K qy"x:B sa(ak yiK swo(:kil !AxUr:B l"hab:T-la) 7.9
;axUny
서둘러 네 마음으로 속상해하지 말라. 왜 이모양인가하고 낙심해 좌절해 말라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다고 해도 먼 미래를 내다보고 성급하게 속상해하거나 내팽개치거나 하지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자에게나 있는 것이다.
전 7: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yibO+ Uyfh {yino$)irfh {yimYahe$ hfyfh hem ram)oT-la) 7.10
;hez-la( fT:la)f$ hfm:kfx"m )ol yiK heL")"m
이전에 과거란 도대체 어떻게 되었느냐? 그 때가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았다는 과거지향적인 것, 구관이 명관이다, 옛날이 지금보다 좋았다는 미래지향적인 삶과 반대되는 그런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혜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런 과거지향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근본적인 약점, 한계, 얄팍한 도덕성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래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며 말하기를 마지막이 좋으면 되므려 참으며 개선해나갈 것을 기대하는 태도로 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11절 이하에 또 찬물을 끼얹는다.
전 7:11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emf<ah y")or:l r"tyw hflAxn-{i( hfm:kfx hfbO+ 7.11
지혜는 유산보다 낫고 해아래 사는 자에게 유익된 것이다.
전 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ta(aD }wor:tyw vesfKah l"c:B hfm:kfxah l"c:B yiK 7.12
;fhyelf(:b heYax:T hfm:kfxah
지혜의 그늘아래 있는 것은 돈의 그늘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혜가 때로는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지혜가 이렇게 참 중요한 것이기는 한데
전 7: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Qat:l lakUy yim yiK {yiholE)fh h"&A(am-te) h"):r 7.13
;wotUi( re$A) t")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히신 것을 누가 바로 펼 수 있겠느냐? 여기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말한다.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데 그 분이 하시는일에 네가 무엇을 어찌하겠느냐?인간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네 능력 밖의 일이다. 미래를 바라보고 무엇인가 개선해보겠다는 사람을 꺾어놓는 것이다. 네 존재를 알라. 하나님께서 굽혀놓으면 네가 어떻게 펴겠는가?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h"):r hf(fr {woy:bU bwo+:b h"yEh hfbO+ {woy:B 7.14
)oLe$ tar:biD-la( {yiholE)fh hf&f( hz-taMu(:l hez-te) {aG
;hfmU):m wyfrAxa) {fdf)fh )fc:my
좋은 날에는 그저 좋아하고 재앙의 날에는 깊이 생각하라. 그저 하나님께서 내게 순경을 허락하시면 기뻐하고 내게 재앙을 당하게 하시면 깊이 생각하라. 그렇게할 뿐이지 네가 무엇을하겠느냐? 굽히신 것을 네가 어찌 피겠느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자. 이것도 저것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미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항상 선한 일만 하시면 미래의 예측 범위가 좁아진다. 하나님께서 항상 좋은 일만 행하신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순경도 역경도 허락하시므로 하나님께서 당하는 일이이제 후에는 순경이 올지 역경이 올지 모른다. 예측못하도록 하신다. 미래지향적 삶에서 미래예측은 아주 중요하고 그 기대가 없으면 미래지향적 삶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처음에는 미래지향적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냉엄한 현실이 인간의 도덕적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러자 그래도 개선의 여지가 있고 나아지지 않겠느냐라는 것에 대해서 하난미의 절대성, 하나님께서 굽히신 것을 어떻게 펴겠느냐?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에 대해서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현실이 사실이 이러한대 미래를 바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는 것이다.
그 다음에 더 큰 난관이 있다. 15절이 하에 보면
전 7: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d"bo) qyiDac $"y yil:beh y"myiB yityi)fr loKah-te) 7.15
;wotf(fr:B |yirA)am (f$fr $"yw woq:dic:B
내가 모든 날을 살펴보면 헛되이 산 날 가운데 이 모든 일을 보았다. 그의 의 가운데서 망한 의인이 있는가하면 그 악행 가운데서도 장수하는 악인이 있는 것을 보았노라. 악인은 잘되면 안된다. 의인이 잘되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의인이 의로운 가우데 죽는다. 자기 의 때문에 망하는경우가 있다. 부지기수로 본다. 양심적인 사람이 어떻게 망해가는가를 본다. 그런데 악인이 잘되고 장수한다. 이것은 원칙이 뒤바꿔져 있는 것이다. 당연한대로 마땅한대로가 아니가 뒤바뀌어있다. 미래지향적 삶에 있어서 가장 미래예측을 불가능하게 하고 살려고 하는 의지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원칙대로 안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고 정반대의 결과가 온다.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그 의 때문에 망하고 악한대 잘되고 하면 완전히 손을 놓게 만든다.
전 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mO<iT hfMfl r"tOy {aKax:tiT-la)w h"B:rah qyiDac yih:T-la) 7.16
그러므로 너무 의로운 자가 되지 말라. 너무 지혜롭게 되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네가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하는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바르게 살려고 하면 거기에 상응하는 선한 결과가 따라와야 하는데 전혀 기대밖의 오히려 의로운 것 때문에 망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다 팽개치게 되는데 그런 꼴 안나려면 너무 의롭게도 하지 말라고 한다.
전 7: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tUmft hfMfl lfkfs yih:T-la)w h"B:rah (a$:riT-la) 7.17
;!eTi( )ol:B
또한 너무 악하지도 말라고 한다. 너무 악하게 굴면 제명대로 못산다는 것이다. 무엇이 좋으냐?
전 7: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edy-te) xaNaT-la) heZim-{agw hezfB zoxE)eT re$A) bO+ 7.18
;{fLuK-te) )"cy {yiholE) )"ry-yiK
이것도 붙잡고 저것도 네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좋다. 외곬수로 살지 말라는것이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적당히 취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나는 의롭게 산다고 하면 망하고 나는 악으로 살겠다고 해도 제명대로 못살고 그래서 적당히 취해야 한다. 적당히 손을 더렵혀야 일이 되지 너무 깨끗하려고 하면 될일도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두가지를 함께 한다고 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해서 다 의롭게만 사는 것이 아니라 양쪽다 적당히 취해야 하는 것이지 철두철미하게 의롭게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이 아니라고 한다. 모난돌 정맞는다고 너무 의롭게 살면 결국 거세되니 양쪽다 취하고 살라는 것이다. 그런가? 이상하죠? 그리고
전 7:19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Uyfh re$A) {yi+yiLa$ hfrf&A("m {fkfxel zo(fT hfm:kfxah 7.19
;ryi(fB
전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bwo=-he&A(y re$A) jerf)fB qyiDac }y") {fdf) yiK 7.20
;)f+Exy )olw
땅에서는 오직 선만행하고 죄를 행하지 않는 완전한 의인은 없다고 한다.
전 7:21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re$A) !eBil }"TiT-la) Ur"Bady re$A) {yirfb:Dah-lfk:l {aG 7.21
;!el:laq:m !:D:ba(-te) (am:$it-)ol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너무 귀길이고 마음을 쓰지 말라고 한다. 자꾸 남의말 들으려고 하면 저주를 들을 것이라고 한다. 이름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남의 너를 평가하는 것을 신경쓰지 말라. 들어봐야 결국 욕만 듣는다. 너 보기에 네가 상당히 깨끗한척 해봐야 사람들이 네 앞에서는 어떻게 할지 몰라도 아는 사람들은 다 욕한다. 그런 약점이 있다. 네 종이 너에게 그런 말을 한다고 노발대발하지 말라고 한다.
전 7:22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Ta)*-{aG re$A) !eBil (ady twoBar {yimf(:P-{aG yiK 7.22
;{yir"xA) fT:laLiq hfTa)**
왜냐하면 너도 그렇기 때문이다. 너나 내나 다 부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말들이 다 무슨 말인가? 죄안짓는사람이 없으니 죄안짓고 사는 것이 불가능하니 필요하면 되조 짓고 그런 중에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 선만행하려고 하면 안된다는 말인가? 중간에서 전도자가 한 말을 보면 여기서 결국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인간의 부패성을 말하는 것이다. 경건한 자라할지라도 범죄를 피할 수 없는 부패성을 말한다.
전 7:23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hfqOx:r )yihw hfmfK:xe) yiT:ramf) hfm:kfxab yityiSn hoz-lfK 7.23
;yNeMim
영적 도덕적 능력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아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지혜자라고 했는데 참지혜는 내게서 너무 멀리 숨어서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인가의 근본적인 무지를 말한다.
전 7:24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UNe)fc:my yim qomf( qomf(w hfyfhe<-ham qwoxfr 7.24
인간 스스로 근본적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전 7:25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hfm:kfx $"QabU rUtflw ta(adfl yiBilw yinA) yitwoBas 7.25
;twol"lOh tUl:kiSahw leseK (a$er ta(adflw }woB:$exw
내가 이렇게 돌이켜 살펴보니 이런 패단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전 7:26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yidOc:m )yih-re$A) hf<i)fh-te) twfMim ram yinA) )ecOmU 7.26
{yiholE)fh y"n:pil bwo+ fhyedy {yirUsA) HfBil {yimfrAxw
;HfB dekfLy )"+Oxw hNeMim +"lfMy
사냥하는 여인, 여자의 유혹이 죽음보다 더 무섭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에게서 가장 무서운 위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겠는가? 힘이 있는자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가 피한다. 죄인은 넘어진다.
전 7:27 전도자가 가로되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taxa):l taxa) telehoq hfr:mf) yit)fcfm hez h"):r 7.27
;}woB:$ex )oc:mil
내가 한가지 한가지 살펴보면 발견하는 것이 있는데
전 7:28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dfxe) {fdf) yit)fcfm )olw yi$:pn hf$:qiB-dO( re$A) 7.28
;yit)fcfm )ol heL")-lfk:b hf<i)w yit)fcfm vele)"m
내가 찾아도 찾지 못한 것이 하나 있는데 일천 인 중에 사람다운 사람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 여자는 없다라고 한다. 솔로몬도 여성에 대해서 큰 편견을 가진 사람인가?
전 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fdf)fh-te) {yiholE)fh hf&f( re$A) yit)fcfm hez-h"):r dab:l 7.29
;{yiBar twonob:<ix U$:qib hfM"hw rf$y
그런데 하나 발견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본래 만들기는 참 정직하게 바르게 만드셨는데 사람은 간교한 생각만 만들어낸다.
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 사람은 여자는 아니었는데 그 사람도 악한 꾀를 낸다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나 다 부패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존재인데 이런 인간에게서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미래의 가능성을 거는 사람에게 이런 명확한 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 8:1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tam:kfx rfbfD re$"P a("dOy yimU {fkfxeh:K yim 8.1
;)eNu$y wyfnfP zo(w wyfnfP ryi)fT {fdf)
8장에 보면 왕의 말을 지키고 이미 하나님과 더불어 맹세한 것을 인하여 왕의 말을 지키라고 한다. 왕 앞에서는 급히 물러나지 말것이요 왕을 향해 악한 일을 꾀하는 것을 동참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왕은 그 기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하는 절대권력을 가진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 8:2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yiholE) ta(Ub:$ tar:biD la(w rwom:$ |elem-yiP ynA) 8.2
전 8: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yiK (fr rfbfd:B domA(aT-la) |"l"T wynfPim l"hfBiT-la) 8.3
;he&A(y joP:xy re$A)-lfK
전 8:4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he&A(aT-ham wol-ram)oy yimU }wo+:li$ |elem-rab:D re$A)aB 8.4
왕이 한번 하면 왜 이런 것을 했냐고 물을 수 없는 절대권력자라고 한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도저히 해결되지 않은 현실의 부조리, 부조리한 현실을 이렇게 말한다.
전 8:5 무릇 명령을 지키는 자는 화를 모르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t"(w (fr rfbfD (ady )ol hfw:cim r"mO$ 8.5
;{fkfx b"l (ady +fP:$imU
만사에는 공의가 시행되는 사필귀정의 때가 있는만큰 아무리 지금의세월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때를 기대하면서 살라고 한다. 비록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모르고 말해줄 사람도 없고 바람을 어거할 수 없고 죽는날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전쟁중에 빠져나가려해도 빠져나갈 수 없고
전 8:6 무론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fdf)fh ta(fr-yiK +fP:$imU t"( $"y jep"x-lfk:l yiK 8.6
;wyflf( hfBar
전 8: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yim hey:hiy re$A)aK yiK hey:hiYe<-ham a("dy UNeny")-yiK 8.7
;wol dyiGy
전 8:8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무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
}y")w axUrfh-te) )wol:kil axUrfB +yiLa$ {fdf) }y") 8.8
+"Lamy-)olw hfmfx:liMaB taxal:$im }y")w twfMah {woy:B }O+:li$
;wyflf(:B-te) (a$er
미래를 아는 사람도 없고 알려줄 사람도 없지만 바람을 제어할 수도 없고 죽는날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전쟁에서도 제마음대로 빠져나가지 않듯이 악은 그 행한자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것을 말하면서 악을 범한자는 반드시 그 댓가를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분명하다. 미래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이 인과응보는 분명하므로 미래에 대해서 그렇게 부담갖지 말라는 것이다.
전 8:9 내가 이런 것들을 다 보고 마음을 다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으며
hf&A(n re$A) he&A(am-lfk:l yiBil-te) }wotnw yityi)fr hez-lfK-te) 8.9
{fdf):B {fdf)fh +alf$ re$A) t"( $emf<ah taxaT
;wol (ar:l
또 내가 해아래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하나님의 때가 모든 부조리한 것을 해결하는 것을 보았다. 악인이 날뛰듯이 스스로 보응을 받는 것을 보았다. 기다리니 다 모든게 풀려가더라. 뿐만 아니라
전 8:10 내가 본즉 악인은 장사지낸 바 되어 무덤에 들어갔고 선을 행한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Odfq {woq:MimU U)fbw {yirub:q {yi(f$:r yityi)fr }"k:bU 8.10
;lebfh hez-{aG U&f(-}"K re$A) ryi(fb Ux:KaT:$iyw Uk"Lahy
악을 그렇게 행하는 사람을 보아도 보니 그 사람이 죽어서 잊혀졌다. 우리가 큰 원칙은 지켜지니 미래에 대해서 답답해 하지말라고 한다.
그러자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한다.
전 8:11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K-la( hfr"h:m hf(frfh h"&A(am {fg:tip hf&A(n-}y") re$A) 8.11
;(fr two&A(al {ehfB {fdf)fh-yn:B b"l )"lfm
첫째는 보응이 신속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행한다.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다. 10년 20년 뒤에 권력을 잃는다든지 죽고나서 잊여진다든지 하는것은 보응이 제대로 시행된다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전 8:12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wol |yirA)amU ta):m (fr he&o( )e+ox re$A) 8.12
{yiholE)fh y"):ry:l bO=-hy:hy re$A) ynf) a("dOy-{aG yiK;wyfnfp:Lim U):ryiy re$A)
보니까 또 악을 100번 행하고도 장수하는 사람이 있다. 끝까지 악을 행하고도 잘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안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전 8: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re$A) l"CaK {yimy |yirA)y-)olw (f$frfl hey:hy-)ol bO+w 8.13
;{yiholE) y"n:piLim )"ry UNeny")
전 8:14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yi(f$:r $"yw {yi(f$:rfh h"&A(am:K {eh"lA) a(yiGam re$A) {yiqyiDac $"y re$A) jerf)fh-la( hf&A(n re$A) lebeh-$y 8.14
;lebfh hez-{aGe$ yiT:ramf) {yiqyiDaCah h"&A(am:K {eh"lA) a(yiGaMe$
악인에게 마땅한 보응을 의인이 받는 경우가 있고 의인의 보응을 악인이 받는 원칙이 뒤바뀐 경우를 본다. 하나님의때가 있고 그것을 기다려봤지만 신통치 못하다. 악인과 선인이 받는 보응이 완전히 뒤바뀌니 선한 삶, 경건한 삶 자체가 무의미하게 만들고 경건하게 살면 거기에 합당한 결과를 수반하고 악하게 살면 거기에 마땅한 결과가 수반되야 하는데 뒤바뀌면 경건하게 살 목적이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전 8:15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taxaT {fdf)fl bwo+-}y") re$A) hfx:mi>ah-te) ynA) yiT:xaBi$w 8.15
UNew:ly )Uhw axwom:&ilw twoT:$ilw lwokE)el-{i) yiK $eme<ah
;$emf<ah taxaT {yiholE)fh wol-}atfn-re$A) wyfYax y"my wolfmA(ab
내가 그럼 붙잡을 것이 무엇이냐? 그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그때를 봐도 보상이 뒤바뀌니 내가 하나님의 일을 잘 살펴보니
전 8:16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fyni(fh-te) tO):rilw hfm:kfx ta(adfl yiBil-te) yiTatn re$A)aK 8.16
hflyaLabU {OYaB {ag yiK jerf)fh-la( hf&A(n re$A)
;he)or UNeny") wyfny"(:B hfn"$
전 8: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fdf)fh lakUy )ol yiK {yiholE)fh h"&A(am-lfK-te) yityi)frw 8.17
re$A) le$:B $eme<ah-taxat hf&A(n re$A) he&A(aMah-te) )Oc:mil
ram)y-{i) {agw )fc:my )olw $"Qab:l {fdf)fh lomA(y
;)oc:mil lakUy )ol ta(adfl {fkfxeh
결국 무슨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가? 도저 이 해아래서 일어나는 일들을 파악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삶이 뒤죽박죽이면 세상사나 역사나 개인의 삶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없다. 미래의 결과도 마찬가지이다.
전 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re$A) hez-lfK-te) rUbflw yiBil-le) yiTatn hez-lfK-te) yiK 9.1
hf)ni&-{ag hfbAha)-{aG {yiholE)fh day:B {ehy"dfbA(w {yimfkAxahw {yiqyiDaCah
;{ehyn:pil loKah {fdf)fh a("dOy }y")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인데 그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미음일지 사랑일지 모르겠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보아서는 도대체 어떻게 될지 예측을 못하겠다.
전 9: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f$frflw qyiDaCal dfxe) her:qim loKal re$A)aK loKah 9.2
ax"bz UNeny") re$A)alw ax"bZalw )"mf=alw rwohf=alw bO=al
;)"ry hf(Ub:$ re$A)aK (fB:$Nah )e+oxaK bO=aK
이렇게 하며 사는 모든 인생이 결국 똑같은 종말을 맞는다. 이것이 가장 큰 패단이다. 죽음의 공평성, 죽음의 비윤리성이랄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죽음이니 결과가 마찬가지이니 의롭게 살아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최후의 결정적인 타격이다. 미래지향적 사람에게서 마지막이다. 그런데 종국이 가보니까 종국까지의 과정도 예측불허이며 확실한 종국인 죽음에 가보니 경건한자든 불경건하든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똑같다. 어떻게 살든 결국 동일한 결말에 이르게 되니까 결국 어떤 결론이 내려지는가? 니 마음대로 살라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전 9: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her:qim-yiK $eme<ah taxaT hf&A(n-re$A) lok:B (fr hez 9.3
twol"lOhw (fr-)"lfm {fdf)fh-yn:B b"l {agw loKal dfxe)
;{yit"Mah-le) wyfrAxa)w {ehyYax:B {fbfb:liB
전 9:4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y {yiYaxah-lfK le) raBuxy** r"xfBy* re$A) yim-yiK 9.4
;t"Mah h"y:ra)fh-}im bwo+ )Uh yax belek:l-yiK }woxf=iB
죽음의 허무에 대해서 말한다. 죽은자에게는 소망이 없다. 죽은 사자보다는 산개가 낫다. 산개같이 사는 것이 낫다.
전 9:5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yi(:dOy {fny") {yit"Mahw UtumYe$ {yi(:dOy {yiYaxah yiK 9.5
;{fr:kz xaK:$n yiK rfkf& {ehfl dwo(-}y")w hfmU):m
산자는 죽을줄을 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죽은자는 아무 보상이 없다. 일도 없고 일에 따른 보상도 결과도 아무것도 없다.
전 9:6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qel"xw hfdfbf) rfb:K {ftf)niq-{aG {ftf)ni&-{aG {ftfbAha) {aG 9.6
;$emf<ah taxaT hf&A(n-re$A) lok:B {flO(:l dO( {ehfl-}y")
거기에는 미움도 사랑도 질투도 없다. 그저 미워하고 사랑하고 하는 입장에서의 삶도 죽음 다음에는 없다. 그리고 한번 죽으면 해아래서의 이 삶에 역사에 참여할 수가 없다.
전 9: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enyy bwo+-bel:b h"tA$U !em:xal hfx:mi&:B lokE) |"l 9.7
;!ye&A(am-te) {yiholE)fh hfcfr rfb:k yiK
그러니 어떠해야 하겠는가? 가서 너는 기쁨으로 떡을 먹으며 네 포도주를 기쁨으로 마실지어라. 하나님께서 너의 일을 기뻐하셨느니라.
전 9: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rfs:xy-la) !:$)or-la( }eme$w {yinfb:l !yedfg:b Uy:hy t"(-lfk:B 9.8
항상 네 옷을 희게하고 네 머리에 향기름을 바르고
전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el:beh y"Yax y"my-lfK fT:bahf)-re$A) hf<i)-{i( {yiYax h"):r 9.9
!el:beh y"my loK $eme<ah taxaT !:l-}atfn re$A)
l"mf( hfTa)-re$A) !:lfmA(abU {yiYaxaB !:q:lex )Uh yiK
;$emf<ah taxaT
네 사랑하는 아내와 살것이요
전 9: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h"&A( !Axok:B two&A(al !:dfy )fc:miT re$A) loK 9.10
lwo):$iB hfm:kfxw ta(adw }OB:$exw he&A(am }y") yiK
;s hfMf$ |"loh hfTa) re$A)
네 힘이 닿는대로 열심이 일하라. 죽으면 일도 없고 사랑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래도 유익하게 의미있는 삶은 살아있는 이 삶이기 때문에 그것을 최대한 즐길 수 있는대로 이 삶을 즐기라고 한다.
전도자가 잠정적으로 질문이나 제시하는 어떤 내용은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히 발견하는 것이다. 불신자나 신자가 시험을 받을 때 묻게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너무 경건하고 믿음에서 흔들리기를 두려워하여 기피하는 문제이지만 성경은 이것을 정직하게 말하고 밝히고 있다.
전 9:1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jwor"Mah {yiLaQal )ol yiK $eme<ah-taxat ho)frw yiT:ba$ 9.11
{exel {yimfkAxal )ol {agw hfmfx:liMah {yirOBiGal )olw
{yi(:dYal )ol {agw re$o( {ynobNal )ol {agw
;{fLuK-te) her:qy (agepw t"(-yiK }"x
잠간 정리를 해보면 3장에서 역사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 몇가지 문제 때문에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다 하시고 그것을 알수 없기 때문에 이성의 한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 행하신다고 하면 인간이 설 자리가 어디인가? 내 삶의 주체로서 인간이 선자리가 어디인가? 실제 우리의 삶을 보니까 질서가 뒤바뀌어 있다. 완전 전도되어 있다. 의와 공의의 자기에 악이 있다. 의와 악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어있는 부조리한 문제, 만일 이것이 인간의 전적으로 내 삶을 주관한다면 인간이 모두 책임을 져야하고 인간 책임으로 이 부조리가 돌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이 역사의 모습이 왜 이런가? 그리고 인간의 종말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취급한다. 3장에서 12장까지 모든 문제가 일단락 제기된다. 그리고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전개시키는 것이다. 4장에서 부조리한 모습을 제기한다. 억울함을 제기한다. 권력의 부패한 탓에 약육강식의 사회가 된 것, 경쟁사회, 모두가 홀로된 그런 모습, 그리고 이것은 또 이제 불신과 신의가 없음, 믿음이 불가능하는 현실, 이런 것 때문에 이것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정말 이런 것이라고 하면 전혀 살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산자보다 죽은자가 낫고 그보다는 아예 이런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서 이런 현실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인간은 전혀 무력하다. 첫째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한 존재요 오직 그가 행하시는 일 앞에 그저 경외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뿐이지 사람이 그외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하나님께 따져볼 수도 없고 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 절대자 앞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를 말한다. 그 다음에는 그것이 가장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인간의삶의 가능성을 말할 때 가장 근본적인 한계가 하나님의 존재요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이다. 인간이 인간을 한계지으는 한계는 근본적인 절대자인 하나니만이 아니고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인간의 뜻을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권력도 나눠갖는 것이요 재물도 그렇다. 지혜로 그렇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능력이 인간이 인간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전체를 요약해서 말한다면 우리로하여금 살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우리 인간은 속수무책이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전도자가 다른 가능성을 한 찾는다. 그럼 혹시 미래에 앞으로 이 속수무책의 현실을 타개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미래로 시선을 돌론다. 종국을 의식하고 현재의 윌의 모습은 이럴지라도 개선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할 가능성이 있는가 타진해보는데 벽에 부닥친다. 인간의 도덕성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힘든 자 앞에서 말을 바꾸고 뇌물 앞에서 변절하는 그런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것이 그정도 밖에 안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무지하여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바꾸어 놓을 수도 없고 더 나아가서 인간의 부패성을 지적한다. 세상에는 선만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자가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도 양쪽을 다 행할 수 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의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깨끗하려고 깨끗하게 자기의 명성을 지키려고 그렇게 해쓰지 말라. 남의 말을 자꾸 듣다보면 너 욕하는 소리를 듣고, 너의 부족한 면, 너의 부패한 죄를 지적하는 말을 듣게 될 것인데 노발대발하지 말라. 나는 깨끗한 사람인데 왜 나를 욕하는가 그러지 말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라. 너도 실상은 다른 사람을 욕하고 있다. 너도 다른 사람에게 완전한 의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지 않느냐!는 것이다.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서 남자역시 별거 역시 아니더라. 사람을 하나님께서 옳바로 지었지만 사람이 악한 꾀를 항상 생각해낸다. 인간의 부패성의 깊이를 지적한다. 개선을 바라고 지금 현재의 모습은 이렇지만 더 나을 수 있으리라 날마다 더 나은 상태로 발전이 가능하고 완전한 종국의 가능성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의 근본적인 능력의 한계, 지적인 능력, 도덕적인 능력, 실천적인 능력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만큼 절망적인 것이 없다. 해봐야 소용없다는 말이다. 너 그렇게 아무리 노력해봐야 너라는 존재는 이정도라는 것이다. 해봐야 뭐하겠느냐는 것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인간이 도더적 여러가지 면에서 능력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성실에 대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한다. 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만사를 때에 따라 다스리시니까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선악간의 보응이 일어지는 듯하지만, 선악간의 보응에 대해서 이런 예를 든다. 악한 자가 권력을 휘드르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 잊혀진다. 보응의 신속하게 이루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보응이 그정도라고 하면 죄짓고 살겠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니까 의인은 의인의 보상을 받ㅇ야 마땅한데 악인이 당해야할 운명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악인의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는 경우를 보았다. 그정도 가지고는 선악간의 보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악의 질서가 완전히 전도되었다. 뒤바뀌었다는 부조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때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산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죽음이라는 종말 때문이다. 인간의 종말을 보니까, 죽음을 보니까 이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악하게 산 사람이나 의롭게 산사람이나 똑같은 종말을 맞는다. 여기까지 전도자가 종국의 가능성, 미래의 가능성을 두고 시도를 해본 것인데 내가 무엇인가 의롭게 살면 지금의 이 현재의 모습이나 내게서 이뤄지는 일들에서는 상당한 보상이나 설명을 들을 수는 없지만 이런 상황이 점차 개선될 것이고 특별히 종국에 가서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미래에는 설명이나 정당한 보상이 있을 것인가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종말이 악인이나 의인이나 똑깥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미래지향적 사람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결과가 똑같다면 내일을 생각하며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쓸데 없다.
그리고 이야기하기를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죽고 난다음에는 사후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유일하게 의미있게 삶의장이라고 하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낫다. 해아래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삶의 장이다. 내 아내와 즐기라. 해아래서의 삶을 즐기라.
계속 해아래삶의 불가해성, 이해가 가지 않고 납득이 가지 않는 부조리함에 대해서 계속 더 말하고 있다. 9장 7절 이하에 말하면 경주라고 하는 것이 재빠른 자에게 있지 아니고 전쟁이 용사에 있지 ㅇ낳다는 것이다. 재빠르다고 반드시 경주에 이기는 것이 아니고 용사라고 항상 이기는 것도 아니다. 지혜로운 자가 항상 빵을 얻는 것도 아니고 명철한 자에게 보물이 모이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를 말하는가? 우칙대로, 기대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럴 것이라는 기대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은 그런 기대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전 9: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yzfxE)eNe$ {yigfDaK woTi(-te) {fdf)fh (ady-)ol {aG yiK 9.12
{yi$fqUy {"hfK xfPaB twozuxA)fh {yirFPiCakw hf(fr hfdOc:miB
;{o):tiP {ehy"lA( lwoPiTe$:K hf(fr t"(:l {fdf)fh y"n:B
세상일은 전부가 다 어떻게 되는가? 예측불허이다. 어느 한순간에 도저히 짐작도 예측도 할 수 없다. 울컥 닥친다. 세상에 크리스마스 새벽기도가면서 술취한 사람이 차 앞으로 뛰어들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냥 휙 뛰어든다. 사람은 그 때를 알지 못한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를 못한다. 물고기가 낚시에 탁 채이듯이 그냥 채이면 올라가듯이 사람이 재앙을 당하는 것도 그런 식으로 당한다. 예측 불허성, 의외성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하기를
전 9:13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yih hflOd:gU $emf<ah taxaT hfm:kfx yityi)fr hoz-{aG 9.13
;yfl")
해아래서 되어지는 일을 보니
전 9:14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elem fhyel")-)fbU +f(:m HfB {yi$nA)w hfNa+:q ryi( 9.14
;{yilod:G {yidOc:m fhyelf( hfnfbU Hfto) babfsw lOdfG
어떤 사람이 많지 않은 고을에 강력한 왕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포위를 했는데 마침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을 구하였으나
전 9:15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ryi(fh-te) )Uh-+aLimU {fkfx }"K:sim $yi) Hfb )fcfmU 9.15
;)Uhah }"K:siMah $yi)fh-te) rakz )ol {fdf)w wotfm:kfx:B
사람들은 그 사람을 기억조차 않한다. 왜냐하면 가난하기 때문이다.
전 9: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K:siMah tam:kfxw hfrUb:Gim hfm:kfx hfbO+ ynf) yiT:ramf)w 9.16
;{yi(fm:$n {fny") wyfrfb:dU hfyUz:B
지혜는 용기보다 나은 것이요 이렇게 나은 것인데 가난한 자의지혜는 경멸을 받고 그의 말은 경청되지 안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리원칙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전 9:17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yilyis:KaB l"$Om taqA(Zim {yi(fm:$n taxan:B {yimfkAx y"r:biD 9.17
지혜자의말은 조용히 경청되어야 한다. 어리석은 군주의 외침보다 오히려 지혜자의 말이 조용히 경청되어야 함에 불구하고
전 9:18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
d"Ba)y dfxe) )e+Oxw bfr:q y"l:Kim hfm:kfx hfbO+ 9.18
;h"B:rah hfbO+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전쟁 무기보다 더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한사람의 죄인이 많은 선을 패괴케 하는 것을 본다.
전 10:1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rfqy ax"qOr }eme$ a(yiBy $yi):by twfm y"bUbz 10.1
;+f(:m tUl:kis dwobfKim hfm:kfx"m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고 기름을 상하게 하듯이 한 사람의 죄인이 많은 선을 패괴케 하는 것을 본다.
전 10:2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wol)om:&il lyis:K b"lw wonyimyil {fkfx b"l 10.2
어리석음이 지혜보다 רקי는 본래 뜻은 weight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outweight라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작은 어리석음이 지혜와 영광을 능가한다, 이긴다. 서울 가본 사람하고 안가본 사람하고 싸우면 안가본 사람이 이긴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과 맞부딛히면 어리석은 사람이 이긴다. 그 사람은 따지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 어리석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어리석은 자와 지혜자는 같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가 오른 쪽을 가면 어리석은 반드시 왼쪽을 택하게 되어 있다. 서로 추구하는 것이 반대므로 반드시 둘이 있으면 사우게 되고 어리석은 자가 이긴다. 지혜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원리로 보면 지혜가 경청되어야 하고 군주의 어리석은 호령보다 지혜자의 말이 경청되어야하는데 실제로는 반대이다. 어리석은자의 한마디가 지혜로운 자의 말을 무너뜨니다.
전 10:3 우매자는 길에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ramf)w r"sfx woBil |"loh lfkfS**e$**:K** lfkfS*ah*e$*:K* |ereDaB-{agw 10.3
;)Uh lfkfs loKal
전 10:4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
yiK xaNaT-la) !:mOq:m !yelf( helA(aT l"$OMah axUr-{i) 10.4
;{yilOd:G {yi)f+Ax axyiNy )"P:ram
권력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이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권력이 행사되는 실상을 살펴보니 그의 다스림의 결과가 어떤 일들이 주어지는가를 보는가하면 어리석은 자가 아주 높은 위치에 앉게 되어 있고 부유한 사람이 낮은 자리에 위치하는것을 보게 되고 종이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보고 방백과 같은 모든 훌륭한 자질을 갖춘자가 종처럼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전 10:5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곧 주권자에게서 나는 허물인 듯한 것을 보았노니
)fcYe$ hfgfg:$iK $emf<ah taxaT yityi)fr hf(fr $"y 10.5
;+yiLa<ah y"n:piLim
전 10:6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부자가 낮은 지위에 앉는도다
;Ub"$y lep"<aB {yiryi$A(w {yiBar {yimOr:MaB lekeSah }aTn 10.6
전 10:7 또 보았노니 종들은 말을 타고 방백들은 종처럼 땅에 걸어 다니는도다
;jerf)fh-la( {yidfbA(aK {yik:loh {yirf&w {yisUs-la( {yidfbA( yityi)fr 10.7
참으로 권력과 권위가 맡겨진다고 하면 현명한자, 인재를 적재적소에 앉혀 종의 일을 해야할 사람은 종의 위치에 놓고 다스리는 자질이 있는 사람은 다스리는 위치에 놓아 잘 되게 해야 하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이 모든 질서를 오히려 뒤집어 놓고 있다.
전 10:8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UNek:<y r"dfG j"ropU lwoPy woB jfMUG r"pox 10.8
;$fxn
그런 것 뿐 아니다. 구덩이를 팔 때에는 남을 빠뜨리려고 파는데 자기가 오히려 구덩이에 떨어지는 경우를 보며 담을 허는데 생각지도 않는데 독사가 나와 물리고
전 10:9 돌을 떠내는 자는 그로 인하여 상할 것이요 나무를 쪼개는 자는 그로 인하여 위험을 당하리라
}ekfSy {yic"( a("qOB {ehfB b"cf(y {yinfbA) a(yiSam 10.9
;{fB
돌을 쪼개다가 그로 인해 상하고 나무르 쪼개다가 누가 그로 인하여 상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지혜의 유익이 참으로 크고 어리석은 자가 멸시받을 것이 당연하지만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앞으로 닥칠 일에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세상사가 예측불능이다.
전 10:10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r"Bagy {yilyAxw laq:liq {yinfp-)ol )Uhw lez:raBah hfh"q-{i) 10.10
;hfm:kfx ry"$:kah }wor:tyw
전 10:11 방술을 베풀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무용하니라
;}wo$fLah la(ab:l }wor:ty }y")w $axfl-)Ol:B $fxNah |o<y-{i) 10.11
전 10:12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UNe(:Lab:T lyis:K twot:pi&w }"x {fkfx-yip y"r:biD 10.12
전 10:13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요 끝은 광패니라
;hf(fr tUl"lOh UhyiP tyirAxa)w tUl:kis Uhyip-y"r:biD taLix:T 10.13
전 10:14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
re$A)w hey:hiYe$-ham {fdf)fh (ady-)ol {yirfb:d heB:ry lfkfSahw 10.14
;wol dyiGy yim wyfrAxa)"m hy:hiy
전 10:15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ryi(-le) tekelfl (ady-)ol re$A) UNe(:Gy:T {yilyis:Kah lamA( 10.15
전 10:16 왕은 어리고 대신들은 아침에 연락하는 이 나라여 화가 있도다
;Ul"k)y reqoBaB |yarf&w ra(fn |"K:laMe$ jere) |fl-yi) 10.16
그들을 다스리는 방백들이 아침부터 먹고 머시는 쾌락을 추구하는 나라의 백성은 불행하다.
전 10:17 왕은 귀족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려 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 먹는 이 나라여 복이 있도다
Ul"k)y t"(fB |yarf&w {yirOx-}eB |"K:laMe$ jere) |y"r:$a) 10.17
;yit:<ab )olw hfrUb:giB
이와 반대로 좋은 자격을 가진 왕이 다스리고 때를 방백들은 따라 먹고 힘을 얻어 일을 하고자 먹고 마시리니 이런 나라는 참으로 복되다.
전 10:18 게으른즉 석가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
;tyfBah vol:dy {yady tUl:pi$:bU herfq:Mah |aMy {yaT:lacA(aB 10.18
게으르면 석가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으면 지붕이 샌다. 이는 우리 생활에서 이런 원칙은 어느정도 지켜지는 모습을 말하고 있다. 다스리는 자가 경험이 없어 미숙하고 쾌락이나 즐기면 불행한 나라가 된다. 그러나 잘 다르시고 방백들이 열심히 나라일을 다스리면 그런 나라는 복되다. 게으르면 석가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으면 지붕이 샌다는 것은 부지런히 노력하면 그 노력의 상당한 결과가 온다는 것이다. 어느정도 이런 원칙은 지켜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전 10:19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
veseKahw {yiYax xaMa&y }yayw {exel {yi&o( qOx:&il 10.19
;loKah-te) henA(y
전 10:20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l"Laq:T-la) !:bfK:$im y"r:dax:bU l"Laq:T-la) |elem !A(fDam:B {aG 10.20
la(abU lwoQah-te) |yilOy {yamf<ah vwo( yiK ryi$f(
;rfbfD dy"Gy {yapn:K** {yapn:K*ah*
그러나 침상에서도 왕을 저주하지 말라. 침상에서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말을 전할 것이다. 이것도 의외성을 말한다. 앞에는 원칙과 일반적인 기대대로 되지만 그러나 전혀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는것이다. 침실에서 말한 것은 새가 들을 줄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다. 어떤 부분에서는 상식적인 원리가 지켜지는 것은 사실이나 침실에서 하는 말을 새가 전할 가능성을 염두해 두라는 것인데 우리의 생각밖의일, 예측못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예측을 불허하는 현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이런 현실을 사는 지혜로운 방식이 무엇이겠는가?
전 11: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UNe)fc:miT {yimYah bor:b-yiK {yfMah y"n:P-la( !:m:xal xaLa$ 11.1
네 빵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물위에 떢을 던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정신병자이다. 물고기 밥주려고 하지 않은 다음에야 물에 던지지 않는다. 도저히 찾을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여러날 후에 찾게 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도저히 기대치 않았다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까지 계산해서 행동하라는 것이다 .물에 떡을 던지듯이 완전히 버리는 것 같은 것도 나중에 찾게 되는 현실이니까 그런 가능성까지 대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 1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ad"t )ol yiK hfnOm:$il {agw hf(:bi$:l qel"x-}eT 11.2
;jerf)fh-la( hf(fr hey:hY-ham
외골수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귀더라도 여러사람을 사귀라는 것이다. 일편단심 한사람 보고 살면 어리석다는 것이다. 대개 가능성을 몇개 두라는 것인가? 일곱내지 여덟개의 가능성을 두라는 것이다. 투자를 해도 여러개의 주식을 사라. 이 땅에서는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7-8개의 가능성을 두고 일을 처리하라.
전 11:3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j"( lwoPy-{i)w Uqyiry jerf)fh-la( {e$eG {yibf(eh U):lfMy-{i) 11.3
{f$ j"(fh lwoPYe$ {woq:m }wopfCaB {i)w {worfDaB
;)Uhy
구름이 차면 구름이 물기로 가득머금으면 그 무거운 물을 비로 땅에 내리게 마련이요 나무가 남쪽으로든 북쪽으로든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의 나무는 있게 마련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세상사는 예측 불가능이요 일을 일어나봐야 알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무가 북쪽으로 넘어질지 남쪽으로 넘어지는지 모른다. 넘어져봐야 안다는 말이다. 먼장래의 불가능한 가능성을 내다보라. 7-8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하라. 모든 가능성을 다 두라. 물이 차야 구름이 비를 내리지만 언제 내릴지 모른다. 나무가 어느쪽으로 넘어질지 모른다. 세상사 우리가 예측할 수 없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어떻게 하는가?
전 11:4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ol {yibf(eb he)orw (frzy )ol axUr r"mo$ 11.4
;rwoc:qy
아무도 못한다. 그러나 세상사가 다 이렇다고 우연에 맡겨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람이 안불때를 기다리면 파종하지 못한다. 오늘 바람불까 안불까 살피기만 하면 평생 씨를 못뿌리고 오늘 비가 올까 안올까 보는자는 평생 추수를 못한다.
전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e+eb:B {yimfcA(aK axUrfh |ereD-ham a("dOy !ny") re$A)aK 11.5
he&A(y re$A) {yiholE)fh h"&A(am-te) (ad"t )ol hfkfK hf)"l:Mah
;loKah-te)
너는 하나님께서 하는 일을 알 도리가 없는 자이다. 이처럼 인간은 언제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만 아침에는 부지런히 네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네 손을 쉬게하지 말라.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해봐라. 어느것이 성공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을 다 해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시도해보라.
전 11:6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yiK !edy xaNaT-la) bere(flw !e(:rz-te) (arz reqoBaB 11.6
hez-O) hezAh rf$:ky hez y") ("dOy !ny")
;{yibO+ dfxe):K {ehyn:$-{i)w
전 11:7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emf<ah-te) two):ril {yany"(al bwo+w rwo)fh qwotfmU 11.7
여기서부터 12:8까지 내용을 보면 전도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일반적인 의도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빛이 달콤함이여 해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내가 해아래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전 11: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xfm:&y {fLuk:B {fdf)fh hey:xy h"B:rah {yinf$-{i) yiK 11.8
;lebfh )fBe$-lfK Uy:hy h"B:rah-yiK |e$oxah y"my-te) roKzyw
그런가 하면 해아래서 여러해 살면서 모든 것을 기뻐하면서도 어두움의 날을 기억하라. 죽음 이후의 어두움을 기억하라고 한다.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의도가 분명치 않다.
전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etOrUx:b y"myiB !:Bil !:byi+yiw !yetUd:ly:B rUxfB xam:& 11.9
yiK (fdw !yeny"( y"):ram:bU !:Bil y"k:rad:B |"Lahw
;+fP:$iMaB {yiholE)fh !A)yiby heL")-lfK-la(
청년은 그 청년의 때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내 마음이 원하는대로 다 즐기라. 그런가하면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네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는 것도 알라.
전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tUd:lYah-yiK !erf&:Bim hf(fr r"bA(ahw !eBiLim sa(aK r"sfhw 11.10
;lebfh tUrAxa<ahw
전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U)oby-)ol re$A) da( !yetorUx:B y"myiB !ye):rwoB-te) rokzU 12.1
yil-}y") ram)oT re$A) {yinf$ U(yiGihw hf(frfh y"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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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에 보면 노쇠하고 죽음에 이르기 전에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그런가하면 인간의 종말은 결국 영육이 분리되어 육신은 본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얼른 보면 전혀 일관된 의도가 없는 것 같이 상당히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혼란스런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피상적으로 느끼고 깨닫는 것 이상의 의도를 여기 가지고 있을 수 있다.
12장에서 쉽게 말하면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보았던 그 기대가 죽음이라는 종말로 인해 완전히 없어져버린 다음에는 모든 내용이 한마리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도 했다가 먹고 즐기라고도 했다가 어두운 날도 기억하라고 하다가 젊은 날도 다 헛되다고 한다. 인간의 종말이 무엇이냐 영육이 분리해서 하나는 흙으로가고 하나는 하나님께 간다고 한다. 대개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하는 이 성경말씀을 긍정적으로 인용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내용 마지막 8절에 보면 헛되고 헛되다고 한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표현에 의해서 지금까지 말한 이 내용들이 적어도 자기 삶에서 적어도 긍정적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허무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허무의 고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말들임을 알 수 있다.
전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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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2: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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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2: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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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2:5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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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2:6 은줄이 풀리고 금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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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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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2:8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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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2:9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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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몇절 안남았는데도 아직도 뭐가 없다. 전도자는 지혜로웠을 뿐만 아니라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치기도 하였고 수많은 잠언을 깊이 숙고하고 탐구하고 정리하고 하는 것을 하였다.
전 12:10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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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참 적절한 말을 찾아서 옳게 기록하였다.
전 12: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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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의 말은 마치 가축떼를 모는 막대기와 같아서 잘박힌 못과 같아서 한 목자에게서 주어진 것이다. 목자라는 말로 보아서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를 기록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전도자가 한 말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전도자가 한 이야기가 옳은가? 틀린가? 세상을 보면서 앞에서 전도자가 한 말과 같은 것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느끼지 않았는가? 다 느끼고 경험했다.
전 12: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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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내 아들아 경계를 받으라. 이 때까지 한말 외에 또 한말을 덧붙이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끝이 없고 자기가 온갖것을 연구하고 탐구하고 해서 그 결과를 기록하고 남기는데 끝이 없다. 그저 공부에 몰두해봐야 몸만 지친다. 이것은 결국 이성의 한계,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인간의지적 노력도 궁극적인 해결이 없다.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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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말이 나온다. רבח ףוס말의 끝이다. 결론이라는 말이다. 모든 일이 다 들었다. 결론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 이것이 인간의 전부다. 인간이란게 무엇이냐? 이것이다. 우리말로는 인간의 본분이라고 하여 뉘앙스가 다르지만 매우 특이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전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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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숨기우는 일에 대하여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결론인가? 아까 이야기하기를 모든 문제는 어디에 압축이 되어있다고 했는가? 3장에 되어 있다고 했다. 3장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세계 역사에 개입시킬 때, 하나님이라고 하는 요소를 고려할 때에 어떤 결고가 초개되는가하면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 만사를 그 때에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는것이다. 우리 눈에는 모든 것이 허무하고 궁극적 의미가 발견되지 않아서 우리가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지만 우리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개관적인 사실로 하나님께서 만사를 그 때에 따라 의미있게 다스린다는것이 존재한다. 앞서서 이 앞에 나오는 전도서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가? 어디를 둘어봐도 자꾸 한계에 부딛히는 것이다. 굴레에 부딛힌다.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게하는 틀들, 한계에 부딛히는데 이것이 바로 전도자로 하여금 삶이 의미가 없다고 고백하는 근본원인이었다. 그런데 2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모든 한계의 근원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 앞에 이야기를 했던 그 흐름을 따른다면 세계 모든 것의 한계의 궁극적인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가 참으로 해아래 모든 역사를,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3장에서 하나님께서 만사를 그 뜻대로 다스리신다고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 우리에게는 허무하게 느끼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는 의미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한계인 하나님이란 존재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허무를 느끼게 하는 그런 분이 실제로는 모든 것을 의미있게 하시는 분이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의 의미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미를 발견하게 하셨는가? 못하게 하셨다. 사람에게 적어도 이 땅에서는 납득하지 못하고 영혼을 사모하게 하는 마음까지 애타게 하시고 깨달아 알 수 없게 하셨다. 바로 우리 삶을 의미있게 하고 의미를 밝혀주고 선명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알 수가 없다.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가 객관적으로 우리 삶을 의미잇게 하는 것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결구 우리 삶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허무를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행하시지만 그 일의 시종을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이것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체 그렇게 지낼 수 밖에 없다.
둘째,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통치자이고 그분이 그의 뜻대로 모든 것을 전담하신다. 그럼 행위자로서 인간이 설자리가 없다. 인간이 무엇인가? 그는 꼭두각시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그는 과연 자기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인가? 그런 자기 삶에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온다.
세째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세계가 이모양이냐? 이렇게 의와 불의의 질서가 뒤바껴 있는가?
네째 인간은 왜 짐승이나 개같이 흑으로 돌아가고 마는가?
이 4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 이후의 내용은 이 네가지 문제를 구체적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이 네가지 의문, 문제제기를 기억하고 마지막 결론을 보고 이 답의 실마리를 준다고 생각해 봅시다.
전도자는 이것이 전부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가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해야할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계명을 지켜야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본질을 밝히는 말씀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그를 경외해야할 위치에 있다, 그가 명하시는 것을 행해야할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 그의 삶의 내용이다.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할 자로 말씀한 것은 전도자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분이요 너는 땅위에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도저히 해소할 수없는 무한한 질적 거리에 대해서 바로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외한다고 하는 것이 단순한 맹목적인 순종, 기계적인 순종은 아니다. 특별히 계명을 지킨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간 외에 비영적인 물질적 대상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명하신다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계명이란 말은 명령이란 말인데 명령하신다는 말은 인간과 관계에서 특별한 의미르 갖는다. 특별히 창2장에서 명령하시는 자로서의 하나님과 그 명령에 순종해야할 인간과의 관계라고 할까 관계의 특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기계적으로 순종하게 되어 있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은 sollen이지 mussen(must)이 아니다. 당연히 해야할 무엇이지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해야 된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게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순종의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당연이라는 것은 내가 해야할 것이고 당위 아래 있는 자가 그 결심과 의지로 하는 그런 형식 아래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면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이 당위의 의미를 갖는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유와 같은 절대적인 자유는 아니라도 해도 모종의 자유가 있다.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의 결단에 따라서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짧막한 말 안에 3장에서 전도자가 제기하였던 그 의미,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 아래 있는 자로서 인간의 위치가 무엇이냐 꼭두각시냐? 인간의 자유를 마련해주는 대답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명령, 미쪼타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이 명령이 모세에게 계시된 계명, 율법과 뗄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 내지 요구, 이것은 이스라엘이 모르는가? 아는가? 안다. 그들에게 계시되었다. 계시되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깊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사색하고 자신의 역사를 반추하고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보이신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지적 능력으로는 도저히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자기가 깨달아 만들어낼 수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반드시 계시되게 되어 있다. 그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경우 성경과 비슷한 윤리 의식, 규범을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로마서 보면 마음에 새긴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본성에 심어두셨다고 한다. 명분화된 형태로가 아니라 그 성품으로 새겨놓았는데 타락한 후에는 이 성품이 변하여서 발견될 때는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간의 윤리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본성에 심긴 율법의 흔적이요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전도자가 절망하였던 문제, 하나님께서 만사를 때에 따라 의미있게 다스리시지만 내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느냐 하는 것, 참으로 나로서는 그것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계시하여 주셨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한것은 아니라도 적어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미있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것을 밝히셨다. 계명뿐 아니라 그의 때에 대해서도 많이 밝혀주셨다. 앞으로 어떻게 행하리라는 것을 밝히셨다. 우리는 역사의 종국을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키라 이것이 인간이란 존재이다. 왜 이렇게 행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를 선악간에 숨겨놓은 것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자가 마지막으로 가장 낙심하였던 문제가 무엇인가? 선악의 질서의 전도였다. 선악간의 보응이 제대로 안되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앞에서도 전도자는 이 문제가 혹시 미래에는 해결될 수 있을것인가 기대했는데 안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때의 무용성을 말했다. 그런데 그런 결론을 다 내려논 다음에 또 그것을 주장한다면 그때 내린 결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보았으나 아무것이 없더라는 것을 뒤집을만한 그 무엇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 왜 전도자가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의 모습, 현실은 이렇게 부조리할지라도 혹시 미래에는 다른게 있지 않을까? 전도된 질서가 바로 회복되지 않을까? 하나님의 때에 대한 기대를 가졌지만 결국 아니라고 했다.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한번 돌이켜 보세요. 지금 현재의 모습에 대한 허무감, 미래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 그런데 왜 전도자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 낙심하고 말았는가?끝까지 마지막에 인간의 죽음을 말하면서 육은 흙으로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허무하고 허무하다고 하였는가? 미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게 무엇인가? 종국이다. 그런데 전도자는 우리 삶의 종국으로 무엇으로 잡았는가? 육신의 죽음이다. 우리의 종국을 육적 죽음으로 잡으면 절대로 종국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이것을 종국으로 처리해버리는 것은 어떤 전제 때문인가? 육신의 종국 이후의 삶에 대해서 무의미한 날로 생각하는 전제 때문이다. 전도자는 이런 전제를 다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다 깔고 모든 것이 허무하고 허무하다고 하는 진의가 무엇이냐?우리가 우리의 존재의 종국을 육신의 종국으로 확정짓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소망과 기대를 버릴 때에는 우리는 삶에서 결코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헛되가는 고백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으로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면 우리의 종국을 육신의 죽음 이후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육신의 죽음이 종국이므로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하고서 마지막에 선악간에 심판할 것이라고 한것이 바로 이것을 깔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우리의 생이 금생뿐이면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한 것과 같다. 전도자의 표현은 직설적이지 않고 우회적이지만 전도자는 해아래 우리 존재ㄸ의 의미, 해아래서의 우리의 삶이 아무리 발견하려고 해도 발견할 수 없다. 그 의미를 발견하려면 어떠게 해야 하는가? 첫재는 해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의 의미는 하나님의 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해아래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이 땅을 초월하는 하나님에게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해아래서의 것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애래 것을 넘어서 있는 하나니을 발견해야 한다. 두번째는 해아래서 의미있으려면 해아래 넘어 있는 어떤 것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질서안에 갇혀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모든 숨기운 것이 밝히 드러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전도자는 우리의 시선이 해아래 것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해아래서 허무를 발견할 수 밖에 없다.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해아래의 삶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허무를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밝힘으로 해아래서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에게서 발견되며 우리의 육신의 죽음을 넘어서 연결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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