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 1~26절은 네 개의 단락으로 구분된다.1 즉 (1) 1~10절, (2) 11~13절, (3) 14~21절, (4) 22~26절이다. 첫 번째 단락은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두 번째 단락은 그 후 달마누다 지역에서 있었던 바리새인과의 논쟁을,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은 선상 중 배 안에서 누룩에 대한 말씀을, 네 번째 단락은 벳새다에서 한 소경의 눈을 고치신 사건을 각각 알려준다.
칠병이삼어와 오병이어(1∼10절)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4천 명을 먹이신 이 사건은 사실 앞의 ‘오병이어’의 사건(6:34~43),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사건에 비하면 다소 작은 것이라 그렇게 유명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2 그렇지만 이 사건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함께 다루고 있는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 두 사건3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가진다.
1) 우선 적은 떡과 물고기로 큰 기적, 즉 많은 이들을 먹인 것은 같다. 그런데 그 수는 차이가 있다. 오병이어로 남자 오천 명인 반면, 칠병이삼어로 사천 명이다. 재료는 다소 늘어난 반면 배불리 먹게 된 사람들은 20퍼센트 이상 줄었다. 흥미롭게도 먹다 남긴 음식도 오병이어의 때는 열두 광주리가 남았는데 이번에는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 앞의 사건과 비교해서 보면 이번은 덜 남은 것이다. 두 사건 모두 특별한 기적의 사건이긴 하지만, 칠병이삼어는 이미 오병이어에 뒤이어 일어난 사건이며 또한 그 규모가 다소 줄어든 사건인 셈이다.
2) 앞의 오병이어 사건은 날이 저물어 가자 제자들이 나서서 사람들로 나가 뭔가 사먹도록 주님께 제안함으로 시작된다(6:36).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하셨는데 이에 제자들이 당황하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놀라운 사건을 일으킨 바 있다.
반면에 이번 사건은 조금 다른데, 주님께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그냥 보내면 길에서 지칠 것이라 말씀하는 것으로 이 사건이 일어난다. 제자들이 앞에선 사람들을 먹일 만한 분량의 떡을 구할 돈 2백 데나리온이 없음을 말하며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했다면 이번에는 어디에서도 그 많은 떡을 구할 수 없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말한다.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4절). 그들의 반응이 두 번 다 부정적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히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사건이 앞의 오병이어 사건에 비해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조금 적어진 것임을 감안해 볼 때, 이 사건에서의 제자들의 반응은 매우 아쉬운 것이었다. 비슷한 상황, 거의 똑같은 일이 반복됐는데도(또한 이 사건 전에 예수로 인한 적지 않은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있어왔던 때였는데도), 특히 더 축소된 사건임에도 이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놀랍다. 마가(4절)와 마태(15:33)는 이를 기록함으로써 제자들의 우둔함과 비신앙적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바리새인(11∼13절)
“바 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 부분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들은 바리새인이다. 당시의 신앙 결사체 멤버로 가장 경건한 종교적 습관을 가진 그룹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성직자 그룹인 제사장들과는 다른 평신도 집단으로서 그릇된 것과 죄된 것으로부터 분리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신앙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내적 신앙과 바른 신앙 자세보다는 신앙의 외적 형태와 형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위선적 신앙으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지적을 받았다.
이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표적을 구했다. 여기 11절에서 ‘힐난하다’(suzhtevw)4라는 말과 ‘시험하다’(peiravzw)5는 말이 합쳐져, 이들 바리새인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 뭐 대단한 표적이 있겠는가’라는 식으로 의심하고 부정하는, 그리고 다투려는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리새인들이 칠병이삼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제2의 오병이어 사건, 이 놀랍고 엄청난 사건 다음에 찾아왔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들이 그 기적의 현장에 없었다면 그들이 들은 소문을 믿지 못해 찾아온 것일 터이고, 그 자리에 일부라도 있었다면 그럴 리 없다는 불신감으로 재차 확인하려고 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랬다.
그런 데 주님은 이들에게 또 다시 그런 기적을 보이지 않겠다고 하신다. 표적은 뭔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보이는 표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으나 주님은 마음속 깊이 탄식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12절).
제자와 바리새인(14∼21절)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4 절 이하에 제자들과 관련된 사건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바로 전에 등장한 바리새인과 제자들은 서로 대조된다. 앞서 제자들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언급이 있었던 점(4절)을 상기하자. 그러나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분명 많이 다르다. 바리새인은 주님을 믿지 않았고 거절했으나 제자들은 주님을 믿었고 그래서 그를 전적으로 따라다닌 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도 부족한 면이 있었다. 어쩌면 바리새인의 문제가 그들에게도 작게나마 있었든지, 혹은 바리새인의 나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그것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경계하시는 부분(15절)에서 드러난다.
제자들이 그때까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충분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의 사역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사건은 같은 장(8장) 후반부(29절, 마 16:16 참고)에 등장한다. 이때까지는 주님을 제대로 고백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주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아직은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세주, 모든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 그 어떤 문제도 그분 앞에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 없는 분, 나를 위해 오신 능력의 그리스도이심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았고 체험했으면서도 또 새로운 문제가 나오면 여전히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족함을 제자들은 보였다(4절 참조).6
몇 절 지나면,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는 길에서 주님은 그들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들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셔서 받아내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주님이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절). 제자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이 고백을 얻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7
제 자들이 제대로 알지 못했던 두 번째 사실은 주님의 사역, 즉 사람을 살리는 사역과 관련이 있다. 칠병이삼어로 사천 명을 먹이실 때,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무리들에 대한 연민, 즉 사랑 때문이었다. 주님은 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인해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제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이 사랑의 마음과 열심이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님과 대비 되는 캐릭터가 된다.
물론 바리새인과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다. 다만, 바리새인의 나쁜 점을 조심해야 한다. 영향을 받아선 안된다. 이 두 그룹은 대조되면서 완전히 차별화돼야 했다. 반면 주님과 제자들은 대비적 관계(또한 수여자-수혜자 관계)가 형성된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뭔가 배워야 하고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한다.
소경 치유 사건
(22∼26절, 7:31∼37)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본 문의 칠병이삼어 사건 바로 앞 7장 31~37절에는 청각장애인을 고쳐주신 일이 있었다. 주님께서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에바다’ 하셨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고 마가는 기록했다.
본문의 칠병이삼어 사건 직후인 22절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벳새다에 이르셨을 때 시각장애인 한 사람을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 주님께서 그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는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어보신 후, 두 번째 안수하시자 장애인인 그 눈앞에 만물이 밝히 보였다고 했다.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의 귀와 입과 눈을 고치신 이 두 사건은 칠병이삼어의 사건과 그 이후의 장면들과 함께 어우러질 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8 귀의 이상을 고치자 듣기 시작했고 혀의 이상을 고치자 혀가 풀려 말하기 시작했다. 눈의 이상을 고치자 보이기 시작했다.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어떤 지식을 얻고 또한 나누는 가장 중요한 지각 및 의사전달 수단이다. 이 육체적인 문제를 고치신 사건은 본문과 관련해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주 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셨던 것은 그들의 진정한 눈이 뜨이고 귀가 들리게 되는 것이었다. 주님이 가르쳤던 말씀과 행하셨던 표적들을 통해 그들이 보고 듣고 그래서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9 바로 예수께서 누구신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입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었다. 보고 듣고 이해하고 말하고 행하는 일이 그들에게 필요했다.
어쩌면 이 장애인들을 고치실 때, 주님은 사실 육체적인 질병과 장애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일 뿐 아니라, 참으로 진리를 보고 듣게 하시며 고백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인지 모른다. 제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해와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아예 듣고자 하지 않았으며 보고자 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들의 혀가 굳어 있었다고 한다면, 제자들은 그 눈이 뜨여야 했고 귀가 들려야 했으며 그들의 혀가 풀어져야 했다. 그래서 주님을 바로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 러므로 칠병이삼어의 사건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육 목적의 사건이기도 했다. 적어도 두 가지를 가르치신 사건이다. 하나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려주는 사건이다. 그분 앞에 풀지 못할 그 어떤 문제라도 있는가. 그분은 또 어떻게 사람과 다른가. 그분은 어떤 능력을 가지셨는가. 대체 그분은 과연 누구이신가.
두 번째로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을 알려주는 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주님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는지, 그분이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그분의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제자들의 고백
결 국 제자들은 주님을 알게 됐고 그래서 고백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10 언제 그들의 눈과 귀가 열렸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눈이 이제 열려 있고 그들이 진리를 귀로 들었으며 이제 혀로 그것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눈과 귀는 주님을 보고 듣기 위해 존재했고, 그들의 혀는 주님을 고백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졌던 것이다.11
본문의 핵심과 적용 포인트
본 문의 초점은 먼저 예수께서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분은 어떤 일을 하셨고 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에 맞춰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과 대조되는 사람들로서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제자들이 어떻게 이들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되는지 보여준다.
주님은 칠병이삼어 사건을 통해 그분의 신적인 능력을 제자들에게 보이셨고 바리새인과의 논쟁과 그들에 대한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주셨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시각 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은 7장의 청각 장애인을 고치신 사건과 더불어 앞의 두 초점(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과 바리새인의 문제)을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크게 세 개로 나뉠 수 있다. (1) 칠병이삼어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관심과 제자들의 부족한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능력이 강조되는 부분(1~10절)이다. (2) 그리고 그리스도와 바리새인, 그리스도와 제자의 대화를 통해 바리새인의 정체를 드러내고 제자들의 그릇된 것에 대해 경계하게 하는 부분(11~21절)이다. (3) 마지막으로 시각 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으로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그분의 사랑, 그리고 예수님만이 육적-영적 눈을 참으로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과 사실상 눈이 먼 바리새인들12을 간접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는 부분(22~26절)이다.
이 세 부분은 이런 점들이 핵심 포인트가 된다. 설교나 성경연구를 통해 바로 그런 점들이 드러나야 한다. 만일 1~26절의 전체적인 의미를 살피려 한다면,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신앙이 점차 깨어가는 과정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에 경계 말씀이 주 포인트가 될 것이다. 특히 그 후의 본문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헌신 부분(사실상의 8장의 클라이맥스)을 연계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적용할 부분을 굳이 따로 강조한다면, 그것은 (1)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는가, (2)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심이 있는가, (3) 바리새인과 같은 그릇된 태도는 없는가, (4)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듣고, 말할 것을 말하는가 등이 될 것이다.
주註
1. MA Beavis 구조에 의하면 9개의 Narrative-Teaching 구조 가운데 중심(7:24∼9:29)에 위치한
narrative ‘revelations’에 속한 것으로 그 중요성이 있다. M A Beavis, The Mark’s Audience: The
Literary and Social Setting of Mark 4:11∼12, JSNT 33, Sheffield: JSOT Press, 1989: 163∼
164. 이에 대해 E. S-B Shim,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According to Mark: A Narrative
Reading, D. Th. Dissertation, Stellenbosch, 1994, pp. 102∼103을 보라.
2. 실제로 마가와 함께 마태(15:32∼39)는 이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누가나 요한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
이 마14:13∼21, 막 6:32∼44, 눅 9:10∼17, 요 6:1∼13 등 네 복음서 모두에 출현하는 오병이어 사
건과 다른 점이다.
3. ‘오병이어’와 짝을 맞추기 위해 이 사건을 ‘칠병이삼어’라 하자. Kilgallen은 이 두 사건을 비교하면서, 숫
자 5(다섯 개의 떡, 오천 명의 5)는 이스라엘을, 숫자 7(일곱 개의 떡과 남은 일곱 광주리의 떡)은 이방인
을 뜻하는 심볼이라 말한다. 그래서 칠병이삼어의 사건은 숫자 7의 사용으로 인해 앞의 이스라엘을 위한
기적에 이방인을 위한 기적으로 보충하는 사건이라는 논리를 폈다. John J Kilgallen, A New
Testament Guide to the Holy Land, Chicago: Loyola Press, 1998, p. 43. 그런데 문제는 오병이
어의 물고기 두 마리의 숫자 2, 칠병이삼어의 4,000명과 관
련된 숫자 4 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그
런 측면에서 보충적인 사건이라기 보다는 허기진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동기와 제자들을 철저히 가르치려는
교육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사건이라 봐야 옳다. 다만, 8장 사
건은 그 지역적 특성(데가볼리 지경과 가까운 갈릴리 호수 부
근으로 요단강 우편 지역, 7:31)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주 대
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4. Louw-Nida에 의하면 이 단어는 뭔가 해결점을 찾고자 하는
그런 목적이 없이 단지 의견의 다른 점을 강하게 표현하며 말
다툼하려는 행위를 뜻한다. Johannes Louw & Eugene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2 Vols, Bible Society of
South Africa, 33.440.
5. Martin은 U W Mauser를 의지하여 마가복음에서 반복된
주제로서 예수의 시험과 이때의 ‘시험하다’라는 용어의 나쁜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Ralph Martin, Mark Evangelist
and Theologian, Grand Rapids: Zondervan, 1972,
pp. 168∼169.
6. 제자들에게는 배고픈 4천 명에 대한 대책이 없는 것이다. 주
님이 이곳에 계신대도 그랬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가졌던 것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던 반면, 제
자들이 주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기대하지 못했던 것은 그 분
에 대한 믿음과 이해와 지식이 부족했던 것임을 뜻할 수 있
다.
7. 물론 이런 고백을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요구하신 것은 주님
께서 십자가의 사건으로 향해 나아가시기 위한 본격적인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제자들
은 주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과 함께 그 분이 누구신지 확실히 인식하게 된 시점이 된다. 따라서 이 사건을
마가복음의 전환점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예를 들어, Brevard S Childs, The New Testament as
Canon: An Introduct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p. 89. Guelich는 마가복음을 크게 두 파트
로 나누고 8:27이하를 그 두 번째 부분으로 본다. R A Guelich, ‘Mark, Gospel of’,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Downers Grove, Illinois: IVP, p. 516∼517. 그런데 여기서 앞의 부분들
(8:27 이전 사건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이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8. Williams는 두 사건이 서로 병행적 관계이며 모두 영적인 치유, 즉 영적인 깨달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는 점을 적절하게 강조한다. Joel F Williams, Other Followers of Jesus: Minor Characters as
Major Figures in Mark’s Gospel, JSNTS 102, Sheffield: JSOT Press, 1994, pp. 121∼124,
127∼130. 시각 장애인의 치유를 영적인 시각 장애의 치유로 연계시킨 주장은 Elizabeth S Malbon,
‘Narrative Criticism: How Does the Story Mean’, in Janice C Anderson and Stephen D
Moore (eds), Mark and Method: New Approaches Biblical Studie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p. 47에서도 보인다. 그런데 Malbon은 이 사
건을 제자들과의 대화(14∼21절) 부분과 연결하지 않고 눈
먼 자 치유의 두 단계를 베드로의 고백(성공)과 책망 받음(실
패)과 연계시켰다. 이것은 바른 이해라 할 수 없다. 시각 장애
인은 두 단계를 거쳐 더 나아진 반면, 베드로는 두 번째 단계
에선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 보다는 처음 베드로의 고백과 책
망 받은 것을 첫 단계(불완전한 이해)로 그리고 예수의 변화
산 사건이나 부활 이후의 깨달음(온전한 이해)을 두 번째 단
계로 본 견해가 더 타당할 것이다. J F Williams, op. cit.,
pp. 131∼132를 참고하라.
9. 이런 이해는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해 경계를
주시는 말씀 가운데 특히 17∼18절에 ‘아직도 알지 못하며
(not percieve) 깨닫지 못하느냐(not understand)?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not see)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not hear)? 또 기억지 못하느
냐?’ 하신 부분과도 깊은 관계를 가진다. 이 말씀의 부분 다
음에 바로 나타난 사건이 시각 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임에 다
시 주목하자. 제자들은 육체적, 외적인 것을 ‘보고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건들의 영적, 내면적인 의미를 ‘보고 듣지’ 못
한 것이다. Mitzi Minor, The Spirituality of Mark,
Responding to God, Louisville: Westminstrer John
Knox Press, 1996, pp. 20∼21을 참조하라.
10. 마태(16:18∼19)에 의하면, 이 고백은 주님의 교회를 이 땅
에서 시작하는 계기로 쓰임 받은 고백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
도 제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적이 있긴 했다(마
14:33, 요1:41, 4:29, 6:69). 그러나 그 때는 주님 자신이
메시야 되심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을 꺼려하셨던 때로 상황이 조금 다르고 이 베드로의 고백과는 그 비
중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 Archibald T Robertson,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and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Vol 1,
Nashville: Broadman Press, pp. 334∼335.
11.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그의 뒤를 따르
는 삶으로 뒷받침되어야 했다.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 후에 바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
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31절)을 제자들에게 가
르치기 시작하시며 그들도 십자가를 지고 뒤따를 것을 요구하셨다(34∼36절).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주님과 그 복음에 대한 헌신은 함께 간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모델이 된다. 죽지 않고자 할 때,
남는 것이 없다. 고백에서 끝난 신앙은 없다. 고백은 삶을 뒤따르게 한다. 나의 눈을 바꾸고 삶의 목표를
바로 세우게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범위를 넘어가기 때문에 더 다루지는 않겠다.
12. 예수의 대적자들의 눈 먼 상태에 대해선, David Rhoads and Donald Michie, Mark asStory: An
Introduction to the Narrative of a Gospe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2, pp. 118∼119
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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