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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성경신학

보혜사 언약(신약성경의 언약 사상 2)(김동수)

by 금빛돌 2015. 3. 21.

2015년 2월호

언약(covenant)은 두 주체간의 약속이다. 고대 사회에서 언약을 맺은 당사자는 그 언약을 지킬 책임을 지게 되어 있었다. 언약의 한 당사자였던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셨는데 다른 상대자인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렘 31:31-34).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백성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언약을 지킬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신약에는 피 언약(마 26:26-29), 재림 언약(요 14:2-3), 보혜사 약속(요 14:16 등) 등이 나온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대표적인 언약은 보혜사 파송 약속이다. 이것은 언약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약속이다. 보혜사 파송을 받기 위해서 제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은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신다. 두 주체 중 한 주체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파괴되는 상호 계약이 아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약속이다. 요한복음 고별 설교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가룟 유다는 제외)에게 이 약속을 주신다. 이들은 사도 무리라기보다는 제자들을 대표한다. 그래서 이 약속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후에 제자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언약의 배경
먼저, 보혜사 약속이 주어진 요한복음 내러티브의 정황은 고별 설교다. 고별 설교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신다는 것이다. 곧 예수님의 죽음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가는 곳을 “내가 가는 곳”(13:33, 36), “내 아버지 집”(14:2), 제자들을 위한 “거처”(14:3)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죽는 것을 “(아버지께) 가다”(14:28; 16:5) 혹은 “떠나가다”(16:7)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도 몰랐고 부활도 예상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당시에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근심이 가득했다. 보혜사 약속은 근심에 싸인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 주신 약속이다. 예수님 부재가 그들을 고아처럼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14:18), 보혜사가 오심으로 오히려 그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바다(16:7).
둘째, 요한복음이 기록됐을 1세기 말 당시의 요한 공동체의 외적인 주요 정황은 불신자들의 박해였다. 그래서 보혜사 본문에는 이 두 가지 주제가 같이 엮여 있다. 보혜사는 세상의 박해 속에서 제자들의 편이 되어 활동하는 성령이다. 예수님이 세상과 대립하듯이, 보혜사는 세상과 대립한다. 세상은 보혜사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14:17), 보혜사는 세상을 꾸짖게 될 것이다(16:8). 세상은 계속해서 제자 무리를 박해할 것이지만, 제자 무리는 보혜사와 연대해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예수님이 세상과 싸워서 승리한 상태다(16:33). 예수님 부재 시에 예수님의 역할을 하는 보혜사의 도움을 받으면 제자들은 환난과 핍박을 이겨 나갈 수 있다.
셋째, 보혜사의 중요한 교회 내적 정황은 보혜사의 활동 시기가 교회 시대라는 것과 연관돼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 시대와 재림 사이에 교회 시대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보혜사가 활동하는 시기다. 보혜사는 예수님이 떠나가셔야만 오고, 예수님 혹은 예수님의 요청에 의해 하나님이 파송하신다. 그렇다면 요한 공동체가 예수님 재림을 급박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 재림의 급박성이 다소 완화된 1세기 말에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을 감안하면 보혜사 본문은 재림의 지체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 된다. 교회 시대에는 보혜사가 제자들의 인도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 재림까지는 보혜사의 인도를 충실히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언약의 내용
예수님은 보혜사를 제자 무리에게 보내 줄 것을 약속하시는데 이것은  다섯 묶음의 보혜사 본문(14:16-17; 14:26; 15:26; 16:7-11; 16:12-15)에 나타나 있다. 우선 보혜사 약속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보혜사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보혜사의 헬라어 단어는 ‘파라클레토스’다. 이 단어는 칠십인역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유대교 배경에서 이 단어의 뜻을 알기는 어렵다. 일반 헬라어에서는 법정 용어로 변호사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요한1서 2:1에서 예수님은 하늘 위 법정에서 신자들을 위한 변호사 역할을 하신다. 요한복음 16:7-11에서는 세상을 고소하는 검사의 역할이 보혜사에게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 외의 본문에서는 이 단어의 법정적 의미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어원적으로 살펴볼 때 이 단어는 수동형으로 ‘옆에 있는 분, 도우미’ 등을 의미하고, 능동형으로 ‘위로하는 사람, 상담자’ 등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의 보혜사 본문에는 보혜사의 수동형 의미와 능동형 의미가 모두 통한다.
‘파라클레토스’는 신약성경에서 요한 문헌에만, 그것도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와 요한1서에 한 번만 나오기 때문에 다른 문헌에서의 신학적 용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보혜사 본문에서 말하는 보혜사의 기능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요한이 말하고자 했던 보혜사의 기능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혜사를 보내 주신 약속의 구체적 내용이 된다. 보혜사의 기능은 모두 제자들과 관계된다.

1. 내주와 동행(14:16-1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날 것을 말씀하시면서(13:33) 동시에 그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14:18). 그리고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14:19)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보면 이 구절은 조금 있다가 예수님이 죽으시고, 곧 부활하실 것을 말하는 구절이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통해서 볼 때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기보다는 세상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혜사(14:17)의 도래를 말한다.
보혜사의 도래가 제자들에게 주는 것은 “너희와 함께 있게” 하고(16절),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17절)이다. 보혜사는 신자 안에 거하고 신자와 함께한다. 이것은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두는 것과 반대된다. 보혜사라는 헬라어 단어를 수동형으로 파자하면 ‘옆에 불리어 있는 분’이다. 이에 대한 우리말의 적절한 표현은 ‘동행’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동행이셨듯이, 예수님 부재 시에는 성령이 동행이 된다는 것이다. 이 동행 기능이야말로 다음에 나오는 모든 성령의 기능에 기초다.
16절에서는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로 표현하는데, 이 말에는 예수님이 원조 보혜사요, 성령은 예수님과 똑같은 역할을 하는 ‘또 한 분의’ 보혜사라는 말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과 동행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그분과 같이 다니지 않는 것이다(6:66). 교회 시대에 성령과 동행한다는 것은 계속 예수님의 제자로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성령이 제자들 안에 거한다(17절)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연대해서 자신의 본질을 형성하듯이, 이제 교회 시대에는 제자들이 성령과 연대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 없는 제자들은 의미 없는 무리가 되듯이, 교회 시대에 보혜사 없는 교회는 의미 없는 집단이 된다. 

2. 올바로 기억하게 함(14:26)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그들의 선생이셨다(14:25).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치셨다. 표적을 일으키는 행위로, 그 표적의 의미를 알려 주는 가르침으로 제자들의 선생님 역할을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가심으로 부재가 발생한다. 이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자신과 똑같은 교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다.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교회 시대에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는 분이다. 여기서 보혜사의 가르침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말을 다시 떠올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건물 성전으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성령이 온 뒤에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해( “기억하고”) 그것이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고, 그 말씀을 믿게 됐다(2:22).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요한은 ‘기억하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올바로 기억하게 하는 것이 보혜사의 역사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사건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은 것도 “생각났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12:16), 이렇게 깨달은 것도 예수님 부활 후에 일어난 일이기에 보혜사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보혜사의 역할은 성경 기록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그들에게만 주어진 기능이었는가? 기억하다는 것이 단순한 기억력의 복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적용에 대한 것이라면, 이것은 1세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일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이 떠난 뒤에 불신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16:4)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사람들이 박해를 당할 때, 그런 박해가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선 고난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내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가 된다고까지 말하는 상황에서(16:2)어떻게 이 박해가 하나님 편에 선 고난이라는 해석을 해낼 수 있는가?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의 정황으로 볼 때 그런 기억, 곧 해석을 신자 안에서 해 줄 분은 바로 보혜사다. 그래서 이런 보혜사의 역할은 초기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필요하다.

3. 증언(15:26)
본문에 기록된 보혜사의 기능은 예수님의 정당하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앞뒤 문맥을 보면 세상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박해하는 상황이다(15:18-16:4). 그 박해는 단순히 제자들의 육체에 해를 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오히려 정당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선언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유대법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요(신 21:23), 로마법에 따르면 십자가형에 처형된 사람은 중죄인이라는 사실과 이렇게 믿는 자들이 모든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 무리는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는지가 본문의 배경이다. 이때 보혜사가 하는 역할은 예수님이 정당하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보혜사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며 그것을 성취한 분인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보혜사는 이것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4. 책망(16:7-11)
본문에 제시된 보혜사의 기능은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다.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보혜사와 세상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말하는 요한복음 14:17과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말하는 세상을 책망하고, 세상의 잘못된 것을 드러내는 것은 제자들의 양심 속에서 보혜사가 하는 일이다. 이것은 세상과 대면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보는 데 반해, 보혜사는 이것이 죄라는 것을 드러낸다. 세상은 예수님이 떠나가신 것, 곧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 정당한 형벌이라고 보는 반면, 보혜사는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룬 일이라고 알려 준다(19:30). 또 세상은 예수님이 심판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보혜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일이 바로 세상의 임금 사탄이 심판받은 일이라고 가르쳐 준다. 여기에 제시된 보혜사의 기능은 앞에서 말한 보혜사의 증언의 기능(15:26)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5. 인도(16:12-15)
지금까지 보혜사의 기능으로 제시된 것들은 제자들과 동행,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함, 예수님이 정당하심을 증언함, 제자들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올바로 깨닫게 함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올바로 기억하게 해 주는 것과 그분이 행하신 일이 정당하다고 제자들에게 해석해 주는 일이다. 마지막 보혜사 본문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예수님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12절)고 말씀하신다.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하는 이는 누구인가? 뒤에 나오는 구절을 통해서 볼 때 그는 보혜사다.
보혜사의 기능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아울러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3절)는 말까지 포함된다. 이 기능은 지금까지 제시된 보혜사의 기능에서 진보된 것이다. 보혜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해석할 뿐 아니라 미래에 될 일을 제자들에게 알려 준다. 이는 단순히 미래 일을 알려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혜사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되뇌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 맞는 말씀을 창조적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성령의 역할을 단순히 말씀을 조명하는 기능에만 한정하는 것을 넘어선다.
보혜사는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보수적인 역할을 한다. 동시에 보혜사는 새로운 상황에 항상 적절한 말을 하는 기능도 가졌다(13절). 보혜사가 장래 일을 알리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새로운 상황에 맞는 말로 제자들을 인도하는 기능을 말한다.
언약의 의미와 교훈

1. 성령 보혜사는 예수님 부재 시 지상에서 예수님의 역할을 하는 분
예수님이 보혜사에 대한 약속을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근심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16:33). 예수님은 제자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혹은 부모 없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다(14:18). 이 약속의 총체는 한마디로 자신과 똑같은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보혜사의 역할은 모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역할이었다. 예수님 부재 시에는 제2의 보혜사인 성령 보혜사가 그 일을 담당할 것이다. 예수님이 옆에 계실 때는, 마치 부모와 함께 있는 어린아이가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듯이, 이제 성령이 함께 있으니 제자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보혜사가 오면 더 나은 점도 말씀하신다. 자신은 스스로 하나의 육체로 제한돼 왔기 때문에 활동 범위가 좁았지만, 보혜사 성령은 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 각자에게 동시에 시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는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16:7-8).
심지어 예수님은 제자들이 나중에 자신이 한 일보다 더 큰일을 한다고까지 말씀하신다(14:12). 과장법이 사용됐다고 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사명을 주었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명을 주셨고, 그런 일은 성령을 통해서 수행될 것이기 때문에 “더 큰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성령 보혜사는 교회 시대에 창조적으로 제자들을 인도하는 분
요한복음에서 제시된 보혜사 성령을 얼굴로 비유한다면 어떤 얼굴일까?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만 증언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수줍은 새색시’의 얼굴인가? 그렇다. 그런 얼굴이 여기에 분명히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고 그것을 위해 활동하셨듯이, 보혜사는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이 정당하심을 드러내고, 그분의 말씀을 올바로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본문에 제시된 보혜사의 역할은 그 이상이다. 보혜사는 제자들이 새로운 상황에서 맞닥뜨리는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 과거에 한 말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혜를 제공하는 창조적인 분으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의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어 새로운 곳에 가서 전도하게 하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영적 헬스 트레이너’(행 1:8)와 닮았다.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을 내몰아 복음을 전하도록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제시된 보혜사의 역할은 요한1서에 나오는 기름 부음의 역할에서 계속된다. 보혜사가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진리를 알게 하듯이(14:17; 16:13), 기름 부음을 받은 제자는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다 알게 된다(요일 2:20). 예수님이 파송해서 제자들은 보혜사를 받고(14:16), 보혜사는 제자들 안에 거하며(14:16-17), 제자들을 가르치고(14:26), 진리의 영이듯이(14:17; 15:26), 기름 부음도 제자들 안에 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며 참되다(요일 2:27). 물론, 여기서 기름 부음도 말씀과 상관없는 성령의 역사라기보다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게 해 주는 분일 뿐 아니라 그것을 창조적으로 해석해서 신자들이 새로운 상황에서 전진해 나가도록 인도해 주는 분이다.

설교의 적용점
보혜사 언약에 대해서 두 가지 주안점을 두어 말하면 좋겠다. 첫째, 성령은 예수님이 공적 사역에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과 교회 시대에 똑같은 역할을 지금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보혜사가 신자들과 동행한다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마누엘’하셨던 예수님(마 1:23)이 제자들에게 주신 복을 모든 개별 신자에게 주는 분이다.
둘째, 보혜사는 예수님이 정당하심을 증언하고, 그분의 말을 올바르게 해석해 주는 분이라는 면에서 말씀에 대한 좋은 교사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창조적으로 한다는 면에서 진보적 역할도 한다. 성령의 역사를 예수님의 말씀과 별 상관없이 전쟁에 대한 예언 등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보혜사의 역할을 잘못 본 것이고, 또한 보혜사의 역할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해석자로 제한해 “장래 일”을 말하는 보혜사의 창조적 역할을 제한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보혜사는 보수적 역할과 진보적 역할을 모두 가지고 있다. 

 

:: 필자 정보 - 김동수
평택대학교 신약학 교수. 케임브리지대학교(Ph. D.). 저서로 《예수님이 꿈꾼 교회》, 《누가신학 렌즈로 본 사도행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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