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적 신학/성경신학

바울서신강의2(김세윤)

by 금빛돌 2014. 11. 28.

 

바울서신 // 5

 

 

 

고린도전후서 1

 

 

 

 

고린도는, 캐사르에 의해서 BC 44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재건되었는데, 이미 27년 부터는 아마야 지역 (그리스 남쪽과 헬로폰네스 합한)의 행정수도가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총독이 주재하던 곳이었습니다. 고대 고린도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재건된 1C의 신약시대의 고린도는 무역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번성했고, 여러 종족들이 모이는 항구도시로서 여러 종족들이 가져온 혼합주의가 성행했었습니다. 특히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신전에서 성창(聖娼)이 번성을 했었습니다. 더불어 성적인 타락이 극심하여서 고린도인들 같이 산다라는 표현이란 고대사에서 성적으로 아주 문란하다는 격언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부유한 도시로서 철학과 수사학의 학자들이 모여들고 그들을 중심으로한 학교들이 번성을 하고, 동시에 이 도시의 시민들은 지적인 자부심이 있었고 특히 수사학의 큰 가치를 두어서 지혜롭게 말하고 아름답게 말하는 것을 높게 생각을 하여서, 아까 고린도인들과 같이 산다라는 격언과 마찬가지로 고린도인들의 말이라는 격언적 표현이 있어서 매우 설득력있고 달콤하게 수사학적으로 말을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아까 이야기 한대로 로마인들, 헬라인들, 또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 섞이면서 종교적 혼합주의가 성행하고 종교적 의식이 아주 몰락하고 타락하는 형태를 보였는데 그런 가운데 상당히 큰 유대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1. 고린도 교회의 설립 배경

바울의 고린도에 대한 첫 선교는 사도행전 18장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제 2차 선교여행중 AD 50-51년의 겨울에 바울은 고린도에 당도하여서 아주 예외적으로 1년반 정도를 머물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바울이 원래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사람인데, AD 49년에 로마의 Claudius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곧 유대인들을 로마시에서 추방하는 중요한 칙령이 내려졌었습니다. 이 칙령에 의해 로마로부터 고린도에 와서 정착한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집에서 취직하여서 일하면서 --그들의 천막 만드는 사업에 동참하면서-- 자기 손으로 밥벌이를 해가면서 유대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고린도후서에서 여러번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한 푼도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손으로 벌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말합니다. 이 유대 회당에서 바울은 상당수의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성공은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그리스도인이 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하나였던 유스도의 집으로 교회를 세웁니다. 이렇게 해서 고린도 교회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AD 517월에 Lucius Junius Gallio가 고린도의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을 했습니다. 이는 로마 역사에서 정확한 날짜인 AD 517월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불법적 종교를 퍼뜨린다고 갈리오에게 송사했습니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들의 고소를 기각했습니다. 이 갈리오의 기각은 바울이 선포하는 message가 당시 로마법에 의해서 적어도 관용되었던 유대교의 일종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과 같았습니다. 당시 유대교가 이른바 religio licita(합법적인 종교)라고 최근 많은 학자들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유대 회당에 유대인들이 바울이 유대교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교의 완성인 메시야 예수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바울이 주장했습니다. 이를 인정치 않고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갈리오에게 송사를 했었으나, 당시 유대교는 합법적인 종교 religio licita로 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만약에 바울이 선포하는 기독교가 유대교인으로 부터 이단으로 낙인 찍힌 것이 로마 행정관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유대교는 별개의 종교이며, religio licita라는 합법성을 더이상 부여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과연 유대교가 당시에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 되었었는가 하는 데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아마도 정식으로 인정은 받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고대 헬라인들이 유대인과 한 경험으로 그리고 로마인 스스로가 유대인과 함께 하는 경험에서 유대인들의 그들의 종교를 되도록이면 간섭하지 않고 놓아주는 것이 좋다고 하는 지혜를 얻어서 유대 교인들에게 법적인 관용을 많이 베풀었을 따름이지 특별히 합법적인 종교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령 유대인들이 군대를 가지 않고 황제 숭배 참여에 요구되지 않는 등의 여러 특권을 허락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선포하는 기독교가 통상의 유대교가 아니라면 유대인들에게 허용된 그런 특권을 기독교인들은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송사를 하였는데 갈리오도 그 송사를 거절하였다는 것은, 갈리오가 볼 때는 기독교는 유대교의 완성이므로 일종의 유대교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 갈리오의 판결은 후에 로마의 관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중요한 선례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례는 곧 무너집니다. 64년 무렵에 Nero의 핍박과 그 이후의 로마의 집정관들은 점차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독립적인 별개의 종교로 보기 시작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1C , 90년대에는 당시 황제에게 Pliny는 보고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선한 일을 하자고 서로 교제를 하고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이런 식의 종교 모임을 하는데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겠습니까? 죄를 졌다고 고소를 해서 잡아서 문초를 해보니 그런 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으니 이 새로운 종교라고 하고 대충 혼을 내어서 석방을 하였는데 다음부터는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라고 하드리안 황제에게 충고를 구하는 편지를 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로마의 원칙이 세워지지는 않은듯 합니다. 네로의 협박은 원칙적인 핍박은 아니였던 것입니다. 지방의 행정관에게 상당히 많은 재량권이 부여되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갈리오가 기독교의 대표되는 바울을 무죄선언했다는 것은 적어도 아가야 지방, 또 이웃 지방에 선례를 남겼을 것입니다. 그후 바울은 로마 관리들의 간섭 없이 계속해서 선교사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AD 52년 봄 쯤에 바울은 에베소를 향하여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2. 고린도 교회의 일반적인 성격

고린도 교회의 대부분은 아마도 하층 이방인 계급 출신들이었던 같습니다. 고전 1:26-29절에서 바울이 이를 지적합니다. 그러나 간혹 상층 부유층 가정이 더러 있었다는 것도 고전 10:27, 11:17-34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자들은 성만찬을 할 때에 음식을 가져와서 잔뜩 먹고 깊이 술에 취해 있다고, 반면에 노예들이 이때 무슨 떡 고물이라도 얻어 먹을까하고 찾아왔으나 부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술에 취해 곤드레 만드레한 상태만 되는, 고린도 예배가 혼란케되고 요즘 표현으로 위화감이 조성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의 여러 문제중의 하나였습니다. 계층간의 위화감이. 그러므로 대부분이 하층 노예 출신 이방인들 같은데 더러 상층 가정도 있고 또한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의 이방적 환경과 고린도 그리스도인의 이방인적 과거는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습니다. 성 도덕의 문란, 우상 숭배, 불신자들간의 교류 문제, 지혜와 지식 자랑 그리고 성령 열광주의등의 여러 문제들을 야기 시켰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모든 문제들의 뿌리는 아마도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옳지 않은 구원론과 성령 은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지 않았나! 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의 구원과 성령 은사가 왜 발생했는가? 그들의 헬라적인 이원론적인 사고방식 때문인듯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실현된 구원이 첫 열매로 주어지나, 그것의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은 이 구원의 첫 열매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때 주어질 구원의 완성에 대한 보증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영과 육의 이원론적 구조로 생각하도록 오랫동안 길들여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이와같은 시간론적인 이원론(지금은 이 세대 구원의 첫 열매를 받고, 그리스도 재림 때에 그 완성을 받는다는 시간적인 이원론)을 본질적인 이원론으로 번역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지금 그들의 영혼이 하늘의 구원을 완전히 얻은 것으로 보고 성령의 은사들을 바로 이와같은 자신들의 확신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 헬라 이원론에 의하면 몸은 물질에 속하니까 이는 악한 것이고, 불필요한 것이고, 구원 못받은 것이지만, 영혼은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영혼의 이데아의 세계, 신적, 영원의, 진리의 세계에 복귀한 것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분명히 영혼의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도 --겉으로 현저하게 드러나는 방언 등의 은사들은-- 이미 자신들의 영혼이 하늘의 영원의 세계에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자신들이 이미 도달했으므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완성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고전 4:8에서 바울은 매우 냉소적으로 지적하면서, “너희가 이미 만족하면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도달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한다?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도 너희와 같이 왕노릇했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들은 벌써 그들의 영혼에 만족한 상태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이미 영적인 존재로 변화된 것이라는 것까지 본 것입니다.

또 고전 3:20 역시 같은 표현을 씁니다. 신령한 자, 영적인 자들로서(πνυματικοι)로서 자신들이 헬라적 이원론에 의해 육신적인 존재를 벗어나서 자신의 영혼이 이미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퓨뉴마티코이라는 영적인 자들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에 대하여, “너희들은 영적인 자들이기는 커녕 육신적인자들이다.”고 하는데, 이는 고린도인들에게 더 큰 욕이 없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이를 좀더 완화시켜 어린아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영적인 자들이라고? 천만의 말이다.”

이 일 때문에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몸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이상할 뿐만 아니라 --헬라적 이원론적인 사상 배경 아래에서는 몸이 부활하는 사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실상 자신들의 영혼이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영혼이 재림때에 영적으로 부활해서 이미 영적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고전 15:3을 보면 그들은 몸의 부활을 부인한 듯 하나, 고린도인들이 특별히 무엇을 부인했는가에 대해서 학자들간의 결론이 나있지는 않는 상태입니다. 부활의 일체인가? 몸의 부활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의 부활도 믿지 못한 것인가? 도대체 고린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견해는 확실히 무엇인가? 바울이 어떤 견해를 지금 반박하고 있는가? 많은 학설이 분분하고,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몸의 부활을 부인했을 것이고, 이는 헬라적 이원론에 의거하여 영혼의 부활만을 믿고 있을 것이며, 이미 세례때에 그리스도와 영적 부활 했기에 더이상 부활이 없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은사(카리스마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구원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저하게 드러난 은사들, 시끄러운 은사들, 방언하고 환상을 보고 이적을 행하는 것들에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이런 은사들을 서로 과시하는데 열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연히 경쟁과 질시와 교만과 상호무시의 분위기를 만들었고, 예배때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의 자랑으로 서로 과시하며 구원을 받고 높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여 일대의 혼돈이 벌어졌음을 고전 12-14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인들은 고린도의 일반적인 분위기였던 철학과 수사학에 대한 자랑의 영향을 받고, 고린도의 자유 분방한 삶, 특히 성적인 도덕 문란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특히 성령의 은사들 중에 말에 관련된 방언, 예언, 지식, 지혜등을 수사학에 관심이 높은 고린도의 일반적 영향에 관련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지식이나 언변등을 높게 생각하여 서로 과시하는데 열중하였습니다.

이들은 성령론을 통하여 얻은 지식으로 우상들, 즉 고린도의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은 실체가 없는 존재에 불과하므로, 그 불신자들이 그들의 신전에서 또한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여러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우상잔치에 있는 고기를 먹는것을 전혀 거리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하늘의 구원을 얻었다고 믿었으므로 그들의 몸으로는 아무 것이나 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해서 고린도의 일반적인 문란한 성도덕에 같이 휩쓸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방인들이 하지 않는 짓까지도 하면서도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을 더 과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학자들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느냐 하면, 성령의 은사들은 구원받은 영혼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라는 그들의 생각에 따라 성령의 은사들을 과시하며 부도덕에 이끄는 자들을 열광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런 영적 상태를 En-thusiats(Enthusiasm)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항상 일어납니다. 교회가 너무나 지적인 정통 교리만 집중하면 항상 성령파들, 은사파들의 카리스마 movement가 항상 Enthusiasm로 흘러서, 도덕성이 항상 약하게 일어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그것으로 자신들의 구원이 확인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도덕적으로는 상당히 문란한 상태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우리 한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미국에 가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가장 꼴불견한 일은 소위 테레비젼 목사들입니다. 이 친구들이 TV를 엄청난 돈으로 사서 말도 안되는 설교를 해서 자신들의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한다고 전국에 방송을 하여 헌금을 호소해서 돈벌이를 엄청나게 합니다. TV장사를 하여 자신들의 엄청난 왕국을 건설하고 삽니다. 로날, 로버트, 인메이커등 여하튼 여러명이 있는데 최근에 한결같이 엄청난 성도덕의 문제로 하나같이 쓰러졌습니다. 짐 베이커는 자신의 기소를 자신의 친구들까지 못살게 굴도록 만들어서 사기를 무지하게 해서 감옥형을 100년이나 언도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짐 베이커 문제를 터트린 자가 한동안 의기양양하면서 부도덕한 자라고 이렇게 간음하고 사기친 자는 우리 교계에서 없애야 한다고 굉장했었습니다. 그런데 2년후에 자신도 똑같은 것으로 감옥에 갔었는데 또 얼마후에 TV 라이벌인 또다른 자를 그런식으로 물고 늘어져서 이제 모두 그런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결같이 은사파들입니다. 열광주의로서 성령의 열광주의자들로서 지적인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킵니다.

바울은 영을 분변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아닌 악령에 의해서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항상 교회에서 일어나서 한국 교회에서도 성령파의 대표가 이 문제로 걸렸는데, 큰 신문보다는 지하 신문에 날 것입니다. 여러분 못 보셨어요? 5공때에 큰 기업의 사보등에서 비밀리에 많이... 한국의 큰 교회 이야기도 많이 나왔었습니다. 불란서에 가서 무슨 짓을 해서 무슨 병이 걸리고 하는 난리가 났습니다.

하여튼 고린도인들이 그러한 것의 전형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이 성령의 열광주의라고 말합니다. 특히 이를 고린티안인슈세슈(고린도 열광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열광주의자들이 2C 이후에 발달하는 영지주의로 점점 발전되는 경향을 보여서 고린도의 열광주의를 또 다른 말로 이제 배태되기 시작한 영지주의(incipient gnosticism)라고 부르기도 했고 얼마전 까지만 해도 이를 그저 영지주의라고 불렀으나, 요즘은 구분해서 진정한 영지주의는 6C에나 가서 발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열광주의 2C의 영지주의로 발달하는데 태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배태된 영지주의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사수였든지 아니면 적어도 고린도 교회의 목소리 큰 자들이었는데, 반면에 헬라적 이원론의 근거에서 정 반대의 윤리적 결론을 내린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중 일부는 유대 그리스도인듯 하고 다른 자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 같은데, 이들도 영과 육의 이원론에 근거해서 영의 구원만이 중요한 것이고 몸은 전혀 무익한 것이므로 영의 구원의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의 소욕을 되도록이면 피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흘렀습니다. 이들은 그래서 결혼을 부인하고 시장에 파는 고기를 사먹는 것을 피했습니다. 당시 시중에 매매되는 고기는 전부 우상에 제사되는 절차에 의해 도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전 7-8장에서 바울이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이 열광주의 자들과 금욕주의 간의 갈등이 일어난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지혜와 지식과 자유를 자랑하는 열광주의 자들은 금욕주의자들을 약한 자들이라고 무시했고, 금욕주의자들은 육신적인 방탕 자들이라고 열광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그들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대립이 고린도 교회의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와 같은 분파는 아볼로와 베드로가 고린도를 방문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철학과 수사학을 숭상하는 고린도의 전통에 찌들었던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성경 해석의 능력과 수사적 기술을 가진 아볼로에 대해서 굉장한 신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아볼로에 대한 평이 나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레고리적 해석(?)의 본고장이지요? 그러니까 자연히 고린도의 열광주의자들은, 방언등을 높이 평가하던 이들이 아볼로를 자신들의 사도로 삼았습니다. 반면에 금욕주의적인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의 가르침을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사도들의 명령의 4가지, 우상숭배, 술을 마시지 말고 등의 계율과 명령을 가르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선호하게 되고 베드로를 자신들의 사도로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group에 대항해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원래 사도들에게 충실하자고 생각해서 우리는 바울파라고 주장을 합니다. 세개의 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group은 아마도 가장 열광주의적인 자들로서 부활한 그리스도와 직접 교류를 한다고 하면서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 같은 인간적인 선생에 붙어있는 자들을 무시한, 이른바 그리스도파가 있게 된 듯 합니다. 이것 역시 학자들간에 진짜 그리스도파가 있었겠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원래 고린도에 세파가 있는데 이 아볼로, 베드로, 바울 파 중에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이 냉소적으로 인간적인 누구에게 속한다고 주장을 하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파다.” 특별히 신학적 색채나 주장이 있지는 않으나 서로 누구의 파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꼴보기 싫으니 우리는 그리스도파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리스도파가 있었다고 보고 아마도 베드로파 보다 더 극단적인 부활한 그리스도와 직접 교류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파를 무시한 자들일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처음 고전 4장까지에서 지혜 자랑에 근거한 분파 행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아볼로가 주는 지혜가 더욱 나은가? 베드로가 더 지혜로운가 등으로 복음을 완전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다양한 헬라의 학파들의 다양한 지혜 정도로 생각하는 서로 반대하고 무시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는 가나한 자와 부자로 갈라졌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만찬을 할 때에 부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잔뜩 먹으면서 자신들이 부자임을 교회 전체에 과시해서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가나한 자들에게 부끄럼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의 교제의 식탁인 성만찬의 식탁을 교회의 하나됨을 상징하는 식탁을 실제로는 분열을 일으키는 짓을 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11:17-33까지에 부자들에게 하나님을 무시했다고 욕을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빈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무시합니다. 다음시간에 합시다.

 

 

바울서신 // 6

 

 

 

고린도전후서 2

 

 

 

 

 

1. 고린도에 보낸 바울의 편지들

지난 시간에 고린도 교회의 일반적인 성격을 알아 봤습니다. 오늘은 고린도 교회와 바울 간의 서신 왕래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서신 왕래의 서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린도인과 바울간의 왕래 관계를 알다 보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알게 되고 바울은 그 문제를 어떻게 취급했는지도 알게 됩니다.

첫째, 고린도 서신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두편인데 그것이 전부인지 아니면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편지에 같이 편집되어 있는지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쓴 편지들이 특히 고린도후서가 한 편지인가 아니면 두 편지인가 또 속편으로 삽입되겠는가? 소위 이 편지들의 단일성(unity)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들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곧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9에 첫째로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전에 썼던 편지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쓴 것에....” 에서 바울이 썼던 편지가 분명히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전에 쓴 편지라고, 이전 편지(the previous letter)라고 부릅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 안의 부도덕한 자들이나 악한 자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고는 그들의 이웃들과 일체 교류하지 말라는 오해인 듯 합니다. 고전 5:9-11을 보면 이 편지는 완전히 상실된 것 같은데 일부 학자들은 고후 6:14에서 7:1이 이 편지의 한 조각이라고 봅니다.

두번째 바울은 글로에의 집 사람들로부터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편지를 오해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등으로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고전 1:1-17까지 지난번에 이 파문에 대하여 조금 설명을 했었습니다.

세번째로 이 무렵에 바울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는 편지를 가지고 온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을 맞았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은 스데바나, 보드나도, 아가이고 등 세 사람으로 구성되었고(고전 16:17), 그 문제들은 첫째 결혼에 대해서(고전 7:1-40), 다음에 우상 제사의 고기에 대하여(고전 8:1-9), 예배때의 혼란(고전 11:2-34), 성령의 은사(고전 12:6-14:4)에 대하여, 부활에 관하여(고전 15:5-58),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에 대해서 입니다. 고전 7:1을 보면 너희에게 쓴 것에 대해서 내가 답을 하겠다.”고 바울은 말하는데, 고린도인들이 세 사람의 대표단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이와같은 사항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십시오 라고 청하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하는 것이 좋다는 구절은 당시 고린도인들의 구호였습니다. 즉 결혼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는 자들과 결혼을 했어도 성 관계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으니,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금욕주의자들의 구호이므로, 거기에 대하여 바울이 7:2부터 답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유의할 점은 너희들에 쓴 것에 대하여 내가 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고전 7:25을 보면 거기에는 처녀들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바울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8:1을 보면 그곳에서는 지금부터 내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해서 답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는 ....’ 하고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는 표현에서 인용의 어귀입니다. 고린도의 열광주의자들의 구호였습니다. ‘우리가 다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은 이미 모든 지식이 있으므로 우상 제물에 괘념치 않고 또한 이방 제사의 festival에 참여해도 된다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다 지식을 가졌는데.” 이러한 것들이 열광주의자들의 구호였습니다. 바울이 이에 8:9에서 말하기를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교회를 세워 올리고 덕을 쌓는다.” 라고 답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지혜 문제에 대하여 또한 고전 12:1을 보면 신령한 것을 언급하는데 이는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영적인 것에 대하여 내가 답을 한다.” 라고 고린도 교회가 문제를 제기해서 바울의 가르침을 더 청했기 때문에 바울은 조목 조목 답을 줍니다. 넷째로 바울은 우리가 현재 고린도전서라 부르는 것에 있어서 이 문제들에 대하여 응답을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입니다. 에베소서 AD 59년에 보낸 이 편지에서 바울은 성령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지상에서 육신과 죄에 노출되어 실존하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키고 교회의 교제를 북돋아 주는 삶의 정신과 우리 말로 덕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교제를 북돋아 주는 삶의 정신과 절제있는 생활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열광주의를 교정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이들의 지혜나 분파 문제들을 다루어서 이웃들에게 올바른 삶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주는 구체적인 충고는 F.F. 부르스의 바울 책이나, 도날드 거쓰리의 서론 책에 아주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을 몇가지 들어 본다면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고전 1:17-2:16), 결혼과 성 문제(고전 5:6-33), 우상에 관계된 고기를 먹을 것인가(고전 8:1-11:6)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자유의 성격을 다룹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성격을 다루면서 교회에 항상 있는 문제, 이른바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대립의 문제를 다룹니다. 복음의 자유를 누리되 방종주의로 흐를 위험을 늘 갖고 있는 강한 자들과, 복음이 근본적으로 자유를 의미하는지 모르고 금욕주의적 율법주의적인 반대 집단으로 흐를 위험을 늘 갖고 있는 악한 자들, 이런 문제는 어느 시대나 어느 곳이나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폴 티니(?)의 책중에는 강한 자와 약한 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르침을 현대 교회 생활과 현대인들의 심리, 정신을 연결 시킨 좋은 책입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다루면서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의무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성령의 은사(고전 11:20-14:40),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공부를 하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어떤 충고를 주는가를 자세히 공부하고,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상황에 적용을 하면 많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의 거울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대개 교회의 문제들이 고린도 전후서에 다루어진대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가 특별히 그러합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진정한 권위의 문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 세상적으로 힘이 있어보이고 권위있는 것이 진정한 사도직의 표증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사도직의 표증이냐? 인간적인 자격들, 학벌, 연줄 등이 진정한 지도자의 자격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이 자격을 지닌 자들인가, 아니면 영성이 무엇인가? 아니면 성경의 사랑의 실천이 진정한 영성인가?

고린도 전후서를 보면 바울의 모든 서신들은 신약의 모든 책들과 일관 되게 진정한 영성은 도덕성으로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성을 표현 않는 영성은 없는 것이고 이는 기독교적인 영성이 아닙니다. 원시 종교의 영성이라는 것은 도덕성이 없고 영이란 하나의 물리적 힘 같아서 도덕이 전혀 쓰이지 않은 그런 가치로 나타납니다. 우리 한국의 샤머니즘이 그런 종교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이른바 영성이라는 것이 도덕성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나타나는 것이 되었고 여러분들이 고린도 전후서를 잘 공부하고 적용을 하면 오늘날 교회의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간단히 생각해 본다면 고린도 교회의 근본 문제들, 적어도 근본 문제들의 일부가 성경주의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령의 은사를 자신들의 영혼이 이미 지혜를 얻어서 육신, 물질의 세계로 해방된 것으로 이해를 하여서 이미 구원을 확보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해와 지식, 자유를 자랑하면서 교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이런 이야기를 조금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종말론적인 이원론을 헬라적인 본질적 이원론으로 오해를 해서 그리스도 안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현재적 영혼의 구원으로 헬라적 재 해석을 하게 되는 오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나번에 이야기한대로 자기 자랑, 자기 과시에 빠져서 서로 과시, 자랑하는 분파와 도덕적인 타락의 분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미 바울은 이들의 근본 문제인 지혜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와 대조하면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들이 성령을 통해서 받은 지혜와 지식을 자랑한다 해도 세상적인 지혜가 아닌 성령을 통해서 얻은 지혜와 지식입니다. 특별히 이 지혜와 지식으로 스스로를 교만케 하고 분파적인 경쟁에 빠지고 성도덕의 타락상을 보이며 우상 숭배자들과 휩쓸리는 것을 봤을때 그들은 진정한 영적인 신령한 자들이 아니고 육신적인 자들임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진정한 신적 지혜나 지식이 아니고 육신적인 또는 세상적인 왜곡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해도 그 성령의 은사를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인 자가 못되고 육신적인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는 이 헬라 철학자들의 지혜와 유대 신학자들의 경건을 둘 다 끝장낸 십자가에 의해서 표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지혜의 반대 개념이며 세상의 가치들을 과격하게 뒤집어 엎는 이 모든 가치들을 뒤집어 엎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7절 이하에 웅변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적인 지혜를 대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적인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연약하며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것으로 그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믿는 자에게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된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요, 하나님의 승리요, 인간들의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바울은 그의 신학이 이른바 십자가의 신학이 --십자가의 신학은 신약 전체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특히 마태가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전후서에서 이 십자가의 신학을 고린도인의 영광의 신학에 과격히 대조시킵니다. 벌써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당도한 것으로 보고 이 세상의 승리를 구가하며 십자가의 표징들을 --연약함, 고난 등을-- 부끄럽게 여긴다거나 배격하던 그런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과격히 대조시킵니다. 특히 바울은 고린도 서신에서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고린도인의 지혜 자랑, 능력 자랑, 은사 자랑, 권위에 대한 존중, 외부적인 힘의 표징들에 대한 존경등에 대조시키면서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자기가 선포하는 십자가의 신학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도적인 권한을 십자가의 복음에 구체적인 표현으로 말합니다.

고린도 전후서에 나타난 고린도의 성령주의자들의 영감의 신학, 지혜 자랑, 지식 자랑, 외적인 힘의 표증들, 권위에 대한 숭상들과 바울의 십자가의 신학,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의 사도적 권한을 오늘 우리 한국의 교회에 적용해 보십시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서 교회의 지도자들, 일반 평신도들이 높히 평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잠깐 토론을 해 봅시다.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한 2년 더 공부를 하고 복음을 선포할 터인데 무슨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말로써만 선포를 하고 삶으로는 세상의 지혜와 능력의 복음, 세상의 힘의 철학과 윤리학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 유행하는 영광의 신학, 고린도인들처럼 왜곡해서 복음 자체를 세상적 힘의 복음에 물들이면 이른바 축복을 받아서 헌금을 많이하면, 축복을 받아서 금력을 얻고, 출세를 하고, 권력을 얻고, 교회에서는 높은 장로가 되어서 교회에서도 권력을 얻고, 또 그런 장로들을 거느린 목사들은 엉터리 박사 학위들을 들여와서 무슨 예배를 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울긋 불긋한 옷으로 치장하고 돈을 많이 들여 무슨 기념인지 축하예배, 감사예배를 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뭐합니까? 총회장 해야죠. 돈을 몇억씩 부어서 교회에서 능력있다고 말해야 합니까? 능력 있는 교회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고린도후서까지 한꺼번에 봐서 특히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초특급 사도들에게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모든 것에 우선해서 바울은 금방 이들을 거짓 사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초특급 사도라 주장했었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당시에 모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형편없는 자들로 예루살렘 교회의 헌금을 사기나 치고 다니는 자들이라고 욕을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추천장 하나 없는 그들과 빗대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나의 추천장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나와 있습니다. 자신들의 족보를 자랑하며, 예루살렘 출신이라는, 사도들과 관계있다라는 연줄을 자랑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정으로 이야기하면 연줄, 지방색(T.K. 출신등의)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증명증, 추천장등의 증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기막힌 환상을 보고 엄청나게 과시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영적인 이적등을 자랑을 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자신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히브리인이요, 사도직은 직접 위로부터 받았고, 영적인 환상, 이적도 다 행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사도직의 조건들에 아무런 모자람이 없고, 그 추천장 문제는 여러분의 심장에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이므로 이는 새 언약에 속하는 추천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며 내가 진정으로 내세우는 사도직의 표증은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 받은 고난이 진정한 사도직이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진정한 사도직의 표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구원이 일어나므로 사도는 그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그의 삶으로 그 십자가의 고난과 그 고난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자가 사도이므로 자신의 연약함에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그것이 유일한 사도직의 표증이라고 내세웁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오늘 우리들이 이른바 능력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누구이어야 하며 누구를 모델로 삼아야 하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가치판단, 가치관 등이 다분히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다음은 다섯번째로 바울이 어떻게 문제를 다루는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내고 곧이어 고린도를 스스로 AD 55년 유월절 지나고 방문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우선 디모데를 먼저 보냅니다(고전 16). 아마 고린도전서를 디모데가 가지고 간듯 합니다.

여섯번째로 그러나 이 바울의 편지는(고린도전서) 고린도 교회 안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디모데는 바울의 지시를 집행하지 못했습니다.

일곱번째로 바울은 그 문제들을 스스로 척결하려고 고린도에 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큰 슬픔 가운데 에베소로 귀환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방문을 쓰라린 방문, 가슴아픈 방문이라고 부릅니다(고후 2:1-5).

여덟번째,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 읽은대로 큰 환난 속에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며(고후 2:1-5) 강경한 어조의 편지를 써서 고린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를 보통 이 귀절을 눈물의 편지 또는 혹독한 편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바울이 몇번째 보낸 편지이냐 하면 세번째 편지였는데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고후 10-13장까지가 이 편지의 일부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는 첫편지의 조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고린도 서신들에 대한 재론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바울이 어떻게 다루는가입니다.

아홉번째로 에베소에서 바울은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극단의 외적 위해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고후 1:8이하에서 아시아에서 극심한 핍박을 받아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살 소망을 잃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도대체 어떤 내용의 고난을 받았을 것인가의 추측들을 많이 합니다. 맹수와 싸웠다는 등, 여러 추측이 있었으나 하여간 바울은 고린도인들로 인해 굉장한 우울증과 고난까지 받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고린도로부터 뱃길로 돌아오는 디도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러 드로아에 갔습니다. 바울의 아주 인간다운 면모를 봅니다. 이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를 파견했는데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와서 바울 자신이 가서 욕만 먹고 다시왔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편지를 디도의 편에 보내서 고린도 문제를 해결하고 평정하라고 보냈는데 바울이 걱정스러웠고, 아시아의 전도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드로아까지 자신이 마중을 나갔습니다. 바울을 신격화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바울은 이렇듯 아주 인간다운 사람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고심하고 있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망정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포기를 하지 않는 면모를 보입니다.

드로아에 디도를 마중하러 바울이 갔으나 디도가 거기에 나타나지 않자, 바울은 그 실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육로로 오는줄 알고 마게도니아로 갑니다. 그곳에서 디도를 만났습니다(고후 2:12이하). 그런데 이제 장로 한분이 오셔서 말하기를 먼저 고전 1:4-9절을 읽어보죠.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너무나 큰 문제로 급하여져 갈라디아인으로 하나님께 감사함을 갖는다는 것을 쓰지 못할 정도였는데, 지금 고린도전서에서 항상 바울이 그랬듯이 고린도인으로 인해 감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내용이 그들에게 하나님께 큰 은혜가 은사로 주시게 되어서 방언, 예언 모든 지식에 부요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인들이 그 은사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고(7), 그것은 고린도인들이 자랑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그 충만한 은사로 인해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부요케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부요함이라는 표현을 역설적으로 냉소적으로 썼습니다. 그러면서 신랄하게 이를 비판합니다.

우선 그들을 인정해 주고 칭찬을 해줍니다(1:10이하). 그런데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소망을 갖는 것이지... 고린도인들을 하나님이 미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날까지 흠없이 지키시리라고 말을합니다(1:8-9). 바울은 고린도인을 생각해 볼때는 도저히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믿음으로 소명하시는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 완성 될 때까지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미쁘신 하나님이시므로 고린도 교인의 구원의 문제에 안도하며 확신을 하면서 고린도인들을 위로하고자 그런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우선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로 인해 마음이 엄청나게 상하고 호되게 꾸짖을터인데, 먼저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칭찬을 단단히 합니다. 이를 카파티오(?)-서두에 선의를 나타내서 수신인으로 하여금 바울의 충고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것- 어제 장로님 한분이 심각한 얼굴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렇듯 인간적인 전략으로쓸 수 있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신격화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의 이런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인간적인 모습은 하나도 없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여기는 관습이 너무 심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공부 못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말로서 하나님의 message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말, 인간성을 완전히 배제하게 되면 이와같은 고린도의 문제들, 정황, 바울이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그런 문제는 연구할 아무런 필요도 없는 것이고 고린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우리의 상황과도 아무런 관련없이 된다는 것, 이러한 잘못된 성경관, 바울관이 상당히 팽배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심히 상심해서 안절부절 못하고 디도를 만나러 드로아에 간 것을 바울은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그 장로님이나 많은 제기를 하던 학자들이 아니, 어떻게 바울이 그럴 수가 있는가? 또 철저한 믿음을 지닌 바울이 안절부절 못하고 아시아의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그를 포기하고 드로아로 마중을 나가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성경해석 방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연역적인 해석 방법만을 택하여 성경에 강요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 놓은 성경론을 이 성경에 강요를 해서 성경에 쓰여진 것 까지도 강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 한국교회에 성경 연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후서에서 넘치는 것이 바울의 인간성, 신자들에게 아주 모범적인 --아무리 외적으로 믿음이 어찌했다하는 자들도 불안이 있게 되고, 회의가 있게 되는데, 진정한 믿음은 마음속에서 끓어오는 회의와의 싸움 속에서 이겨서 이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외칠 때에 비로소-- 진정한 믿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언제 실행됩니까? 이런 바울과 같은 안절부절한 상황속에서 그런 외적인 것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겠다는 그 평화가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4:18이하에서 바울은 바랄 수도 없는 가운데 바라는 믿음, 완전한 절망의 상태, 모든 것이 소망에 거슬리는 상황 속에서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죽었고 사라의 태가 다 말라 붙었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조건들이 도대체 더 이상 하나님을 믿고 살 수없게끔 하는 절망의 상황에서 그럼에도 소망가운데, 이럴 때에 진정한 소망과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바울 역시, 절망의 상황에 에베소에서 처하게 됩니다. 외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정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디모데의 체험과 자신 스스로의 체험 때문에 인간적으로 도저히 소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가닥,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소망, 그 소망의 확인을 위해서 디도를 만나러 나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진정한 소망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내게는 회의라는 것이 이만큼도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 불안이라는 것이 이만큼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마치 신앙이나 믿음이 좋은 것을 과시 하기 위하여 속에서 일어나는 회의와 불안을 억누르고 겉으로만 늘 믿음으로, 기쁨으로 가득차고, 소망으로 가득찬 위선적인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바울이 하나님의 평화를 얼마나 많이 말하는 사람입니까? 빌립보서에서도 하나님의 평안을 얼마나 말을 해요. 그러나 그 평안이라는 것이 항상 내 스스로를 세뇌시켜서 아무렇지 않고 모든 것이 잘된다면서 자꾸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의 상황과 진지한 대결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처지에 빠지고 바울의 처지에 빠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체험하는 믿음과 소망이 진정한 것입니다. 바울을 너무나 신종할 것이 아니라, 바울을 우리들의 진정한 모델로 보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대하여 하나의 문제를 토론해 보았습니다. 바울은 하여튼 디도를 만났습니다.

열번째로, 디도는 바울의 혹독한 편지가 효과가 있어서 고린도인들의 반란이 끝나고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권위에 반란하도록 한 주모자를 정죄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2:6이하).

열한번째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린도후서, 또는 그중에 처음 아홉장을 써서 AD 55년에 빌립보에서 쓴 듯합니다. 디도를 만난 그 자리에서 빌립보가 마게도냐에 있는 도시인데 실제로는 이 편지가 바울이 고린도인에게 쓴 네번째 편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써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이 해결된 것에 대한 그의 안도함과 그의 고린도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에게 적대했던 자를 용서해 주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까 읽은 고린도후서 2:1-11까지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의 전반부는 바울이 매우 기분이 좋아져서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편지입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의 문제 해결이 자신의 고난을 일시에 마친듯한 자신의 사랑을 내 쏟는 심정으로 편지를 씁니다. 자신의 심장을 소매끝에 둔다는 영어 숙어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심정을 깊숙히 숨겨놓고 잘 드러내지 않는 심장의 본심을 --몸에 깊숙하였던 심장을-- 소매끝에 달아놓아 모두 다 볼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감정, 생각을 모두 드러내는 자를 경솔하고 경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후서의 처음에 자신의 심장을 다 드러내 놓은 이 부분을 바울의 편지와 더불어 바울의 매우 인간적인 모습과 면모를 불안과 걱정과 그의 이 사랑과 그의 신앙이 그의 십자가의 신학과 결탁이 세상적인 유혹을 뿌리친 진정한 영적인 사랑의 생생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격화 된 것은 우리와 차원이 달라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생생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바울은 기쁨으로 들뜬 마음으로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권한과 영광을 생생히 그려 표현하고(고후 3-6),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의 문제를 다시 제기합니다(고후 8-9장까지), 예전에 고린도 교회에서 헌금을 모아서 그것에 관한 가르침을 달라고 고전 16장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커져서 더이상 진행을 못하고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고린도 교회가 평정을 찾았으므로 다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하라고 자세하게 고린도후서 8-9장까지에서 어떻게 헌금을 하며, 자신이 어떻게 걷으러 갈 것인가를 자세히 말을 합니다. 그리하여 고후 8-9장에 헌금에 관한 가르침을 둡니다.

바울은 마게도니아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걷은 헌금을 가지고 마게도니아 교회의 대표단과 함께 고린도를 거쳐 가면서 아가야 교회들의 헌금을 전달할 아가야의 교회 대표들을 대동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고후 8-9). 그래서 바울은 즉각 디도를 다시 고린도에 보내서 그들의 헌금 사업을 완수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밖에서 질투한 거짓 사도들의 충동에 의하여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교회의 헌금 걷는 것을 사기 행각이라고 공격을 하는 문제가 다시 터집니다.

이 다음 시간에 계속해야겠습니다. 이 다음 시간에는 로마서를 할테니까 로마서 서론은 가장 중요한 issue가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입니다. 왜 바울은 로마서를 썼는가가 서론에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언제 쓰였는가가 가장 중요하며 고린도 전후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의 성격들과 바울의 처방들, 그리고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들이 중요합니다.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왜 바울이 로마서를 썼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다음 시간에는 고린도서신들을 빨리 마치고 로마서 서론을 하겠는데 마침,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된 목적에 대해서 내가 글을 하나 써놓는 것이 있으니 복사해서 나누어 가지면 강의가 빠를테니, 그 목적이 대단히 복잡하여서 Text가 있으면 도움이 됩니다.

 

 

 

바울서신 // 7

 

 

 

 

고린도전후서 3, 로마서 1

 

 

 

 

 

1. 고린도전후서의 연속

오늘은 지난번에 하다만 바울과 고린도와의 관계12번을 이어서 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문제가 다 평정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9장까지를 써가지고 디도의 편에 보내서 디도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완수하도록 보냈는데, 그 사이에 고린도에 또 하나의 위기가 발생했어요.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걷는 헌금을 오해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와 같은 오해는 왜 생겼느냐 하면, 밖에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 헌금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고 바울의 사악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냐? 한마디로 바울이 사기꾼이 아니냐?” 한 것 같아요.

밖에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자들은 자신들의 이스라엘 족보를 자랑하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위임을 자랑하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부터 권위를 위임 받았음을 자랑하고, 또 자신들의 영적 체험, 가령 환상이라든지 이적이라든지 등의 체험을 과대 선전하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부터 사도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내세우고 자신들의 엄청난 영적 체험을 과시했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고린도인들에게 상당히 호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고린도인들 자신들이 힘을, 능력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이 권위주의적 행위라든가 또는 사도로서 마땅히 교회에 의해 부양되어야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든가 또는 엄청난 영적 체험을 자랑한다든가 이런 모든 것들이 그들의 능력의 표징으로 고린도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것 같아요.

우리 한국 교회하고 똑같죠? 목회자가 겸손하면 장로들이나 회중들이 막 올라타려고 그러죠. 목회자가 아주 목에 힘을 주고 권위주의로 나가고 그러면 회중이 ! 저 뭐가 있나보다!” 하고서 그런 사람은 막 모셔요. 목회자가 좀 섬기는 자세로 나가면 막 깔아 뭉게고, 막 돌아다니면서 총회일이나 하고 간부일 열심히 하고 세상적으로 관직있는 사람과 전화질이나 좀 하고 엉터리 학위나 둘러메고 거기다가 주의 종은 당연히 교회에서 잘 받아 모셔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필요하면 산속에 가서 뭐 들었다고 주장하고 아 이러면 틀림없이 성도들이 아주 좋아하고 그런 교회에 열심히 모여요. 또 여러분들 교회부흥, 뭐 성경적 세미나 하고 그러는데 그런게 다 거짓말이고 지금 내가 가르친대로 하면 돼요. 그러면 교회 부흥한다고. 틀림없이 그래가지고 교회가 웬만큼 크면 당회장실을 크게 만들라고 구중궁궐로 저 깊숙한 방을 만들어 놓고 비서를 댓명 두면 거 뭐 틀림없이 부흥한다고... 바울같이 겸손하면 안돼요. 그러면 자꾸 무시해요.

열세번째, 그래서 바울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후 10-13장 까지를 써서 이 거짓 사도들을 정면으로 공격한거예요. 이 편지는 앞의 고후 1-9장까지와 별개의 편지로 따로 보내졌다가 바로 앞서 보낸 편지, 그러니까 1장에서 9장까지와 나중에 합쳐졌거나 그렇다면 이 편지는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5번째 편지다. 아니면 고후 2:1-9절까지를 쓴 직후로 아직 디도 손에 들려서 보내기 직전에 이와 같은 새로운 위기에 대해서 들어서 바울이 빨리 이 편지를(고후 1-13) 써서 한 편지로 합본해서 디도 손에 들려 보냈거나, 하여간 1-9장까지와 10-13장 까지 사이에서는 내용적으로나 tone에 있어서 즉 바울의 어조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어요. 그리고 그 주제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요.

물론 고후 10-13장까지에서 다루는 문제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회의, 도전, 특히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부터 안수받고 위임 받고 초청장 받은 것이 없음에 대한 도전은 고후 3장에도 나오긴 나오지. 그래서 일면 연속점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러나 고후 10-13장까지의 자기 사도직에 대한 변호와 거짓 사도들에 대한 공격이 주를 이루는 이 부분과 그 앞부분은 내용과 어종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다른 편지로 생각하던가 아니면 전후에 써가지고 합본해서 보냈거나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다. 만약에 후자가 옳다면 그러니까 1-9장까지 써가지고 이제 막 보내려고 하는데 고린도 교회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접해서 바울이 10-13장까지를 또 써가지고 합본해서 보냈다면, 우리는 이 고린도후서를 쓰는데 있어서 여러날, 여러주가 걸린 것으로 상상을 해야 돼요. 이 편지 하나를 쓰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당시 이 편지를 쓰는데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렸지. 그런데 바울이 고후 1-9장까지를 쓴 뒤에 고린도에 새로운 위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고후 10-13장까지를 새로 아주 전투적인 언어로 써서 합본해서 보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벌써 고후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토론한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고후가 3개의 편지로 되었다고 그렇게 본다. 하나는 1-9장까지, 하나는 10-13장까지, 또 하나는 무슨 편지? 소위 무슨 letter.

바울이 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모욕을 당하고 쓴 눈물의 편지가 고후 10-13장까지의 일부에 담겨있다고 본다고. 그리고 또 먼저 쓴 편지, 바울이 제일 먼저 쓴 편지(고린도 교인들이 오해한 편지)가 고후 6:14-7:1까지에 남아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어요. 벌써 우리는 이런 토론으로 어떤 학자들은 고후가 서너개의 편지들로 원래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3개의 편지가 합쳐져서 오늘의 고린도후서를 이루었다고 하는 그런 견해가 있어요. 그래서 고후의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가 이 unit의 문제야. 이 편지가 원래 하나의 편지였느냐? 아니면 지금 이야기하는 19절과 1013절까지의 두개의 편지로 보느냐? 아니면 고후 6:14-7:1까지 거기에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 처음 보낸 편지 조각이 있느냐? 그렇다면 3개의 편지지... 또 고후 10-13까지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모욕을 당하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런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그 편지가 일부 남았느냐? 그렇다면 4개의 편지가 되는거죠. 이렇게 고린도후서가 하나의 편지, 또 두개의 편지, 세개, 네개의 편지 조각이냐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예요.

이런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도놀드 거쓰리나 킴멜의 책을 읽어보면 자세한 토론이 있으니까 읽어봐요. 아마 가장 무난한 견해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1-9장 까지를 먼저 쓰고 조금 있다가 10-13장까지를 썼는데 어쩌면 별개의 편지로 볼 수도 있고, 그러나 연달아서 아니면 합본해서 보냈을 수도 있어요. 이 부문에 있어서... 그러니까 이 마지막 편지에 있어서 10-13장까지에서 바울은 이 침투자들은 다른 예수를 선포하는 자들로, 갈라디아에 침투한 자들은 뭐라고 해요? 다른 복음을 선포한 자들, 그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어? 그러니까 이것은 복음도 아니라고 해요. 그러면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에게도 다른 예수를 선포하는 자들이라. 고후 11:4다른 예수를 선포하고 다른 영을 가지고 다른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고 있어요.

그들의 엄청난 이 주장 즉, 사도로서의 그들이 주장하는 자격들, 곧 그들이 사도의 표징들이라고 주장하는 이것들에 의거해서 볼 때에 바울 자신이 조금도 뒤떨어짐이 없으나 자신은 그들이 내세우는 족보라든가 --이스라엘인이고, 히브리인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는-- 그 구약의 특수 구원사적 족보라든가, 또는 외적인 인간에 의한 권위의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안수받고, 사도직함을 받고 무슨 추천장 받고 하는 그 외적인, 인간적인 권위의 위임이라든가 또는 심지어 성령의 신비스러운 체험까지도 사도의 진정한 표징들이 될 수 없고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과정 중에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는 과정 중에 고난 받음이 사도의 진정한 표징이라고 바울은 내세웠어요.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며 이 사도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도의 삶은, 사도는 그리스도의 대표로서 그리스도를 그 삶에서 나타내야 된다고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삶이 이 사도의 삶에서 시위되어야 된다고... 거꾸로 말하면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시위해야 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나도 그렇다.그들이 히브리인의 자손이냐? 나도 그렇다.” 그래서 이 족보나 구약의 옛 언약에 의한 평가를 내리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들에게 꿀림이 없다 이거예요. 그들이 무슨 영적인 엄청난 체험을 이야기하는데 그점에 있어서도 전혀 꿀림이 없다. 나도 기사와 이적과 표징을 행했으며... 자기도 심지어 3층천에까지 간 일이 있어. 그러니까 그런건 난 말하고 싶지가 않은데 너희들이 나를 강요해서 내가 잠시 바보가 되어서 이따위 소리 한다고, 전혀 말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까 오늘날 뭐 천당갔다 왔다고, 지옥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정신에 완전히 위배된 사람이예요.

바울은 그런 체험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너희들이 지금 억지로 나를 강요한다고 그런 체험을 마치 뭐 큰 특권이나 얻은양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신약 성경의 기본 정신에 위배된 사람들이라고. 바울이 뭐라고 해요? “내 이런말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너희들 때문에 잠깐 바보가 되어서 할 수 없이 이런말 하는데, 좀 참아 달라. 좀 참고 들어달라.” 그래놓고는 내가 다시 바보가 되었다.”고 그렇게 말해요. 근데 하여간 그런 성령의 체험이나, 성령의 능력의 발휘, 기사나 이적, 그런 것들로 봐도 그들이 다 그런 것들을 사도의 표징들로 내세운다고 조금도 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도의 표징이 아니고 무엇이 진정한 의미의 사도의 표징이냐?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고, 이 사도직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시위이기 때문에,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로서 말로만 아니라 삶에 있어 그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세워야 한다. 바울은 뭐래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니고 다닌다고 말하죠.

사도의 진정한 표징, 그래서 아주 그 역설적인 논지로 표현이 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의 신학(?) 이른바 고린도 교인들의 또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의 영광의 신학에 반한 바울의 이 십자가의 신학의 전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설파하는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주는, 모든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진정한 자기와 자기 사역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케 하는 아주 중요한 교훈으로 가득차 있어요. 거짓 사도들과 이 세상적으로 판단하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의 영광의 신학에 반해서 바울은 자기의 이 고난 많은 사도적 삶을, 십자가 신학을, 하나의 시위로, 삽화(illustration)로 내세우고 있어요. 여러분들 한번 토론해 봐요. 진정한 주의 종이 누구냐? 주의 종의 진정한 표징이 뭐냐? 오늘 우리 한국의 개신교의 목회자들이 중세의 카톨릭 사제주의의 목회자적 자기애를 따르고 있어요. 날이 갈 수록 그래요.

자꾸 이 하나님과 평신도의 중보자로 자기들을 이해하며 구약 제사장에서 자기애를 도출하는 이것이 사제주의지... 그래서 권위주의적 행패를 하며 섬기는 자보다는 군림하는 자들의 자세를 취하며 우리 종교개혁의 결과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사제주의의 타파인데, 바로 그러한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우리 개신교의 목회자들이 중세의 타락한 카톨릭 신부들의 사제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아주 위험한 지경에 있어요. 그래서 지금 바울이 고후 10-13장까지에서 펼치는 진정한 주의 종의 표징이라는 것이 뭐냐에 대한 진정한 토론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들 한번 토론해 봐요. 이렇게 해서 고후는 신약 성경에서 아니 고대 문학 전체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personal, 가장 감동적인 문서가 된거예요. 그리스도의 두 오심 사이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영광의 이 역리적(paradox) 실존을 잘 그리고 있어요. 고후 12:1-10까지 누가 읽어봐요.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다. 나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강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완성된다. 인간인 바울이 스스로의 강함에 있을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어요. 그가 스스로 완전히 비웠을 때에 그의 삶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디어 나타나는 거라. 내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 이런 paradox가 바울의 사도의 표징으로 내세우고 있어요. 자기의 그 사도적 삶 --사도는 그리스도의 대표라는 그의 사도적 삶-- 에서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이 시위될 때에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바울을 보고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는 그런 그 역리를 지금 말하고 있어요.

 

 

2. 로마서에 대해서

, 그러면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 로마서의 쓰여진 연대라든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다만 로마서의 서론적인 문제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울이 로마서를 왜 썼느냐?” 하는 문제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린 로마서에서 바울이 로마와 로마 교회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다루게 돼요.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옳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토론이 참 많아요. 거기 9page 보면 Kummel의 신약서론을 보고 그 다음에 거기 여러책들 있지 ???? 등의 논문들이 있다. 그런데 이 논문들이 편리하게 K.P. Donfried가 편집한 The Romans Debate 책에 모아져 있어요. 그 외에도 Drane의 글이라든지, 로마서 주석에, 특히 최근의 주석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바울이 로마서를 왜 썼는가에 대한 토론이 참 많아요. 중요하기 때문에, 의견이 많이 갈리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 하나씩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은 원래 칼빈세미나에 갔을 때의 강의 노트인데 학생들이 번역을 해놓았어요. 그런데 번역이 상당히 틀려가지고 내가 손으로 써 넣었어요. 자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직접적인 목적은 로마서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명확히 보여준다. 로마서 110-15절과 1514-33절까지. 집에가서 다시한번 읽어봐요. 여기에 바울은 로마서를 수록한 목적을 분명히 밝혀요. 그걸 좀 설명해 보면 먼저 로마서 1514절 부터 33절까지를 먼저 읽죠.

바울이 지금 이 편지를 어디서 쓰고 있느냐 하면 고린도에서 쓰고 있어요. AD 57년경에 로마에 편지를 쓰고 있어요. 로마서 1519절에 뭐라고 해요? 자기의 지금까지의 사도적 사역을 뭐라고 요약해요? 예루살렘에서 부터 빙 둘러서 일루리곤까지 (오늘의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그쪽, 즉 마게도니아 일루리곤까지) 내가 복음을 편만히 전했다. 곧 복음으로 가득채웠다. 또 거기에 ?라는 전치사가 나오지? 예루살렘에서 시작을 해서 빙 둘러서 일루리곤까지 내가 복음을 완전히 전했노라. 그래서 이 지역에 내가 더 이상 일할 곳이 없었다. 전부터 내가 로마를 방문해서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 선교여행을 가려고 여러번 계획했었는데 그때마다 길이 막혔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갈 수가 있다. 지금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아마 바울이 일루리곤에 당도했을 때 여기서부터 넓이뛰기를 하면 로마에 당도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여기서부터 로마에 갈려고 바울이 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동안에 갈라디아인들의 문제, 고린도 교회의 문제, 특히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울을 몇년동안 요 지역에 잡아둔거란 말이예요. 그런데 이제 드디어 고린도 문제가 다 평정이 되었어요. 고린도 전후서를 통해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드디어 고린도의 문제가 다 평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심지어 바울은 사기꾼으로 몰았던 고린도인, 바울이 자기들과 같이 있을 때는 아주 샌님인척 돈에 관해서는 깨끗한척 하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취직을 해서 공짜로 돈을 번다고 해 놓고서는 에베소에 가서는 자기 똘마니들, 디모데니 디도를 자꾸 보내가지고 예루살렘을 빙자해서 자꾸 돈 내라고 한다고 고린도인들이 그렇게 바울에게 공격을 보내고 자기가 사도직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안수 받음도 없고 초청장도 없고 그러니까 요새말로 교단의 인정이 없지. 그래서 우리와 같이 있을때는 차마 여러분들이 헌금해 가지고 나를 부양하라는 소리를 못하고는 구로동 공장에 가서 취직해 가지고 밥벌어 먹고 밤에 와서 성경 가르친다고 해 놓고는 아 에베소에 가 가지고는, “자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을 하자!” 하니까 아가야에서도 하고 마게도니아도 하고 또 갈라디아 교회 아시아 교회도 다 하니까 여러분들도 동참하라는 명목으로 선교헌금 자꾸 거두어 들인다고... 지금 뭐 무슨 소련 선교한다고 자꾸 돈 내라고 하고 거짓말로 아프리카 선교한다고 자꾸 돈내라고 하죠.

그렇게 지금 고린도 교회가 오해를 하고 고린도 교회에 갖가지의 문제가 발생했죠. 그래서 바울이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네번, 다섯번 쓰고 자기 스스로 고린도 교회에 갔다가 봉변만 당하고 와서는 화가 나가지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편지를 쓰고 그것도 안되어서 디도, 디모데를 보내고 난리가 났죠. 이 디도가 돌아오는 줄로 알고 여기까지 마중나갔다가 안 오니까 아 육로로 오는가 보구나.” 마게도니아에서 아마 빌리보까지 가서 거기서 또 만나가지고 아 이제 살게 되었구나.” 이래서 바울이 지금까지 몇년동안 2-3년동안 자기의 로마제국의 ?로의 선교여행을 포기하고 이 문제 평정한다고 여기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런데 그 뒤에 평정이 있었어. 그래서 바울을 사기꾼으로 몰았던 고린도 교회까지도, 아가야 교회까지도, 헌금에 기꺼이 동참했어요. 그래서 이제 헌금이 완성 되어서 아가야, 마게도니아, 아시아, 갈라디아 곳곳에서 헌금이 완성이 되었어요. 그래 가지고 각 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큰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지금 어디를 가려고 해요? 예루살렘을 가려 해. 가서 헌금을 전달하고 그러면은 이제 로마 제국의 동반구에서의 자기의 선교사업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는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로마를 가겠노라. 그래서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서반아로 선교하러 가겠노라.”는 자기의 선교 계획을 발표하지. 로마서 15. 자 로마제국의 동반구에서의 선교 사역을 완수한 후, 그는 서방에서의 자신의 선교의 한 새로운 국면을 착수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스페인으로 여행하고자 해요. 지원을 확보하고자 해요. 지금 로마 제국의 동반구에서의 선교를 위해서는 어떤 교회가 바울의 후원 교회였어요? 안디옥 교회가 후원교회였어요. 그런데 이제 바울이 자기의 선교지를 로마제국의 서반구로 옮겨감에 있어서 안디옥은 너무 멀어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서울의 큰 교회가 좀 지원을 해야 되겠다 이 말이예요. 그래서 로마 교회를 자기의 후원 교회로 얻으려고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안디옥교회가 나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기도해 주고, 헌금해 주고, 후원해 주는데, 이제 로마 교회 당신들이 나를 좀 후원해 주라.”는 편지예요. 그러므로 바울에 의해 설립되지도 않았고 또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로마 교회에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대한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적절히 소개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그의 사도직에 대한 해명뿐만 아니라 그가 전하는 복음에 관하여도 설명해야 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고린도 그리고 기타 지역, 예를 들어 빌립보 같은 곳은 바울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에 대적하는 도전들이 일어났었죠?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의 복음을 부정하는 그들과, 또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그의 사도직을 부인하는 자들)과 또 빌립보서 3장을 보면은 그의 복음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하는 자들과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자기의 그리고 사도직의 권위를 위해서 죽기 살기 싸웠다고... 큰 신학적인 논쟁을 벌였죠?

아마 이 논쟁들을 들으면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거 바울 신학이 좀 문제가 있다고 하던데’ ‘거참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던데’ ‘모세 율법도 필요 없고 뭐, 윤리 그런 것도 필요없고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상당히 자유주의라고 하던데’ ‘거 바울 사도직에 좀 문제가 있다고 하던데?’ 누구나 들으면 바울이 고린도나 갈라디아나 빌립보에서 이렇게 그의 복음과 그의 사도직에 대해서 도전한 자들과 엄청난 논쟁을 벌인 것을 간접적으로 멀리서 들으면 그의 속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그런 의심이 가겠죠? “거 바울 신학이 너무 진보적이고 자유주의라.”, “뭐 그 사람이 다메섹 도상에서 어떻게 사도가 되었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렇게 주장하는데, 예루살렘 원래 사도들은 인정 않는다지?”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도 소문이 굉장히 안좋게 났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의 신학, 그의 복음이 의심될 가능성이 많아. 더구나 그 사람 가는곳 마다 싸움만 열심히 했다고 하던데, 아주 뭐 쌈쟁이라고 하던데, 성격이 아주 고약하고 글러 먹었다.”고 이렇게 소문이 고약하게 났을 가능성이 많다고...

그래서 로마서 내에서 그는 자신이 가르친 복음에 관한,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며, 시종일관 유대인들과 유대파 기독교인들간에 비난을 시키고 이방인들에 대한 자신의 사도직을 해명하면, 그의 장래의 선교 계획을 설명함과 아울러 또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조심스럽게 주장하는 예외적으로 긴 서론과 결론으로써 이를 대신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자기의 복음과 사도직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어서 오해를 잔뜩 하고 있음직한 이 로마교회를 바울이 자기 후원 교회로 얻으려니까 자연히 어떻게 해야 돼요? 자기 복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야 해.

그것에 도전하는 유대주의나 유대 기독교도들의 주장에 대해서 이 주장을 물리치며 자기 복음의 진리등을 체계적으로 로마 교회에 전달했죠? 또 자기 사도직의(이방인 사도직의) 권위를 주장했다고. 그래서 로마서가 이렇게 체계적인 바울의 편지가 된거란 말이야. 로마서의 또 하나 특징이 뭐야? 예외적으로 긴 서문과 결론, 어느 편지에도 이렇게 긴 서문이 있어? 1:1-15까지의 긴 서문, 그 다음 이 결론 자기의 여행 계획을 길게 밝히는 이 15장의 후반부로... 이러한 로마서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소개하고자 하는 필요성 하나만으로서는 로마서의 모든 특성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로마서를 쓴 직접적인 목적은 금방 드러나지? 그래 뭐라고? 로마 교회에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잘 소개해서 로마 교회를 자기 서방 선교의 후원 교회로 얻으려고 하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이라고요. 그런데 그 한 목적 만으로는 로마서의 모든 특징을 다 설명할 수 없어. “다른 목적들이 있지 않나?” 하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어. 그래서 본 서신의 보다 근본적인 저작 목적에 관련한 토론에 있으며, 이 토론의 중심적인 로마서를 통해서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몇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돕기위한 것이었나? 아니면 로마 교회의 특수한 사정과는 별도로 그가 또다른 집필목적을 가지고 있었느냐? issue는 이 토론의 중심문제는 하나의 직접적인 목적은 학자들이 여러가지로 토론하는데 그 토론의 issue는 뭐냐 하면 이거야.

바울이 이 편지를 통해서 로마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울려고 했는가? 아니면 로마 교회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도리어 자기의 상황과 관계되는 편지를 썼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마 교회가 갈라디아 교회같이 가령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주의자들 간의 복음에 대한 상이한 이해로 갈등하고 있었느냐? 그래서 바울이 이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이들간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느냐? 이것이 로마서를 쓴 목적중의 하나냐? 아니면 로마 교회의 어떤 문제와는 관계없이 이 로마서를 썼느냐? 그게 이제 문제예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학자들 논쟁은 다음과 같은 4가지 factor, 요소들로 논쟁을 한다고. 그러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요소들을 잘 살펴봐야 한다.

첫째로 로마교회의 상황, 둘째 로마교회의 문제들, 세째 로마서의 일반적인 체계적 특성, 네째 마지막으로 29page의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바울의 상황, 이 네가지 요인들을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를 쓴 또 하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잘 알게 된다고. 자 그럼 그걸 하나씩 검토해 보는데.

첫째 로마교회의 상황. 로마 교회의 기원은 아주 모호하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은 사도 베드로가 세웠다고 하지?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아주 모호하다고-- 어떻게 발생했는지 잘 몰라요. 누가 세웠으며? 아마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 그냥 여행하고 이주해 살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겼을 가능성도 있고 --어떤 사도가 세웠다기 보다는-- 하여간 누가 로마 교회를 세웠는지는 아주 모호하며, 그 교회의 상황에 관한 단서도 거의 없어요. 만약 로마서 16장이 바울이 쓴 로마서 원본의 한 부분이라면, 로마서 16장은 뭘로 가득차 있어요? 인사로 가득차 있죠. 누구 누구에 대한, 그런데 이게 사본학적으로 로마서의 원본에 부착된 편지였느냐, 부분이었느냐에 좀 문제가 있어요. 사본학적으로 로마서가 15장으로 끝나는 사본이 있어요. 16장이 없는 사본이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16장이 원래 로마서의 편지였느냐? 또하나 내용적으로 바울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교회에 왜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로마서 16장은 바울이 로마서에 부친 인사장이 아니고 아마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 덧붙인 인사장일 거라고 해요. 아마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다 에베소에 있는 바울의 친구들일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16장이 로마서의 원본의 일부냐? 아니냐 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논란 거리예요.

만약에 16장이 바울의 로마서의 원본의 일부라면, 우리는 로마 교회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어요. 16장으로 부터. 16장은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가 아마 서로 다른 인종적, 지방적 배경을 가진 매우 다양한 가정 교회들로 구성된 복합적 모임이었음을 보여줘요. 이것 외에는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의 특성이나 당시 사회 상황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어요. 이런 상황속에서 어떤 학자들은 (?) 같은 학자는 주후 1C 여간에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 관한 몇가지 단편적 정보로 부터 로마 교회의 상황을 추론해 내려고 노력해 왔어요.

몇몇 문헌적인 그리고 고고학적인 행적은 로마의 유대인 사회가 아주 잡다한 성격을, 아주 복잡한 다양한 성격을 지녔고, 많은 다양한 회당들이 공존하였으며, 그러니까 팔레스티나에서 최근에 이주해와 회당을 이룬 히브리인들의 회당도 있었고, 헬라말을 쓰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도 있었고,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도 또 고린도에서 이주한 사람들, 아시아에서 이주한 사람들 각 지역마다 따로따로 회당을 이루는 다양한 공동체였어요. 이것들은 서로 다른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신학적, 집단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과 쟌브레인은 이것이 이렇게 다양한 유대 공동체가 공존한 것이 로마의 제4대 황제 클라디오가 칙령을 발포해서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을 추방한 칙령의 배경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클라우디오의 전기를 쓴 로마의 역사가에 의하면 황제 클라우디오가 어떤 크레토스(?) 때문에 (?)크레토스의 선동에 의해서 소요를 계속했던 유대인들을 로마로 부터 추방했다고 그래요. 근데 이 크레토스는 유용한자란 뜻이죠. 그래서 당시 노예들이 많이 가지고 있던 이름이예요. 노예들은 크리스도스라고 많이 붙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노예가 유대인들간에, 로마의 유대인들간에 선동을 해서 유대인들간에 싸움이 벌어졌다고 해요. 그래서 로마의 치안이 어지러워지니까 이 클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저 로마 밖으로 몰아내는 칙령을 발표했다는 거야. 요새 학자들은 거의 가 이 크리스토스가 주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는 거야.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냐 안하냐 이 문제 때문에 로마의 유대 공동체에서 일대 싸움이 벌어졌다고 해요. 그런데 이 ? 같은 이방인에게는 그리스도 같은 이런 이름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헬라말로 그리스도에서 온 말인데 기름붓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말이예요. 그래서 히브리어의 메시야의 직역이야. 문자 그대로 번역해봐요.

그래서 구약적인 하나님께서 그의 일군으로 내세우기 위한 하나의 의식으로 기름붓는 그런 종교사적 배경이 없는 그런 배경을 모르는 헬라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플래토니우스가 크레스토스를 아마 이말이 요말이겠지? 이것은 당시 노예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이름이라고 바로 이 말이겠지 하고 이렇게 쓴거라? 이 뭐펠이나(?) 브레인은(?), 두 가지 사실을 연결시켜 놓았지? 하나는 일세기의 로마의 유대공동체가 아주 다양한 언어적, 신학적, 지방적, 사회적 계층들로 구분되어서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고 서로 다른 공동체, 서로 다르면 뭐가 일어나겠어요?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요?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 그 공동체로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

둘째 사실, 클라우오디오스가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다 추방했다는 사실. 이 두 사실을 지금 연결해서 로마의 교회가 어떤 상황에 있겠나를 지금 추론하려고 해요. 대개는 플래토니우스가 크레스토스를 크리스티아니(?) 교파의 창시자 크리스토스를 지칭한 것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간주해요. 이 칙령의 발효시기를 기독교 유대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갔을 때를 미루어보아 학자들은 대략 주후 49년으로 추정해요. 18장에 보면은 바울이 어떻게 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해요? 고린도에서 누구를 만나? 로마에서 온 유대 그리스도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지. 그들이 마침 천막업을 하기 때문에 바울이 거기에 동업자로 들어가요.

그런데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왜 로마에서 고린도로 옮겨 왔느냐? 아마 그 클라우디오의 칙령, 유대인들을 다 몰아내는 칙령 때문에 이들이 짜가지고 고린도로 이주해 오지않았느냐? 그러면 이 칙령이 주후 49년 쯤에 반포되었을 것으로 본단 말이예요. 분명히 클라우디오의 제위 기간중에 로마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관한 매우 심각한 논쟁이 있었고 당시 여러 회당들은 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들을 취했었던 것 같다.

크라우디오의 제위기간 동안에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관한 매우 심각한 논쟁이 있었고 당시 여러 회당들은 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었던 것 같다. 그 논쟁은 너무나도 심각해져 가지고 급기야는 사회 평화를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그리하여 클라우디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내어 쫓아 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추방된 유대인들 중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유대파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주후 54년 네로가 5대 황제로 즉위하고서야 비로소 그 추방령이 폐지되고 유대인들은 로마로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로마로 돌아온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 이방인들의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버린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이제는 자신들이 소수가 되어버린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어요.

원래 로마 교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였으나 클라우디오의 칙령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났다가 7-8년후에 다시 로마로 돌아와 보니 그곳의 교회에 그동안 누가 다수가 되었어?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다수가 되었단 말이야. 게다가 그들은 로마 사회의 극심한 반 유대주의 감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뭐펠(?)에 의하면 이들 유대파 기독교인들이야 말로 롬 14:1-15:13에 등장하는 약한 자이며,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목전에서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다수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유대파 그리스도인과 한 교회 안에서 함께 하도록 도와주며 그리고 기독교에 반대하는 대다수 유대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에 문제가 있어요. 그 문제가 뭐야? 그러나 롬 14:1-15:13절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을 구체성을 결여하고 좀 일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가령 고린도 교회에서 약한 자, 강한 자에게 주는 가르침과는 성격이 좀 달라. 비슷한 내용이면서도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이라고... 로마서에서는 아주 일반적이고 원칙적인데 그런 것들을 고려하고, 이 로마서의 약한 자들과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동일시 하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음을 감안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그런데 로마서의 약한 자들은 채식주의자로 나타나 있어. 유대인들은 채식주의를 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문제가 있다고. 로마서의 약한 자들은 정말 유대 그리스도인이었나? 뮈펠은 그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랬을 것 같지가 않다 이말이예요. 그래서 이렇게 약한 자들과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동일시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이런 것들을 감안한 쟌 레인(?)은 이 리펠(?)이 주장한 것 같은 의견을 약간 수정해 가지고 이렇게 주장해요. 자신들의 다양한 회당적 배경에서 연유하는 유대 기독교인들 내부의 상이점들과 이제 주류가 되어버린 이방 기독교인들과 마찰등이 여러 가정 교회들과 기독 교회의 분열을 조장했다. 그 사실에서 큰 의미를 부여해서 쟌레인(?)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이 다양한 그리스도인 분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함이었다. 뭐펠(?)은 그냥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는데 그건 너무 단순한거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또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다양한 분파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아는 유대인들은 채식주의자는 아니었는데 혹 다양한 유대 분파중 일부 유대 분파는 채식주의자 였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유대 그리스도인들간의 갈등, 그들과 이방인들과의 갈등, 이 갈등 구조를 좀 복잡하게 생각해야지 단순히 유대 그리스도인들 대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생각하면 안된다. 이런 식으로 쟌레일?은 말한다고... 여기서 뭐펠?과 쟌브레인은 로마서를 쓴 목적을 무엇으로 결정하려고 해? 로마교회의 상황에 의거해서...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왜 썼다고? 로마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또는 다양한 분파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복음을 옳게 이해하고 또 옳은 복음 위에서 서로를 관용하고 하나로 묶기 위해서였다고.

둘째로, 로마 교회의 문제들, 지금 이야기한 로마 교회의 상황들 보다 좀더 구체적으로, 로마 교회의 문제들이 뭐였느냐? 그것과 로마서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대입시킬 수는 없느냐? 비록 40년대와 50년대에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상황이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에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더라도 그것으로 부터 로마서의 목적에 관해 뮈펠과 브레인이 이끌어내는 추론은 로마서에서 정말 바울이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을 연합시키려 하거나 또는 다양한 유대 가정 교회들을 연합시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석적으로 증명되기까지는 여전히 추측으로만 남을 뿐이다. 로마서 자체에서 주석적으로 바울이 로마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느냐 않느냐를 실제로 ?로 바꾸어 선구자적 저술 이후 상당수의 많은 학자들이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다양한 논증들이 유대파와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왔다. 율법의 행위들에 의해 구원 얻는다는 유대인들의 교리에 대항하는 바울의 논쟁에 호소하여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의 투쟁을 위해서 혹은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로마서를 기록했다고 믿는다.

로마서를 왜 썼다고? 이 사람들에 의하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대항해서 올바른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썼다. 반 율법 주의적인 결론을 끌어내는 것에 대항하는 바울의 논쟁에 근거해서, 또 아직도 유효한 유대인들의 구원사적인 특권들에 대한 바울의 주장에 근거해서, 그리고 이방 기독교인들의 교만에 대한 그의 경고에 의거해서, 또 다른 학자들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오류를 조정하거나 그들의 반 율법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전혀 상반된 견해죠? 일단의 학자들은 뭐라고? 아 바울이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된다는 복음을 로마서에서 체계적으로 펼치지... 그것에 근거해서 뭐라고 주장해요? “아 유대주의자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바울이 이 편지를 썼나보다.” 갈라디아서와 비슷한 목적이 있네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이 로마서에 또 뭐가 있어? 바울의 복음을 방탕주의로 해석하고, 야 은혜로 구원 받으니 죄를 더 짓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로마서 6장에, 또 로마서 9-11장까지 보면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완전히 떨어져나간 존재가 아니고 그들이 결국 구원 받는다는 것을 펼치지. 또 이방인들이 교만해진 것을 경고하지. 이런 것을 볼 때 아 바울이 이 교만해지는 이방인들 반율법주의로 나가는 이방인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예요.

14:1-15:13에 있는 강한 자와 약한 자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과 아울러 양자의 특성을 취급하여 또 어떤 학자들이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유대파 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려 한다고 주장해요. 사실 예일 대학 교수였던 리니?는 로마서 14:1-15:13까지에서 강한 자와 연약한 자의 다양한 fator를 지닌 서로 다른 다섯개의 집단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고 강한 자, 조금 덜 강한 자, 중간적인 존재, 덜 약한 자, 아주 약한 자 이렇게 다섯 종류의 그룹이 로마에 있었대. 그래서 로마서 전부를 이런 집단들의 문제를 해결해서 그들을 연합시키기 위한 시도로 설명하는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세가지 견해를 이야기 했어요. 하나는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을 대항해서 그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다는 설, 이건 F.B.바우어에서 나온 설이지. 둘째로는 반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썼다는 설, 셋째는 약한 자와 강한 자,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화합하기 위해서 썼다는 설인데 그것에 좀 지나친 대표자가 리니어예요. 약한 자, 강한 자가 두 그룹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섯 그룹이나 있었다는 거예요. 자 오늘은 여기까지.

 

 

바울서신 // 8

 

 

 

로마서 2

 

 

 

 

1.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지요? 19페이지 중간까지. 자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유, 또는 로마서를 쓴 목적을 규명함에 있어서 4가지 요인들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로마 교회의 그 문제들에 있어서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내가지고 로마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울려고 했느냐? 바울이 모든 편지를 그런 목적으로 쓰지요? 고린도에는 고린도 교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便紙를 쓰고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서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고, 데살로니가 전후서도 마찬가지로 거기서 벌어진 問題를 해결하기 위해서 쓴거냐? 그게 하나의 토론의 요인이지. 근데 로마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별로 아는바가 없으므로, 로마서 자체내에서 로마 교회가 무슨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고, 바울이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가를(돕는가를) 추측해 내거나, 아니면 로마서 밖의 자료들 --아주 어렴풋한 자료들 말이지-- 그런 자료들에서 우리가 당시 로마 교회가 아마 어떤 문제를 안고 있었을 거라고 추론해 보는 정도라 이 말이예요.

근데 그 중에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아마 Claudius 皇帝의 유대인 축출이 로마 교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고, 유대인들이 나중에 NeroClaudius 皇帝의 칙령 해제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로마에 돌아왔을 때에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간에 관계가 어려워졌을 것이다이런 식으로 추론해 가서 보면, 그렇다면은 로마서의 14-15장의 자료는 강한 자나 약한 자의 문제를 혹, 그 이방 그리스도인과 유대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의 문제로 해석을 해야 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중의 하나가,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서로 옳은 복음에 근거해서 서로 잘 화합하도록 도울려고 이 편지를 썼다고 말할 수 있죠. , 그러나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추론해 갔단 말이야. 그러나 로마서 안에 로마 교회의 어떤 특정한 문제 인물이나 혹은 특별한 문제에 대항하는 어떤 특수한 논쟁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한 이의가 제기되어 왔었다. 1-11장에 걸쳐서 펼쳐지는 교리 부분에서 바울은 자기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diatribe'로 알려진 수사적 방식을 채용하고 있으며, 그의 입장에 도전하는 적수들이 실재했다기 보다는 가상의 인물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어요. 지금 거기(p19.10째줄) 문단을 나눠서는 안되는데 괜히 자기들이 나누어 가지고, 즉 그 갈라디아, 고린도 전후서 문단이 계속 이어지는 거라구. 지금까지 19페이지 전까지는 무슨 방향으로 추론해 갔어요? 바울이 로마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과의 화합하도록 돕기 위해서 아마 이 편지를 썼는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추론해 갔다구.

이제, ‘그러나로부터 거기에 대한 반론이라구.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뭐냐면, 로마서 에 바울이 어떤 특정한 issue나 또는 어떤 특정한 문제화를 다루는 흔적이 없다 이거야. 왜 그러느냐,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것은 로마서에서의 바울의 논쟁의 형식이 이른바 ‘diatribe’라는 수사적 방법을 쓰고 있는데 ‘diatribe’는 논객이, 논제를 전개하는 사람이 실제 자기 논지에 반대하는 적수와 맞상대로 토론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 논지를 일방적으로 전개해 가는 하나의 수단으로 가상적인 적을 설정하여서 그 가상적인 적이 자기 논지에서 이렇게 반박을 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 간다는 식으로 전개해 가는 수사적 방법을 말한다구. 그래서 R.Bultumann의 원래 博士學位 論文이 로마서 9-11장까지의 헬라 수사학의 한 방법인 ‘diatribe’ 형식에 대한 관찰이었다구.

그래서 그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로마서 1-11장의 바울의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이 복음이라는 설명에 간혹 반박하는 질문을 한다구. 가령 3:8, 6:1 이런 식으로 특히 9-11장에서 바울의 논지에 반박하는 문제 제기가 가끔 일어나요. 그게 실제 로마 교회에 어떤 바울의 논지에 적대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에 반박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바울이 자기의 복음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당시 헬라세계에 유행했던 ‘diatribe’라는 수사학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구. 영어로 이걸 「 」라고 읽어요. 그런데 하여간 영어로 읽든지, 원래어로 읽든 지금 로마서에서의 바울의 논술 형식이 이런 헬라 세계에 만연되었다고 보고 diatribe라는 수사방법을 썼다고... 그러면 무슨 소리예요?

로마서는 로마 교회의 어떤 문제 인물이나 --바울을 적대하는, 바울의 복음에 반대하는 문제 인물이나-- 또는 로마 교회의 어떤 문제와는 전혀 관계 없이 순전히 바울이 자기의 복음 설명의 하나의 수사학적 방법으로 쓴 거란 말이예요. 그러면 로마서는 로마 교회의 문제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이지.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또 갈라디아서나 고린도 전후서에 나오는 그의 적대자들이나 과오를 범하는 그의, 그가 그리스도인 만든 자들과의 논쟁과 비교해 볼 때, 바울의 로마서 논쟁은 아주 일반적인것, 일반화 된 것이며 특정한 적대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아요.

한번 생각해 봐요. 갈라디아서는 거기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 거짓 선생들에게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고 또 그들에 휩쓸린 갈라디아인들에게 이 어리석은 갈라디아 인들아!” 하고 바울이 얼마나 자주 지적해서 말을 해요? 고린도 전후서도 마찬가지이지. 거기서 바울에게 대항한 녀석, 또 무슨 異邦人도 범하지 않는 음행을 범한 녀석, 또 바울의 사도직이 엉터리라고 하는 바울을 냉소적으로 말하는 초특급 사도들... 뭐 아주 생생하게 그들의 문제를 나타낸다구. 또 강한 자들, 즉 이방의 우상 숭배하는 Festival에 열심히 참여하는 그런 강한 자들, 또 뭘 먹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결혼해도 부부가 같이 생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약한 자들, 또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온갖 혼란을 일으킨 자들, 성만찬 식탁에서 막 먹고 마시고 과소비하는 부자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어 굶주리는 가난한 자들, 또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 바울이 다루는 어떤 특수한 issue가 나오지 않고 그 issue들이 아주 일반화 되어서 나타난다 이말이예요. 심지어 권면 부분에서 까지도, 12-15장의 윤리적 권면 부분에 까지도 그의 권면은 구체적이라기 보다는 보다 일반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 12:3-13까지에서 마치 그가 고린도전서 12-14장에 다루었던 방식대로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제시하며 그런 맥락에서 영적인 은사들을 취급하고 있어요. 주장은 같지.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제는 같아요. 성령의 은사 문제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몸으로 이해되는 교회의 맥락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똑 같은 주제라.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단지 대강적인 원리들만 취급하고 있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그러했던 恩師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에 관해서 특별한 교훈을 주지 않아요.

가령 방언을 하되, “집에 가서 하라. 예배때는 삼가하라.” 또는 예언을 하되 차례, 차례로 한 사람씩 하고 다음 사람이 하려고 하면 전에 한 사람은 주저 앉고 또 필요하면 한 사람이 통역하고는 식으로 고린도 전후서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구.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그런게 하나도 없어요. 방언 은사도 있고 예언 은사도 있다는 이야기만 하지, 방언을 어떻게 해야 돼느냐? 바울은 뭐래. 방언은 집에 가서나 하라고 그러지. 그들은 교회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뭐 그게 별로 좋은게 아니라고 자꾸 그런다구. 방언은 자기만을 돕는 것이지 남 돕는게 못 되니까 은사중에서는 제일 하급 은사니까. 그거 너무 자랑하지 말라. 또 자기가 무슨 성령의 영감 받았다고 혼자 그냥 설교를 여나므시간씩 하면 안된다 이말이야. 그 다음 사람이 또 영감을 받았으면 그 사람이 하도록 먼저 사람은 앉고, 이런 식으로 하라, 차례로 하라. 이렇게 설명해 줘요.

그런데 왜 그러느냐?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 은사들 때문에 예배모임 때마다 시장 바닥이 된다구. 가락시장만큼 시끄러워. 가락시장은 안가봤지만... 난장판이 되었어요. 서로 방언, 예언, 한쪽에서는 그냥 幻想을 본다고 난리를 피우고, 완전히 이건 시장이 되어 버렸다구. 그래서 바울이 질서를, 규율을 잡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엔 그런게 하나도 없어요. 아주 은사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들을 제시할 뿐이라. 이게 다 무슨 말이야? 로마서는 로마 敎會의 어떤 특별한 issue를 다룬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교훈을 로마 교회의 issue와는 관계 없이 다룬거 아니냐 그 말이지.

또 로마서 14-15장과 고린도전서 8-10장의 비교는 둘 다 연약한 자, 강한 자 문제를 다루는 것은 공통점이지. 그러나 전자에서 바울이 경쟁적 관계에 있는 연약한 자와 강한 자, 두 진영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적인 갈등의 상황에서 얻은 강한 자와 약한 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친교 속에서 어떻게 적절하고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관한 일반적 원리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줘요. 아까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14장과 비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로마서 14-15장의 연약한 자와 강한 자의 관계를 다루는 장과, 고린도전서 8-10장의 관계를 다루는 같은 관계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8-10장을 비교해 보면 또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구.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들이 생생해. 아까 이야기한대로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다 먹어야 되느냐? 안 먹어야 되느냐? 이방인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같이 식사를 해도 되나, 안되나? 또 그 당시 , 직업단위로 그 神殿에서 벌어지는 Festival에 참여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연약한 자와 강한 자들이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은 상황이지... 거기에서 바울이 요런 문제들을 하나 하나 다루어요.

그러나 로마서 14-15장에는 구체성이 전혀 없고 일반적인 원칙만 다루는데, 로마서가 고린도 전후서 후에 쓰였으므로 곧 고린도의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된 후에 쓰였으므로 뭐라고 말하 수 있느냐? 고린도의 구체적인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관계의 갈등에서 얻은 체험에서 --그들을 지도한 상황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울이 로마 교회에 일반화 해서 이런 연약한 자와 강한 자의 문제는 어느 敎會에나 있어요. 表出양식, 구체적인 표출 양식은 조금 다를지 모르나 항상 있는 거라구. 한국 교회에도 있고, 미국 교회에도 있고, 고린도 교회에도, 로마 교회에도 항상 있는 문제라구. 연약한 자와 강한 자의 문제, 이 문제를 로마 교회에 그런 문제가 異邦 그리스도인들 강한 자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 약한 자들의 실재를 지금 머리 터지게 싸워서, 바울이 그들을 교정하려고 그런거 같지는 않다 이말이예요. 로마서의 이런 일반적 특성들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그 편지가 로마 교회의 어떤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와, 또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한 목적도 로마 교회 의 어떤 오류들을 시정하려 하거나 혹은 분쟁을 일삼는 분파들을 하나로 연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견해들을 부인한다 이말이예요.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무슨 이야기였어요? 아까는 로마, 주로 Claudius의 칙령을 배경으로 해서 많은 추론을 한거지. 처음에는 아마 유대인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 교회에 다수였을 거지. 그들이 다 쫓겨났다가 몇년후에 다시 돌아오니까 그 사이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다수가 되었어요. 유대 그리스도인과의 그 관계에 주로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로마서에서 다루는 중심 문제 중의 하나가 유대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문제아니냐? 9-10까지, 더구나 로마서 14-15의 연약한 자, 강한 자 이런 문제 다루지 않느냐? 이렇게 아마 바울이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옳바른 복음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지 않았나?” 이런 식으로 argument해 가는 거예요. 지금 이 19페이지 후반의 그러나로 부터 시작해서는 그 반대로 지금 반증, 반대로 논증하고 있는 거예요.

첫째, 로마서의 모든 토론은 구체적인 적수(적대자)를 두고 그들과 토론한다기 보다는 가상적인 적대자를 생각하고 벌이는 수사적 방법인 diatribe에 부하다.

둘째는, 로마서에서 다루는 issue들은 전부 구체성을 결여하고 일반적인 원칙적 토론이지 구체성이 없다.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문제 연약한 자와 강한 자 다루는 문제 다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것이지 구체성이 없다. 그런걸 보면은 바울이 로마서에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편지를 쓴 것 같지 않다는 그 말이지.

그러나 또 여기에 대한 반론, 이런 의견을 제시하는 --앞에도 내가 썼지-- R.J. Karris, G. Bornkamm, V. Furnish --Dallas에 있는 Sauthen Massachusetts University Ferkins School Theology에서 교수하는-- 이런 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데, 거기에 반해서 K.P. Donfried는 강력한 반론을 제기하는데 그가 제기한 것 이 diatribe 라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요. 도대체 바울 당시에 문학 쟝르로서에 diatribe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몇몇 고전학자들에 호소하면서 그러니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헬라의 수사 형식하나가 “diatribe"로 특히 이 stoic, 냉소주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많이 활용된 문학 쟝르라 그렇게 봤다구. stoic 주의자들이나 이 냉소주의 철학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자기들의 철학을 가르칠때 관중들 모아놓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가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누가 자기에게 무엇을 반박한게 아니고, 자기 혼자 가상적인 적이 자기 논지에 대해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 그건 實際로 문제가 있다라는 것을 자기가 이렇게 보여준다는 식으로 전개해 나가는 그런 diatribe存在했다고 봤다구. 아주 헬라적 수사학에서 중요한 쟝르로 보았다구.

그러나 최근에 몇몇 고전 학자들이 diatribe라는 쟝르가 어디가 있어? 그런건 괜히 현대학자들이 가상한거지 그게 뭐 있었나?” 라고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어요. 그런 학자들에 호소하면서 DonfriedBultumann과 그의 영향을 받아 로마서에 있는 바울의 주장을 로마 교회의 상황과는 관계없는 ‘diatribe’라고 지적하는 자들을 공격한다. 그러니까 로마서가 로마 교회의 특정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유중의 하나가 뭐라 그랬죠? ‘diatribe’ 수사학 형식을 띄는 거지. 실제로 로마 교회에 무슨 바울의 가르침에 반대하거나 또는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

그런데 ‘diatribe’라는게 존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그걸 좀 봐야지. 고대 문학작품에 다양한 쟝르 속에 발견되어지는, 우리가 고작해야 ‘diatribe'와 유사한 것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한 H. Rahn의 결론과 그와 및 다른 학자들의 서신-수필 (letter-essay)형식 쟝르에 관한 묘사로부터 유추된 통찰을 통해서, Donfried는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곳 교회의 구체적 상황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말이예요. (거기에 그 다시 번역한 친구가 어순을 잘못해 가지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교회의 구체적 상황을 갈라디아와 갈라디아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문제에 결부시켜 형성한 자신의 생각을 사용하여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말이예요. 그러니까 Donfried가 뭐라 그러느냐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룬다 이말이예요. 그런데 어떻게 다루느냐? 갈라디아교회와 고린도교회에서 자기가 한 체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사용해서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룬다 이 말이예요.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 Donfried‘diatribe’라는 문학 쟝르가 있은게 아니고 여러 쟝르에 연극, 연설, 시 여러 문학 쟝르에 이렇게 가상적인 적대자를 상정하여서 주고 받는 그런 토론 양식은 있었다. 그래서 그걸 diatribe와 같은 토론 양식이 --여러 문학 쟝르에 diatribe 쟝르가 있은게 아니고-- 여러문학 쟝르에 diatribe 같은 그런 가상적인 적수를 상정하여서 주고 받는 그런 것이 있었는데, 로마서가 바로 그런 정도의 성격을 띄고 있는거고 로마서를 구태여 문학 쟝르로 구분한다면 letter-essay라고 해야한다. 서신의 경격을 띤 논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또는 논지를 담은 서신으로 봐야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제 바울이 구체적인 로마 교회의 문제들을 다룬다. 그런데 얼마전에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과 논쟁한, 그래서 얻은 통찰력, 또 고린도 교회에서 복잡한 문제들을 일으킨 자들과의 논쟁을 얻은 통찰력, 이런 것들을 사용하여 가지고 바울이 로마서를 썼다. 이렇게 주장해요. Donfried.

그러나 다시 이제 Donfried의 주장에 대한 또 반박 그러나, 토론이 오고 가고 하는거야. 문학쟝르로서 diatribe를 거부하고 대신에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논증에 관하여 diatribe와 유사한 문제라고 일컫는 것은 R.J. Kanis가 올바로 反駁했듯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곳 교회의 실제상황을 言及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證據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예요. diatribe라는 쟝르도 없었고 다만 여러 文學 쟝르들 속에 diatribe같은 그런 토론 形式이 있었다고 해서 그게 로마서가 그런 구체적인 證據가 되려 못되요. 아무 것도 아니라 말도 안된 소리라. 그럼 論證도 안되지. Donfried가 한 15Kg쯤 되는 프로 레슬레쯤 되는 巨人이라구. 그리고 이놈이 꼭 돼지 같이 생겼어요. 그래가지고 이 대개 신약학회 할 때마다 어디서 큰 소리가 나서 보면 거기에 K.P. Donfried가 앉아 있다구.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아주 그냥 모든 사람을 압도하는 목소리라고. 눈도 꼭 돼지같이 생겼고 괴물같이 생겼다구. 그런데 뭐 미국에 아주 Smith대학이라고 여자 대학인데, Ivilive중에 여자대학중에 하나로서 아주 좋은 대학이라구. 거기 교수하는 녀석인데, 뭐 꽤 많이 알아요. 이런 바보같은 소리나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 즉 로마서에 diatribe와 유사한 본문들 속에 보여지는 적대자들이 실존 인물인가 아니면 가증의 인물인가 하는 문제는 그러한 본문들을 상세하게 주석함으로써만 결정될 수 있는거지. 그게 진짜 diatribe냐 아니면 diatribe와 유사란 거냐?” 그런 것으로 결정될 것이 아니라 이말이예요.

, 로마서에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 문제점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 문제를 유대인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의 觀點에서 定意해요. , 유대인과가 아니고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간의 갈등의 관점에서 정의한다 말이야. 그러나, 그러면 구체적으로 보자 이말이지. 로마서 14-15장의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각각 연약한 자로, 강한 자로 指稱이 되어서 그들간의 갈등을 다루는 것인가, 로마서 14:1에서 15:13까지의 연약한 자를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 동일시 해 버리려는 것은 얌전히 설득력 있는 主張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것에 나오는 연약한주의자들은 채식주의로 나타나요. 고리를 전혀 안 먹는 채식주의자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채식주의자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게 큰 문제라. 이게 바울이 로마서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다룬다면 곧 연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갈등을 다룬다 말이예요. 연약한 자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생각을 해야 될텐데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채식주의로 나타난다구. 그런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채식주의가 아니예요. 그래서 이게 문제야.

그래서 사실상 Karris는 강한 자와 연약한 자들의 정체를 밝혀 주려는 종교사학파의 모든 시도들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이 실패야 말로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실제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로마서를 쓴 것으로 보는 자신의 견해의 근거들 중 하나라고 선언한다. 고린도전서 8-10장의 연약한 자, 강한 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확연히 쉽게 밝혀져요. 그러나 로마서의 14-15의 연약한 자와 강한 자들은 그들이 누구였는지 밝힐 수가 없단 말이예요. 그들이 어떤 자들인가. 어떤 과거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지금 어떤 신학적 주장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이 한쪽은 연약한 자, 채식주의자였는가? 그리고 해와 달, 이런 것을 존중하고 했나? 여러가지로 종교사학적으로 이들이 유대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들이 무슨 이방 금욕주의자들이었다.” 뭐 여러가지로 생각해보나 그게 다 성공하지 못했다 말이야. Karris는 이점을 들어서 바울이 로마 교회에 구체적인 狀況을 지금 다루는게 아니고 일반적으로 原則的으로 다루는데 채식주의를 하나의 illustration으로 다루고 있다고 봐야된다 그런 말이예요.

또 로마서 16장의 인사목록으로 미루어 보아서 로마의 여러개의 가정 교회들이 실재했을 것을 확인한다 해도 그것은 서로 상이한 인종적, 신학적 집단들의 정체를 밝히는데는 별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여러 집단이나 가정 교회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그들을 하나의 교회로 끌어 모으려고 했다는 증거를 로마서에서 찾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Karris같은 사람들은 로마서가 로마 교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쓴 편지가 아니다.” 이말이죠.

다른 한편 로마서 14:1-15:13의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한 바울의 충고를 그가 고린도교회의 分爭을 해결하였듯이 양자 사이의 올바른 관계 수립을 위한 그의 일반적인 원리의 방식으로서 단순하게 파악하려는 시도도 역시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9-10장에 나오는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분쟁의 근본은 곧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 반면에 로마서 14:1-15:13에서는 문제의 일단이 약한 자들의 채식주의와 그들의 어떤 날 또는 달을 지키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Karris 같이 로마서가 일반적인 편지다. 뭐 로마 교회의 연약한 자 강한 자가 구체적으로 있어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 보다는 바울이 어느 교회나 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가 있어서 복음의 자유를 분명히 깨달아 가지고 그 자유를 행사하는 자 그런데 그 도가 좀 지나쳐서 윤리적 한계를 넘어서서 행사하는 강한 자와, 복음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깨닫지 못해가지고 율법주의로 생각하는 그 연약한 자들이 어느 교회에나 항상 있는 법이라고 바울이 생각하고, 그러므로 로마 교회에도 그런자들이 있어서 그런 문제가 있을 거다 생각해서 자기가 지금 최근에 고린도에서 실제로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분쟁을 해결하는데서 오는 그 체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지금 로마 교회에 일반적으로, 원칙적으로 썼다면 그러면 무엇을 예로 들어서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문제를 바울이 썼을 거예요.??? 론 예를 들어서 썼겠지 왜? 고린도 교회에서 그래서 실제로 바울이 다룬 문제가 뭐예요?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이 첨예한 대립을 보인 문제가 뭐예요? 우상에 바쳐진 제물아니야.? ? ? 그러니까 그것을 예로 들어 가지고 로마 교회에 쓸거 아니냐 이말이지.

로마 교회와의 구체적인 관계가 없이 순전히 고린도에서 얻은 체험에 근거해서 바울이 일반적인 충고를 로마인들에게 주고자 했다면 그 예를 무엇으로 들었겠어? 이방 사회에서 항상 일어나는 가장 절실한 문제, 그리스도인들로서 이제 자기들의 community, 지역사회의 잔치에 참여할까 말까, 시장에 나와서 팔리는 모든 고기는 우상에게 한번 바쳐진 의식을 통해서 도살되었는데 그것을 먹어야 되느냐 이게 아주 첨예하게, 아주 절실한 문제지. 그걸 예로 들어서 로마인들에게 썼을것 아니야. 그런데 로마서 14:1-15:13에는 그게 안 나온다구. 도리어 뭐가 나와요? 전혀 다른 문제, 채식주의 문제, , 달 이런 절기 지키는 문제가 나온다구.

이것은 우리로 뭘 생각하게 하죠? “아 로마 교회에 진짜 채식주의 문제가 있은 모양이지? 아니면 날, 달을 지키는 연약한 자들이 있은 모양이지?” 이렇게 우리를 상상하게 하죠. 그러니까 지금 이 증거가 어렵게 되어 있다구. Karris는 뭐라고 주장한다구? 이 로마 교회의 연약한 자들의 종교사적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그냥 알 수가 없어. 이들이 유대인이었다고 할 수가 없단 말이야. ? 유대인들은 채식주의가 보통 아니었는데, 혹 옛날 고대 문서가 갑자기 어느날 발견이 되어서 유대인들중 일부가 채식주의자였다는 것이 발견되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지금까지는 이들을 유대인이라 할 수 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알려진 유대 공동체 어디도 채식주의 아닌자 없으니까. 그리고 충고의 이 일반적 성격 이런 걸 들어서 바울이 로마서에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고린도 교회에서 다룬 체험에서 나온 통찰력을 일반적으로 로마인들에게 주었다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야.

그러나 반면에 그렇다면, 아 고린도에서 실제로 다룬 문제 --로마도 이방인 세계니까 거기서 실제로 일어날 문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야 되느냐 안되느냐? 偶像 崇拜가 곁들여진 Festival에 참여해야 되느냐 안되느냐?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 친구가 식사에 초대하면 가야 되느냐 마느냐? 이런 문제를 다룰 것이지, 전혀 다른 채식주의 문제, , 달 문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이것은 로마 교회에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거 아니냐?” 이런 식이야. 지금 증거가 어떻게 되요? 서로 이 말도 맞는 거 같고 저 말도 맞는 것 같지? 여러분들 이렇게 증거를 양쪽 논증,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증거를 대고 그 증거의 무게를 달아야 돼요. 어떤게 더 무거운가? 무게를 달아야 돼요. 이렇게 토론해 가는 거예요.

만일 로마서 14:1-15:13에서 바울이 로마 교회의 실제적인 상황에 관하여 언급함이 없이 단순히 보다 양심이 주저됨이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그 약한 자들이지--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강한 자들이지-- 사이에 적절한 관계에 대한 원리만을 논하려고 했다면, 그는 고린도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고린도의 두 집단 사이의 문제들을 예로 들어 그것을 논의하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그 문제는 로마에서도 분명히 절실한 문제라. 채식주의자와 특정한 날 준수에 관한 언급은 로마서 14:1-15:13에서 바울이 로마에 있는 특수한 그리스도인 집단을 취급하고 있음을 시사하지 않는가?

, 여러분들 지금까지 복잡하게 주장이, 서로 증거를 대면서 논쟁하는 것을 봤다구요. 지금 구분에서도 한쪽은 바울이 로마서를 뭐라고 썼다?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썼다. 다른 한쪽은 아니라. 로마서는 로마 교회와 관계없이 일반적인 바울의 충고의 전제다.” 양쪽을 정리하면, 로마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썼다는 사람들은 어떤 증거를 대는 거야? 아주 일반적인 반증으로써 로마 교회의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Claudius 황제의 칙령 때문에 그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또 하나 뭐였지? 연약한 자와 강한 자의 문제, 이거 뭐 보며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 고린도 교회에 얻은 통찰력을 일반적으로 일반화해서 쓴 것이면 아 ? 를 예로 들어서 할 것이지 왜 구체적으로 아주 구체적인 채식주의나 날, 달 준수하는 문제를 issue로 삼는냐 이런거지. 이런거.

반면에 로마서가 로마 교회의 문제와 관계없이 일반적인 편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뭘 증거로 삼아요? 이 로마서의 적대자는 진짜 적대자가 아니고 가상적인 적대자를 지금 설정해서 벌리는 ‘diatribe’형식이다. 또 그 충고가 고린도서나 갈라디아서와 비교해 보면 일반적이란 말이야. 성령의 은사문제 다루는 것이라든지, 또 강한 자와 약한 자 다루는 문제도 굉장히 일반적인 거라구. 또 하나 뭐예요? 이 약한 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 유대 그리스도인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니까. 지금 이런걸 왔다갔다 했단 말이야. 어느것이 더 설득력이 있은거 같애? 여러분들! 증거가 어느것이 더 무거운거 같애? 저울이 어느쪽으로 더 기우는것 같애?

자 그다음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몰라요. 우리 이런 때는 양쪽의 증거가 아주 팽팽히 맞섰다.” 그렇게 봐야 된다구. 팽팽히 맞서 있어요. 지금. 그러니까 이제 다른 요인들도 봐야지요.

 

<세번째 요인- 로마서의 일반적, 체계적 특성> p25

여기 제기한 마지막 질문에도 불구하고 로마서가 대체로 일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로마 교회에 대한 바울의 지식은 별로 많거나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로마서는 수신인들의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아주 막연한 언급들과 아울러 그 일반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바울의 서신들 중에서도 매우 유별나다. 그것은 또한 바울의 복음에 대한 아주 광범위 하고 체계적인 해설을 한 서신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 특성 때문에 Melanchthon은 로마서를 기독교 교리의 개요라고 명명하며 다른 종교 개혁자들도 그것을 그리스도인 신앙의 조직적 교리 체계로 취급했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기독론, 종말론, 성찬, 교회정치등에 대한 포괄적인 제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와같은 고전적인 이해는 더 이상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일반적 권면을 동반한 구원론에 대한 충만하고도 체계적인 강해는 몇몇 현대 학자들로 하여금 바울이 그 서신을 기록한 의도 속에는 <교리 문답적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代表的으로 獨逸의 로마의 큰 註釋을 쓴 O. Michel의 같은 교수들이어요.

로마서의 체계적이고 일반적인 특성은 여타의 바울 서신들 사이의 공통된 주체들과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하게 보여진다.

*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고 은혜에 의한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얻는 의임됨, 칭의(1-11에 체계적으로 전개, 3-4, 고전 1:30, 고후 5:21, etc에 덜 체계적으로 산재해 있어요).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로마서 4, 갈라디아서 3).

* 아담과 그리스도(5:12ff, 고전 15:22ff, 45ff).

* 율법, , 그리고 죽음 아래 놓여 있는 육신의 속한 사람의 비참함(7:7-25),고전 15:56f).

*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심, 성령의 증거와 우리의 양자됨(8, 4:4-6).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그의 지체들로서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이 은사들, ? (12, 고전 12-14).

*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14-15, 고전 8-10).

이런 공통된 주제들의 목록과, 신학적으로 더욱 숙고하고 정교하며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그것들을 로마서에서 취급한 방식은 그러니까 두 가지이지. 하나는 로마서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다 바울이 그 이전 편지들에서 단편적으로 다룬 편지들의 집대성이란 말이야. 또 하나는 로마서에서는 훨씬 더 체계적이고 더 깊은 묵상을 거친 원만하게 전개된 거란 말이야. 다른 편지, 이전 편지들에서는 단편적이고 덜 체계적인 것인데 반해서 이 성격은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이 그가 동방에서 여러해 동안 선교사업을 하면서 다듬어졌던 자신의 신학적 사상을 요약한 것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로마서를 쓴 目的이 뭐야? 로마 교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뭐라구? 지금까지 자기가 동방 선교에서 얻은 신학적 통찰력을 잘 정리 요약한거라 말이지. 체계적으로 정리, 요약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왜 그것들을 요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가?”를 이해하게끔 도와주는 로마서 기록당시의 바울의 상황을 고려해 봄으로써 더욱 강화 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로마서 기록 당시의 바울의 상황> p29-

이게 로마서를 쓴 目的에 다루는 결정하는 4번째 요인이지. 로마서 기록당시의 바울의 상황 한번 읽어봐요. 로마서 1:1-16를 읽어봐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을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나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 로마서의 서문이 가장 길어요. 모든 편지에서 유독히 길다구. 여기서 바울이 아주 이 민감하게 편지를 쓰는데 뭐라? 그래 한마디로 자기가 로마에 가고자 하는 강력한 의사를 표시하지. 여러번 가려고 그랬는데 못갔단 말이야. 자기가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빚을 진 자로 로마 교회의 이방 교회인 자신이 세우진 않았어도, 로마 교회도 자기 사도적 권위 아래 들어감을 은근히 바울이 지금 말하면서, 그래서 자기가 세우지 않은 교회라도 거기가서 복음 선포할 권리가 있지. 다른 이방 교회와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열매를 걷으려 하고 그들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어서 그들을 강화하고, 또 뭐라 그래요? 자기도 그들의 도움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로마에 여러번 가기를 원했는데 지금까지 길이 막혔었다. 이렇게 굉장히 긴 서문을 달아요. 모든 편지들 중에 제일 긴 서문이야.

다시 로마서 15:14-끝절까지 누가 또 한번 읽어봐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음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 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라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안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위에 건축치 아니하려 함이니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해전 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어 줌을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카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증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사람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여기서 --이 로마서 결론 부분에-- 다시 자기가 서론 부분에서 재기한 자기 로마 교회로의 여행 그리고 로마인들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스페인으로 선교여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그러한 바램을 강력히 표현하지요. 이곳에서 자기 집까지에 변방에서의 선교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앞으로의 서방에서의 선교의 계획을 발표하면서 로마 교회의 지원을 지금 강력히 요청하고 있어요. 그러나 서방교회로의 선교하기 전에 동방 교회에서 얻은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을 지금 예루살렘에 전달하러 가야되는데, 그 길이 상당히 위험 천만한 길이야. 그래서 로마인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지금 하고 있어요. 자 그래서 로마서의 서론과 결론에서 바울은 로마서를 쓸 당시의 자기의 상황에 대해서 상당히 소상하게 지금 밝히고 있어요. 그걸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정리해 본다구.

1. 동방에서의 선교사역을 완수한 후 그는 이제 막 서방에서의 선교에 착수하려는 때에 당도했어요. 즉 그는 사도로서의 생애에 있어서 전환점에 서 있어요. 거기 19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서 빙 둘러서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분하게 선포했노라편만하게 전한거라 그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가득 채우노라 그말이예요. 지금 여러분들 지도를 한번봐요. 예루살렘을 먼저 한번 찾아보고 그 다음 일루리곤을 한번 찾아 보라구. 일루리곤이 어디에 있는가? 지금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면, 지금 바울이 고린도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고린도에서 로마로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거라. 이 상황속에서 뭐라 그러느냐면 지금까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두루 행하여, 두루행하여 그말이 ?이라는 전치사인데 빙 둘러서 그런 뜻이야. 빙 둘러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빙둘러서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완전히 전했노라. 그래서 이 지역에서 더이상 일할 곳이 없어서 이제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가려고 그런다.

2-3년동안 에베소에 묶여 있었어요.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그래서 여러번 지금 로마로 일루리곤쯤 갔을 때는 길이 있어서 로마로 갈 수가 있었는데, 바울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여러해 동안(2-3) 에베소에 고린도 문제로 인해 묶여 있었다구. 여기서 고린도에 편지를 보내고 디모데를 보내고 디도를 보내고 세월을 많이 보냈어요. 그런데 드디어 고린도의 문제가 평정이 된 거라. 그러니까 바울이 직접 방문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이 헌금을 이제 다 거둬 가지고 예루살렘에 지금 갔다 주려고 하는거야. 그리고는 어떻게 하려고? 그리고는 이제 로마로 와서 드디어 그의 로마제국의 서반부 문제의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서 있어요. 그래서 지금 바울은 이 로마서 15장 끝에서 지금까지의 자기의 선교를 로마제국의 동반부에서, 또는 정확히 말하면 동북부에서의 선교를 완전히 마친 것을 말해요. 예루살렘으로 부터 일루리곤까지.

지금까지의 바울의 선교를 위해서는 안디옥이 바울의 지원교회였다구(후원교회, 모교회). 그래 이제 바울이 그의 선교사업을 로마제국으로 --로마제국의 서반부로-- 옮겨 감에 있어서 안디옥은 너무 멀어. 그러니까 로마 교회가 --안디옥 교회가 했던 식으로 앞으로는 로마 교회가-- 그를 위해서 지원(후원)교회가 되어주길 바라서 이 편지를 쓰지. 지난번에 이야기 했죠. 그게 로마서를 쓴 가장 직접적인 목적중의 하나라 했지? 그건 분명하다고 했지. 그래서 지금 바울은 이 로마서를 쓰는 시점에 AD 57년쯤에, 봄쯤에 고린도에서 이 동반부의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제 여기를 완전히 떠나서 서반부로 선교의 지역을 옮기려고 하는, 아주 이 사도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에 서 있다 이 말이예요.

2. 그는 갈라디아, 고린도, 그리고 기타지역에서의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훼방과 그의 회심자들, 그가 전도하여 그리스도인 되게한 자들의 오류에 직면하는 매우 어려웠던 8여년의 세월을 이제 통과하고 마쳤어요. 드디어 고린도 문제가 평정되므로 드디어 그 어려웠던 기간을 이제 지나온 셈이야.

3. 수년간에 걸쳐 커다란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시아, 마게도냐 그리고 아가야의 이방 교회들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모금을 방금 끝내고 나서, 고린도에서 오해가 생겨가지고 문제가 많았죠. 그런데 드디어 거기서도 이제 다, 이제 성공적으로 끝내서, 그는 이방교회의 대표단들과 함께 모금된 구제연보를 가지고 이제 막 예루살렘으로 향하려는 시점에 서 있었다(로마서 15:25이하, 20).

4. 그는 유대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 박해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의한 환영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유대들이 물론 자신을 박해 하겠지만, 바울이 지금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 자체가 그의 헌금을 받아 줄지 안 받아 줄지 모른다구. 그래서 이 헌금이 그들에게 받음직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지금 그러잖아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헌금과 자신을 받아 줄 것인가?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인 대표자들을 그리스도안의 형제들로 받아 줄 것인가 아닌가가 지금 불확실하다는 말이예요. 그래 이런 상황에 바울이 처해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지금 글을 쓰고 있다.

,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 G. Bsrnkamm왜 바울은 고린도로부터 로마로 곧장 직행하지 않고, 그의 개인적인 참여 없이도 아주 간단하게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시켜서 모금된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자신이 직접 취합된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단히 위험스런 여행을 감행했느냐?”고 묻는다. 그렇죠? 자기는 로마로 해서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했으니, 이제 하루 빨리 싸게 싸게 그리고 갈 일이지, ?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그래. 또 예루살렘은 아주 위험하다 말이야. 거기 각 교회 대표단을 잘 구성해서 디모데나 거기에 대표로 삼아서 보낼 일이지 왜 자신이 직접 가야돼? 위험을 무릅쓰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로마서의 목적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 2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편은 바울과 바나바 다른 한편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사이에 선교지를 분할했지?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가기로 하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가서 선교하기로 사도적 합의를 했다 이말이야. 그 후에 이방 유대파 그리스도인 사이에의 교제의 표현으로 연보 계획을 바울이 수행했죠? 갈라디아서 2:10에 보면 이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무엇을 부탁했어? 가난한 자들을 계속 생각해 달라고 부탁한 거지. 그래서 바울은 그 유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자기가 개척한 이방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걷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 교회의 하나됨, 그 교제의 확인으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와 유대 그리스도인 교회의 하나의 교회됨, 그리고 성도들의 교제의 sign으로 한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이 또 있다구. 또 효과적인 목적이 있어요. 구약의 선지자들로 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종말론적인 소망하나가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나면 뭐 그 하나님의 영광의 극치가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들, 열방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온 세상을 덮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자기들이 지금까지 섬기던 신들이 전부 우상에 불과한 것을 알고 우상을 다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들을 가지고 시온에 순례와서 진정한 인 야웨를 예배하고 그의 구원에 동참한다는 사상이것을 보통 뭐라고 부르느냐면 이방인들의 시온에 대한 종말론적 숭배사상이라 그래요. 구약의 선지자들로 부터 내려오는 아주 중요한 이방의 종말론적 소망중의 하나야.

바울은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메시야의 오심으로 그리고 그를 통한 구원의 성취로 바로 이 선지자들의 이 소망이 이루어 졌다고 본다구.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가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이 시온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이방 민족들에게 전파하는 이방의 빛으로 지금 나서고 있는거야. 이방 모든 민족들의 자손, 시온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 그를 통해서 이루신 그의 구원을 바울이 지금 전파하는 거라. 그 시온의 영광의 빛이 온 세상에 지금 비쳐지고 있는 거예요. 누구를 통해서? 이방인 사도인 바울 자신을 통해서. 그래서 이방인들이 어떻게 되는거야? 우상을 버리고 산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는거야. 대표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9-10한번 읽어 봐요.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 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래서 자기의 이방인의 데살로니가에 복음 선포한 것을 뭐라고 지금 표현하고 있는거야? 또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신앙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는거예요? 그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리고 진정한 살아계신 하나님, 우상? 그런건 목석에 불과한 것이라고 아무 생명도 없는 그런 것이라고, 그런 것을 다 버리고 이제 바울의 이 복음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구. 진정한 하나님의 지식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시온에의 재림을 통해서 있을 구원의 완성을 기다린 자라 이렇게 표현하죠.

지금, 자기의 이방 사도직을 통해서 이 선지자들의 비젼이 지금 성취되어 가고 있는거야. 그런데 선지자들의 비젼중에 하나가 뭐예요? 그렇게 되면 이방인들이 다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데 그들의 부활을 가지고 시온에 휩쓸려 온다 말이예요. 바울의 지금 자기가 개척한 이방교회에서 헌금 모집한게 바로 이 선지자적 비젼의 성취라. 그래서 이 구원사적 의미가 있어요. 구속사적 의미가... 그래서 바울이 헌금 걷는데 있어서 이것은 물론 구제의 목적이 있었고, 그 다음의 교회의 하나됨의 표징, Ecumeniecal 목적이 있었고, 또 유대 그리스도인이 이방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로 인정함, 그래서 그들이 같이 사귐, 하나의 fellow ship을 나누는자 됨을, 하나의 교회됨을 인정하는 Ecumenical 목적이 있었고. 또 지금 이야기하는 구속사적 目的이 있었다구. 이에 선지자들의 Vision을 성취하는 종말론적 구속사적 목적이 있었어요.

이것은 또 하나의 目的으로 연결이 돼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것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신속하게 하려는 바울의 宣敎 전략과 연결이 되죠. 이렇게 바울의 獻金 모집은 삼중, 사중의 중요한 신학적 목적이 있었다구. 그래서 바울이 엄청난 어려움을 무릅쓰고 --고린도 敎會 같은 엄청난 반란을 무릅쓰고도--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한푼도 헌금을 안 받았지만 예루살렘 敎會를 위해서는 열심히 헌금을 거둔거야.

그래서 바울의 獻金 걷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그리고 宣敎 전략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아주 좋은 연구 대상이어요. 여러분들 생각해 보라구. 자 거기까지 하고 이 다음 시간에 계속해요.

 

 

바울서신 // 9

 

 

 

로마서 3, 빌립보서 1

 

 

 

 

 

1. 로마서의 기록 목적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어요? 31페이지? 다시 그럼 29페이지 부터 로마기록 당시의 바울의 狀況, 이게 로마서를 쓴 목적을 糾明 하는데 있어서 4번째 요인이라구. 이런 4가지 요인들을 고려해서 바울의 로마서를 쓴 목적을 우리가 규정을 해야 돼요.

그런데 그게 4번째로 이제 로마서 기록 당시 상황은 첫째로, 東方에서의 선교 사업을 완수한 후 이제 막 西方에서의 선교에 착수하려는 때였다. 즉 그는 사도로서의 生涯에 있어서 전환점에 서 있었다. 지난번에 설명했지?

둘째로, 그는 갈라디아, 고린도 그리고 기타 지역에서의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회당과 여기 기타 지역이라면 빌립보서가 로마서보다 먼저 쓰였다면 빌립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구. 거기도 이제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회당이 있었는데, 곧 보겠지만 빌립보서가 로마서 전에 쓰였는지 로마서 후에 쓰였는지 분명치 않아요. 그런데 만약에 에 쓰였다면 빌립보 지역에서도 문제가 있어요. 이런 지역에서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훼방과 바울의 福音이 틀렸다고, 그리고 바울의 사도직이 가짜라 이렇게 훼방을 놓았죠. 그리고 그의 회심자들의 오류에 직면하는 매우 어려웠던 8년여의 歲月을 통과하고 있었다. 갈라디아의 문제, 고린도의 문제들을 이제 막 원만하게 해결한 상태란 말이야.

세째로, 數年間 걸쳐 커다란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시아, 마게도냐 그리고 아가야에 이방교회들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 募金을 방금 끝내고 나서 그는 이방 교회의 대표단들과 함께 모금된 구제 연보를 가지고 이제 막 예루살렘에로 향해 하려는 시점에 이르렀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의 의미를 설명했지.

네째로, 그는 유대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박해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환영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크게 염려 하고 있다. 곧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헌금과 자신을 받아 줄 것인가?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인 대표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로 받아줄 것인가를 바울은 확신을 갖지 못해요.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간다구. 지난번에 헌금 의미중의 하나가 뭐라구? 이방 교회와 유대교회의 하나됨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형제됨을 확인하는 증거로 지금 가지고 가는데, 만약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안 받아 버리면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로 인정 않는다는 소리지.

그럼, 바울이 세운 이방 교회는 뭐가 되어요? 母敎會와 연결되 있지 않은 교회가 되어 버린다구. 그래서 바울에게는 자기가 확실히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원래 선교지 분활하고 교제의 악수를 할 때 갈라디아서 2장에서 보고된 그렇게 정신으로 되돌아가고 그때의 상호 인정을 재 확인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구. 그때 뭘 가져가서 그렇죠. 헌금 가져가서 그렇거든. 그때에 그들이 뭘 부탁했어요? 계속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지? 그래서 지금 다시 아주 어려움을 많이 겪으면서 --고린도 교회에서는 사기꾼이라고 몰리면서까지-- 헌금을 걷어가지고 지금 예루살렘에 가는데, 이 예루살렘의 교회가 그 사이에 많이 변했다구. 많이 극우, 극보수가 되었어요. 베드로의 리더쉽 안에 있다가 야고보의 리더쉽 안에 들어가면서 AD 40년 중반에 --46년 무렵에-- 아주 극단적인 국수주의, 보수로 회유를 했다구. 그것은 야고보의 신학적 경향이 베드로 보다 더 보수적인 그런 면도 있지만 그 예루살렘 교회의 당시의 여건도 중요한 요인이었어요.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 열혈당 운동이 아주 고조되고 있던 때야. 열혈당 운동은 아주 극단의 국수주의적인 색채를 띄는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극단적인 국수주의적인 경향을 뛰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순결을 더럽힌다.” 해서 이방인과 교류를 일체 허락하지 않는 거란 말이야.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로서 이방 그리스도인을 인정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져요. 이런 상황에 바울은 지금 원래 사도들의 교제의 악수, 복음의 상호 인정, 그리고 선교지의 분활 이런 합의를 재 확인 하기 위해서 다시한번 사도회의를 목적으로 하고 지금 헌금을 가지고 가는데, 그러기 위해서 각 교회의 대표들을 헌금단으로 구성해서 일부러 시위하면서 간다구. 되도록이면 조용히 가는게 좋겠지. 그래서 헌금단을 데리고 간 이유도 그 헌금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나, 누가 도중에 착복 안했다는 것, 확인하는 의미도 있었겠죠.

오늘도 요새같이 大明天地에도 선교한다고 헌금가져 가지고 중간에 착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래. 아주 공공연히 그짓을 한다고 그래요. 여러분들이 그 뭐 헌금내면 좋은 선교단체는 국내에서 경비로 한10%쯤 쓰고 한90%쯤이 전달된다구. 선교사에게 전달이 돼요.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한 30% 떼는 모양이야. 국내에서 내가 본 이른바 아시아 선교한다는 선교단체는 50% 떼는 것을 봤다구. 그거 이 국내에서 돈벌이 하는거라. 선교를... 그런데 내가 또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들은바에 의하면 100%떼는 곳도 있다 그래. 거짓말로 선교한다고 잔뜩 모금, 선교대회 엄청나게 하고 해 가지고 모금해 가지고는 신사 유람단을 구성해 가지고 선교 단체의 이른바 지도자들끼리 아시아로 유럽으로 빙 돌아다니고 일급 호텔에 지내면서 저 마닐라에 일급 호텔에 머무르면서 저기 섬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다 오라.” 저한테 오라 해가지고, 아 열심히 선교하는 사람들 선교하도록 내 버려두지 뭐하려고 마닐라에 오라해 가지고 며칠씩 교통도 아주 불편해요. 아주 자기 잘 지내는것 구경하고 지가 또 목에 힘주고 연설 한번 하고 밥한끼 사주고 그러고는 다시 가라고 그러지. 그러고는 선교했다고 국내에 와서는 보고를, 또 사진찍어야지, 물론 증명사진, 그다음에 뭐 선교대회 거창하게 했다고 난리를 피우고, 이런 식으로 다 탕진해 버리는 단체가 많아요.

그래서 이 선교단체 雨後竹筍으로 하는게 많이 일어나는데 그 중에서 상당히 그 들이 그걸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구. 옛날에 저기 6.25직후 고아원 해 가지고 구호물자 다 빼먹어서 치부한 이른바 사회사건이 많듯이, 오늘날 이른바 선교사업하는 사람들이 많아. 선교로 자기 개인적 사업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혹시 여러분 선교에 관심이 있으면 그런 단체를 통해선 절대 선교를 나가지 말 것. 그런 비 양심적인 지도자가 있는 선교 단체를 통해서 나가면 선교사가 고생을 해요. 국내에 있는 지지자들이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는, 그건 뭐 그래 좀 괜찮은데, 그런 단체를 통해서 나간 선교사는 아주 고생이 많다구. 지원금이 잘 전달이 안되고 몇달씩 안오기도 하고... 그런 단체의 일 수록 또 요게 아주 이 객관성이 없고 합리성이 없고 선교에 대한 열의가 없어가지고 자기 위주로 자기 편의대로 선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자기는 선교지 하나도 알지도 못하는데 여기 앉아 가지고 자기 선전하기 좋게 자꾸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지시만 한다구. 그래서 이 complant가 일어나곤 해. 東南아시아에 있으면서 그런거 많이 보았어요. 그런 사람은 상종을 말아요. 여러분들 제대로 된 선교단체를 통해서 가야된다 말이야. 물론 여기 그 정명현교수 선교 전공하니까 그 양반이 이런거 뭐 더 잘 가르치겠지만 선교라는 것을 통해서 하두 비행이 많이 저질러진 것을 봤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이용당하고, 속고, 굉장히 낭패를 당하고 가족까지, 애들까지 다 데리고 갔는데, 선교지에서 이것 뭐 진짜 이거 고립되고 그런것도 내가 봤다구. 자 하여간 그런 엉터리 선교들.

바울은 그러지 않아 다행이야. 그래서 이제 각 교회의 대표자들을 뽑아가지고 대표단의 구성원이 가는데, 그래서 이 선교비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이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것도 확인하고,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대표자들이 그 각 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에 이방 교회 전체, 바울이 세운 이방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거예요.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으로 대표되는, 선교지 분할 때,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선교하기로 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異邦人들에게 가서 선교하기로 했는데, 이게 바울이 자기가 선교한 지역에서 그 열매의 대표단을 이제 데리고 가서 예루살렘 교회 유대교회의 대표자들과 상호교제 악수를 함으로 헌금을 주고 받음으로 이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려고, 그래서 일부러 위험하지만 큰 대표단을 거느리고 간다구. 자 그럼 31페이지 한번 읽고.

Q. 바울이 선교 헌금을 모아가지고 예루살렘에 갔는데 聖經을 읽다가 보면 교회에 헌금이 전달되어 가지고 이 헌금을 모금한 目標가 이제 발송되어 가는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는데?

A. 바울의 더 이상 편지가 없고, 편지를 안썼고, 사도행전도 그걸로 끝나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헌금 전달을 했는데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된거예요? 야고보를 위시한 리더쉽을 받아들인거라. 바울이 그런데 어떻게 된거야? 예루살렘 교회내의 보수파들, 바리새파들이 바울과 그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항거한, 그래서 저기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야고보가 무슨 저기 compromise를 제안해요. 네가(바울) 성전에 가서 뭐하냐구. 서약에 대한 제사를 하라고 그러지. 결례를 하라고 그런다구. 그걸로 지금 교회내에서 당신에 대해서 비판하는 세력에 증명하라. 모세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이방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 그러지. 그러며는 교회내에서 당신을 비판하는 당신의 설교를 批判하고 당신이 모세 율법을 무시하고 할례를 무시하고 그런다는 비판세력을 조용하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유대인들도 감히 대들지 못할거다.” 이렇게 해서 야고보는 바울에게 타협안을 제시해요.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면, 이 야고보와 ??들은 바울과 헌금단을 받아줄 용의가 있었어요. 근데 그 교회 내의 극우파 바리새인들, 열혈당 정신에 상당히 찌든 극우파 바리새인들의 항거가 있은거라. 그래서 바울이 그 타협안을 받아들여서 성전에 가서 결례를 하다가 어떻게 돼? 유대인들 한테 린치를 당하지. 유대인들이 둘러싸 가지고 바울을... 그 사건을 가할때에 누구가 개입을 해요? 로마 군대가 항상 이 성전뜰을 지키고 있어. 그 소요 사태를 감시하는 로마군대가 백부장의 지위아래 와서 금방 바울을 체포한다구. 그래 가지고 어떻게 돼? 그때부터 이제 바울이 감옥살이를 하고 어디로 가게돼? 결국 가이사랴에서 2-3년 감옥살이 하다 결국 로마로 간다구. 거기까지가 우리에게 알려진 기록이라구.

그래서 바울이 헌금단을 의도했던 목적이 완전히 결실되는건 아니지. 바울이 목적한 바를 --아까 이야기 한대로-- 지난번에 이야기 하는대로 우선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에 목적이 있었고 둘째로, 이 신학적으로 두 교회의 하나됨,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것도, 근데 그것도 지금 안된거란 말이야. 그보다 더 마지막으로 열방이 시온에 보화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이 종말론적인 선지자의 비젼을 성취하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이 종말의 메시아적 죽음이 시온에 일어났음을 확인했어. 유대인들을 시기케 해서라도 유대인들의 회개를 불러 일으키려고 한 거야. 그게 바울의 헌금의 마지막 목적이었다구. 근데 그 마지막 목적은 거의 뭐 발상이 안되었다고 봐야지. 그렇게 된거지. 31page-.

G. Bornkamm왜 바울은 고린도로부터 로마로 곧장 직행하지 않고 그의 개인적인 참여 없이도 아주 간단하게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시켜서 모금된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자신이 직접 취합된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단히 위험스런 여행을 감행했느냐?”고 묻는다. 그의 그 바울책에 보면 이런게 토론이 되어 있어요. G. Bornkamm의 바울책 한국말로도 번역이 되었다구. 허혁 교수가 번역을 했는데, 그 책이 1960년대까지 바울 신학 토론에 대한 것을 좀 쉬운 언어로 평신도들이 읽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아주 잘 썼어요. 그래서 독일에서 그게 출판이 되서 수십만권이 팔렸다구. 영어로 번역된 상태로도 굉장히 많이 팔렸어. 그래서 학자들도 보고 평신도들도 보는 참 좋은 책인데 한국말로도 번역이 되어 있어요. 물론 거기에서도 배울 수 없는 비판적인 것도 한번 읽어 보라구. 여러분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로마서의 목적과 직접관련 되어 있다.

선교지역의 구분에 대한 합의가 있은 후로 이방 및 유대파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교제의 표현으로 연보 계획을 수행한 뒤 바울은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연보를 기부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이러한 연합과 친교가 더욱 공고해 질 것을 기대했다.

그가 사도적 전환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서방에로의 새로운 이방 선교를 시작하려는 이 시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 있어서는 이 연합이 이방및 유대파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받아들여 지고 그의 이방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교회의 합법적 구성원으로 용인되어지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갈라디아, 고린도 등지에서의 예루살렘의 권위자들에게 호소하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의 투쟁은 바울로 하여금 그의 율법과 할례에서의 자유함,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그의 복음이 사도들의 공의회서와 마찬가지로 인정될 것인지? 그리고 복음으로 얻은 이방 회심자들이 야고보의 지도 아래 있는 엄격한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용납되어질 것인지에 대해 불안해 하게 했다. 그는 자기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다시금 의문에 붙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갈라디아와 고린도에 침투한, 침투해서 바울의 사도직과 바울의 복음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누구에게 호소했어요?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호소했다구. 자기들이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부터 파송되었다고 주장하고 그들의 추천장 가지고 왔다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이 예루살렘 원래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르다. 그러니까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이 틀렸다. 이런식으로 고소를 한 거야.

또 바울은 더 이상 옛날의 사도회의 때에 서로 복음을 인정하기로 하고 선교지를 분할하고 교제의 악수를 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이제 서방으로 선교사업을 확대해감에 있어서 근데 옛날에 상호 인정했던 것이 재 확인 되리라는 지금 보장이 없는거야. 바울에게는 최근의 체험에 비추어 봤을때 그래서 지금 로마로 가는 길이예요. 아 예루살렘으로 직접가는 거예요. 자기가.

그리하여 로마서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다가오는 도전을 예견하며 복음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요약정리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바울이 갈라디아와 고린도등지에서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의 투쟁은 그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율법의 행위에 의한 구원 교리가 아직도 여전히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여타 여러지역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그는 유대인들의 구원 교리에 대항하여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칭의라는 자신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명확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로마서의 성격이 일부 분명해질 수 있다 이말이예요. 로마서의 성격이 뭐야? 아주 체계적으로 그의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복음을 전개하는 거지. 체계적으로 전개한 거야. 그런데 체계적으로 전개함에 있어 상당히 많은 부분이 갈라디아와 고린도 전후서와 내용이 일치한다 말이야.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에서 다루었던 것을 로마서에서도 더 어떻게 해? 더 체계적으로 전개하는데 있지. 그래서 그것을 생각할 때 바울이 지금 로마서를 쓰는 상황에 의해서 일부 설명이 된다구.

예루살렘에서 직면할 논쟁을 예견하면 그는 또한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문제(그들의 선택, 불신,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 구원)를 취급하며 최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계획했던 복음이 어떻게, “왜 먼저 이방인에게로 갔다가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와야 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예루살렘 교회에 가면 이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교의 구원사에 대한 이해를 계속 이어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종말에나 하나님의 천사들이 다 불러 들여서 구원 받을 것이지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들고 구원받아야지 무슨 이방인 선교냐?” 이럴 수 있단 말이예요. 바울이 그걸 예견하면서 --그와 같은 논쟁을 예견하면서-- 로마서 9-11장에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자세히 토론했다고요.

사도들의 공회의와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번 기회에 다시금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과 복음의 진리 및 자유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새로운 협의를 위해 그는 교회의 연합이 기초할 공고한 토대로서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매우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점점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와같이 바울이 로마 교회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다가오는 예루살렘회의를 대비하려고 그의 복음을 요약하려는 목적에서 로마서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이렇게 보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이 뭐라고? 로마 교회의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거예요? 그게 아니고 뭐라? 다가오는 예루살렘에서의 사도회의에서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확인하고 유대교회와 이방 교회의 하나의 복음에 해당(기초)하는 Unity를 확인하고 그래서 이방 교회의 합법성을 얻으려는 그런 목적이란 말이야 알겠어요? 예루살렘에서의 사도적, 또 하나의 사도회의에서의 논쟁을 준비하는 것이 로마서의 목적이라. 그래서 그때까지 자기의 갈라디아나 고린도에서 겪었던 문제들에 대해서 답을 정리한 것이 로마서라 그렇게 볼 수 있단 말이예요.

그래서 G. Bornkamm은 로마서를 바울의 마지막 유지및 유언이라고도 하며, U. Wilckens(Bornkamm의 제자 )또 뭐라고 하느냐면 예루살렘에서의 자기 변호 연설을 위한 예습으로 간주하며, E. Fuchs예루살렘이 로마서의 감추어진 수신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말이예요. 그러니까 로마서가 진짜로는 누구에게 하는 연설이어요?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예루살렘교회에게 하는 연설이란 말이야. 예루살렘 교회가 로마서의 감추어진 수신인이다. 또 노르웨의 J. Jervell은 로마서를 아예 그냥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편지라고 까지 부른다.

그렇지만 이제 나의 비판이야. 이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다. 서방에로의 새로운 선교 모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바울은 그의 마지막 유지및 유언으로서 로마서를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게 Bornkamm의 견해에 대항하는 것이지. 지금 바울은 로마서 1:11-15보면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 가서 새로운 선교하겠다는 희망으로 가득차 있죠? 그런 사람이 뭐 어쩌면 예루살렘에 가서 잡아 죽임을 당할찌도 모른다고 자기가 터득한 복음을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길이 보전되도록 교회의 신앙의 자유와 진리가 보전되도록 마지막 유지및 유언으로 썼다? 유언으로 로마서를 썼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그렇죠? 여러분들 또 제아무리 예루살렘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을 현실적으로 예상했다고 할지라도, 뭐 바울이 유언으로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자기 복음의 진리가 확고히 보장되도록 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이렇게 복음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이게 하나의 유언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이말이예요.

또 이 WilkensFuchsJervell은 자신들의 일방적인 견해에 빠져 있으므로, 그렇다면 왜 바울이 그 편지를 로마로 그것도 특히 로마로 보내었는가를 거의 설명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지금 겨냥하고 편지를 썼고,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하기 위해서 연설 연습을 한 것이고, 아예 Jervell말대로 예루살렘에 보내는 편지라면 예루살렘으로 보낼 것이지, 아니면 가지고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다가 예루살렘에 가지고 가서 일장 연설을 할 것이지 왜 로마로 이 편지를 보내? 정 반대 방향으로... 그러니 그건 이 사람들이 설명을 못한다 말이야. 그래서 이 사람들의 이 이야기가 너무 지나치다 말이야.

그러나 이 시점에서 T.W. Manson의 이론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Manson에 의하면 바울은 복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하나의 선언문으로 요약하며, 본 서신의 본문을 구성하였다는 것이다(1:1-15:13). 복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하나의 선언문으로 요약하며 구성했다는 거야. 그리고 나서는 편지의 복사본 하나는 앞으로 계획에 대한 포부와 함께 로마로 보냈고 그러니까 15:14절 이하를 덧 붙여서 로마로 보냈지. 그러니까 로마서 본문은 어디까지 15:13까지, 거기 15:13절 한번 봐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거기서 벌써 글을 마치는 인사를 한다고. 바울이 13절에서. 그리고 이 Manson은 원래 바울이 13절까지를(15:13) 바울이 복음을 요약하는 기본 편지를 써가지고 복사본을 여러개 만들었다 이거예요. 그중에 한 사본을 14절 이후에 나오는 14절에서 15장 끝까지에 나오는 로마 교회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는 자기 여행 계획을 발표하고 --그 계획에 좀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은근히 해서-- 이것을 덧 붙여서 로마로 보냈다 이거야. 또 다른 복사본 하나는 16장을 덧붙여서 --16장은 뭐야? 친구들에게 안부 전하라는 인사 목록이지? 이것은 로마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아니고 에베소의 성도들이라는 거야. Manson에 의하면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로마서 16장을 덧붙여서 하나의 복사본은 에베소로 보냈고, 그리고 고린도에서 그 편지를 작성하면서 그는 그곳에서 구두로 편지의 핵심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고, 고린도는 어느 지방의 대표교회야? 아가야 지방의 대표 교회지.

그러니까 아가야 지방에는 지금 거기서 바울이 편지를 썼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구두로 이 편지 내용을 잘 설명했고, 로마로 또 한 사본을 보내서 아시아 지역에 자기 복음을 설명하고 앞으로 그곳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이제 아가야를 떠나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텐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바울은 항상 어디를 들려? 자기 모교회 안디옥을 들리지. 안디옥에 가서 안디옥은 어느교회 대표야? 시리아 교회 대표라구. 거기에 가서 또 이 복음을 한번 설명하고, 팔레스티나 교회에 가서 설명하고, 드디어 예루살렘의 교회에 가서 이 복음으로 이제 사도들과 회의를 한거란 말이야. 이렇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로마서의 목적은 모든 교회에 대한 자신의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그의 로마서를 쓴 목적이다. 그러니까 로마서는 하나의 회람인거예요. 회람용으로 쓰였다 이말이예요. 그렇다면은 로마 교회와는 관계없이 쓴거야. 무엇과 관계있는거야? 바울의 지금 상황과 이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고자 하는 그런 목적으로 하나의 회람용으로 써서 한 복사판은 로마, 한 복사분은 아시아 에베소로, 어쩌면 또 하나의 복사판은 갈라디아로 보냈었을지도. 그래서 바울의 모든 교회에 이 복음을 전하고 이제 안디옥, 시리아 그리고 팔레스티나에 가서는 직접 자기가 설명을 하고 이렇게 할려고 한거다. 그래서 로마서가 하나의 회람이다. 바울의 복음을 선언적으로 천명하는 하나의 회람이다. 이렇게 Manson이 주장을 해요.

이러한 Manson의 이론은 바울이 앞으로 있을 예루살렘에서의 신학적 대결을 예상하며 로마서를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줄 것이다. 앞의 Bornkamm, Wilkens, Fuchs, Jervell의 의견의 약점이 뭐라 그랬죠? 바울이 로마 교회와는 관계없이 예루살렘에서의 신학적 대결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복음을 정리했다면 그래서 로마서를 썼다면 왜 그걸 로마로 보내었냐가 문제였지. 그런데 Manson의 이론이 맞다면 바울이 이것을 자기 전 교회에 다 보냈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다행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은 로마로 보낸 사본이기 때문에 이게 로마서가 된 거라 말이야. 알겠어요? 거기다가 Manson에 의하면 로마서 16--요건 에베소로 보낸 사본인데-- 에베소로 보낸 조각이 지금 로마로 보낸 사본에게 합본되어 가지고 우리에게 있는거라. 그래서 Manson의 이론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 말이예요.

즉 그는 바울이 로마서를 선언문으로 기록했으며 그 편지가 로마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 세계의 요충지를 위한 회람용 편지가 되게 했는데, 이는 예루살렘에서의 자신과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대결에서 그들의(기독교 교회) 지지를 그들에게(로마에, 고린도에, 에베소에, 안디옥중에)지지를 획득할 목적이었다 이말이예요. 그러나 본래는 로마서가 단지 1:1-15:13 + 16:25-27로 구성되어 있고 --15:13에서 곧 1625-27절 인사말로 원래 되어 있고-- 현재의 161-23절까지는 원래가 에베소에 보내졌던 사본에 부착되어 있었다는 Manson의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서가 하나의 선언문이요, 회람용 편지였다.”는 그 이론에 관하여는 커다란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Manson의 이론이 상당히 attact한 것은 사실이야.

16장의 문제중에 하나가 바울의 로마 교회에 전혀 모르는데 왠 로마에 친구가 있어? 왜 로마의 친구가 이렇게 많아. 이게 그래서 로마서의 16장의 친구들은 아마 다 에베소 교회의 친구들일 거다.” 이런 이론이야. 이런 가정이예요. 그래서 이건 에베소 교회에서는 사본에 부착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Manson이 주장을 하는 것은 사본학적으로 16:25-27까지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구. 그것은 어떤 사본은 14:23절 끝에 붙어있기도 하고... 거기에 봐요. Nestle-Alard text. 어떤 text에 의하면 15:33끝에 붙어 있기도 하고, 15:33끝에 붙어있었단 말은 무슨 말이야? 이 어떤 로마서 사본은 16장 없이도 존재했단 말이지. 15:33절을 끝으로. 그러니까 로마에 보낸 사본은 16:33, 로마에 보낸 사본은 Manson이 주장하는 대로 원래 로마서의 본문은 15:33까지로 끝나고 --거기다가 로마로 보내는 인사말과 자기 계획 발표를 14절에서 33절까지 붙이고 거기다가 뭘 붙인거야? 지금 16:25-27에 나오는 인사말을 붙여서 보낸거란 말이야. 한 사본을 알겠어요?

에베소에 보낸 사본은 15:13까지 본문, 거기다가 16:1-23, 거기다가 지금 16:25-27 마지막 인사말 이렇게 해서 보냈겠지. 그래서 지금 16:25-27의 인사말이 사본에 따라 15장 끝에 붙기도 하고, 어떤 사본은 16장 끝에 붙어 있기도 하고 이렇다 이거야. 그래서 Manson이 사본학적으로 자기 이론을 상당히 뒷받침하는데, 그러니까 Manson의 이론의 핵심이 16장이 그러면은 진짜 에베소의 성도들에 대한 인사냐, 에베소의 성도들에게의 인사라면 Manson의 이론이 상당히 설득력 있는 거야. 아니냐? 그게 이제 상당히 관심의 촛점이라. 그래서 로마서 큰 주석들에 보면 다 16장의 문제를 토론해요. 이게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인사냐? 아니면 에베소에 보낸 인사냐. 근데 지금 다수 의견을 로마서 교회에 보낸 성도들에게 인사라는 거야. 그렇다면 Manson의 이론이 성립이 안되는 거라구. 그래서 불확실성이 좀 남아있어요.

, 이런 상황에서 아마도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공히 신중하게 취급해야만 할 것같다.

첫째, 바울은 한편으로는 복음의 진리와 자유,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합법성, 교회의 하나됨 등에 대해 예루살렘에서의 다가오는 대결을 의식하여 로마서를 기록하였으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란 말이야. 요게 하나의 사실이야.

또 하나의 사실은 이 편지를 다른 사람들이 아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냈다는 사실, 그러니까 Mansom의 이론이 맞지 않다면 로마로 보냈다는 것도 하나의 사실이란 말이야. 이 두 가지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느냐, 또는 이 두가지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로마서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느냐? 후자의 사실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소개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의 대결을 염두해 두고 그의 복음을 요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못지 않게 강조해야 함을 명백히 시사해 준다. 이 편지를 로마에 띄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바울이 적어도 두가지 의도가 있었어요. 하나는 예루살렘에서의 복음을 변호할 의도와 못지않게 로마 교회에 자신의 복음을 옳게 소개할 의도, 이 두가지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예요. 명백히 시사해 준다고.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간에 갈등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가 없다. 예루살렘교회에서도 무슨 문제가 주문제라고?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이 하나됨이 주 문제라 그랬지. 그런데 지금 바울은, 그러니까 고린도에서 한 눈은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신학적 대결에 집중하고, 한 눈은 또 로마에 집중하고, 그렇다면 지금 마침 로마서 내에서도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간에 관계가 문제가 된 듯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니 우리가 언제 봤어요? 지난번에 봤지. 로마교회의 상황문제들 여러분들 기억나? 그것도 로마서의 목적을 규정하는데 하나의 요인이라고 그랬지. 그걸 생각할 때에 이 로마 교회 내에서의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됨을 도모하려는 것도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의 부차적 목적 --주된 목적은 아니지만 부차적인 목적-- 일 수는 있겠다고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예요. 알겠어요?

바울이 그 문제에 대해서 막연하게 나마 들어서 알았거나 --로마 교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그리스도인간의 갈등이 좀 있다는 소식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막연하게나마 들어 알았거나-- 그렇지 않았다 해도 그 문제는 헬라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들에 있었던 문제이었으므로 로마 교회도 있을 것으로 바울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자기가 로마 교회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문제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걸 도우려고 했느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그러지. 근데 바울의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헬라세계에서의 교회에 항상 이 문제가 있다구. 고린도 교회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이르기까지... 로마 교회에도 이 문제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지금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사도회의에서 문제가 이방 그리스도인과 유대 그리스도인간에 하나됨을 지금 자기 복음으로 도모하려고 그러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서 지금 자기의 복음의 이해와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의 복음에서의 하나됨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는 마당에 그것을 로마로 보낼 때에 그것이 로마교회의 현지상황에 도움이 되기를 바울이 바랐을 것이다는 말이예요. 그런 의도도 있을 것이다. 알겠어요?

이 편지를 가지고 바울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로마 교회에 소개하여 예루살렘 등지에 있는 유대주의, 즉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의 대결에서 로마 교회를 자기편으로 이끌려 하고, 또한 자신의 서방선교를 위해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로마로 보낸 것은 일단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를 준비하면서 자기 복음을 요약한거야. 그래서 로마서가 아주 체계적인 복음 해설의 성격을 띄고 있는거야. 그러나 왜 이걸 로마로 보냈느냐 하면 한편은 자기를 소개하고 자기 복음을 소개해서 스페인에로의 선교여행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교회가 앞으로 다가오는 예루살렘에서의 대결에서 바울편을 들어 주는게 아주 중요하다구. 로마 교회가 나중에 바울 이후의 고대 교회에서 제국의 수도의 교회였기 때문에 항상 신학 논쟁에서 로마 교회가 어느 편을 따르는가가 아주 중요해 지지 벌써. 바울시대에도 로마 교회의 위치가 중요하게 된다구. 그래서 그런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까 서방 선교를 위한 지원뿐만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 내에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도 이 신학적으로도 바울이 함께 서주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야. 그래서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로마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설립되지도 않았으며 그 교인들 대다수는 바울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교회가 제국의 수도에 위치함으로써 차지하는 신학적 전략적 중요성을 매우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19:21ff) 그게 우리 사도행전에서 행간에서 본다구. 사도행전 1921내가 로마를 봐야 된다그래서 사도행전의 후반부는 바울이 오로지 로마를 향해서 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로마를 목표로 달리는 것도 또 자신의 서방 선교를 위한 그곳 교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계속되는 이방 선교사역 뿐만아니라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 자신의 대결을 위해서도 조만간 예루살렘에 가게될 것처럼 그곳 교회를 위해서 전적으로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의 복음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그 교회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아주 필수적인 일이었다.

이제 로마서를 쓴 목적을 설명했어. 이 로마서를 쓴 목적이 무엇을 다 설명해야 된다고? 로마서의 특별 성격을 띄고 있었나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어야 된다구. 지금 이 로마서를 쓴 목적을 다 설명했어요.

Q.바울의 로마 교회에 와서 그후의 상황은?

A.바울이 로마 교회에 당도해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Nero(64)의 핍박 때에 순교를 당한 것이 거의 확실한데, 바울과 베드로가 AD 64Nero의 핍박때 순교했다는 고대 교회의 전설이 거의 확실한 사실로 학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져요. 그러나 이제 지금한 문제 무엇과 더불어 발생하는 질문이냐 하면, 목회서신들과 더불어 발생하는 질문이야. 디모데 전후서나 디도서를 바울이 직접 쓴 편지로 본다면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일단 석방이 되어 가지고 이 스페인으로 선교를 가지않고 무슨 연유인지 다시 자기의 옛 선교지역 동방으로 돌아와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그런 편지를 쓴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가장 쉽다구. 그래서 목회서신들을 바울이 직접 쓴 편지로 주장하는 보수주의적인 학자들은 대개 그렇게 바울의 연대를 재 구성해 보려고 노력을해요. 그외의 증거는 하나도 없어.

목회서신들이 바울이 감옥에서 일단 석방이 되어 가지고 동방에서 다시 와서 좀 활동을 하다가 또 체포되어서 --아마 64년에 순교를 당했든지 아니면 64년에 순교를 당하지 않았던지-- 스페인으로 갔다는 증거는 전혀 없어요. 그러나 바울이 64년에 순교당했다는 것을 거의 확실히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이 그 사이에 일단 석방이 되었으면 로마서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자기가 열망하는대로 스페인으로 갔을 것이지 뭐 동방으로 다시 왔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은 --그러면서도 이제 목회서신을 바울의 진짜 편지도 자기가 직접 쓴 편지로 볼려고 하는 학자들은-- 목회서신을 바울이 로마에 잡혀가기 전에 쓴 편지로 바울의 연대기를 다시 설명하려고 해. 그런 설도 있어요. 목회서신들도 그렇게 늦은 편지가 아니고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보고되는 frame-work속에 어떻게 좀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편지로 보려고 하는 그런 학자들도 있어. V. Leke같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구. 그러나 지금 제기한 문제는 전적으로 목회서신들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어요. 그러나 바울이 목회서신 빼놓고는 목회서신에서 우리가 재 구성하는 것 외에는 바울이 로마교회에 붙잡혀 갔다가 다시 석방되었다든지 일체의 증거가 없어요. 그러니까 모르지. 우리 목회서신하게 되면 그때 가서 좀.

 

 

2. 빌립보서

그러면 로마서의 서론은 그 정도로 하고 이제 빌립보서 서론을 하겠어요.(빌립보서 문단 나누어서 제목들 써와요)

빌립보서 서론을 위해서는 사도행전 16장을 한번 읽어요. 사도행전 16장에 빌립보교회의 개척이 상당히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게 상당히 재미 있다구. 많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한번 읽어봐요. 빌립보서 아니 사도행전 166절부터 한번 읽어봐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를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 유명한 이야기 다 알지? 바울이 아시아에서 선교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밤에 환상가운데 마게도냐 사람이 우리를 와서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이제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유명한 장면이라. 아마 설교 많이 들었을 거야.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빌립보를 뭐라고 설명해? 여러분들 성경의 지도 한번 봐요. 그래서 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길목을 한번 보라구. 이 아시아 지역에서 빌립보가 마게도냐의 첫 성이라. 또 빌립보가 마게도냐의 가장 수도라 말이예요. 그런데 거기를 특별히 뭐라고 설명해요. 로마의 식민지라. 그 지역 마게도냐 전체가 로마의 식민지이지. 그러나 빌립보를 특별히 로마의 식민지라 한 이유가 있다구.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안식일날 바울이 어느곳에 나가면 어디를 먼저 찾아갔지? 회당. 그런데 지금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어요. 없었다는 소리야.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군대 특히 로마의 제대군인들, 예비역 군인들, 제대군인들이 정주하던 곳이라. 그래서 빌립보에는 유대인들이 별로 없었다구. 거의 없었어요. 하나도 없었는지 모르지. 하여간 회당이 설립되기 위해서는 유대성인 남자 10명이 있어야 돼. 그게 정족수라. 유대 성인 남자 9명이 여자가 999명이 있어도 회당이 안된다구. 그래서 회당이 없어. 그래도 혹 유대인이 있고 유대교와 접해서 준비된 사람들이 있나 둘러 봤더니 빨래터에 누가 있어? 여자들 몇이 모여 있는데, 그중 하나가 루디아인데, 뭐라고 소개되어 있어요, 거기에? 하나님을 공경한 자. 그게 무슨 뜻이라고 그랬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매력을 느껴서 유대교의 예배에 참여하고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으로 개종하기 까지는 않았지만... 그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개종한 자를 뭐라고 부른다고? 개종자. 내가 다 설명했는데, 여러분들 멀뚱 멀뚱하고 있어.

이방인중에 유대회당과 연합되어 있는 사람중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개종자(προσηλυτοσ). 그 사람들은 어떤자들? 할례를 받고 개종한 사람들이야. 언약의 표징, 언약의 백성의 표징인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개종한 자. 이건 소수였고, 대다수는 어떤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불리웠단 말이야. 자기들은 개종까지는 않했지만 회당의 예배에 참여하면서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지키기로 애쓴 사람들이라구. 루디아가 구약과 유대교를 꽤 많이 알아서 복음 받기에 많이 준비된 사람이라 그런 말이지. 바울이 이런 사람들을 먼저 찾은거야. ?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 설명하기가 쉬우니까 계속 읽어봐요.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전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 하며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옷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거기 몇절이냐. 19절에 저자가 뭐야. 저자가 무슨뜻인지 아나 여러분들? ‘시장의 옛말이야 아고라그 다음에 지금 여기서는 빌립보, 완전히 헬라도시의 당시의 영적상태, 당시의 분위기를 아주 잘 보여준다구. 당시 헬라세계의 불안과 숙명론과 점성술, 우상숭배, 성적 타락 이런게 헬라도시의 아주 집중적인 분위기였는데, 여기보면 점쟁이가 상당히 돈을 많이 버는 그런 분위기라. 숙명에 대해서 불안해 하고 그것을 좀 헤아려 보려고 어둠에서 헤매는 헬라의 영적 상태를 잘 보여줘요. 그런데 이 복음이 바로 이와같은 헬라문화와 갈등을 일으킨거지. 종교와 문화가 갈등을 일으켜요. 이런 그 숙명주의와 불안 속에 빠진자들에게 해방과 새로운 숙명, 소망을 준다고... 그래서 귀신을 내어쫓고 이 점쟁이를 온전케 하고 이렇게 되었다 말이야.

그러니까 이 점쟁이 소녀를 통해서 돈벌던 주인들이 바울과 그 동료들을, 실라를 잡아 고소를 하는데 --막상 죄목은 이 점쟁이를 점을 못치게 해 가지고 자기들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게 아니고 죄목은 뭐야?-- 로마법에 어긋나는 로마법과 로마풍습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하고 소란, 소요를 일으켰다는 거지. 이게 이제 로마 사회에서 복음이 또 취조당하는 issue. 로마법에 어긋나고 로마의 종교, 관습, 시민정신과 어긋난다. 아까 빌립보는 뭐라고? 로마의 식민지라 그랬지. 그래서 이 빌립보인들이 이 로마의 시민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했어요. 그래서 이 로마법을 로마의 정신을 로마의 풍습과 어긋난다는 걸로 지금 고소를 하고 감옥에 가둔 거라. 이것도 당시의 바울의 헬라 세계에서의 선교 상황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상당히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도록 완전히 시사하는 부분이예요. 계속 읽어요.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을 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2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날이 새어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가 하거늘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앞에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아전들이 이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 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거기 이제 지진을 통한 바울과 실라의 석방, 그리고 간수의 가족의 구원이야기 여러분들 잘 알고. 그 다음에 이 바울이 로마 시민으로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보게되요. “로마시민이 재판도 받지 않고 이렇게 두들겨 맞은 후 감옥에 갇히는 일이 어디있느냐?” 거기서 우리는 당시 로마 행정과 사법제도가 비교적 공정했음을 보여준다고. 우리 5공 정권들보다 훨씬 나았다구. 그래서 바울이 자기 로마 시민권을 당당히 주장하면서 인권의 보호와 권리를 행사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 로마 행정이, 로마법과 로마 행정이 비교적 공정했어요. 적어도 로마 시민들에게는 그랬다는 말이예요. 이것을 바울이 충분히 이용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어요.

그의 선교의 하나의 조건이 로마 제국의 효율적인 도로망, 교통망도 하나의 조건이었지만, 로마제국의 군대와 행정관에 의한 비교적 공정한 법집행도 로마세계에서 바울의 당시 선교에 상당히 좋은 조건을 제공했던 거예요. 그런걸 우리가 여기서 볼 수가 있다구. 자 그러면 이 빌립보서의 이 빌립보 교회의 개척에 대해서 이렇게 사도행전 16장에 아주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어요.

, 그럼 빌립보가 어떤 도시인가? 여기에 사도행전 16:12에 마게도냐의 첫 성이요, 로마의 식민지라. 마게도냐의 수도격이야.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라. 이렇게 지금 정의되어 있지. 이 빌립보는 원래 Alexander 大王의 아버지인 마게도냐의 Philip 2세에 의해서 BC 360년쯤에 창건이 되어 가지고, 그 이름을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이라고 정한거예요. 마게도냐의 Philip 2세가 Thrace족속들 한테 땅을 빼앗아 가지고 거기에 도시를 창건해서 자기 이름을 붙인거라. 그렇게 빌립보라는 도시가 성립이 되었는데, 창건이 되었는데, 이게 이제 로마제국 --전체 그리스이스와 마게도냐 전체가 로마 제국-- 의 식민지가 되면서 로마의 땅이 되었지. BC 168년에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어요. 그랬다가 BC 42년에 Octavianus의 군대와 BurtusCasius의 공화국 군대간에 전투가 벌어져서, Octavianus의 승리 후에 Octavianus 휘하의 그 장교들과 군사들을 빌립보에 정착을 시켰어요.

그래서 이 빌립보를 로마의 특별식민지(Colonia)로 성립시키고 그곳의 시민들은 --빌립보의 시민들은-- 로마의 시민들이었으며 “ius italicum”문자 그대로 하면 “italia의 벗곧 이탈리아 반도 내의 로마인들에게 부여했던 전적 특권을 그들에게도 부여했다구. 그래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의 시민들이지만 마치 로마 시내의 시민들과 똑 같은 특권을 누리는 시민들이었다 말이야. 그래서 Octavianus의 군대의 제대군인들이 두 차례에 걸쳐서 거기 정주하게 돼요. 한번은 BurtusCasius의 전투, 다른 한번은 이 Antonius군대와의 그 유명한 Actium해전 끝에(BC 31) --그 전쟁으로 Octavianus가 로마의 단독 통치자가 되지. 로마의 첫 황제 Augustus Octavianus-- 그 양전쟁에서 승리군인으로서 빌립보에 정착을 시켰다구. 그리고 그들에게 이런 특권을 주었단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빌립보의 시민들은 로마의 시민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했어요. 이것이 아까 우리가 본 대로 사도행전 16:12-40까지 잘 반영이 돼 있지. 바울에 대하여 뭐라고 起訴해요? “로마법과 로마의 풍습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한다.” 하는 것을 기소하지. 그러나 나중에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주장하자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구. 로마 시민의 의식과 로마 시민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히 강했다 말이야.

이 빌립보서의 짧은 便紙에 바울은 많은 정치적, 군사적 용어를 많이 사용해요. 가령 1:27, 3:12-15, 3:20ff, 4:3등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특히 政治的, 軍事的 용어들을 참 많이 사용한다구. 그것은 이 빌립보의 도시의 성격과 많이 관계가 있는 거라. 빌립보인들이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 군사적 용어들을 아주 쉽게 이해를 하게돼요. 그래서 바울이 이런 언어들을 많이 쓴다구.

사도행전 16:12-40, 바울이 아세아에서 마게도냐롤 건너가서 빌립보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이제 잘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느때냐 하면 AD 49년쯤 이른바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중에 발생한 거야. 의 특별한 지시로 바울은 아시아의 선교지를 떠나서 유럽으로 건너가서 유럽 대륙에 처음 세운 교회가 이 빌립보 교회였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제국의 서반부를 로마 제국의 동반부와 연결시킨 소위 “Via egnatia” 로마의 중요한 군사행정로에 놓여있는 중요한 도시였어요. 바울이 주로 이런 중요한 로마의 군사행정로를 따라서 선교를 했지. 거기에 놓여있는 중요한 도시가 빌립보였는데 그곳에서 유럽대륙에 있어서 첫 교회를 세우는 거다.

그러니까 빌립보에서의 교회 개척은, 교회창건은 바울의 선교전략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봐야 되고, 적어도 그 무렵에는 바울이 로마까지 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해요. Via egnatia 길이 어디로 연결해? 로마로 연결한다. 그 길을 쭉 따라가면 로마라. 누가 한번 빌립보서 4:15절을 읽어봐요.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마게도냐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또는 이 복음의 시초였음을 굉장히 의식하는 거야. 보는 바와 같이, 이 빌립보 교회에서의 바울의 첫 회심자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와 그의 가족, 간수와 그의 가족, 그리고 빌립보서에 언급된 에바브로 디도, 유오디아, 순두게, 클레멘트... 이런 자들인데, 이 이름들이 전부 이방이름들이라. 전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어요. 그래서 빌립보 교회는, 거기는 회당도 없었고 무엇으로 시작을 해?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시작을 해. 또 빌립보에서 바울의 로마 관리들과 처음 갈등을 일으켜요.

바울이, 아까 본대로 이 시민들의 고소, 로마법과 로마 풍습에 어긋난다는 고소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 로마 관리들이 그걸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 몰라요. 바울에 어떻게 처리할지 모른다구. 다만 바울이 로마시민이라는데서 사과를 하고 제발 조용히 떠나 달라고 사정 사정했어요. 그래서 바울이 떠난다구. 그래서 지금 이제 고린도에 당도해서는 Galio앞에서 정식으로 바울이 재판을 받고 무혐의로 바울이 기각당하지. 고소가... 그게 이제 선례라. 요새말로 하면 판례가 되는 거라구. 당분간. 근데, 그 전에 빌립보에서는 로마 교회와 로마의 관리들과 처음 갈등을 일으켰는데 로마의 관원들이 바울과 그 바울의 일당을 어떻게 처리할 줄 몰라요. 그래서 지금 그냥 흐지부지 제발 좀 조용히 나가 달라고 사정한거야.

이제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특별히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예외적으로 빌립보 교회로부터는 자기 개인의 용도를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았어요. 1:3-5, 2:25, 4:10-14f. 근데 4장을 쭉 보면 4:10f를 보면 바울이 예외적으로 빌립보인들로 부터는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데 있어서는 아주 불편해 해요. 바울의 원칙이 뭐야?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일체 안받고 자기 손으로 생계를 벌어서 활동하는 거였는데, 빌립보 교회만은 이 일로 허락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불편해 한다구.

바울은 빌립보서 4:1에 빌립보인들을 뭐라고 불러요. “나의 兄弟,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고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이렇게 그냥 자기 감정을 충분히 표현해서 빌립보인들을 부른 것을 보면, 이들과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자 다음 시간에.

 

 

 

바울서신 // 10

 

 

 

빌립보서 2

 

 

 

 

1. 빌립보서를 기록하게 된 정황

지난주에 빌립보 도시에 대해서 했고 바울이 빌립교회를-

, 그러면 이 편지를 쓰게된 정황. 어떤 정황에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나? 이 정황을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빌립보에서 몇가지 정보를 우선 추측해야 돼요.

첫째로, 감옥에서 지금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지. 감옥에서 편지를 쓰면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천거하고 있어요. 그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추천하고 그들을 잘 받아 들이도록 부탁을 했다구. 이렇게 해서 그들이 이제 빌립보에 당도할텐데 그곳에서 그들이 잘 영접받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을 봐요. 혹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빌립보 교회의 오해나 비판을 미리 풀어서 해소하려고 하는 점도 있지 않나 생각해요(2:23f).

에바브로디도가, 분명히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에바브로 디도편에 헌금을 거두어서 바울에게 보내면서 에바브로디도로 하여금 바울을 감옥에서 좀 수발들도록 했던 것 같애. 근데 에바브로디도가 혹 그 일을 충실히 못했을까? 또는 그로부터 소식이 별로 없었다든지 이리해서 가령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오해가 좀 있던가? 혹 빌립보 교회에서 비판도 좀 있었는지 모르지. 그래서 바울이 일부러 그 부분을 상당히 장황하게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의 당부를 자기에 대해서 넘치도록 잘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심히 아파가지고 어려운 지경에 빠졌었노라고. 근데 그의 병환에 대해서 빌립보 교회에서 걱정할까봐 자기가 돌려 보낸다.”고 상당히 길게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그런 오해도 좀 있었는지. 그런 것을 우리가 상관케 하는데 바울이 있었다면 바울이 그런걸 해소해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에 잘 도착하고 영접받도록 준비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지요.

둘째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보낸 편지, 헌금을 감사히 잘 받았다는 영수증을 떼어 주고 있는 거지.

셋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몇가지 문제들을 이 편지에서 다루고 있어요. 특히 어쩌면 에바브로디도에 의해서 바울에게 보고 된 빌립보 교회 내의 분쟁 상태를 바울이 상당히 집중해서 다루어요. 1장 후반부 부터 2장까지 또 4장에도 좀 그런게 나타나고... 그래서 교회 전체가 하나됨이 중요하다.” 하는 것을 굉장히 강조한다구. 그 하나됨을 위해서는 서로 겸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함의 예를 들어서 겸손을 굉장히 강조하지.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주장하지 말고 서로에게 겸손하고 서로를 섬기고 서로의 남의 이익을 추구해야 된다구 하는 거예요.

네번째로, 빌립보 교회는 어쩌면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대 기독교 열광주의자들에 의해서 복음의 이해에 혼돈을 가져오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혼돈을 가져오는 문제들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아마 그들은 혹 외부에서 침투한 자들인 것 같은데, 그들은 바울의 복음에 반대하고 빌립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영적 체험을 지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완성의 표징으로 자랑하면서, 현재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재림때 있을 구원의 완성에 대한 미래적 소망, 이런 것을 다 무시하면서 지금 현재 완전한 구원을 누리고 승리자로 살 수 있다는 순전히 영광의 신학또는 승리의 신학” “trimphalism"이라고 그러지 이런걸, trimphalism에 도취된 자들이 빌립보 교회에 와서 좀 어지럽게 하는 것 같애요.

마지막 다섯번째로, 빌립보 교회는 또 외부 세계의 계속되는 핍박 아래 놓여 있었던 것 같애. 지난번에 바울이 이 교회를 세울 때 부터 벌써 빌립보의 로마 시민 정신과 부딪혀 가지고 바울 스스로 감옥살이하고 고난 받는 것 같죠. 이 빌립보서를 계속 읽으면 그와 같은 갈등이 계속되고 외적인 핍박이 계속되었던 것 같애. 이런 그 전투를 우리가 빌립보 내에서 유추할 수 있는데, 이런 걸 볼 때에 바울이 빌립보인들에게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감사함과 그들의 선물과 그들의 자신을 위해서 애써줌에 대한 감사함과 그들에 대한 자기의 넘치는 사랑과, 바울의 모든 편지중에서 이만큼 교회에 대한 사랑을 퍼 붓는 편지가 없어요. 빌립보서 같이 그에 대한 사랑과 또 핍박의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또 핍박의 상황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교회 자체내에서 unity 하나됨을 유지하도록 권면하고 외적인 이방인들의 핍박이나 유대 열광적 그리스도인들의 훼방에 맞서서 믿음에 굳게 서도록 이 편지를 쓰는것 같애.

 

 

2. 기록된 년대

그 다음에 이제 중요한 문제 하나가 이 편지가 그럼 언제 어디서 쓰였느냐?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구. 3개의 이론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하나도 학자들의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그런 설이 아닌 의견의 일치가 없어요. 이 문제에 있어서.

첫째는, 이게 전통적인 견해인데 로마에서 AD 61-63년 그 사이에 썼다.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에 이제 감옥. 가이샤에게 상소를 해서 로마에 가지. 그 감옥에 있게 되는데 이때 썼다. 그때 당시 빌립보서가 굉장히 늦은 편지야.

둘째 이론은, 가이사랴에서 썼다. 58-60년쯤에 가이사랴에서 썼다. 바울이 로마에 끌려가기 전에 가이사랴에서 감옥살이 했지. 그때 썼다는 이론.

셋째로는 에베소에서 썼다. 54-57년 사이에 에베소에서 썼다는 이론. 에베소에서 썼다는 이론은 지리적으로 빌립보와 좀 가까워서 선물이 오고 가고 하는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러나 가이사랴나 로마는 상당히 멀다구. 빌립보에서 선물이 옥에 가는 것을 설명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지지. 그러나 반면에 바울이 가이샤라와 로마에 갇혔던 해를 잘 아는데, 에베소에서도 분명히 엄청난 핍박을 받은게 사실이어요. 고린도후서 1장에 뭐라 그래. 자기가 아시아(에베소)에서 극심한 핍박때문에 자기생을 포기할 정도가 되었다고. 그래서 분명히 사도 바울이(사람들이 많이 추측하지) 혹 거기서 감옥생활하다가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웠단 말인가? 뭐 여러가지 추측을 한다구. 근데 하여간 극심한 --거의 생을 포기할 정도의-- 핍박을 받은건 사실이라고 그래. 그래서 그렇게 보면 에베소에서 감옥살이를 했을 텐데, 이 빌립보서가 오고 가고 빌립보인들이 에바브로디도로 하여금 감옥에서 수발을 들게 할 정도로 장기간 했느냐? 그런걸 잘 모른다구.

어떤 사람들은 또 여기 이게 지금까지 말한게 주로 전통적으로 토론되어온 세가지 라이벌 이론들인데, 하나 덧 붙여서 AD 50년쯤에 고린도에서 감옥생활 --바울이 고린도에서 붙잡혀 가지고 거기 아가야 총독 Galio앞에 서게 되지. 그래서 고린도에서도 아마 감옥생활-- 을 좀 했기 때문에 거기서 쓴 거 아니냐? 그러면 고린도도 물론 빌립보와 좀 더 가까워서 선물이 오고 간 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가 있는데 사실 고린도의 감옥생활에 대해 잘 몰라요. 3-4가지 설들이 어느 하나 완전한 설득력이 없이 그냥 학자들간에 추측으로 이중에는 그래도 어느 설이 제일 그럴 듯 하다고 가정하고 할 따름이지 어떤 확실한 것은 없어요.

근데 빌립보서의 연대 잡음도 좀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서와 좀 비슷하다구. 왜냐하면 빌립보서 3장에 바울의 유대 율법주의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또는 믿음으로 의인됨의 바울의 복음이 빌립보서 3장에 펼쳐져 있지. 그러기 때문에 이 편지가 굉장히 이른 편지면, 사람들이 보통 이 이론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만 펼쳐져 있지 다른 편지들은 없다는 것에 대한 좋은 그 반박거리가 되지. 바울이 일찌감치 그의 복음을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으로 전개하고 가르쳤다는 것을 뒷받침 한다 말야.

그러나 빌립보서의 서론적인 문제에서 특히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빌립보서 3장이) 빌립보서가 하나의 편지로 되어 있느냐 아니면 두개 이상의 편지들이 지금 합본 되어 있느냐? 근데 이것은 무엇을 가지고 그러느냐 하면 빌립보서 3장을 가지고 그래. 빌립보서 3:2-4:3이 혹 나중에 끼어든게 아니냐. 3장 한번 펴 봐요. 2:19-3:1을 누가 한번 쭉 읽어 봐. 우리가 어떤 분위기를 갖게 되는가.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자기가 지금 감옥에서 최종판결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판결이 어떻게 나는가를 봐 가면서 디모데를 보내겠다. 그리고 자기가 만일 무죄 석방이 되면 자기도 곧 빌립보를 방문하겠다고 그래. 계속 읽어봐요.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로 알고 심히 근심한 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하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가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여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리라

여기까지 읽으면, 바울이 편지를 지금 미리 하려는 것 같지? 자기 계획을 발표하고 자기가 지금 감옥에서 잘 풀려나면 너희도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그러구. 그 전에 이 교회의 안위를 위해서 디모데를 보내서 좀 소식을 듣고 싶고, 지금까지 2장에서 다루는 문제는 교회의 외적인 핍박과 그러나 특히 내적인 분열 이거였다구. 2장에서 주로 다룬것은 적인 분열이 있으니까. 그래서 우선 디모데를 보내는데, 에바브로 디도도 이제 보낸다 말이야.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의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사자니까. 에바브로디도가 다시 빌립보에 돌아오는 건 아니지. 그래서 이렇게 마무리를 지금 편지를 해 가면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3:1에 인사를 하고 있다 이말이예요. 그러다가 이제 3:2부터 읽어봐요. 와전히 분위기가 바뀌어져 버린다구.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 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

. 여기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지? 갑자기 바울의 어조가 격렬하게 된다구. 그래서 여기 손 할례당이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말이 κατατομη그게 바울이 지어낸 말이야. “περιτομη이게 할례라는 말이지 그것을 비꼬아서 κατατομη라고, 이것은 자기 몸을 짤라낸 놈들이라 그 소리야.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유대 지금 적대자들이 빌립보교회에 침투해 가지고 빌립보인들에게 περιτομη(할례)를 받아야 된다. 그래야 구원을 받고 할례를 받으면 지금 벌써 완성된 구원을 보장받는다.” 이렇게 주장하니까, 그것을 비꼬아서 우리가(그리스도를 믿는사람) 진짜 περιτομη라 왜? 새 언약의 백성이니까. 할례는 뭐야? 언약의 표징이지. 우리가 진짜 할례당이고 그럼 유대인들은 뭐냐? 그들은 육신을 신뢰하는, 자기 육신 한 조각을 짤라내는 자들이다. “κατατομη라 이렇게 욕을 한다구.

게다가 또 뭐라고 욕을 해요? 개들이라고. 개놈들이라고. 거기 개들을 삼가하라개들을 주의하라는 말이야. 달려드는 개새끼들을 주의하라. 근데 이 개란 말은 원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두고 쓰는 말이지. 불결한자, 이방인들. 그러한 말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쓸때 개라 그랬다구. 근데 그걸 바울이 누구한테 완전히 뒤집어서 --아까는 그리스도인들이 περιτομη 이고 유대인들은 뭐야? κατατομη 라고.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περιτομη-- 그들을 뭐라? 개놈들이라구. 바울이 욕을 썩 잘했어요. 그래서 이 유대인들이 보통 이방인들에게 하는 욕을 뒤집어서 그들에게 돌려 하고 있어요. 그리고 거기 사람들은 자기들은 율법지켜서 늘 의롭다고 하는데 무슨 말씀(?) “행악자들이라. 악을 행하는 놈들이라.” 이렇게 그냥 욕들 퍼부어 버린다구.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육신을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섬기는 우리가 진짜 할례당이라. 하나님 백성이라.” 이렇게 하면서 욕을 하고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과거와 다메섹도상에서의 변화를 이제 쭉 써요. 이게 자기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가장 personal하게 쓰는 부분이 이 부분이야. 개인적으로, 보통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사도직에로의 부름과 복음의 계시로 상당히 강조해서 자신의 직접적인 구원과도 관계해서 가장 personal하게 쓴 부분이예요. 쭉 읽어봐 4:3까지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을 내 주 그리스도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불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날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아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트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부분이 빌립보서에 원래 같이 쓰여진 것이 아니고, 혹 나중의 편지가 합본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이유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4:1-아니 3:1-2로 넘어가는데 아주 부드럽지 못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단 말이야. 3:1까지는 거의 편지를 마무리 하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를 느끼다가, 갑자기 바울이 격렬한 어조로 빌립보 교회내에 침투한 자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빌립보인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올바른 신앙 연습을 자기의 자서전적인 체험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어요.

또 하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빌립보 교회에 1-2장에 다루는 문제는 빌립보 교회 내의 겸손이 부족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자기 이익을 좇는데서 오는 이기주의에서 오는 분파문제와 또 1:2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외부적인 핍박 이런 종류의 것이었는데, 3:2부터 다루는 문제는 문제의 종류가 좀 달라 이것은 외부에서 빌립보 교회내에 침투한 어쩌면 유대 광신주의자들이 조금 다른 복음을 가지고 와서 빌립보인들을 혼돈시키는 문제의 성질이 많이 다르단 말이야. 그런 이유로 요 부분이 나중에 덧 붙여지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돼요.

우선 여기에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 어떤 자들이었느냐? 여기서 보면 분명히 유대인들로서 할례를 구원의 표징으로 내세우면서 할례만 있으면 구원을 보장 받는다. 그러니까 이들을 바울은 뭐라 그래? 육신을 신뢰하는 자들이라. 육신에 할례 받아 놓고는, 육신의 한 조각을 짤라 내 놓고는 그것으로 구원을 확신했다고 하니 육신을 신뢰한 자라 그러지. 또 이들은 분명히 지금 벌써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선동한 것 같애. 그러니까 바울이 뭐라 그래? 우리가 종말에(20-21),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우리의 천한 몸이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됨으로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거고, 그때까진 우리가 구원의 첫 열매를 가진자로서, 믿음으로 의인된 자로서 어떻게 하는자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데 뒤의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서 경주하는 자로 --바울이 구원으로 달려가는 자로-- 이렇게 그리고 있어요.

그래서 이 자들은 분명히 Trimphalism, 지금 우리가 벌써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렇게 강조하면 자연히 뭘 비판하게 돼? 그리스도의 고난을 비판한단 말야. 그리스도인이 고난 받는 것은 이것 뭐 믿음이 좀 부족해서다. 또는 축복을 잘 못 받아서이다. 복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 이다.” 이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부끄러워하고 또는 비판하고 또 이들은 무엇을 그러면은 자기들의 구원 받은 상태를 자랑한거 같애? 육신적인 것, 세상의 가치들 먹고 마시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을 고귀한 가치로 생각하면서 그걸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바울이 또 아래에서 욕을 하지? 그들은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긴다고 욕을 한거예요.

그리고 부끄러운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가치 전도... 우리 한국도 그래. 우리 한국도 그리스도인이 고난 받은 것은 뭐가 잘못되서 그런거지? 기도원에 가서 뭘좀 바쳤어야 백배, 천배로 축복 받는데 기도원에 안가서 그러지. 그래서 지금 이런자들아 그럼 이런 자들은 또 어떤 자들이었을까? 할례와 율법을 강조한 것을 보면 그리고 그들이 유대인인 것을 굉장히 내세운 것을 보면 거기에 대해서 바울이 뭐라? 그래 나도 유대인이었고 나도 팔일 만에 할례 받았고 사실은 율법에 있어서는 흠없는 자였다고 그래. 그러나 그런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 그런 것을 보면 분명히 이들은 유대 주의자들이다.

반면에 이들이 지금 여기서의 구원의 완성을 부르짖고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을 부여하지 않고 이런 것을 보면 좀 영지주의적 요소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지금 두 그룹을 상대하고 있다. 한편은 유대주의자들(갈라디아에 침투한 유대주의자인듯)로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이런 유대주의 자들, 또 한편은 좀 영지주의자들, 혹 고린도에 침투한 영지주의자들 같이 이미 자기들이 지식을 가졌고 엄청난 성령체험을 하고 그래서 --그것으로 자기들의 구원이 완성이 되었다. 그래서 뭐 미래에 더 바라볼 것도 없고 도덕적으로는 육신으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고린도인들 그랬지.-- 우상숭배에 열심히 참여해도 되고 성문란에도 참여해도 되고 뭐 이렇게 봤다 말이야.

17절 이하에 보면 이들도 자기 배를 으로 섬기고 부끄러운 것을 자기들의 영광으로 삼고 이방인들도 감히 저지르지 않는 형태의 음란행위에 참여하면서 도리어 그것이 자기들의 자유를 잘 나타낸다고 그것을 자랑했단 말이야. 또 이들에 대해서 뭐라고 해요? 18절에 십자가의 원수라 한다구. 이건 또 우리에게 무엇을 상기시켜, 고전1-2장에는 십자가의 도가 뭐라? 멸망하는 자들에게 뭐라? 미련한 것이요. 거침돌이 된다구. 십자가를 싫어하고 말이야. 그래서 이 뒷부분은 --3장 뒷부분은-- 또 혹 고린도에 침투한 자들같은 경향을 가진 영지주의자들 아니냐? 이렇게 그래서 바울이 3장에서 두 그룹에 적대자들을 상대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학자들도 있어요. 그러나 고린도 교회 내에도 고후 10-13까지의 침투한 열광주의자들은 영지주의자라고 보기 보다는 원래 고린도가 헬라 도시로서 지식을 추구하고 지식을 통해서 지금 벌써 구원을 누릴 수 있다는 그 바탕이 있는데다가 거짓 사도들이 침투해서 혼란을 일으킨 것이지. 그게 나중에 발달하는 영지주의자라고는 하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빌립보에도 바울이 두 그룹을 상대한게 아니고 유대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 두 그룹을 상징한게 아니고 유대인들로서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자기들의 유대교적 유산, 곧 할례와 율법이 언약의 표징들로 자기들의 구원을 확실히 한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그 밑바탕 위에다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자기들의 영적체험 이런 것을 또 예로 들면서, 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게 아니고 항상 승리자로 사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뭐 이런거 저런거 얽매어 사는게 아니고 자유롭게 산다고 하면서, 그러니까 율법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도덕적으로 좀 문란한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그들은,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유대 광신주의자적 기독교인들, 소위 ‘Jewish Xian enthusiasts' 유대 그리스도인 광란주의자들, 광신주의자들이 지금 여기 빌립보서 3장에서 일관되게 공격되고 있지 않느냐. 바로 이들이 고린도에 침투한(고후10-13)에서 바울이 격렬히 싸우는 거짓 사도들이라구. 그러니까 같은 종류의 적대자들인 것으로 우리가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침투를 해서 바울이 어떻게 대항하게 되었느냐? 이미 빌립보서 처음 쓸 무렵에 이들의 침투를 알고 바울이 써 내려가면서 첫째로 외부적인 핍박을 극복해야 된다(1:27-28)고 해놓고, 그 다음에 이제 빌립보 교회내의 문제 --자기들끼리의 내분의 문제-- 빌립보인들의 자기 추구하는 문제를 다루고 그 다음에 이제 외적인, 외부에서 침투한 거짓 선생들의 문제를 다루고 이렇게 바울이 체계적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다루어 가려고 처음부터 이 편지를 구상하고 썼느냐? 아니면 진짜 격렬한 언어의 변화라든지 내용의 변화에서 우리가 빌립보서가 적어도 두개의 편지로 되어 있다고 봐야 되느냐? 원래는 1-2, 그리고 4장을 이렇게 썼단 말이야. 그러다가 나중에 또 빌립보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후에 편지를 썼는데 빌립보 교회에서 나중에 편지가 모아 질때 이게 합본된 거냐 이런 문제가 남는다고.

이렇게 합본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게 뭐냐면, 4:10절 이하에 바울이 410절에서 20절까지 헌금 문제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동시에 앞으로는 되도록 나에게 그런 헌금을 안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행간에 표현을 해요. ? 이 빌립보인들이 바울의 원칙이 뭐야? 절대 원칙이 자비량이지. 그런데 빌립보인들이 예외적으로 빌립보인들에게서는 바울이 이것을 받았어요. 바울이 자기의 선교 원칙에 대해서 여러번 이야기 해(대표적인 예를 고전 9장에서 찾을 수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referrence를 좀 찾아볼까? 한번좀 찾아 봐요. 살전 2:9절 한번 읽어봐요.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거기 그래서 자기가 누구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자기 손으로 벌어서 먹고 살면서 복음 전했다 그러지. 살후 3:7-12도 마찬가지야. 읽진 않겠어요. 그 다음에 바울이 고전 4:8-13, 9:1-18, 고후 11:7-10에서 이 원칙을 굉장히 되풀이한다구... 근데 가장 뚜렷한 곳이 고전 9:12-15인데 한번 읽어봐요.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여기서 분명히 말하지. 주께서 복음 선포한자들은 복음으로 부터 생계를 얻어 살도록 분명히 특권을 주었단 말이야. 그래서 다른 사도들은 다 특권을 주고 심지어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까지도 그 특권을 주장하고 있어. 고린도인들로 부터 대우를 잘 받는다구. 그런데 바울은 그 권리를 자기는 안쓰기로 포기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바울이 주께 불순종한 것이지. 근데 바로 이게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책잡는 이유중에 하나였다구. 이 거짓 사도들이, 아 주께서 이렇게 가르쳤는데 바울이 너희들 한테 와서는 헌금해 달라고 --자기 생계를 지원해 달라고-- 못한 것은 자기 사도직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런거다 말이야. 그래 놓고는 이제 에베소로 간 뒤에 자꾸 무슨 예루살렘을 빙자해서 헌금내라고 자꾸 그러구. 디모데 보내고, 디도 보내고 자꾸 그래서 헌금 뜯으려고 하는데 그게 바울이 사기꾼이라고 이런식으로 된거라.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자기 원칙을 분명히 밝혀요. 여기서 보면 바울이 왜 헌금받는 것을 거부했느냐면, 복음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라 값으로 사는게 아니고 복음 자체가 값없는 은혜에요. 이 값없는 은혜를 선포할 때에 값없이 할때에 그 은혜의 성격이 더크게 나타난다구. 돈받고 선포하면 값없는 무료의 복음을 돈으로, 돈받고 주는 것같이 되잖아. 그래서 바울이 이 복음에 값없는 은혜의 성격을 강조하게 위해서. 둘째로 그의 적대자들이 바울이 자기 선교를 빙자해서 자기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추구한다고 비판하지 못하도록. 셋째로 남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복음을 원활히 증거키 위해서 자기를 위하는 헌금은 거부하고 자기 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의적으로 빌립보교회에서는 받았고, 무엇을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를 위해서 복음의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선포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

반면에 예루살렘 가난한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촉구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는 바울이 열심히 헌금을 거두었지, 자기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이거 지난번에 설명했죠. 이 헌금의 의미. 그런데 이 빌립보 교회만 아주 예외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도 아무 불평없이 --고린도 교회는 부자 교회라 한대도 그냥 그 문제만큼 몇년씩 끌면서 바울에게 온갖 욕을 다 보이면서 조금 헌금을 했는데-- 빌립보 교회는, 고후8:1- 까지 읽어봐요.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빌립보 교회가 --마게도냐 교회는 빌립보 교회를 두고 말하는 거지-- 극심한 환란 가운데 핍박가운데서도 또 극심한 자신들의 가난속에서도 기쁨으로 그리고 넘치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했다는 거야. 그걸 지금까지 헌금을 오해하고 문제를 일으킨 고린도 부자 동네에, 아가야의 고린도 교회에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자신이 또 빌립보 교회로부터 개인적인 헌금은 받았어. 바울이 예외적으로 빌 4:16한번 봐바! 한번만이 아니고 몇번 받았다고. 그것도 빌 4:16한번 읽어봐요.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자기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도 그랬단 말이야. 한두번 근데 지금 감옥에 있는데 또 보냈지. 지금 어느 감옥에 있는지는 잘 몰라도, 그러니까 몇번 보낸거라. 그걸 바울이 또 자랑을 해요. 고후 11:8-9한번 보라구 한번 읽어봐요.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거라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바울이 뭐라 그래요? 고린도인들이 부끄럽게, 이말 읽으면 고린도인들이 상당히 부끄러워 해야지, 고린도 교회는 부자교회라. 근데 거기서 바울이 이럴때 너희들에게 누를 안끼치기 위해서 자기손으로 일했지만 그도 부족했을때는 어떻게 했다구. 이 고린도 교회보다 훨씬 가난한 마게도냐 교회에서 좀 지원해 주어서 내 부족을 채워서 내가 먹고 살면서 내가 섬겼다고 그러지. 그러니까 마게도냐 빌립보 교회만 아주 예의적으로 바울이 헌금을 받은 거예요. 근데 이제 이 마지막에 감옥에 있을 때에 이것을 보냈는데 빌 4:10-19절을 자세히 안읽겠지만 여기서 문제가 이거야. 두 개예요. ? 바울은 벌써 1장 첫머리에서 헌금을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고, 바울이. 13, 5절 한번 읽어봐요.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복음을 위해서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함, 이것을 교제라고 표현하지. Koinonia라고. 그래서 이미 여기에서 지금 언급을 했어요. 근데 이 편지를 지금 에바브로디도에게 손에 쥐어서 보낼 때에 가장 당면한 핵심 문제가 헌금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영수증을 써주는 거라. 잘 받았다고. 근데 그걸 바울이 가장 뒤에다가, 이렇게 지금 3장이 원래 빌립보서에 내용에 있었다면 너무 멀리 저기 뒤에다 둔거라. 그게 좀 이상하다 이거야. 그러니까 아마 3장은 나중에 끼어든게 아니냐. 2장 다음에 4:10부터 이렇게 헌금문제가 다루어진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 3장이 끼어들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그런 것도 하나의 이유로 내세운다구. 그러나 3장이 끼어들지 않고 원래부터 빌립보서가 3장을 포함한 대로 한 편지로 쓰였다면, 그런면에서 우리가 설명을 해야 돼. 왜 바울이 헌금문제를 가장 뒤로 이렇게 미루느냐. 미루되 장황하게 쓴다구. 10-19절까지 자기 삶의 태도, 개성에 대한 태도를 밝히면서. 그래서 여기 10-19절까지 자세히 보면 두가지 엇갈리는 말이, 자꾸 엇갈려. 하나는 보내줘서 고맙다는 감사하다는 말과 다른 하나는 사실은 이것이 없이도 살 수 있다.

자기가 궁핍에 처할 수 있고 부요에도 처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것을 배워서 그 비밀을 배워서 사실은 다시는 헌금을 안보내주는 것이 좋을 뻔하였다. 이런 행과의 말을 해요. 바울이 그래서 빌립보 교회에서만 바울이 예외적으로 헌금을 여러번 말하는데 이것이 자기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써 한편은 감사하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은 상당히 껄끄러워 받지 않아야 되는데 받게 됐음을 두가지로 표현한다구.

그래서 내용적으로 빌립보서 3장이 끼어든 것이 아니고 원래 한편지로 쓰였다고 보는 사람들은 왜 그러면 헌금 문제를 제일 뒤에 장황하게 썼느냐? 그것은 헌금 문제가 상당히 바울에게는 개인적으로 껄끄러운 것이어서 자연히 그런 것들은 자꾸 미루다가 제일 뒤에 다루게 된거라.” 그렇게 설명할 수가 있지. 그렇게 설명하는 사람들은 3장이 끼어든게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빌립보서의 unity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더 자세한 논증이 필요하지만 이것도 어느 확실한 이론이 --어느 대다수의 학자들이 지지하는 이론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크게 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적 경향을 뛰는 사람들은 빌립보서 3장이 다른 조각으로서 여기에 끼어들었다.” 물론 바울의 편지지... 그런데 원래 빌립보서를 쓸 때에 쓰여진게 아니고 나중의 편지가 여기에 합본되었다고 보는거고. 좀 보수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이게 하나의 편지였다고 주장을 하는거고. 그런데 그 두주장이 어느 하나가 더 확실한 건 아니예요. 그런 경황에 우리는 대개 이게 빌립보서 전체가 하나의 편지로 지금 있는대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더 안전하지. 그러니까는 확실히 이게 분리된 편지였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가령 갑자기 tone이 변한다든가 바울의 어조가 변한다든가 주제가 좀 변한다든가 이런 것은 확신을 주는 그런 무게 있는 주장은 못돼요.

왜 그러느냐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바울에게 보통 평안한 서재에서 편지쓰는 우리의 입장을 강요한 거라구. 우리야 편안히 방안에서 차곡차곡 편지를 쓰겠지만 바울은, 이 감옥에서, 지금 빌립보 교회에 여러날 이런 편지가 이게 지금 짧은 편지지만 여러날에 걸쳐서 쓰기도 하고 여러 주에 걸쳐 쓰기도 하는데, 그 편지 쓰면 이렇게 안쓸텐데라는 그 전제에서 시작해서 그러므로 바울도 그렇게 안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개의 편지일 것이다.”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오늘날 우리의 편안한 상화속에서의 논리를 바울에게 강요하는 거라구.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비판자들이 내놓은 이유보다더 좀더 무게 있는 이유가 나오기 전에는 이 편지가 하나의 편지로 쓰여졌다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 말이예요.

그러나 반면에 이 편지가 원래 두 개의 편지인데 합본되었다고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수주의자들은 무조건 그러면 그냥 어디 영감들이 다 달아나고 성경이 그냥 빵구난 줄로 아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도 바울에 의해 쓰여진 거라, 영감받아서. 그러니까 그렇게 무서워 해서는 안된다구. 나중에 더 좋은 이유가 발견이 되어서 이게 두 개의 편지가 합본 되었다고... 그렇다고 해서 영감이 더 떨어진거야?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몇번 편지를 쓴거지. 그래서 아까, 지난번에 이야기한대로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 전후서에 전에 썼던 편지들 또는 잃어버린 편지들의 조각이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들어갔다고 본다 말이야.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서 우리가 이런 것을 너무 무서워 하지 말고 살펴봐야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내 견해도 그래) 더 확실한 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는 빌립보서는 하나의 편지로 쓰여졌다고 보는게 나아요. 자 마지막으로 빌 1:27 한번 누가 읽어보아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 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 부터 난 것이니라

거기를 좀 보라구 거기가 지난 번에 내가 빌립보란 도시가 어떤 도시? 알렉산더 大王의 아버지 PhilipThrace야만인으로 부터 빼앗아서 만든 도시라 그랬지. 자기 이름을 붙인 도시라 그랬지. 그때부터 군사적인 garrison town 방어도시의 성격을 띤 거라. 근데 나중에 로마 사람들이 이 도시를 재건해 가지고 거기다가 Octavianus가 누구를 정주시켰다고? 자기의 Burtus와 그의 추종자들과의 결전에서 자기 군대를 승리하게 한 군인들을 거기 정주시켰다고 그랬지. 나중에 또 Antonius와의 Actium해전에서 마지막 승리해서 OctavianusAugustinus로서의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을 때에 또 그때 Antonius의 군대를 쳐부순 자기의 군대들을 거기 정주시켰다구. 그래서 많은 특권을 주었다고 그랬지?

그래서 이 빌립보 도시가 상당히 군사적인 성격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고 또 이제 우리 신약시대에는 로마 시민정신, 로마의 군대들과 그들의 후손들로 시민을 이룬 로마의 시민정신이 그래서 아주 컸다. “ius ilalicum"이탈리아의 법이 빌립보에서 시행되는 이탈리아 반도내에 로마 시민의 특권을 그냥 그 자리서 누리는 특권을 가진 것이었다. 그런 군사적인 로마 시민정신을 바울이 염두에 두고 빌립보서 짧은 편지에 군사적인 또는 시민적인 Metaphor들이 많이 쓰인다 그랬지. 지난번에.... 320절 거기에 우리의 시민권 이야기가 나오지.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단 말이야. 빌립의 시민들은 자기들의 시민권이 어디서 나와? 로마에서 나와 그걸 가지고 굉장한 긍지로 생각했다 말이야. 그래서 빌립보의 시민들은 빌립보가 야만인들의 세계로 둘러싸인 곧 바로 옆의 thrace 야만인들 세계 속에 박힌 이 세계의 지대 민족 문화 민족 로마 제국의 수도라는 것을 굉장히 긍지를 느끼고 그래서 로마에 지대민족의 높은 시민 정신 높은 문화를 이 야만인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어. 그런 것을 바울이 여기서 Metaphor로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이 세상에 암흑의 세상에 박혀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라. 빌립보가 야만의 세상에 박혀 있는 위대한 로마제국의 식민지 이듯이 그것을 바울이 그림으로 교회를 설명하는 수단, 교회는 뭐냐? 이 세상에 박혀 있는 이 암흑의 세상에 박혀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야. 빌립보의 시민들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서 야만인들 세계에 있지만 뭐예요? 로마의 시민이라구. 교회 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속에 있지만 세상의 시민들이 아니고 어디 市民이야? 하나님 나라의 시민. 바울이 여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그래.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예요.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세상의 倫理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1:27-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된다 이 말이예요.

빌립보인들은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말. 동사, 복음에 합당하게 하다. 여기서 나온 말이 정치(politics) 라는 말이예요. 헬라어의... 그래서, 정확히 말해서 정치하라.” 그말이예요. 정치란 뭐야? 삶의 정돈, 삶을 꾸려가는 거지 복음에 합당하게 정치해가라. 교회 내에서 복음에 합당하게 정치해 가거라. 복음에 합당하게 삶을 규제하고 정돈하고 복음이 제시하는 자치대로 복음이 제시하는 윤리대로 살아가라. 개인적인 살아감 뿐만 아니고 공동체적인 삶을 꾸려가라. 공동체 삶을 꾸려 가는게 정치지, 교회내의 공동체적 삶을 복음에 합당하게 꾸려가라.

문자 그대로 하면 복음에 합당하게 정치하라. 그러니까 빌립보인들은 thrace 야만인들에 둘러싸여서 로마법에 따라 “ius italicum” 로마법에 따라 자기들의 공동체적 시민의 삶을 꾸려가지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상에 박혀 있지만 세상의 정신대로. 세상의 가치관 대로 공동체적 삶을 꾸려가서는 안되고, 어떻게? 하나님의 법대로 해야 된다 말이예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니까 그게 복음이라 말이지 복음의 대로 복음의 법은 한마디로 말하면 뭐야? 사랑이란 말이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그러니까 이 복음이 교회 憲法이라. 이 세상에 박혀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인 교회 헌법, 이 복음이라구. “복음에 합당하게 공동체적 삶을 꾸려 나가라. 정치하라.” 그러면 서로 시기하고 서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서로 자랑하고 이런거 없고 겸손하고 남의 利益을 추구하고 서로 섬기고 이렇게 되겠죠.

이게 복음에 합당한 삶이지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라? 27절 후반부 한 정신으로 한 마음으로 굳게 서서 어떻게 하라?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어떻게 하라 한 team으로 --운동선수가 한팀으로 투쟁하듯이 한 팀으로-- 투쟁하라. 거기에 그 다음에 나오는 ethletics(영어)가 거기서 나온 말이지. 운동 경기. 이거는 곧 운동경기의 Metaphor로 나온다구. 이게 앞에 붙어서 뭐라 그러느냐면, 같이 한팀으로 --축구팀이 한팀으로 싸우잖아. 한팀으로-- 그 다음에 한 정신으로 한 마음으로 굳건히 서서 한팀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싸워라. 복음의 신앙으로 싸워라. 뭐 하면서? 그 다음에 28절 전반부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말고 말이지.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운동선수적인, 군사적인 장면을 연상케 해요. 운동선수가 한 팀으로 상대방 팀에게 scrum을 짜고 그 대열을 정비해서 같이 나가는 한마음, 일심동체로 나가는 그런 장면도 우리에게 연상시키고, 다른 한 장면은 여러분들이 옛날 로마 군대 전투하는 모습 영화로 본 일이 있지. 어떻게 전진해? 방패를 들고 줄을 서가지고 그냥 앞으로 나가는 거지. 이 전법이 마침 누구의 전법이냐면 마게도냐의 필립왕의 전법이야.

이 빌립보라는 도시를 세운 Alexander의 아버지 빌립의 유명한 전법이 이른바 밀집 장창 대전법이었다구. 군사를 그냥 밀집시켜 가지고 한손에 방패들고 한손에 창, 긴창들고 앞으로 막 나가는거야. 그렇게 해서 마게도냐 지역을 거의 다 통일했다구. 빌립이. 여기 빌립보도 아마 이 빌립의 필립대왕의 밀집 장창대로 아마 thrace에게서 빼앗았을 거야. 지금 이런 말들이 빌립보인들에게는 그냥 쉽게 알아듣는 거야. 자기들이 다 군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그들도 로마시민의 정신을 이용해서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교회를 하나님의 식민지로.

그러면 이 빌립보인들이 그 세계에 대한 태도와 비유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세상에 속하지 않느냐? 세상에서 자꾸 핍박이 오는데 내분이, 자꾸 자기들끼리 서롤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시기하고 뭐 이런게 있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그걸 자세히 2:1-부터 자세히 다룬다구. 그전에 우선 원칙적으로 한 마음으로, 한 정신으로 마치 운동선수가 scrum을 짜고 상대방에게 일심동체로 돌격하듯이, 마치 로마 군대가 또는 그전에 빌립보 도시 원래 세운 빌립대왕이 군대 대오를 이렇게 해서 적대자들에게... 여기서 굳건히 서서라고 그러지? “굳건히 서서아주 군사적인 언어라구. 절대 뒤로 물러나지 말고 굳건히 서서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여기 첫줄 사람들이 무너지면 막 무너진다구. 그 중에(첫줄) 한 놈이 뒤로 돌아서면 안된다 말이야. 자기 자리에서 나가라.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바로 이런 정신이, 우리가 이 세상에 있지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시민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의해서 사는게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윤리를 보여주는게 교회가 존재함으로써 세상에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함이지. 그런데 우리 한국에 교회가 너무 세상적으로 되어 가지고 교회법이 아니고 세상법이. 그래서 총회장 선거하는데도 꼭 세상같이 이번에 통합파 총회장 선거는 총회장 한 10억들었다 그래. 10, 그래서 그 장로가 무슨 출판사 경영하는 장로가 총회장이 됐는데, 총회 당일날 신문에서 봤어. 진짜인지 모르겠어 신문에 났더라구. 당일날 자기 출판사 출판하는 책 가지고 갈피에다가 10만원짜리 수표하나씩 다 들어가지고 장로가 총회장이 됐어요. 그거 족히 10억을 들였어. 10억은...

이 개혁이 이번에 총회장 선거 때문에 총회 첫날 개회도 못했다고 신문에 났어. 이놈의 총회장 선거가 없어져 버려야 교회가 서지. 자 오늘 그만. 이 다음시간 골로새서 할거예요. 골로새서.

 

 

 

바울서신 // 11

 

 

 

골로새서

 

 

 

 

1. 기록 배경

오늘은 골로새서를 공부하려고 해요. 여러분들, 지도에서 골로새 한번 찾아보세요. 성경 지도에서, 우선 골로새가 어디쯤에 위치하나? 에베소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면 골로새가 나와요. 이곳은 Brigia 지역으로서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그러니까 내륙쪽으로 몇십마일 들어간 곳인데, 무역로 상에 있는 조그마한 都市로서 특히 양털과 양털식물을, 무역이 성행되었던 곳으로 고대 세력들에 나오고 Perisia의 정복전쟁때에 군대가 거쳐 갔던 곳으로서도 가끔 나왔어요.

그러나 이 도시는 별로 중요한 도시가 아니어서 이 골로새서에 대해서 중요한 주석을 쓴 J.B. Lightfood는 말하기를 아마 이 골로새가 바울의 편지 쓴 도시들 중에 제일 의미가 작은 도시였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할 정도예요.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당시 골로새 인구는 거기에 Brigia 원주민들과 헬라시민들, 이주민들로 대개 구성이 됐을 것이나, 상당한 수의 유대인들도 살았던 것으로 추측이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Josephus가 말하기를 Antiocius 3세가 메소포타미아와 바벨론에서 2,000명의 유대인들을 골로새 지방으로 이주 시켰노라 하고, 62에서 61, BC , 무렵에 당시 이곳의 로마총독 Flaccus가 그러니까 그곳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세로 20pound의 금을 수송하려고 하는 것을 금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때의 금값을 매겨 가지고 그것을 유대 성인 남자 수로 나누면 골로새를 중심으로 한 라오디게아 지역에 적어도 만천(11,000)명 정도의 유대 성인 남자가 있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어요.

근데 이곳은 Brigia의 혼합 종교의 특색을 아주 강하게 나타내었던 지역으로서, 특히 Cybele를 섬기는 Asia의 어머니가 신으로 섬김을 받았던, 을 섬기는 의식이 강했고 또 이 을 섬기는 의식(rituals)이 엑스타지와 동시에 금욕주의가 겸해지는 그런 의식, ritual이 강하게 요구되는 그런 것이었어요. 몸에 자해행위도 해가면서 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 골로새서 2:23, 2:11에 몸에 자해행위를 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나 그렇게 추측이 되요. 뿐만 아니라 이곳에 특히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것 같고, 또 혼합주의적인 유대교의 영향도 상당히 강했던 거 같애요. 게다가 골로새서 2:8, 20에 나오는, 문자 그대로 하면 세상 요인들, 요소들 elements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내요. 2:8, 20, “τα στοικεια του κοσμου우리말로 뭐라고 번역했어? 초등학문이라고 번역했지 아마. 뭐라고 번역했어요? 왜냐하면 요 말이 갈라디아서에서도 나온다고. 그런데 요 말이 진짜 무엇을 뜻하느냐. 주석이 아주 어려워요. 그래서 영어에서는 보통 이걸 elemental spirit,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의 영적인 힘, 마력을 가진 힘으로 보고, 이것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냐?

가령, 고대 헬라 사상에 의하면 세상은 4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었다는 거지. 불과 흙과 공기, 가령 이 불, , , 공기 이런 것은 Mithra를 섬기는 신비 종교에서는 들로 숭상하고 그들을 기분좋게 해야 운명이, 신세가 편하다고 했는데, 그런 그 세상을 구성하는 요인들을 영적인 신적인 힘을 가진 마력을 가진 것들로 섬김을 그런 것을 섬기는게 골로새의 일반적인 종교적 경향이었지 않나. 그것에 골로새 교인들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울이 그것을 경고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근데 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말이 무엇까지 포함하느냐 하면, 율법이라든지 모세 율법도 이런 인간을 얽어매는 세상의 기초적인 힘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초등학문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그게 항상 옳은 번역인지 주석가들에게 늘 토론의 대상이 돼요. 하여간 이렇게 여러가지 신비종교들 --Cybele를 섬기는 신비 종교들, Mithra를 섬기는 신비종교들, 그리고 여러가지 세상의 구성 요소들을 신을 섬기는 종교들-- 이런 것들이 있었고, 거기에 동시에 혼합종교적인 유대교도 한 몫해서 복잡한 종교적인 현상을 나타냈던 도시였다.

어쩌면 이곳에 유대교 뿐만 아니고 이방의 종교 요소들도 거기에 첨가되고 유대교의 지혜사상도 첨가되어서 상당히 혼합종교적인 복잡한 theosophy(을 아는 지혜)를 얻고자 하는 그런 종교경향으로 나타나고, 을 아는 지식을 터득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훈련(discipline), 그 여러가지 금욕주의적 형태, 그리고 여러가지 의식(ritual)들이 요구되었던 그런 그 분위기가 골로새라는 도시의 분위기였지 않는가 추측이 돼요.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그가 에베소에서 2-3년 우거할 그 무렵에 세운것 같아요. 사도행전 19:10절 누가 한번 읽어봐요.

이같이 두해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바울이 에베소에서 2-3년동안 목회하는 동안 --어떤 학자에 의하면 바울의 전성기였다 그러는데, 그 기간동안--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아시아 수도 에베소에서의 목회가 굉장히 성공적이어서 그 일대가 즉 아시아 일대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다고 지금 사도행전 19:10에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바울 스스로 골로새에 간 것 같지는 않고, 왜냐하면 골 1:42:1에 바울이 골로새에 한번도 안 간것으로 암시돼 있어요. 아마 자기 동역자 또는 부교역자 정도를 에베소에서 인근지역 --골로새 같은 지역-- 에 파견을 해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선포하게 하고 그 교회를 세우게 했지 않았나 그렇게 짐작이 돼요.

어쩌면 이 에바브라가 골로새의 출신인 것 같은데, 4:12을 보면은 이 사람이 어쩌면 바울을 위해서 골로새에 파견되어 가지고 복음을 선포해서 골로새에 교회가 서지 않았는가 그렇게 추측이 돼요. 그래서 골로새서엔 4:12-13등에 이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인들과 특별한 관계에 서있는 것을 암시하고, 1:7에는 에바브라를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라고 칭찬하는 것을 볼 때에, 아마 이 사람이 바울의 동역자로서 골로새 교회를 직접 설립한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돼요.

골로새 교인 중에 또하나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은 빌레몬과 그의 가족이지. 1:2 빌레몬과 그의 권속들, 아키포 역시 아마 빌레몬의 권속이었던거 같고, 또 바울에게 감옥에서 전도받은 옛, 빌레몬의 옛 종이었던 오네시모도 골로새 출신 빌레몬의 권속이었던 것으로 골로새서 4:9에도 나타나고 빌레몬서 11절에도 나타나요.

그래서 이 골로새서와 더불어 우리는 빌레몬서도 같이 생각을 해야 돼. 빌레몬이 골로새의 아마 가장 대표적인 그리스도인 가문이었던거 같아요. 골로새서의 서문에 있어서 중요한 두 issue, 골로새의 교회에 위협을 주는 이단적 가르침의 성격이 무엇이었는가?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적 가르침을 공격하고 사도적 선포를 변호하는데 도대체 그 이단적 성격이 무엇이며 그것을 퍼뜨린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를 규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편지가 어디에서 쓰여졌느냐? 바울이 어느 감옥에서 편지를 썼을 것이며 도대체 이 편지들을 바울이 썼느냐? 아니면 바울 이후의 편지인데 바울의 이름으로 보내진 거냐? 이런 생각, issue가 골로새서의 서문을 연구할 때 중요한 문제예요.

아주 비판적인 학자들은 바울의 이름을 건 열세편지들 중에 7개만 진짜 바울의 편지로 보지. 로마서, 1, 2, 고린도서와 갈라디아서 등을 보면은 그 어느곳에도 이 이단 사설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하고 있지는 않으나, 바울의 언명에서 우리는 이 이단 사설이 이러 이러한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바울이 거기에 대항해서 이런 말을 하는구나 하고 이렇게 추론함으로써 이단 사설의 주장과 성격을 대강 파악할 수가 있어요. 가령 그래서 대표적인 것을 들면 1:19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충만함이 신성의 충만함이 ? 신성의 충만함이 거한다라고 한 것, 그 다음에 2:18에 사람들이 자신들을 금욕주의적으로 자해하면서 천사들을 섬긴다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도 이 한 요소, 2:21에 누가 한번 읽어봐요.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여기 붙잡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이것은 골로새의 이단자들의 구호를 지금 인용하는 것 같은데, 이것도 지금 한 요소고.

그 다음에 23절 한번 읽어봐요.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이것은 이단 사설이 요구하는 금욕주의적인 의식이요. 자해 행위인데 바울은 이런 것은 진정한 겸손의 덕을 고양시키는데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봐서, 이단 사설이 강력한 자해 행위를 동반한 금욕주의적 의식을 고취한 것을 우리가 살펴볼 수가 있어요. 거기다가 덧 붙여 아까 이야기한 2:8, 20에 세상의 원초적 힘들 τα στοικεια, 세상의 원초적 들을 으로 섬기고, 그 신들을 기분이 좋게 해야 운명이 편하다고 하는 그런 사상을 가진 것을 봤을 때에 이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갖지 않았나... 하나님의 神性? 가 하나님의 신성의 ? 충만함이 제일 높은 하늘에서 부터 이 물질의 세계인 땅에까지 점점 流出된다 말이야. 流出emanation 流出. 그래서 이 神性의 충만함이 저 위에서 하늘의 기강 높은 에서 부터 점점 流出된다 말이야 땅의 물질의 세계에 오면 더 이상 없다 말이야.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神性의 충만함의 流出論에 근거해서 땅에 사는 우리와 人間들과 저 하늘의 사이에 神性을 띠는 ? 流出 받는 여러 이 存在들이 있다고 보았지 않나? 그래서 이 여러 存在들을 aeon이라하고 이 存在들이 神性을 조금이라도 띠는한 우리가 그들을 섬겨야 되고 그들을 기분좋게 해야 이 땅위에서 저기 하늘로 올라감.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렇게 보지 않았나. 그래서 하늘에서 보이는 별들이라 든지 이런 곳에 전부 神性을 띠는 존재들(aeon)이 있다고 보고, 그런 aeon들이 人間의 숙명과 人間의 삶을 지배한다고 보지 않았나. 그래서 그런 들을 잘 섬겨야 하늘로 올라가서 구원을 얻는다고 보지 않았나. 이렇게 짐작이 가요. 이런 宗敎的인 전통을 가진 골로새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를 그런 aeon들 중에 하나로 아마 그중에서 좀 높은 aeon 정도로 생각을 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옛날의 종교체계 aeon들의 하에라티에 편입시켜 가지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예배 --기독교 예배의식도 옛 자기들의 宗敎意識과 혼합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유일성 구원관으로서 유일성, 그리고 세상의 통치자로서의 유일성을 위협하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그곳에 토착적인 혼합종교들에 복잡한 한편은 광란주의적, 한편은 금욕주의적 예배의식과 섞여가지고 진정한 사도적 전통이 위협을 받지 않았나 그렇게 짐작이 가요.

이들은 금욕주의의 일환으로서 음식을 가리고 또 종교단체로에 입교의식이 복잡한 절차가 있었고 어쩌면 獨身主意를 주장하면서 男女의 성관계를 부인하고 심지어 인간의 육신을 쳐 없애야 된다는 사상에의 자해 행위도 많이 하지 않았나, 그래서 이들에게는 여러가지 Tabbu들이 많이 있지 않았겠나 이렇게 생각이 돼요. 이런걸 통해서 이들은 aeon들을 잘 섬겨가지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유대교, 헬라 유대교의 지혜사상과 천사사상이 더 합쳐져 가지고 골로새서를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지혜 기독론으로써 펴는데 바울이 바로 골로새의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그렇게 짐작이 가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골로새의 지금 아주 대강 설명한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사상을 조금 더 정확히 영지주의 주의적 구원자 神話와 영지주의적 종교적 경향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협했다고 상당히 정확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특히 Bultman학파에서. 그래서 이 골로새 교회에서는 구원자에 대한 영지주의적 神話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재 해석해서 그것이 가장 큰 위협이 되어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finality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반면에 지금 Cambrige에서 가르치는 M.Hooker교수 같은 사람은 골로새의 교회에 이단 사설이 침투를 해 가지고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영지주의 神話의 체계에 그냥 내포시키던가 아니면 지금 설명한 이런 aeon들 중에 하나로 aeon들의 하에라티의 하나로 내포시키는 이런 일을 벌써 저질러서 바울이 그것을 이 편지를 통해서 교정하는게 아니고 그러한 골로새의 이방인들의 분위기가 골로새 교회에 언제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바울이 그것을 미리 예방하는 쪽으로 골로새서를 썼다.

그러니까 골로새에 진짜 이단 사설이 침투한건 아니고 침투할 가능성이 있어서 예방을 위해서 편지를 썼다. 그런식으로 설명을 하는 데에 아마 M.Hooker의 반응은 한동안 골로새 교회의 영지주의적 과 영지주의적 종교현상이 확실히 있었다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렇게 말을 했겠지만, 이 골로새 교회가 신약시대 이후에 일어난다고 보통 보는 영지주의의 침투는 안 받았지만 골로새지역에 또 Brigin지역에 복잡한 혼합종교들의 영향을 받고 또 혼합종교들의 영향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고 있는 것을 본문에서 우리가 확실히 파악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러한 이미 침투한 이단 사설에 대항해서 바울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고 그의 절대성을 아주 강조한다구. 이 강조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역할을 굉장히 강조해요. 그래서 골로새와 에베소에 특히 골로새에 기독론, 골로새서의 기독론은 宇宙論적 그리스도론 강력하게 펼쳐지는 것이야. 근데 그게 제일 집중해서 나타나는 곳이 골로새서 115-20까지의 그리스도에 대한 讚頌詩예요. 그래서 거기를 한번 자세히 읽어보겠어요. 누가 읽어봐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끝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여기서 두드러진 思想은 뭐야? 그리스도의 先在思想, 그리스도가 萬物보다 먼저 계심의 先在思想,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創造中保者이심, 萬物들이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모든 것들이 보이는 것들이나 안보이는 것들이나, 우리말로 권좌들이나 뭐라고 번역되어 있어? ? 보좌들이나 왕좌란 말이지 왕좌(권좌, 보좌)들이나 ? 주권자들이나 모든 통치나 권세나 모든 것들이 그러니까 이 지금 골로새 사람들이 여러가지 ?를 조금씩 流出받은 별들이라든지 하늘과 땅 사이에 存在하는 많은 세상의 요인(요소)들을 다 神的 힘을 가진 것들로 섬기는데 그들이 아마 이렇게 ? 이런 여러가지 등으로 불렀겠지. 그런 것들이 어떤 것이든 다 그리스도가 창조한 것으로 지금 여기 나타내고 있어요. 그리스도가 선재한 ? 처음 난자로서 모든 存在들 무엇까지 포함해서 골로새 사람들이 섬기는 하늘과 땅사이에 存在한다는 여러 神性을 가진 여러 統治權을 가진 그런 存在들 까지도 다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다음에 또 그리스도가 어떤 분? 再創造中保者 곧 구속의 종보자, 救援의 중보자이심. 그가 敎會의 머리로서 죽은자들 가운데서 첫 열매로서, 재창조 復活을 통한 終末의 재 창조의 우두머리요, 시작이요. 우두머리요 또 그것의 중보자 再創造中保者임을 강력히 나타내요.

그리고 또 무슨 思想? 그 다음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和解시키는자, universal Reconciter 하나님과 人間들 사이를 갈라놓는 aeon들과 혹 그 하나님께 적대하는 이 모든 사탄의 세력들까지도 전부를 하나님께 和解시키고 그의 피를 통해서 그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平和을 입은자. 和解中保者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의 화해의 중보자 임을 거기서 나타내요. 그래서 이 십자가의 죽음을 이렇게 人間들의 를 속죄하고 人間들은 하나님께 和解시키는 이런 人間論的인 범위를 넘어서 世上 전체 온 우주의 和解의 의미로 확대해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또 하난 여기서 두드러진 생각은 처음의 1:15에 있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해서 그리스도의 이 하나님의 完全啓示者思想이 두드러지죠.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의 啓示者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 으로서 그가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는 이유는 19절에 그 안에 하나님의 이 ? 神性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안에 거하기 때문에, 무슨 aeon들 이런 것들에 하나님의 ? 流出되어서 조금씩 거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 전체가 그리스도안에 거함. 그리스도안에만 있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가 계시할 수 있고 그가 하나님의 중보자, 실행자로서 創造再創造의 실행자이고 그가 소외된 우주 전체를 하나님께 和解시키는 임을 강력히 천명하고 있어요. 이 골로새서 1:15-20의 시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cosmic role 우주론적 역활, 창조자로서 그리고 화해자로서 곧 구속자로서, 구원자로서 이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역활을 아주 이 Grard, Skeley으로 그리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서 볼 수 없는 로마서나, 고린도 전후서나 암시되어 있었지만은 가령 고전 8:6에도 하나님 그로부터 모든 것이 지음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信仰고백이예요. 고전 8:6한번 읽어봐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거기서 보면 이게 두 member로 된 신앙고백이지. 우리는 한 하나님. 고린도의 헬라 이방인들은 많은 들을 믿고 많은 들을 믿지만 우리는 한 을 믿는데 唯一神 사상, 은 어떤 이냐? 創造主이시고 우리가 그로 부터 창조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삶의 目的이 모든 피조물의 存在 目的이 궁극적으로 그에게 있음. 그 다음에 한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분은 어떤 분이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어요. 그리스도가 만물에 創造中保者. 이렇게 고전 8:6이라든지 이런 곳에 또는 로마 8장이라든지 여러곳에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역할이 암시되어 있어요. 이미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골로새서에 있는 1:15-20讚頌詩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같이 골 1:15-20까지는 신앙고백을 찬송가로 만든 시로 보통으로 본다. 2:6-11과 마찬가지로 여기서와 같이 아주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역활을 확대 해석 한 곳은 아직 없다 이말이예요. 그래서 이 골로새서의 基督論의 독특성이예요. 그 앞에는 그리스도의 우주론적이. 그러므로 우주론적으로 해석이 돼서 하나님의 모든 하나님의 소유된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다시 和解되고 統合됨을 천명하고 있어요.

바울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첫 창조의 중보자요, 재 창조의 중보자요, 그리고 만물의 화해자로 강력하게 편지 서두에 내 세우는 것은 아마 골로새 이단들의 aeon思想에 의거해서 그리스도를 많은 aeon중에 하나 정도로 볼려고 하는 것에 대처하는 行爲가 아닌가 그렇게 볼 수가 있어요. 바로 그리스도가 이런 그 골로새 사람들이 생각했던 aeon들과 그의 모든 神性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 까지도 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創造되었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께 和解될 것임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그러므로, 그런 aeon들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그들을 뭘 섬길 필요는 더더구나 없고 그리스도안에 하나님의 神性의 충만함을 갖는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음을 천명해요. 2:9-10(8-9)한번 읽어봐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리스도가 神性의 충만함이 거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우리도 그 안에서 神性의 충만함을 누리게 된 자들이므로 뭐 aeon이나 이런 것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있어요.

또 이단들은 그리스도를 여러 aeon들 중에 하나로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정통 헬라 이원론에 의거해서, 그리스도의 神性만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그 成育身을 부인하고 人間性을 또 부인했던 것 같애.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이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人間性도 굉장히 강조를 해요. 1:22- 그리스도가 성육신함. 2:9-11. 그리스도가 그의 피를 흘림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서 만물을 和解시킴을 강조한다구. 1:27.

그 다음에 또 바울은 이 골로새인들에게 사도적 전승에 굳건히 서기를 당부해요. 아까 방금 읽은 2:28人間의 유전과 人間의 가르침에 반대하고 이 사도적 福音을 견지하도록 부탁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들이 그 지역의 혼합종교들의 theosophy 체계를 받아들여 가지고 그것에 의해서 사도의 福音을 혼합시키는 그러한 일을 하지 말도록 사도적 복음과 인간의 유전을 분명히 구분해서 人間의 유전에 더 이상 휩쓸리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또 바울은 골로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신과 그것에서 오는 자유를 강조해. 아까 이 골로새의 혼합종교에서 aeon 세상의 원초적 힘들을 섬기는 것이 여러가지 자해 행위를 동반한 금욕주의 타부, 이런 것들을 지키는 ritkuals들로 의식들로 나타났다고 그러는데 그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음.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이 모든 하나님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이기고 만유의 주로 군림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神性? 가 거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런 세상의 원초적인 힘들의 지배를 받지 않으므로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무슨 음식을 가리고 무슨 자해행위를 하고, 무슨 타부를 하고 그럴 필요가 없음을 강조해요. 그리스도의 자유를 강조한다구.

그래서 한마디로 골로새서는 사도적 복음이 헬라의 혼합종교와 부딪쳐서 헬라의 synchritheism 혼합종교의 체계속으로 체계속에 여러 요소들 중에 한 요소로 녹아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거예요. 어떻게 방지해요? 그리스도의 독특성,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근데 이게 2세기 이후 수백년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이 부딪쳐야 하는 문제였지요. 헬라의 宗敎精神은 혼합종교 정신이었다구. 헬레니즘이 혼합주의죠. 그래서 어떤 것도 그 체계안에 녹여 가지고 그 혼합종교의 한 요소로 삼으려고 했는데, 바로 기독교도 그리스도의 복음도 그러한 지금 위험을 골로새에서 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때에 바울이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스도의 finality의 절대성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그 혼합 종교로 기독교의 복음이 녹아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있어요.

오늘날 다시 소위 종교적 다원주의의 시대에 사는 오늘날,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부딪치는 문제를 우리가 부딪쳐요. 특히 선교지에서 많이 부딪친다구. 특히 여러분들 인도 사람들 하고 이야기해 보면 이 문제를 금방 알 수가 있어요. 힌두교의 복잡한 혼합종교 체계 속에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녹일려고 하는 경향을 많이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힌두교에, 가령 1976년에 그곳에 있는 W.C.C Ecumenical 측에서 이른바 제3세계에서 신학이란 주제로 신학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어떻게 해서 내가 참석하게 되었는데, 인도에서 이제 제일 역사 있고 강력한 신학교가 U.T.C --United Theolgy College-- 라고 방갈로에 있는 W.C.C계통 학교인데, 거기의 교수란 친구가 인도에서의 기독론이라 해서 뭐라고 논의를 펼치느냐 하면, “인도에서는 그리스도를 브라만이라고 선포해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인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의미가 있게 된다. 그래서 완전히 기독교의 복음을 힌두교의 체계로 조직적으로 번역을 해야 된다. 그게 이른바 토착화고 상황화라.” 이렇게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건 골로새의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aeon의 체계의 하나쯤으로 ontegration하는 거와 똑 같은 현상이라구.

그런게 아주 강하게 나타나요. 근데 인도에서는 그게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라구. 우리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종교와의 대화라든지, 무슨 토착화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전통적인 한국의 신앙체계라든지, 또는 종교 체계에 하나로 그중의 하나로 ontegration시키려고 하는 그런게 그런 경향이 항상 있는데, 이 골로새서가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이른바 토착화의 한계를 금을 그어 주고 이 종교적 혼합주의의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선례를 드는 의미에서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커요.

 

 

2. 기록 장소

, 그래서 여러분들 골로새서를 연구해 보길 바라고, 이제 골로새서의 또 하나의 문제는 이 편지를 바울이 썼다면 어디에서 썼느냐? 바울의 감옥에서 쓴 편지가 4개가 있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4개가 감옥에서 쓴 편지란 말이야. 그런데 이 4개중에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는 다 내용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시기적으로도 다 연결되어 있어요. 가령 골로새서 4:7-8과 에베소서 6:21-22은 두기고가 이 편지를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가지고 전달하는 자로 나타나.

그 다음에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갔는데 바로 이 오네시모가 또 골로새서에서도 나타나고 아킵보가 골 4:17, 그리고 몬 1:2에 나타나고 이런 점으로 해서 4개의 옥중서신들 중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내용적으로도 아주 근접하고 골로새서, 에베소서는 내용적으로 아주 밀접하지. 밀접하고 또 지리적으로도 에베소 지역, 그 다음에 편지들에서 언급된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가 이 편지들은 같은데서 썼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요. 반면에 빌립보서와 세 편지들 간은 별 접촉점이 없어요. 그래서 빌립보서는 세 편지들과 어쩌면 다른 곳에서 썼거나 아니면 같은 곳에서 썼다면 다른 시기에 썼거나 이렇게 짐작할 수 있어요.

전통적으로 이 4개의 옥중서신들은 전부 바울이 로마에서 썼다는 것이 전통적인 설인데, 그렇다면 바울의 마지막 감옥 60년대에 이 로마에서 썼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인데, 그렇다면 이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그 감옥살이의 초창기에 썼고 빌립보서는 그 감옥살이의 마지막 단계에서 썼을 것이다. 그렇게 짐작이 가요. ? 빌립보서를 보면 1장에 곧 내려질 최후 판결을 기다리는, 그래서 그것이 혹 사형 언도가 될지 아니면 무죄 석방이 될지 바울이 상당히 내적인 불안함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이 영혼의 평안함을 얻는 그런 그 모습을 빌립보서에서는 확실히 우리가 느낄 수가 있다구. 그러나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그런 최후판결을 기다리는 자로서의 그 모습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전통적인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들을 다 썼다면 그러면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레몬서는 이 감옥살이의 어쩌면 2-3년 계속 되었을 감옥살이의 초창기에 썼으리라. 그리고 빌립보서는 그 감옥살이의 마지막 단계에서 썼으리라. 아니면 아예 빌립보서는 지난번에 이야기 한 것처럼 전혀 다른 감옥에서 썼던 것 같아요. 이 세 편지와 더불어...

그래서 지난번에 이 빌립보서가 가이사랴, 로마로 이송되기전 가이사랴 감옥에서 썼나? 아니면 에베소 감옥에서 썼나? 아니면 어쩌면, 고린도 감옥에서 썼나? 여러 설들이 구구하게 있다고 그랬지?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異見이 있어요. 로마에서 썼다는 전통적인 見解에 설득이 안되는 사람들은 로마로 이송되기 전 가이사랴에서 썼다? 우리가 여러분 저기 Guthrie책 같은 것을 읽으면 이런 것에 대한 자세한 토론이 있으니까 그런 것을 살펴봐요. 별로 중요한 토론이 아니라구.

그러나 또 하나의 유력한 은 에베소에서 아마 잠깐 바울이 감옥살이를 했는 것 같은데, 에베소에서 이 편지를 썼지 않았을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구. 물론 에베소에서 감옥살이 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몰라요. 다만 고린도 후서 1장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엄청난 환란을 당한 것을 언급하는데 그것이 정확히 어떠한 환란이었는지 모르나 거의 확실히 되는 것을 포함하는 환란이었을 것이다. 아시아에서 자기가 생을 포기하고 그런 환란을 당했다고 그러는데 그 환란은 거의 확실히 몸에, 신변에 구속상태를 포함하는 환란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고 바울이 에베소에서 감옥살이를 했을 것이다.” 보고, 그렇다면 골로새의 에베소에 갇혀 있는 동안에 골로새에 이단 사설이 침투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위협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 편지를 썼을 가능성이 이제 많아지는 거예요.

골로새서는 그 정도로 하고, 이 다음시간에는 에베소서를 우리가 공부를 할테니까 에베소서를 또 한번 자세히 읽어봐요. 그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의 유사점들을 눈여겨서 읽어보고 와요. 유사점들과 차이점들을 좀 눈여겨 보고 빌레몬서를 좀 더 읽어오고, 빌레몬서는 짧은 편지지만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많다구. 특히 1C의 교회가 노예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나? 바울이 지금 우리의 현대 눈으로 봐서는 고대 사회의 가장 악질적인 제도였던 노예제도를 복음의 정신에서 바울이 어떻게 부딪치나? 그게 우리 오늘, 우리의 社會論理를 정립함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구. 그래서 이 빌레몬서를 한번 자세히 --짧은 편지니까-- 자세히 공부하고, 특히 빌레몬서는 바울이 나중에 보겠지만, 모든 편지가 그렇지만 빌레몬서는 아주 이 Master piece. 그 행간의 행간의 함축의미가 엄청나게 풍부한 Master piece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빌레몬의 입장에 서 봐요. 여러분들이 바울로 부터 이 편지를 받았을때 오네시모를 어떻게 했을까? 여러분들의 돈을 떼먹고 도망간 노예를 지금 돌려 보내면서 바울이 이 편지를 쥐어서 보냈다구 그랬을 때에 이 편지를 읽고 여러분들이 종 오네시모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을까? 빌레몬의 입장에서 그 편지를 한번 읽어봐. 그러면 바울이 얼마만큼 지혜있게 이 편지를 썼나. 왜 사람들이 이 편지를 Master piece라고 하나. 그 다음일이지만 오늘 우리가 기독교 사회의 뜻에 어떠한 원칙들을 깨닫게 해주는가 이 다음시간에 에베소서, 빌레몬서를 아주 면밀히 살펴 보겠어요.

 

 

바울서신 // 12

 

 

 

 

에베소서

 

 

 

 

 

오늘은 에베소서를 좀 보겠다 그랬죠. 에베소서를 읽고 좀 해왔어요? 에베소서 내용을 읽었어? 지금 여러분들은 바울서신을 정독해간 셈이지. 지금까지 에베소서에 있어서 저작성 문제, 저자문제, 즉 바울이 진짜로 이 편지를 썼느냐 아니면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썼느냐? 다시 말하면 이게 바울의 진짜 편지냐? 아니면 이른바 “deutero-Pauline"이라고 하는 이차적으로 바울의 편지인 거냐?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생각을 담아서 쓴거냐?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예요. 골로새서와 더불어서도 이 문제가 나오는데 골로새서에서 보다 에베소서에서 더 심각하게 이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는 첫째로 내용적으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아주 비슷하면서 에베소의 몇가지 특징들이 있는데, 특징들이 골로새서보다 더 이차적 바울의 저작성을 지적하는 것 같다고 많은 學者들이 보기 때문에 그런 問題發生을 해요.

 

 

1. 저작성에 대하여

우선 이 便紙의 특징을 보면 첫째로 이 편지가 다른 바울의 편지들에 비해서 굉장히 독자들과 밀접한 개인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면이 적어요. 아주 적어요.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서는 바울이 독자들을 잘 알고 그들의 문제들을 속속들이 알고 그들에 직접으로 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자기가 모르는 교회, 로마 교회에의 편지에서도 로마 교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이런 style이 있는데 비해서, 에베소서에서는 개인적으로 친밀하고 직접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어요. 아주 impersonal하다구. 에베소서 6:21, 22 그런 한 두절을 빼어 놓고는 전체적으로 저자가 지금 독자들을 간접적으로 아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우리에게 보여줘요. 골로새서와 비교해 봐도 이런 간접성, 그리고 개인적인 친밀성의 결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구.

둘째로, 이것과 연결시켜서 보통 지적되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이게 하나의 편지라기 보다는 --한 교회에 보내서 그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고 특별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떠한 편지라기 보다는-- 편지 형태를 갖춘 하나의 논문아니냐? 소 논문이라고 봐야 되지 않느냐? 기독론과 교회론에 관한 소 논문의 성격이 많다. 序文과 같애. 편지의 형태를 갖추기는 갖추었으나, 이게 실제로 어떤 교회에 보내진 편지라기 보다는 논문이 아니냐.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의 편지들 중에서는 그런 의미에서도 굉장히 독특하다 이말이예요.

셋째로, 어휘들과 style이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굉장히 다르다는 거야. 에베소서에서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에베소서에서만 나오는 38개의 말들이 있다구. 이런걸“hapaxlegomena”라고 그러지. 헬라말 `απαξλεγομενα 에서 왔는데, 한번 말해진 소리, 신약성경에 한번 나온 말을 보통 `απαξλεγομενα 단수로, 그리고 그런 말들을 복수로 `απαξλεγομεναι 라고 그래. 가끔 나오는 말이야. 이건 그러니까 `απαξλεγομενα 가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 전체에서 에베소서에만 한번 나오는 말들이 38번이고 바울의 편지들 중에 에베소서에만 한번 나오는 말이 44번이야. 다시 말하면 바울이 다른 편지들에선 전혀 쓰지 않는 말들이 44개나 이 편지에 있고 그래서 어휘들이 많이 다르다는 것, 둘째로 style이 많이 달라요. , 아주 긴, 복잡하게 묵상하는 문장들, 관계사가 많고 추상명사들이 굉장히 많고 동격의 구절들이 이어져 나오는 또는 속격으로 동의어들이 자꾸 연결되어 있는 것들, 이런 style들은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와 style이 많이 다르다.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 있어서는 상당히 직접적인 문장으로 고수하는데 여기서는 이런 문장들이라. 그래서 그렇게 어휘와 style이 많이 다르다는 거야.

네째로, 1장의 1절에 그리스도의 예수의 아니,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 그 다음에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다 할 때에 이 1:1εν Εφεσω 가 많은 이 고대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고. 없다고. 거기에 에베소에 라는 이 편지의 수신인들의 지명이 많은 중요한 寫本, 바울서신에서 가장 오래된 중요한 사본은 papirus 46(P46) 이지. 이런 사본들에 생략이 되어 있고, 또 에베소서를 인용하는 古代 교부들에 의해서도 이말이 생략이 되어 있는 것이 확인이 돼요.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사본학적인 문제는 이 편지가 에베소 교회에 보내졌느냐, 아니냐?”의 문제라. 더구나 이 편지가 원래 에베소서에 보내졌다면 에베소 교회는 바울과 상당히 특별한 관계에 있던 교회지. 바울이 거기 오래 머물렀던 --적어도 한 2-3牧會했던-- 다른 어느 敎會에서 보다 더 오래 목회했던 교회라. 그런 교회에 이 편지를 보내면서 아까 우리 처음 관찰한 개인적인 친밀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편지를 보낼수가 있었겠느냐? 이런 문제가 제기가 되어요.

반면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자료들을 덧 붙인다면 --두개만 덧 붙인다면-- 에베소서의 내용의 중심은 敎會論에 있는데,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같이 하나님께 화해되고 서로 화해되어서 하나의 교회, 또 곧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을 아주 위대한 하나님의 恩惠의 사건으로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太初부터의 구원의 경륜에 의한 것이었고 그 경륜의 실현이었음을 밝힘으로써 한편 이 교회의 우주론적 의미와 이 교회의 영원한 의미, 둘다 다 합쳐서 이 교회의 의미, 형이상학적인 실체로서의 의미를 함축하는데, 이것은 바울 시대 이후의 교회의 상황을 반영한게 아니냐? 바울시대때 까지만 해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대립과 긴장관계가 확연했는데,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을 통해서 헬라세계의 가령 에베소 같은 곳에 이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상황속에서 이 유대 민족과 이방인 다수로 구성된 교회의 관계가 신학적으로 어느정도 정리된 상황을 반영한게 아니냐? 또 하나는 3장에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집중적인 묵상이 있는데, 바울은 이와 같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화해 되어 하나를 이루게 된 것이, 바울의 이 사도직 곧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곧 비밀을 맡은, 비밀을 관리하는 관리자로서의 바울의 사도직에 의한 것으로 바울의 사도직을 굉장히 높이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나 로마서등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이해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그러나 그 보다 더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평가 곧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서 바울의 사도직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되돌아보는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냐? 이미 완성된 이미 다 끝난 바울의 사도직의 그 의미를 이방인의 사도적 의미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키고 연합시킨,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성취한 그런 것으로 전체적으로 이미 완성된 것으로 되돌아보는 그런 perspective가 아니냐. 이런 점에서 바울의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 바울의 사도직을 그렸다고 해석하고 서술했다고 그렇게 봐야 되지 않느냐? 이런 그 제안들이야.

이런 증거들을, 또는 이런 특징들을 주어서 대부분의 비판적인 학자들은 에베소서를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쓴 2차적 바울의 서신 deutero-Pauline 편지로서 에베소 교회 한 교회에 보냈다기 보다는 소아시아 지역에 여러 교회들에 보낸 회람이지 않느냐? 그래서 바울의 편지들에 이미 표현되어 있는 바울의 기독론과 교회론, 그리고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이해들을 요약하고 그들을 더 묵상해서 더 높은 차원에서 표현해서 아시아,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 회람아니냐. 그러기 때문에 에베소서 1:1에 에베소란 말이 빠졌고, 아마 에베소 교회에 갔던 사본은 에베소에 있는 이란 말이 들어 있었겠지. 또는 다른데 보낸 사본은 또 다른 지역의 이름이 거기에 들어갔겠죠. 이렇게 많은 대부분의 비판적인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야. 그 학자들은 그러면 누가 썼겠느냐아마 로마서도 바울이 두기고에 구술시킨 것으로 드러나는데, 로마서 16장에 두기고가 바울이 비서로서 로마서를 口述받아서 쓴 자로 인사를 한다고, 로마 교회에. 그래서 바울이 보통 비서를 써서 口述을 했는데, 그럼 이 두기고 같은 사람이 바울의 이 편지를, 바울의 가르침을 담아서 바울시대 조금 후에 바울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보내지 않겠느냐? 또는 누가가 했을거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에베소서와 누가복음, 사도행전과의 어휘상에서 약간 비슷한 점이 있다구. 그래서 누가가 이 편지를 바울 사도의 이름으로 썼지 않았겠느냐? 뭐 여러가지 이렇게 추측을 해요.

반면에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英國의 상당한 學者, 가령 F.F. Bruce는 말할 것도 없지만, C.H. Dodd나 또는 옥스퍼드에서 가르쳤던 G.B.Caird같은 사람들도 이 편지의 바울 著作성을 강력히 주장을 해요. 물론 이 주장에는 古代 교회 傳統의 뒷받침이 있지. 왜냐하면 고대 교회는 상당히 聯合된 목소리로 이 편지의 바울 저작성을 證言해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그의 生涯의 끝점에 이 편지를 썼다. 그의 생애의 끝에서 자기의 지금까지의 使徒직을 되돌아보는, 회상하는 perspective. 그 자기의 이방인 사도직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되돌아 보는 회고하는 perspective로 자기 이방인의 사도직으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거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거라. 곧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의 그 역사에 참여하게 된 거라. 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되고 같이 하나님께 화해되어서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는 놀라운 고대사회에사 想像할 수 없는 異蹟이 일어난 거라. 그래서 하나님과 人間들 사이의 敵對의 장벽이 무너지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적대의 장벽이 무너졌는데 이것이 자기의 이방인 사도직을 통해서 이루어졌단 말이야.

그것을 바울이 가령 한 AD 62-3년쯤 후의 생애의 마지막 쯤에 지금까지의 자기의 사도직의 결과를 회고하는 perspective, 그래서 자기의 사도직이 일어난 현실이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화해되고 또 서로에게 화해 되어서 하나의 unity를 형성하게 된 것은 창세전부터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고, 자기가 그 구원의 계획의 담당자로서 관리자로서 ? 로서 이것을 이루었음을 회고하는 그런 편지다. 그래서 이게 바울이 영적 유지라, 유언(testament)이라. 그러기 때문에 이 편지의 여러 바울적인 사상들이 바울의 특히 기독론과 교회론이 이미 그 앞서 편지들에서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신들이나 로마서에서 이미 표현된 것들이 완숙하게 깊은 黙想을 통해서 발달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C.H. Dodd 같은 사람은 에베소서를 바울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구.

이어받아서 F.F. Bruce도 이 편지가 에베소서가 이 바울 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것으로 그렇게 표현을 해요.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에 우린 앞서 다른 바울 편지들과 비교해서 이 편지가 다르다는 여러 특색들이 일부 설명이 된다구. 바울이 지금 어떤 구체적인 교회에 이 편지를 써서 스스로 문제들을 해결하고 이렇게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독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친밀성을 나타내지 않아요. 또 이게 바울이 순전히 자기 사도직을 통해서 일어난 위대한 구원사의 현실에 대한 묵상하고 하나의 논문이므로 자연히 덜 개인적인 그리고 덜 직접적인 형태를 뛰게 되고 일부 추상적인 어휘들이 쓰이게 되고, 일부 예배적인 style이 쓰이게 된다 말이야.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복잡한 관계들이 이어지고 동격의 명사들이 자꾸 속격으로 이어지고 한 것은 이 묵상의 style --깊은 예배의 상태에 빠져드는 묵상의 style-- 또 아까 내가 강조하진 않았지만 이 편지의 믿음으로 의인됨이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의인화 된다는 의미가 한 두마디로 요약이 되있지, 펼쳐지지 않았어요. 또 종말론이 깊이, 분명히 펼쳐지지 않았다구. 그런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고. 지금 바울의 그 주제가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의 사도직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사를 되돌아 보는 perspective로 묵상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는 구원의 계획이 태초부터 영원부터 유래함을 강조하지. 그것이 앞으로 종말에 완성될 것의 종말론을 강조하지 않는다구. 도리어 그러면 뭐가 강조된 거예요? 실현된 종말론이 강조된 거라. 자기의 이방인 사도직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실현된 인류의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의 화해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실현 이란 말이야. 그래서 이제 실현된 종말론에 대한 강조가 있고 앞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든지 그때 재림때 완성될 우리 구원에 대한 강조가 결여되어 있는데, 그것도 우리는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의 끝에서서 자기 사도직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묵상, 회고의 관점에서 이 글을 썼다면 설명이 되는 거라구. 알겠어요. 무슨말인지?

어휘들이 다르다. style이 다른 것은 어느정도 설명이 된다구. 그런데 그 중에서도 꼭 일부 style은 묵상과 예배의 정황으로 설명이 된다 하지 않더라도 특히 어휘들이 다른 점을 우리가 인정을 해야 되는데 이것은 바울이 항상 서기들을 썼다구. 갈라디아서도 서기들을 썼어요. 갈라디아서 같이 급히 쓴 편지에서도 바울이 서기를 썼다구. 자기가 마지막 서명한, 자기 서명을 했지. 보통 바울은 그래서 서기에 따라 고대 편지쓰는 시간이 과연 어떤 것이었느냐? 한자 한자 불러주는 때도 있었을 것이여. 구술한 때도 있었을 것이지만, 대개 큰 아이디어를 주고 서기에게 그 아이디어로 문장을 구성하도록 많은 융통성과 자유를 주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 말이야. 그래서 누가 서기였느냐 에 따라 어휘의 차이들이 많이 설명이 될 수가 있어요. 가령 에베소서와 누가복음, 사도행전 어휘면에서 상당한 근접성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바울이 누가를 서기로 썼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감옥에서 노후에 깊은 묵상하는 하나의 생각을 주었을 때에 그것을 실제로 받아서 文章으로 완성하고 이어지게 한 것은 누가 일지도 모른다구. 그래서 이런 어휘의 차이들이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본다구.

그래서 최근에 에베소서에 바울 저작성을 강력히 論證Van Room, 화란의 Van Room이라고 한 600page되는 책을 썼다구. 지루해서 못 읽는다구. Van Room이란 친구가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성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그도 바로 이런 점에서 서기가 많이 다른 편지에서 보다 더 많이 활약했음을 인정함으로써 어휘와 style에서의 특이성, 다른 편지와의 차이점들을 설명하면서 근본적인 바울 저작성, 이 편지의 바울 저작성을 주장을 해요. , 지금 이런 상황속에서 우리가 결정을 해야 된다구.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 끝에, 자기의 사도직을 통해서 지난 한 30년동안의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깊은 묵상을, 가령 누가 또는 두기고 자기의 동역자 자기의 부관에게 같이 나누면서 그로 하여금 일부 구술하고 --일부 구술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구술하고-- 일부 서기에게 완성하도록 자유를 주어서 이 편지를 썼느냐? 근데 이 편지는 거의 확실한 에베소 한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기 보다는, 아시아 교회 전체에 보내는 아마 회람일 것이다. 그 교회들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더 크게는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건 나중에 보겠지만-- 주로 바울의 회고적 묵상을 담아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전체적 가르침을 주는 그런 하나의 설교라든지, 論文이라든지 이렇게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바울의 저작성을, 근본적인 저작성을 견지할 수 있고, 아니면 반대로 이 편지는 누가나 두기고나 이런 바울의 제자가 바울 사후 바울의 생각들을 더 깊이 묵상하고 바울의 사도직을 하나님의 구원사의 맥락에서 평가하고 높이는 사도직을 통해서 일어난 위대한 그 현실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연합하여 한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을 이루게 된 위대한 현실-- 을 칭송하는 선언문을 써서 옛 바울의 선교지역이었던 아시아의 교회들에 보낸 회람이다. 뭐 이렇게 볼 수도 있고, 또 거기서 인제 이렇게 두가지 가능성들이 각자들에게 논의 되는데 이중에서 여러분들이 이제 저울에 이 두 의견들을 놓고 달아보았을 때, 어느쪽으로 더 증거들의 무게가 더 쏠리느냐? 어느쪽이 더 그럴듯하냐? 이렇게 결정을 해야지. 좀 보수적인 사람들은 前者를 결정할 것이고 아까 이야기한대로 좀 자유주의적인 대다수는 後者로 결정한다 말이야.

근데 나는 전자로 결정을 해서 이 에베소서가 진짜 바울 편지인데, 그러니까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의 끝에 서서 자기의 사도직을 통해서 일어난 실현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묵상을 담은 하나의 說敎 또는 小 論文인데, 어쩌면 ?누가? --우리에게 알려진 자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자는 누가일거란 말이야-- 누가에게 많은 자유를 주어서 쒸운 그런 글이다. 나는 그렇게 봐요. 그게 가장 무난한, 모든 증거들을 가장 무난하게 하는 것이다. 난 그렇게 본다구. 그래서 그렇게 본다면 이 편지와 골로새서와의 유사성도 금방 설명을 할 수가 있는거라구.

골로새 교회는 아시아, 소아시아에 에베소에서 가까운 소아시아의 교회에 있는 구체적인 편지로서 그곳에 침투하기 시작한 이제 막 일어나는 영지주의적 경향을 체크하고 그러한 영향으로 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 편지를 썼다 말이야. 아마 그 얼마후 같은 지금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골로새서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런 이제 잉태되는 영지주의적 위험에 대해서, 위험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의미와 --그러니까 기독론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교회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하여 가지고 바울이 하나의 회람으로 소아시아 교회 전체에 이 글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서와 내용의 유사성이 많다 이말이예요. 그렇게 설명이 가능해요.

만약에 이 편지가 바울 死後,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생각을 담아서 썼다면 골로새서와 유사성이 사실은 좀 문제가 된다구요. 그렇게 본다면 왜 바울의 사후, 골로새서를 베껴가지고 골로새 근방의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보냈나? 바울의 이름으로 보냈나? 그 교회들이 틀림없이 교회들을 알게 될 텐데... 그렇게 된다면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차이점을 가지고 바울의 저작성을 --에베소서의 바울의 저작성을-- 否認할텐데, 진짜 바울이 썼을 경우는 그런게 문제가 안돼요. 그러나 바울의 제자가 바울 이름으로 썼을 경우는 문제가 된다구. ?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썼을 때는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 지는게 중요하다구. 진짜 바울이 썼을 때는 그건 당연히 자기의 편지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그런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문제는 의식하지 않아요.

그러나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편지 쓸 때는 뭐가 중요해? 뭐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 독자들이 이 편지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들음으로 바울의 사도적 권위가 실린 편지로 인식해 주는게 중요하지. 그러기 때문에 골로새서를 이런 식으로 복사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이야. ? 똑같은 지역에 보내는 편지인데 일부 내용이 겹치고 일부 내용이 다르고 그렇다면 사람들이 금방 어떻게 이런 두 가지 편지가 있나?” 이렇게 생각할 거란 말이야. 근데 진짜 바울이 썼다면 그런 문제를 의식하지 않는 거야. 자기가 직접 썼으니까.

그러나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썼을 때는 그것은 이제 문제가 될 거다. 그런 저런 이유로 에베소서를 진짜 바울이 썼다고 보는 것이 더 지금 우리가 관찰한 에베소서의 특성들을 잘 무리없이 선명하게 한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요.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해? 우리 생각에는 --지금 우리가 성경 말씀에 문장 하나 하나 전치사 하나라도, 전치사는 고사하고 그 토씨 하나라도 눈여겨 보도록 훈련받은 우리들은 또 여러분들 같이 문자적인 축자 영감설 고착된 사람들에게는-- “허이구! 바울이 어떻게 그렇게 자기 서기에게 그만큼 자유를 주어가지고 쓰게 했을까?” 도저히 상상이 안되겠지. 그러나 실제로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굉장한 자유를 누렸어요. 왜 자유를 누렸느냐? 바로 성령의 역사를 믿었기 때문에 자유를 누린 거라구. 자기를 통해서 역사하신 성령이 자기 부관, 누가, 두기고를 통해서 역사한다고 철두 철미하게 확신했기 때문에 우리같이 조마 조마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여러가지로 알아.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인용하느냐? 문자적으로 인용하잖아. 어떤때는 문자적으로 인용하지만 어떤때는 말을 바꾸어서 인용하고, 어떤때는 그냥 내용을 한 마디로 간추려서 인용하기도 하고, 많이 말을 바꾸어서 인용한다구. 또 어떻게 아느냐? 이 공관복음서를 비교해 보년 안다구. 마태가 마가를 어떻게 고쳐쓰나? 누가가 마가를 어떻게 고쳐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뭐예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철두철미한 이 확신 때문에 그런다구.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비서에게 편지 하나를 구술할 때 여러분들 비서의 능력을 의심하면 토씨 하나까지도 정확히 구술할 거라 말이야. 그러나 여러분들이 비서를 신임하고 그가 나보다 더 잘 쓴다, 내 생각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 한다면 여러분들은 대강 이러 이러한 아이디어를 주고 편지할 거라. 게다가 지금 바울은 믿는게 하나 있어 뭐? 성령의 역사를 믿는다구. 그러니까 사실은 최근에도 그런 예가 많아요.

여러분들 Karl Barth의 교회론을 한번 보라구. 제 몇권인가 서문에 자기가 그 책을 어떻게 썼나를 쭉 쓴다고. 그게 무슨 이야기를 썼는가를 알아요? 자기 여비서 그 아가씨 이름이 뭐야? 어이구 이름 잊어먹어 버렸네. Muchen의 간호원 출신인 여비서를 Barth가 채용을 했어요. 여비서는 독일의 장교의 딸이었는데 여비서는 신학의 문턱도 안가본 친구아. 처음에는 Barth의 글 정서하는 타자를 치도록 채용을 했겠지. 그런데 이 친구가 Barth와 같이 Barth의 책을 정리하고 그의 강의를 정리하면서 스스로 굉장한 신학자가 된 거야. 그래가지고 Barth가 교회론을 쓸 때에 --보통 여름 방학때 자기 친구의 별장인 알프스의 별장에서 이 여비서와 같이 Barth의 사진에도 나와요. Barth의 전기를 보면은-- 같이 마주보고 앉아서 일부 구술하고 일부 쓰게 하고 그런식으로 썼는데, 그 서문에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자기가 대강 idea를 주고 중요한 개념들을 주고 그 아가씨가 다 썼다고 시인했다고. 자기가 어디까지 쓰고 그 다음에 어디까지 그 아가씨가 이제 더 이상 분간 할 수 없다고 그러지.

여러분들 그 Barth의 책 Dogmatik을 읽어봐요. Barth가 굉장한 style로 썼다고 문장을 아주, 근데 굉장히 긴 문장, 아주 정확히 표현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되풀이하는 그런 저술면이 낫다는 생각이 발전한다구. 그래서 이 독일어 작품으로도 굉장히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구. 근데 Barth도 그래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가 자기가 썼고 어디까지 자기 비서가 썼다고 더이상 분간할 수가 없다고 그래. 그 정도로 완전한 사상적인 unity가 이루어진 거지. 이 친구가 다 알아. Barth가 몇마디 하면 뭐라고 할지 안다구. 그래서 문장을 완성하면 Barth가 보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표현을 잘 했으니까 --그런 비서하나 있었으면 좋겠죠 여러분.-- 근데 사실은 Barth와 이 여자의 관계가 상당히 학문적인 친밀성 뿐만 아니고 개인적인 친밀성의 오해가 굉장히 많아가지고 문제가 굉장히 많았어요.

하여간 근데 그 정도로 Barth가 이 아가씨를 신임을 해 가지고 그 복잡한 신학사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주된 생각만 주고 이 비서로 하여금 완성하게 하였어요. 그래서 그건 얼마나, 어느정도 가능해요. 특히 고대의 편지 쓰는 형식에 있어서는 충분히 가능하지. 흔했다고, 관례라.

Q.그것이 성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가능?

A.성경이 될 거라 생각했어도 가능.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 편지가 여러 교회에서 예배 때에 읽히고 그게 사도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께 자기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충분히 의식을 했어요. 그러니까 뭐래, 고전 같은데, 로마서 같은데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그래서 자기가 말하는게 그리스도께서 말하는 것으로 충분히 의식을 했다구. 감수했겠지 아니면 읽어 봐주겠지.

Q.융통성이 주어졌다고 한다면 영감설에 있어서 바울에게 영감이 되었다. 또한 서기에게 영감이 되었다?

A.둘다 다 성령이 꼭 바울에게만 역사하나? 그 바울의 제자들에게도 역사하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바울이 철두철미하게 믿었기 때문에 자기 人間이 중요한게 아니라 말이야. 우리같이 성령이 잘못 믿는, 믿는다고 거짓말로 하면서 사실은 못 믿기 때문에 문자가지고 그냥 어쩔줄 모르고 벌벌 떨고 그냥 알겠어요.

그래서 사실 그 사람들도 바울 편지가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뭐 이 에베소서의 권위가 그만큼 떨어진거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가 떨어진거냐? 천만에 그렇지 않다 말이야. 그리고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쓸때에 뭐 요새 같은 속임수 쓰는거 아니냐. 도저히 그렇지 않단 말이야. ? 자기가, 지금 자기 선생의 사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선생의 이름으로 쓴 거라. 고대 사람들은 이런걸 속임수로 생각하지 않았다구.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질문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곰곰하게 생각해 봐. 여러분들 진짜 영감설 믿으면 그런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안 믿으니까 그런 소릴 지금 하지.

바울이 친필로 papirus에 썼어야만 축자영감인데 말이야. 어떻게 바울이 이것을 누가가 받아 쓰고 사도직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지금 바울이 혼자 묵상을 하고 어쩌면 혼자말 같이 깊은 예배의 상태에 빠져서 거기서 가령 상상을 해 보라구. 누가가 그걸 문장으로 만들어 썼다고 해봐. 충분히 그러 수 있단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누가적인 언어가 많이 나올 수 있다 말이야. 지금 성령이 바울에게만 역사하고 누가에게는 역사 안한거야? 그럼 누가가 거기서 이제 바울 편지라 했다면 누가가 거짓말 한거야. 속임수 쓴거야? 천만의 말씀 바울 편지지. Karl Barth의 비서 이름이 Von Kirschof. 누가 그럼 Church DogmaticKirschof가 썼다고 그러나? Karl Barth가 썼다 그러지. Karl Barth의 사상이기 때문에 문장의 구체적인 formulation은 가끔 Kirschof가 했는지 모르지만 그걸 누가 Kirschof책이라고 그래? Karl Barth책이라 그러지. 너무 문자적으로 벌벌 떠는 사람들은 성경을 깊이 공부 안한 사람들이라구.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이야. 금방 바울의 구약성경을 어떻게 인용한가 보면 알잖아.

바울이 어떤 바울이야. 구약성경을 새롭게 인용한다구. ? 아 그 선지자들을 영감한 성령이 지금 자기에게 구약성경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적용하도록 역사한 것을 믿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래. 그건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게 없는 사람들은 문자에만 얽매인다는 말이야.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이 뭐라 그래? 고린도후서 3:6 누가 한번 읽어봐 거기 뭐라 그랬는가.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의문이 뭔지 알아? 문자는 죽이고 영은 어쩐다? 살린다. 그래서 너무 문자적으로 얽매이지 말란 말이야.

자 그래서 에베소서의 저자는 바울이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아마 에베소라는 교회에 보냈다기 보다는 에베소 주위의 아시아, 소아시아 전체의 교회들에 회람용으로 바울의 묵상 또는 설교를 담은 글이다. 뭐 대충 이렇게 저자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지.

아 그러면 에베소서는 교회론이 특징인데 그중에서도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창조, 이 인류의 하나님과 화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인류의 대표적인 대적 관계에 있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화해, 그리하여 하나님과 세상 전체의 화해, 이런 이 화해론과 하나됨을 강조하는 편지야. 그런데 이 하나님과 인류 그리고 인류와 인류사이에 그리고 온 피조물과의 화해와 하나됨을 강조하는 편지이기 때문에, 이 편지가 특히 20C에 오늘날 같은 시대에 특별히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해서 이 편지를 어떤 사람은 바울의 어떤 편지 보다 더 이 에베소서가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할 말이 많은 편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편지이다. ? 20C人間들의 적대 관계를 가장 심각하게 체험한 세기라.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人間들의 상호적대관계의 처절함을 가장 심각하게 체험한 때라 말이야.

그래서 20C에 와서는 일치운동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Ecumenical 운동도 그중의 하나지 敎會一致運動. 그래서 이 교회의 일치운동을 생각하거나 또는 민족과 민족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화해하고 일치하는 생활이었거나, 또는 20C의 사회 계층간의 대립을 가장 극심하게 체험한 때지, 공산 주의 운동이 그런걸. 우리에게 사회 계층간의 대립을 가장 심각하게 부각시킨 것이 지난 70년동안에 공산주의 운동이지 proletaria와 자본가의 대립을 계급간의 계급 투쟁을 공산주의 역사 이론에 의하면 역사의 진전이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계급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말이야.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래서 이 계급간의 투쟁이 근본적으로 proletaria에 승리와 독재를 통해서 해소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공산주의 이론이란 말이야.

공산주의 이론이 다 파산되어서 거짓 효과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공산주의 이론이 우리에게 우리 인루 전체사에서 어떤 기능을 했느냐? 사람들로 하여금 계급에 대한 새로운 이해, 새로운 의식, 계급간의 대립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확고히 한거라구. 무산대중, 억압받는 무산 노동 대중과 자본가 그리고 중다 소시민들. 부르조아의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제기한게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물론 그것은 18C이후에 産業革命을 통해서 양산된 노동자 계급의 착취문제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의식 구조에 중요한 문제로 자리잡게 된 것은 共産主義 운동의 역활이라구. 그래서 이 蘇聯에서 특히 中國에서 문화 혁명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문제가 발생을 하고, 우리 韓半島에서도 그런 문제가 발생을 하고, 지금까지도 우리 한반도의 사상적인 후진성을 잘 타나내는 면인데, 이미 유럽에서 1960년도 후반에서 1970년도 후반까지 토론되고 정리된 사상적인 운동이 신좌익 운동이 우리 한반도에서는 80년대에 일어나가지고 지금까지 이제 그게 거의 다시 해소되는 모양인데 한반도에서는 80년대에 일어났지.

20-30년의 사상의 후진성을 나타낸다구. 유럽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신좌익 운동이 성행해서 1970년대 후반에 한두번의 oil shock를 거치면서 정리가 되었어요. 그래서 공산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이 거의 종결이 된다구. 근데 우리 한국에는 그때는 박정희 군사 통치속에서 그런게 좀 못하다가 80년대 후반에 들어와 가지고 요원의 불길같이 모든 대학가에서 또는 이른바 진보주의 체계 속에서 마치 Marx주의가 무슨 복음의 구원이나 되는양 굉장히 확산이 되었다구. 노동 운동이 굉장히 확산이 되고... 근데 우리 자체내부에 학문적인 토론과 사회적인 부의 공정한 재 분배, 사회의 이런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 서양에서는 그런 것을 통해서 많이 해소가 되는데, 우리는 공산주의가 소련이나 동구에서 소멸되었다는 그런 세계적인 대세에 밀려가지고 그 사람들이 점점 소멸되었다는 그런 상황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부의 재 분배에 있어서 불공정함과 불의한 구조, 억압구조는 사실 별로 수정이 안되고 그대로 남아요.

근데 이런 계급 투쟁의 문제, 특히 이제 20C에 가장 심각하게 의식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 최근에 와서는 1970년대 부터는 피조세계 전체와 人間과의 관계라, 자연의 고갈과 환경오염 두 개념으로 대표되는 피조세계 전체와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단계라. 자연고갈과 환경 오염이... 그래서 人間의 생태계가 파괴되므로 인간이 못살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구. 그래서 어떻게 다시한번 성경의 가르침대로 인간과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의 연대성 속에 있으며 어떻게 人間들이 피조세계 전체에 대한 올바른 orientation을 주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구. 그래서 인간과 세상, 또는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롭게 의식하게 된 거예요. 그것도 아주 늦게온 사상이예요. 1970년대에 와.

사실은 이런 여러가지 갈등에 갈등관계에 대한 의식이 20C에 들어와서 가장 인간의 보편적인 의식의 문제로 대두되어서 바로 이 에베소서가 하나님과 人間들의 화해, 민족과 민족의 화해, 하나님과 온 세상의 화해, 이런데에서 하나됨, 화해의 하나됨, unity를 강조하는 에베소서가 오늘 우리에게 바울의 어떤 메세지보다 가장 절실한 메세지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어서 어떤 학자는 아까 이야기한대로 에베소서가 가장 제일 우리시대에 중요한 편지다. 그렇게 주장했었다구.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에베소서가 새로운 더 중요한 의미를 띄게 될 수가 있다구. 남북관계, 남북이 화해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남북이 화해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되는 것 같이 그들이 같이 하나님에게 화해되어서 새 인류가 되듯이 어떻게 한국이 화해가 되느냐? 이런 걸 여러분들 곰곰히 생각해 봐. 에베소서를 다음 시간에 좀 더 해보려고 하는데 에베소서의 중요한 주제들을 다음시간에 조금 더 정리하려고 그러는데, 그런것 미리 조금더 생각을 하고 에베소서를 좀더 읽어와.

그런데 교회가 지금 바울이 여기서 그린바와 같이 화해와 하나됨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담당하는 ? 또는 ?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자체가 하나가 되어야지. 근데 우리 한국 교회와 같이 분열된 교회가 세상에 어디있어? 그래가지고 이놈의 교회가 화해와 하나됨을 도모하는 하나님의 도구이기는 커녕 분열하고 싸우고 찢고 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구. 그래서 에베소서의 메세지가 한국 교회에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면이 있어요. 다른 어느 서신보다 그래서 한국 보수교회들이 신학적인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의미로 Ecumenical W.C.C운동을 반대하는데 W.C.C Ecumenical 운동이 신학적으로 아주 못되어 먹었지. 여러면에서 아주 못되어 먹었죠. 그들이 내거는 그 이상 교회의 하나됨을 통해서 인류의 화해 그리고 하나됨, 그리고 인류와 피조세계의 화해, 이런 이상은 그들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추진, 도모 못한다면 아! 보수교회는 그럼 보수적인 신학으로 도모하려는 의지가 좀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런데 없다구. 하나도. 보수교회 일수록 더 찢어진다구. 더 분열이 많아요. 이것을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위배되는, 에베소서의 정신과 완전히 위배되는 불순종이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그래서 Ecumenical운동하면 그냥 다 하나님께 저주받을 것으로 다 욕을 하는데 W.C.C라는 기관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하는 Ecumenical 운동의 신학은 구구절절히 틀렸어요.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이상 화해와 하나됨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추구해야 할 진리라구. 성경적 진리.

그러면 지금 W.C.C운동이 틀려먹은 신학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주장해도 올바로 추진할 수 없다면 그럼 보수신학자와 보수교회는 올바른 신학으로 성경적인 이상을 추구해야 할 것 아냐?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분들 곰곰히 생각해 보라구. 여러분들 에베소서를 통해서 O.K ?

 

 

 

바울서신 // 13

 

 

 

 

빌레몬서

 

 

 

 

1. 에베소서

에베소서의 중심적인 사상들을 보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 이방잊들의 하나의 를 이루게 된 것, 그들이 율법의 그 울타리 율법의 그 장벽을 허물고 율법을 유대인들은 울타리라고 봤어요. 곧 이스라엘의 성결을 지키는 즉, 이방인들과 선민인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이방인들의 불결한 ?로 부터 지키는 울타리로 봤다고. 근데 바울이 바로 이 사상을 이어 받아서 사실 율법이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만을 갈라 놓는 장벽 노릇을 한게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전체를 갈라 놓는 장벽, 이중 장벽 노릇을 한 것이예요. 유대인들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성벽을 보호하는 울타리로 긍정적으로 봤는데 바울도 바로 그 생각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세운 통찰력으로 보나 --율법은 사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가로막는 담벼락이었는데 뿐만 아니라 인간들과 하나님을 가로 막는 담벼락인데--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속죄의 죽음으로 곧 화해의 죽음으로 곧 화해의 죽음으로 이 장벽을 헐어버리고 율법의 장벽을 헐어버렸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인간들끼리 또 화해를 시키고, 그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해서 교회 안에서 하나의 백성을 이룬거라. 이것이 이사야서의 예언된 성취로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 인간과 인간, 곧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립되었던 그 장벽을 제거해서 하나님과 인간, 이방인과 유대인의의 화해를 이루어서 평화를 이룬 분이라.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굉장히 칭송하는 중요한 사상이예요. 2장에 있어서 이것은 갈 3:8-29,고전 12:12절 등 롬 1:16절에 이미 설명한 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고 또 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에게는 더 이상 이방인들이나 헬라인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또는 종이나 상전이나, 남자나 여자나, 인종적, 적인 구분, 신분적인 사회적인 구분이 다 의미를 잃어버렸음을 말 했는데 이것을 더 깊이 묵상하는 것이 에베소서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사도적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 그 하나님의 역사를 뒤돌아 보면서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칭송하고 감탄하고 있어요.

둘째로 중요한 사상이 3장에 바로 이러한 역사가 바울 자신의 그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계획을, 곧 비밀을 자신이 사도로서 맡아 관리함으로 일어났던 자신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자 오이코노모스(?) 비밀의 관리자임을 이야기함으로 이러한 하나님께서 인류를 자기에게 화해 시키고 인류를 또 하나로 화해시키는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자기 사도직의 의미를 또 묵상해요.

세번째로 중요한 사상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서 이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그런데 이미 고전 12장이라든지 롬 12장등에 은사들과 은사에 따른 교회 내에서 직분들과 역할들을 설명할 때, 바울은 이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메타포(비유)를 사용했어요. 그곳에서는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양한 지체들이 있다는것, 그런데 이 지체들이 다 개별적이고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다양성에 강조점이 있었어요. 그런데 골로새서, 에베소서에서는 이 교회가 하나님의 몸이라는 사상이 조금 더 발전을 해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머리 사상,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임을 강조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일치를 강조하고 머리와 몸으로서의 관계 일치와 동시에 주종의 관계를 강조하고 동시에 몸의 하나됨을 강조했어요.

네번째로 이 교회가 그런데 이 아까 이야기한 바와 같이 바울은 그 자신의 그 이방의 사도직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은혜의 역사를 뒤돌아 보는 관점에서 셀레로이션? 한다고 했는데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사 속에 --그 영원한 구원사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이 교회의 그 영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예정과 이 교회의 그 하늘에 하늘적인, 초월적인 지위와 그리고 이 교회가 지금 현재의 벌써 높임바된 뒤에 이 청상의 삶에 동행하는 것을 강조해요. 교회가 영원한 예정의지에서 부터 나와서 지금 현재 벌써 하늘의 높임 받은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 예수의 삶에 동참한 2:22, 2:50, 5:27절입니다.

다섯번째로 윤리, 기독교 윤리에 대한 강조가 있는데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을 얻은 자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을 4:17이하, 5:3이하에서 강조해요. 여기서 특히 세례가 옛 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삶으로 회심을 분명히 사건화한 것으로 호서가 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했으므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것을 강조해요. 그것이 믿음을 일으키는 사건인데 그것을 세례가 그것으로 표시했어요. 그래서 물속에 잠겼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옛 죄인으로서의 자아가 죽고 장사되고 다시 물에서 깨끗이 씻긴 몸으로 떠오르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을 입고 새 사람으로 부활할 것을 상징한단 말이예요. 그것을 내세워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더이상 옛사람대로 살아서는 안될 것을 강조해요.

마지막으로 이와같은 윤리적 강조는 아마 소아시아에 퇴폐되기 시작한 영지주의적 경향에 대한 투쟁과 연관이 되어 있을 텐데 골로새서, 에베소서에도 이 영지주의자들의 세계관과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도덕적인 타락에 대해 경고하고 있어요. 영지주의자들은 한편 영의 세계인 하늘과 물질적인 땅 사이의 많은 악령들이 존재하면서 인간들의 운명을 左之右之 한다고 봤어요. 특히 하늘에 있는 별들이 이런 악령들의 그 거처지로서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우리 영혼이 하늘의 영의 세계로 복귀해서 구원을 얻는데 방해하고 길을 막고 인간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그러한 영적인 악령들의 손에 노예로서 고난을 받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러니까 이런 그 악령들을 어떻게 하면 잘 기쁨을 주고 환심을 사서 어떻게 이 땅에서의 삶을 좀더 평안하게 하고 영혼의 구원을 얻느냐? 자기들의 비밀지식을 가졌다느니 무슨 특별한 종교의식을 통해서 그런일을 해야 되느니 이런식의 가르침을 했는데 그러한 경향이 벌써 에베소 소아시아 지역에 벌써 일어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골로새서와 마찬가지이지만 그리스도가 모든 영들 위에 승리하신 --모든 악령들을 무장해제하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써 모든 악령들 위에 승리하시고 그들을 무장 해제하고 그러니까 부정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들까지도 하나님께 화해시킨, 그래서 온 우주가 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종식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물이 되도록 삶을 굉장히 강조해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승리하신 그럼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반역하는 영들이 조금 있긴 있지만, 그런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온 우주를 통치하는 κυριοσ()이시므로 조만간 나머지 반발하는 세력까지도 전부 해체시키고, 무장 해제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그들도 하나님께 화해 시킬 것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의지에 따라 옛사람 같이 죄악을 저지르고 고난을 받는 그리고 그들의 종 노릇을 하는 것은 더 할 나위 없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들과의 거룩한 전쟁을 계속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이런 6장에서는 거룩한 전쟁, 聖戰 --구약의 聖戰-- 사상을 교회의 또는 그리스도인들에 이 잔존하는 악령들과의 전쟁에 적용을 해요. 이미 승리하시고 우주에 군림하시는 주의 은혜로 이런 아직도 반발하는 악령들과 대적해서 싸워야 할 것이지 그들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그러나 그들에게 순종할 필요는 더 더구나 없어요. 그래서 죄를 짓고 고난을 받고 그래서는 안될 것이예요. 이런 것을 강조해요. 골로새서도 마찬가지예요.

 

2. 빌레몬서

그점에 있어서 자 에베소서는 대충 그렇게 하고 빌레몬서를 봐요. 빌레몬서는 마지막으로 빌레몬서를 읽어보라구요. 짧은 편지니까. 이 편지가 아주 이제 보겠지만 아주 지혜롭게 쓰여진 편지라. 아마 바울의 편지중에 가장 지혜롭게 쓰여진 편지일거예요. 그래서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된다구요. 하여간, 바울이 암시적으로 하는 말을 읽을 줄 알아야 해요. 천천히 누가 한번 큰 소리로 읽어봐요.

신약의 모든 책중에 이 편지가 가장 개인적이고 아름다운 편지예요. 아주 엄청난 지헤와 ?를 살피는 조심성을 가지고 있는 편지라. 이 편지에서 목사로서의 바울,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모습이 아주 잘 드러난다구요. 고린도 전후서에서 특히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의 인간적인 모습, 바울의 목회자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또 이 빌레몬서에서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모습이 잘 드러나요. 그래서 우리가 배울게 많아요. 바울의 목회자로서의 --바울에게서 참 진정한 목자의-- 모습을 잘 배울 수 있고 또 오늘같이 교회의 사회적 역할, 또는 복음의 사회적 의미가 강조되는 시대에 또 빌레몬서는 우리에게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어떻게 상호 교회 안에서의 관계 되는 것에서도 많은 교훈을 줘요. 우선 이 빌레몬은 아마 골로새가 위치했던 라이크로스? 계곡의 어느 곳에 있었던 그리스도인인 것 같아요. 골로새나 아마 인근지역에 있었던 그리스도인인데 상당히 부요한 그리스도인임이 여기서 드러나요. 노예들을 거느린 상당히 부요한 그리스도인이었고 바울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예요.

그런데 이제 신앙이 훌륭하고 또 집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2절을 보는 바와 같이, 자기 집에 교회를 초청해서 자기 집에서 교회가 모인다구요. 지금 요새말로 하면 House church. 초대 교회들이 다 이랬죠. 부자 집에서 교회가 모였다구요. 빌레몬집이 그래요. 이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집안의 노예였는데 도방을 해가지고, 아마 빌레몬집의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을 한 것 같아요. 도망을 갔는데, --인제 아마 큰 도시로 간 것 같아요. 큰 도시의 익명성을 누릴려고 해요. 멀리 지금 바울이 어느 감옥에 있느냐가 문제인데, 전통적으로 로마 감옥에 있다고 보는데, 에베소 감옥에 있든지, 아니면 아이자라 감옥에, 아니면 고린도 감옥에 있었느냐는 여러설이 있는데 옥중서신들이 다 어느 감옥에서 쓰여졌느냐하면 전통적으로 로마 감옥에서 쓰여졌다고 그러는데, 다 그런거냐 아니면 지금 이야기한 그런 어느 곳이냐 하는것이냐 확실히 모른다 이거예요. 큰 도시에 있는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로마일 가능성이 있지. 도망을 갔는데-- 이 오네시모가 체포되어 가지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니면 도망 온 노예라는 것이 발각이 되었는지 같이 감옥에 살게 되었어요. 바울하고 거기서 바울의 복음 선포로 이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구요. 그래서 바울을 이제 섬기는자가 되었어요. 바울을 돕는자가 되었다구요.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의 도움을 계속해서 이용하려고 하지 않고 이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지금 돌려 보내는거라. 돌려 보내는데, 바로 이 편지를 쥐어서 보내요. 오네시모에게 너 주인한테 돌아가라. 이 편지를 가지고 가거라.” 그래서 지금 이 편지를 써서 보낸단 말이예요. 우리도 아까 이야기한대로 바울의 목회자, 목자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첫째로 이 바울은 부자인 빌레몬에게도 복음을 선포하고 노예인 오네시모에게도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이것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것이예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롬 1:16절 또는 갈 3:28절 아까 이야기한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에게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힘이라 그래서 이 복음에는 인위적인 편파주의가 있을 수 없어요. 복음은 주로 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자들을 무시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예요. 오늘날 같이 이념적인 분규가 심하고 계층적인 분규가 심한 사회에서는 도시의 중산층 교회에서는 마치 복음이 부자들만, 부자들을 위하여 있는 것 같이 아주 중산층적인 태도와 가치관만 강조하고, 반면에 해방신학 하는 사람들은 복음은 마치 가난한 자들만 위한 것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말이예요. 복음은 부자나 가난한자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서울의 무슨 어떤 부자동네 아주 엄청나게 큰 교회 목사가 --저기 미국의 그 말썽 많은 로버트 슐러의 수제자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그 위대한 스승 로버트 슐러를 초청해가지고 힐튼 호텔에서 무슨 목회자 수련회를 했대요. 거기 참가 자격, 장년 천명이상 모이는 교회 목사 이상들만 참가 자격을 해가지고 힐튼 호텔에서 돈을 쫘악 내가지고 로버트 슐러를 데려오는데 돈즐 잔뜩 줘가지고 해서 수련회를 했대요. 바로 그런 목회자는 복음은 누구만을 위해서 있는거냐 하면 부자와 귀족들만 위해서 있는거라. 그래서 그런사람, 천명이상 거느린 목사만 진짜 목사고 나머지는 목사가 아니라. 목사도 아니예요.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칼빈신학교는 크리스찬 리포움 쳐치CRC라고 화란의 개혁교회가 두개로 갈라졌어요. 하나는 모르겠어요. 화란말로 모르겠는데 하여간 화란의 개혁 교회가 크게 두개로 갈라 졌는데, 그 갈라진 사람들이 미국에 와서 이중 자유주의 쪽으로 하는 사람들은 르포움드 쳐치 인 아메리카라는 교단이고, 좀 보수적인 여기서 갈라진 사람들은 크리스챤 르포움드 쳐치라는 교단을 만들었어요. 이 두개는 완전히 다른 교단인데, 서부 미시간에 화란계 이민들의 중심지예요. 화란계 이민들이 모여사는 몇 곳이 있어요. 아이오하도 몇 곳이 있는데 여기에 한 반은 르포움드 쳐치인 아메리카하고, 반은 크리스챤 르포움드 쳐치인데 (칼빈은 크리스찬 르포움드 쳐치계통) 바로 미시간 호숫가에서 45분 차로 가는 거리에 훌란드라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 이 학교의 세미나가 있었어요. 로버트 슐러가 바로 여기 출신인 RCA라는 화란 계통이예요. 그런데 이 친구가 화란 사람들에게 크리스챤 르포움드 쳐치나 RCA 사람들에게 아주 눈에 가시라. 이 사람 때문에 아주 창피하게 느낀다구. 이 사람 엉터리 복음, 완전히 자본주의적, 상품주의적 엉터리복음을 선포한다고 아주 화란 사람들이 창피하게 생각한다구요.

그런데 이 친구가 자기가 산상 수훈을 강해 했다고 LA에 있는 크리스탈 쳐치(수정 교회)에서 산상 수훈 강해한 것을 책으로 냈다구. 그런데 뭐라고 냈느냐 하면 (칠판) 8, 라틴말로 (메아티튜스) 복이 있다. Be happy happy to(?)라는 책을 냈다고 자기가 산상 수훈 강해 8복 강해. 이 친구 사상이라는게 그거 아냐? 이른바 적극적인 사고방식, 적극적으로 나가면 물질적인 축복 받고 성공하고 건강하니 그래서 행복하게 산다는거 아니예요? 하나님께 많이 바치면 하나님께서 몇배로 갚아주고. 모든 축복이 다 물질적인 반대 급부로 이루어진다는거 아니예요? 그래서 이 팔복은 우는자가 복이 있고 굶주린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거꾸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적극적으로 사고해 가지고 돈 많이 버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거라. 완전히 산상 수훈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거라.

이 책이 출판해서 나 거기 있을때 86년인가 그리스챤 르포움드 쳐치에서 지난 1년동안에 가장 나쁜책, 'The ? book year'이 상을 줬다고요. 같은 화란 사람들이 아주 창피하게 생각한다고요. 로버터 슐러 같은 자가 자기들 중 하나라, 정작 미국 사람들은 그러는데... 여기 한국의 조선 사람들이 로버트 슐러가 예수님 다음으로 생각하고 아니면 적어도 바울 사도 다음쯤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을 데려다가 그 난리를 피웠다는데 그래서 이 복음이 부자와 귀족들만 위한 것이라.

반면에 또 해방 신학, 민중 신학하는 사람들이 복음은 누구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느냐 하면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예요. 그렇지 않고 빌레몬을 위해서도 있고 오네시모를 위해서도 있고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하나님 앞에 똑 같이 죄인들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인 것을 우리가 여기서 발견을 해요. 바울이 진정한 의미로 차별없이 모두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이 복음을 선포한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둘째로 바울의 복음 선포는 아주 효과적인 거였어요. 그래서 이 빌레몬이 아주 철저하게 회심을 하고 그래서 자기 집에서 교회를 세울 정도로 마찬가지로 오네시모에게 아주 완전한 회개를 이루고 회심을 이루어서 완전한 변화를 이루었어요. 전에는 이 아무 쓸모없고 반역하고 달아난 노예였는데 이런 사람을 복음으로 하나님께 쓸모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었다구요. 그래서 바울을 신실하게 섬기고 이제 자기 옛 주인 빌레몬에게 돌아갈 각오가 되어 있는 돌아 갔다고 하는 보통 이 도망간 노예가 그것도 아마 상당한 금전을 도둑질 해 가지고 도망간 노예가 돌아오면 죽사하게 맞고 감옥살이 하고 그럴 판인데 그런데 어떻게 적당히 바울을 사바사바 해가지고 아 내가 당신 감옥에서 고생하니까 당신좀 섬기게 도와 달라고 이런 부탁 하지 않고, 자기 주인에게 돌아가는 자기가 도망간 것의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돌아가는 그런 오네시모의 모습에서 바울의 복음 선포가 효과적이었음으로 적당히 중간쯤에서 끝나는게 아니고 완전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요. 이것은 오네시모가, 이 오네시모라는 이름 자체가 유용한자라는 뜻인데 이제 어떻게 하느냐 하면 11절에 무익한 자였으나이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유용한 자가 되었다고 오네시모 이름으로 우리 언어 유희를 해요.

세번째로 바울은 어떤 그 혁명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아요. 가령 노예제도는 완전히 철폐되어야 된다는 구호를 외쳐대지 않아요. ‘빌레몬 네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노예를 부린다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그런 말 한마디 없어요. 그러나 이 진정한 혁명을 가져오는 그런 가르침을 하고 있어요. 그는 노예제도가 철폐되어야 된다든가 또는 오네시모가 너 참 도망 잘했다. 그 노예 제도라는 것은 당연히 도망해야지, 너 잘했다.’ 이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오네시모를 옛 주인에게 돌려보내요. 이렇게 보면 당시 바울이 그 노예 제도를 존중한 것을, 사회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요새말로 하면. 그러나 바울이 오네시모를 스스로 어떻게 취급해요? ‘내가 감옥에서 낳은 아들이다.’ 아들로 취급하고 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으로 받지 말고 형제로 받으라고.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 가져오는 진정한 혁명이라는 말이예요.

제도적 혁명보다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정신에 혁명을 가져와요. 주종의 관계를 주안에서 형제의 관계로 뒤집어 놓는 것이 복음이라 이말이예요.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이 세상적으로 주와 종과, 하늘과 땅 차이의 관계인데 주안에서는 형제로서 그러니까 같이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기능적인 차이, 主從의 기능적인 차이는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관계의 본질적인 면이 탈바꿈하는 것이죠. 그래서 노예제도... 하나의 인간 인격체가 되는 것이고, 아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주인인 빌레몬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라 말이요. 여러분들이 이 편지를 받았을때 이 편지를 받는 빌레몬의 입장을 생각해 봐요. 그가 진정으로 바울의 복음을 이해 했다면 오네시모를 더 이상 옛날 같이 종으로 다루지 않고 어떻게 다루느냐 하면 형제로 다룰 수 밖에 없는거라 말이예요.

이와 같이 복음은 항상 무슨 이념적인 선동을 통해서 변화를 가져오기 보다는 항상 그 사람들의 심장을 변화 시키고 사람들의 세계관, 인생관을 변화 시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 관계에서 본질적인 면 이웃에 대한 태도를 변화 시켜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거라 말이예요. 그래서 우리 신약성경 어느 곳에도 노예를 우리 지금 현재의 관점으로 봤을때 고대 사회의 가장 악질적인 모습이 노예제도였지요. 모든 고대 문명은 노예들의 희생위에 세워진 문명이지요. 에집트의 피라밋 문명도 그렇지요. 헬라의 이른바 민주 사회도 노예들의 민주 사회의, 헬라의 그리스도의 민주사회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인권을 갖고 자유를 갖고 그런게 아니지요. 자유인들만, 시민들만, 그 소수의 시민들의 그런 자유로운 삶, 자유로운 정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노예들이 아무런 인권도 보장 받음 없이 그 하귀(?)의 일정으로 항상 그랬어요.

오늘날 우리 관점으로 볼 때 고대 사회의 악질적인 모습이 노예제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예제도의 문제점을 우리 신약 성경은 의식을 해요. 가령 고린도전서 7장 같은 곳에서도 그러고 지금 이런 것에서도, 그러나 어느곳에서도 명백히 노예 제도가 복음에 위배되는 것이니까 이것을 철폐해야 된다는 그러한 명백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이예요. 노예 제도가 복음에 위배되는 것임은 다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거라. 아까 갈라디아서3:28절 같은 것이 바로 그런거라. 그리스도안에서 자유인도 노예도 없다는 그 소리는 지금 이 세상적인 노예와 자유인의 분리가 이제 이 세상에 악함의 표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의 그 관계 또는 새로 회복된 하나님의 cosmos의 새 질서 속에는 그런 이 세상의 죄악의 모습인 착취당하는 노예와 착취하는 주인이 없어져 버린다 말이요. 그래서 이 노예 제도의 문제점을 신약성경에서는 곳곳에서 말하고 있어요. 그것의 죄악성, 곧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곳에서 노예 제도를 철폐해야 된다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아까 이야기 한대로 그러나 복음은 사람들의 그 심장을 변화 시키고 이웃에 대한 태도를 변화 시키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 새로운 태도를 넣어 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혁명을 가져왔어요.

그래서 복음의 역사를 주욱 보면 항상 복음은 해방하는 --해방의 복음으로-- 힘을 발휘했어요. 그래서 고대 사회의 노예제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구요. 신약전서 어디에서나 노예 제도가 철폐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지만, 자 이복음이 전파된 곳에 노예제도가 철폐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어요. 고대 사회 속에서도 최근의 역사에서도 그렇고, 아프리카 사람들 잡아다가 노예로 파는 것을 금한 것도 영국의 국회 그리스도인들이었고, 미국에서 노예 해방 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었고, 물론 노예 제도가 복음에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엉터리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었지만... 이 복음에 진정으로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동했고 항상 억압 받은 사람들에 대한 해방의 복음으로 힘을 발휘했어요. 우리 한국에서도 그렇지요.

요새는 이 바울의 가르침이 여자들을 억누르기 위해서 자꾸 쓰는데 정 반대로 사실은 예수와 바울의 가르침이 가는 곳에는 항상 여자들의 해방이 있어요. 이것이 없는 곳에는 항상 여자들을 억누르고 있어요. 오늘날 여러분들 중동에 한번, 인도에 한번 가봐요. 여자들이 얼마나 노예로 사는가? 인도나 파키스탄공항에 내려보면 벌써 알아요. 또는 중동의 공항에 내려보면 이 여자들이 눈만 내놓고 다 뒤집어 쓰고 거의 장님이 되어가지고 공항에 자기 남편이나 아들의 손에 이끌려서 왔다 갔다 한다구요. 눈만 내놨으니까 좌우가 안보이잖아요. 그래서 자꾸 부딪힌다구. 그러니까 장님 이끌듯이 남자가 이끌고 이리저리 다닌다구요. 그게 여자들의 노예상을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슬람에 가면... 예수 당시도 그랬죠. 유대인들도 힐련?에 의하면 남자는 마음대로 여자를 이혼할 수 있어요. 땅을 조금 태워도 이혼사유가 되고, 우리말로 밥이 좀 설어도 이혼사유가 되요. 이혼 증서만 써주고 나가라고 해요. 그게 이제 오늘날 이스람 샤리아법에도 그대로 있어가지고 이슬람들은 어쩌면 통일이 되어 버렸어요. 재판소에 갈 필요도 없어요. “내가 너를 이혼한다. 내가 너를 이혼한다. 내가 너를 이혼한다.” 3번하면 끝. 이 여자들의 그 억압이라는 것은(노예상이라는 것은) 지금도 복음이 안들어간 회교권에나 힌두권에는 말 할 수 없어요. 힌두의 과부를 태워 죽이는 법, 이게 영국 식민 통치자들이 19C에 법을 금했는데 엄청난 반발을 일으키며 금했어요. 이게 뭔지 말아요 여러분들, 남편이 죽으면 힌두 장례식은 화장을 해요. 시체를 장작불에 태우는데 거기에 그 과부가 아무리 청춘이어서 아직 삶이 창창 남았든 어쨋든 그 남편의 장례 화장불에 뛰어 들어가 같이 죽어야 되는 거라구요. 힌두법에는 그짓을 했어요.

이것은 옛날 고대 우상 숭배한 종교에서 인간을 재물로 바쳤던 이 제도를 영국의 식민 통치자들이 금했는데 힌두교들이 엄청나게 반발을 했어요.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이 토속 종교의 부활이 일어나는 운동이 있어가지고 이란의 호메이니옹이 회교 부활운동이 있어 가지고 이란 사람들은 상당히 서구화 해가지고 여자들이 이런거 안쓰고 다녔다고요. 호메이니 혁명 이후에는 다 쓰게 만들었다구요. 여자들이 억압을 받게 되고 그 영향으로 심지어 인도네시아 같은 데서도 이 이슬람 사회의 그 코란의 샤리아법을 현대 법으로 쓰기는 어렵다고 해가지고 ? 대부분이 현대적? 그런데 이 호메이니 혁명이후 ?........... 이슬람 공화국의 리야드다 전부 현대적인 법은 때려치우고 코란의 샤리아 법을 그대로 적용을 했어요. 도둑질하면 팔을 잘라 버리고, 간음하다 잡히면 곤장을 40대인가 때려서 죽기도 해요. 또는 목을 매서 처형을 시키고, 옛날에 1970년대 사우디 아라비아 공주 하나가 공개적으로 칼로 목을 침을 당해서 죽었어요. 왜냐 하면 그 여자가 영국 남자하고 살았는데 발각이 되었어요. 이 사우디 아라비아는 왕자 공주가 수백명이예요. 왜냐하면 부인을 정당하게 4명을 얻을 수 있으니까 거기서 난 왕자 공주들이 수십명이라고요. 그중의 하나가 처형을 당했어요. 그것을 영국의 어떤 여행자가 비밀리에 그 장면을 찍어가지고 내가 영국에 있을때 BBC에서 방송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게 영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크게 외교적인 문제가 되었다구요.

하여간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 이런 나라들이 다시 자기들이 이슬람 퍼블릭?이 되어야 한다고 회교들이 심지어 여자들이 이 샤리아 법을 해야 된다고 해요. 그러면 남자들은 부인을 4명까지 얻어도 되는 거고 아무렇게나 이혼해 버려도 되는 것이고 여자들의 권리는 아무 것도 없는 거라. 그런데 그런 법을 해야 된다 이거예요. 그리고 머리에 쓰고 다니고 그래야 된다 이거예요. 이런 식으로 회교 국가에서 일어나 가지고 인도네시아에서 지금 가령 수하르트 군부 정권에서 그들은 자꾸 독재를 해서라도 조금 국가를 현대화 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맞선 근본주의자들과 투쟁하는데 에집트도 마찬가지예요. 무바라크 정권은 자꾸 세속화하고 현대화 하려고 하는데 이 근본주의 회교 주의자들은 자꾸 이슬람식으로 하려고 하는데 더 억압이 된다구요. 이 영향을 받아서 인도에서도 일부 여자들이 아까 이야기한 그 미망인 태워 죽이는 법을 부활한다고 데모를 해요. 저희들 다 죽고 싶은 모양이지요. 도대체 이런것을 보면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얽어매는 쇠사슬인가를 알게되요. 종교라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주는게 아니고 사람들을 얽어매는 쇠사슬인 것이예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어느곳에서나 해방운동이 일어나는데 노예의 해방운동이, 여자들의 해방운동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운동이 오늘날 바울의 가르침을 가지고 자꾸 교회내에서 여자들을 억누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와 바울의 정신에 어긋난 사람들이라구요. 이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자꾸 고린도전서 11:32이하를 둘러대면서 여자들은 잠잠하라 했으니까 찍소리도 말고 가만히 있어라하는데, 그것은 바울의 복음을 이해 하지 못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못한다구요. 그런 문자주의자들은 그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구요.

네번째로 바울은 자기 사도적 권위를 어떻게 쓰나를 우리가 잘 볼 수가 있어요. 우리 한국에서도 복음이 여자들의 해방이어 가지고 여자들이 여기 남자들 틈에 앉아 신학 공부한다고 앉아 있어요. 바울의 복음이 없었어 봐요. 지금 여러분들 치마를 둘러쓰고 집앞에 왔다 갔다 할 정도지 어떻게 서울에 와서 어디 지금 이 틈에 앉아 있어요? 나 어렸을때 우리 할머니들도 치마쓰고 다녔다구요. 그리고 좀 시골에서 행세하는 집안에서 여자가 시장에 간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잠잠하라 소리는 무엇을 전제하느냐 하면 여자들이 복음의 자유를 얻어가지고 교회에서 활발히 말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라구요. 그런데 여자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이런 동네가 떠내려가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여러가지로 분파로 또 성만찬에 부자들이 과시하느라고 잔뜩 음식을 챙겨오고, 잔뜩 맛있는 포도주 가지고 와서 먹고 마시고 해 가지고 곤드레 만드레 해서 굉장히 무드있어 하고, 노예들은 먹을게 없어서 곤란이 일어나고, 성령 은사를 받았다고 그 은사중에서도 좀 밖에 드러나는 은사, 방언하고,환상보고, 에언한다고 하는 온갖 곳에서 떠들어 대는데, 그중에 한 몫한 것이 여자들이라... 바울이 뭐라 했느냐 하면 여자들이 기도하는 것은 좋다 공적으로 기도하고 말하는 것은 좋은데 너울을 쓰고 하고 그리고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물어볼 것 있으면 집에가서 물어보고, 이렇게 질서를 잡는거라구요. 그런데 그 질서 잡음이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고대 사회에서 있을 수 없었던 일, 고대사에나 헬라사에서 있을 수 없었던 일, 남녀가 함께 모이는 곳에서, 고대 유대 회당에서 남녀가 어떻게 함께 모여요? 여자들은 저기 따로 저기 뒤에 앉아있어야지. 남녀가 함께 모여가지고 거기서 막 떠들어대는데 남자들은 못당해요. 그런 인류애의 보편적인 것이지. 여자들이 말이 많아요. 그래서 무질서해서 질서를 잡는거예요.

그래서 이 질서가 제대로 유지되는 곳에는 갈라디아서 3:28에 들어 맞는 거라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의 질서 속에서는 남자고 여자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말이예요.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고 그것은 다 빼버리고 바울이 질서잡는 그말만 그냥 확대화 해가지고 여자들은 꿈쩍도, 찍소리도 말라고 자꾸 윽박지른단 말이예요.

바울은 8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빌레몬의 순종을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있음을 은근히 말하죠. 이 권위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바울은 아주 이 세상적인 성신 원리로 비상하잖아요. 사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식으로 하지 않고 자기가 빌레몬에게 한 섬김에 근거해서 이 권위를 주장해요.

특히 19절을 보면 너는 나에게 네 자신으로 빚졌다해요. 왜냐 하면 복음의 섬김을 통해서 그가 영생을 얻었으므로 생명을 얻었으므로라고 은근히 상기시켜요. 바로 이런 사도적 권위를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주장하는게 아니고 그래서 가령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주장하는게 아니고 아 나 지금 감옥에서 고생이 많은데 너만 그렇게 편히 살면 되느냐? 나를 좀 도와다오 그러니 네 종 오네시모를 나에게돌려 보내면 어떠냐?’ 이런 말도 하지 않아요. 자기 사도적 권위를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쓴게 아니고 도리어 18-19절에 오네시모가 너에게 무슨 빚진 일이 있으면 만약 못 갚을 빚을 졌다든가 네 재산을 축내고 도둑질해 도망 갔다든가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다 갚아 주마자기가 다 대신 갚아 주겠다고 해요. 여기서도 바울이 자기의 교회, 자기를 통해서 회심한 사람들에게 금전적인 누를 전혀 안끼치려고 하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볼 수가 있지요. 이 권위를 바울은 다만 사도적 사역만을 위해서 쓰라는 말이예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움을 위해서만 쓰라. 구체적으로 다시말하면 빌레몬과 오네시모사이에 화해를 가져오고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는 그 일에만 지금 사도적 권위를 쓰고 있는 거예요.

다섯번째로 보면 바울의 이 그 온화한 모습을 봐요. 8절과 9절에 내가 명령할 수 있지만 명령을 하는게 하니고 호소한다 그랬어요. 이런 것에 어디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있어요? 오늘 우리 목회자들의 큰 병폐 하나가 권위주의로 나가는 것인데, 내가 명령할 수도 있지만 명령하지 않고 내가 호소한다고, 또 자기쪽에서 일방적인 결정을 하는게 아니고 빌레몬의 동의를 구하는 자세, 14, 20절에 보면 나를 도와 달라고 바울이 호소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 이게 다 사랑의 근거에서 나온다구요. 권위주의적인 목회자의 모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온화한 목회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여섯번째로 바울의 지혜와 민감성. 이 편지의 스타일 자체가 아주 지혜롭고 아주 주의 깊게 문장 하나 하나를 골라서 행간에 많은 것을 함축하면서 자기의 호소와 오네시모를 제대로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는 호소와 자기 사도적 권위 내지는 빌레몬이 자기에게 진 빚을 상기 시킴을 잘 발란스를 이루었어요.

한편 바울이 오네시모가 너에게 도망을 가서 큰 해를 입혔는데 용서해 주고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간곡한 호소가 있지요. 그 호소를 하고는 곧 바울이 항상 무엇을 덧 붙이느냐 하면(그 발란스를 이루느냐 하면) ‘네가 나한테 얼마나 빚졌는가를 생각해 보라... ‘오네시모가 너에게 빚진 것이 얼마인가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네가 나에게 얼마나 빚졌는가를 생각해보라.’고 은근히 상기 시키는 아주 지혜롭게 쓴 편지예요.

그래서 12, 13, 20절을 보면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이 바울에게 돌려 보내서 감옥에서 바울의 시중들기를 바라는 바울의 소망이 행간에 함축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명령하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도 않고-- 아주 간접적으로 지혜롭게 표현하고 있어요. 이것은 바울이 빌레몬이 오네시모에 대한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이예요. 빌레몬이 결국 자발적으로 결정해야 할 일이고, 왜냐하면 빌레몬이 바울에게 무엇을 선물한다면 그것은 자발적인 사랑의 선물이어야만 진정한 선물이기 때문에 강요함이 전혀 없어요. 오늘 한국 목회자들의 이 권위주의와 강요, 우리 한국 교회 요소의 신앙생활이 강요 요소가 많아요. 헌금, 주일 성수라든지 기도회 참석이라든지 너무 강요 요소가 많아요. 그래서 이 신앙생활이 고달픈거라. 그래서 한국에서의 신앙 생활은 고달퍼요. 기쁨이 별로 없다구요. 맨 강요, 모든게 강요. 교회 내에서의 강요하는게 굉장히 많아요. 설교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호령하고 강요하는 것도 있지만 그 외의 여러가지 분위기라든지, 강요하고 몰아 붙이고... 그러면 외적인 것은 성장이야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적인 인격의 성장이 있는지 그것을 한번 다시 생각해 볼 문제예요.

일곱번째로 바울이 아까 이야기한대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빚을 자기가 갚겠노라고 해요. 18, 19, 자기의 그 양을 위해서 이렇게 까지 자기가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목회자를 봐요. 우리 한국에서 이 목회자는 무조건 대우만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관념이 있는데, 여러분들 나중에 다 목회자가 될 텐데 지난번에 어떤 권사님 한분이 나보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같이 먹었어요. 옛날부터 나를 한번 대접하려고 했대요. 그렇다고 어디 좋은데로 가자고해서 점심이니까 좋은데로 갈 것이 아니라 설렁탕이나 간단히 먹자고 설렁탕 하나씩 먹었어요. 노인 권사님이니까 아무래도 느리지. 그래서 내가 먼저 돈을 냈다고. 그랬더니 깜짝 놀래가지고 어디 목사님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목사님은 당연히 받기만 하는거야? 아주 인식이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목사가 권사님 위해서 점심 한번 사는게 뭐가 그렇게 이상하느냐 말이요? 당연한 것이지. 바울 보라구요. 우리 한국에서는 이상하단 말이야. 장로하고 목사하고 어디가면 장로가 사야되고, 권사하고 목사하고 어디가면 꼭 권사가 사야되고. 왜 그래요? 생각해 보라구요. 그럴 이유가 있나? 하여간 목회자는 종이라고 하면서도 상전 대우만 받아야 한다구요. 종님이니까? 사전에 자 뒤에 님자는 없어요. 놈자가 붙어야지.

마지막으로 바울의 오네시모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구구절절히 표현이 되어 있어요. 10절에 내 아들 오네시모, 내가 감옥에서 낳았다.’고 이런 표현, 11절에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자기 이름값 하는 유용한 자가 되었다고, 12절에 우리말 번역이 잘못된 것 같아요. 오네시모가 나의 심복이라, 우리말로 종이 아니고 (폴랑크랑?) 그가 나의 심장이라. 심복이라면 내가 데리고 다니고, 내가 신임하는 나의 모든것을 알아서 해주는 꼬봉이라, 그런 소리가 아니예요? 그게 아니고 정반대, 나의 심장이라 그말이요. 정서, 감정이 싹트는 심장이라는 뜻이예요. 16절에 내게 아주 귀한자라 오네시모가. 18, 19절에 그대신에 빚도 갚아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바울이 오네시모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표현하는데 빌레몬이 이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 한번 빌레몬이라 한다면 꼼짝 못하겠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빌레몬이라 했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아마 오네시모를 형제로 환영하고 며칠 잘 대접하고 쉬게 했다가 다시 바울에게 가서 감옥에서 고생하는 바울을 돌보라고 보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거 강요하는 곳이 하나도 없다구요. 그래서 지금 내가 몇가지로 간추렸는데 이 편지는 사회 계층간의 문제,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를 바울이 어떻게 해결하나에 대해서도 오늘날 사회 계층 문제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줘요. 그러나 목사 바울의 참 모습도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주 귀한 편지예요. 자 오늘은 거기까지. 이번 학기는 여기까지 종강.

바울서신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