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적 신학/성경신학

보혈 언약(신약성경의 언약 사상 1)(박수암)

by 금빛돌 2015. 2. 26.

 

“언약”(coverant)을 뜻하는 헬라어 ‘디아테케’는 히브리어 ‘브리이트’에 해당하며, ‘바라’(먹는다, 삼하 13:6) 혹은 ‘카라트’(자른다)라는 어근을 가진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계약을 맺을 때에 계약 체결자 쌍방이 함께 식사를  한 것(창 26:30, 31:46, 출 24:11, 삼하 3:17-21, 시 41:9), 계약을 위해 짐승을 잡은 것(창 15:10,17)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계약자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계약의 확실성을 나타냈으며 계약을  어길 경우 짐승의 배를 갈라 그 사이를 지나가듯이 그 어긴 계약자의 배를 갈라 그 사이를 지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구약에는 하나님과 인간 간의 많은 언약들이 있다. 아담(창 3:15), 노아(창 9:11-17), 아브라함(창 12:2, 15:5, 17:4), 모세(출 24:1-11), 다윗(삼하 7:12-16)의 언약 등.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모세와 맺은 시내산 언약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했다. 이에 백성들은 그 모든 말씀을 준행할 것을 서약했으며, 이에 모세는 화목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고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라고 말했다. 이 언약은 ‘옛 언약’, 곧 구약이라 불린다. 
이 옛 언약 (구약)은 이스라엘의 불이행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김으로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시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인류 구원의 새판을 짜시기 위해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체결하실 것을 약속하신다(렘 31:31-34). 
예수님은 “언약”이란 말을 그의 생애 중에 오직 한 번,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성만찬)을 나누시면서 그 만찬의 뜻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 참고 막 14:24; 마 26:: 28; 눅 22:20). 그 피 곧 예수의 죽음은 새 언약을 인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보혈 언약에 관한 말씀으로 마태복음 26:28의 말씀이 제일 온전한 형태의 말씀이다. 바울과 누가는 이 언약을 ‘새 언약’(New Covenant)이라 부른다. ‘새 언약’이란 말의 ‘새’(헬라어 ‘카이네’)는 질적인 새로움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모든 언약과는 달리 질적으로 새 언약을 맺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혈 언약은 보혜사 언약(요 14:16), 재림 언약(요 14:2-3) 등 신약에 있는 많은 구두약속들을 초월하는 대표적인 언약이 되고 있다. 예레미야 31:31-34(히 8:8-12), 마태복음 26:28, 누가복음 22:20을 중심으로 이 보혈언약의 내용, 의미, 교훈, 설교에의 적용점들을 고찰해보자.

보혈 언약의 내용
이 새 언약은 첫째로, 내적이며, 영적이다.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 8:10). 전에는 율법을 돌비에 기록했으나 이제는 율법을 심비에 기록하며, 전에는 율법이 인간 밖에 있었으나 지금은 율법이 인간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그만큼 율법은 생생하고 또렷하게 이해되며,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와 사고 자체의 일부분이 됐다. 전에는 율법 준수가 나의 선택 사항이었으나 지금은 율법 준수가 나를 지배하는 원리가 된 것이다. 전에는  외적인 법규들을 준수함에 그쳤으나 지금은 그 준수가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에는 율법이 하나의 명령이었으나 지금은 율법이 하나의 선물로서의 새로운 복종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그 마음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죄 용서와 사랑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변화된 마음이요, 살(flesh) 같이 부드러운 마음이다(겔 11:19, 36:26).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순종의 마음이다.
이 새 언약은 둘째로,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히 8:11).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란 표현은 ‘전부’를 뜻하는 관용구로서(행 8:10), 옛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에만 해당됐으나  새 언약은 올법을 개개인의 마음에 기록함으로써 민족과 연령과 지위 등 인간의 모든 제한을 초월하여 주셨다(마 28:19). “앎이라”(히 8:11, ‘에이데수신’)는 직접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전에는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을 알았으나 이 때가 되면 그들이 직접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direct and first-hand knowledge). 과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원래적인 의도를 완전히 계시하시고, 성령께서 오셔서 그리스도인 각자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고 증거하심으로 그들 스스로 알게 된 것이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앞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구원이 될 때 더욱 완전해질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 새 언약은 셋째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죄를 완전히 실현하는 언약이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새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효과적이고 영구적인 속죄의 길을 제공한다는 말씀이다. 옛 언약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있고, 사죄가 있었다(출 34:6,7). 그러나 그때의 자비는 부분적이고 조건적이었고 완전하지 않았으며, 그때의 사죄는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생각나게 하며, 다시 죄를 짓게 되는 성격의 것이었다(히 10:3). 그것은 때마다 짐승의 희생을 요구했고, 거기에 한해서 죄의 용서가 있었다. 짐승의 희생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의 피로 세워짐으로써 인간의  어떤 희생물이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비에 의해 완전한 사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히 9:14, 15, 26, 10:17-18). 옛 언약은 모세에 의해 해마다 제사를 드려야 하며(히 9:25), 죄를 영구히 없애지 못했으나 새 언약은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의 피로 이루어졌으며(히 9:12,14, 10:19, 29, 12:24, 13:12,20), 그 피는 단 한번으로 영원히 드려졌다(히 9:26,28). 옛 언약은 피상적인 죄를 사하는 정도였으나 새 언약은 마음의 악 즉 본질적인 죄를 사한다(히 9:23).
이 선수적(先手的)인 사죄의 은혜는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언약관계에서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는 경우는 일찍이 구약에서도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창 12:1-3), 노아(창 5:13-21)와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노아를 택하심으로 그들을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에 대해 노아와 아브라함은 각각 그 관계가 요구하는 바 믿음을 보였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의롭다고 인정 받았다. 아브라함을 가리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노아를 가리켜 “의인, 완전한 자”(창 6:9)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구약에서 의로운 자들은 율법을 행하는 자들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고 그를 기다리며(사 33:2, 미 7:7-9), 그분 안에서 희망하는  자들이며(시 69:6, 71:7,14, 146:5), 그를 찾는 자들이요(시 69:32), 그를 신뢰하는 자들이다(시 71:5, 143:8). 그들은 여호와를 아는 자들이며(시 36:10), 두려워하는 자들이고(시 103:11, 13, 17), 그를 사랑하는 자들이다(시 69:36).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분을 의지하여 신실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의다.
이스라엘의 믿음은 여호와와의 관계에 대한 수행이다. 이스라엘이 자신을 의롭다고 부를 때(시 37:39) 그것은 그들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없기 때문이거나(시 32:11, 69:28) 하나님의 구원을 공로로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요, 하나님은 그의 산성이 되시기 때문이다(시 5:12, 14:5, 31:18, 33:1 등). 그리하여 ‘의’는 종종 ‘믿음’과 관련된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5).
예수님은 이러한 구약의 ‘의’ 개념을 배경으로 하여 새 언약을 체결하시며(막 14:24, 마 26:28, 눅 22:20), 사람들을 의롭다 하셨다. 그는 인간의 믿음을 조건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새 언약관계를 체결하셨다. 그는 세리들을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다고 하시며(눅 18:14), 세리들과 창기들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신다(마 21:31). 이는 세리와 창기들이 윤리적으로 바리새인이나 백성의 장로들보다 더 의로워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관계적으로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요구하시는 믿음의 조건을 그들이 총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관계성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의’란 말로 나타내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 5:10).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 21:32).

보혈 언약의 의미
이상의 내용 고찰은 보혈 언약이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보혈 언약은 예수님의 일생 선포의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되는 개념이다(G. Dix, Shape of Liturgy, 74-77).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전 인류와 새 언약을 체결하는 사건이며, 예수님의 새 언약 체결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하는 중대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시기 위해, 즉 이 새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언약과 잔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께서 그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여 새 계약을 체결하셨음은 후일 새 계약을 이루게 하시는 성령을 부어주심에서 확증된다. 일찍이 에스겔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신 때에는 하나님께서 새 영을, 하나님의 신을 인간 속에 두실 것을 예언했다(겔 36:26-27).
둘째, 보혈언약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새 법령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 이 언약을 “새 언약”이라 한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고후 3:6). 여기 “새 언약의 일꾼”은 ‘새로운 구원 법령을 따라 일하는 일꾼’이란 뜻이다.  구약의 언약들은 모두 옛 이스라엘의 특권(구원의 약속)들 가운데 하나였다(롬 9:4). 그리하여 새 언약도 죄 용서를 베풀어준다.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롬 11:27; 사 59:21). 바울은 이 새 언약의 일꾼이 됐으며, 새 언약은 문자가 아니고 영이다(고후 3:6, 렘 31:33). 옛 언약은 모세의 율법으로 그 자체의 영광을 가졌을 뿐이며, 이스라엘에겐 수건이 가리워져서 아무런 유익을 못주었다. 그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질 것이다(고후 3:7-10). 두 개의 언약이 있으나 하나님의 한 뜻만이 있을 뿐이며, 이 뜻은 율법의 마침이 되시며 모든 약속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구약의 모든 언약들은 “약속의 언약들”이며(엡 2:12), 이 약속의 언약들은 모두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재확인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의 모든 언약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새 언약의 그림자들이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셋째, 보혈 언약은 옛 언약과 질적으로 다른 언약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이를 잘 보여준다. 옛 언약은 먹으로 돌비에 쓴 것이나 새 언약은 영으로 육의 심비에 쓴 것이며(3절), 옛 언약은 먹으로 쓴 것이나 새 언약은 성령으로 쓴 것이며(3절), 옛 언약은 의문(letter)에 속하나 새 언약은 영(spirit)에 속한다(6절). 옛 언약은 없어질 일시적인 것이나 새 언약은 길이 있을 것이며(11절), 옛 언약은 죽이는 것이나 새 언약은 살리는 것이다(6절). 옛 언약은 인간으로 하여금 정죄에 이르게 하나 옛 언약은 의에 이르게 한다(9절). 옛 언약은 인간으로 하여금 정죄에 이르게 하나 새 언약은 의에 이르게 한다(9절). 옛 언약은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광채를 주목하지 못했지만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모든 믿는 자의 마음에 비추셨다(고후 4:6). 옛 언약은 이스라엘 한 민족을 대상으로 했으나 새 언약은 믿는 모든 인류를 상대한 것이다(13절). 옛 언약은 행위에 근거한 행위 언약이었으나 새 언약은 믿음에 근거한 은혜 언약이다(5절). 옛 언약은 주의 영이 없음으로 인하여 자유함이 없었으나 새 언약은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자유함이 있다(17절).
이리하여 이 새 언약은 인간으로 하여금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 직접적인 하나님 지식, 자발적인 순종,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속죄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구약의 예레미야(렘 31:33-34)와 에스겔 선지자(겔 36:25 이하)가 예언했던 새 언약의 시대가 온 것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시대가 지나가고 은혜의 시대가, 행위의 시대가 지나가고 믿음의 시대가, 문자의 시대가 지나가고 영의 시대가 된 것이다. 복음은 바로 이 새 언약에 근거해 있으며, 새 언약의 영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허락한다. 그는 옛 언약의 중심인 율법의 한계들을 극복케 하신다. 그러기에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이 언약을 통해 육적인 이스라엘의 모든 특권은 영적인 새 이스라엘(교회)에게로 계승ㆍ대체됐으며, 옛 이스라엘은 그 특권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됐다(롬 2:28, 29, 4:11,16,24, 9:24, 갈 3:7,9 등). 그리스도는 더 좋은 약속들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심으로, 구약의 모든 대제사장들보다 더 나은 새 언약의 대제사장이 되신다(히 8:1-13).

보혈 언약의 교훈 
보혈 언약이 이상과 같은 내용과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보혈 언약이 체결된 이후의 세상은 모두 보혈 언약의 빛 아래에서 해석되고, 가치관이 정립되고, 평가돼야 한다. 보혈 언약을 맺으신 예수님은 일찍이 보혈 언약에 맞게 새 언약 백성의 윤리로 산상보훈(마 5-7장)을 주셨다. 산상보훈은 ‘천국시민의 대헌장’으로서(Tholuck), 보혈 언약처럼 직접적인 하나님 지식,즉 본질적인 도덕성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옛 언약의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설교에서 그런 율법적 요구의 원래적인 뜻이 무엇인자를 보여준다(마 5:21-22, 27-28). 다시 말해 그런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적인 의도(original intention)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산상보훈은 보혈 언약처럼 ‘내면성’(inwardness)을 강조한다. 그것은 인간의 내적인 동기 혹은 마음의 깨끗함을 강조한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행동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밖으로부터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규칙과 제도들을 성정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인간의 마음에서 찾으신다. 율법은 살인을 죄로 여기나 예수는 마음속의 미움을 죄로 여기시며, 율법은 간음을 정죄하나 예수는 음욕 자체를 정죄하신다. 율법은 눈은 눈으로서의 복수를 말하나 예수는 복수하는 마음 자체를 정죄하신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도덕을 내면화시키신다.
산상보훈은 보혈 언약처럼 보편성을 강조한다. 산상설교엔 국수주의나 선민주의가 없다. 그것은 인류 일반을 취급한다. 그것이 관계하는 영역은 팔레스타인이 아닌 전 세상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소금이나 빛이 아닌 전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한다(마 5:13-14). 예수께서는 이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늘 아버지가 박애적(catholic)인 것처럼 박애적이 돼야 한다고 하신다(마 5:48). 산상설교는 이스라엘의 편협한 출애굽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 세상 창조 사건에 근거하여 교훈을 준다(마 6:24-30). 이런 사실은 예수께서 장차 맺을 보혈 언약을 생각하시면서 그의 새 언약 백성인 교회가 지킬 산상보훈의 설교를 주셨다고 보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십계명을 지키되 산상보훈의 빛 아래에서 지켜야 한다.
이는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 문제를 보혈, 즉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저마다 자기와 관계 있는 지도자들에 편승하여 자기 자랑을 하고 있었다.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자기가 좋아하는 지도자들에게 편승했다. 이런 가운데서 바울은 분열된 고린도교회가 십자가(보혈)의 정신으로 분쟁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보혈)에게 나타났다. 이 세상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어서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는데(약 3:15-16), 이런 세상 지혜의 눈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 어리석은 사건일 수 밖에 없다. 호령하고 군림하고 주관해야 할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광스런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위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어리석음 속에 인간을 구원하는 참 지혜가 나타났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서로가 잘났다고 뻐기고 자랑하는 이 세상 지혜가 아니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가치관을 재평가, 재판정, 재정립하게 한다.

설교 적용점
1. 그리스도인(새 언약의 백성)은 언제나 보혈과 보혈 언약을 생각해야 하며, 그에 따라 감사함으로 행동해야 한다(마 26:28).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혈 언약을 통해 구원의 새 판을 짜셨기 때문에 신약시대는 모든 행동을 이 보혈의 언약의 판도 내에서 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진심으로 행해야 한다.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렘 31:34).
3.  보혈(십자가)은 하나님께서 전 인류와 새 언약을 맺는 사건이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언약 백성이다.
4.  언약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적인 사랑(무한한 사랑)을 받는다. 

 

:: 필자 정보 - 박수암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신약학). 토론토대학교(Th.D.). 저서로 《신약 신학 주제 사전》, 《신약성서 개론》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