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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성경신학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의미와 종류, 특징

by 금빛돌 2014. 12. 4.

 

본문 및 주제 연구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의미와 종류, 특징


강성열  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Th.D.). 저서로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 등이 있다.

‘언약’(covenant) 또는 ‘계약’은 히브리어(구약)와 헬라어(신약)의 ‘브리트’와 ‘디아테케’를 번역한 것으로, 흔히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서로의 신뢰 관계를 확증하는 차원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약속을 일컫는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언약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수평적인 차원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가 사이에 맺어지는 언약을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수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과 더불어 맺으시는 언약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이 두 언약이 다 언급돼 있다. 전자가 쌍방 합의 하에 맺어지는 성격을 갖는다면, 후자는 사람의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맺어지는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수평적인 차원에 속한 언약의 예로는,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 맺는 언약(창 21:27, 32)이나 라반이 야곱과 맺는 언약(창 31:44), 이스라엘 자손과 기브온 주민 사이에 맺어진 조약(수 9:6, 7, 11, 15, 16; 개역 개정판은 ‘브리트’를 “조약”으로 번역함),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사람들과 맺고자 했던 언약(삼상 11:1),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맺어진 언약(삼상 18:3; 20:16; 23:18), 다윗과 아브넬의 언약(삼하 3:12-13, 21), 다윗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 사이에 맺어진 언약(삼하 5:3; 대상 11:3), 솔로몬과 두로 왕 히람 사이에 맺어진 언약(왕상 5:26; 개역 개정판은 ‘브리트’를 “약조”로 번역함), 제사장 여호야다와 백부장들 및 온 회중 사이에 맺어진 언약(왕하 11:4; 대하 23:1, 3, 16), 요시야 왕과 유다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왕하 23:3), 예수를 팔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이 가룟 유다와 맺은 언약(눅 22:3-4), 그리고 한 번 정한 후에는 누구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약(갈 3:15)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수직적인 차원의 언약에는 하나님이 맨 처음 인간과 맺으신 언약(창 1:26-29; 2:15-17), 범죄한 인간과 맺으신 언약(창 3:15), 홍수의 주인공인 노아와 맺으신 언약(창 6:18-21; 9:1-17),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과 맺으신 횃불 언약(창 15장)과 할례 언약(창 17:1-14; 행 7:8), 출애굽 공동체인 이스라엘 자손과 맺으신 이른바 시내 산 언약(출 19-24장),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윗과 맺으신 언약(삼하 7:5-16), 예레미야 31:31-34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새 언약(눅 22:20; 고전 11:25; 고후 3:6; 히 8:8, 13; 9:15; 12:24) 등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수평적인 차원의 언약이 아니라 수직적인 차원의 언약이기에, 이 글에서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맨 처음 인간: 하나님의 형상과 선악과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인간 창조에 대해 가장 많은 설명을 곁들인다. 이는 인간 창조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인간 창조가 창조의 절정에 속한다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복을 받았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1:26-28). 또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공작(工作)에 의해 창조됐다(2:7, 22)는 점에서 창조의 정점에 속하는 존재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언약의 증거로 그에게 약속과 복을 주신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서 언급하는 창세기 1:26-28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26절과 28절의 반복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이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는 것이다(참조. 시 8:5-8).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해서 무제한의 지배권을 가지고 자연 세계를 마음껏 파괴하고 착취해도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소유물을 잘 관리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사람에게 식물로 주신다(29절).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단순히 사람을 비롯한 온갖 생명체를 만든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식물을 마련해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생명을 계속 지탱해갈 수 있게 해 주셨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제약이 따른다. 이른바 선악과 언약이 그렇다. 피조 세계 다스림의 복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형상 언약은 온갖 식물을 인간에게 식량으로 허락했지만, 그들이 경작하며 지켜야 할 에덴 동산 중앙의 선악과 열매만큼은 예외로 삼았던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언약의 조건(2:16-17)이 그렇다.
이러한 선악과 금지의 조건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무제한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넘어가서는 안 될 한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피조물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안 된다고 명령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 즉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 이것이야말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라는 말이다. 이것은 결국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명령하는 분이시요, 피조물인 사람은 그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임을 뜻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결코 사람의 자유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질서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피조물인 사람이 지켜야 할 삶의 질서인 동시에 참된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리는 표지판과도 같다. 따라서 만일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잘 지킨다면,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자유를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에는 정반대의 결과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은 결국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맞서는 것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피조물이기를 중단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3:4-5)이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범죄한 인간: 이른바 “원시 복음”
창세기 3장은 악의 시작과 인간의 범죄 및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심판 후에 있을 새로운 구원 은총 등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창세기 3장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어떻게 해서 훼손됐는가, 죄의 본질은 무엇인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불평등의 관계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 인간 세상에 왜 고통과 수고가 계속되는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왜 생겨난 것인가 등등의 문제에 해답을 주고 있는 단락이기도 하다.
창세기 3장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의도를 염두에 두면서 이 단락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맨 먼저 간교한 뱀이 여자에게 나타나 여자를 유혹한다. 마침내 뱀의 유혹에 넘어간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자기 남편에게도 준다.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에 그들은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기들의 벗은 몸을 가린다(6-7절). 이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실을 아신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차례대로 심문하신 후에 뱀, 남자, 여자의 순서로 벌을 내리신다(8-19절). 여자의 이름이 남자에 의해 “하와”로 칭해진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보시고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신다(20절). 아울러 하나님은 죽음의 벌을 받게 된 그들이 생명나무를 먹을 수 없게끔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신다(22-24절).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그가 뱀에게 벌을 내리시는 맥락에서 언급된다. 뱀을 향한 하나님의 형벌(14-15절)은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 하나는 뱀이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배로 다녀야 할 뿐만 아니라 또 평생토록 흙을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흙을 먹는다는 것은 벌을 받아 가장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시 72:9; 사 49:23; 65:25; 애 3:29; 미 7:17 등을 참조). 뱀에게 내린 이러한 저주의 말씀은 뱀을 신적인 존재로 떠받드는 뱀 숭배사상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뱀에게 내린 두 번째의 심판은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되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인 바,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볼 때 인간과 뱀 사이의 관계, 즉 뱀을 혐오하는 인간 측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사 11:8 참조). 여기서 말하는 “후손”은 히브리어로 ‘제라’라는 낱말로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손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보다 깊은 의미는 악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영적인 싸움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싸움은 사탄에 대해 승리를 거두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개신교는, 이 심판의 말씀이 그리스도가 사탄에 대하여 거둘 승리를 가리킨다고 이해한 초대 교회의 이레네우스(Irenaeus) 이래로 이 말씀을 이른바 “원시 복음”(proto- evangelium)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이 말씀이 애초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있을 투쟁 관계만을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과 악 사이의 오랜 싸움의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결말 부분에 해당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에 대해 거두시는 승리는 이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오랜 싸움의 역사에 포함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 말씀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 점에 비추어볼 때, 뱀에게 내린 이러한 저주의 말씀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언약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홍수의 주인공 노아: 무지개 언약
창세기 4:16-24에 있는 가인의 족보는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셋에게로 이어지는 아담과 하와의 족보(5장)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기본 성격은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족보는 인간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코 인간의 선함과 신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아담과 하와의 족보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노아 시대 사람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생활상이다(6:5, 11-12).
인간 세상의 이러한 극심한 죄악상을 보다 못한 하나님은 마침내 땅 위에 사는 모든 인간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신다. 이를 위해 그는 지상 세계에 큰 홍수가 나게 하시고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과 짐승들을 물로써 멸하신다. 그러나 의롭고 경건한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큼은 홍수 심판의 와중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해 주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창세기 6장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의 구원을 언약의 맥락에서 언급한다. 18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노아와 함께 맺으신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칭하시면서, 그의 여덟 식구들과 모든 생물을 암수 한 쌍씩 방주로 들어가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으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끝장 내지 않으시고 인류 역사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다시금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간을 벌하시지만 결코 인간 역사가 중단되게 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부터 끊임없이 계속된 것으로써 자기가 만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오래 참으심, 그리고 그의 자유로운 구원 은총에 속한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노아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근거한 것이다(18절).
홍수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9장은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 은총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 준다. 홍수가 끝난 후에 하나님은 다시는 인간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시면서, 노아의 모든 식구들과 그의 후손들 및 모든 생물들과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우주적인 언약(cosmic covenant)을 맺으신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죄→심판(홍수)’의 원리에서 인간에 대하여 무한한 인내심을 베푸시는 ‘심판→은혜’의 원리로 전환하셨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무지개”(rainbow)라는 히브리어 낱말(‘케쉐트’)이 갖는 본래적이고 일반적인 의미가 전쟁 무기로서의 활(bow)을 의미하며,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기 사용을 포기하셨음을 상징하는 표징이라고 볼 때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9:1-17의 노아 언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맨 먼저 창세기 1:28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갱신하심으로써, 홍수 심판 후 피조물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에 의해서 생육, 번성하는 것임을 선언하셨다. 둘째로 하나님은 사람과 동물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규정하시면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갱신함과 동시에 피를 제외한 육식을 허용하셨다. 그리고 셋째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음을 재확인하심으로써, 인간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거듭 천명하셨다.
이상의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 언약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안전하고 확실한 인격적 관계가 함축돼 있는 바, 이는 신들과 인간 사이의 임의적이고 비인격적인 관계를 반영하는 고대 근동 지역의 홍수 설화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 횃불 언약과 할례 언약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바벨론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을 하란 땅에서 부르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게 하셨다. 그러고서는 그에게 두 가지 약속, 곧 자손의 약속과 땅의 약속을 주심으로써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가 되게 하셨다(창 12:1-3). 그러나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오래도록 자식이 없는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 있는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정해 놓고 있었다(15:2-3). 이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의 몸에서 날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아울러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며,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5:1, 4-21).
하나님의 이 약속은 언약 체결의 양식을 통해 주어졌는데, 그것은 곧 희생 제물들의 몸을 둘로 쪼개어 놓고 하나님께서 그 사이를 지나가시는 방식이다(9-17절). 이러한 언약 세움의 절차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언약”을 뜻하는 히브리어 ‘브리트’는 본래 “… 사이”(between)를 뜻하며, “자르다, 베다”(cut)를 뜻하는 ‘카라트’라는 동사와 결합하여 “언약을 맺다”는 뜻의 숙어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하여 “… 사이에(를) 베다”는 뜻이 “언약을 맺다”는 뜻으로 바뀐 것일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언약을 맺을 때 소나 양 또는 당나귀 등의 몸을 둘로 쪼개어 서로 마주보게 한 다음에, 언약 당사자들이 그 쪼갠 사이를 지나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곧 언약 위반자가 언약 체결의 증인으로 나오는 신(神)에 의해 그 쪼개진 짐승의 몸처럼 쪼개어질 것이라는 저주 의식을 뜻했다.
하나님은 그러한 언약 체결 양식을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적용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암송아지와 암염소 및 숫양 등의 몸을 둘로 쪼개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러고서는 하나님이 친히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의 형상으로 그 쪼갠 사이를 지나가셨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그 언약을 성취하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 자신이 그처럼 두 쪽이 나도 좋다는, 하나님 자신의 굳은 약속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 쪼갠 사이를 지나가지 않았다. 그는 그저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홀로 그 쪼갠 사이를 지나가시는 모습을 본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아무런 조건도 가지고 있지 않은 무조건적인 언약(unconditional covenant)이요, 하나님 한 편만이 의무를 지고 있는 편무적(片務的; unilateral)인 언약이었던 것이다.
   이 언약을 보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때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다시금 그와 언약(“내 언약”; 17:2, 4, 7, 9, 10, 13, 14, 19, 21)을 맺으시면서, 그에게 언약에 순종하는 완전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셨다(창 17:1-2, 9). 이 언약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맨 먼저 이 언약은 아브라함이 크게 번성하여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요, 그에게서 나라들과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17:4-6).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으로 바뀌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두 번째로 이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들과도 맺으시는 것으로 이해됐다. 따라서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브리트 올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그의 자손의 하나님도 되실 것이다(17:7-8).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언약은 태어난 지 8일 되는 모든 남자들의 포피를 베는 이른바 할례 의식을 통해 확실하게 보증되는 것이었다(17:10-14).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면서 동시에 할례 받은 자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표시였던 것이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시내 산 언약
출애굽 해방의 은총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 홍해에서 구원을 얻은 후, 하나님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하고(출 16장) 므리바에서 갈증을 해결한다(17:1-6).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워 승리를 거둔 다음(17:8-16), 출애굽한 지 3개월째 되던 때에 시내 산에 도착한다(19:1). 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이후로 지속돼 온 하나님과의 관계를 공인하는 성격을 가진다. 즉 이스라엘이 정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은 때는 바로 이 시내 산 언약을 맺은 이후부터다.
모세 언약으로도 불리는 시내 산 언약은 사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구원 은총(출애굽 해방)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를 규정하고 있는 자발적인 순종과 응답의 체계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출애굽기 19:5-6이 이 점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이스라엘이 시내 산 언약을 잘 지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렇다(참조, 벧전 2:9). 이것은 시내 산 언약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라거나, 사람들을 강제하고 속박하는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제사장이 일반인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시내 산 언약에 의해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되는 존재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시내 산 언약은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 은총에 힘입어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삶의 규범이 아닐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시내 산 언약은 어디까지나 이미 조건 없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함으로 응답해야 할 성격의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 됨을 증명하는 매우 중요한 표지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경험한 오늘의 신자들이, 감사함으로 그의 법을 지킴으로써 생활 속에서 그가 원하시는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은 이치에 속한다.
하나님과의 언약 체결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곧 그의 현현(顯現, theophany)에 대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이에는 성결한 생활, 의복을 청결하게 하는 일, 하나님이 나타나실 장소를 성역화하고 그곳을 침범치 못하게 하는 일 등의 세 가지가 포함된다(19:10-15).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화산 폭발과도 같은 자연 현상을 통해 시내 산에 강림(19:16-18)하신 하나님은 십계명을 비롯한 많은 언약 규정들을 주시고 희생 동물의 피로써 그 언약을 확정하신다(24:3-8). 언약 체결 절차를 모두 마친 후 모세와 70장로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른바 언약의 식사를 나눈다(24:9-11). 이 식사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생명을 보전했음을 축하하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몇몇 선택된 증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언약을 축하하는 감사제(感謝祭)의 성격을 갖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은 크게 십계명(20:1-17)과 언약서(20:22-23:33)로 나뉘며, 이의 구체적인 시행 방안으로 성막 건축과 레위기 제사법 규정이 뒤따른다. 모세는 이 부분에서 철저하게 언약의 중재자(mediator)로 나타나며, 십계명은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다른 계명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 시내 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는 달리 조건적인 것이었다. 예레미야 34:18-20은 이것을 창세기 15장에 언급돼 있는 언약 체결 의식을 빌어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 바, 이것은 시내 산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과는 달리 조건적인(conditional) 언약이요, 쌍무적(雙務的)인 언약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 다윗 언약
사울의 뒤를 이어 통일왕국의 왕위에 오른 다윗은 남북의 중간 지대(지역 갈등을 예방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님)에 있는 여부스 족의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해 정치적인 수도로 삼았다(삼하 5:1-10). 그리고 지파 동맹체의 모세 전승을 확보함으로써 종교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했다(삼하 6:1-19). 이로써 예루살렘은 다윗 왕국의 종교적인 수도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왕권을 견고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사울 때와는 달리 중앙 집권 정부를 구성하여 안정되게 나라를 통치했다(삼하 8:15-18; 20:23-26). 그 결과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다윗의 통치에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첫째로 그가 수도로 삼은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의 영향이 상존해 있는, 따라서 종교 혼합주의의 온상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제 도시화로 인한 급격한 사회 변동의 위험성을 안고 있기도 했다. 둘째로 가나안 원주민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긴장 관계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계속됐다. 셋째로 가정 문제가 심각했다. 배다른 자녀들(삼하 3:2-5) 사이의 권력 투쟁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밧세바 사건(삼하 11장), 다말을 강간하는 암논(삼하 13장), 압살롬의 반란(삼하 15-18장) 등이 그렇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통치 후반부에는 시므이의 저주(삼하 16:5-6)와 세바의 반란(삼하 20장) 등이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 나단 예언자를 통해 전달된 그 언약은 사무엘하 7장(시 89편과 132편도 마찬가지임)에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그래서인지 나단 신탁(Nathan’s Oracle)으로도 불리는 다윗 언약(Davidic Covenant)은 두 가지 중심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사람(다윗)의 선택이요, 다른 하나는 장소(시온)의 선택이다. 전자는 다윗 왕조의 연속성을 보증함으로써 세습 왕조를 확립하는 것을 의미하며, 후자는 통일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다윗 왕조의 통치 거점으로 항구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두 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는 다윗 언약은 앞에서 소개한 아브라함 언약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인 언약이요, 편무적인 언약임에 틀림이 없다. 설령 다윗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실지언정 버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신 바가 있기 때문이다(삼하 7:14-16; 시 89:30-37). 그리고 하나님이 노아와 더불어 맺으신 언약이 영원한 언약인 것(창 9:16)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아브라함 언약 역시 영원한 언약인 것(창 17:7, 13, 19)과 마찬가지로, 다윗 언약 역시 영원한 언약으로 불린다(삼하 23:5).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조건적인 언약은 당연히 항구적인 효력을 갖는 편무적인 언약의 성격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및 다윗 언약 등은 조건적인 언약이면서 쌍무적인 언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시내 산 언약(또는 모세 언약)의 맞은편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두 개의 언약 전승이야말로 이스라엘 역사를 떠받치고 있는 양대 축에 해당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달리 말해서 무조건적이고 편무적인 성격을 갖는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및 다윗 언약 등의 세 언약 전승과 조건적이고 쌍무적인 성격을 갖는 시내 산 언약 전승은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가는 수레의 두 바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
신약성경은 “새 언약”에 대해서 모두 일곱 번 언급한다(눅 22:20; 고전 11:25; 고후 3:6; 히 8:8, 13; 9:15; 12:24). 그런데 흥미롭게도 일곱 번의 용례 중에서 네 번이나 히브리서에 “새 언약”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을 매우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히브리서는 그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히브리 사람들, 곧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쓴 편지인 까닭에,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 시대의 주요 인물들보다 위대하신 분이요, 구약 시대의 옛 언약(또는 첫 언약, 히 9:15)을 새 언약으로 대체하신 이면서 동시에 새 언약의 중보자시라는 점을 여러 군데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떡과 잔을 나누시는 중에 포도주 잔을 일컬어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신다(눅 22:20). 이 말씀은 인류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야말로 새 언약의 핵심임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5에서 누가복음의 이 말씀을 그대로 성찬 예식의 말씀으로 사용한다. 그는 또한 자신을 비롯한 복음의 사역자들을 일컬어 “새 언약의 일꾼”으로 칭함으로써, 율법 조문에 매이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활동하는 사람들임을 강조한다(고후 3:6).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사건을 “새 언약”이라고 칭하는가? 우리는 그 이유와 배경을 예레미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활동했던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요,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됐음을 알고 있던 그는 바벨론에 항복해야만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선포하기도 했다(렘 21:9; 38:2, 17-18). 새 언약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은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와 속박의 땅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던 날에 세우셨던 옛 언약, 곧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렘 31:31-32). 시내 산 언약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편으로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셨지만, 왕이나 제사장, 예언자, 일반 백성들 중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에 바로 응답하지 못했다. 언약 위반의 범죄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렘 7:23-26). 그 결과 그들은 시내 산 언약의 저주 규정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요, 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만드실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인도할 이 새로운 언약은 이제 더 이상 죄인인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할 것이다(렘 31:33-34).
이 새 언약은 궁극적으로 다윗 언약의 성취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됐다. 이 점은 예레미야 31:31-34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서 8:8-13에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주신 새 언약(고전 11:25)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됐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성찬 예식은 이처럼 중요한 사실을 성도들에게 항상 상기시켜주는 중요한 예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넓게 보면 신약성경(New Testament) 전체는 그러한 새 언약의 결정체인 셈이다.

 

:: 필자 정보 - 강성열
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Th.D.). 저서로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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