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12월만 되어서 괜히 설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 12월동안 성탄절 행사준비를 한다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들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구호가 “성탄절을 가족과 함께 조용히 보냅시다” 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조용합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또 몇 년 전부터는 저작권료 때문에 크리스마스캐롤 조차도 들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무관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힘든데, 크리스마스 기분은 낼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또 무엇보다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분위기들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교회들도 이맘때가 되면 한해를 결산하고 내년을 계획한다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을 기뻐할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교회 밖이나 교회 안이나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처음 성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에 에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정치의 중심은 로마의 황제 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가이사란 보통 황제를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또 아구스도도 황제를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황제를 나타내는 말로서 가이사 아구스도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B.C. 27-A.D. 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로마로 말미암은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와같이 왜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왜 천하로 호적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까?
그 이유는 황제 자신이 이 온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세상은 황제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세상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당시 세상은 로마와 가이사 아구스도 황제에 의해서 움직였습니다. 또 그 당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로마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도 자신의 고향에 황제의 명령에 따라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 또 고향에 갔는데 해산할 때가 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6,7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기서 왜 여관에 있을 곳이 없고 말합니까?
물론 이 말은 여관이 곽찼다는 말도 됩니다. 그런데 만일 당시의 여관주인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방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여관이 있을 곳이 없다는 말은 여관에 전혀 빈빙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예수님을 모실만한 빈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은 한 참 돈벌이가 될 때입니다. 그래서 돈도 없어 보이고--또 아이를 가진 이 사람들을 맞이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우기 이 여관집 주인은 예수그리스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구유에서 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구유라고 하니까 고상하게 보이지만 말 그대로 하면 가축 밥통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중고등부를 담당할 때-그때가 1980년도중반쯤 되었을 때 였습니다.
--성탄연극을 하는데 아이들이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 지금 처럼 성극대본도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충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오늘 예수님이 나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는 주제로 성극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학생들이 알아서 극본을 만들고 연극을 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때 요셉 분장을 하고--또 마리아 분장을 했던 학생들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습니다(장석준-석은주). 연극의 내용입니다. 처음 어느 집을 방문 했습니다. 너무 조용한 집이 었습니다.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여기 예수님이 나실 자리가 없습니까?
그랬더니 그 집에 어머니가 나와서 “쉿 조용하세요. 지금 우리 집 아이가 입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래서 안됩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요란스러운 음악이 들리는 곳이었습니다. 징글벨 루돌프 사금코 등등 저기에 가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갔습니다. 나이트 클럽입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물 흐리지 말라고 당연히 쫓겨났습니다. 그러다가 또 길을 가다가 이런 노래 소리가 듣겠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뿐이네” 어느 가정에서 너무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듣겼습니다. “야 저렇게 화목한 집에는 우리가 갈 빈 빙이 있겠지” 그런데 그 가정에서 하는 말 “우리는 지금 너무 우리 가족끼리 단란하고 행복해요. 그래서 더 이상 우리 가정의 이 행복한 분위기를 깨지 마세요 저리 가세요”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이제는 안되겠다 하고 교회로 갔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회에 가면 우리를 맞아주겠지 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갔습니다.
=마침 그날이 12월 24일 입니다. 교회에 찾아가 물었습니다. 교회 본당에 올라갔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너무 예수님을 반기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예수님이 나실만한 빈방이 없습니까?” “이 다음 순서에 우리 아이가 나온다고 방해하지 말고 지하로 내려가 보세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하로 내려가 보니 중고등부에서 올라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혹 여기 예수님이 나실 만한 빈 방이 없습니까? 그랬더니 중고등부 회장이 나와서 하는 말이 오늘 밤에 올라이트를 하는데 --예수님을 모실만한 빈방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나가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극 마지막에 “예수님이 오늘 태어나신다면 어디에서 나셔야할까요?” 라는 물음으로 연극이 마쳤습니다. 요즘 들어 “빈 방 없습니까?” 라는 제목의 연극이 있던데, 아마 저희들이 한 것을 따라한 것 같습니다. 분명 그때 그 연극이 우리가 만든 창작물이었습니다.
--제가 그 연극을 보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태어나신다면 교회조차-다른 곳에 관심 때문에 --더 이상 그 예수님을 모실만한 마음의 빈방이 없습니다.
- 과연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 때문에 모이고, 무엇 때문에 회의하고, 또 무엇 때문에 행사를 하고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 빠진 행사, 모임, 회의는 우리로 하여금 회의와 피곤함만 더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임과 회의를 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를 잃어버린 회의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0년대는 성탄절의 너무 요란한 행사 때문에 예수님을 모실만한 마음의 빈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요즘에는 너무 무관심합니다.
오늘날에는 먹고 살기에 너무 힘이 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실만한 마음의 빈방이 없지 않습니까?
또 미래와 내년에 대한 너무 지나친 염려와 근심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실만한 마음의 빈방이 없지 않습니까?
또 교회의 일들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 때문에 우리조차도 예수님을 모실만한 마음의 빈방이 없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신 그때나 오늘날에도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를 모셔들일 만한 마음의 자리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정치인들은 누가 이 세상의 주도권을 잡느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또 보통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더 이상 이 땅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까?
이런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까?
또 이런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로서 -지금도 하나님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나옵니다.
아구스도 황제가 자신이 온 세상의 주임임을 드러내게 위해서 천하로 호적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요셉의 고향이자 다윗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은 예수님이 나시기 720년 전 구약성경 미가서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베들레헴은 다윗왕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예수님이 다윗왕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구스도 황제가 내린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아구스도 황제가 자신이 세상의 주관자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린 명령이 예수님이 이 세상의 왕이시고 주이신 것을 드러내게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아구스도 황제는 전혀 하나님에게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뜻대로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역사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의 정치인들도 내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내 뜻대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ㅡ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의 도도한 물줄기 가운데 하나님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가십니다.
-온 세상이 그렇게 날뛰어도---- 그래서 마치 이 세상이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여전히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여전히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왕이시고 주이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이 세상사람들도 하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에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지금도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계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실패도 합니다. 실수도 합니다. 쓰러지기도 합니다. 깨어지기도 합니다.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떨 때는 순간적으로나마 주님을 부인하고 요나처럼 도망하기도 합니다. 주님 없는 곳으로 낮을 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벗어날 수 없는 여러분들의 인생 배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부한다 해도 하나님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여러분의 삶을 이끌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살 소망조차 끊어지는 듯이 보입니다--사탄의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삶 속에서 지금도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교회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 이 교회를 지금도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걱정하기 마시기 바랍니다.
-단지 주님이 이 세상과 교회나 나의 삶을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며 움직여나가고 계심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풍랑에 배저어 항해하는 주 예수님 이 배의 사공이라 나두렴없네 두렵없도다 주 예수님 늘깨어 계시도다 이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찬송가 432장1절입니다)
---그러면 누가 지금도 역사하사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까?
또 누가 예수님을 마음 가운데 모셔들이며-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아래에 먼저 목자입니다. 그는 모두가 호적하러 가서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고 있을때-밤하늘만 바라보며 양떼만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세상에서 기댈 언덕이 없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누리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돈도 없습니다- 권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로서 가장 마음에 상처가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탄의 기쁜 소식이 가장 먼저 이 목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 우리에게 여러 가지 아름과 상처가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탄의 주님은 늘 아픔과 상처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김관성 목사님이라는 분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분은 말하기를 상처는 “상처는 치료해서는 안 된다 ”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상처들조차도 귀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처를 남겨놓으신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남아있는 상처는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동력입니다. 왜인가요? 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매순간 깨닫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어 주는 놀라운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모질게 아픈 상처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돋보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상처는 이웃의 아픔을 “너무 선명하게 보이게 하는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상처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과 긍휼의 자리로 인도하는 복된 아픔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상처는 변형된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 상처는 “생애를 망치기 보다는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새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망할놈의 상처 때문에 그는 더 많은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것이 신자가 누리는 복된 운명이 아닐까요?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조끔 더 생생하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상처 받고 있는 치유자' 어떤가요? 남아있는 상처 치료하지 마세요. 아깝잖아요. 하나님 아버지 손 안에서는 상처도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맘 깊이 담아 두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환경적으로 가난해서 이 세상에 기댈 언덕이 없어서 하늘만 바라보는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기쁨과 위로로 찾아오십니다.
--또 시므온처럼 암울한 역사의 현실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을 기다리는 자에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또 안나처럼 남편을 여의고 평생을 오직 주님만을 사모 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탄생에 무관심한 이때에 상처 입은 마음으로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또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셔서 성탄의 주님을 여러분들의 빈 마음 가운데서 왕으로 모셔 들일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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