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나의 양심으로는 거리킬 것이 없지만, 남의 양심을 생각해서 먹지 말라고 합니다.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신자 중에 약한 자의)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그런데 당시에는 시장에 나오는 대부분의 고기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후에 내어놓은 것들입니다. 이럴 경우에고 그 고기들을 사지도 말고 먹지도 말야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믿지 않는 자의)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믿지 않는 자의)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 말씀은 언 듯 보면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28절에서는 양심을 위하여 우상제물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5절과 27절에서는 양심을 위하여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8절에서 양심은 누구의 양심입니까? 예수를 믿는 자 중에서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입니다. 이들은 우상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숭배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양심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우상제물을 먹을 때 그것에 대해서 상처를 받는 양심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믿음이 약한 자의 양심입니다. 그래서 나의 양심으로는 우상제물이 거리낄 것이 없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서도 옆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 밥을 받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어릴 때 어머니와 기도원에 갔는데, 거기서 누가 제사 밥을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먹어야하나? 말아야하나?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각자의 신앙 양심대로 해야 합니다.
나의 신앙양심으로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신앙양심으로 제사음식을 절대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먹지 말아야합니다. 만일 내 신앙의 양심으로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양심을 어기고 먹으면 죄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 음식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내 양심을 어긴 것이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나의 양심만 아니라 남의 양심을 생각해야합니다.
29절에.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양심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양심이고 또 하나는 남의 양심입니다. 내 양심에는 절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 양심으로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의 양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초대교회 당시에 시장에 갑니다. 그런데 그 시장에 나오는 모든 물건들이 다 우상에게 바쳐졌다고 나온 물건들입니다. 그러면 그 물건들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물건들이기에 사지도 말고 먹지도 말아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믿지 않는 자의)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26절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도 다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믿지 않는 불신자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어야합니다.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믿지 않는 자의)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또 만일 믿는 신자 중에서 믿음이 약하여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식당에 갑니다. 그런데 그 식당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메뉴로 있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아야합니다. 28. 누가 (식당에서) 너희에게 이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신자 중에 약한 자의)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이와 같이 우리에게 두 가지 양심이 있습니다. 나의 양심이 있고, 남의 양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는 나의 양심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양심만 생각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양심보다 다른 사람의 양심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양심을 생각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예를 들어서 술, 담배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 자체를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또 성경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한 곳이 어디에 있느냐, 서양에서는 유명한 목사님들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느냐 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먼저 무엇을 생각해야합니까?
내 양심만 아니라 남의 양심을 생각해야합니다. 다른 나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가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그리스도인들 술, 담배는 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생각해서 먹지 말아야 합니다. 술, 담배 자체가 죄라기보다는 술, 담배를 함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에 상처를 주는 것이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바울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른 사람 혹은 교회에)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른 사람, 혹은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 혹은 교회)남의 유익을 구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양심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나의 양심의 자유가 교회가 덕을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또 31절에서 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여러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그것이 32절과 33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절대 교회에서 거치게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합니다.
여기서 거친다는 말은 걸림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교회에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합니다.
문맥적으로 보면 여기서 거치는 자란 나의 양심만 생각하고 남의 양심을 생각하지 않는 자입니다. 나의 유익만을 생각하고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는 자입니다. 또 교회에서 덕이 되지 않는 자입니다. 여기서 덕이란 말은 건설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덕이 되지 않는 자란 건설적이지 않는 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한분이라도 교회에서 거침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따라하겠습니다.
“나는 교회의 거침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겠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거침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까?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나의 유익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할 때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11장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의 결론은 11장 1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교회의 거침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교회의 덕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당회를 할 때도 십자가를 가슴에 대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고 하면서 말씀들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크게 부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왜 자신의 생각을 죽이고, 남을 먼저 생각하고, 교회의 유익을 먼저 생각했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계실 때 철저히 섬기는 자로 계셨습니다. 섬기는 자란 철저하게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교회의 머리돌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무엇을 하시든지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님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생각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한 단계 더 올라가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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