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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고린도전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관하여(2)(김세윤교수)

by 금빛돌 2014. 11. 21.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관하여(2)

- 2004년 3월호

Imitatio Christi

고린도전서 11장 1절을 중심으로

바울은 우상 음식을 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본받고 있는가(고전 8~10장)

3. 에이돌로쒸타(“우상의 제물”) 문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없고 오직 절대적 금지만 있는가
고린도전서 8~10장에 나타난 바울의 논증을 이상과 같이 해석하는 것은 주류를 이루는 전통적인 다수의 견해다. 즉 에이돌로쒸타는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의미하며, 바울은 신전 경내에서든 가정에서든 에이돌로쒸타 먹는 것 자체는 금해야 할 우상숭배 행위로 보지 않았지만(8:10; 10:25, 27), 그것이 “연약한” 형제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8:10; 10:28) 혹은 그것이 우상숭배의 성격을 띤다면, 다시 말해 실제로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어떤 제의(祭儀) 때의 식탁 교제라면,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0:14~22).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할 때 바울의 말들이 상호간에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고 생각한다. 즉 먼저 신전에서의 에이돌로쒸타 먹기를 원칙적으로 허용한(8:10) 다음, 이를 우상숭배 행위로 치부하고 절대적으로 금지한 것이(10:1~22) 모순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8장에서 바울이 지식 과시자들에게 신전에서 에이돌로쒸타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고 본다. 바울이 8장과 10장 1~22절에서 공히 신전에서의 에이돌로쒸타 취식(取食) 행위를 전적으로 금했지만 개인집에서 먹는 것은 허용했다는(10:23~11:1) 고든 피(Gorden Fee)의 시각이 그런 예다. 그에 따르면, 8장과 10장 1~22절 간의 유일한 차이는 이것이다. 즉 8장에서는 바울이 윤리적 근거 하에 신전에서 에이돌로쒸타를 먹는 것에 반대하는 반면, 10장 1~22절에서는 신학적 근거 하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벤 위더링턴(Ben Witherington)은 이 견해를 좀더 정교화해 에이돌로쒸톤과 히에로쒸톤(신전의 제물)을 구별한다. 그에 의하면 에이돌로쒸톤은 어떤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던 이교도 신전에서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반면, 히에로쒸톤은 성전에서 가져와 집에서 먹는 음식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바울이 에이돌로쒸톤을 금지하고 히에로쒸톤을 허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데이비드 호렐(David Horrell)은 위더링턴의 언어 분석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와 같은 해석 노선에 반대하는데 그의 주장은 옳다: “바울이 10장에서 에이돌로쒸타 먹는 행위를 금지하고자 했다면, 왜 8장에서 강한 자들이 신전에서까지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엑수시아(권리)에 대해 외견상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는지는 납득하기가 어렵다”(Horrell, “Theological Principle,” 99). 사실, 바울이 신전에서 에이돌로쒸타 먹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보고 이에 반대하고자 했다면 먼저 그런 근거 아래 이에 관한 반대 논증을 개시한 후 10장 1~22절처럼 진지하게 이를 경고하거나 아니면 로마서 1장 18~32절처럼 이를 절대적으로 배격했을 것이다. 또한 만일 우상숭배로 보았다면 바울은, 에이돌로쒸타 취식 행위가 약한 형제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데 대해서만 자신이 염려하고 그것의 우상숭배적 성격에 대해서는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는, 그런 인상을 8장에 남기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확실하다. 나아가 8장에서 지식 과시자들에게 원칙적으로 우상 신전에서 에이돌로쒸타를 먹을 권리와 자유가 있음을 전제하지 않은 채, 약한 형제들을 위해 이 권리와 자유를 희생하라고 권하고 있다면 9장에서 그가 타인을 위해 사도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희생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그런 모범을 제시한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필자는 브루스 피스크(Bruce N. Fisk)와 데이비드 호렐의 입장에서 대다수의 견해를 재확인하며 8장 10절과 10장 14~22절의 차이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보고 싶다: 후자의 경우(10:14~22)에는 우상에 대한 실제적 제사가 동반되는 경우의 에이돌로쒸타 취식 행위를 상정하고 있는 반면, 전자의 경우에는 그러한 제사를 수반하지 않는 신전의 사교적인 식사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다수 견해에 대한 가장 격렬한 도전은 피터 톰슨(Peter J. Tomson)과 알렉스 츙(Alex T. Cheung)에게서 나왔다. 이 두 사람은 바울이 여하한 상황 하에서든 에이돌로쒸톤으로 알려진 음식물의 취식 행위를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톰슨은 고린도전서 8~10장의 가르침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고린도전서 8장은 이 문제를 도입하고 10장 1~22절은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아는 음식의 일반적 금지를 재론하는 반면, 10장 25~29절은 이교도 배경 속의 성격이 모호한 음식을 다루고 있다.” 톰슨에 따르면, 고린도전서 8~10장의 쉰에이데시스(양심)는 “의도”(intention)를 의미하며, 음식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의도 때문에, 문의하지 않고도 어떤 것이든 먹을 수 있다”는(10:25, 27) 것이 바울의 취지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톰슨은 바울이 온건한 힐렐(Hillel) 학파의 할라카(Halakha)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Tompson, Paul and the Jewish Law, 208~20, 266). 이 전통에서는 우상숭배 의도가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다루는 일이 허용되었다.
9장 19~22절의 중대 본문에 대한 톰슨의 해석은 뭔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압도적인 사본상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먼저, 20절에서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라는 문구뿐만 아니라 유다이오스(“유대인”) 앞의 호스(“~ 같이”)를 제거하고자 한다. 이어서 그는 20절 전반(前半)과 22절 전반을 대단히 이상하게, 하지만 수상쩍게 번역한다: “내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내가 연약한 자들에게는 연약한 자로 태어났다.”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라는 문구는, 바로 앞의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속에 이미 묵시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뜻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는 말에 불과하다. 톰슨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전자는 “한정적인 문구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뒤의 동의어 반복”이라는 그의 말이, 이를 입증한다. 톰슨은 이런 사실을 들어, 전자(“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가 후대 필사자에 의해 추가되었다는 자신의 견해를 증명한다. 물론 그가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라는 문구를 제거하고자 이처럼 애쓴 것은, 그리스도인 바울조차도 언제나 모세의 율법 아래 있었고 그 율법 밖에 있지 않았다는 자신의 총체적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톰슨 자신이 관찰한 것에 의해 오히려 그 자신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토이스 휘포 노몬 호스 휘포 노몬(“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이라는 문구는, 메 온 아우토스 휘포 노몬(“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이 없더라도 이미, 실제로 21절 전반에서 말하듯이, 바울이 토이스 아노모이스 호스 아노모스(“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될 수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유다이오스 앞에서 호스를 제거하고자 한 톰슨의 노력도 역시 전적으로 무익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토이스 휘포 노몬 호스 휘포 노몬(“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이라는 문구가, 토이스 유다이오이스 [호스] 유다이오스(“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와 평행을 이루는 가운데, 최초의 원문이라는 토이스 유다이오이스 유다이오스(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조차도 역시 토이스 유다이오이스 호스 유다이오스(“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의 의미로 이해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라는 문구는 “[바울이] 참으로, 어떤 면에서든 ‘율법 아래’ 있지 않았음”을 분명히 암시한다고 톰슨도 인정한다. 그리고 톰슨은 로마서 6장 14절; 갈라디아서 3장 23~25절과 5장 18절 같은 구절들까지도 인용한다. 이런 구절들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역설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다소 모호하게 “바울의 묵시록적(apocalyptic) 율법 신학”을 들먹이며 이런 구절들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설명하려고 한다(이상, 같은 책 276~78). 톰슨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그러나 왜 이런 묵시문학적(apocalyptic) 영상(影像)을 실제로 현 단락과 관련시켜야 하는가에 있어서는, 그러한 기타 일부 문맥으로부터 미약한 메아리가 울려온다는 의미 외에, 분명한 게 없다. 오히려 여기에서 가리키는 바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인간 지위 혹은 계급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울이 “유대인”이었다면 그는 고대의 온갖 표준에 따라 유대 율법 “아래” 있었을 것이다. 기실, “율법 아래”라는 표현도 역시 “현실주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현실주의적 의미가 여기에는 더 잘 어울릴 것이다…. 그런 “현실주의적” 의미에서 바울이, 자기가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율법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자기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진술할 수 있었는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278~79).

놀랍게도 톰슨은, 바울이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이었다고 전제하는 바람에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을 왜곡하는 지경까지 나아가고 말았다. 분명 이런 고착화된 견해 때문에 톰슨은 갈라디아서 4장 4~5절도(그에 따르면 우리가 다루는 고전 9장 20절의 “완벽하고도 중요한 평행 구절”이라고 함) 잘못 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 갈라디아서 구절이 고린도전서 9장 20절에 나오는 메 온 아우토스 휘포 노몬(“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의 신빙성을 깎아 내린다고 보았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4장 4~5절의 선언은 그와 정반대이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율법 곧 파이다고고스(“몽학선생”)로부터 속량함으로써 그러한 엄격한 규율 선생 아래서 벗어나게 하는(우케티 휘포 파이다고곤, 갈 3:24~25), 새 시대(aeon)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톰슨이 고린도전서 9장 21절의 중요한 문구 토이스 아노모이스 호스 아노모스(“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 같이”)를 조용히 지나쳐 곧장 그 다음 문구 메 온 아노모스 쎄우 알 엔노모스 크리스투(“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로 넘어간 것도 뭔가를 시사해 준다. 이어서 그는 후자의 문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율법”은 언제나 “유대인의 율법”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 문구의 뜻은 “바울이 이방인처럼 ‘율법 밖에’ 있지 않고 ‘율법을 존중하는’ 유대인”이지만 “그리스도의 관점 아래서 율법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독립적인 하나의 목표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여러 지체들 가운데 하나로 본다(p.280). 이런 설명은 의미가 잘 통하지 않으며 확실히 고린도전서 9장 21절의 바른 설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중요한 단락 고린도전서 9장 19~22절의 톰슨 해석에 관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단락으로부터 바울이 유대인의 할라카 전통을 충실히 지켰다는 자신의 전제를 입증하고자 한 톰슨의 시도는 실패작이며, 그러므로 그가 이런 전제에 의거해 고린도전서 8~10장의 에이돌로쒸타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해석한 것은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분명 톰슨의 이런 전제는 다음과 같은 그의 판단에서 나왔을 것이다: “예수님이 성경의 음식 율법을 어겼으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241면) 바울이 자신을 유대인으로 인정한 것도 그가 음식/정결 율법을 포함한 전반적인 “유대인의 율법 아래” 있음을 의미하였다(279면).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은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 갈라놓음으로써 예수님의 유대인 제자들을 출교한 사도로” 잘못 묘사되었을 것이다(228면). 톰슨의 전제와 같이 예수님과 바울이 유대 율법의 충실한 준행자였다면 그들이 왜 유대인들에게서 그토록 극심한 박해를 받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좌우간 톰슨은 바울의 가르침을 랍비 할라카의 틀 안에서만 해석하려다 보니, 안디옥 논쟁을, 야고보의 사람들이 표방한 샴마이 학파의 입장과 바울이 보여준 힐렐 학파의 입장 간에 일어난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230~36). 그러므로 톰슨은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옹호한 것에 대해서도(갈 2:14) 사실상 그가 힐렐 학파의 할라카 전통을 옹호한 것으로 설명하고 말았다(236)! 이것은, 갈라디아서 1~2장에서 바울이 “열성적인”(샴마이 학파의?) 바리새주의를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회심한 것과 그리스도의 구원 은혜를 증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아 톰슨 자신의 추측에 따라 그를 힐렐파 유대교로 되돌려 놓는 행위이다!
톰슨의 바울 해석에서 근본적인 문제점 하나는, 그의 전제가, 바울의 기독론이 그의 율법 이해에 모종의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톰슨은 바울의 사상에서 기독론이 본질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단언한다(273면). 그러나 이러한 단언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모세) 율법의 마침”으로 묘사하고(롬 10:14) 따라서 이제 모세의 율법과 구별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처사일 뿐만 아니라 바울의 사상을 아주 명백하게 왜곡한 것이다. 이를 논박하느라 우리는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어쨌든 바울 사상에서의 기독론 역할을 근거 없이 부인하고 바울이 모세의 율법과 유대의 할라카를 계속 지지했다는 부당한 전제를 가지고 있다 보니 톰슨은, 에이돌로쒸타 문제를 포함한 율법 전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전혀 이치에 닿지 않게 해석하고 말았다.
톰슨이 유대의 할라카에 입각해 논증을 편 반면 알렉스 츙(Alex T. Cheung, Idol Food in Corinth)은 구약성경에 의거해 논증을 편다. 그의 견해는, 바울이 에이돌로쒸타 먹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고 다만 에이돌로쒸타로 밝혀지지 않은 음식의 취식만을 허용하였다는 것이다. 톰슨이 바울의 지속적인 유대적 성격에 호소했듯이, 마찬가지로 츙도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가 공히 에이돌로쒸타 취식을 금하였다는 사실에 호소한다. 톰슨이 “예수님이 성경의 음식 율법을 어겼으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자신의 교리적 판단을 선언했듯이 츙도 역시 다음과 같은 교리적 판단을 선포한다: ‘바울 자신이 우상 음식을 먹었거나 우상 음식 먹는 것을 묵과했다는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상상할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104면). 바울의 율법 교수에 대한 톰슨의 해석에서 기독론이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듯이 바울의 에이돌로쒸타 가르침에 대한 츙의 해석에서도 기독론은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이 주제에 좀 더 날카롭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 톰슨이 고린도전서 9장 21절에서 토이스 아노모이스 호스 아노모스(“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 같이”)라는 문구를 조용히 간과하고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아래)”라는 문구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듯이, 츙도 이 두 문구를 말없이 넘어간다. 츙과 톰슨 간의 이런 여러 가지 유사점은 톰슨에 대한 위의 비평 가운데 많은 부분이 츙에게도 적용됨을 의미한다.
대다수 견해, 즉 8장 7~10절에서 에이돌로쒸타를 먹는 행위가 약한 형제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 이상 바울이 원칙적으로 지식 과시자들에게 이를 허용했다는 견해에 맞서기 위해, 츙은 고든 피의 비효과적인 설명에 따라 바울이 두 단계에 걸쳐 즉 첫째는 윤리적 근거 하에(8:7~13), 둘째는 신학적 근거 하에(10:14~22) 에이돌로쒸타에 대한 반대 논증을 전개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0장 23~30절을 해석할 때 츙은 고든 피와 결별하고 톰슨에게 가담해, “부지불식간에 우상 음식을 먹은 자는 더럽혀지지 않는” 이상 바울이 그 종교적 내력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음식에 대해서만 취식을 허용했다고 주장한다(152~60, 300). 그러므로 츙은, 이런 유대 원칙에 따라 “양심”을 위해(고전 10:25, 27) 음식의 에이돌로쒸톤 성격을 묻지 말라는 것이 바울의 조언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결국 에이돌로쒸톤 성격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울이 묻지 말라고 조언했다는, 그런 인상을 풍긴다.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서 그려볼 수 있는 바울의 모습은, 그 자신이 바로 이런 종류의 율법주의적 염려에서 해방되었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바로 이런 종류의 근심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율법주의적 염려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울이 어떻게 늘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 같이”(토이스 아노모이스 호스 아노모스) 될 수 있었는지가 사뭇 궁금하다. 톰슨은 고린도전서 10장 23~30절의 바울 조언에 대한 그의 해석을 랍비 할라카로 지지한 반면 츙은 “시장 음식과 불신자의 식사 초대에 대한 (바울의) 다소 결의론적(決疑論的)인(casuistic) 접근법”에 관해 출애굽기 21장 12~13절, 28~29절, 그리고 22장 2절 같은 일부 구약성경 구절들에 호소한다. 그러나 출애굽기에 의한 이런 예증은 견강부회(牽强附會)에 불과하다고 사료된다. “그것이 에이돌로쒸톤임을 알지 못한다면 에이돌로쒸톤을 먹어도 좋다”는 말과, “무엇이든지 차려놓은 것은 묻지 말고 먹으라”는 말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츙과 톰슨은 고린도전서 10장 25절과 27절의 바울의 말이 전자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실제로 후자를 뜻한다고 믿는다. 계속해서 바울은 28~29절에서, 만일 누군가가 이교도 식탁 위의 음식이 에이돌로쒸톤임을 밝힌다면 우리의 “양심”이 아닌 밝혀준 자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웃 “양심”의 존중 의무를 천명함과 아울러, 에이돌로쒸톤으로 알려진 음식에 대한 취식의 자유를 원칙적으로 허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돌로쒸타 취식의 절대적 금지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보편적 입장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틀림없이 이렇게 가르쳤을 것이라는 츙의 거듭된 주장은 얼마나 유효할까? 유대의 증거는 명백하지만 이것이 사도 바울과 유관(有關)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바울은 바로 이 에이돌로쒸타 같은 문제들에 관해, 그리스도 사건에 비추어 현재의 자신과, 예전의 자기 입장 즉 바리새적 유대교 입장을 구별하기 때문이다(예, 고전 7:12~14; 9:19~22; 롬 14:14~20; 갈 2:11~21). 초기 기독교의 에이돌로쒸타 자료에 관한 츙의 포괄적 조사는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러나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강력한 혐오와 사도 교령(행 15:28~29; 참조. 계 2:14,20)의 영향을 감안해 볼 때, 나아가 바울의 칭의 교리가 사도 후 시대에 거의 전적으로 망각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에이돌로쒸타 교훈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다. 게다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보편적으로 바울의 주의 깊고 섬세한 가르침을 무미건조하게 만들어 이를 우상음식 취식의 단순한 금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는 사실과, 그들이 솔라 그라티아/피데(sola gratia/fide)라는 바울의 칭의 교리를 행위隙?義) 교리로 대체하고 말았다는 사실 간에는 어떤 유사점 혹은 모종의 연계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 츙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고린도전서 8~10장을 에이돌로쒸타의 절대적 금지라는 관점에서 단순하게 읽은 츙과 톰슨 자신들이 바로, 부지불식간에 그런 일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음을 실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해석에 호소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려고 하기보다 먼저 우리는 고린도전서 8~10장의 본문 자체를 주의 깊게 주해하고 그 다음 로마서 14장 1절에서 15장 13절; 골로새서 2장 16절; 디모데전서 4장 3~5절 같은 관련 본문들과 바울의 율법 신학 전반을 참고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초기 기독교에 나타난 증거들의 무게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지면 관계상 고린도전서 8~10장에 대한 츙의 잘못된 해석을 낱낱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중대 구절들인 고린도전서 8장 7~13절과 9장 19~22절 및 10장 23~30절에 대한 그의 해석의 일부 문제점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지적했다. 또 하나 유감스러운 점은, 츙이 로마서 14~15장의 의의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서 바울이 유대의 음식 율법을 논했지만 츙은 이것이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다룬 에이돌로쒸타 문제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서 14~15장에서 다룬 유대 음식 율법은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다룬 에이돌로쒸타 문제들보다 범위가 넓다. 그리고 두 단락에 나타난 “강한 자”와 “약한 자” 간의 갈등도 그 성격이 똑같지 않다. 그러나 이 두 주제가 전적으로 상호 무관하다거나, 고린도전서 8~10장을 기록한지 불과 2년 후 고린도에서 로마서 14~15장을 쓸 때, 바울이 전자 속에 기록한 것을 후자 속에 반영시키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두 문단 간에는 너무나 많은 유사점이 존재한다! 사실 로마서 14~15장의 “약한 자”가 고기를 피하고(14:21) 채소만을 먹은 것은(14:2), 그 고기가 에이돌로쒸타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최소한 일부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꽤 높다. 그러므로 모든 음식이 본질적으로 깨끗하다는 바울의 선언(롬 14:14, 20)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할 우려가 있을 경우 고기 먹을 권리와 자유를 보류해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은 우리의 고린도전서 8~10장 해석에 밝은 조명을 주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그런 선언과 가르침은 츙의 명제에 분명하게 반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율법 신학의 포괄적 틀 속에서 그의 에이돌로쒸타 교훈을 고찰해 본다면, 이에 관한 대다수의 견해가 츙과 톰슨의 그것보다 개연성이 훨씬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4. 예수님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모범까지도
우리의 연구에 의하면, 바울이 에이돌로쒸타를 다룬 바로 이 문맥에서 기독론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리처드 헤이스(Richard B. Hays)도 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하나됨과 그리스도 본받기”가 고린도전서 8~10장 및 기타 구절들에 나타난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에서 “두 가지 근본적 표준”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그의 책, The Moral Vision of the NT, 41). 데이비드 호렐은 “기독론적 프락시스” 혹은 “기독론적으로 형성된 타인 지향성”이, 바울의 윤리 전반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 8~10장의 에이돌로쒸타 논의에서도 지도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증하기 위해 한편의 논문을 썼다(“Theological Principle or Christological Praxis? Pauline Ethics in 1 Corinthians 8.1~11.1”). 이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호렐은, 바울이 약한 자들의 양심을 무시한 지식 과시자들의 권리 행사를, “그리스도께 대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였다는 점(8:12), 바울이 타인들의 필요에 부응하고자 “그리스도와 같은 자기희생”을 실천하였다는 점(고전 9:19~22), 바울이 성만찬과 관련해 그리스도의 몸을 언급하며 우상숭배를 논박하였다는 점(고전 10:16~17),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서 11장 1절의 결론부에서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모방하라고 분명하게 요청했다는 점 등을 지적한다. 고린도전서 9장 21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사랑 명령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가운데 호렐은 또한,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서 11장 1절 및 9장 19~22절의 기독모방 주제를 빌립보서 2장 4~11절 및 로마서 15장 3절의 그것과 비교한다.
헤이스와 호렐이 고린도전서 8~10장과 바울의 윤리학 전반에서 이미타티오 크리스티라는 주제가 근본적으로 중요함을 인정한 것은, 우리가 위에서 고찰한 일부 비평적 개신교 학자들의 경향을 개선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시야를 좁혀,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에만 집중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명제는 상기한 축소주의적 학자들의 명제를 실질적으로 개선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심지어 헤이스는 바울이 에이돌로쒸타 문제를 다루면서 “예수님의 권위있는 가르침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강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와 (바울 자신의) 모범을 따라 특권의 지위를 포기하라고 강권”했다는 점에 무게를 두기도 한다(앞의 책, 43). 마찬가지로 호렐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본받기 위해 예수님의 직접적 가르침까지도 무시한다고(고전 9:14~15) 역설한다.
그러나 복음 전파자들이 복음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울이 외견상 어긴 것은(고전 9:14~15; 참조. 눅 10:7/마10:10), 호렐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 가르침의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가르침의 정신 혹은 의도에 순종하기 위한 조처였을 뿐이다. 게다가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문맥 안에는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여러 가지 말씀들과 그의 행동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인유(引喩)들이 있는 이상, 그리스도의 모범에 관한, 헤이스와 호렐이 제시한 바와 같은 좁은 개념은 지탱되기 어렵다. 나아가, 우리는 이를 좀 더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에이돌로쒸타에 관한 바울의 전반적 가르침(8~10장) 가운데 결론적 요약부에 해당하는 바로 이 10장 23절에서 11장 1절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요구(11:1) 직전에, 마가복음 7장 15절 및 그 평행절(고전 10:25,27; 참조. 9:21), 마가복음 9장 42~50절 및 그 평행절 (고전 10:32, 28; 참조. 8:13), 마가복음 12장 30절 및 그 평행절(고전 10:31; 참조. 10:14), 마가복음 12장 31절 및 그 평행절(고전 10:28, 32~33; 참조. 9:19~22), 마가복음 10장 44~45절 및 그 평행절(고전 10:33; 참조. 9:19~22) 같은 예수님의 말씀들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고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던 행동도 이 부분에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고전 10:21; 참조. 9:21). 확실히 이런 사실은, 고린도전서 8~10장에 나타난 바울의 전반적인 에이돌로쒸타 교훈에, 죽음을 통한 예수님의 자기희생(고전 8:11; 10:33/막 10:45과 평행절)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그러한 말씀들도 지도적 원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요구할 때 죽음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강력히 지적해 준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8~10장에 나타난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에서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패러다임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단언할 때 우리는, 바울이 죽음을 통한 예수님의 자기희생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행동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결론은 기타 여러 요소들에 의해 뒷받침을 받는다. 고린도전서 9장 14절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선교 명령을 인용한 것은, 그가 에이돌로쒸타에 관한 가르침(고전 8~10장)을 전하는 동안에도 역사적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사실상 의식하고 있었다는 표시이다. 바울이 인접(직전) 문맥에서 예수님의 실질적 가르침을 인용하며 이를 이혼에 관한 자기 가르침의 원리로 삼았다는(고전 7:10~11) 사실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추론을 끌어낼 수 있다. 바울이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주 예수님의 명령을 크게 숭상했다는 사실은(고전 7:10을 7:12 및 25절과 비교해 보라), 이 추론을 가일층 강화시켜 준다. 결혼 관계가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 동일 문맥 안의 가르침에 관해, 바울은 불신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를 통해 거룩해진다는(불신 배우자를 통해 믿는 배우자가 더럽혀지는 게 아니라, 고전 7:12~14)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러한 진술이 예전의 “열성적인” 바리새인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연합에 의한 성화 원리는, 그의 예전 바리새파 원리 즉 연합에 의한 오염 원리를 극적으로 전복시키고 있다(참조. 스 9~10장; 느 13:23~30; m. Git. 9:2에 나타난, 이방인과의 결혼 반대). 바울이 이 새로운 신학적 신념을, 예수님의 “악명 높은” 습관 즉 죄인들 및 기타 불결한 사람들과 어울림으로써 그들을 “깨끗한” 혹은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셨던 행위(막 1:40~45와 평행절; 2:15~17과 평행절; 5:25~34과 평행절; 마 11:19/눅 7:34; 묵 19:1~10; 기타)와 전혀 무관하게 발전시켰으리라는 것은, 개연성이 지극히 낮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14장 14~20절을 들어, 바울이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음식과 정결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막 7:15/마 15:10)을 암묵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 조명을 준 바 있다. 어법과 사상 구조가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서 11장 1절과 다소 유사한 로마서 15장 1~3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모범을 언급한다. “강한 자”와 “약한 자” 간의 음식 논쟁을 다룬 글(롬 14:1~15:13) 결론부에서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권면한다(롬 15:7; 참조. 14:1). 이 권면은 형제 앞에 “부딪힐 것(프로스콤마)이나 거칠 것(스칸달론)”을 두지 말라는 그의 경고(롬 14:13~23; 참조. 고전 8:9,13; 10:32) 바로 뒤에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 경고에는 “이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스칸달리제인)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마 18:6/막 9:42/눅 17:1)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상기의 권면(롬 15:7)은 아이들을 “영접”하라는,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마 18:5/막 9:37/눅 9:48) 반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18장 5~6절에서도 이 영접하라는 말씀은 스칸달리제인(실족케 하다) 말씀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사실이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바울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는다는 개념 속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포시키고 있는 셈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핍박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바울 자신과 “주를” “본받은 자”(미메타이)가 되었다며 그들을 칭찬한다. 분명 바울이 여기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복음 설교에 대한 반대자들의 박해 앞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인내하시던 예수님의 태도였을 것이다(마 12:28/눅 11:20; 눅 10:21; 참조. 또한 눅 6:22~23; 히 12:2). 바울 자신이 그러했듯이(고후 6:10; 8:2), 이제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이 점에서 주 예수님의 모방자가 되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1장 6절에서 바울은 역사적 예수님이 모방의 대상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핍박을 기쁨으로 참으신 예수님의 태도가 모방의 요점이라는 사실을 아주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복음을 위해 예수님이 감내하셨던 그 핍박은 십자가에 못 박힘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에서 예수님에 대한 대적자들의 반대 및 핍박과 무관하게 오로지 그 절정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그런 핍박이 결국 십자가 사건으로 귀결되었지만) 고집한다면, 이는 대단히 독단적인 해석일 것이다. 이미타티오 크리스티라는 주제에서 바울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 혹은 그의 자기희생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고린도전서 11장 1절과 10장 33절의 직접적 연계성은, 죽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행위를 모방하라는 것이 바로 바울의 강조점임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10장 33절은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죽음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반향(反響)하고 있기 때문이다(막 10:45과 평행절). 그러나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서 11장 1절에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되울림으로써,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을 자기희생 행위로 명시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자기 희생 행위로 해석한 것은, 그가 원시 교회의 케리그마를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 죽음에 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에 의거해 이해했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처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죽으셨다)”(고전 15:3; 갈 1:3~4; 살전 5:9~10; 기타)는 사실을 원시교회의 케리그마로부터 배웠다 하더라도, 그는 틀림없이 주님의 말씀 즉 자기 죽음에 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으로 확증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橘牟?논쟁 전반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바울의 신학 방법론(그의 신학 방법론은, 예수님의 주장과 초기 교회의 케리그마를 다메섹 계시에 의해 확증하고, 그 다음 그 계시를 예수 전승 및 성경에 비추어 해석하거나, 혹은 그 역순을 밟는 방식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두란노서원에서 나온 필자의 책 「바울 신학과 새 관점」를 참조하라)에서도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바울이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무시하고서 오로지 교회의 케리그마에만, 혹은 그 케리그마가 말해 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집중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확실히 이를, 어떤 수학 공식처럼 지상 예수님의 생애와 아무런 연결선이 없는, 고립적인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어떤 추상적 원리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오히려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서 11장 1절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 그 죽음이 많은 사람의 구속을 위한 희생 제사라고 말씀하시고 그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던 예수님을 완벽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서 11장 1절에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던 바로 그 그리스도 혹은 그 예수님을, 그와 우리가 모방해야 할 본보기로 제시한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이나 가르침과 분리해 독립적으로 생각했다는 시각에 우리는 찬성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서 11장 1절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바울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바울이 이 두 절로 고린도전서 8~10장의 가르침 전체에 대한 총결론을 내리면서 자기 죽음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막 10:45과 평행절)을 메아리쳐 울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수님의 희생적 섬김에 관한 최고 절정의 실증으로 생각하고, 이에 따라 그러한 죽음을 그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장 명쾌한 모델로 생각했다는 분명한 암시이다. 10장 32절에서 11장 1절과 9장 19~22절 사이에 평행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 양대 구절들이 공통으로 마가복음 10장 45절과 그 평행구절들을 반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역시 같은 효과를 낳고 있다. 이런 인상으로 인해 우리는 당연히, 여기의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요구를 빌립보서 2장 5~11절(참조. 또한 3:10~17), 고린도후서 8장 9절(참조. 롬 15:1~3) 등의 유사한 요구들과 연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구절들은, 성육신과 죽음 사이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모범적 행동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이 성육신과 죽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본보기적 자기 비움과 자기 내어줌에 관해서만 지극히 인상적인 용어들로 묘사하고 있다. 나아가 바울 서신 전반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강력한 집중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들에서 압도적 인상을 받고 학자들이 고린도전서 11장 1절의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요구에서도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죽음 차원에만 좁게 초점을 맞춘 것은,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 서신 전반에 나타난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주제를 고찰할 때 죽음(과 성육신)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 차원을, 이 주제의 핵심으로 보고 강조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하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 비추어 그 차원이 고린도전서 11장 1절의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요구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도 역시 합당하다. 필자가 여기에서 변호하고자 한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죽음과 사랑이 중심을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하다가, 고린도전서 11장 1절의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요구 안에 내포된, 지상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적 행동을 따른다는 차원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 그 자체가, 자기 죽음에 관한 예수님 말씀의 메아리로서, 우리의 이런 행동을 막고 있다.
웨더번(A. J. M. Wedderburn)의 논술에 의하면, 바울의 이방인 선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죄인들을 받아들이신 데 따른 행위였으며 이는 바울이 그 이전에 헬레니스트들(Hellenists)에게서 배운 것이었다고 한다. 월프(C. Wolff)는 예수님과 바울 간의 유사점들을 보여 주는, 생애와 사역의 네 가지 측면을 기술하며(박탈당함, 독신생활, 겸손한 섬김, 핍박당함), 바울이 예수님의 “진정한 추종자”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월프의 판단에 동의를 표하며 웨더번은 좀더 나아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한 미덕의 목록들은(고전 13:4~7; 갈 5:22~23) “궁극적으로 지상 예수님의 성품을 기억한 데서 유래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Paul and Jesus: Similarity and Continuity,” in Paul and Jesus, 180). 그러므로 우리가 선정한 고린도전서 8~10장의 문단에서는 물론, 바울 서신 전체라는 거대 문맥에서도 바울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고자 했다고 우리는 확언할 수 있다. 동시에 웨더번은, 바울의 사상에서 예수님 이야기 속의 자기희생적 죽음이 중심을 차지했다고 역설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나머지 지상 생애와 예수님 이야기의 타세적 부분 양자를 평가했다”고 진술한 후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웨더번, 같은 책, 187면). 그러나 웨더번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한 바울의 단언들에서 예수님의 지상 생애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고 논한다:

만일 예수님이 지상 생애에서 자기 과시적으로 행동하셨다면, 성육신에 나타난 자아 부인 모범에의 호소는(고후 8:9; 빌 2:6~7)… 최소한 방해 내지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행동하셨다면, 바울의 회심자들이 도대체 예수님의 어떤 모범을 따라야 하느냐고 물으며, 자아 부정적인 천상적 예수님보다 자아 추구적인 지상적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고 고집한다 하더라도, 이를 가당찮은 행동이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웨더번, 앞의 글, 182면).

바로 이 논증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지상 생애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나머지 지상 생애 간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좌우간 우리가 고려한 이런 모든 요소들은, 그리스도 모방에 관한 사고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뿐만 아니라 지상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죽음은 자기 내주기 사랑에 관한 그의 가르침의 최고 실증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기희생적 삶 전체의 결론이었다. 그 까닭에 바울은 예수님의 이 죽음이 그의 도덕적 권면에 가장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이에 관한 톰슨(M. Thompson)의 주장은 이를 잘 설명한다:
바울의 사상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종말(eschaton)의 개시였으며 따라서 의의상(意義上) 수난(Passion) 이전의 그의 모든 언행을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십자가상의 온전한 헌신 모범을 거론할 수 있는 마당에, 예수님의 사역 중에 나타난 사랑이나 겸손 혹은 긍휼의 행위를 지적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부활을 언급할 수 있는 마당에, 어떤 치유 권능을 운운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죽음 이전, 진실의 입증(부활) 이전, 예수님이 말하고 행동하셨던 모든 것은, 그리스도 사건(Christ?vent)과 비교해 볼 때 그 의의가 창백해진다(Clothed with Christ, 73면).

이 논의는, 바울이 윤리적 권면에서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죽음에(그리고 좀 더 확대해, 성육신에) 초점을 맞춘 이유를 명료히 밝혀준다. 그러나 또한 이 논의는, 바울이 어떻게 해서 지상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적 행동에 관한 분명한 인유(引喩) 내지 메아리를 충분히 남기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죽음으로 요약될 만큼 그 죽음과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는지도 명료히 밝혀준다.
바울이 복음서 전통의 아콜루쎄인(따르다)이라는 용어를 빼고 그 대신 오로지 미메테스(본받는 자)라는 용어만을 사용한 이면에는 아마도, 바울의 사고에서 그리스도가 더 이상 지상적 인물이 아니며 단순한 지상적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죽음(과 성육신)에 대한 이런 집중 현상이 놓여 있을 것이다. 물론 바울이 그리스도 모방이라는 개념 속에 지상 예수님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따른다는 뜻도 포함시켰지만 말이다.

5. 결론
이제 우리의 연구 결과를 취합해 그 결과들에 함축된 의의를 고찰해 보자.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에이돌로쒸타 문제를 다룰 때,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절대적 요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님은 이 절대 요구를, 이중 사랑 명령(막 12:28~34과 평행절), 기타 말씀(막 9:42~50과 평행절; 10:44~45과 그 평행절), 음식과 정결에 관한 가르침(막 7:15과 평행절) 뿐만 아니라 이런 가르침을 실례로 보여주신 그의 행동들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고전 8:11), 그리고 죄인들과 자유로이 교제를 나누신 행위 등에서 직접 구현하셨다. 바울의 글이 예수님의 그러한 말씀들과 그러한 행동을, 핵심 구절들인 고린도전서 8장 13절과 9장 19~22절 및 10장 23~33절에서 유달리 또렷하게 반향(反響)하는 가운데, 바울이 그런 구절들에서 자신을 고린도인들이 모방해야 할 본보기로 제시하고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방자라고(11:1) 말하고 있는 이상,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함에 있어서 바울이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과 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끝에 가서, 많은 사람의 구속을 위해 자기 목숨을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메아리쳐 울리는 가운데(막 10:45/고전 10:33), 그리스도의 모방자인 자신을 본받으라고 요구하면서, 에이돌로쒸타에 대한 긴 논의에 총결론을 내린다. 이를 보면서 우리는 바울의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사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이 예수님의 구체적인 가르침과 행동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에 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에 입각해 그 모든 것의 정점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운데, 고린도전서 8~10장은, 바울의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사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핵심을 차지한다는 것을 우리가 시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물론 그 죽음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으로부터 절연된 고립적 사건이 아니라 삶과 가르침의 정점이다. 분명 바울의 사상에서 십자가상 죽음을 통한 예수님의 자기희생은 그의 모범적인 자기 내어주기 삶의 절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 교훈의 최고 실증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학뿐만 아니라 바울의 윤리학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심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한편, 우리는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랐다는 사실에도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본 연구의 이 주요 결과 외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부속적 결과를 확언할 수 있다. (1) 본 연구는 바울의 에이돌로쒸타 논의에 관한 전통적인 대다수 견해를 확인해 주었다. (2) 또한 본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리스도인의 사랑 의무 간에 균형을 아주 잘 잡아주고 있는, 에이돌로쒸타에 관한 바울의 탁월한 조언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개인적으로 수용한 데서 나온 결과물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메아리를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시사할 뿐만 아니라 사실 “그리스도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라는 주장을 통해(고전 9:21; 11:1) 우리의 본문에서 이를 직접 지적한다. (3) 이런 결과들보다 가일층 의의 깊은 것은 아마도, 마가복음 8장 15절 및 그 평행구절, 9장 2~50절 및 그 평행구절, 10장 45절 및 그 평행구절, 12장 28~34절 및 그 평행구절 같은 핵심적인 예수님 말씀들의 진정성(authenticity) 옹호론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바울이 이런 말씀들을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분명 바울은 마가복음 10장 45절과 그 평행구절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를 우리의 본문에서 두 번이나 메아리쳐 울릴 정도로 무척 높이 평가하고 있었을 것이다(9:19; 10:33; 참조. 딤전 2:5~6).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바울의 이해에서, 예수-바울 논쟁에서, 게다가 부활이후교회(post?aster Church)의 케리그마 부상에 관한 전반적 문제에서, 심지어 역사적 예수님에 관한 탐구에서까지, 이런 사실이 함축하고 있는 큰 의미는, 우리가 힘주어 강조해야 마땅하다.
이런 결과들과 함께, 본 연구는 그 밖의 두 가지 사항과 의미 깊은 관계가 있다. 바울이 그의 가르침에서 예수님의 일부 구체적인 말씀과 모범을 알고 효과적으로 사용했음이 분명하게 밝혀진 이상, 우리는 바울의 신학과 윤리에서 역사적 예수가 중요하였다고 역설해야 한다. 나아가, 바울이 이방인 선교 현장에서 직면한 에이돌로쒸타 문제를 다루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적 행동을 지도 원리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선교 상황에서도 해석학적, 신학적 노력의 경주(傾注)에 패러다임적 의의를 부여한다.
바울의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주제에 관한 연구는, 그 주제와 바울의 또 한 가지 주제 즉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에이콘)이신(고후 4:4; 골 1:15; 참조. 빌 2:6) 그리스도의 형상(에이콘)으로 화한다는(쉼모르퓌스싸이) 혹은 변모한다(메타모르퓌스싸이)는 개념(롬 8:29; 고전 15:49; 고후 3:18; 빌 3:20~21; 골 3:9~10; 참조. 엡 4:22~24), 이 양자 간의 관계를 고찰해 보지 않는다면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이 두 주제를 상호 어떻게 연관시켰을까(참조. 빌 2:1~30과 3:10~11; 고후 4:10)? 이 문제는 학계에서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필자는 후자의 주제(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한다)가 구원론과 윤리학을 포괄하는 바울의 중요한 주제임을 역설한 바 있다. 이 문제는 후일을 위한 과업으로 그리고 본 논문의 속편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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