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오늘 본문부터 14장까지는 예배시간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 예배시간에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그 다음 고전11장 17-34절은 예배시간에 행해지는 성찬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 12장부터 14장까지는 예배시간에 일어나는 방언의 문제와 은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 당시에 예배시간에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사도바울은 항상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칭찬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기억하고, 내가 너희에게 전해준 그 전통들을 잘 지키고 있음으로 너희를 칭찬한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교회에서 내려오는 전통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들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좋은 전통들을 교인들에게 전해주었고, 또 그 전통들을 어느 정도 잘 지켜왔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당시에 내려왔던 전통 중에서 여자들이 예배시간에 수건을 쓰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예배시간에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당시에 예배시간에 여자들이 왜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렸습니까? 머리에게 수건을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남자의 권위)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천사란 예배시간에 예배를 지켜보고 있는 천사들을 말합니다. 예배시간에 우리의 예배를 지켜보고 있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그들이 남자의 권위 아래 있다는 표를 머리에 두라고 합니다. 바로 여자가 남자의 권위아래 있다는 표시가 당시로서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의 권위아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여자의 머리 위에 남자가 있다는 표시로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말입니다.
또 8절과 9절과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남자의 권위)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여기서도 남자가 여자에게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않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니, 여자는 그들이 남자의 권위 아래 있는 표시로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도 그러면 여 성도님들이 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사도바울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를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전통이라고 합니다. 전통이란 그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형식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14장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여성은 교회에서 주일학교사나 소그룹리더나 구역강사조차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리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니까 교회에서 여성들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잠잠히 있으라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여성이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지는 말아야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는 남자가 맡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여성목사안수에 대해서 교단마다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통합측은 이미 여성목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창조의 섭리를 따라서 여자는 남자의 권위아래 있어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이슬람교인들처럼 잘못 적용하면 되지 않습니다. 이슬람사람들은 무조건 여자는 남자의 권위아래 있어야한다고 말하면 너무나 심한 여성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1)그러면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 여자는 남자의 권위 아래 있어야한다는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첫째는, 이것은 우월이나 아니라 역할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여자가 남자의 권위 아래 있어야한다는 말은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가 열등하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창세기에서는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돕는다는 말이 “에셀”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하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같은 “에셀”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고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다” 하는데, 여기서도 도움이라는 말도 “에셀”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를 돕는다고 해서 그것을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하나님을 우리 보다 못한 열등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에 열등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들이 성령하나님과 성부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주장을 하신다면 이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는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는 말은 절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돕는 여성들이 남자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남성들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직관적입니다. 그러니까 동시에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감각적인 면에서는 더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분들은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하나님께서 더 지혜롭게 만드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여자 말을 잘 들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은 비록 여성들이 돕는 배필로서 더 지혜로울 수 있지만, 절대 남자의 권위 위에 있거나 남자를 조종하려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여성은 복수하려는 다윗을 잘 설득해서 용서하는 자로 만든 아비가일처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 지혜로운 여성으로서 자신의 지혜로 남자의 권위를 세워주는 모든 여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또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 여자는 남자의 권위 아래 있어야한다는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둘째는, 남자는 섬김과 희생의 권위를 나타내야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말씀하는 권위는 항상 섬김의 권위, 희생의 권위입니다. 이 말씀에서 여자는 남자의 권위아래 있어야한다고 하니까 이 말씀을 세상적으로 이해를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권위자가 부리는 자입니다. 권위아래 있는 자는 항상 희생당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오히려 권위 있는 자가 더 섬기고 희생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는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고 하면서 남자가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희생하여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남자는 권위자로서 아내를 위해서 더 희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하고 섬기는 남자의 권위아래 아내는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머리에 수건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머리에 수건을 쓰는 그 전통의 의미는 지금도 내려 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에서 여성들은 더 지혜로운 분들로서 남성들의 권위를 세워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와 가정에서 남성들은 여성보다 더 희생하고 섬겨서 참된 권위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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