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관해서 다루었습니다. 우상숭배는 절대 되지 않지만,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라고 했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세 가지의 원리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의 원리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서로의 다른 견해에 대해서 비판하지 말라는 원리입니다. 만일 서로 의견이 다를 때 그 의견에 대해서 비판한다면 그를 받으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공동체적 유익과 사랑의 원리입니다. 내가 얼마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공동체의 유익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포기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얼마든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평생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같은 주제를 가지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장 1절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1절에서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라고 하는데, 이것은 특별히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하다는 말입니다(고전8:9).
또 1절에서 “내가 사도가 아니냐”라고 합니다.
여기서 왜 사도바울이 내가 사도가 아니냐 라고 합니까? 그것은 당시 고린도교회안에서 바울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1절에 “(내가) (부활하신)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 합니다. 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고 합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자신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2-5절까지 자신이 자유인과 사도로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리를 이야기합니다.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다른 교회 교인들은 몰라도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는 분명히 사도라고 말할 수있다는 말이다)
3. 나를 비판하는 자(사도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자들)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여기서는 고전 8장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또 여기서는 사도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베드로와 같이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결혼을 반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또 여기서는 고린도교회의 거짓선생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생이며 사도라고 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시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과 바나바만 열심히 죽도록 일했습니다. 여기서도 사도바울이 그 거짓선생들과 같이 일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음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 7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사례금을 받지 않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7. 누가 자기 비용(자비량)으로 (영적인)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말씀의) 포도를 심고 그 열매(사례금)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영혼의)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사례금)을 먹지 않겠느냐
여기서 군 복무, 포도를 심는 것, 양떼를 기르는 것은 모두 복음의 사역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복음의 사역을 하고 자비량을 하지 않고 사례금을 받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사역자가 복음 사역을 하고 사례금을 받는 것은 구약율법에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곡식을 밟아 떠는 소는 그 일 자체만으로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수고하는 소에게 망을 씌워서 부담을 주지 말라고 구약성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역자가 사역을 하는 것 자체로 힘이 드는데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말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역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사역자가 사역을 하는 것도 힘이 드는데, 그에게 생계에 대한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여기서 신령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육적인 것은 사례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너희에게 사례금을 받는 것이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바울은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었습니다.
또 결혼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었습니다.
또 말씀을 전하고 사례금을 받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잇는 그 자유와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고린도교회가 신앙적으로 매우 어리고 약하기 때문에 사례금을 받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례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될까하여 그 자유와 권리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둘째는, 사도바울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다 사용하면 천국에서 상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18절에 있습니다.
18. 그런즉 내 (천국의) 상(급)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사도바울은 그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이 천국의 상급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차원에서 보았을 때 천국에 가면 대 역전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땅에서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목사님들은 천국에 가면 아무 상급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영광도 없이 섬긴 목사님들이 천국에서 가서 더 큰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3)사도바울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은 얻고자 함입니다.
19절입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지만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유와 권리에 대한 지나친 주장 때문에 사람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해서 사도바울은 그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우리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지만, 사랑을 인하여 포기해야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첫째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서 음식을 먹을 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우리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혹 어떤 음식을 먹는 것이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까? 그것이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조차 포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둘째는, 내가 마음대로 말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 내 말이 조금이라도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까? 또 내 말이 공동체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 생각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조차도 포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셋째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행동조차도 포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행동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형제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하고 싶은 모든 행동도 포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싸움은 누구와의 싸움이겠습니까?
우리는 나와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싸움은 바로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사도바울은 어떻게 이야기를 합니까?
“고전9: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여기서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몸을 친다는 말은 권투경기를 할 때 상대방의 눈 아래를 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몸을 친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권투경기를 하듯이 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몸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이 몸이 아닙니다.
내 안에 내가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육체적인 욕구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마치 권투경기를 하듯이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이라고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이 완전히 녹다운이 될 때까지 자신과 더불어 치열한 싸움을 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무엇과 싸움이니까?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싸웁니다. 또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신의 권리와 싸웁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반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자유가 침해를 받을 때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싸웁니다.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권리가 침해를 받을 때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싸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반대로 자신에게 있는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기 위해서 그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자신을 완전히 쳐서 복종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7절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얻은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어떤 상급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하나님께 상급을 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강명식이 부른 승리라는 노래의 가사가 있습니다.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더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을/
절연히 잘라버리고/오직 주님만 따라 가는 것/그것이 바로 승리라네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하고 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힘겹게 억누르고/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그것이 바로 승리라네
결과가 어떠해도 주님만 빛나시고/주님평안 내 안에 있으면/그 것이 바로 승리라/
/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허옇게 잠재우고/오직 주님만 따라 가는 것/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주님만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이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진정한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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