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1절에 보시면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라는 말입니다.
당시에 시장에서 나오는 고기들 중에서 신전에 제물로 바쳤다가 나온 고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먹을 것이냐 말 것이냐 에 대해서 고린도교회 안에서 두 가지 대립되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견해입니다. 또 하나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자들 대해서는 지식이 있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믿음이 강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자신은 지식이 있고,믿음이 강한 자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것이 4-6절까지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나무나 돌이나 금으로 우상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이 땅에서 신은 오직 하나님한분밖에 없습니다. 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가운데서 모두 이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7절에 보시면 고린도교회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래서 고린도교회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절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 하는데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정답이겠습니까?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는 것이 정답입니까? 아니면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기에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답입니까?
--이 문제는 사실 정답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말씀했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정답이 없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도 있고, 또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는 “아디아포라” 라고 해서 “규정할 수 없는 진리”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아디라포라의 문제입니다. 즉 이럴 수도 있고, 또 저럴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은 말씀은 이럴 수도 있고, 또 저럴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커텐을 하는데, 어떤 색을 해야 합니까? 정답이 없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절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교회에는 절대 커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무엇이 정답입니까? 이것도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문제가 될 때 대부분 이럴 수도 있고, 저절 수도 있는 문제들 때문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미국에 어떤 교회는 카페트를 하는데, 붉은 색을 할 것인가? 푸른색을 할 것인가를 두고 크게 싸웠다고 합니다. 푸른색을 주장하는 분들은 시편23편을 근거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라고 해서 교회에서는 푸른 카펫을 깔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붉은 색을 주장하는 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붉은색이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피를 상징하는 붉은 카펫을 깔아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엇이 정답입니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의 원리입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상의 제물을 먹든지, 아니면 먹지 안 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탐욕을 위하여 먹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한다는 자도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고집 때문에 절대 먹지 말아야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반대로 나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나의 개인적인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우상의 제물은 먹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 도 있는 문제 있어서 그것이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둘째는,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서로의 의견들에 대해서 절대 비판하지 말라는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주장만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절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가 당시 로마교회에도 있었습니다.
로마교회에서도 구약성경에서 금지하는 돼지고기와 같은 음식을 먹지 말아야할 것인가? 아니면 먹어야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믿음이 강한 자들은 구약의 율법은 완성되었기에 돼지고기는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주장했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약한 자들은 구약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고기는 절대 먹지 말아야하고, 체소만 먹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돼지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믿음이 강한 자들은 자신들만 옳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자라고 하면서 믿음이 약하여 체소만 먹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비판했습니다.
“야 웃긴다, 돼지고기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냐, 그리고 구약의 율법은 이미 완성되지 않았나-그런데 왜 체소만 먹어야한다고 주장하느냐-그렇게 믿음이 약하냐하고”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비판하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롬14:1. 믿음이 연약한 자(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한다고 하는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돼지고기)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느니라 3. (돼지고기를) 먹는 자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자는 (돼지고기를)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여기서 “업신여긴다”는 말은 그 사람을 나의 눈 아래로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깔본다는 말입니다. 또 여기서 비판한다는 말은 마치 그 사람이 지옥에 갈 사람처럼 정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서로의 다른 견해에 대해서 업신여거나 비판하지 말하고 하고 있습니까?
나와 서로 의견이 다른 자도 하나님께서 받으신 자이고, 예수님께서 받으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용납하신 형제들에 대해서 나의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업신여거나 비판한다면—그것은 그를 받으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그를 받으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해서 나의 눈 아래로 보고 깔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또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 비판하고 비난하면 그것도 얼마나 큰 죄입니까? 우리가 이일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서 나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업신여기거나 지옥 갈 자처럼 비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하나님을 비판하는 자와 같습니다.
//또 오늘 본문 고린도 전서 8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1. 그러면 네 지식(우상제물을 먹어도 된다는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우상제물을 먹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나와 의견이 다르더라도 그 형제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입니다. 그래서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마음에 상처를 준다면—그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비난한다면—그를 받으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비판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또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면-그를 위하여 죽은 신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또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모두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서로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원리입니다. 또 두 번째는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서로의 다른 의견들에 대해서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합니다.
3)마지막 세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적 유익과 사랑의 원리입니다.
고전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라
//여기서 보면 모든 것이 가하나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면 우상제물을 먹는 것이나 또 먹지 않은 모든 것이 다 옳은 것이고,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옳고, 저 것도 옳지만 그것이 모두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또 모든 것이 다 옳고 가능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원리는 나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의 원리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는 주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고린도교회에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여, 이제 죽을 때까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우상에게 바쳐진 제물-고기)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여러분 이렇게 내가 아무리 옳다고 주장을 하지만, 나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여 나의 생각을 포기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3장 5절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실습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곳이 커텐을 달아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달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손을 들어보십시오,
첫째는 무슨 원리를 생각해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원리입니다.
둘째는,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하는 원리입니다.
커텐을 달아야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렇지 않은 분들을 비판하지 마시고, 또 커텐을 달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그렇지 않은 분들을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옆에 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나의 주장도 맞고, 당신의 주장도 맞습니다” 라고 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주장도 맞고, 당신의 주장도 맞습니다”라고 서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제일 중요한 원리가 무엇입니까?
공동체적 유익과 사랑의 원리입니다.
커텐을 다는 것이 절대 나의 유익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해서 필요하다면 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해서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달지 않으면 됩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서 모든 것을 서로 사랑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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