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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호5:8-6장3절)

by 금빛돌 2014. 9. 20.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느 한곳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불안한 이 세상에서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안전 책을 만들어 그 성안에서 살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안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돈이 우리의 안전을 지켜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나를 지켜주는 성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또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리가 자신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좀 더 안전한 직장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안정된 직장이 나를 지켜주는 성이라 믿고 살아갑니다.

또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믿는 사람을 나를 지켜주는 성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물론 돈이나 안정된 직장이나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나 자리나 사람들을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돈이 있고, 안정된 직장이 있고, 또 나가 믿는 사람들만 있으면 굳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여기서 기브아, 라마, 벧아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입니다. 기브아, 라마, 벧아윈은 이스라엘의 가장 중간에 있는 도시로서 북쪽에서 적이 쳐들어와도 안전하고, 남쪽에서 쳐들어와도 안전한 곳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강남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브아에 거하기만 하면, 또 라마에 거하기만 하면, 벧아윈에 거하기만 하면 안전하다고 믿었습니다. 또 그 성들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라고 합니다. 여기서 뿔나팔이나 나팔은 전쟁이나 심판이 있기 전에 미리 경고용으로 부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 벌하는 날(심판하는 날)에 에브라임(이스라엘을 가리킴)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사람들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소리가 울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무엇을 이야기 해줍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이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사람들이 생각하는 안전한 성이 그들의 안전을 영원히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고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사람들이 생각한 안전한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들은 돈만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 통장에 돈이 있고, 또 아파트가 있고, 또 땅이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망하더라도 3대는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합니다. 또 하나님을 믿더라도 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아쉬운 마음이 없습니다. 또 안정되고 잘 나가는 직장이 있습니다. 또 든든한 남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나를 영원히 안전히 지켜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해서 더 이상 아쉬운 마음이 없습니다.

/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습니까?

네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그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10.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11. 에브라임(이스라엘의 대표지파)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여기서 보면 유다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에브라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보다 사람의 말(명령)을 더 따르고 믿고 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심판은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이스라엘의 대표적 지파-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킴)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이 좀과 같고 썩이는 것과 같이 임한다고 합니다.

좀이 무엇입니까? 좀은 소리도 내지 않고 눈에 잘 보이지 않게 조용하게 임합니다.

또 섞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건이 썩을 때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처음에는 좀과 같이 썩이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임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임합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를 보셨습니까? 더욱이 젊은 사자를 보셨습니까? 사자는 갈기가 있어서 사자가 덮칠 때는 모두 보이게, 그리고 소리 나게 덮칩니다. 또 젊은 사자가 사냥감을 움켰을 때는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처음에는 좀처럼, 썪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소리 없이,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내면세계 속에 임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사자같이 눈에 보이게 외부에 임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하실 때는 아무도 그 심판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이 눈에 보이지 않게 임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좀도, 썩이는 것도 자세히 보면 보이듯이,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도 자세히 보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은밀한 가운데 좀같이, 썪이는 것같이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의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예전에는 기도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도하기가 싫어집니다. 기도하려 왔는데도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었는데 이제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예전에는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한 말씀이라도 놓치지 않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말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은밀한 심판의 은밀한 경고입니다. 예전에는 모든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어떤 말씀을 들어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내게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우리는 찬송을 부를 때 나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습니. 정상적일 때는 그 가사 한 절 한 절이 나의 신앙고백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찬송할 때 노래만 하고 전혀 내 신앙고백이 담겨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심판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때 깨달아야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경고의 소리를 듣고도 보고도, 하나님의 심판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기도해야지, 말씀대로 살아야지,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잠시 생각하고 느끼다가도 그냥 넘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당장 하나님이 없더라도 내게 돈이 있습니다. 안정된 직장이 있습니다. 또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를 듣고도 무시하고 그냥 넘어 갑니다

그러다가 언제서야 돌이킵니까?

정말 내가 믿었던 것, 붙들었던 것,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돌이키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15절 하반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5. --그들이 고난 (의지하던 재물을 다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눈에 보이는 고난)받을 때에 (그때서야)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믿고 의지했던 것들을 다 잃어버리는 것 같은 눈에 보이는 심판을 받더라도 그때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61절과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우리가 아무리 잘못하고, 죄를 짖더라도,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자와 같이 임하여 우리를 완전히 찢으신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시 우리를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세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죄를 회개하고--여호와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하나님께서 심판에서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나중에는 우리를 심판 받을 때보다 더 높이 일으켜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5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를 건져 낼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6장에 보면 우리가 죄를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우리를 이틀 만에 삼일 만에 금방 낫게 해시고 더 잘되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절대 심판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가 금방 낫게 해 주신다는 말씀은 어떻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 같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심판의 채찍을 내려서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바로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로 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고자 하는 그 모든 은혜와 복을 우리가 누리기를 게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내면적 경고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아니면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외부적 심판을 받고 계십니까?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건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받아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높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심판가운데서도 회복도 주시고, 은혜와 축복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1)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조건 형식적인 예배의 자리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61절에서 호세아는 이스라엘백성에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었던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우리는 이미 여호와께로 와 있지 않은가? 안식일도 잘 지키고, 제사도 잘 드리는데,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하는가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께서도 내가 이미 하님께로 돌아와 있는데, 이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말씀은 절대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예배의 자리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성전의 마당만 밟고 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하나님께서는 성전 마땅 만 밟는 사람은 보호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1,2). 하나님은 이 예배시간에 여러분들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분도 예외가 없이 다 하나님을 만나보시고 돌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두 번째로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씀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6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합니다. 또 호세아4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말은 말씀의 자리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씀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먼저 말씀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선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합니다. 우리교회 젊은 성도님들은 연세 드신 성도님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정말 많이 읽고 계십니다. 벌써 성경을 몇 독 째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이번에 성경통독을 하는 가운데 느낀 것은 말씀이 이해가 되건 되지 않건 우선 많이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독 하면서 느낀 것은 이 말씀을 우리가 깨닫지 않고 들으면 마치 소귀에 경 읽기와 같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다음에는 성경을 공부함으로 말씀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414절에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호세아 414절에서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고 하는데,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는 것도 있지만,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깨닫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어야합니다. 또 성경을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망합니다.

/호세아시대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호세아시대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많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128절을 옛날성경으로 보면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고 합니다. 이것을 표준새번약성경에서는 수만 가지 율법을 써 주었으나,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호세아 시대 때 수많은 말씀을 주신 것이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들이 그 말씀을 자신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듣고 깨달으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돌이키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호세아 시대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망했습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마치 내게 주시는 말씀 같다고 느끼는 것이 축복입니까? 아니면 저주입니까? 그것은 축복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도무지 그 말씀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도리어 저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축복이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또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회개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71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회복)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고 합니다.

대학 다닐 때 허리춤에 종기가 생겼습니다. 허리띠가 있는 부분이라 걸을 때마다 너무 가려웠습니다. 그래서 가렵지 않기 위해서 피부약을 발랐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시원했는데, 여전히 가렵고 아팠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는 분을 통해서 고신대복음병원에 가서 공짜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간단한 치료일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취 없이 먼저 종기 윗부분을 메스로 잘랐습니다. 종기의 생살을 메스로 자르는데, 그 시간이 정말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제 다 된 줄 알고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의사분이 하는 말이 이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종기 안에 고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취고 없이 그 고름을 쥐어짰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프다는 말조차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안에 있는 고름이 물컹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실로 꿰맸습니다. 아팠지만 정말 시원했습니다. 완전 치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 피부과의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외과의사이십니다. 우리 안에 상처가 있습니까? 왜 아픔이 있습니까? 물론 인간적으로 이해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죄라고 하는 고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진정 회복을 원하십니까? 마음의 상처의 치유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안에 죄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해야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로 인해서 잃어버리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가 죄의 회개로 인해 그 어떤 수치와 모욕을 당하더라도 죄 자체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또 진정한 회개는 절대 다른 사람을 향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안의 죄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이제 내 삶을 180도 완전히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회개함으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참된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맛보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6:4. 에브라임아(이스라엘)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사랑)()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사랑)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러분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와 있습니까?

이 말씀에 보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은 내 방식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백성들과 유다백성들에게도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은 마치 아침 구름과 같이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이렇게 금방 없어지는 사랑으로 만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5절을 보시면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6절에 보시면 나는 진정한 사랑을 원하고 형식적인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호세아서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내가 인간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돌아오기까지 내 모든 것을 희생하기까지 사랑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61절에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자신을 배반하여 다른 남자에게로 간 원수 같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떠난 원수 같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호세아서를 보면 호세아를 떠난 원수 같은 아내 고멜은 이스라엘백성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을 배신하여 떠난 원수 같은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호세아32절을 보면 호세아는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많은 돈을 지불해서 그를 데리고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원수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의 피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 사랑은 쉽게 없어지는 아침 구름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구나--네가 그런 사랑을 했다고 하면서 내게 돌아왔다고 생각하느냐-착각하지 마라-나는 네가 그런 인간적인 사랑을 하면서 내게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려도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만일 네가 인간적인 사랑만 한다면 내가 너희를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너는 내가 너에게 원하는 참된 사랑의 자리로 돌아오라-그것이 진정으로 내게로 돌아오는 것이다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된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고,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며,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는 놀라운 회복의 은혜를 입으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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