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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약함의 유익(고후12:5-10)

by 금빛돌 2014. 9. 12.

오늘 본문 앞 고후121-4절까지 보면 바울은 천국을 직접 체험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체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습니다. 또 많은 병자를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믿음을 가진 바울이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그가 믿음으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에게는 그가 해결하지 못한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까지 살려주었던 바울이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병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바울이 그 병을 위해 기도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세 번 바울이 기도했다는 것은 단순히 세 번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낫게 해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사도바울의 병을 고쳐주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을 이렇게 말합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9절에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도바울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지만, 왜 육신의 약함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육신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자신의 약함을 도리어 자랑하고(9), 또 심지어 자신의 육신의 약함을 기뻐하고 있습니다(10).

이번 교역자수련회에서 옥한흠목사님의 목사가 목사에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옥목사님은 사역자는 자신의 약함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그것을 잘 모를 때는 남들에게 물어서라도 자신의 약함을 잘 알고 있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자신의 약함이 사역의 거침돌이 아니라 사역의 디딤돌이 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을 철저히 감추고 숨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의 약함을 내 앞에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너의 약함을 하나님께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너의 약함을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도에게 있어서 약함의 유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약함은 참된 믿음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약함은 우리의 믿음에 큰 유익을 줍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믿음을 내 안에 있는 자신감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으면 내게 믿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말했습니까?

1717절에 아브라함이 엎드려 (피식)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이때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롬4장에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내 안에 있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자녀를 낳을 것이라는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이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마치 로보캅처럼 이삭을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22장에서의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힘과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창221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일이란 무엇이니까? 여기서 그 일이란 아브라함에 믿음이 없어서 두 번씩이나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창21장에서의 아브라함은 믿음에 실패한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저는 창2122장을 볼 때마다 제가 어릴 때 물에 빠졌던 생각이 납니다. 어릴 때 물놀이를 하다가 내 친구와 같이 물에 빠졌습니다. 두 사람이 물에 허우적거리니까 우리를 건지려고 했던 사람도 물에 같이 빠질 뻔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에서 건져준 사람이 갑자기 저의 머리를 잡더니 도리어 물에 쳐 박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친구가 완전히 힘이 빠져서 기절하려고 하는 순간 저와 친구를 물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아브라함에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습니까? 절대 인간적인 자신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에서 실패한 자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고 생각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용사들은 인간적인 자심감이 충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모세를 40년 광야생활을 하게 하심으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가나안땅을 눈앞에 둔 여호수아도 인간적인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 여호수아는 인간적인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여호수아에게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참된 믿음이 무엇입니까? 참된 믿음이란 인간적인 자신감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자신감이 아니라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서 나옵니다. 참된 믿음이란 우리 인간의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간의 약함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9-내 능력이 (인간적으로)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완성되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사도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인간적인 약함을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인간적인 약함을 통해서 참된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약함을 절대 우리를 절망과 낙담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습니다. 우리의 약함으로 도리어 하나님께 대한 참 믿음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낙망하고 절망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때문에 절망한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았을 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십니까? 나는 정말 약한 인간이라고 느끼고 계십니까? 심지어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약함 때문에 죽고 싶은 생각까지도 드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여러분의 약함을 두고 하나님께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 약함을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약함을 절망과 낙담의 통로로 여기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약함을 참된 믿음의 통로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크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나의 약함이 절망의 통로가 아니라 믿음의 통로가 됨을 믿습니다 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약할 때 그때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약함은 기도의 통로가 됩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는 처음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가자 먼저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9:20. 이에 (예수님께)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왜 예수님께 데리고 왔는데, 아이의 상태가 더 심해집니까? 그 이유는 아이의 아버지의 인간적인 자신감을 꺾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완전한 무능의 상태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9:24)” 라고 합니다. 즉 나의 할 수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오 할레스 비는 기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무능이 기도의 본질이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무능, 할 수 없음, 약함이 기도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대학3학년 때 그 책을 읽고 너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인간의 무능이다. 인간의 무능은 좌절과 실망으로 이끌지 않고 기도로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다가도 내가 조금이라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바로 기도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8시간 정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밥 먹고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 시간을 기도실에서 보냈는데, 그때가 성적이 제일 좋았습니다. 또 사역의 열매도 제일 많을 때였습니다. 또 모태신앙의 틀을 깨고, 예수님이 나의 친구이며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체험할 때였습니다. 지금도 자주 그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그때처럼 무조건 기도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첫째,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옵소서둘째,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주옵소서, 셋째는,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기도를 이렇게 바꾸어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기도하게 하옵소서, 둘째,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셋째,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어떤 여인이 남편을 잃고 남겨준 자녀를 너무나 훌륭하게 잘 키웠다고 합니다. 나중에 어떻게 그렇게 자녀를 잘 키웠는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자녀를 위해서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목록을 적었다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 부분은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자녀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부분들까지 잘 되게 하셔서 자녀들이 아름답게 잘 자랐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도무지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서 그 부분에서 있어서 철저히 나의 무능과 약함을 느끼고 계십니까? 그래서 그것 때문에 실망이 되시고 낙심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무능과 약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무능과 약함을 기뻐하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무능과 약함이 기도의 기회이고, 기도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능하고 약하지만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절대 무능하지 않습니다. 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무능과 약함을 기도의 기회가 통로로 삼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던 사도바울의 병을 왜 고쳐주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지 "믿음이 있는 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만일 바울이 다른 사람의 병도 다 고쳐주고, 자신의 모든 병도 고침을 받았다면 믿음으로 행한 그 일이 바울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함으로 바울이 행했던 모든 능력은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예배시간에 병자를 위해 기도하시고, 또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것으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을 잘 아는 어떤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목사님은 아직도 자신의 병을 완전하게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 목사님의 치유의 능력이 결코 그 목사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예는 너무도 많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스펄전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역사상 최대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말년에 굉장히 심한 풍치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또 옥한흠 목사님도 말년에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별세목회를 부르짖었던 이중표목사님도 평생 암으로 고생하시가다 돌아가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폐병환자이셨습니다. 하용조 목사님도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렇게 훌륭하신 목사님들인데 건강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고통을 통해서 그분의 말씀의 모든 능력이 그 목사님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육체의 가시를 뽑아 달라하는 것은 내게 하나님의 능력을 빼앗아 달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가시를 뽑아가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 가시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고, 또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철학자인 키에르 케고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사용하시는 사람을 먼저 무로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40년의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던 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역사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9절에서 사도바울도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약함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이 절망이 아니라 그를 의지하는 참된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약함이 낙심이 아니라 간절한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이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약함은 연합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수도 없이 서로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모든 일을 서로 함께 하라고 하십니다. 기도 혼자 하는 기도보다 두 세 사람이 서로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전도도 혼자하는 것보다 함께 같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222절에 보면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해서 함께 함께 지어져 가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 함께 연합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약함을 인정할 때입니다. 그래서 약함은 연합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부부가 행복해지기 위한 6가지 법칙가운데 타어어의 법칙이 있습니다.

사막의 모래에서 차가 빠져 나오는 방법은 타이어의 바람을 빼는 일이다. 공기를 빼면 타이어가 평평해져서 바퀴 표면이 넓어지기 때문에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부부가 갈등의 모래사막에 빠져 헤멜 때 즉시 자존심과 자신의 고집이라는 바람을 빼는 일이다. 그러면 둘 다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지금 살아가는 인생이 너무나 어렵고 힘이 든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힘을 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약함을 인정하시고, 더욱더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또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약함을 인정하시고, 서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약함이 참된 믿음의 통로가 되시고, 기도의 통로가 되시고,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시고, 서로 함께 연합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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