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을 보면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서로 “남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남이 아닙니다.
또 “나그네(즉 손님)도 아니요” 라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은 어떤 가게에 가는 손님이나 고객도 아닙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속, 즉 한 가족입니다.
명절이 되면 우리는 모두 육신의 가족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가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까?
성경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말씀에 보면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사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계획을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를 선택하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흥분이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교회가 몇 년 전에 어떻게 세워졌느냐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 세워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 사실입니까?
창세 전 부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 선택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한 가족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가 한 가족이 되기 위한 계획을 창세전부터 세우시고, 또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앞 엡2:13-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가운데 있는 막힌 담들을 부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적 으로 말하면 서로 남이지만 이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서로 하나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9절에서 이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는 외인도 아니고, 또 손님도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한 몸이 되고, 한 가족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작은 교회이고 교회는 큰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교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사실은 먼저 교회의 숫자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가 가족에 대해서 말할 때 가족의 숫자나 크기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와 같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했을 때, 교회의 숫자나 크기는 교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또 교회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프로그램이 교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운데 어느 누가 가정에 들어갔을 때 가정의 프로그램을 때문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매일 가정에서 어떤 이벤트를 하고, 그래서 그 프로그램 때문에 가정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참 가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의 가족이라고 했을 때 교회의 참된 본질은 숫자도 아니고, 어떤 프로그램도 아니고, 서로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고, 또 돈이 많고, 또 좋은 집에 살더라도 가족 간에 관계가 깨어지면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어떤 숫자나 프로그램이나 건물이나 재정보다 중요한 것 서로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과 교회가 서로 아름다운 관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서 서로 어떤 관계가 되어야겠습니까?
또 우리가 명절 때 서로 만나게 되는 가족들끼리도 어떤 관계가 되어야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적인 의미에서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 먼저 가족이라 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가족의 원형으로서 창세기에 나타난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보아야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한 가족으로서 서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한 가족이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이래야 참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 오면 밖에서 입었던 옷을 벗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 저녁이 되면 잠옷이나 내복을 입고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때 저 같은 경우에는 여지없이 튀어나온 뱃살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가족이라고 했을 때 옷을 벗는 것만이 아닙니다. 서로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그대로 공개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합니다. 이것이 가족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밖에서 제일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아내에게 다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남편에게 털어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또 자녀가 가정에 와서 부모에서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저는 요즘에 가족 카톡방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를 가면 어디를 간다고 카톡을 보냅니다. 그리고 마치고 나면 마쳤다고 카톡을 보냅니다. 어디를 가면 사진을 찍어 보냅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 가족들과 끊임없이 카톡을 보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움직이는 이모티콘이 있어서 심심하면 우리 가족들에게 움직이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족이란 무엇입니까? 서로 앞에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한 후 나타난 모습이 어떤 것입니까?
서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에서 서로의 부끄러운 것을 숨기고 기리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서로 숨기는 것은 가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 한 가족이라 했을 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 솔직해야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을 형식과 외식과 거짓으로 가리는 것은 가족으로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가족으로 얼마든지 이 교회에서 우리의 허물과 부족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의 허물과 부족으로 다 털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허물과 부족을 다 털어놓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요즘 24시간 예수님을 생각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 동안 제일 많이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 모두 죄입니다. 어느 누가 더 잘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형식과 외식의 모든 옷을 벗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솔직한 모습으로 서게 합니다.
//날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허물과 부족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아무리 가까운 부부사이라도, 또 성도사이라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너무 한꺼번에 더 털어놓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씩 또 서로가 감당이 되는 만큼 털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서 서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가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또 성경에서 가족이라 했을 때, 서로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노아의 가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노아가 물 심판을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노아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술에 취해서 부끄러운 모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참 가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셈이었습니다. 셈은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고 덮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떠들고 다녔습니다. 공개했습니다. 이것은 참 가족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사건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셈의 하나님이 되시고 셈의 자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셈의 가계에서 아브라함이 나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나오게 하시고, 예수님도 나오게 하시고,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도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함의 자손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버려두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된 가족이란 서로의 허물과 부족,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공개하고 고발하는 자가 아니라 덮어주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가족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부부라면 먼저 서로의 부끄러움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또 서로가 부끄러움을 털어놓았을 때 그것을 공개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사랑으로 덮어주는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이래야 참된 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용납과 관용입니다.
용납이란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를 변화시키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뀌어야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생긴 그대로 인정해주고, 모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용납입니다.
//그리고 용납을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이 관용입니다. 관용이란 모든 것을 내 안에서 다 소화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마음의 넓이를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가족들에게 관용하십니까? 얼마나 내 마음을 넓혀놓고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일 용납하고, 관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제일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과 한 교회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이라크의 후세인이나 러시아의 스탈린은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가족, 성도들끼리 용납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까이에서 매일 부딪혀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와 그 은혜만이 나의 좁아진 마음을 녹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생활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교회에서 인간관계를 잘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간관계가 어려울수록 예배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합니다. 예배에 목숨을 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을 관용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서 서로의 허물과 부족을 덮어주고, 용납할 수 있는 관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성경적 의미에서 참된 가족이란 기다림과 희생, 그리고 잔치의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탕자의 비유에서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난 아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고 가정을 떠났어도 절대 아들을 종이라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그 아들을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집나간 아들이라도 절대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준 가족의 모습입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그림). 여기서 아버지는 눈물로 아들을 기다리시다가 눈이 멀어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아들이 눈이 멀 정도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손은 한 쪽은 남자의 손이고, 또 한쪽은 여자의 손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아버지로서 절대 아들에게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회개함으로 죄악 된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아버지께로 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자녀가 이제 돌아왔을 때는 이제 하나님은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모성으로 우리를 안아주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연세 많으신 권사님 집을 심방했습니다. 권사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은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한 아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든 자녀가 다 하나님께로 돌아와도 돌아오지 한 자녀에게 마음이 가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연세 많으신 남자 집사님도 심방 갈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병보다 내 큰 아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제일 큰 기도제목입니다”라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가족과 가족이 아닌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가족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사람들은 얼마든지 버리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가족의 관계를 언약적 관계라고 합니다. 언약적 관계란 만일 그 관계를 깨뜨리면 고기의 쪼개짐과 같이 죽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가족은 언약적관계로서 죽기 직전에는 서로 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언약적 관계로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관계여야 합니다. 포기는 배추포기를 말하지 가족이란 포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싫든 좋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서 가족으로 맺어준 관계에 있어서는 절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압적으로 아들이 돌아오게 해서도 안 됩니다. 만일 군대라면 탈영병이 있으면 강압적으로 데리고 올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만일 힘든 가족이 있으면 포기하지 말고, 그냥 기다릴 수 있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족은 쉽게 끊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가는 것이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기 바랍니다.
“죽을 때 까지 함께 합시다”
혹 우리 가운데 낙심한 사람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처럼 끝까지 기다리고 기다려서 돌아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
또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15장23절에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을 때 살지고 값비싼 송아지를 희생했습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열었는데, 송아지는 그 잔치 날이 제삿날이었습니다. 이것은 가족잔치의 기쁨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아니 어떻게 그런 값비싼 송아지를 희생할 수 있는가? 그 송아지의 값이 얼마인줄 아느냐?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희생의 값을 지불하고도 그 돈이 아깝지 않은 것이 가족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가족입니까? 가족이 아닙니까? 큰 아들은 가족이 아닙니다. 집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적 의미에서 가족이 무엇입니까? 기쁨의 잔치를 위해서 희생해 줄 수 있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정말 화목한 가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에 얼마든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 가정의 경우에는 어머님이셨습니다. 이와 같이 화목한 가정에는 반드시 그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어떻게 매주 기쁨의 잔치를 베푸는 곳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은 가정과 마찬가지로 이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는 한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내가 왜 희생해야하는가? 왜 내가 손해를 봐야하는가? 하는 사람은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면 그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잔치 상에 올려 진 송아지처럼 가정과 교회를 위해서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가족은 서로를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가족이란 잔치의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누가복음15장에서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어떻게 말합니까?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와 같이 무엇이 진정한 가족입니까? 가족이란 서로를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해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왜 가족들이 서로 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스바냐3장 17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말이 무슨 말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만 잠잠하여 안식할 수 있다” 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는 잠잠하지 못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습3:17.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명절이 되면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오기를 눈이 빠질 정도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명절에 자녀들을 보았을 때 춤을 추실 정도로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가족과 같은 교회입니까?
서로를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시편에서 16편 2절에서 다윗은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밖에 나의 복이 없다고 말한 다윗이 성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합니까? 시16: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여러분 왜 우리가 서로를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밖에 없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 밖에 나의 복이 없습니다”.
또 다윗처럼 옆에서 분들에게 한 가족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기시 바랍니다.
“나의 모든 즐거움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함으로 참된 가족을 이루어 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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