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질투라고 하면 잘못된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질투가운데서 좋은 질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그 배우자가 어떻게 하겠습니다. 절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배우자가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안되면 자신의 배우자가 관심을 가지는 그 사람을 물리쳐서라도 그 사랑을 보호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질투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데도 전혀 질투를 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사랑은 식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의미에서 질투란 두 사람의 사랑의 관계를 보호하려는 사랑의 열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사랑하는 부부사이에 사랑의 질투를 하나님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제일 먼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했을 때 질투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4장에도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질투 그 자체인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출34장 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헨리 나우엔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행기의 지연을 기다려야 할 때, 우리는 신문을 읽지만, 우리는 기도하는가?
저녁에 특별한 계획이 없을 때, TV를 시청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전화를 걸기도하지만,
우리는 기도하는가?
우리의 삶 가운데 종종 빈 시간들이 생겨나지만, 우리는 기도하는가?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며, 또한 우리가 가끔 드리는 기도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며, 우리가 단지 주말의 몇 시간을
그분과 함께 하는 것으로 퍽 만족해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긴장을 하는 것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연인”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낮이나 밤의 한 순간이라도 우리를 홀로 두기를 원치 않으시는 우리의 연인(戀人)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전체, 곧 분산되지 않은 전적인 관심을, 언제나 요구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질투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1.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기하시고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지극히 사랑하시는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 남편이라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께 대하여 불경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시고 그의 피로 구원하신 우리들을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신부로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시는 남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54: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사랑하는 부부관계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암3장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여기서 너희만 알았다(야다)라고 하는데 알았다고 하는 말은 부부가 성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음행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1장2절 “-- 이 나라(이스라엘)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영적으로)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이와 같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결혼한 신부와 같고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으로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즉 피 흘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으로 우리를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사랑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대 이스라엘백성들이 숫자가 크고 대단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민족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또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우리를 “음란한 여인인 고멜”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가서에 술람미 여인을 보십시오. 피부도 검고 못생겼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사랑할만한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자였습니다. 이삭을 보시기 바랍니다. 두 아들 중에서 누가 택하신 자인 줄 몰랐던 영적으로 어두운 자였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속고 속이는 자였습니다. 유다를 보십시오. 자신의 며느리와 동침한 자였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우리를 당신의 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셔서 당신의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또 이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한번 피를 흘려주심으로만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를 지켜주시고 돌아보아 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에베소서에는 우리를 보호하고 양육하시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나의 미래와 앞길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오 주여 믿습니다-내 앞 길 인도하시리라).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에게 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우리를 시기하고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칼빈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매우 빈번히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남편의 입장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남편으로 모든 직무를 수행하신 것처럼 신부인 우리에게 사랑과 순결을 요구하십니다. 즉 우리의 영혼을 사탄에게 팔아 넘어가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남편이 순전하고 순결할수록 자기 아내가 라이벌 되는 남자에게 기울어지는 것을 볼 때 더 크게 상심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순결을 무시하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했을 때) 가장 강력한 질투를 느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결혼한 침상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2.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어떤 부분에 질투를 느끼십니까?
1)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에 하나님은 질투를 느끼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만 아니라 그의 사랑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자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 저는 저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또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준다고 하니까 하나님도 섬겼지만 바알도 섬겼습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연예인들이 영화나 드라마가 잘 되게 해 달라고 고사상에서 돼지머리를 같다 놓고 고사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돈과 인기만 얻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보다 돈과 인기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무한한 질투를 느끼고 계십니다.
2)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들에 대해서 무한한 질투심을 느끼고 계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위기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당시의 강대국들을 의지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사람을 더 의지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보다 돈이나 세상을 더 의지하지 않습니까? 또 나의 인간적인 계획과 지혜를 더 의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들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무한한 질투심을 느끼고 계십니다.
3)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 더 큰 안식과 쾌락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 질투를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안식과 쾌락을 느끼고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기뻐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속에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우리의 만족과 기쁨을 찾으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남이 더 큰 기쁨이고 위로고 쾌락입입니까? 아니면 tv을 보거나 오락을 하는 것이 더 기쁨이고 위로이고 쾌락입니까?
//우리는 쾌락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타락이라는 말로 연관을 시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소요리문답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쾌락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쾌락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죄와 세상의 쾌락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쾌락을 느끼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한 쾌락 때문에 세상의 것들이 재미없고 무가치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보니 세상이 재미가 없어져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한 기쁨과 쾌락이 있습니까?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쾌락을 느껴야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쾌락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안식과 기쁨과 쾌락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
한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질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연애하자 그래서 나와 함께 한 없는 쾌락을 누리며 살아가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4) 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무엇에 질투를 느끼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많이 교제하는 대상에 대해서 무한한 질투를 느끼고 계십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든 예수님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마음을 주고, 육신적인 위로 속에서 충분한 위로를 발견하며, 심지어 주님과 은밀하고 다정하게 나누는 교제보다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나누는 교제를 더 선호한다면, 질투의 하나님이 몹시 근심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투하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신뢰하고, 또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기쁨을 느끼며, 하나님보다 다른 것과 더 많이 교제를 나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호세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호2장“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그가 그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연애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하나님)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하나님을 더 사랑할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심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왜 우리가 가는 길에 가시가 있습니까? 담이 있습니까? 왜 우리가 하는 일들이 잘 되지 않습니까? 왜 내 인생이 잘 풀리지 않습니까? 왜 내가 기도하고 소원했던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왜 우리의 삶 가운데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까? 슬픔이 있습니까?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 일으키게 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때 하나님께서 왜 내가 사랑하거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씩 빼앗아 가시는가를 두고 하나님께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데 가난하게 하십니까? 주님을 더 사랑하게하기 위함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서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까? 내 안에 내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씩 제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호세아2장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유혹하여) 거친 들(고난의 광야)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사랑으로 속삭이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함으로 유혹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이 있을 때 내 안에 조금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고통가운데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했던 것들을 다 내어버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고통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3.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질투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자신만을 사랑하여 자신만 잘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잘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돈에 미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돈에 미치면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사랑해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에게 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또 만일 우리가 하나님보다 우리 자녀를 더 사랑하면--자녀를 망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가 더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쾌락에 빠져서 살면 그것은 마치 바다 소금물 같이 먹어도 먹어도 만족이 없고-결국 타락의 길로 갈수 박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진정한 쾌락을 느끼며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님보다 사람을 더 믿고 신뢰하고 살아가면 그 사람들은 언젠가는 우리에게 실망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말씀에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 천대까지복 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는 삼대까지 저주를 내리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숫자적으로 천대이고 삼대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신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더 복을 받고 잘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가계의 저주를 끊으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숫자적으로 생각해서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해서 삼, 사대까지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인 줄 아십니까? 우리가 돌이켜 당장이라도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천대까지 은혜와 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니까 설사 3,4대의 저주가 있다 하더라도 돌이켜 하나님만을 사랑하면 997대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목적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또 질투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위로를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해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절대 참고 견디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질투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주님은 우리를 해치는 모든 원수들로부터 보호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 주여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매력적인 것들을 외면한 채, 거룩한 순결함으로 우리 마음을 사랑하는 주님 한 분만 위해 바칠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스펄전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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