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고린도교회의 분쟁에 대한 말씀입니다. 몇 주 지났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복습을 해보겠습니다. 고전1:10-4장21절까지는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파당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파가 있습니까?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가 있습니다. 바울파는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또 게바파는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을 중요시 하는 파입니다. 또 이들은 특별히 표적을 아주 중요시하는 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게바파에 속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라고 했습니다(고전1:22a). 또 아볼로파는 헬라의 지식과 지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아볼로파에 속한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라고 했습니다(고전1:22b).
이와 같이 고린도교회가 파당으로 갈라지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적인 자랑 때문이었습니다. 바울파는 자신들이 세례를 받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또 게바파는 특별한 표적이나 기적을 자랑했습니다. 또 아볼로파는 세상적인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인간적인 모든 자랑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합니다. 표적이나 기적을 추구하는 게바파에 속한 유대인들의 입장에는 십자가는 무능력하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어떤 표적이나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지혜를 추구하는 아볼로파에 속한 사람들은 십자가는 너무나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1장 31절에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하는데, 이 말은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모든 인간적인 자랑을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무능하게 보이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자랑은 우리를 서로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합니다.
우리가운데도 어떤 자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이 교회를 몇 년 동안 다녔다는 것도 인간적인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이교회에 이렇게 헌신하고 봉사했다는 것도 인간적인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랑이 되면 우리는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파당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교회에 나름대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파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처럼 우리의 인간적인 모든 자랑을 다 배설물과 같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서로 파당이 없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선포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인간적인 지혜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십자가의 복음)를(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파를 염두하고 이 말을 했겠습니까? 아볼로파입니다. 아볼로 파는 말 잘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말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만일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면 결국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4절과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전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게 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철학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복음전도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전도에 실패를 하고 난 다음에 고린도에 와서 어떤 마음인지를 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지금 사도바울은 아테네에서 복음전도에 실패하고 난 다음에 고린도에 와서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리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리게 되는 가운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단순히 인간적인 지혜나 힘으로만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만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패한 후에 철저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박영돈 교수님은 성령 충만을 실패한자들에게 주시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시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시다가 철저히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또 아니면 교회의 일을 하는 가운데 나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는 무능함과 약함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실패를 경험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실패를 경험하게 하셔고, 시들게 하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제 인간적인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저는 요즘 들어 어느 때보다 이것을 많이 깨닫습니다. 나의 인간인 힘과 능력과 지식과 지혜로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습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성령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도 금요기도회 때 말씀을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했는데, 기도회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마치고 난 다음에 보니까 기도를 할 때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가니까 아내도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리 기도제목이 많아도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는 빠지지 않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지식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또 인간적인 힘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면 어떤 역사가 나타납니까?
첫째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면 인간적인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 전과 후의 가장 큰 차이는 두려움입니다. 사도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 전에는 계집종도 두려워하여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난 다음에는 수많은 무리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7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인간적인 마음이요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면 인간적인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신적인 평안함과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면 우리의 전하는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 전과 후의 차이는 전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어떤 사역자는 인간적인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준비하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령의 능력이 그 사역자에게 임했습니다. 같은 설교였습니다. 또 같은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놀라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부흥시기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문을 보면 지금보면 너무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이임하니까 그가 크게 웅변적으로 설교하지 않고, 원고채로 그냥 읽어도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사역자들은 옛날에 비하면 성경의 지식에 있어서는 뛰어납니다. 그런데 초장기 목사님들은 성경의 지식에 있어서는 휠씬 못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딱딱하고 지루한 말씀이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를 하실 때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씀전하는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스펄전목사님에게 다른 목사님들이 어떻게 말씀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아니하시고 성도들이 강단 밑에서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우리 모든 사역자들의 말씀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우리는 보통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면 병고침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신약시대에 부어질 성령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약시대에 부어질 성령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드럽게 된 마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행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을 듣고 오히려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용서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테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돌이 날라왔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같이 돌을 던지지 않고 오주여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죽었습니다.
스테반이 원래 마음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용서할수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의 굳은 마음이 제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마음이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 용서할수 있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힘과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품어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의 충만으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시고, 능력있게 복음을 전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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