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스승의 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오늘을 스승의 주일로 지키는 곳도 있습니다. 스승이라고 하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나 교역자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하면 우리의 선생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13절을 보시면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의 선생이요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생이라고 하면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학을 가르치면 수학선생님이고, 영어를 가르치면 영어선생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선생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선생과는 다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선생은 단순히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선생은 따라야 할 삶의 본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제자란 그 선생의 가르침만 아니라 그 선생님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사는 자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그대로 따라서 살아야하는 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주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주 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그대로 따라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15절을 보시면 “15. 내가 (주와 선생으로)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제자인)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와 선생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그대로 따라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주와 선생으로 어떤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까?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떤 교회에서는 선생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세족식을 하기도 합니다. 또 수련회 행사로서 세족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세족식 이상의 말씀을 하십니다.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우리가 세족식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세족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기는 그 의미를 알고 행해야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본받아서 서로의 발을 씻기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10절과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
여기서 목욕한 자는 중생한자 거듭난 자 즉 구원받은 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목욕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는 말씀은 11제자는 다 영적으로 목욕한 자 즉 중생하고 거듭난 자들이지만가롯유다만 중생한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당시의 목욕풍습을 보면 목욕탕과 탈의실이 분리가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목욕한 자는 몸을 씻고 난 다음 탈의실에 가서 옷을 입고--다시 와서 발을 씻습니다. 그런데 목욕한 자는 이미 목욕을 했기에 이제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영적의미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미 목욕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은 우리가 영적으로 머리부터 발까지 다 목욕한 자들이지만--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아 예수의 피로 깨끗이 되었지만--우리는 아직 모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영적으로 거듭났지만, 성격이 다열질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격이 너무 급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깐깐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서로의 발을 씻기라는 말씀은 우리가 육신이 약하여 성격상 서로 모난 부분들을 서로 이해하고 용납해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또 발을 씻기라는 말씀은 우리가 영적으로 다 목욕한 자들이지만--우리가 이 세상과 접촉하여 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또 실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상과 접촉하여 살면서 실수하기도 하고 죄를 짖기고 하는 것을 서로 용서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유대인의 공동체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유대인의 공동체의 가입조건은 먼저 유대인이라는 혈통입니다. 또 어느 지역이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는 유대인이라도 안 됩니다. 또 자신의 의, 또는 잘남이 유대인의 공동체에 가입조건입니다. 이렇게 혈통, 지역, 또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에--유대인의 공동체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 서로 허물이 있는가? 죄가 있는가?를 보고 “나는 찾았네 나는 발견했네” 라고 하면서 서로의 죄와 허물을 공개하여 그 사람을 쫒아내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을 선지자 노릇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공동체가 이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까?
유대인의 공동체는 철저히 자신의 더러운 발을 숨깁니다. 안 그런 체합니다. 연약하지 않은 체합니다. 죄짓지 않은체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외식으로 자신의 더러운 발을 가립니다. 그렇게 하다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더러운 발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공격을 하고, 또 공격을 당하는 공동체가 유대인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철저히 그 유대인의 공동체와는 대조되고, 반대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가입조건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아 이 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됨에도 불구하고-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그러함에도 불구하고--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기에 우리의 모습은 허물이 있고-부족하고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리의 허물과 부족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서로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어라, 즉 서로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허물과 부족을 정죄할 대상과 조건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할 대상과 조건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어느 교회에서 사람들의 문제를 적어서--그것을 공개하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조목들은 공개하고 다닐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서로 기도해주고, 서로 사랑하고 헌신할 조목들로 생각해야합니다.
-칼빈은 “교회 사람들의 연약함과 부족은 그 교회를 떠나거나 부정할 조건을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그 교회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 기독교 강요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주라고 하십니까?
요13:34,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여기서 사랑하라는 말씀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용서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용서하셨습니까?
마18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일만 달란트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한 달란트는 우리 돈으로 계산하면 18억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는 18조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18조에 해당되는 용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사람이 일백 데리나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일백 데나리온이 얼마입니까?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으로 계산해서 10만원으로 보면 1000만원입니다. 여러분 1000만원이 큰돈입니까? 예-엄청나게 큰돈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가 용서할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너무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1000만 원정도가 아니라 18조원에 해당되는 용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8조원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사람이 10000만원 빚진 자에게 목을 잡고, 나중에 감옥에까지 가둡니다.
--그때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18장32을 읽어보겠습니다.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용서해줌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용서해 줌)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교회의 지체)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공의대로 갚으시리라)
여기서 “이와 같이”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공의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서로 용서하지 않는 자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공의대로 갚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가운데 있는 심판 날에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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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의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서로 발을 씻기라-즉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용서라는 말뜻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용서란 풀어준다는 뜻이 있습니다.
먼저 용서란 과거로부터 나를 풀어준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일 서로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떤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까?
서로의 과거의 허물과 죄에 얽매여 미래를 향해서 한 걸음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미래를 향해서 걸어가기 위해서는 서로 발을 씻기는 자-즉 서로 용서해주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또 용서란 내 안에서 그 사람을 풀어준다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해주지 않는 사람을 내 마음속에 있는 원한의 감옥에 평생 가두어놓습니다. 그래서 평생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원한의 감옥에서 그 사람을 풀어주어 그 사람만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서로 용서해주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합니다. 용서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용서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아주 어렵게 생각합니다.
1)먼저 용서를 화해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다른 것입니다. 용서는 내 마음속에 있는 원한의 감옥에서 그 사람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일방적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용서해주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해는 그렇지 않습니다. 화해는 쌍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 용서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도 나를 용서해 주어야합니다. 그래서 화해란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해준다 해도 그 사람이 나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화해를 용서로 생각하기 때문에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용서란 화해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를 용서하지 않아서 화해가 되지 않더라도 내 마음으로 그 사람을 일방적으로 용서해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2)또 용서를 감정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눅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용서는 믿음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종은 주인에게 무조건 순종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믿음의 문제도 아니고, 또 우리의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용서는 내 삶의 주인이 누구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에게 나의 감정과는 관계없이 무조건 순종해야하는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용서가 되지 않는 가정 큰 문제는 용서를 감정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 어떤 사람에 대해서 감정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순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코리덴붐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독일나치에게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2차 대전 이후에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해 주어야한다고 강의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용서와 사랑에 대한 강의를 하고 난 다음에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데, 보니까 저 앞에 자기를 고문한 사람이 줄에 서 있었습니다. 방금 용서하고 사랑해야한다고 강연을 했던 코리덴붐은 갑자기 얼음처럼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도무지 그 사람을 감정적으로는 용서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순서를 따라서 결국 그 사람에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코리덴붐에게 “용서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때 코리덴붐은 자신의 감정과는 관계없이 “내가 당신을 용서 하겠습니다” 고 하는 순간 정말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3)또 용서를 악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제거하고 응징하기 위해서 용서하지 않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용서에 대한 오해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악을 응징하기 위해서 복수를 택했습니까? 그렇게 복수를 선택한 결과 더 많은 악이 제거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복수를 한다고 하면서 인간들은 그들이 당한 것 이상으로 더 큰 악들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죄를 응징하고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를 응징하고 없애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응징하시고 없애신 방법은 용서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향해 복수의 칼날들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내 탓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모두 내 탓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모든 죄를 덮어쓰시고, 용서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악을 응징하시고 죄를 없애신 방법입니다. 용서해 주는 것이 결코 죄를 조장하고, 악을 더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만이 죄를 죽이고, 악을 응징하고, 얼었던 심령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십니까? 또 용서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용서하는 자에게는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
첫째, 용서하면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둘째, 우리가 서로 용서하면 우리 가슴의 상처를 뽐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습니까? 그때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최선책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내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중심으로 용서할 때 내 마음속에 가시가 하나씩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우리는 용서해야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보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용서함으로 내 상처를 치유해야합니다. 그러면 내게 주어진 상처가 이제 내 마음을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게 됩니다. 용서란 무조건 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용서하면 기억하더라도 내 마음에 상처는 없습니다.
셋째, 우리가 서로 용서 해주어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몸으로 아는 자가 됩니다.
고슴도치가 어떻게 사랑하겠습니다. 끌어안으면 사랑합니다. 그런데 고슴도치는 안으면 안을수록 가시가 찔러 아픕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용서할 때 비로소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면서 아프면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가 있습니다. 허물이 있는 것을 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싫어 할 때도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들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구속이란 말은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 죄가 있지만 없는 것같이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론적으로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해줄 때--우리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넷째, 우리가 용서하면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평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기 지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안하라”는 말씀입니다(요20:19,20). 이 평안은 예수님이 가지셨던 평안인데, 이 평안을 우리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평안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평안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아직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원한을 품는 사람이 있었다면-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제 승리했으니 내가 나를 찌르고 배신 한 자를 값아 주겠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배신한 제자들도, 또 그를 잘 몰라서 그를 찌를 로마 군병들도, 예수님은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마디가 “평안 하라” 였습니다.
이 평안은 예수님이 가지셨던 평안인데, 이 평안은 우리가 서로 용서할 때 주어집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더러운 발을 씻어줄 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서로 용서함으로 예수님이 가지셨던 평안을 소유하시면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 용서할 때 비로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살아오면서 제일 많이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는 사춘기 때 형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또 보디발의 집에서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는 그가 은혜를 베풀어주었던 관원들에게 잊어지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모든 상처를 받으면서도 상처받지 않고, 마음에 숨겨놓은 칼이 없이 살았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요셉은 큰 아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습니까? 므낫세입니다. 기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의 과거에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함으로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또 둘째 아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습니까? 에브라임입니다.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용서함으로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풍성한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 지난 과거를 용서함으로 기억하지 않는 므낫세의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미래에 하나님께서 풍성함으로 채워주시는 에브라임의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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