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의 중심주제/구약의 중심주제

학개서의 중심주제

by 금빛돌 2011. 4. 9.



1.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학1:1-11).
유다백성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잡혀가서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가 잡혀가 있다가 70년이 지난 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오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시137편에 보면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에 있을 때 예루살렘성전을 생각하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강가에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바벨론에서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히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성전을 다시 짖고 거기서 하나님께 노래하고 찬양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오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마음으로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다가 사마리아사람들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갔을 때 바벨론사람들과 같이 결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사람들은 성전건축에 이들을 끼워주지 않았습니다. 이 일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을 짓는 일을 방해했고, 나중에 페르시아왕인 아닥사스다 왕에게 모함을 해서 성전건축을 금지하는 조서를 내려져서 성전건축이 중단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전을 건축하다가 중단된 16년이 지난 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닥사스다 왕 뒤에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인 다리오 왕 2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학개와 총독인 스룹바벨과 제사장인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절과 2절입니다.
1 다리오 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기서 재미있는 말씀은 2절에 하나님께서 유다백성을 내 백성이라 하지 않고 이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 유다백성들의 모습이 하나님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유다백성들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아직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다백성들의 핑계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박해로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의 칙령으로 성전건축이 금지가 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래부터 페르시아의 정책은 유다백성만 아니라 모든 정복국가의 정치와 종교의 자치권을 부여해주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닥사스다 왕이 죽은 이후에 다리오 왕에 와서는 성전건축을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유다백성이 이제 더 이상 성전건축 할 마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왜 그들이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없었습니까?
그 이유가 3절과 4절에 있습니다.
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4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떼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또 9절 하반 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b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
이것은 유다백성들의 삶이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 그들의 마음의 우선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모했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었습니다(그래서 더 이상 바벨론에서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그들의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이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식어졌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마음보다 그들의 집을 짓는 일에 삶의 우선순위를 더 두었던 것입니다.
---------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라고 말씀하는데, 이 판벽한 집이란 벽과 지붕에 각종 장식을 한 화려하고 안락한 저택을 말합니다.
여기서 16년 동안 짓다가 황폐하게 된 성전과 각종 장식을 한 체 화려고하고 안락한 저택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
--물론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 왔을 때 그들의 집도 다 무너지고 없어 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집도 지어야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신들의 무너진 집을 짓는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내 집안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정도 하나님의 작은 교회로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냥 자신의 무너진 집을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그 집은 지나치게 화려하게 짖고 장식하면서도--황폐하게 된 하나님의 성전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
결국 이렇게 삶의 우선권이 잘못된 유다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5절과 6절입니다.
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이렇게 삶의 우선권이 바로 되지 않았을 때, 그들이 아무리 수고 노력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삶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것뿐만 아닙니다. 10,11절을 보겠습니다.
10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
유다백성들이 삶의 우선권이 바로 되지 아니하니까, 그들의 개인적인 삶만 허무한 것이 아니라,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이슬을 그치게 하고, 산물을 그치게 하시고, 또 그 땅 모든 소산과 사람과 육축과 모든 일에 한재를 일으키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이룬 것 같은데, 허무합니다. 그리고
경제, 정치, 교육, 농업 모든 부분에 있어서 먹구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말합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삶의 우선권이 바로 되지 않아서---우리 때문에 이 땅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7절,8절입니다.
7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
7절에 보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너희는 자기의 소위(행동)를 살펴볼찌니라--
즉 자신의 삶의 우선권이 어디 있는지 자신의 삶을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또 8절에 보면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내가 기뻐하고, 영광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
우리는 이 말씀을 지금 당장 우리교회를 새로 건축하거나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 말씀으로 적용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오늘 여러분에게 건축헌금을 작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2장에 보면 성전을 다 건축하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의 노인들이 불평을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건물이 솔로몬성전과 비교했을 때 너무 초라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학개가 어떻게 말합니까?
이 성전의 참된 영광은 눈에 보이는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다고 말씀합니다(학개2:2-5).

--그래서 우리는 성전을 다시 지으라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합니까?
그것은 네 삶의 우선권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사람은 단순히 겉 모양과 모습만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하게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정확하게 우리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가 있는 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어디에 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있습니까? 아니면 돈입니까? 아니면 내 가정입니까? 또 성공입니까? 내 명예나 비전입니까?
이것이 하나님보다 더 앞선 내 삶의 우선이 아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어 보십니다.
가정이 중요하지 않다.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내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유다백성의 삶이 하나님의 중심의 삶으로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해주십니까?
앞에 보면 유다백성을 “이 백성”이라고 했는데, 13절에 보면 이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하나님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모든 재앙을 반대로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함께 해주시면 네가 수고한대로 하나님이 되게 해주시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면 우리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적용)--그러면 우리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회복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합니까?
첫째로, 우리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으로 회복된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일보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난번 금요일에 말씀을 드렸는데, 어느 교회 장로님은 규모가 큰 해외 무역업을 하신다고 합니다. 차도 우리나라에서 몇 대 되지 않는 차를 타고 다니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만큼은 본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차도 주일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신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너무 지나친 주일성수가 강조되었는데 요즘에는 주일이나 다른 날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제일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이 예배에 실패하고, 예배드리는 삶에서 무너지면 그 사람은 삶 가운데서의 예배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예배가 내 삶의 우선이 되어야합니다.
또 요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앞에서 매일 기도하고,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경건의 삶이 우선이 되어야합니다.
-바쁠수록 더 기도해야합니다. 또 몸이 피곤할수록 더 기도해야합니다.
-우리가 저녁에 티브에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새벽에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시간을 더 우선으로 해야합니다.
또 일주일에 새벽에 나오지 못한다면 금요기도회라도 나와야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삶이 우선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모든 삶에 우선권과 질서가 잡힐 수 있습니다.
둘째--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회복된다는 우리가 육신보다 영혼에 더 우선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육체의 건강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요즘 태목사님과 일주일에 세 번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영을 배우러 갈 때 마다 로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아주머니들을 봅니다. 얼굴에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마치 운동하며 살을 빼는 것이 마치 전투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육체의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것이 나쁘거나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과연 내가 육체의 건강을 위해 비장한 각오로 사는 만큼 영혼의 건강에 얼마나 신경을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육체는 건강하고 화려한데, 내 영혼은 황폐하지 않습니까?
내 육체를 위한 투자에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데 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전혀 나의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언가 잘못 된 것입니다. 육체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의 건강도 진단해야하듯이 영혼의 건강도 진단해야합니다.
영혼의 감기-기도하면 졸린다//영혼의 독감-찬양이 은혜가 되지 않는다//영혼의 죽음--말씀이 전혀 내 영혼에 들어오지 않는다//이렇다면 빨리 원인을 분석하고 진단하여, 우리의 영혼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갈 육체를 위해 심는 자입니까! 아니면 영혼을 위해 영원을 살아가는 자 입니까?

셋째--하나님중심의 삶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소유보다 존재에 더 우선된 가치를 두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이것에 관한 어느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인생의 중요한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소유하느냐?’라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이 되느냐?’하는 존재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이 더 잘 아신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을 모르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다.
인생의 우선순위와 목표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염려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마치 기독교 신앙이 현실을 무시한 채 그저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님은 안개와 같은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영원한 것들을 놓치게 될 것을 경계하시는 것이다.
결코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든든하고 확실한 대책을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보장받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주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이요 힘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처럼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염려가 참으로 많았던 베드로 사도는 후에 이렇게 이야기 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이 말도 소유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즉 우리가 이 땅에서 소유해야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유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 것인가에 더 우선된 가치를 두고 살아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으로 회복된다는 말은 내가 하는 어떤 일보다 사람들을 돌아보는 사랑하는 일에 더 우선하는 가치를 두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가 돌아봐야할 사람들의 고통소리가 우리에게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눈에 우리가 돌아봐야 할 영혼들이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이 되는 사람은 단순히 교회 건물의 외양을 보는 자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영혼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을 돌아보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바쁘고 분주한 우리의 삶에 쫒겨서 살아가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삶의 우선권, 삶의 더 중요한 가치를 쫒아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하신 두 번째 말씀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학2:1-9).
유다백성들이 심어도 거두지 못하고, 돈을 전대에 넣어도 그 전대가 뚫어진 전대가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지으라는 것은 너희의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들과 함께 함으로 너희들의 삶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유다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학1장12-15절을 보면 그들은 즉시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제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건축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다백성들은 그들의 삶의 우선권을 바로 하여 성전을 건축하면, 금방 어떤 결과들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장 곡식들이 풍성해지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들의 살림살이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전건축을 한지 한 달이 지났는데 그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학1장15절에 보면 성전 건축이 시작된 시일이 다리오 왕 2년 유월인데 오늘 본문에 보면 칠월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전건축을 한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칠월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10월 11월에 해당되는 추수기였습니다.
사람들이 추수기가 되면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가장 낙심하는 계절이 봄이고 가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들은 봄이 되면 무언가 새로운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으면 낙심합니다. 또 남자 청년들은 가을이 되면 무언가 일이 있지 않을까 조급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을 때 가을에 남자들이 낙심합니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은 별로 결과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기대할 때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 유다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그들의 삶이 황폐하게 된 이유를 몰랐습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알고 하나님중심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또 추수기가 되어서 어떤 결과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한 만큼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전건축을 한 뒤 한 달이 지난 후 그들은 달리지지 않은 삶을 보고 낙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그들이 짓고 있는 성전이 문제였습니다. 황폐하게 된 성전을 지으면서 두 무리가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무너진 성전이 지어지는 과정을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솔로몬의 화려한 성전을 본 노인들은 그 성전과 비교하면서 크게 낙심했습니다. 에스라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성전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에스라 3:12-13).
여기서 보면 성전을 짓는 것을 보고 대성통곡하는 무리와 기뻐하는 두 무리가 나옵니다.
--이 두 무리 중에서 누가 더 지도자들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십니까?
기뻐하는 무리입니까? 낙심하는 무리입니까?
낙심하는 무리입니다. 성전을 짓는 것을 보고, 과거 화려한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면서 낙심하는 무리가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은 낙심하는데, 더 자연스럽습니다. 아무리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해도 단 한 사람이 낙심되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이 더 영향력을 미칩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정적인 본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이런 낙심하는 이야기를 듣고 유다의 총독인 스룹바벨과 제사장인 여호수아와 모든 유다백성이 크게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다백성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낙심할 때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학개에게 나타나셔서 어떻게 말씀하십니다.
학2장3-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들어가면서 세 번씩이나 말씀하십니다.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니라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니라 유다백성들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니라 너희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굳세게 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낙심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더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 가정과 교회를 허무는 작은 여우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비교의식이고, 결과주의입니다.
한 가장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이제 아파트 13평을 얻었습니다. 그라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이때 그 가정을 허무는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아파트 30평에 사는 이웃집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은 더 이상 일할 의욕이 없습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 1학기 성적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보기에 공부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어느 등급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이때 부모가 결과를 가지고 다그친다면 그 학생은 더 이상공부 할 의욕을 상실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가장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다른 교회의 비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 교회는 저 같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는 이렇게 되었고, 또 저렇게 되었는데 왜 우리교회는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비교했을 때 그래도 노력하면 따라 갈수 있는 것을 비교하면 그래도 격려가 되는데,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것과 비교했을 때 더 낙심이 됩니다.
또 교회 모든 일을 과정 보다 결과를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열심히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장 크게 낙심케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비교의식과 결과주의에 대해 “낙심하지 말고 스스로 굳세게 하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오늘 말씀에서 스스로 굳세게 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성전건축은 성전의 외양이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오늘 식으로 말씀을 드리면 교회의 참된 영광은 교회의 외양이나 당장 눈에 보이는 어떤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3.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하신 세 번재 말씀은 무엇이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학2:10-14)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다백성들에게 하신 세 번째 말씀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유다백성이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 성전을 건축하다가 중단한지 16년이 지난 후 학개를 통해서 성전을 다시 지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때가 다리오 왕 2년 6월1일입니다. 여기서 성전을 다시 지으라는 말씀은 그들의 삶의 우선권을 바로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6월 14일에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7월 21일에 두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성전을 짓기 시작해도 그들의 삶이 달라지지 않고, 또 솔로몬성전과 비교하면서 낙심해 있는 유다백성들에게 “스스로 굳세게 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성전의 참된 영광은 건물과 외양에 있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두 번째 말씀을 하신 후 두 달 후, 즉 성전재건을 시작한지 세 달 후인 9월 24일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때는 성전의 기초가 완성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재건을 시작한지 세 달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서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
18절 19절입니다-
18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 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그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19 (성전을 짓기 전에는)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

이 말씀에서 오늘은 9월 24일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의 기초를 쌓게 된 오늘부터 그 이전, 성전을 재건하지 아니한 이전을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을 짓지 아니한 그때는 곡식 종자가 창고에만 있었고, 또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와 석류나무와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성전재건이 시작된 세 달이 지나서야 하나님께서 유다백성들에게 복을 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전재건이 시작 된 3달이 지난 후, 또 유다백성들에게 축복을 약속한 9월 24일에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세 번째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0 다리오왕 이년 구월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1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12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13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12절에 보면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거룩한 물건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보면 거룩한 고기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제물은 거룩한 고기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고기를 거룩하지 않은 옷에 넣는다고 해서그 옷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그 거룩한 고기를 쌓던 옷자락을 다른 식물에 닿는다고 해서 그 식물이 거룩한 물건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지금 성전을 짓고 있는 유다백성들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생각해봐야합니다. 왜 지금 성전을 잘 짓고 있는 유다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지금 거룩하지 않은 유다 백성들이 거룩한 성전을 짓고 있다고 해서--그들 자신이 거룩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거룩하지 않은 옷은 유다백성을 가리키고-거룩한 고기는 성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좀 더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악덕 건축업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동안 부정한 방법으로 건물을 지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다가 부도를 맞아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악덕 건축업자가 이제 내가 세상건물을 짓다가 부도를 맞았느니, 이제 세상건물을 짖지 말고--거룩한 예배당 건물을 짓자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똑같이 부정한 방법으로 예배당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이 세상건축업이 아니라--교회건축업을 한다고 이제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부정한 사람이 부정한 방법으로 교회건물을 짓는다면 그 교회건물도 부정한 건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거룩하지 않은 유다백성이 거룩한 성전을 지었다고 해서 그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거룩하지 않은 유다백성이 거룩한 성전을 지으면--그 거룩한 성전도 부정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사람이 다른 물건을 만지면 그 물건이 부정하여 지는 것처럼 --부정한 유다백성이 거룩한 성전을 지으면 그 성전도 부정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해 놓고 하나님은 이 이야기가 누구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고 있습니까?
14절입니다.
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부정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부정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부정하고) 그들이(유다백성들이) 거기서(거룩한 성전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
아무리 그들이 거룩한 성전을 짓는다 하더라도 그 성전을 짓는 유다백성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이성전도 거룩한 성전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다백성들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참된 거룩이란 종교적 행위나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가 거룩하게 변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변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종교적인 행위와 외식으로 포장해놓고 하나님께 나온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받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게서 제일 경계하시고 싫어하시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아예 세상에서 세속적인 일을 하는 죄인들은 그래도 자신이 죄인인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하나님께로 돌아올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외식적인 종교적 틀속에서 자신을 감추고--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거룩하다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합니다.(아니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께 나와 있다고 착각합니다--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
우리는 세상적인 직업에서 종교적인 직업으로 바꾸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다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종교적인 직업으로 바꾼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거룩하게 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
심지어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교회봉사를 하고,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거룩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거룩한 일들 속에 우리의 부정함을 감추고 위장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흉악한 범인을 경찰이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범인을 심문하는 가운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범인이 범죄를 행하는 기간 동안 매 주일마다 성당에 나가서 주일미사를 빠짐없이 드렸다고 합니다. 그 범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양심의 가책에 위안을 얻기 위해서 미사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거룩한 종교적 의식으로 자신을 위장하고--자신을 더 안심시켜서 더 큰 범죄의 자리에 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거룩이란 단순한 종교적 행위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앞에서 거룩하게 변해야합니다.
-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지만 결코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존재가 변하지 않고==종교적인 행위나 의식으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지 않습니다.

--오늘 18절에서 축복의 말씀을 하기에 앞서서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유다백성들이 거룩한 성전을 짓는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축복해주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그들의 이런 죄를 철저히 돌아보고 회개해야 진정한 하나님 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적용)그러면 하나님백성으로서의 참된 거룩이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하나님 백성으로서 참된 거룩이란 그 일을 하는 동기에 있어서 거룩해야합니다
슥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벧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가 여러해동안 전에 행한 대로 오월에 하나님께 울며 금식기도를 재개하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
6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을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고 말씀하십니다.
무조건 금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그 금식이 누구를 위한 금식이냐고 묻습니다. 그 금식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동기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자신이 이기적인 욕망을 체우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하나님은 묻습니다.
-------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많이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하나님을 섬기는 동기가 순수하고 거룩해야합니다--우리가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일을한다고 해 놓고--실상은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내 이기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일을 하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을 살펴보아야합니다.
-
구약성경을 보면 학개 스가랴 말라기로 끝이 납니다---그리고 400년동안의 계시의 공백기가 생겨났습니다-이때 탄생한 것이 유대종교입니다--유대종교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종교로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인간의 명예를 얻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끊임없이 싸웠던 대상이 바로 유대종교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욕망 중에서 제일 더럽고 추악한 욕망은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한자리를 차지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버렸다. 그러니 이제 내가 이 교회에서 한번 크게 되어보고, 높이 되어보고 잘 되어 보자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사탄의 두 번째 시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헛된 욕망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지 않은지를 돌이켜 보아야합니다.


-이번에 청년들과 장년들이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이번에 우리가 선교여행을 가는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합니다
-여러분 과연 이번에 선교여행을 하는 것이 선교여행입니까? 아니면 단순한 관광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어떤 교회를 보고, 예배를 참석한다 해서 그것이 선교여행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반대로 단순히 중국땅과 북한 땅만 바라 보고 온다고 해도 선교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동기입니다.
--우리가 과연 어떤 마음의 동기로 그 땅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시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의 동기로서 그 땅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 북한의 황폐한 땅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땅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땅을 바라보기만 해도 선교여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없이 그 땅만 바라본다면 그냥 관광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청년들은 세달 동안 선교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또 장년들도 앞으로 두달동안 선교기도회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선교여행이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하니님의 마음을 읽는 선교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백성으로서 참된 거룩이란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 거룩해야합니다.
특히 우리는 교회 일을 하며, 교회 돈을 사용할 때 철저하며 거룩해야합니다.
-우리가 주일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내 호주머니에 있을 때는 그냥 돈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는 거룩한 제물이 됩니다. 이때 우리가 교회 일을 하고 하나님을 함에 있어서 우리가 쓰는 돈은 결코 단순한 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제물들입니다--그래서 무엇보다 거룩하게 써야하고 신중하게 써야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아무리 그 사람이 교회일에 열심히 봉사한다 하더라도--조금이라도 교회돈을 함부로 써는 사람이 있다면--절대 그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그것은 아무리 적은 액수라 하더라도 하니님의 돈이기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제 휴대폰으로 5000원이 결제가 되었습니다-그런데 보니까 그 5000원은 제가 완전히 제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된 돈이 었습니다--그래서 제가 당장 헌금봉투에 휴대폰에서 잘못 사용된 돈 5000원을 집어 넣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를 준비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것만이 거룩한 것이 아닙니디---하나님앞에서 물질 부분에 있어서도 거룩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거룩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거룩해야합니다----
--
또 우리는 하나님백성으로서 언어사용에 있어서도 거룩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 종교적인 일들인데, 유일하게 우리 입술은 거룩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보고 제일 먼저 회개한 것은 입술의 부정이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신앙인격을 나타냅니다--내가 아무리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우리의 말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낙심을 주고 상처를 준다면--결코 그 사람은 결코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하나님앞에서 말이 내 언어가--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그 말은 부흥사처럼 쉰 목소를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는 말들이 서로 하나님백성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워주는 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결국 참된 거룩은 내가 어떤 종교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 내 모든 삶속에-- 인격 속에--예수님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
--우리는 오직 예수님으로 옷을 입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바울처럼 내 심장이 도려지고--내 안에 예수님의 심장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할 때 예수님의 심장으로--예수님의 눈으로--모든 일을 해야합니다--
--
그런데 이것은 한순간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조금씩 죽어 가야합니다.
-그래서 내 삶속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형상들이 날마다 나타나길 바랍니다.
--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며--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모든 복들을 예수님과 함께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주제 > 구약의 중심주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라기의 중심주제  (0) 2011.04.09
하박국의 중심주제  (0) 2011.04.09
호세아서의 중심주제  (0) 2011.04.09
선지자와 그리스도인  (0) 2011.04.09
열왕기, 역대기의 중심주제  (0) 2011.04.0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