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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중심주제/구약의 중심주제

호세아서의 중심주제

by 금빛돌 2011. 4. 9.


1.호세아서의 중심주제를 말하시오.

호세아 서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저주를 긴장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밑에서 설명).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말인가? 아니면 미워하신다는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말로 집약 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아무런 공의와 정의없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의 칼을 가지시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호세아서의 중심주제이다(아모스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중심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고멜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라고 한 사건이다. 호세아가 음란한 고멜과 결혼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음란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호세아와 고멜사이에 낳은 두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스라엘족속의 나라를 폐할것이다)이라 하고, 로루하마(내가 다시는 이스라엘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음란한 이스라엘에 대한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저주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이 공의가 없는 무턱댄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너무도 많이 오해하고 있다(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의 부족,피상성). 구원파를 포함한 일부 극단적인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현재,미래의 죄까지 사해주셨기때문에 걱정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공의가 빠진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안식교)과 같은 일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율법적 의무와 두려움만을 조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담은 사랑의 모습을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가장 잘 알수 있다.만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가 없는 사랑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을 필요가 없다.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에 죽으셔야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지신 것은 먼저 하나님의 공의의 입장에서 볼 때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십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공의의 모습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내려져야 할 공의의 십판을 자신에 대신 져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완벽한 공의를 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의의 하나님앞에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아야 한다.

문/1.하니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에 대해서 좀 더 토론해보시오.
문/2.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입장에서 호세아서를 분류해보시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1장 2절
7절
10절,11절
2장 1절
14-23절
3장 1절-5절
4장,5장
6장 1절-3절
7장-10장
11장 1절
8절-11절
12장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심판)
1장2-6절,8,9절
2장2-13절
4,5장전구절
6장4-11절
7-10장 전구절
11장2-7절,12절
12장전구절


A.위의 구절들을 모두 찾아보고 각 단락의 주제를 적어보시오.
B.이상을 통해서 보았을 때 이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어떻게 긴장을 이루고 있는가?
C.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왕하8:29-9:37,10:11.15:10)
D.이 시대에 나타난 사랑과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비교해보시오?(자녀교육문제,가정에서의 문제,학교나 직장에서의 관계)

2.B.C.8세기의 선지자(아모스, 호세아)들의 신학이 무엇인가?

다윗언약 이후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이스라엘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나라의 왕위를 영원 무궁하도록 지키실 것이라고 생각했다(삼하7:9B-14/다윗언약내용-이스라엘을 대적의 위협에서 지키심,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우심,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 하리라). 그런데 솔로몬 이 후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그 후에도 강대국의 침입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이스라엘(유다포함)은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다윗언약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당시의 사람들(왕과 그들의 편이 되었던 궁중 선지자, 혹은 거짓선지자)은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것은 비록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받고 이스라엘왕위에도 큰 위협이 따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며(즉 그들의 하나님 노릇해주시고), 결국 종말(선지서에서는 여호와의 날, 혹은 그 날이라고 표현한다)에 가서는 결국 이스라엘나라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낙관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암6:1,7:10-17, 참조 미3:11). 이에대해 B.C.8세기의 선지자들은 오히려 정반대의 메세지를 선포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율법의 정신에 떠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다는 것
이다. 그런데 이 멸망시키심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더 큰 회복을 위한 멸망이 아니라 완전한 심판을 위한 멸망이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낙관적으로 고대했던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을 향한 회복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암6:18-20) 그러면 왜 이러한 상반된 견해(신학)가(이) 나왔을까요? 그것은 다윗언약에 대한 당시의 사람들의 오해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사람들은 다윗에게 한 약속이 혈통적 이스라엘왕국을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다윗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혈통적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든지, 또한 민족적 이스라엘의 왕위를 유지시키시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중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남은자)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이 친히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왕국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삼하7: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다윗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은 역사적으로는 솔로몬을 가리키나 궁극적으 로는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네 아들을 통해서 네 나라위를 견고케 할 것이라는 것은 다윗의 혈통적인 아들들인 이스라엘의 왕과 그들의 나라가 아니라, 다윗의 진정한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우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이 다윗의 언약이 자신들의 민족적 보존의 의미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B.C. 8세기의 선지자들은 이러한 다윗언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당시의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과 심판을 선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멸망과 심판은 다윗언약의 파기가 아니라 진정한 다윗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헤와 긍휼의 정신을 이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남은자)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민족적 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중에서라도 이러한 진정한 이스라엘(야곱의 집으로 표현,선택된 이스라엘)과는 함께 계시며 지키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모스서의 중심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암9:8절이다. 암9:8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이스라엘중 진정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다윗언약의 대상)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민족 이스라엘)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아모스서에 나타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선택받은 진정한 이스라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라리라 내 백성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거짓 선지자의 신학을 가졌던 당시의 모든 혈통적 이스라엘)은 칼에 죽으리라"(아모스서의 중심주제를 담은 요절) 그리고 진정한 다윗의 후손(아들)을 통해서 다윗언약
에 나타난 하나님나라를 세우실 것이며 그 나라 위를 영원히 켠고케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암9:11"그 날에(여호와의 날, 종말의 날, 궁극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의 때롤 포괄하는 때를 가리킨다)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다윗 언약적 표현)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호3:5"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 그 왕 다윗(예수그리스도)을 구하고 말 일(아모스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날)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신약시대의 소망)"

문/1.여호와의 날의 의미를 말하시오.(참조,암5:18,욜1:15,습1:14-18)
문/2.남은자란 무엇을 말하는가?(참조.사10:20,21,22,롬9:27,롬11:5)
문/3.B.C.8세기의 선지자였던 호세아의 메세지와 아모스의 메세지를 서로 비교해보시오.(연
구과제,4참조)

3.B.C.8세기의 선지자들의 산학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말씀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키져야지만 우리의 구원이 안전히 보장받는다고 이해해야하는가? 은혜로 구원받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것은 결국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더 철저히 율법을 지켜려고 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 전까지의 400년(중간시대, 계시의 공백기)동안 율법의 근본정신에서 벗어난 율법주의를 태동케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율법주의가 예수님이 전해 준 복음과 사도가 전해준 복음에 충돌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아모스서를 대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결국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 될 수 있기(심판받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힘써 율법을 지켜 나가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라, 율법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정신(출애굽정신)을 구체화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다.

율법의 정신은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동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정신을 유지시키고 기억케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보자. 왜 구약시대때에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포함한 절기들을 지키라 하셨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월절의 정신을 그 절기들을 통해서 기억케하기 위함이다. 구약의 모든 절기들을 유월절을 중심으로 제정되어있음은 구약의 모든 절기들이 바로 그 유월절의 정신을 기억시키기 위한 조치들인 것이다. 또한 안식일에 왜 일을 하지 말하는 명령을 하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일을 하지 않는 우리의 행위자체를 의지하는 것이 안식일의 정신이 아니라, 우리가 일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있음 나타내기 위해서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킨다 하더라도 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한체 율법주의로 빠지게 된 것이다. "율법주의"란 율법의 근본정신(유월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을 망각한체 율법 그 자체에 메어 인간의 노력으로 지켜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아모스서를 통해 가난한자를 압제하고 그들을 돌아보지 못함을 두고 크게 책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왜 그들이 가난한자를 압제하지 말고 돌아보아야 하는가? 그것도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애굽땅 종되었던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기때문이다(신15:15) 이것을 잊지 않기위해 가난
한 자를 돌봐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정신은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시대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사랑받은 자인 것을 기억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포로기 전의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율법을 무시했고,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율법의 근본정신(출애굽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율법주의에 빠져 인간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사탄의 사상을 낳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심판받게 된다는 것도 강조하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을 거부했기에 심판을 받게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즉 아모스서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함은 호세아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헤와 사랑을 잊어버리고 무시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아모스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이스라엘이 멸망된다고 보았고,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저버려서 이스라엘이 멸망된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같은 의미이다(아모스와 호세아 비교).

문/.구약에 나타난 약자보호법(안식년,희년법)에 대해서 설명하시오(연구과제)

둘째로, 율법의 더 적극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을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담고 잇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스랑레백성들이 율법대로 삶으로서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제사장나라)이(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이방인들에게 드러내기위함이다(출19:5-6)

세번째로, 율법은 이스라엘중 진정한 선택받은 참 이스라엘을 가려내는 시금석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율법을 지켜야지만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된다는 이 아니다. 선택받은 자
는 하나님의 주권적의지에 따라서 율법대로 살게되어 있고 결국 그들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에서와 야곱의 팥죽사건) 그러나 이스라엘백성이라 하더라도 선택받지 않은 자는 율법대로 살 수 없고 결국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 심판받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을 결코 기계적으로 적용시켜서는 되지 않는다. 즉 "나는 선택받은 자이기에 말씀대로 살아간다. 그런데 너는 선택받는 자이기에 말씀대로 살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어느 누구도 미리 선택된 사실을 말할 수 없다. 선택된 자는 말씀을 지킴으로 종말에 판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모든 이스라엘에 다 선택받은 자도 아니라 할지라도 계속된 회개의 메세지를 전파했던 것이다. 그 회개의 메세지에 응한 자는 선택된 이스라엘로 판명이 되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율법은 가나안화-세속화-를 막기위한 하나님의 조치들로도 볼수 있다.

그러면 대부분의 이스라엘백성들이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율법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보았을 때 혈통적 이스라엘이라 하더라도 모두 선택받은 이스라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진정한 선택받은 이스라엘이라는 말인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적인 조건때문에 선택받은 백성이라 말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중의 진정한 이스라엘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월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헤의 정신을 잘 이해하여 하나님의 울법대로 살아가는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이고 선택받은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리고 혈통적인 이스라엘이라 하더라도 선택받지 아니한 이스라엘은 결국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여기서 선택받지 않은 이스라엘이 결국 심판받을 수 밖에 없음은 단순히 운명론적인 논리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정리하면 선택받은 이스라엘은 그들이 선택받은 받은 자이기에 유월절의 정신과 율법의 정신에 부합한 삶을 살아감으로 그들이 선택받은 자로서 판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월절의 정신을 망각하여 하나님의 법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결국 선택받지 않은 이스라엘로 판명이 되어 결국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경계를 받아야 한다.로마서의 표현대로라면 이스라엘민족은 참 감람나무였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정신을 잊게 되자 멸망시켰는데 참 감람나무에 접부침을 한 돌 감람나무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정신을 망각한체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선택받고 구원받았다고 자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롬11:20:23) 우리는 아무도 자기의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
고 내가 이러한 조건대문에 선택받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구원의 확신이란 구원이 오직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지, 그것을 내게 적용시켰을 때는 신중해야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조건 교회에 나간다고해서 또한 선교단체에 등록했다고 해서 우리가 다 선택받고 구원받은 자로 확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진정으로 선택받은 자라면 우리가 하나님안에 있음으로 나타나는 열매를 맺힐수 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인체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안에 있는 자로서의 참된 삶의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는 심판받을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해야한다.

선택과 구원의 비밀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선택받은 자는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열매들로서 나중에 판명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호세아(아모스)서를 통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삶의 열매들로서 확인해 보는 삶을 살아야한다.

히12:28-29 "그러므로 우리가 변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혹 감사하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4.호세아의 메세지 전달방식

이러한 주제를 1-3장까지는 호세아의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4-12장까지는 구체적인 메시지로 들려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먼저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메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입술로만 증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먼저 체험되어지고 난 다음에 증거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고멜을 취하고 자식을 낳음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공의를 담은 사랑을 그의 가정생활에서 체험적으로 알게하셨다. 그리고 난 다음 입으로(문자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다.
율법에 보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죽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참 선지자라한다면 호세아는 고멜을 돌로 쳐죽여야만 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를 아내로 취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영적으로 음란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호세아가 몸소 체험해보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우리는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과 사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부담스럽고 역겹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음란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호세아가 몸소 체험하고 느끼라고 한 것이다.(우리가 원수라도 사랑함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원수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또한 고멜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의 이름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도 체험적으로 알게하셨다.

문/(묵상과 적용).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얼마나 느끼고 바르게 알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잘 느끼지 못한 것이 혹 나의 삶의 문제가 아닌가? 자신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랑의 이름을 적어보자. 그리고 그를 정말 사랑하는 친구로서 끌어안아보자.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각자가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보자. 또한 사랑하는 그 친구의 잘못에 대해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에 대해서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를 통해서 생각해보자.

5.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심판을 받게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아모스서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유다와 같이 율법을 멸시하였기때문이다.
율법은 출애굽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정신을 기억하게 하기위해 주신 것이다. 즉 율법에 나타난 출애굽의 정신(어린양의 피로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음)을 무시하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된 것이다(율법무시-일상성-혼합주의-배도-심판).

그러면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게된 결정적인 요인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음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4:1,4:6, 5:1-4)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호4:6절),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그러면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신앙생활을 하기는 했는데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없이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왔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없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을 "종교생활"이라 한다. 종교생활이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믿음의 대상이 누구이며,또한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바른 지식)없이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신을 부르짖는 것이다(벧엘과 길갈에서의 제사-혼합주의). 결국 이렇게 되다보니 하나님을 섬기되 자신을 위한 하나님,자신의 탐욕을 체워주기 위한 하나님으로 밖에 섬길수 없다. 그러나 바른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한 신앙생활이다(믿음의 3요소-지식,인정,의지하고 순종함).그래서 호세아는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한 것이다.

문/.(묵상과 나눔) 지금 이시대도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무시하는 시대가 아닌가?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6.호세아서 강해

하나님의 사랑(1장1-2장15)
호세아서의 중심 주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가정 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1장 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무엇을 명령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인 고멜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호세아에게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들겠습니까?
제가 대학4년에 부산에 어느 교회에 교육전도사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바로 앞에 그런 집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려고 육교를 오르려 하면-항상 누가 뒤에서 잡습니다. 그러면 제가 “와이카노” 하면서 황급히 피해서 교회를 갔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저의 별명이 “와이카노”였습니다.
-또 지난번 교회도 역주위의 교회였습니다. 역주위에도 항상 그런 동네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가다보면 또 항상 그 동네를 지나가야합니다. 그래서 앞에 보면 사람들이 기디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악셀레터를 세게 밟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피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달리는 차를 따라오면서 차를 치면서 따라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같이 순진한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그런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살아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함으로 자녀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하나님의 명령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성결이 생명인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했는지를 생각해봐야합니다----처음 호세아가 결혼했을 때 호세아 자신은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고-고멜은 부정한 여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이 음란한 여인인 고멜이 하나님 앞에서 봤을 때--이스라엘이며,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믿습니까?) -즉 하나님 앞에서 보았을 때는 호세아나 고멜과 우리는 다 부정하고 음란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이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고멜과 같이 음란하고 부정하고 사랑받기에 누추한 죄인이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사랑하시셔서 자신의 아내로 맞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바로 이 호세아는 하나님을 가리키고--이 고멜은 우리 자신입니다-즉 이호세아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음란한 여인과 같은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로 삼으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고멜과 같습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면할수록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가를 깨닫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
왜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잘 났다라고 생각하기때문입니다--내가 이렇게 잘났으니 --구원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은 바리새인입니다--
--말씀을 보면 볼수록--하나님 앞에 나가면 나갈수록 -성령 충만 하면 할수록 --나는 정말 별수 없는 죄인이구나라고 깨달을 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한 가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아내 몰래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습니다-그리고 나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때 정말 그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 괞찮아--다 용서해줄께--내게 돌아오기만 하면되--제발 길게는 그렇게 하지마--라고 하면서 다른 여자와 사귀는 그 남편을 가만히 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남편이 가는 길을 막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밥을 굶긴다든지--아니면 요즘 신문을 보니까--자기 남편을 경찰에 고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그래서 그 남편의 이름을 공개해서라도 그 남편이 가는 길을 막아야합니다..왜 이렇게 합니까?
사랑하기때문입니다--만일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가만 버려둡니다-이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로 이런 상황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내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런 하나님이 사랑을 저버리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2절을 한번더 읽겠습니다. 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여기서 행음했다는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윤리적으로 타락했다는 것만 아니라///영적으로 타락해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섬겼다는 말입니다.
.
그러면 이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그래도 괜찬다고 가만히 버려두는 것입니다-아닙니다. 절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앞으로 나아오게 하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시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시는 지독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이것을 호세아와 고멜 사이에서 난 자녀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름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녀의 이름은 로루하마 즉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고, 셋째는 로암미는 즉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예들들어-집에서 부를때//망할놈아/사랑못할 놈아/하나님이 버린 자식아--뭐하니-부른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로 하여금 자신의 자녀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 사랑을 저버리고 살아가면 내가 너를 망하게 할 것이다(이스르엘).
--또 네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내가 이제 더 이상 네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겠디(*로루하마).
--또 내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이제는 너는 백성이 아니다(로 암미)-즉 내가 더 이상 너와 함게 해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줄 아십니까?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한 순간에 망하게 하면 끝장입니다-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거두어가시며 끝장입니다-=무엇보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여러분 저는 제가 올초부터 재일 제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돈을 조금 잃어버리는 것--또 내가 누구에게 오해와 비난을 받는 것--물론 이것도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으면 끝장이라는 것입니다(은혜가 없으면 목사를 그만두어야합니다--/언론에 나오는 목사님들-한때 유능-은혜가 떨어짐-인간냄새-그러면 끝장이다).

---그래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음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계속해서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호2;2-4입니다.
2절입니다.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것이며
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영적 음행을 저버리지 않으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2장5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마음이 빼앗겼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연애하는 자란 바알을 가리킵니다.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도 섬기지만 바알을 따라갔습니까?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의 가장 큰 관심은 육신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일입니다--그리고 그렇게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 하나님도 섬겼지만 바알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영적인 구원만 주었고, 육신적인 부요함은 바알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8절입니다. “8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구원만 베풀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육신적인 양식과 이 땅의 복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신적인 것은 바알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섬겼지만 바알도 섬겼던 것입니다.--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은 물질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
------그러면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같이 읽읍시다)
6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11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12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13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오늘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없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바알을 섬기거나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절하지는 않습니다--
-
---오늘날의 바알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다--먹고사는 문제입니다--물론 오늘날의 경제가 어렵다 위기다는 것은 알고 잇습니다--정말 새벽부터 노력해서 땀을 흘려서라고 경제적인 위기를 막아야합니다--
그래서 돈벌이기 위해서는 새벽이라도 일어나서 일을 합니다--
밤늦게까지 일을 합니다--그런데 그렇게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는 혈안이 되어 있는데--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시간이 왜 그렇게 아깝게 생각하고(?)-어렵게 생각하십니까?
------
또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새벽부터 밤을 세워 기도할 틈도 없이 일을 했지만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어렵고 힘들지 않습니까?
--또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왜 하나님 내게 복을 주지 않습니까 라고 원망하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
우리가 정신없이 먹고 사는 문제에만 온 마음이 빼앗겨 있고, 물질에만 관심이 있는데-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내어버려두시고--따라다니시면서 내 마음의 소원대로 다 잘되게 해주신다면 --그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 주위에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우위에 두고 그가 원하는 대로 잘먹고 잘 사는 사람이있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이 버린 사람입니다--

--------
그런데 혹 여러분 가운데 이런 분이 잇습니까?
정말 하는 일마다 안됩니다--되는 일이 없습니다--내가 이것을 하려고 하면--갑자가 일이생겨서 그 일이 안되게 되고-또 저것을 하려고 하면 또 하필 다른 문제가 생겨 그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의 삶을 돌아보면 거친 광야와 같은 삶이 아닙니까?
내 삶에 품성한 열매도 없고--양식도없고 쉼도 없습니다//초라ㅓ합니다-
-지금 내 삶-이상하게도 내가 붙들고 의지하고 사랑하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하나 하나씩 다 가져가져 가고 있다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수년 동안 계속해서 내게서 하나 하나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 하나씩 다 빼앗아가시는 것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청년-자녀복-명성등등-좋은 성도들--나는 혼자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합니까?
혹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해놓고 계속해서 내게 이런 어려움을 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
우리로 하여금 일이 안되게 하시고 힘들게 하시고 어렵게 하시고 광야와 같게 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핵심-이다)
-왜 주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마다 어렵게 하시게 하시고 힘들게 하십니까?
그 이유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네 마음을 더 이상 세상니나 물질이나 사람이나 다른 것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오직 주만바라보라는 것입니다--오직 하나님만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가운데 정말 내가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버린 경험을 하신 분이 있습니까?
왜 주님은 내게 내 사랑하는 자녀나 남편을 먼저 데리고 가십니까 라고 하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주님이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바랍니다--
.

--그러면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처벙전이 무엇입니까?
같이 읽읍시다.
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
-내가 저를 개유하여==꼬신다는 말입니다--유혹한다는 말입니다--(제발 제발 내게 오라--제발 제발 --아 기도해라))))기가막힌 표한
-- 어디로 데리고 가십니까? 나가야한다는 말입니까?
거친들로 나가야합니다--빈들입니다--이것은 바로 기도의 광야입니다----
----
내가 붙들고 의지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다 던져버려야 합니다=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리로 나가야합니다--그러면 거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치유를 주십니다-회복을 주십니다-더 큰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
왜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살아갈 길이 있기때문이다--


지독한 하나님의 사랑
호1장1-2장15
호세아서의 중심 주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가정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1장 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무엇을 명령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인 고멜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호세아에게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들겠습니까?
제가 대학4년에 부산에 어느 교회에 교육전도사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바로 앞에 그런 집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려고 육교를 오르려 하면-항상 누가 뒤에서 잡습니다. 그러면 제가 “와이카노” 하면서 황급히 피해서 교회를 갔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저의 별명이 “와이카노”였습니다.
-또 지난번 교회도 역주위의 교회였습니다. 역주위에도 항상 그런 동네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가다보면 또 항상 그 동네를 지나가야합니다. 그래서 앞에 보면 사람들이 기디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악셀레터를 세게 밟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피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달리는 차를 따라오면서 차를 치면서 따라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같이 순진한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그런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살아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함으로 자녀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하나님의 명령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성결이 생명인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했는지를 생각해봐야합니다.
처음 호세아가 결혼했을 때 호세아 자신은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고-고멜은 부정한 여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이 음란한 여인인 고멜이 하나님 앞에서 봤을 때--이스라엘이며,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믿습니까?) 즉 하나님 앞에서 보았을 때는 호세아나 고멜과 우리는 다 부정하고 음란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이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고멜과 같이 음란하고 부정하고 사랑받기에 누추한 죄인이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사랑하시셔서 자신의 아내로 맞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바로 이 호세아는 하나님을 가리키고--이 고멜은 우리 자신입니다-즉 이호세아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음란한 여인과 같은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로 삼으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고멜과 같습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면할수록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가를 깨닫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잘 났다라고 생각하기때문입니다--내가 이렇게 잘났으니 --구원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은 바리새인입니다.
말씀을 보면 볼수록--하나님 앞에 나가면 나갈수록 -성령 충만 하면 할수록 --나는 정말 별수 없는 죄인이구나라고 깨달을 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한 가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아내 몰래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습니다-그리고 나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때 정말 그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 괞찮아--다 용서해줄께--내게 돌아오기만 하면되--제발 길게는 그렇게 하지마--라고 하면서 다른 여자와 사귀는 그 남편을 가만히 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남편이 가는 길을 막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밥을 굶긴다든지--아니면 요즘 신문을 보니까--자기 남편을 경찰에 고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그래서 그 남편의 이름을 공개해서라도 그 남편이 가는 길을 막아야합니다..왜 이렇게 합니까?
사랑하기때문입니다. 만일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가만 버려둡니다-이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로 이런 상황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내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런 하나님이 사랑을 저버리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2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여기서 행음했다는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윤리적으로 타락했다는 것만 아니라///영적으로 타락해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섬겼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그래도 괜찬다고 가만히 버려두는 것입니다-아닙니다. 절대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앞으로 나아오게 하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시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시는 지독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호세아와 고멜 사이에서 난 자녀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름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녀의 이름은 로루하마 즉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고, 셋째는 로암미는 즉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예들들어-집에서 부를때//망할놈아/사랑못할 놈아/하나님이 버린 자식아--뭐하니-부른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로 하여금 자신의 자녀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 사랑을 저버리고 살아가면 내가 너를 망하게 할 것이다(이스르엘).
--또 네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내가 이제 더 이상 네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겠디(*로루하마).
--또 내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이제는 너는 백성이 아니다(로 암미)-즉 내가 더 이상 너와 함게 해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줄 아십니까?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한 순간에 망하게 하면 끝장입니다-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거두어가시며 끝장입니다-=무엇보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여러분 저는 제가 올초부터 재일 제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돈을 조금 잃어버리는 것--또 내가 누구에게 오해와 비난을 받는 것--물론 이것도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으면 끝장이라는 것입니다(은혜가 없으면 목사를 그만두어야합니다--/언론에 나오는 목사님들-한때 유능-은혜가 떨어짐-인간냄새-그러면 끝장이다).

---그래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음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계속해서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호2;2-4입니다.
2절입니다.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것이며
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영적 음행을 저버리지 않으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2장5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마음이 빼앗겼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연애하는 자란 바알을 가리킵니다.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도 섬기지만 바알을 따라갔습니까?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의 가장 큰 관심은 육신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일입니다--그리고 그렇게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 하나님도 섬겼지만 바알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영적인 구원만 주었고, 육신적인 부요함은 바알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8절입니다. “8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구원만 베풀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육신적인 양식과 이 땅의 복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신적인 것은 바알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섬겼지만 바알도 섬겼던 것입니다.--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은 물질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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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같이 읽읍시다)
6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11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12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13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오늘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없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바알을 섬기거나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절하지는 않습니다--
-
---오늘날의 바알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다--먹고사는 문제입니다--물론 오늘날의 경제가 어렵다 위기다는 것은 알고 잇습니다--정말 새벽부터 노력해서 땀을 흘려서라고 경제적인 위기를 막아야합니다--
그래서 돈벌이기 위해서는 새벽이라도 일어나서 일을 합니다--
밤늦게까지 일을 합니다--그런데 그렇게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는 혈안이 되어 있는데--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시간이 왜 그렇게 아깝게 생각하고(?)-어렵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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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새벽부터 밤을 세워 기도할 틈도 없이 일을 했지만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어렵고 힘들지 않습니까?
--또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왜 하나님 내게 복을 주지 않습니까 라고 원망하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
우리가 정신없이 먹고 사는 문제에만 온 마음이 빼앗겨 있고, 물질에만 관심이 있는데-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내어버려두시고--따라다니시면서 내 마음의 소원대로 다 잘되게 해주신다면 --그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 주위에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우위에 두고 그가 원하는 대로 잘먹고 잘 사는 사람이있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이 버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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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혹 여러분 가운데 이런 분이 잇습니까?
정말 하는 일마다 안됩니다--되는 일이 없습니다--내가 이것을 하려고 하면--갑자가 일이생겨서 그 일이 안되게 되고-또 저것을 하려고 하면 또 하필 다른 문제가 생겨 그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의 삶을 돌아보면 거친 광야와 같은 삶이 아닙니까?
내 삶에 품성한 열매도 없고--양식도없고 쉼도 없습니다//초라ㅓ합니다-
-지금 내 삶-이상하게도 내가 붙들고 의지하고 사랑하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하나 하나씩 다 가져가져 가고 있다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수년 동안 계속해서 내게서 하나 하나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 하나씩 다 빼앗아가시는 것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청년-자녀복-명성등등-좋은 성도들--나는 혼자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합니까?
혹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해놓고 계속해서 내게 이런 어려움을 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
우리로 하여금 일이 안되게 하시고 힘들게 하시고 어렵게 하시고 광야와 같게 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핵심-이다)
-왜 주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마다 어렵게 하시게 하시고 힘들게 하십니까?
그 이유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네 마음을 더 이상 세상니나 물질이나 사람이나 다른 것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오직 주만바라보라는 것입니다--오직 하나님만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가운데 정말 내가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버린 경험을 하신 분이 있습니까?
왜 주님은 내게 내 사랑하는 자녀나 남편을 먼저 데리고 가십니까 라고 하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주님이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바랍니다--
.

--그러면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처벙전이 무엇입니까?
같이 읽읍시다.
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
-내가 저를 개유하여==꼬신다는 말입니다--유혹한다는 말입니다--(제발 제발 내게 오라--제발 제발 --아 기도해라))))기가막힌 표한
-- 어디로 데리고 가십니까? 나가야한다는 말입니까?
거친들로 나가야합니다--빈들입니다--이것은 바로 기도의 광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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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붙들고 의지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다 던져버려야 합니다=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리로 나가야합니다--그러면 거기서 주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치유를 주십니다-회복을 주십니다-더 큰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포기하지 는 사랑(호1-2)
요즘 시대 사람들은 조급한 것 같습니다. 젊은 남녀들이 금방 만났다가 금방 헤어집니다. 많은 가정들도 처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했다가 금방 헤어집니다. 심지어 자녀를 사랑하고 책임져야할 부모들이 자녀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연초에 혹은 우리가 무슨 일을 처음 맡았을 때는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쯤 되면 그 사랑이 식어질 때입니다. 지칠 때 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심을 합니다. 이번 연말에는 절대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이 그럴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호세아서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또 부부간의 사랑이란 무엇인지--참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3장까지에서 계속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떠나지 않는다고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즉 내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매주 우리에게 그 어떤 새로운 지식보다 하나님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계속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 듣고 듣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411장).
호세아서에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모습이고--고멜은 이스라엘과 우리들의 모습을 나태내주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한 것처럼 --고멜과 같이 영적으로 음란하고 죄악된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내로 맞아주신 사랑입니다. 또 그 사랑의 열매로 자녀까지 낳습니다. 그런데 고멜은 이런 사랑을 받고도 어떻게 합니까? 고멜은 그렇게 사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에게 가서 사생자를 낳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어떻게 합니까? 그 사생자로 낳은 아들조차도 자신의 아들로 삼아주기까지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못난 모습조차도 받아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합니다. 2장에 보면 연애하는 자를 쫒아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쫓아갈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가만두지 않습니다. 시기하기까지 질투하기까지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풀어주어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 징계와 채찍을 통해서, 또 그들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버리기까지 해서라도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듣고도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듣지 않습니다-생각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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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과 고멜이 하나님을 떠나고 호세아를 떠나 도망해버립니다.
3장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자손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호세아가 이스라엘과 고멜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남편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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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하나님과 호세아가 지독하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고멜이 하나님과 남편의 품을 떠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남자에게 가면, 또 다른 신에게 가면 건포도 떡이 있기 때문입니다.
건포도 떡이 무엇입니까? 건포도는 달콤함을 줍니다. 또 떡이니까 배부름을 줍니다. 이것을 통해서 순간적인 즐거움과 만족을 줍니다.
--이스라엘과 고멜이 왜 하나님을 떠나고 사랑하는 남편을 떠납니까? 무언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 찾으면 , 남편 외에 다른 것을 찾으면 무언가 달콤함을 줄 수 있습니다. 배부름을 줄 수 있습니다.
-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고, 결혼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달콤함과 배부름이 신앙생활의 목적이고, 결혼생활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이 알지 못하는 달콤함이 있습니다-또 그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배부르고 풍성한 삶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을 단순히 달콤함과 배부름에 두면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은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특히 결혼하신지가 얼마되지 않는 분들-젊은 분들은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분명 결혼생활은 그전과는 다른 달콤함이 있습니다. 또 혼자 살때보다는 여유와 배부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니까 매일 달콤하고 배부른 생활을 했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예 그럴때도있었죠--그러나 저는 혹 주님을 따르는 길이 고난이고--또 배고픔이라 하더라도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이것이 정말 신앙생활입니다--

--결혼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에게도 물어보십시오--남편하고 사니까 매일 달콤하고 배부른 생활을 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또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예 그럴때도있었죠--그런데 어떨때는 내 남편이 왠수처럼 보일때도 있었습니다 아니 내 남편이 고통의 근원일때도 있었습니다-또 남편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그러나 나는 남편을 사랑합니다--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이렇게 다른 남자에게로 다른 신에게로 가면 순간적인 기쁨을 준다고 해서 가보았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고멜이 몹쓸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남자를 만나서 처음에는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엇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여인을 이용해 먹을 때로 이용먹고 나서 이 여인을 노예창녀로 팔아버립니다.
이제 고멜이 노예창녀가 되었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인신매매에게 잡혀 끌려간 몸을 파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그들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포주에게 잡혀 성 노리게감으로 전락합니다.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빚이 져서 그 빚 때문에 떠날 수도 없는 모습들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철장에 갇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하고-호세아가 사랑하는 고멜의 상태가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갑니다. 그런데 못된 남자를 만나 잡혀가서 그런 곳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 이상 돌아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찾지도 않을 지도 모릅니다. 찾더라도 이혼하자고할지 모릅니다. 또 속으로는 벌 받았다 잘됐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런 고멜에 대해서 다시 그에게 다시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주어라고 합니다.
1절 하반절에 “여호와가 저(고멜)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노예창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하려고 하는데-이제는 인간적인 단순한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마음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멜은 노예창녀로 팔려갔습니다-그래서 이제 그녀를 데리고 오려면 값을 지불해야합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십십시오-같이 읽겠습니다.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2절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여기서 노예가 되어져 있는 이 여인을 값을 지불하는 것을 속전이라고 합니다--또 값을 지불해서 노예의 상태에서 구출해내어 자신의 소유로 삼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구속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은15개와 보리 한 호멜반은 우리에게 무엇을 연상시켜 줍니까?
예수님이 은30에 팔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즉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예시해줍니다).
---이 호세아가 은15개가 속전이 되어 노예상태에 있던 고멜을 구속시켜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가 속전이 되어-----죄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를 구출하여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하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하신,는데 --그래도 그 사랑을 받지 들이지 않고 도망갑니다--그때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버려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사실 우리는 매주 마다 성찬식을 해야합니다--예배의 의미-주일의 의미-매주 마다 주님의 구속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십자가는 날마다 매주 기억되며 묵상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피는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합니다--날마다 피의 의미를 깊이 묵상을 해보십시오---
그 십자의 피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해야합니까?
--하나님이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따라가 노예가 되어진 우리에게 끝까지 찾아와 피흘려주시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끈질긴 사랑을 묵상해야합니다. -

또 은15개로 고멜은 산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호세아가 고멜을 은15으로 산 것은 고멜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창녀노예가 아니라-힘있는 남자노예를 살수있습니다-이 여인의 가치보다 엄청난 돈을 지불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엄청난 값을 지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에 이런 일이 있을수 있다고 합니다-만일 노예를 값을 주고 데리고 왔습니다-그런데 다시 포주가 그 노예를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런데 그 노예를 달라고 한다면 조건이 있습니다=이 노예를 판 돈을 다시 돌려주어야합니다-이것이 무슨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 여인의 가치보다 더 이상의 가치로 속전을 지불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더 이상 그 포주가 더 이상 데리고갈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도무지 값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절대로 내 손에서 이 여인을 데리고 갈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값비산 속전을 지불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들은 죄와 사망의 노예상태에서 구속받았습니다-=그런데 세상과 사탄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다시 죄와 사탄의 노예상태로 우리를 다시 데리고 갈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
이제 하나님의 소유된 내 자녀를 데리고 갈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왜 그렇습니까?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꺼집어 내려면 하나님이 아들의 피값과 같은 것을 치루어야합니다. --사탄도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도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이 세상과 권력과 부귀영화의 권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그 어떤 권세와 힘으로 하나님의 사랑안에 잇는 우리를--그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를 데리고 갈 수없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 사실을 믿으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망이나 음부나 죄악의 권세--천인이 만인이 나를 누르고 위협하고 겁주고 좌절케 하고 넘어지게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그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손에서 빼낼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또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샀다는 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줍니까?
또 고멜과 같은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이 보실 때는 피 값으로 샀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것이 됩니다--바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나는 부족 연약하고 실패하고 죄악되다고)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이 가운데 고멜 보다 못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고멜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사랑했는데-조금 실수하고 부족한 우리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인간적인 조건을 봅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을 보지 않습니다-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함께하십니다-포기하지 않습니다--(그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지내시기를 원하십니다--3장3절--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가 조금 부족하다 해서 실패했다 해서 자신에 대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말아야합니다-넘어지더라도 오뚜기처럼 일어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가정을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우리 남편이나 자녀도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가운데 있을수 있습니다-실패와 좌절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우리 자녀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 가정을 포기하지 않았는데--우리도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끝까지 인내하고 사랑해야합니다--마지막 생명을 버리기까지 사랑해야합니다(하나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다 하고 나가게 하소서-지식 열심-사람)
-호4장에 가면 어떤 사랑을 요구하십니까?
진실과 인애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단순히 진리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진실과 아울러 책임지는사랑이 필요합나다-다---희생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호세아서에서 나타난 하나님이 사랑은 말로만 하는그런 사랑--비판만 하고 진리만을 말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자신의 몸을 던지는 그런 인애의 사랑을 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진실 인애 지식(호4장1-9)
호세아서 1-3장 까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독하고 끈질긴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법정에 세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절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과 쟁변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쟁변이라는 말은 법정에 세워 놓고 잘못을 고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지금 법정에 세워놓고 고소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있어야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있어서 있어야 할 것인데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1절).

그런데 호세아 시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없어야 할 것인데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여기서 저주란 무슨 말입니까? 서로를 칭찬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벌 받을 것이라 저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위는 서로 거짓으로 속이고 사기를 치는 것을 말합니다. 살인은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투절은 서로의 것을 힘으로 빼앗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무엇입니까?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완악하여 용서하지 않고 끝까지 죽기까지 서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지금 이런 “저주 사기 살인 도적질 간음 싸움”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다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인 이스라엘백성들 사이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
이 세상이 서로 죽고 죽이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지금 오늘 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 교회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상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서로 고소하고 고발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우리교회 어떤 장로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제일 재판하기 어려운 것이 교인들끼리 싸움이라고 합니다. 대개 판사는 서로 합의하고 화해를 청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한다고 합니다-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선지자가 되어서 남을 심판하듯이---끝까지 간다고 합니다.
--우리교회에 다니는 어떤 자매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그 자매는 기독교 출판사를 다니는 자매입니다-그런데 어떤 책을 출간했는데 실수를 해서 번역자의 이름을 표지에 누락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다시 1000만원을 더 덜여서 다시 책을 재 출간했다고 합니다--그런데 그 번역자는 그 출판사를 명예 훼손죄로 고소했고--지금 까지 고소가 진행중이라고 합니다-그래서 그 자매가 울면서 찾아서 용서를 빌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그 책의 제목은 건강한 교회가 한국교회를 살린다(그분은 지금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
하나의 작은 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없어야 할 것들입니다.
--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렇게 없어야 할 것들이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것은 있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없어야 할 것들이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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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무엇입니까?
진실입니다--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정직입니다. 공의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진실해야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예배의 자리만 아니라 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을 믿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무엇보다 진실해야합니다. 정직해야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진실과 정직이 없이 서로 속고 속이는 것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
또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애입니다. 인애란 단순한 사랑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호세아서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애의 사랑입니다. 인애란 헤세드란 말로서 희생하는 사랑, 책임지는 사랑을 말합니다.
--만일 진실하지 않는 가운데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런데 진실을 말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진실하고 정의로 와야 합니다. 그러나 진실하면서도 책임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회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는가 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진실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바른 말하는 것만으로 내가 할 노릇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 하는 가운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개혁을 말하지만 과연 그 속에 책임지고 희생하는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보수는 진실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진보는 책임지며 희생하는 사랑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공의와 사랑의 입맞춤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인애란 무엇입니까? 예를 든다고 왜 선교사파송하지 않는가 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난 후 자신이 얼마라도 책임 있게 선교헌금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아무도 선교사로 안 간다면 자신이 선교사로 가야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계속해서 선교이야기를 하시다가 자신이 선교사로 직접 가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애입니다.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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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보면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교회에 헌금을 못하겠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 헌금을 정말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바로 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해 일수도 있고, 또 진실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과연 그 사람이 정말 가난한 사람을 위해 과연 얼마나 돈을 쓰고 있습니까? 그것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자신은 가난한 자를 위해 한 푼이 돈 도 쓰지 않는 사람이 교회가 구제에 약하다고 헌금하지 안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애가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 사람이 진실이 있고 인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에 책임지는 삶이 있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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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거짓 선지자는 입으로만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하기를 선지자 노릇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주여 주여 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참 선지자는 입으로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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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호세아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모습입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아내에게 진실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진실과 함께 인애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1장에 보면 고멜이 둘째 아이를 낳은 젖땐 후에 다른 남자에게 가서 낳은 아이도 받아주었습니다. 또 3장에 보면 다시 또 도망을 가서 이제 노예 창녀가 되었을때--은15개와 보리한 호멜반으로 값을 지불해서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만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과 함께 인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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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애의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진실과 희생하고 책임지는 인애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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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당시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었습니까?
--그 이유는 6절입니다.
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것이 호세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그런데 이것이 참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가장 부흥했을 때 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거대한 제사를 드릴 때 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종교적으로 열심인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말씀이 없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무언가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그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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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종교적으로 열심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합니다.
오래전에 데니스 레인 목사님 강해 설교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은 영국교회가 50, 60년 전에 우리 한국교회와 같았다고 합니다. 교회는 넘쳐나고 많은 선교사를 보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국 교회는 한 목사님이 여러 교회를 맡아야할 정도로 거의 황폐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살펴보니 교회가 부흥했을 때, 목회자와 평신도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50년이 지난 뒤 영국교회는 거의 고사위기에 있고, 오히려 그곳에 한국 목회자가 가야할 상황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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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집회 같은 곳은 차고 넘칩니다. 우리의 신앙이 말씀의 지성보다는 너무 감정에 치우쳐 있습니다. 한국교회 초장기와 같은 말씀 사경회는 없습니다. 또 말씀 집회라는 것도 강사의 재미있는 말만 있고,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습니다. (조병수교수-향후 50년의 과제- 신앙의 감정주의--세속화--이것을 이겨야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두 종류의 신자-말씀안에서 강한신자와 약한 신자--말씀안에서 강한 신자로 키워야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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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당시의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 말씀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당시의 일반백성들의 책임이었겠습니까? 아니면 제사장이나 선자자들의 책임이겠습니까?
모두의 책임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네 백성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사장은 참 제사장입니다.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제사장과 다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바른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그것을 하나님말씀으로 안 듣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른 말씀전하면 싸워서 못 전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누구든지 순종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내게 부담스럽다고 해서 선지자와 싸운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설교가운데 “한국교회는 말씀으로 상처받기 싫어한다. 그래서 절대 말씀으로 상처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운데서 참 된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상처 받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적인 말로 상처주면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에 대해서는 상처를 주어야합니다. 그래야 참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자와 다투는 자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6절에 보면 바른 말씀의 지식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시고, 또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잊어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축복을 거두어 가신다는 말이다-제사장 축복을 받아 복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

또 백성들만 문제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장들도 문제였습니다.
8절에 보면 저희(제사장)가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 죄악에 두는도다고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속하기 위해서 바치는 속죄 제물은 제사장의 양식(레6장 26절)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오히려 백성들이 범죄 하기를 더 바랐다는 것입니다. 즉 당시의 제사장들은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제물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 당시의 선지자들도 죄와 회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고, 오직 이스라엘백성들이 절대 망하지 않고 잘 될 것이라고만 말했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9절 내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런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의 문제 때문에 어떤 결과가 있다고 합니까?
3절입니다.
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여기서 왜 이스라엘에 진실과 인애가 지식이 없는 것 때문에 이 땅이 슬퍼하고, 바다에 고기가 없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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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진실함과 참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교회가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 때문에 이 땅을 벌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왜 그들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까?
제사장이 말씀에 순종하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복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바로 살면 그 제사장 때문에 이 땅에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제사장이 바로 살지 못하면 그도 복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단순한 민족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진실과 인애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조차 잊어버리게 되니까 땅조차도 저주를 받게 되고, 바다의 고기조차도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의 책임은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 되어야할 교회에 있다고 봅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정직성과 사랑을 회복하지 못해서 이 땅에 모든 문제가 생겼습니다.

---몇 년 전에 남미에서 있었던 부흥에 관한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성령의 역사가 있으니까 무당이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의 윤리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을에서 심은 농작물이 다른 곳에 있던 농작물보다 더 크고 싱싱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이 땅의 교회가 교회답게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며 정직하며,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참 인애의 사랑을 회복하고, 우리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 때문에 이 땅이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를 책망하시거나 누구를 책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비효과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나비효과란 말을 “나 하나의 변화로 말미암아 비로소 시작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효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
누구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나 하나가 진실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모두 이기적으로 살아가며, 아무도 책임지지 못하며 비판과 비난만 하는 세상에서 나 하나라도 희생하고 책임지는 인애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
내가 변하면 교회가 변하고 교회가 변하면 이 세상이 변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온 세상가운데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영광으로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빼앗긴 이스라엘(4장6-19)
오늘 이 시대는 말씀은 많으나 말씀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 말은 많은 말씀이 증거가 되지만 바른 말씀을 증거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바른 말씀이 증거 되더라도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많지만 우리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 가운데 말씀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호세아시대의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열심은 있었지만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6장 6절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호8장 12절에는 “12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말씀을 버리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합니다(6절).
또 17절에 보면 말씀을 떠나 우상과 연합한 에브라함(*이스라엘대표자파)를 버려두겠다고 말씀하십니다(17).

그러나 또 한편 호세아는 계속해서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6장 3절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이른 비는 파종 전에 메마른 땅에 내리는 비를 가리키고, 늦은 비는 추수 전 메마른 땅에 내리는 비로서 늦은 비가 내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면 하나님께서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여서--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에 열매를 맺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그렇게 열심인데, 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되었습니까?

1)표면적인 이유가 호4장 7절에 있습니다.
7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이스라엘은 번성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번성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물질적으로 부요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무조건 가난하게 살아야합니까? 우리가 가난해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찾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물질적으로 풍요하신 분인데,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물질의 풍요를 가지고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열심히 그 물질로 이웃을 섬기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번성하기 때문에 말씀을 버리는 것도 표면적이 이유가 되겠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백성이 번성하는 것보다 더 큰문제가 11절에 있습니다.

2)11절입니다.
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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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 어디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하고 있습니까?
음행와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에 마음을 빼앗겨서--그들 마음 가운데 전혀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말씀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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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고, 또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주일 아침에 그 전날까지 정말 피곤하게 사신 분들 봅니다. 그런데 말씀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말씀에 더 집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분들은 전혀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디에 마음이 빼앗겼다고 합니까?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입니다.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그 당시의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안식일에는 여호와의 제단에 나옵니다. 그런데 제단에 나오지만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송아지 우상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그 앞에 여호와께 드릴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평일에는 바알신전에 갑니다. 왜냐하면 영적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이지만 물질의 풍요는 바알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은 남신으로 비를 주관하신 신이었고, 아스다롯은 여신으로 다산을 주관하는 신으로 여겼습니다. 또 땅에 많은 비가 오고, 많은 곡식이 있게 하기 위해서 바알신과 아스라롯신이 성적 결합이 있어야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바알신을 대신한 남자 제사장(케데심)과 여자제사장(게데소트)를 세웁니다. 그래서 두 제사장이 간음행위를 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알제사입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또 이스라엘남자들이 바알신전에 가서 여자제사장과 간음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여자들도 바알신전에 가서 남자 제사장과 간음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바알을 기쁘게 하여 비가 오게 되고, 또 아스다롯을 기쁘게 하여 포도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
-또 이렇게 하고 돌아온 이스라엘의 남자와 여자들은 좋은 나무 그늘만 있으면 어디서나 간음을 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13 중반“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
14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남자와 여자 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벌하지 않겠다--아것은 이스라엘을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15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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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백성들이 간음을 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질적 풍요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즉 그들은 돈에 온통 그들의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그들은 그 돈을 얻기 위해서 말씀이고 뭐고 다 버립니다. 간음을 해서라도 곡식만 많아진다면--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들은 간음을 통하여 성적인 쾌락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니 그들 마음가운데 도무지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바알을 섬기고, 간음을 한 열매로 포도가 열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포도는 누가 열게 하신 것입니까? 만물을 주관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알이 포도열매를 맺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포도를 가지고 무엇을 만듭니까? 포도주를 만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물이 좋지 않기 때문에 포도주가 음료수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포도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완전히 그들을 취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포도주 몇 년산인가 내일은 포도주가 몇 년 산인가--하고 또 오늘은 새 포도주인가 라고 하면서 포도주에 취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도무지 그들 마음 가운데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에 완전히 그들의 마음이 빼앗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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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되어도 그들은 여전히 안식일이면 여호와를 섬기는 제단에 갑니다. 그런데 이 제단이 있는 곳이 사마리아고 벧아윈이고 길갈입니다(15절에 길갈과 벧아윈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송아지 우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우상을 우상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 우상은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스마일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고 하지만-그것은 참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제사가운데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들의 죄에 대한 경책이 없습니다. 무조건 잘되고 복 받게 하겠다는 말만 있습니다. 그들의 안식일의 제사는 오히려 그들의 죄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이렇게 하고 평일에는 여전히 바알을 섬깁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제 이스라엘백성들은 평일에 바알만을 섬기지 않습니다.
12절,13절을 보십시오.
12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13 저희가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17 에브라임(이스라엘의 대표지파)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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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스라엘은 육신적인 음행만 아니라 우상을 섬김으로 영적으로 음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된 동기며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줄 깨달아야합니다. 12절에서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무엇에 마음을 빼앗겨 있는가를 깨달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온통 우리 마음이 돈에 빼앗겨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합니다.
오늘 이시대의 바알은 바로 돈입니다.
요즘 쩐의 전쟁이라는 드라마에서 한국사회에서 돈이 어떤 위치를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쩐의 전쟁 명대사가 있습니다.
태초에 돈이 있었다. 최후의 심판 그들 돈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인류는 멸망해도 돈을 멸망하지 않는다(박신양).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돈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대한민국에는 돈이면 다 됩니다. 낙타가 아니라 코끼리도 항공모함도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요. 법보다 주먹 주먹보다 돈이 앞서는 세상입니다(박신양).
이 말은 대한민국에서는 돈이 하나님과 같이 전능한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 음란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겨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합니다.
한 달 전에 티브이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에 어느 인터넷으로 sbs 티브만 볼 수 있는 곳에 가입했습니다. 거기에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같이 건전하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공중파 티브인데도 건전한 영화를 가족들과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를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 영화가 건전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 음란에 우리 마음을 빼앗아갈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음란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면 4가지를 잃게 됩니다.
첫째는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단 마음(하나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음분열
둘째는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를 떠나게 합니다.
셋째는 우리안에 구원의 즐거움 기쁨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넷째로 우리안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원하는 마음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이런 음란한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 다음 술입니다.
우리는 담배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데 술에 대해서는 너무 관용적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잠언 23장 19절부터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19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 20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21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29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창에의 한 상처)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30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32    이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33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34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그 외에도 우리마음을 빼앗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지나친 염려가 우리 마음속에 말씀을 빼앗아가는 가시라고 합니다(마13장). 내일 일을 위해서 지나차게 염려하면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d염려와 걱정과 근심의 가시를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에게는 현실이라는 우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말씀을 빼앗아갈 수 있습니다.
옥한흠목사님 성경공부교제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현실 교회에서 바른 말씀을 전하면 성도들이 떠나게 되는데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말씀보다 더 큰 현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교회조차도 말씀대로만 하면 성장을 안 된다는 현실적 논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들이 사는 현실은 어떻겠습니까? 말씀대로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야죠. 또 인애의 삶을 살아야죠.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구약 이스라엘이 말씀을 버려서 망하게 되었다는 이런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현실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말씀을 외면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실패한 이스라엘백성들의 말입니다. 그들도 현실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바알을 섬길 수밖에 없었고, 또 음행을 하고 술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현실을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단순히 돈입니까? 바알입니까? 사람입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지금 이 현실세계를 주관하시는 분도 바알이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쩐의 전쟁에서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진심은 통하고 진실은 승리한다. 아무리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도 끝까지 양심을 지키고--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현실에서도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외면해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50년 뒤를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50년 뒤에도 그런 교회가 잘 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진보의 역설(그레그 이스터브룩)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욕구’만이 아닌 ‘의미의 욕구’까지 충족해야 행복한 사회가 성립된다. 그러한 ‘의미의 욕구’를 채워주는 방법은 용서하고 감사하고 낙천적인 태도, 즉 이타적이라고 여겨지는 특성들의 실천이다. 이러한 실천행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며, 그것은 다시 이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제는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도 소유의 욕구를 체우는 것만으로 행복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도 이제 의미의 욕구, 즉 말씀대로 사랑하며 감사하며 용서하며,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성공이요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가 현실의 논리를 내세워 말씀대로 살수 없다는 것도 핑계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새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는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말씀을 회복하기 위해서 가져야할 마음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1)광야의 마음입니다(호2장14-15). 광야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마음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배고파 죽을 수밖에 없고,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야합니다. 호2장15절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의 광야로 나아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내사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광야의 마음, 광야의 심정을 회복해야합니다.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2)젖뗀 마음입니다(시131). 젖뗀 마음은 하나님을 찾을때 젖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제 젖을 뗏기에 젖이 아니라--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그 무엇이 아니라--오직 하나님 그 자체--하나님 말씀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젖땐 마음이 필요합니다.
3)그 다음에는 적용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철저히 적용하는 마음으로 들어야합니다. 누구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한 말씀으로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날마다 내 삶속에 구체화시켜야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내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됩니다.
또 그 다음에는 그 말씀대로 적용하며 살아야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말씀이 내 삶속에서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금요일 구제모임을 마치고 장로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말씀에 있는 대로 “이 소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 했는데, 정말 예수님에게 한 것처럼 하니까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를 붙들고 당신이 한 이 행동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물으면 그 행동의 동기로 들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말씀대로 살아도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동기를 가지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말씀만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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