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새끼를 타시고 들어갔습니다.
옛날 왕들이 어떤 도시를 들어갈 때도 그냥 걸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힘센 말을 타고 들어갑니다. 또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는 많은 전쟁의 전리품들과 또 장수들과 함께 그 도시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이제는 왕으로 들어가시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려 했는데,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는 완전히 바른 방식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당시에 왕들은 힘센 말을 타고 도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스가랴 9장 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슥9장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세상 왕들은 힘의 상징인 말을 타고 들어오시는데, 예수님은 힘도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또 세상의 왕들은 많은 전리품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지고 오시기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존귀한 예수님 자신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또 세상의 왕들은 힘센 장수들을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은 가난한 갈릴리 어부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또 세상의 왕들은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고 충성할 부하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세상 왕들은 자신의 부하들을 왕을 위한 희생재물을 삼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지도자들은 절대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을 희생재물로 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면 사용하다가 필요 없으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자기 자신이 희생재물이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또 무엇보다 세상의 왕들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자신과 반대되는 정치권력을 힘으로 무너뜨리고,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절대 정치적인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전 인격과 전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지성소, 우리 마음의 성전에 왕으로 (주인으로)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았을 때, 여러분들은 과연 이 예수님은 과연 여러분 마음의 왕으로 (주로), 영혼의 왕으로, 모시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왕으로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예수님을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 밖에 세워놓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를 오래 믿었지만, 아직 예수님을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또 단순히 내가 죽을 때 들어놓은 보험처럼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한 보험처럼 여기지 않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계3:20)”
//이 말씀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를 누구보다 잘 믿는다고 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의 왕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는데, 예수님을 절대 폭군처럼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세상의 왕이라면 강력한 무기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 왕이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까? 힘센 말은 왕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귀 새끼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귀 새끼는 사람을 많이 태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서 다루어야합니다. 조금이라도 넘어질 것 같으면 같이 넘어질 것처럼 하면서 다루어야합니다. 몰고 가다가 가만히 서 있으면 같이 가만히 서 있으면서 가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이것이 참된 왕으로서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는 방식이고,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윽박지르듯이 “네 마음을 열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다루듯이 우리의 마음을 다루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넘어질 것 같으면 예수님도 같이 넘어지실 것 같이 우리를 잡으십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있으시면 우리 마음이 열리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떤 신학자는 한 평생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더 크시다” 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은 내가 당하는 이 큰 어려움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라고 하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또 그를 넘어지게 하는 대적을 만나면 하나님은 나를 넘어지게 이 대적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고 하면서 이겨냈다고 합니다.
또 무엇보다 나를 낙심케 하고 넘어지게 하는 사탄보다 하나님은 더 크시다 고 하면서 사탄을 이겼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그 신학자는 하나님은 더 크신 분이시다는 신앙을 가지고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와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큰 인기와 명성을 얻었어도 하나님은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을 얻은 나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고 하면서 그 순간에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학자에게 갑자기 큰 질병이 찾아 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년에는 병실에서 쓸쓸하고 외롭게 지내시다가 197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그분의 유품을 가운데 이런 내용을 글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건강할 때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고 고백했는데, 이제 병이 들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은 더 작은 분이시다”고 고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작은 나보다 더 작은 분인 것처럼 하고 나에게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병으로 비천하게 된 나 자신 보다 더 비천한 분으로 나에게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외롭고 쓸쓸한 자신 보다 더 외롭고 쓸쓸한 분으로 나에게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더 큰 죄인인 나보다 더 큰 죄인 것처럼 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찾아오셨다” 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세상의 그 어떤 권력자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권력자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위협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낙심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사탄의 도전이 있습니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나귀새끼처럼 이 세상의 죄악의 풍조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를 힘센 말을 다루듯이 하지 않습니다.
“너 왜 이런 죄를 지었어, 너 이제 죽어야해, 너 이것도 못해, 너는 이제 끝이야/ 세상사람이 율법이 사탄이 그런 것처럼 나도 너를 정죄하노라”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힘센 말을 다루듯이 하지 아니하시고 새끼 나귀를 다루듯이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쓰러지고 넘어질 때 같이 쓰러지고 넘어지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서 신음할 때 같이 신음해 주십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버림을 받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땅에 있을 때 너보다 더 크게 버림을 받았어”/
/우리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여 괴로움을 당할 때—“나는 너보다 사람들에게 더 크게 배신을 당했어-그래서 내가 사랑하고 믿었던 베드로에게 까지 배신을 당했지”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외로움과 쓸쓸함 가운데 있을 때 —“그래 나는 너보다 이 세상가운데 더 외롭고 쓸쓸하게 살았지—그래서 공중의 새도 거처할 곳이 있었지만 나는 거처할 곳도 없이 살았지”-
--계속되고 거듭된 실패를 통해서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비참함을 느낄 때-=“그래 나는 너보다 십자가에서 너보다 더 크게 비참하게 되었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죄인이라고 조롱할 때--“그래 나는 너보다 큰 죄인으로 사람들에게 비참하게 조롱을 당했지”
—내가 이 세상에 가장 작은 자라고 느낄 때 –“그래 나는 너보다 더 작은 자로 지금 너와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보다 더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폭군처럼 우리 마음의 문을 강제로 열지 아니하시고,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 내가 너의 연약을 안다. 내가 너의 아픔과 연약을 치유하겠노라—그러니 네 마음을 열고 참된 왕이신 나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정말 찾아야 할 참된 왕은 누구이십니까?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실패했습니까? 넘어졌습니까? 죄를 지었습니까? 인생에 희망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날마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왕좌에 왕으로, 주로 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직 이 세상의 정욕을 붙들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인간의 정욕은 절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직 이 세상의 물잘 돈 명예를 붙들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 모든 것들은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들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내가 영원히 사랑하고 사모해야할 분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만이 내 영혼의 왕으로 주인으로 영원토록 모시고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왕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직 우리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시고, 주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부모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세가 많으셔서 머리도 완전히 백발이 되셨습니다. 이제 몸에 어느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으십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러십니다. 저희 아버지는 일을 하시다가 손가락을 다치셔서 손톱이 하나 없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저렇게 볼품이 없으시지. 왜 우리 어머니는 저렇게 초라하시지, 왜 우리 아버지는 남들에게 굽신거리며 사시지, 왜 우리 어머니는 저렇게 참으며 사시지
그런데 이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 부모님들이 그렇게 초라한 모습이 되셨습니까? 다 우리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오늘 본문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 왕보다 힘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강하고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왜 나보다 더 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연약 때문입니다
죄라고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우리보다 더 죄가 많은 죄인인 것 처럼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작아지시고 낮아지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고백해야합니까?
예수님 내가 죄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하여주옵소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보면서 호산나 라고 외칩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라는 말입니다.
-“오 주여 나를 이 죄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나를 이 비참한데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오 주여 나를 실패하고 좌절한데 구원하여 주옵소서, 오주여 나를 이 영적 낙심과 침체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 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참된 왕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왕으로 찾아오셔 내 삶의 왕이 되어주시면 우리는 쓰러지고 넘어진데서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 온 세상이 왕으로 진정으로 찾아야할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 모두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서 참된 치유와 회복이 있을 수 있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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