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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중심주제/언약과 하나님 나라

하나님나라와 종말(부제:하나님 나라를 알면 종말이 보인다).

by 금빛돌 2011. 4. 9.

부제:하나님 나라를 알면 종말이 보인다.

*아직 글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부분을 추후에 완성하여 올리겠습니다.


서론적고찰
1. 말뜻
2. 현재성 미래성
3.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종말
4. 하나님 나라와 종말을 어떻게 확인할수 있는가?
5. 역사적 종말의 의미
1. 때가 차매(역사적 배경)
1.1. 창조사상
1.2. 타락사상
1.3. 언약사상
1.4. 종말사상
2.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2.1. 창조의 목적
2.2.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신 나라
2.3. 피조물
2.4. 하나님 형상
2.5. 생영
2.6 하나님 나라와 안식일
3. 타락-하나님 나라의 도전
3.1. 사탄의 시험
3.2. 죄의 본질
3.3. 죄의 증상과 결과
4 구원-하나님 나라의 회복
4.1. 구원의 의미
4.2. 최초의 복음(창3;15)
5. 노아언약과 종말
5.1. 노아언약의 배경
5.2. 노아언약과 종말사상
6. 족장들의 언약(구원의언약)과 하나님 나라
6.1. 구원의 언약
6.2. 땅,백성,후손
7. 다윗언약과 하나님 나라
8. 선지자들과 하나님 나라
9.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
10. 하나님 나라와 종말

부록-이 땅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와 장차올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
종말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1.하나님 나라와 종말에 관한 총론적 고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맨 먼저 하신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다(막1:1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말씀의 중심이 되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동안 그의 선포와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왔으며,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말씀하셨다. 또한 이 하나님나라에 관한 사상은 신, 구약 성경의 중심이 되는 사상이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종말사상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1.하나님나라라는 말 뜻

우리는 대개 "하나님 나라"하면 우주공간 저편에 있는 열두진주문 황금보석이 있는 나라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어떤 장소나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다. 물론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통치하심", 또는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심"이라는 역동적인 말로 먼저 이해해야 한다. 또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하나님의 나라, 그의 나라, 주의 나라,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1.2.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나라가 장차 올 나라도 되지만(미래성), 이미 왔다(현재성)라고 선포하셨다.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하나님나라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나라

창 조 예수님의 초림 예수님의 재림(역사적 종말)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단순 미래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했다. 이 세상역사의 끝이 오면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미래의 하나님 나라도 인정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시므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벌써 왔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병자 치유와 축귀의 행적을 보여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진 나라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중에서 어느 쪽에다 더 강조를 두셨는가? 그것은 현재성이다. 예수님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곧 온다, 반드시 온다, 기다려라"는 식으로만 말씀하셨다. 그리고 장차 올 나라에 대해서는 많은 묘사를 하지 않으셨다. 유대인들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물질적인 현란함으로 많은 묘사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해서는 선포와 가르침과 비유로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보다 현재성에 더 촛점을 두어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동참해있지 않은 사람은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 나라에 동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서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고 하자. 그러면 이 사람은 과연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동참해 있지 않으면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것을 요청하셨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이 복음이고, 그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살던 세계에서 나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이렇게 구원받아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그 종말이 언제이냐에 상관없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우선된 관심사는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한다.

1,3.하나님나라와 심판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이미 왔다는 것은 이 땅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에 동참해 있지 않은 사람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으로 말씀하신다(요3:18.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영생이라는 말과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벌써 임한 것처럼,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도 벌써 시작되었기 때문이다(롬1:18). 만일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은 현재 임하여진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현재성이 있고 미래성이 있듯이, 이 땅에 대한 종말과 심판도 현재성이 있고 미래성이 있다.

1,4.감추어진 하나님나라

하나님 나라와 이 땅에 대한 심판과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감추어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 중에서 제일 중요한 비유가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이다.(마13장:44) 밭에 감추인 보화는 겉으로 보면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밭을 소유하여 땅을 파보면 보화를 확인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나라가 현재에 임했다는 것은 육신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 나라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임하여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 할 수 있는가?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와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임하여 졌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살던 죄악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세계로 들어왔다는 말이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가만히 두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생애를 주관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사실들을 보고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안식을 누려나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임하여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대표적인 비유가 잔치집의 비유이다. 잔치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잔치집은 풍요와 기쁨, 평안과 안식을 나타낸다. 이것이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임하여졌다는 것은 잔치집과 같은 풍요와 기쁨의 나라가 이 땅가운데 임하여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안에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풍요와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풍요와 기쁨을 완전히 누릴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히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말이 오기 전 현재 가운데서도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선취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축귀와 치유의 기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의 역사 세계 속에 이미 개입하기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인할 수 있음을 알게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 대한 종말과 심판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확인 할 수 있는가?

첫째로, 롬1장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는 막는 사람들 위에 벌써 임하여져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삶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심이다(롬1:24,28) 이것이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모습이다. 우리 주위에서 이와같은 사실을 너무나 많이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조그만 잘못된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을 보게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잘못해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음을 보게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시73).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시고 내어 버려 두시는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안에 들어온 자는 진정한 풍요와 기쁨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안에 들어와 있지 않는 사람들은 진정한 안식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현재에 심판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이 시대의 문화는 허무주의 문화이다. 대학가도 마찬가지이다. 왜 대학생들이 향락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지는가? 그 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진정한 기쁨과 안식이 없기때문이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너무나 부러워 할 때가 많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더 자유로워 보이고 풍요로워 보이고 즐거워 보인다(시73) 그러나 그들의 심령 속에 진정한 기쁨과 안식이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겠다. 이 허무함이 바로 현재적 심판의 모습이다.

1,5.재림과 역사적 종말의 의미

그러면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 혹은 역사적 종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벧후 3장 10절을 보면 주님이 재림하시면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탄다고 이야기한다. 즉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의 종말이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 때에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사실로 드러나는 날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에 임하여진 심판이 눈에 보이는 사실로 드러나는 날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 혹은 역사적 종말로 말미암아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의 기본적인 성격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와 동일하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풍요와 안식의 잔치를 누리며 살는 나라이다.

결 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언약으로서 우리의 하나님 노릇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다. 이렇게 우리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미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살게되는 것이다.그러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밖에 있기에 현재적인 심판을 받고 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종말에 관한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마24:36,행1:6) 우리의 관심사는 현재적 심판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야한다. 그리고 이미 그 나라에 들어온 자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알고 그 나라에 합당한 백성의 삶을 궁구하며 살아야한다.

2.태초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공생애에 나타난 예수님의 첫 선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1:15을 보면 이 하나님 나라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때가 차매" 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때가 차매"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때가 차매"라는 말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구약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인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의 창조사상, 타락사상, 언약사상, 선지자들의 종말사상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이시다(창조사상).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에 도전한 것이 사탄의 시험이다.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타락이 오게되었다. 인간의 타락이란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다(타락사상).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려한다. 그 언약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의 왕노릇해 주겠다"라는 것었다(언약사상). 그런데 이스라엘에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주지 못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메시야를 통한 종말의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때가차매 예수님이 오셔서 창조의 회복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언약의 완성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종말의 성취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해야 한다. 특히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잘 이해해야 한다.

2.1.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에덴동산을 통해서 알수 있다. 계시록에 보면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창조 때 나타난 에덴 동산의 회복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에덴동산을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인간이 중심이 된 유토피아(이상향)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에덴동산은 인간이 중심이된 인간유토피아가 아니다. 만일 에덴동산이 인간 유토피아라면 하나님께서 왜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셨겠는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에덴 동산이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또 선악과는 선악을 판단하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창조 때의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에서 따라서 선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셨다. 이와같은 사실을 통해서 에덴동산은 인간이 중심이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된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왜 두셨는가 라고 이야기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면 인간이 죄를 짖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인간이 죄를 짖지 않았다면 세상의 불행이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인간의 죄와 불행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결국 에덴 동산을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유토피아로만 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장차 가게될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도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처럼 인간의 뜻대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나라이다(계: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더라 ).

2.2.하나님이 주권의 실행되는 나라

그러면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가 대개 어떤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또 그 나라의 백성은 어떠한가'를 알아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먼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신 나라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에덴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과 에덴의 창조주이기에 에덴의 주권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에덴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실수 있는 것이다(주권자는 명령자,혹은 입법자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세가지의 명령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명령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령을 하셨다. 이것은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인간은 단지 분별만 할뿐이다.그러나 그것을 판단하시는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한 몸을 이룰 것을 명령하셨다(결혼명령) 이와같이 에덴 동산은 통하여 보게된 창조때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나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명령이 있는 나라인 것을 알 수 있다.

2.3.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피조물,하나님형상,생영

처음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알수 있다. 우리가 한 나라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그 나라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도 알아야하지만, 또한 그 주권자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어떤 자들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어떤 모습인가? 이것은 창조때 나타난 처음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먼저 성경에서는 태초에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피조물인 것을 말하고 있다. 요즈음 복제 인간에 대한 논의가 나오면서 마치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창조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혹 복제 인간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창조라고는 할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분명히 말하는 바는 사람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피조물이란 사실이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피조물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사람과 인생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은 인간이 저절로 진화되어져서 만들어졌다고 항변한다. 이것은 인간의 피조물됨을 인정치 않고 사람이 인생과 세상의 주인인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말하기를 사람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피조물이란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인생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사실은 사람이란 하나님께 대하여 의지하고 순종해야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도 요즈음의 사람들은 거의 부정하고 있다. 요즈음의 사람들은 인간이 인생과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이란 하나님의 도움심이 없어도 살아갈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아갈수 없는 피조물임을 말하고 있다.

질문/1(묵상과 나눔). 당신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가?

질문/2(나눔).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왜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도피주의적이냐? 현실을 도피하여 신에게로 도망하지 마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당신은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우리가 현실을 도피해서 신에게로 도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너희들이 신에게서 도피하여 세상에 숨어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인간이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사람이다-마이클 그리피스의 도피하는 현대인이라는 책을 읽어보시오>

질문/3(나눔). 요즈음 일고 있는 복제 인간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질문/4(연구).지금 세상 사람들이 복제 인간을 통해서 주장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인간이 생명의 창조자,인간의 주인은 인간이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적 운명이나 신에게 의존할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한다>.

또한 성경은 태초에 나타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인간이란 하나님을 비추이고 반영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마치 밤하늘에 달이 연못속에 비추어져서 달의 형상이 연못에 비취는 것과 같다. 그 연못속에 달이 비췰 때 연못 속에 달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달의 형상이 연못속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연못처럼 하나님을 비추이고 반영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지금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살아가고 있다(창11:4). 그러나 이것은 참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사람의 제일 최고 가치는 그가 하나님을 나타내고 드러내는데 있다. 이것이 인생의 최대의 목적이다. 사람이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야 할 존재이다(고전10:31).

질문/(나눔). 당신은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았는가? 우리는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되겠는가?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사람을 생령으로 보고 있다.(창2:7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인간이 생령이라는 말은 인간이란 영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요즈음 일고 있는 복제 인간에 대한 논의중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간을 단순히 동물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자기 비하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단순히 살과 고기만 있는 육적인 존재로만 보지 않고 영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는 말은 사람이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도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여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고 교제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먹고 마시기만 하는 육적인 존재로만 보고 있다(마4:3)

질문/(묵상과 나눔) 요4장에서 우물가의 여인이 많은 남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진정한 인생의 만족을 누리고 있지 못했는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기에 세상적인 것을 모두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가?<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있어도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허무할 수밖
에 없다>.

2.4.하나님나라와 안식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창조때 나타난 안식의 의미를 이해해야한다. 하나님께서 6일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7일째 되는 날에 쉬셨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출20장에서는 창조때 하나님이 안식하심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안식하라고 명하신다.(물론 신명기에서는 출애굽 사상에 근거해서 안식일을 지킬 것을 말한다. 문자적으로 보면 안식일 준수의 근거가 다른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의미를 알고 보면 같은 말이다. 출애굽 사건은 결국 창조의 회복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출애굽 사건에서 의미하는 안식일 준수도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하심의 회복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그러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제 7일에 안식하라고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왜 안식일에 일을 쉬라고 말씀하셨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때 그렇게 하셨기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이 창조의 회복인 것을 알수 있다. 창조 때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안식만 있고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안식하라는 명령이 없다. 안식일의 명령은 구체적으로 출애굽 사건 이후에 나온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출애굽 사건이 창조의 회복이기 때문에 우리는 창조때 구체적인 안식이라는 명령이 없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안식과 더불어 인간의 안식도 있었음을 짐작할수 있다(안식이 창조때는 명령이 될 수 없었고 도리어 축복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제 7일에 쉬시고 또 그 안식에 인간을 동참시키시는가? (이것은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태조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즉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공로나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은 제 7일에 하나님과 같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때 나타난 안식의 의미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인간은 이제 아무일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지 않았다. 범죄한 인간은 이제 땀을 흘리고 노력함으로 안전과 행복을 보장받게 되었다(창조때 전혀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었다. 예를들어 출생사건-범죄전-복,후-고통). 만일 누구든지 지금도 우리가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고 창조때 처럼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선물만을 고대한다면 그 사람은 타락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타락이후 인간의 노력이 과연 인간의 안전과 행복을 완전히 보장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오히려 역작용이 많다. 타락후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그 발전의 배후에 여러 가지의 부작용이 따랐던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공해, 인간성의 황폐, 경쟁). 그래서 인류의 역사에는 발전에 따른 반작용도 많이 생겼고 그 결과 자연주의가 나오고 히피주의가 나왔다. 그런데 인간의 노력에 의한 발전을 중단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인간의 행복과 안전이 보장되는가? 그렇지 않다. 결국 인간의 완전한 안전과 행복은 이 땅에서의 어떠한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 나라는 창조 때와 같이 인간의 행위와 노력에 의해 움직
여지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이 쉬더라도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들을 풍성히 누리는 나라이다. 이 완전한 안식(쉼)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현재에 미리 맛보게 하는 장치가 바로 안식일인 것이다. 이와같이 안식일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말적 완전한 안식에 대한 소망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또한 안식일에 쉼의 의미는 현재적인 의미도 있다. 그것은 6일동안에 나타난 인간의 어떠한 최선의 노력도 완전한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7일에 쉼으로서 우리 인간의 모든 안전과 행복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창조때의 모습을 잠시나마 회복하는 것과 같다. 창조 때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산물들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안식일에 누리는 이 안식을 우리가 완전히 누릴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이 땅은 타락한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6일동안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6일동안 우리가 열심히 일한다 하더라도 안식일
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인간의 완전한 안전과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고대하는 마음으로 일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또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지 안되기 때문에 7일째 우리의 모든 수고를 중단함으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고대하는 것이다. 또 이 모든 수고의 완전한 안식이 저 영원한 나라에서 이루어짐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에 우리가 쉬어야하는 이유이다(안식년,희년-같은 의미).

질문/(연구). 성경에서 왜 하나님 나라를 잔치집과 보화로 비유하고 있는가? 잔치집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먼저 풍요, 즉 부족함이 없음이다. 또한 부족함이 없음으로 기쁨과 안식이 있는 곳이다. 보화도 잔치집과 같이 부요함과 기쁨을 나타내는 비유이다.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는 잔치집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안식과 풍요와 기쁨을 누리는 나라이다.


3.타락-하나님나라의 도전

2과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도전이 왔다. 그 도전자는 사탄이었다. 사탄은 인간을 끌어들여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도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탄이 이 하나님 나라를 도전하게 되었는가? 또한 그 결과 이 땅에 죄가 어떻게 들어왔는가? 또한 사탄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들어오게된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공부해보자. 이로서 우리에게 왜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다.

3.1.사탄의 시험

사탄은 원래 하나님 밑에서 수종을 들던 천사였다. 그런데 사탄은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쫒겨나 사탄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사망의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성경구절) 이러한 사탄이 자기와 같은 운명으로 인간을 끌어들이려고 최초의 사람(아담과 하와)을 시험했다. 사탄은 최초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게 했다(사탄의 말-하나님이 정녕 그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것을 먹는 날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3). 그러면 사탄이 이렇게 시험한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된 자리(주로 섬기고, 복종하는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되게 하려는 동기였다. 사탄은 말하기를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선악을 아는데 하나님과 같이 될 수있다"고 사람을유혹했다(창3:5).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 이 땅에 선악간에 판단하는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었다.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선악과였다. 선악과는 에덴의 모든 선악간 판단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드러내는 나무였다. 이로서 에덴이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나라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도전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사탄의 유혹이 최초의 사람들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되었고,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감추어지게 된 것이다(창3:22-24)

질문/1(묵상과 나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과 사탄에게서 어떻게 바뀌어지게 되었나?.이것을 통해서 당신이 배울 수 있는 바가 무엇인가?<하와-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을 까 하노라, 사탄-선악과를 따먹으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조금 약화시켜 말하게될 때 사탄은 그것을 정반대로 말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한다>.

질문/2(정리). 사탄은 선악과를 통해 어떻게 인간을 시험했나?
A. 불순종하게 함
B. 선악을 분별하는데 하나님과 같이 되려함


3.2.죄의 본질

사탄의 시험에 인간이 넘어감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들어오게된 죄란 무엇인가?

첫째로 죄란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사탄은 그것을 따먹으라고 했다. 이에 최초의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다. 죄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로 죄란 인간이 인간의 피조물된 자리(하나님을 주로 섬기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이 땅과 인생의 주인노릇 하려는 것이다. 태초에 인간은 하나님을 주로 섬기고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결국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본래의 인간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 이 땅과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이 세상의 형편을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이 땅의 주인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인생의 주인도 자기 자신 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되어 자기 마음대로 세상과 인생을 움직여 나갈까라고 하는 것이 지금 인간들의 최대의 관심사이다.

셋째로 이제 인간은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하여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을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독립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제한된 자원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질문/1. 지금 이 세상의 문화에 나타난 이러한 죄의 현상들에 대해서 말해보시오.


질문/2. 지금 당신은 이러한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가?


3.3.죄의 증상과 결과
이러한 사탄의 시험과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가 깨어지게 되었다.
(창3:22-24). 이제 이 세상은 죄와 불의가 난무한 세상이 되었고,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세상이 되게 되었다. 이러한 죄의 궁극적인 결과는 사망 곧 지옥이다(요계21:8). 지금의 인간과 세상은 어떻게 되든 궁극적으로는 사망(멸망)과 지옥(심판)에 처하게 된 것이다(롬6:33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궁극적인 결과 이전에 죄와 사망의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을 병인 암에 걸려있다고 생각해보자. 암세포가 죄의 본질로 생각해보자. 이 암세포(죄의 본질)의 궁극적인 결과는 죽음이다. 그런데 암세포가 죽음으로 가기까지 암과 죽음의 증상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예를들어 눈이 뛰어나온다든지, 혹이 나온다든지, 몸에 반점이 생긴다든지 하는 암과 죽음의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암의 증상들로 이 사람에게 암세포가 있으며, 또한 결국 이 사람은 죽게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죄가운데 처해 있고 궁극적으로 사망(지옥)가운데 처하게 되는데, 이러한 죄와 사망의 증상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죄와 사망의 증상들로 세상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고, 또한 궁극적으로 사망(지옥)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들의 죄와 사망의 증상들이 무엇인가? 죄와 사망의 증상은 태초에 나타난 바른 관계들의 단절(왜곡)으로 나타난다.

첫째 우리가 볼 수 있는 죄와 사망의 증상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단절이다.

태초의 인간은 하나님을 주로 섬기고 그를 의지하고 순종하고(피조물),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하나님의 형상), 또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인간(생령)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이제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바른관계(주된관계, 의지하고 순종하는 관계, 교통하며 교제하는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존재가 되게 되었다.(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또한 하나님으로 더불어 기뻐하며 안식을 누리는 관계에서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하고 항변하는 존재가 되었다(창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또한 이제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제한된 자원으로 살아가보려고 하게 되었다.

질문/.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제한된 자원으로 살아가보려고 할 때 생기게되는 현상이 어떠한가? 지배와 착취의 현상, 결핍으로 말미암은 고난의 현상, 구원에 있어서도 인간의 제한된 힘으로 구원을 얻어보려고 함, 기도하지 않는 현상

둘째로 인간에게 나타난 죄와 사망의 증상은 대인 관계의 단절(왜곡)이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었을 때 사람과의 관계도 하나된 관계였다. 최초에 나타난 아담과 하와는 한 몸의 관계였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부부간의 한몸의 관계도 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담이 처음에 그의 아내를 보고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했는데(창3:22), 범죄한 후에는 "이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따억게 되었다"고 죄에 대한 책임을 여자에게 돌렸다(창3:12). 창4장에 보면 형제의 관계도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후에 가인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내가 아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했다(창4:9). .또한 창6장에 보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관계에 정욕과 폭력이 개입되게 되었다(창6:2.4).

질문/. 지금 우리 세대에 나타난 대인 관계의 왜곡(단절)은 어떤 것이 있는가? <개인주의 이기주의 사람의 상품화 도구화 비인격주의 인간소외와 착취의 현상>

셋째로 대물관계의 왜곡이다. 최초의 인간은 만물에 대해서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관계였다. 그런데 이제 인간들은 물질(돈)에 메이는 존재가 되게되었고, 땅은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는 땅이 되게 되었다.(창3:17)

질문/. 지금 우리 세대에 나타난 대물관계의 왜곡은 어떤 것이 있는가? 물신주의

결론적으로 말하면 죄로 말미암은 모든 악과 고난의 상태가 죄와 사망의 증상으로 볼 수 있다. 이 땅에 끊임없는 전쟁과 불의, 불안과 질병과 걱정와 소외 등의 현상이 있다. 이렇게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들이 바로 죄와 사망의 증상인 것이다. 그런데 창6장 5절에 보면 이러한 죄가 세상에 관영하여 있고, 또한 그 마음의 생각의 계획하는 바가 악하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죄가 세상에 관영하다는 말은 이러한 죄의 범위에 있어서 온 세상에 퍼져 있다는 말이다(사회의 구조적이고 환경적인 악) 또한 그 마음의 생각의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하다는 것은 이러한 죄가 인간의 내부속에 있다는 것이다(죄의 내향성).

질문/1.이러한 죄의 현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한가?(창6:6,7,롬1:18)
지금의 세상가운데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져 있다고 한다.

질문/2.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서 볼 때 구원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4.구원-하나님나라의 회복

4.1.구원이란 무엇인가?

지난 과에서 죄란 무엇인가를 공부했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 죄의 최종적 결과는 사망(지옥)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죄와 사망의 증상은 대신, 대인, 대물관계의 단절(왜곡)이라고 말했다. 또한 죄로 말미암은 모든 결핍과 고난의 상태라고 말했다. 이렇게 죄와 죄의 결과와 증상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언급한 이유는 우리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비정상적인 죄 가운데 있고, 또 그 죄의 결과들이 어떠한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인간의 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이 이렇게 죄로 말미암은 사망과 고난의 상태에 있기에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죄의 상태를 이해함으로서 구원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이러한 죄와 그 죄의 결과들에서 구출함을 받는 것을 의미
한다. 또한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러면 처음 세상을 창조할 때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인간의 죄로 깨어졌던 하나님 나라가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의미이다. 복음이란 죄로 말미암아 깨어졌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지게 되는 것이다.(막1:14,15)

질문/.(정리와 나눔) 죄에 대한 정의와 그와 반대되는 개념에서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이 구원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첫째로 구원이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받는 것이다.둘째로 구원이란 죄와 사망의 증상들에서 해방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때의 바른 관계들이 회복되는 것이다. 먼저는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또한 죄로 말미암아 분리된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또한 만물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또한 죄로 말미암은 모든 악과 고난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4.2.복음에 관한 최초의 약속-창3:15

앞에서 우리는 구원이란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 나라안에 들어감이 구원받음이라고 했다. 그러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깨어졌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회복되는가? 이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 창3:15이다. 창3:15절은 일명 최초의 복음에 관한 약속이다. 왜 이것이 최초의 복음에 관한 약속인가? 여기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은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뱀의 후손은 사탄을 가리킨다. 여기서 뱀의 후손(사탄,요계12장)과 여자의 후손(예수그리스도)이 서로 싸우는데,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난을 준다는 의미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것이다(사탄의 권세를 격파) 그러면 여기서 왜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 받음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릴 것이라고 약속하는가? 무엇을 이루려고 이런 싸움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창조때 하나님 나라를 도전하고 부순 자는 사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사탄의 권세를 부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음으로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 것은 예수님이 사탄에게 고난받으시는 것(발꿈치를 상함)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림(뱀의 머리를 상하게 함)은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고난받음과 원수를 이김은 정반대의 개념이다. 그런데 창3:15절에서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하나 하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난을 준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킨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것을 가리킨다(사53,막10:45,요1:35-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다. 또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고 함은 죄의 결과인 사망(지옥)의 문제도 해결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은 부끄러운 것이거나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심이 어떻게 사탄의 권세(머리)를 깨뜨리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이 되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범죄 이후 사탄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왕노릇 했는가 이해해야 한다. 창조때 이 땅은 하나님의 의와 공평으로 다스려지는 하나님 나라였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이후 이 땅은 사탄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 왕노릇하는 곳이 되었다(창6). 이것이 이 땅에 대한 사탄의 통치방식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이렇게 고난 받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심이 결국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주권)를 임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질문/1(정리). 고전15장에서는 무엇이 복음이라고 하는가? 막1:14,15절에서는 무엇을 복음이라 하는가?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질문/2(연구). 창3:15에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칭하는가?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의 후손이 아닌 자를 가리킨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남자의 후손이다.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의 후손이 아닌, 인간의 후손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은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의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됨을 의미한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하나님 나라(구원)를 이룰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문선명이 메시야라하고 정명석이 메시야라 하더라도 그들은 여자의 후손이 아니다.그들은 모두 남자의 후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친아들이 될 수도 없으며 우리의 구원자도 될 수 없다.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여자의 후손으로서 고난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줄 수 있는 분이시다.


4.3.구원(복음)과 하나님나라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들이 증거한 복음의 핵심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이 땅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었다 (행2:36). 우리는 대개 예수의 죽으심으로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죄에서 구원해주시는 메시야)되심만을 강조 할 때가 많다(단순한 복음주의). 그러나 복음은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복음이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는 그리스도가 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주가 되시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바울이 왜 예수를 핍박했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사도들이 주요 그리스도라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이었다. 신명기서에 보면 누구든지 나무에 메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인데, 사도들이 그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라고 하니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 대한 모독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를 핍박했던 바울이 언제 깨어지게 되었나? 그것은 다메섹도상에서였다. 다메섹도상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중에 계신 예수를 보았다(행9:1-18.22:6-21,26
:12-18). 다메섹에서 본 예수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시고 또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이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실행하는 자리) 계신 분이라는 것을 바울이 직접 보게된 것이다. 이 다메섹의 체험을 통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메섹사건을 통해서 바울은 결론을 짖기를 예수의 십자가 지심은 실패와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고 사탄의 권세를 깨드리기위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권세를 이기셔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단순한 복음주의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할뿐 아니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주이심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의 그리스도되심만을 강조하고 예수의 주되심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구원이란 우리의 죄가 사해져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신분적인 차원에서만 구원을 적용
시켜왔다. 또한 구원받았다는 것이 단순히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출석하기만 하고, 또 죽으면 천당가는 의미로만 생각해 왔었다. 이와같이 우리는 구원 받았다라고 하지만 더 풍성한 구원의 의미를 누리고 있지 못하다(히6:1-2). 이렇게 되다보니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과 세상 속에서의 우리의 삶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교회가 1000만의 성도를 자랑하면서도 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복음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가? 복음이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이고, 구원이란 내가 그 나라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우리는 비록 이 세상나라 속에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로 말미암은 자기주장과 결핍가운데 살지말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속에서 하나님과 화평과 충만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한다.(롬5:1) 이것을 일명 하나님 주권의 개인적 적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이 단순히 개인적인데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더 넓은 범위에서도 적용이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구원받은 개인의 주님만이 아니라, 교회와 역사와 세계와 우주의 주이심을 인정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도 하나님 중심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 장래의 직업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한다. 또한 정치가 인간의 놀음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여전히 정치와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인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야하는 것이다. 대학문화가 이데올로기가 중심을 이루고, 전통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대학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이 대학의 문화가 주님이심을 믿고 고백한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여 드리는 삶이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되는 것이다.

질문/1.(묵상과 나눔)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서 당신은 그동안 구원받았다는 의미를 어떤 의미로만 생각했는가? 당신이 더 풍성하게 누려나가야 할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나누어 보시오.

질문/2.(묵상과 나눔)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당신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으며,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누리고 있는가?(롬5:1)이웃과의 관계성 속에서-교회-하나됨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풍서을 누림,믿지 않는 이웃 세상문화 속에서-세속문화속의 변혁-동화,도피가 아니라 변혁의 모습

질문/3.(연구) 하나님 나라가 왔는데 여전히 이 세상에는 죄악이 관영하는가?

5.노아언약과 종말

5.1.노아언약의 배경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노아 때의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죄가 노아시대 때 죄가 모든 범위에 있어서 퍼졌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이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죄의 내향적인 성격을 말한다. 결국 이러한 노아시대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모든 만물과 사람들을 물로써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죄로 관영한 노아 시대를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는가? 그리고 물로 심판하셨는가(전세계적 심판)? 그것은 첫째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공의대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주인이신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의도를 저버리고 죄로 관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셔서 이 땅의 죄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로 관영한 노아시대의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아시대의 심판은 단순히 과거에 지나갔던 한 사건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사건은 노아시대와 같이 불의한 지금의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과 진노이다. 하나님은 노아시대와 같이 이 세상에 대해서도 진노하고 계시는 것이다(롬1:18). 이것이 복음의 출발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출발을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노아시대의 심판과 로마서 1장 18-32절에 나타난 말씀을 통해서 보면 복음의 출발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설명이 되어져야 한다. 또한 이 노아시대의 심판은 장차 이 인류가 심판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다.여기서 보면 홍수가 끝난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홍수가 끝난 후 이 세상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죄가 물로 완전히 씻기어졌기 때문인가? 그것은 아니다. 창세기 8장 21절 중반절을 보면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세상을 심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세상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홍수 후에도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홍수 전에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하였기 때문에 물로 세상을 심판했다. 그런데 홍수 후에도 여전히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한데, 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또한 현대인의 물음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금의 세상이 노아홍수 때보다도 더 악한데, 왜 지금의 세상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없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특히 서구인들은 세계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하게 되었다. 왜 나치의 독일이 무고한 유대인들을 독가스실로 보내면서 죽이는데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가? 왜 세계대전의 가해국이었던 일본과 독일이 20세기 말에 와서는 오히려 제일 잘사는 나라가 되었는가? 그 외에도 우리는 지금의 이 세상이 노아시대보다 더 악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이 유지가 되어지고 발전이 되어짐을 보고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이에 대해 두 가지의 설명이 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죄를 묵인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어떤 때는 공의로 죄를 판단하시지만, 어떤 때는 죄를 그냥 묵인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이렇게 홍수 후에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죄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참지 못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구약성경을 한 번 보기 바란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호렙산에 올라갔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만일 이 산에 올라오면 "내가 너희를 돌격하여 죽일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사건이 나온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들이 함부로 들여다보다 죽은 것이다(삼상6:19).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잘못 오해하고 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의 죄를 묵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만일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죄를 묵인하시고 넘어가시고 덮어 주시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 말씀은 이렇게 바뀌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의 사람들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덮어 주시느니라"
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를 죽이시므로 세상에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죽이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죄를 용납하시거나 묵인할 수 없다. 그러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을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죄에 대한 댓가를 하나님 자신이 지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이면에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이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죄인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 의를 힘입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히10:19).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홍수 후에 죄를 묵인하셨기 때문에 심판을 내리시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철저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죄를 결코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반드시 죄를 심판하셔야 하는 분이시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홍수 후에 여전히 세상에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노아 때와 같은 심판을 하지 않으시는가(여기서 노아때와 같은 심판이라는 것은 전세계적인 대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이 땅에 대한 국지적 심판은 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공의로우신 분인데, 이제는 심판을 베풀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뒷 방 늙은이와 같다는 것이다. 손자가 겁없이 할아버지 수염을 당긴다. 할아버지는 분명히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안다. 손자가 수염 당기는 죄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네 이놈! 누가 할아버지 수염을 당기느냐!"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할아버지는 분명히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 그 죄를 용납하지 않지만 그에게 벌을 내릴 기운이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후에도 여전히 공의로우신 분이시지만, 그는 죄를 징벌할 힘이 없다. 그는 지금 늙었고 힘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는 졸고 있거나 죽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과연 그런 분이신가? 만일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면 이 지구와 천체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세계에는 함께 하시고 역사 하시지만 인간들의 세계와 역사에는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도 잘못된 말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무엇을 중심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비인격적인 만물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심으로 역사하시지 결코 이 세상 만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만물 가운데서는 역사하시지만, 인간과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는 역사하지 않는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인간과 인간의 역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또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그러면 왜 홍수 후에도 인류가 여전히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그것은 바로 노아와 세우신 언약 때문이다(창9:11).하나님께서는 홍수를 일으키실 때부터 미리 말씀하시기를 홍수를 일으키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다(창6:18). 그래서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제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신 것이다. 언약은 마치 임금님 면사포와 같다. 옛날에 백성들이 임금님의 얼굴을 감히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임금님은 면사포를 가리고 백성들과 만났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로 보신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당장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면사포에 "나는 다시는 물로써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써 놓고 세상을 대하시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대로 보신다면 이 세상은 언제든지 노아시대와 같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인간이 범죄한 이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이제 더 이상의 접촉점이 없게 되었다. 만일 인간과 하나님이 바로 접촉한다면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밖에 없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 이후에 이 언약이라는 양식을 통해서만 인간과 접촉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범죄한 이후에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래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저런 분이시라고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인 경험으로 만들어낸 하나님에 불과하다. 언약을 통해서 계시된 참 하나
님과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낸 하나님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낸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시기 위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다. 그러나 언약을 통해서 계시된 참 하나님은 인간의 기호에 맞추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인간이 맞추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종교의 거짓 하나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고, 그 언약적 양식을 통해서만 바른 신앙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하나님은 본성보다 언약을 더 앞세우신다.). 노아 언약은 이와 같이 인간이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노아 때와 같은 심판이 당장 내려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런데 이렇게 불의한 세상에 대해 당장 심판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불의한 이 세상이 창조 때와 같이 그대로 보존되는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신학자들은 이 노아 언약을 보존의 언약이라고 한다(벧후3:7). 또한 이 노아 언약은 인간의 생명이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보존되는 것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창세기 5장에 나타난 인간의 족보를 보면 계속 "죽었더라 죽었더라"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10장에 노아언약 후의 인간의 족보를 보면 계속 "낳았더라, 낳았더라"고 하면서 생명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노아언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명이 계속 보존됨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이 주어지게 된 것도 우리가 죄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도 노아언약으로 말미암은 일반은총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해와 비(자연적인 은총)를 내려 주신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도 노아언약의 은혜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자연적인 모든 은총도 인간과 만물이 죄가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노아언약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노아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교의학에서는 일반은총(자연은총)이라 부른다.

5.2.노아언약과 종말사상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만일 이 노아언약이 시간적으로 영원한 언약이라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으며 의롭게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노아언약이 시간적으로 영원한 언약인지를 살펴보자.

벧후3:6-7

여기서 보면 노아언약은 시간적인 한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하늘과 땅을 보존하여 두시는 것이다. 노아언약은 시간적으로 이 세대가 보존되어지는 것만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노아언약은 영원한 세상까지 이어지는 언약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노아언약 뒤에 무슨 언약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시간적으로도 영원한 세상까지를 이어주는 구원의 언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노아언약은 시간적인 한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상의 한계도 있다. 그것은 이 노아언약으로는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하나님 나라)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하나님나라)을 가리우게 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노아언약을 통한 자연적인 은총들을 내려줌으로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연적인 은총을 입은 인간들이 과연 하나님께 바르게 영광을 돌리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창11장의 바벨탑의 사건이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인간들에게 노아언약을 통해서 자연적인 은총(생육,번성 등)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하는 짓은 하나님께 반역하여 바벨탑을 쌓았던 것이다. 바벨탑은 노아언약의 한계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인류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노아언약으로 말미암은 자연적인 은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없다.또한 이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로마서 1장이다. 로마서 1장 18절에 왜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상 위에 머물러져 있다고 하는가? 그것은 1장 19절과 20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과 하나님의 자연적인 은총들이 사람들에게 임하여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러한 자연적인 은총들을 입은 인간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영광을 돌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선물들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섬긴다. 더 나아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잘했다 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한다. 이것이 노아언약으로 말미암은 자연적인 은총을 입은 인간들의 모습이다.이러한 인간들의 모습을 예로 들어보겠다(롬1:18-32). 옛날에 우리 집에 바퀴벌레가 많았다. 그런데 그 바퀴벌레들을 한 마리씩 죽이려고 하니까 귀여운 개미까지 죽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했다. 바퀴벌레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습기 있는 보자기를 준비했다. 그 보자기 위에 바퀴벌레들이 좋아하는 온갖 먹이를 넣어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퀴벌레들이 좋아하는 곳에 두었다. 바퀴벌레들이 그것을 보고 몰려 들었다. 나는 먹이가 떨어지면 계속 먹이를 공급했다. 그리고 추우면 불을 지폈다. 그런데 이 바퀴벌레들이 내게 큰 은혜를 입고도, 나로 하여금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았다. 또한 그들은 나보다도 내가 그들에게 준 먹이들을 더 경배하고 섬겼다. 그리고 또한 그 바퀴벌레들은 나를 마음에 두기 싫어했다. 그런데도 나는 끝장이 내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에게 먹이를 공급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보자기의 주인은 없다. 이 보자기는 우리들의 것이다."하고 나를 조롱했다. 그런데 이 바퀴벌레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이 바퀴벌레들에게 보자기를 제공하고, 바퀴벌레들의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계속 먹이를 공급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바퀴벌레들이 하는 짓을 좋아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바퀴벌레들에게 계속 먹이를 주는 것은 나중에 한번에 그들을 불살라 버리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노아언약의 일반은총적 은혜를 입은 이 세상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금의 이 세상사람들은 노아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일반은총적인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반역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와같이 노아언약이 시간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에 있어서 위와 같은 한계가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언약을 베풀어주신 것이다. 즉 노아언약으로는 저 영원한 세상도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2장부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언약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리고 구원의 언약을 받은 백성들로 통하여 이스라엘(구약교회)을 세우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노아언약은 구원의 언약의 토대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노아언약이 없이는 전 인류가 멸망당하기 때문에 구원의 언약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언약을 통하여 이 세상을 보존케 하심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종말은 구원의 언약이 택하신 자들에게 모두 증거 되어지고 이루어지면 오는 것이다(마24:14).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노아의 언약을 통해서 유지시키시고 보존시키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언약을 베풀기 위해서이다.


6.족장들의 언약(구원의언약)과 하나님나라
6..1.구원의 언약
6.2..땅,백성,후손
7.다윗언약과 하나님나라
8.선지자들과 하나님나라
9.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
10.하나님나라와 종말

부록-이 땅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와 장차올 하나님나라의 연속성
종말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나머지 부분은 수정하여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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