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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언약설교전체모음

by 금빛돌 2012. 10. 5.

 

언약설교1-천국시민의 족보(1:1-3)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세계라는 말은 족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아브라함의 족보이며, 다윗의 족보이며,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우리는 처음 성경을 볼 때 이렇게 아브라함은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 하는 이 족보이야기를 보면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경은 처음부터 애 낳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의미와 교훈을 줍니다. 이 족보는 구약의 여러 인물 중에서 누가 천국의 시민인가? 누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보여주는 족보입니다. 즉 구약의 인물 중에서 아브라함이 최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여러 자녀가 있었지만, 그중에 이삭만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이삭의 아들 중에서 에서도 있었지만 야곱만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이 족보는 단순한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족보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녀 중에서 누가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누가 천국시민의 족보에 들어간 인물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분명 천국에 가면 이 족보 밑에 우리의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 족보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또 유다가 어떻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구약의 많은 인물 중에서 천국시민의 이 영광스러운 족보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어떻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하면 먼저 그는 믿음의 조상이고, 또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정도로 굉장한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굉장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또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창12장에 보면 그가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즉 변화되기 전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옵니다. 13장부터는 변화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는 창12장에 나타난 변화받기전의 아브라함을 통해서 원래 아브라함이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갔을 때, 가나안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갑니다. 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갑니까? 아브라함은 처음에 부름을 받았을 때 오직 그의 관심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 밖에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서 좀 살기 힘이 드니까 약속의 땅도 버리고, 애굽으로 갔던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애굽에 가서 누구를 만납니까. 애굽 왕 바로를 만납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의 사래를 취하려고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덕에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애굽에서 아내 덕에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가리켜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등처가라고 합니다. 등처가가 무슨 말입니까? 마누라 등처먹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드라이브맨이 무슨 말입니까? 부인이 공무원인데 아침 저녁으로 부인을 출퇴근 시켜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셔터맨이 무슨 말입니까? 부인이 약사를 하는데, 아침 저녁으로 약국의 셔터문만 열어주면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수퍼맨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옆집에 살던 사람이 수퍼맨이었습니다. 그분은 날씨가 좋으면 날씨가 좋다고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또 날씨가 좋지 않으면 또 날씨가 좋지 않다고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는 수퍼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매일 수퍼에서 놀면서 과자를 술안주로 삼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런 드라이브맨, 셔터맨, 수퍼맨정도가 아닙니다.

아니 어떻게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일 수 있습니까? 또 그 아내를 남의 남자에게 주고 그 아내 덕에 잘 먹고 잘 살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본래의 인간성은 자기 부인에게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도 자주 제 아내에게 하는 자연스런 행동을 통해서 내가 본래 어떤 인간인가를 자주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도 금요성경공부를 다 마치고 갑자기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짜장면이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짜장면 먹고 싶지, 빨리 중국집에 연락해서 짜장면을 먹자, 사실 짜장면은 제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방적으로 먹고 싶으니까 당신도 먹어야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통해서 내가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에게 한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본래의 인간성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아브라함의 본래의 인간성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자신만 알고, 오직 육신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거룩하고,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사람을 이용해먹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왜 불렀습니까? 그가 어떠했기에 최초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아브라함(내가)이 비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 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다 그러합니다. 모두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이 많은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간들이 다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 이 천국시민의 족보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원래 불임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베게 했습니다. 그때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왜 내 뱃속에 두 아이가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에서와 야곱 중에서 야곱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말을 언제 했습니까?

그것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즉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였습니다.

태중에 있을 때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런 선이나 악이나 행하지 않은 때입니다(9).

그러면 제가 또 물어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서 아무 선이나 악도 행하지 않았을 때인데도, 왜 야곱만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주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야곱에게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과 이유 없이 야곱을 일방적으로 사랑하셨기에 야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에서가 야곱보다 더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에서는 남자답게 사냥을 좋아하고, 온몸에 털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마치 여자 같습니다. 그래서 부엌에 들어가 팥죽이나 끓이고, 어머니 치마폭에 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이삭도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오해를 할 때가 많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좋아 보여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보기에 잘나고 좋은 사람보다, 인간이 볼 때 볼품이 없는 그런 사람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극렬하게 보여주는 것이 오늘 족보에 나오는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의 대표로 나옵니다.

2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을 낳고”. 여기서 보면 선택받은(구원받은) 열두 형제의 대표가 유다로 나옵니다. 또 야곱의 열두 형제 중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혈통에서 나옵니다. 재미 있게도 지금 12지파 중에서 가장 크게 남아있는 지파가 유다지파-즉 유대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의 대표인 유다는 어떤 인물입니까?

유다의 이야기는 창38장에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절대 인간을 절대시하거나 영웅시 하지 않습니다. 성경만큼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곳은 없습니다.

유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유다에게 세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아이를 가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당시의 결혼풍습에 따라 둘째 아들이 첫째 며느리와 관계를 가지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첫째아들의 자식이 되어 집안의 대를 이어갑니다(시형제결혼법). 그런데 둘째 아들이 이것을 거부하여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게 됩니다. 그리고 셋째아들은 너무 나이가 어립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의 며느리 이름이 다말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다말이 나쁜 여인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다말이라는 여인은 어떻게 해서든 집안의 대를 이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 남자가 없습니다. 남자라곤 오직 시아버지 유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기 위해 창녀로 분장을 합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왜 다말이 창녀로 분장을 합니까? 그 이유는 평소 자기 시아버지 유다의 평소 소행이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창녀로 분장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유다가 걸렸습니다. 사실 그 도시에는 창녀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다말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입니다.

바로 이자가 유다입니다. 이 유다가 하나님의 선택받고 구원받은 자녀의 대표가 되었고, 또 예수님은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이 유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이이야기는 하나님의 선택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육신적인 것만 생각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별 볼일 없는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간사하고 속이기를 잘하고 연약한 인간입니다.

또 우리는 유다처럼 세상의 풍조에 휘말려 얼마든지 범죄 할 수 있는 그런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계속 이야기 하는 것과 또 이 족보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은 본래 아무 것도 아닌 인간들이며 연약하고 부족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절대 우리의 잘남이나, 똑똑함이나 거룩함이 아니라--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함이나 감격함이 없는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악 되었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인가를 극렬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학1학년 때 부산에서 공부를 할 때 저는 5000원짜리 스폰지 파커가 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 5000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부탁해서 5000원짜리 파커를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께서 저희 이모님 카드를 빌려서 당시로서는 거금인 15만원짜리 런던포그 오리털 파커를 사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런데포그는 항상 상표를 앞에 크게 붙여놓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제 앞을 확 지나가다가 한 5미터 갔다가 다시 저에게로 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야 이거 런더포그 내 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좀 우쭐거립니다. 그래서 항상 저는 그 옷을 입은 기숙사현관이 자주 서 있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15만원짜리 오리털 파커를 입고 있으면서-그 옷 에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실제가 15만원짜리 파거를 입고 다니지만, 사실 저의 본질은 5000원짜리 파커도 살 돈이 없는 자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한 번도 남들이 말하는 그렇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로 저의 겉으로 드러난 거룩하게 보이는 그 모습이 본래의 저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았을 때, 겉모습과는 달리 너무도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게 있는 착하고 도덕적이고 거룩한 모습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십니까? 일 때문에 봉사 때문에 습관 때문에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가 그랬듯이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나가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배(기도)의 자리에 나와서도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의롭고 똑똑하고 바르게 살았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한번은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제 입에서 이런 찬양이 나왔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 벌레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얼마나 크게 느끼십니까? 우리가 더러운 시궁창에서 나와서 밝은 빛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실재로는 내 더러운 오물이 점점 없어져 갑니다. 그러나 그 밝은 빛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실재로는 내가 더 깨끗한 사람이지만, 밝은 불빛아래서 내가 느낄 때에는 오히려 더 더럽고 흉측한 사람으로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성령의 밝은 조명이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은밀히 나아가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죄인인가.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보시기바랍니다.

옛날에는 내가 잘나서 괜찮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 죄를 보게 되니 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죄인을 사랑하셨습니까?

오주님 어떻게 이런 죄인에게 오래 참으셨습니까? 오주님 어떻게 이런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 주셨습니까?“ 라고 고백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도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과 동시에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

그래서 어제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다음날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더 풍성히 누리고 깨달아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천국시민의 족보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우리는 이 교회 안에서 어떤 인간적인 자랑을 하지 말아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학별의 자랑도, 혈통의 자랑도, 또 행위의 자랑도 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이 천국 시민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오직 만세전부터 선택해주신 하나님만을 자랑해야합니다. 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해야합니다.

어떤 교회가 행복한 교회입니까? 그 어떤 인간적인 자랑도 하지 않고 서로 모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행복해하고 기쁘고 즐거워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오늘 이 천국민의 족보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 아이가 병이 낫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는 단순한 육신의 행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심에 있습니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해 만족하시고 감사하시고 기뻐하시며 살아가시기바랍니다.

 

 

 

언약설교2-신실하신 하나님(15:1)

죽음에 대해서 서로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당신은 죽으면 천국 갈 자신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 있게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죽으면 천국 갈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제가 또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을 믿으십니까?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분명 나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또 그 자신은 분명히 지금 예수를 믿고 있고, 또 구원받았다고 말 합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확신은 하는데, 장차 죽어서 천국 갈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지금은 예수를 잘 믿는다는데,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어떻게 될지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큰 시험이나 환난이 닥치면 내가 과연 이 믿음을 잘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믿고 있는데 미래에까지 내 믿음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장차 죽어서 천국가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천국 가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서울시 중랑구 묵동 여기가 천국이라고 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 제가 살던 대구가 세상이라고 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

이 묵동(천국)에 계시던 주님이 세상에 있는 피 흘린 손으로 제게 전화를 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 이제 너희 죄를 다 사해졌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이 천국의 처소를 예비해주었다. 이제 너는 이 천국에 올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갑자기 부르르 떠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었다. 그러니 이제 대구(세상)에서 여기까지 알아서 혼자 와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참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구나 이제 내가 천국(서울)에 갈수 있구나". 그런데 그 다음 걱정이 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처음 서울에 올 때 혼이 났습니다. 관리집사님이 "경부선을 지나, 영동대교로 쭉 오면, 중랑경찰서가 나오고, 그 앞에 교회가 있다. 찾기 쉽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길을 완전히 익하는데, 한 달이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한남대교를 지나 어떤 터널을 지나 서울 시내로 들어와서 헤멨습니다. 그 다음에는 영동대교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다른 곳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서울에 갈수 는 있는데 가는 길에 청량리에서 깡패들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고, 또 중랑천이 범람해서 거기서 빠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화를 받고 난 후 제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서울은 갈수 있어서 좋은데, 나 혼자서 갈 자신이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 예수를 믿는데, 앞으로 천국 갈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면 제가 앞에서 든 예화를 어떻게 바꾸어야합니까? 처음에는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서울(천국)에서 피 흘린 손으로 전화를 하셔서 이제 너는 여기를 올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제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것은 다 해주었으니 혼자 알아서 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다. “움직이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그렇게 말씀하시고, 헬리콥터를 타시고 대구(세상)에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경부선에서 영동대교로 가는 길을 몰라 물을 때 주님은 친절하게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청량리 깡패가 와서 우리를 위협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칼싸움을 하셔서 그 깡패들을 물리쳐 주십니다. 또 중랑천에 와서 강이 범람해서 건너갈 수 없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뗏목을 만들어서라도 건너가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여기 묵동 중랑경찰서 앞, 교회까지 올 때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인도해주십니다. 이렇게 말해야 옳은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성경에 구원 얻은 이후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141-3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러가노라.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천국까지 인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천국에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온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곁에 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서 우리가 천국까지 갈 때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 우리의 모든 대적을 다 물리쳐주셔서, 마지막 천국까지 갈 때까지 우리를 확실히 지켜주시고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아무 염려도 말고 근심도 말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구원 얻은 이후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희 방패요, 상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행동을 하시고 난 다음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사건을 두고 한 말씀입니까? 먼저 나는 너의 방패라는 말씀은 창12장에서 하나님께서 바로의 손에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신 사건을 염두 해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잘못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벌하시지 않으시고, 바로를 벌하십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단순히 예수 믿는 사람이 잘못해도 믿지 않는 사람을 벌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을 잘못해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실수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로의 손에서 그를 지켜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지 않아서 사래가 바로에게로 갔다면,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차질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로의 손에서 지키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실 구원사역을 완전히 완성하시고,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또 나는 너의 상급이라는 말씀은 창14장의 사건을 염두 해 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땅의 부족연합군에게 잡혀가게 됩니다. 그래서 롯이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 종들을 데리고 싸워서 이기게 됩니다. 전쟁에서 이긴 아브라함이 많은 전쟁의 승전물(이것이 상급)을 가지고 옵니다. 그때 제사장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바쳐라 합니다.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십일조는 십분의 일만 주님이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하는 최소한의 표시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바쳐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모든 전쟁의 승전물(상급)들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이 모든 전쟁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신 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어떻게 우리가 해석을 해야 합니까? 이것도 우리가 구원받음에 있어서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물리쳐 주심으로 장래의 모든 구원을 완성하시고, 이루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래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어 천국 가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아무 것도 염려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시고, 또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심으로 우리는 무사히 천국까지 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즉 미래에 천국 가는 것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도 주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약속(계획)을 반드시 이루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원해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약속을 해주십니다. 내가 너로 하여금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은 구원받은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 이 가나안땅을 네게 주겠다 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그런 일이 내게 벌어지겠습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나는 못 믿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꿈을 꾸게 하십니다. 그 꿈속에서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쪼갠 고기사이로 여호와를 상징하는 불이 지나가는 꿈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두 사람이 서로 약속할 때 치르는 의식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지켜주겠다" 서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산 고기를 쪼갭니다. 그 쪼갠 고기 사이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지나갑니다. 이것은 만일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약속을 어기면 이 고기가 쪼개진 것처럼 죽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풍습대로 하면 쪼갠 고기 사이로 아브람과 하나님이 같이 손잡고 지나가야합니다. 그런데 창15장에 보면 하나님을 상징하는 불만 지나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아 내가 네가 한 약속은 혹 네가 부족하여 연약하여 쓰러진다 할지라도 나 혼자서 반드시 지키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만일 네가 나를 버리고 거역한다 할지라도 내가 너를 위해서 이 쪼갠고기가 되어서 죽어지더라도 내가 기필코 네게 대한 약속을 이루고야 말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서 내 몸이 쪼개어지기까지 (죽기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발 이런 나를 믿어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장래의 구원의 문제와 우리의 모든 삶의 모든 미래를 주님 앞에 다 맡기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는 저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날 이런 말씀을 듣고 믿음과 확신 가운데 집에 돌아갑니다. 그러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어떻습니까? 우리 눈에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질병으로 시달리는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수십 군데 직장 원서를 써 놓았는데도, 아직 몇 년째 취직이 되지 않습니다. 나이가 자꾸 먹어 가는데, 아직 혼사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 남편이 자식이 곧 변화되어 주님 앞에 오리라 믿었는데, 그럴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 보니까 언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계속 어렵고 힘든 일만 닥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보고 하나님말씀을 들어도 막상 이런 삶의 어려운 상황과 특히 위기를 닥치면 우리는 또 낙심하고 좌절하고 실망합니다. 그때 우리는 또 말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나와 함께하시는가? 이런 위기를 닥칠 때마다 흔들립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우리의 감정의 문제입니다. 내가 느낄 때 마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또 상황을 보면 더욱 절망입니다. 그래서 시에스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불안한 감정을 컨트롤 할 줄 아는 것이다고 했습니다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우리의 불안한 감정을 컨트롤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해 주겠다 믿고 안심하라" 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항상 우리 마음에 의심을 줍니다. 불안을 줍니다. 두려움을 줍니다. 나의 구원의 완성에 대해서, 내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항상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큰 확신의 마음을 주십니다.

여러분 내가 걸어가는 걸음이 나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제 구원의 길에 들어선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내 걸음에 보이지 않는 발자욱이 있습니다. 내가 혹 주님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하더라도 그 주님은 나를 엎고 이리로 왔습니다. 혹 삶이 그대를 속이고 사람이 그대를 속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그대를 속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숨을 건 약속은 오늘도 변치 않습니다. 오늘도 이 약속을 믿고 믿음과 평안가운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겨드랑이 비유).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과 여리고성을 무찌를 수 있었던 비결과 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현실가운데 악의 권세가 있고, 분명 사탄의 책략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주십니다. 우리를 대신 싸워주십니다.

또 이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 가운데 이루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쫒기는 상황에서 그가 기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 내가 에서에게 이렇게 좆기는 상황가운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벧엘에서의 약속)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환도뼈 힘줄이 끊어지기까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던 상황이(얍복의 상황)이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기도를 통하여 그곳에 약속대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 현실가운데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심령으로 확인해 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것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우리와 함께 하고 싶으신지, 그리고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것들을 주기를 원하시는지 기도를 통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약설교3-모세언약(20:1-17)

어느 집에 종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매일 10가지의 일을 시켰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방청소를 하고, 밥을 짓는 일 등 10가지의 일을 시켰습니다. 만일 종이 10가지 일 중에서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때 종은 어떻게 일을 하겠습니까? 하기 싫지만 억지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종의 문서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너는 이 집의 종이 아니라 주인의 아들이다. 이 모든 제산은 너의 것이다라고 하고 그에게 양자의 증서를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아들이 된 종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제 그 종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집에서 쫓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은 종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에 했던 10가지의 일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건성으로 하지 않습니다. 10가지의 조문에 메여서 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방을 쓸다가다도 주인을 생각합니다. 밥을 짓다가도 주인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인을 위해서 10가지 이상의 일을 합니다. 이제 종은 모든 일을 할 때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어떤 보상이니 조건 때문에 일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주인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천국에 갈수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에 갈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든지 이런 구원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모세언약인 십계명입니다. 10계명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계명을 통해서 어떻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함으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1계명의 뜻입니다. 1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며 살아야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1계명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폭군이 아닌가, 왜 하나님은 다른 것은 사랑하지 말고 자기만 사랑하라고 하시는가?”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이 계명을 말씀하시기전에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계명을 주시기전에 먼저 그 자신이 우리를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셨습니다. 십계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1계명이 아니라 십계명 서문입니다. 십계명서문에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한 여호와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출애굽 시켜 주실 때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서 살려주셨습니다. 거기서 어린양은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우리를 구원하실 때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아들이 아프면 아버지는 자신이 죽어서라도 아들이 낫는 길을 택합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아들 예수는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했을 때 선지자가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부를 때 나는 너희만 알았고, 너희만 사랑했거늘 왜 너희가 나를 버려 다른 것들을 섬겼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다. 짝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사랑의 두 대상이 서로 같이 사랑할 때 온전한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베드로에게 물으시듯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는 이때 정답의 차원에서 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맞기에 정답의 차원에서 그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정답의 차원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을 원하십니다. 진실한 고백의 차원에서 예수님은 진실로 네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학생들에게 성경공부나 훈련이 다 끝나고 나면 항상 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저는 이 세상의 모든 명예와 부귀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 합니다고 대답을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합니까? 학생들은 명예나 부귀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부귀나 명예나 권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실한 고백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진로, 또는 비전이 제일 우선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합니다. “너는 너의 진로나 비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베드로처럼 정말 신중하게 주님 저는 저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 합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질문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물어봐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문제일수 있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문제일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자존심이 문제일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명예와 명성이 문제일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자리가 문제일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경우에는 목회비전이나 목회 성공을 주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 과거에는 자신 있게 고백했는데, 또 지금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끊임없이 내가 진정으로 주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물어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한다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려야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것은 이단들이 하는 방법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결혼하기 전에 매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철저히 두 번째로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남녀 간의 사랑이 잘못 될 줄 압니다. 그래서 당시에 교회 자매들은 저하고 결혼하면 정말 재미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심으로 그 아내만을 평생으로 주님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 돈이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니까 가장 먼저 아내가 눈에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더라도 내 아내와 다시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하나님중심이 되고 말씀중심이 되니까 비로소 내 가정의 식구들이 보이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내 눈에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명예, 내 소유나 지위, 내 자존심, 내 욕망과 욕심, 이것이 먼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내 눈에 사랑해야할 사람들이 보입니다. 주님에게 내게 맡겨주신 양들이 보입니다. 일이나 사업이나 성공이나 성취, 또는 어떤 결과나 업적이나 내 욕망이 절대 우선시 될 수 없습니다. 또 그 욕심과 성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증거로 우리 눈에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두신 양들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십계명의 가장 중심적인 사상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일 크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이 있고, 똑똑하고, 성경공부를 많이 했고, 신앙생활을 오래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감사 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이 십계명은 단순히 의무감과 부담감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합니다.

2계명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형상화를 시키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이 그 주시는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돈 때문에, 또 명성 때문에 하나님을 섬 길 때가 많습니다. 또 그런 것들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합니다. 3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을 존중히 여기라는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이름이라는 것은 앞에 나오는 형상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즉 이것도 2계명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 그 자체만을 보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와 사랑만을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4계명에서 우리가 왜 안식일을 지켜야합니까? 그것도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왜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합니까?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공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일하지 않는 것은 일하지 않는 자들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1-4계명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보답하는 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4계명 뒤에 5계명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아는 인간이 되면 당연히 부모님의 은혜도 알고 보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어릴 때(특히 사춘기 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게 구원의 은혜만 베풀어 주셨지 내가 원하는 것들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구원의 은혜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춘기 때 겉으로는 부모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저희 집에 가보자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희 집이 너무 초라하고 누추해서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아버지는 왜 가난한가? 왜 더 좋은 집을 내게 주지 않은가 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게 일어난 첫 번째 변화는 그동안 내가 원망하고 불평했던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사춘기 때 아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이 내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 누구는 무엇도 해주고 무엇도 해주었는데, 왜 부모님은 내가 원하는 이것을 해주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즉 부모님께 원망 불평하는 것은 사실 부모님이 내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내게 아무리 많고 좋은 것을 해주어도 내가 바라는 작은 그 한 가지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부모님께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가장 값진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원망 불평하는 사람은 그 은혜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내게 값진 구원의 은혜를 주셨지만 지금 내가 원하는 바로 이것을 이루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바라고 원하는 그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내게 이미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는 감사 할 수 있는데,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없다 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격 파탄자, 이중인격자, 회칠한 외식주의자입니다(고르반). 우리의 인격이 하나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면 너무나 당연히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만일 내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외식이고, 가식이고, 거짓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모든 사람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됩니다. 이렇게 사람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5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6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이웃에게 살인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며, 도적질 하지 말며, 거짓증거 하지 말며,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웃을 서로 사랑하기 위한 부정적인 전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단순히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은 것으로 이 계명들을 지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술 담배 하지 않음으로 율법적 규칙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왜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합니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과 같이 이웃을 사랑할 때 나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족을 주셨습니까? 가족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습물입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습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평생 이런 꿈을 꾸어야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알아가는 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 가능합니다.

 

 

 

 

 

 

 

 

언약설교5-약자보호법(22:21-24)

한때 한국 교회 안에서 교회는 영혼구원의 단체이지 구제단체가 아니다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한 자에게 빵을 준다고 해도, 그 속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는 것보다 먼저 생명의 복음을 주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핑계로 교회가 가난한 자를 돌아보지 않고, 구제를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자를 돌아보고, 구제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5장에 보면 “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만일 네가 그들을 해롭게 함으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내가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방 나그네란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 할 때 애굽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따라 나왔습니다. 바로 그 애굽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고아나 과부는 모든 시대를 걸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방 나그네, 고아와 과부와 같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약한 자,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일명 약자보호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십계명만큼이나 중요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십계명뒤 계약법전의 중심사상-김이곤).

이사야서나 예례미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무수한 제물과 화려한 예배를 역겨워서 받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예배를 드려도 고아나 과부를 괴롭게 하고, 그들의 신음소리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기도한다할지라도 고아와 과부와 같은 자들을 가슴 아프게 한다면 하나님은 절대 그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결국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이유는 그들이 고아나 과부를 괴롭게 했고,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도 보면 예수님은 부자에게도 복음을 전했지만, 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 된 증거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초대교회는 선교만 한 것이 아니라, 선교와 구제를 동시에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손봉호 교수님은 초대교회는 구제를 너무 잘했기 때문에 서신서에서 굳이 구제하라는 말씀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는 말씀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서인석씨는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에서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성경의 중심사상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고 하신 말씀은 성경의 아주 중요한 말씀이고, 또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할 바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합니까? 물론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왜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하는 신앙적 이유를 살펴 보아야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이유를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 땅에있는 나그네-즉 가난한 자로 있었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것을 쉽게 예를 들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백성과 같이 우리 모두 밑바닥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경제적 차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1정도의 높이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2정도의 사람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3정도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재물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의 땀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이 소유의 정도를 가지고 이 사람은 1이고 또 저 사람은 2이고 또 저 사람은 3이라고 차등을 둡니다. 우리는 소유로 존재를 평가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보실 때--우리 원래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에 보았을 때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원래 우리의 모습은 (애굽에 있는) 가난한 모습입니다. 즉 아무리 우리가 많은 제물을 가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을 보면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되면 이렇게 쌓았던 재물을 서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래서 서로 같이 비슷하게 되게 합니다.

그러다가 안식년이 7번째인 49년이 지난 50년째인 희년이 되면 그들이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나누어주고 흩어버림으로 -다시 50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려버립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제물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원래 우리의 모습은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난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희년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희년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모든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많은 재물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앞에서 우리 모두가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수 없는 가난한 자라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복이 있다 하시고--그런자에게 천국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라는 것을 성령의 은혜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로 깨닫는 것만 아니라--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돌아봐줌으로 하나님 앞에서 볼 때 내가 저 가난한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볼 때 하나님 저는 저 고와와 과부와 가난한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심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아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건입니다.

우리가 밤새도록 하나님 저는 가난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이렇게 기도하다가 가난한 사람을 볼 때--“그들과 나는 다르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된 경건입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라고 느낀다면,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그들과 같은 자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긍휼로 도와주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은혜와 긍휼과 축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제가 여기서 가난한 자라고 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한자만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정말 마음이 상한 자가 있습니다. 또 고칠 수 없는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또 정말 큰 어려움을 당한 자가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우리가 돌봐야하는 가난한 자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유일한 비결은 이 교회 안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성도를 생각하며--밤 세워 기도하며--그들과 같이 가난한 심정이 되어 기도할 때--반드시 하나님이 내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3년의 공생애 가운데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문둥병자-중풍병자-혈루병자-등 예수님은 정말 육신적으로 힘들고 어렵고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을 두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절대 오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보고 가난하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열심히 노력하려 부자가 되십니오.

그러나 부자가 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의 본질은 항상 가난한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부를 가지고-움켜쥐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여러분에게 영육 간에 더 큰 은혜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언약과 예배(24:7-8)

출애굽기 247,8입니다.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언약서는 앞에 3절과 4절에 있는 대로,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그들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스라엘백성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리이다고 합니다(7). 이렇게 말하니까 8절에서 모세가 그들에게 언약의 피를 뿌립니다. 이 피는 속죄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말씀대로 살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든지, 아니면 죄를 짖고 있는 장면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왜 모세가 속죄를 상징하는 피를 그들에게 뿌렸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라고 하지만, 결국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할 것을 예상하시고

속죄의 피를 뿌려준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속죄의 피를 뿌려준 것이 제도화된 것이 출25장부터 나오는 제사의 제도이고, 이 제사제도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성경이 바로 오늘 읽었던 레위기서입니다. 또 구약의 제사제도가 바로 신약시대 예배의 모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구약시대에 제사제도가 왜 필요했는지를 알 수 있고, 또 신약시대에 우리에게도 예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왜 예배가 필요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말씀대로 살아가야합니다. 그런데 항상 한주간의 삶을 돌아보면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우리의 죄를 처리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다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남으로 다시 새 힘을 얻고 또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또 한 주간 살다보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예배의 자리에 나와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해야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눈이 감길 때까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주 예배를 드려야하는 이유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잘못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처럼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보다 잘 살았습니다, 나는 저런 죄인들과는 정말 다르게 살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신의 의를 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나는 그래도 그들보다는 잘 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과 비교해서 잘 살았다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있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절대 그 어느 누구도 나는 자신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았고, 또 한 주간동안 기도만 하고 살았어도--항상 하나님 앞에서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너무나도 하나님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런 죄악 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학생들 경우에 토요일 밤 늦게 까지 티브를 보았거나 게임을 하거나 믿지 않는 친구들과 밤 늦게까지 놀다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또 초신자나 신앙이 어린 사람의 경우에는 분명히 주일 교회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토요일 친구가 연락이 와서 밤새도록 술을 먹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겨우 일어났습니다. 이런 경우 정말 내가 감히 교회 나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양심상 꺼리 끼고 부담스럽습니다.

물어보겠습니다. 이럴 경우에 예배를 드려야합니까?

-이럴수록 더 예배의 자리로 나가야합니다.

그럴수록 더 하나님 앞에 나가야합니다.

우리가 예배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게 말씀대로 잘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항상 말씀대로 살기를 바라지만-죄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1019절에서 내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완벽하게 살아간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도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담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 히1022절에 보면 양심의 악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말합니다.

왜 양심의 악이라 합니까? 양심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너무 양심적이라서, 내 양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양심이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갈 때 비록 내 양심에 꺼리 낀다 하더라도 오직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가야합니다.

 

 

 

 

 

 

 

 

 

 

 

 

 

 

 

 

 

 

언약설교6-언약과 기도(2:23-25)

요즘 집에 가면 생선을 먹으라고 난리입니다. 특히 등푸른 생선이 좋다고 합니다. 저도 생선이 좋다는 것은 것은 인정합니다. 또 생선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너무 생선을 강조하니까-그 말만 들어도 조금 부담스러울때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생선구워줄까 하니까 저는 아니 그냥 있는대로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혹 기도에 대한 강조가 이와같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사실 기도는 좋은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하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기도만 강조하니까 혹 기도가 우리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질때가 있습니다-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기도자체보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질 은혜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기도란 우리를 향허신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담은 보고와 같습니다-- --기도란 마치 기차 레일과 같습니다. 기차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약속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기차 안에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약속이 담겨 있어도 기도라고 하는 레일이 없으면 그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란 바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성경이 신약이며 구약입니까(옛언약 새언약).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책입니다엄청난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에 기록된 우리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바로 출애굽기 1장과 2장이 이것을 우리에게 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 자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는 그 약속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5절입니다. “이미 애굽에 있는 요셉까지 야곱의 혈속이 모두 칠십인이었더라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대로 7절에 보면 “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이렇게 되니까 애굽사람들이 다 학대를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자손을 더 번성하게 만드십니다.

12절입니다.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렇게 되니까 애굽 사람들이 남자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고 합니다(16). 그런데 17절에 보면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남자아이들을 살려줍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이렇게 아무리 심한 박해가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백성은 더 번성해집니다(20). 이렇게 되니까 22절에 애굽왕 바로가 이제 명령을 내려서 남자가 나거든 다 하수에 던져 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남자가 태어면 다 하수에 던져 죽이라고 하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의 대가 끊어질 위기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백성의 대가 끊어지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여기서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탄식하여 부르짖습니까? 그 이유는 오늘 본문에는 고역(고된 노역)이라고 하는데, 단순히 이것 때문만이 아닙니다-//그 고된 노동을 하는데, 문제는 모든 대가 끊어질 위기 있었습니다-즉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끊어질 위기에 있었습니다-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탄식하여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탄식하여 부르짖자 24절입니다. 24절에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약속)을 기억하셨다고 합니다.

무슨 언약(약속)입니까? 생육하여 번성케 되리라는 그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응답으로 25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마음에 두심-그 기도를 들어셔서 마음에 두심)하심으로 애굽의 압제가운데서 풀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왜 기도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세우신 약속이 현실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의 약속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그 약속이 끊어질 위기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결국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약속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권념하심으로 출애굽의 역사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기도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실들을 현실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실과 현실의 괴리가운데서 가만히 있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실들이 현실 가운데 보여지지 않고 이루지지 않을 때, "뭐 그럴 수도 있지, 현실은 어쩔 수 없는거야" 하면서 자포자기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현실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을 두고 원통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기도를 통하여 그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몸부림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38장에서 야곱이 왜 밤이 새도록 기도하며, 또 환도뼈 힘줄이 끊어지기 까지 기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복을 주어 그들과 함께 한 것처럼 나도 너와 함께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특히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해주겠다라고 약속합니다(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얍복강에서 야곱이 당하고 있는 현실이 무엇입니까? 야곱은 지금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주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와 함께 주기는 커녕 에서의 손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에서의 손에서 죽든지, 아니면 또 그의 모든 재물들이 빼앗기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야곱이 그가 가진 재물이 중요했다면 그것을 붙들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모든 재물을 뒤로 하고 그저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했습니다,

야곱은 이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습니까?

야곱은 여기서 벧엘에서 그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어디를 가든지 그와 함께하시겠다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야곱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만을 신경을 섰습니다-그런데 이제 야곱은 생존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을 그 삶속에서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또 이것은 야곱이 환도뼈가 끊겨 평생 절둑거리며 살더라도 하나님께 떼를 쓰면서 확인하고 싶었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이 새도록 기도했습니다. 환도뼈가 끊어지기까지 기도했습니다(생명 건 기도)

그 기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시퍼런 눈이라는 뜻을 가진 얍복이 브니엘(즉 하나님의 얼굴)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즉 야곱이 밤세워 기도한 결과 그가 있는 그 곳에서 프니엘-하나님의 얼굴-즉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며, 그를 얼굴과 얼굴로 친히 대면해주시는 것을 느끼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또 이것이 단순히 기도의 자리에서만 체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본 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녹여주셔서 야곱과 화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는 나와 문제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변화시켜주십니다).-이와 같이 기도란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화시켜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공허하며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진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도대체 저 말씀들이 지금 어렵고 힘든 내 삶과 현실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느끼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허하게 이 자리에 앉아계시는 분들이 없습니까?

오래에 어떤 학생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믿어왔는데, 도무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 있다는 글이었습니다-그때 어떤 분이 이런 글을남겼습니다. 자신도 20대때 그런 신앙적 회의를 가진적이 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원에 올라가 하나님게 부르짖고 기도했다-그래서 기도하면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했다는 글이었습니다-/

야곱처럼 기도로 시름하십시오--기도로 도전해보십시오-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다고 했는데, 나를 도와주신다 햇는데- 왜 내 현실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시름하며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먹고 사는 생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무엇이 우리의 생명입니까?

하나님입니다-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입니다-우리환경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내 삶이 피곤할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확신과 체험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만 체험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해야합니다. 필요하다면 금식도 필요합니다-내가 조금 꿂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0---새벽도 좋고 금요도 좋고-안돼면 이 자리에서 라도 기도해보십시오--그래서 하나님의 그 약속의 말씀이 내 마음에 느껴질때까지--- 마음에 와 닿을때까지 기도해보시오--기도하다가 몸이 좀 상하도 괜찮습니다.-(크게 외쳐보십시오-부르짖으십시오-힘들 수 잇습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일입니다-목이 아플수 있습니다--또 부끄러울수도 이습니다(바디메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합니까? 체면이 중요합니까?그렇지 않습니다-어떻게 해서라도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머리와 가슴사이입니다-머리와 가슴은 가깝습니다--그러나 제일 먼 사이입니다--우리가 머리로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할수 있습니다--그러나 내 가슴으로는 그렇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유럽을 여행하면서 왜 유럽의 교회가 텅텅 비며, 왜 젊은이들이 교회를 다 떠났는가를 생각해보았다고 합니다. --유럽교회에는 우리가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어마 어마한 신학이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비교할수 없는 엄청난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또 어마어마한 건물들도 있습니다.--그런데 그들에게는 머리 속에 있는 하나님, 지식으로만 하나님을 알고 있지---하나님께 대한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고 지식으로만 알고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니까--조그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금방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이것을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현실,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느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며 도전이며 몸부림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현실가운데서 체험할수 있고, 그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가운데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기도란 불의한 현실에 대한 저항입니다----

시편기자의 탄원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벌하시고, 의인에게 복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이 현실은 그렇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그때 시편기는 이렇게 외칩니다. 왜 현실은 어렇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의인과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햇는데, 왜 내 주위에 악한 원수와 대적이 많습니까?

하나님이여 당신의 약속대로 나를 구원해주옵소서. 이것이 시편의 원수에 대한 탄원시입니다.

그 기도의 결과가 어떠합니까? (기도후 하나님께서 악인의 결국을 깨닫게 하셨다-보기는 좋지만 미끄러운 곳에 두셨군요-라고 햇다-기도해보십시오-악인들의 결국이 눈에 보입니다-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가운데 나타나지 않음에도 낙망치 않고 믿음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뿐만아니라 그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화되지 않음을 두고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신음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성경에 기록된 그 무수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도와 삶을 통해서 현실화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해야한다. 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기도해야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 약속들이 현실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기도해야합니다.

9장에 나오는 다니엘의 경우가 그렇다. 포로귀환의 때가 이루어진 줄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70년 후 해방). 어떻게 보면 가만히 있어도 그 약속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더 간절하게 포로귀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믿지 않아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믿었기에 기도햇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히브리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경우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후 부활에 과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체로 계실 때 심한 탄식과 통곡으로 능히 살리실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 간구하심으로 응답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응답으로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믿지 않아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약속을-믿었기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우리의 삶의 주관자 도어주시겟다는야속

야베스처럼 수치를 당하지 않고 영광스럽게 해주시겠다는 약속--

야곱처럼 우리와 늘 함께 동행해주심의 약속--

또 요셉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요셉은 무성한 가지라 가지가 담장을 넘었도다”--이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치유와 회복에 관한 약속이 있습니다---마음이 상한 분이 계십니까>상처가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또 육신의 질고가 있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치유에 관한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주님이 나를 만져주시고 역사해주시고-- 함께 해주시면 게 치유될수 있습니다--이 약속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또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에 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24장에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이 약속은 교회 가운데 부어주실 실 성령입니다-성령의 능력이고, 성령의 충만입니다---성령충만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수 있습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체험케 하는 것은 오직 기도뿐입니다. 초대교회사람들은 이 약속을 믿고 마가요한 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을 셨니다--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령충만받아 놀랍고 아릅답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따라합시다-우리도 기도하면 됩니다-하나님이여우리에게 도행전과 같은 성령충만을 주옵소서-(금요기도회--

마지막으로 그 외에도 기도응답의 대한 약속들이 있습니다--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그려면 찾을 것이요 열릴 약속하셨습니다-이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언약설교7-복음과 하나님나라(16:15-20)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본문입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마가복음의 마지막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시작이 되는 마가복음 1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11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마지막에서는 이제 우리에게 그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가복음은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으로 끝이 나는 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가복음을 다 읽은 우리들은 이 복음을 전파해야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음입니까? 복음은 복된 소식, 또는 좋은 소식, 또는 기쁨의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슬픈 소식이 아니라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고 마지막으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음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도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14,15절입니다.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의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미 왔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 즉 복된 소식입니다.

/보통 예수님의 사역은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선포하시는 사역입니다. 또 하나는 그 선포하신 것을 가르치시는 사역입니다. 또 하나는 그 선포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각종 표적으로 보여주시는 사역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역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하나님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종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또 산상설교를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윤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하나님나라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물리치시는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병자를 고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선포하심과 가르치심과 각종 표적을 행하심의 핵심은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우리가운데 이미 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

//복음서에는 이 하나님나라를 천국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하늘나라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이 중에서 제일 대표적인 말이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라는 말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나라라고 하면 열두진주문 황금보석으로 만든 천국만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나라의 말뜻은 원문으로 바실레이아란 말로서 하나님의 다스리심, 통치하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 하나님나라가 이미 왔다고 할 때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 땅에 이미 왔다고 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나라라는 말뜻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말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나라로만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금의 유대인들과 이슬람사람들은 하나님나라를 죽어서만 가는 나라로만 알고 있습니다.

지금 중동지방에서 왜 이스라엘과 이슬람이 피 흘리며 싸우고 있습니까? 특별히 왜 이슬람사람들은 이 땅에서 잘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 폭탄테러를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이 땅에서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죽으면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하나님나라,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만 가는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선포하시고 가르쳤습니까?

그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시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예전에 말씀을 드렸던 도표를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현재의 하나님나라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나라

 

 

세상나라

 

 

 

 

창조

 

예수님의 초림

예수님의 재림(세상나라의 종말)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나라가 끝이 나야 저 미래에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이미 하나님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이 끝이 나고 올 미래의 영원한 하나님나라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미래의 하나님나라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이제 우리가 이 세상나라 속에 살지만,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들은 이 세상나라 속에서 살다가 죽어서만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 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이겠습니까? 아니면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나라이겠습니까? 현재에 임하여질 하나님나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 절대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죽으면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다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절대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미 현재에 임하여진 이 하나님나라에 들어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자동적으로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파해야할 복음, 즉 복된 소식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그리스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 죽든지, 또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우리는 얼마든지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하나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전파하라

16. (예수님을)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현재에 임하진 하나님나라)을 얻을 것이요(들어갈 것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현재 임하여진 심판)를 받으리라

이 말씀에서도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증표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게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 즉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3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예수님)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예수님)보다 어둠(세상)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그래서 여러분 이 세상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어서만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의 하나님나라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나라

 

 

세상나라

현재의 심판과 종말

미래에 임하여질 심판과 종말

 

창조

 

예수님의 초림

예수님의 재림(세상나라의 종말)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에도 현재성이 있고, 미래성이 있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대한 심판도 현재성이 있고 미래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의 심판을 이미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이미 왔고, 또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하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에게 대해서 하나님나라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에 비유를 하셨습니다.

13:44. 천국(하나님나라)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러면 밭에 감추인 보화는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밭을 사서 땅을 파보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왔고,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하였다는 사실은 먼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밭에 감추인 보화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밭을 사서 땅을 파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화처럼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얼마든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임하여 하나님의 심판도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확신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또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고, 간섭하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아니 보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고, 간섭하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 세계무역센터 수석 부총재인 이희돈 장로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911사건이 일어나던 그 날 아침에 이희돈 장로님이 갑자기 배탈이 났다고 합니다. 그 날 중요한 이사회가 있어서 반드시 제 시간에 참석해야하는데, 배탈 때문에 제 시간에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로님의 배탈 때문에 이사회가 연기가 되었고, 그리고 911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장로님의 배탈 때문에 무역센터의 이사들이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그 날 아침에 화장실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중요한 이사회에 참석을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배탈이 나게 하십니까?” 그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주관하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심을 몰랐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순간 하나님의 세밀하신 간섭하심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돈 한 푼 없이 유학을 가게 된 일과 옥스퍼드대학에 전도하러 갔다고 거기서 공부하게 되고, 또 옥스퍼드 대학의 종신교수가 된 일과 멕시코 오지 선교사로서 실패했지만 그것 때문에 세계무역센터에 들어가게 된 일 등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 장로님의 삶을 주관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심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모든 삶을 주관하고 계시고 간섭하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억울하고 피 눈물 나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나의 삶이 마치 요셉에 감옥에 있을 때와 같이 앞길이 보이지 않고 깜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삶을 지금도 주관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현재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낙심은 마귀의 초청장입니다. 지금도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하여져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거나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내어버려두심입니다. 주위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모든 것을 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전혀 간섭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떨 때는 그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현재 그들에게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님나라가 현재 임하여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귀신이 물러가고, 새 방언을 하며, 병이 치유되는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현재 이미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미래에 가게 될 영원한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 나라에서는 전혀 사탄의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 하나 된 새로운 언어를 사용합니다. 또 모든 질병들이 다 치유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우리가 장차 미래에 누리게 하나님나라를 현재에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제는 사탄 마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제 새로운 방언을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방언이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하게 될 새로운 방언을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방언은 문제지만, 성령이 주시는 방언은 절대 금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방언이 기도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제일 많이 타락한 것이 우리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서로 거짓말하고, 서로 죽이는 말을 하고, 서로 원망 불평하는 말을 하며, 서로 상처주고 미워하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믿고 새 방언을 말 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제 서로를 향해 진실된 말을 하고, 또 살리는 말을 하고, 서로 감사하는 말을 하고,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서로를 향해서 새 방언을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 이해합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나라의 새 방언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 어떤 병이라도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병이 낫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병이 낫는 것은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원하신다면 그 어떤 병이라도 나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사탄의 권세가 물러가고, 병이 치유가 되고, 새로운 방언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표적을 통해서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잠시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미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병 고침의 표적이 있습니까? 또 방언의 표적이 있습니까? 또 귀신이 물러가는 표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증거 해야 합니까? 병 고침이나 방언이나 귀신이 물러감이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이미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현재에 임해져 있는 이 하나님나라에 들어 올 것을 사람들에게 증거 해야 합니다.

//3)마지막으로 하나님나라가 현재에 이미 임하여 졌다는 것은 하나님나라 잔치의 풍성함과 기쁨을 맛보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는 잔치 집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잔치 집은 풍성함이 있습니다. 또 그 풍성함으로 인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인간의 제한된 힘으로 살아갑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결핍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더라도 참된 평안과 기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무엇이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맛볼 수 있는 삶입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 하나님의 풍성함과 충만하심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땅 가운데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의 심판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편안은 있어도 영혼의 참된 평안은 없습니다. 또 세상이 주는 순간적인 즐거움은 있지만 영혼의 참된 기쁨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해서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이 모든 세상이 끝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3장에 보면 이제 이 모든 사실이 눈으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 임하여 있는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서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이제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살게 됩니다. 우리가 가게 될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나라입니다. 또 모든 질병이 없어지고, 사탄의 권세가 물러가고, 새로운 사랑의 방언만이 있는 나라입니다. 또 날마다 하나님으로 인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풍성함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못입니다. 그런데 지옥의 고통이 이런 것만이 아닙니다. 지옥이란 이제 영원토록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두신 곳입니다. 그래서 지옥에서는 그 어떤 고통소리도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십니다. 또 지옥은 사탄의 완전한 지배가 있는 나라입니다. 또 완전한 고난과 고통이 있는 나라입니다. 무엇보다 서로 영원토록 말로서 상처주고 고통을 주는 나라입니다. 또 그 어떤 희망도 없고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왜 복음을 전파해야합니까? 하나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대한 심판도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마지막은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기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에게 임하여 있는 이 하나님나라를 더 풍성하게 체험하고 누림으로 하나님나라를 전파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 제자들이 나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하나님나라의)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하나님나라를 먼저 체험하고, 또한 전파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언약설교8-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3:5)

지난 주에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 즐거운 소식 기쁨의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들어야하는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복음이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복음이란 때가차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나라는 미래에도 임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 땅에 벌써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벌써 임했음과 동시에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벌써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나라가 이 땅이 이미 왔고, 또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도 이미 임했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왔고, 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든지 확인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다스리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심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병이 치유되고, 마귀가 물러가고, 또 새로운 방언을 함으로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나라의 잔치의 풍성함과 기쁨을 맛봄으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내어버려두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이 이미 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죄와 사탄의 고통가운데 거하며, 또 말로서 서로 죽고 죽이는 삶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삶에 참된 평안과 기쁨이 없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이미 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 모든 사실이 이제 공개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하나님나라에 살게 됩니다. 또 이 땅에 이미 임하여진 하나님의 심판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지옥이라 했습니다.

지옥이 어떤 곳이라 했습니까? 지옥이란 하나님께서 영원히 내어버려두신 곳입니다. 또 지옥이란 죄로 인한 모든 고통과 사탄의 압제 아래서 있는 곳입니다. 또 서로 영원히 말로서 물고 뜯고 살아가는 곳이라 했습니다. 그래도 죽고 싶어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 또 지옥이란 평안이라고는 전혀 없고 기쁨이라고는 전혀 없는 영원히 공허하며 허무한 곳입니다.

고린도 후서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까지는 구원받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과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더 확실히 알고 체험하여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더 널리 증거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왔다고 말씀하실 때, 그에 앞서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때가차매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갑자기 이 땅이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는 창조 때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나라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태초에 에덴동산을 만드실 때 그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나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크게 오해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드신 에덴동산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간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두셨는가? 라고 질문을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게 되었고, 그 죄 때문에 인간의 불행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와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주장은 틀린 말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에덴동산에 왜 선악과를 두었느냐고 우리에게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합니까? 에덴동산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간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왕인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인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 인간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인간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1)비교의식과 열등감이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 만족하면 사는 나라입니다.

창세기 35절을 찾아보겠습니다. “5. 너희가 그것을(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기서 보면 선악과는 무엇을 나타냅니까? 선악과는 이 세상에 선과 악 즉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모든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만족하며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남자로 태어났는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또 나는 얼굴이 왜 이렇게 못생겼는가? 나는 왜 이렇게 뚱뚱한가? 왜 이렇게 키가 작은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벗었지만 그들이 벗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나라가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모든 만물을 보면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분별력은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분별한다는 것과 판단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보면서 뚱뚱하구나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을 보면서 날씬하구나합니다. 그런데 뚱뚱한 것은 나쁘고, 날씬 한 것은 좋다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크니까 좋고,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으니까 나쁘다라고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분별은 하되, 인간이 자기 기준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뱀을 통해서 인간을 시험했습니다. 사탄의 시험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선악을 판단하는데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지 안을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인생과 이 세상의 주인 노릇해보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기가 기준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선악을 판단하면서 살아가게 되니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대로 만족하지 않고--남들과 서로 비교하는 의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남들보다 나아보이면 우월감을 가집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남이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면 끝없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이 시기와 질투는 심지어 형제를 죽이기까지 만듭니다. 죄가 들어온 후 최초의 범죄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왜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인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고,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내 동생의 기도는 들어주시고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비교해보니 도무지 미워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제일 많이 느끼는 것이 비교의식이 많다는 것입니다. 지방은 서울만큼 크게 비교하며 살아갈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경제적인 수준도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또 교회도 작은 교회도 몇 십명이고 큰 교회도 몇 백명 단위입니다. 그런데 서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적 수입의 차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교회도 몇 십명에서 몇 십만명 까지 모이는 교회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의 의식 가운데 너무나 많이 서로 판단하고 비교하는 의식이 많습니다.

이런 비교의식에서 열등감이 나옵니다. 이렇게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너무 피곤합니다. 어떤 성도님에게 너무 감사하고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같이 감사하고 기뻐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 일을 두고 기뻐하고 감사하다가도 옆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감사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왜 내게는 그런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 일을 두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또 교회에 새 가족이 옵니다. 그중에 보기에 우리보다 더 똑똑하고 잘 나 보이는 사람이 들어옵니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누가 오더라도 반갑게 환영합니다. 우리교회에 참 좋은 분이 오셨다고 감사하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나보다 조금이라도 잘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을 깍아 내리려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사람이 이 교회공동체에 들어올 자리와 틈을 주지 못합니다. 이런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그 교회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교회부흥을 외쳐도 그 열등감이 극복되지 못하면 교회는 부흥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그 어떤 것을 받아도 그것을 가지고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백성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사람들과 비교하면서--자기 스스로를 메뚜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생각했던 단 한 사람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유영철과 같은 인간은 여성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무수한 여성을 이유 없이 죽이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들과 서로 비교하는 비교의식과 열등감에서 구원받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비교의식과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처음 창조 때와 같이 내 모든 삶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교의식과 열등감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가면 우리의 얼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자는 모두 장동건 얼굴이 되고, 여자는 모두 김태희 얼굴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우리의 얼굴의 원형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질병으로 인해서 손상된 얼굴은 모두 치유됩니다. 그런데 원형은 그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는 단 한 사람도 얼굴 때문에 좋다 나쁘다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가지고 남들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얼굴 그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의 얼굴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얼굴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얼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시면 같이 불러보겠습니다.

사랑의 주님이 날 사랑하시니 내 모습 이대로 받으셨네 사랑의 주님이 널 사랑하신 나도 너를 사랑하며 섬기리”.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사도바울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자책할 어떤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 때문에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부족함이 있을 때 그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악간의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다 맡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판단이 아니라 오직 충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의 삶(사역)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실패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공하라 판단해 절대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실패라고 판단해서 절대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모든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십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어떠했든 간에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날마다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선악간의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에게 칭찬과 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만족하시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또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2)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언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까?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지으신 후에 맨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중간에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제 인간은 부족한 모든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살아가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공급해주시고 난 다음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명령을 하시며가 아님)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먹고 사는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고 공급해주시니, 먹고 살아가는 그 어떤 염려나 걱정이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나라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왔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하나님나라 밖에 있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창조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시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시는 그 하나님나라를 믿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기에 충분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그에게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너를 번성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처럼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셔서 내 삶의 모든 것을 다 공급해주시고 책임져주시는 내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와 같이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나라의 복으로 누리시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3)결핍이 없이 풍성한 나라입니다.

원래 인간은 피조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이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풍성함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제한된 모습으로 살아가보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죄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제한 된 자원으로 살아가려함이 죄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어떻게 이야기를 합니까? “15:17b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바로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있는 집이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죄입니까? 결핍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하심과 충만하심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결핍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항상 인간의 결핍된 사랑으로 살아가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다 우리의 사랑이 항상 결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 지극히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 사랑이 지극히 풍성하신 하나님에게로부터 풍성하신 사랑을 받고 누리며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나의 결핍된 모습으로는 사랑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은혜가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가진 은혜는 항상 제한된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의 풍성함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일 안타까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사랑이 메말라 있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메말라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풍성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은혜가 풍성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한때 제가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은풍이라고 하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 은풍이정말 좋은 이름입니다.

결핍은 죄입니다. 메마름도 죄입니다. 날마다 풍성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더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마지막으로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안식과 평안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기뻐하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기뻐하심으로 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123456해서 마지막 날 안식일이 아니라 123456하고 매일 매일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안식의 세계 속에 모든 인간이 동참으로 우리 인간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인간들은 이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이스라엘백성들로 안식일을 제정하셔서 안식일에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도록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주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과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삶으로 매일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하나님나라의 안식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언약설교9-구원과 하나님나라(3:1-10)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죄가 무엇인지--그리고 그 죄 가운데 있는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또 가운데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잘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p>--우리는 죄가 무엇이냐 고 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강도짓하고, 사람을 죽이는 그런 일만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전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법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너무 착하기 때문에 굳이 구원받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 이같이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p>그분이 죄가 전혀 없다고 하는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br>그것은 사람들이 만든 법들을 다 잘 지켰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br>--이렇게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자신이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필요 없고, 구원자도 필요 없고, 교회도 필요 없고, 전도 받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과연 그렇습니까?<p>그러나 하나님말씀인 성경에서는 죄를 살인과 강도와 같은 그런 것만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p>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br>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땅에 죄가 어떻게 들어왔으며, 그 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또 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p>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본문을 통해서 죄가 어떻게 들어왔으며, 또 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또 죄의 결과가 무엇이며, 마지막으로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p>***먼저 죄가 어떻게 들어왔습니까?<br>오늘 본문에 보며 뱀이 나옵니다. 뱀은 사탄을 가리킵니다(요계). 이 사탄은 원래 하나님 밑에서 수종을 들던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쫓겨나 사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망의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탄이 자기와 같은 운명으로 인간을 끌어들이려고 최초의 사람(아담과 하와)을 시험했습니다. <br>-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br>-그런데 사탄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녕 그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합니다. 즉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만듭니다.<br>그때 여자가 무슨 말을 합니까? 이것을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고합니다. <br>--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말씀대로 죽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까?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br>**사탄은 아주 인격적입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처음부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도록 하지 않습니다. 먼저 인간 편에서의 동의를 구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때 어떻게 말합니까?<br> 그것을 먹는 날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3)고 합니다. <br>---------<br>** 그러면 사탄이 이렇게 시험한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입니까? <br>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리를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려는 동기였습니다. 이것은 사탄자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사탄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고 해서 사탄이 되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습니다). <br>--3:5에 보면 사탄은 말하기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데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사람을 시험했습니다(3:5). <br>--<br>--이와 같이 사탄이 시험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노릇해보지 않을래라고 는 것이었습니다. <br>-이런 사탄의 시험에 인간이 넘어가서 이 땅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p>*****그러면 죄란 무엇입니까? <p>1.죄란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br>죄란 단순히 인간이 만든 법을 어기는 정도가 아니라--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br>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높은 기준으로 말씀하십니다. 원수라도 사랑해야한다. 미워하면 살인이요,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불순종하는 것이 죄입니다. <p>2. 또 죄란 인간이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이 땅과 인생의 주인노릇 하려는 것입니다 <br>--여러분 지금 길가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이 세상의 누구의 세상입니까? 당신의 인생을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같이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이고,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다 주장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라는 말입니다.<br>--그러면서 서로 누가 이 세상의 더 큰 주인이 되느냐를 가지고 다투고 싸우는 것이 이 세상 아닙니까?<br>--왜 전쟁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납니까? 서로 주인노릇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교회에서는 이래서는 안 된다.주도권 다툼-죄의 모습이다). <p>3. 또 죄란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br>즉 죄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독립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br>--오래 전에 비트라는 정우성이 주연하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 보면 주인공이 오토바이를 타면서 두 팔을 벌립니다. 그리고 달립니다. 그러면서 존 레논의 렛 잇비라는 노래가 나옵니다.<br>--렛잇비를 우리나라 말로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냅둬유---<br>하나님이 더 이상 날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br>여러분--이것이 바로 오늘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죄의 본질입니다.<br>-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br>겨울 숲에서 들개와 집개가 만났습니다. 집에 사는 개는 겨울인데도 아주 기름지게 살이 쪄 있었습니다.<br>그런데 들개는 잘 먹지 못해 초췌해있었습니다. 그때 들개가 물었습니다. “집개야 넌 어떻게 이 겨울에도 그렇게 살아져 있어그때 집개가 하는 말이 우리 집에 가자 그러면 이 추운 겨울에도 마음껏 먹고 쉴 수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집을 향해 같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들개가 집개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집개야 너의 목에 목걸이가 있는데 그것이 뭐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집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 목걸이? 집에 가면 주인이 여기에다가 줄을 메 달고 나를 이 방 저 방 데리고 다니면서 먹을 것을 주지그 소리를 들은 들개는 깨갱 하면서 소리를 치면서 황량한 숲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하는 말이 나는 굶어죽을지언정 너처럼 메여서 살지는 않을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그 들개는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br>--------<br>여러분 보십시오. 우리 안에는 항상 이 들개와 같은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br>하나님 믿으면 되는데-기도하면 되는데--그렇게 해결될 줄 믿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br>--하나님이 여러분 삶의 주인이 되고-또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 속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더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br>--그런데 우리 인간이 가진 죄의 본성 때문에 이상하게도 의지하면 되는데-그냥 끝까지 고집하면서 가만히 있습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br>이것이 바로 죄라는 말입니다.<br>--위기의 부부가 있습니다. 부부의 위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의 한계입니다. 내가 가진 사랑으로는 도무지 저 사람을 사랑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그렇게 말합니다. <br>--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빌어야합니다. 오주님 내 사랑에 한계가 있습니다. 내 힘으론 저 사람하고 살수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고도 하지 않습니다. <br>오히려 어떤 사람은 내가 그렇게 기도하면 저 사람을 사랑하게 될 줄로 알아서 오히려 더 그렇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 <br>--여러분 이것을 개성(*개 같은 성격)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br>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겨야 할 죄의 본성입니다. 이런 죄는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가장 큰 권세입니다. <p>****그러면 이런 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죄의 결과는 사망 즉 죽음입니다(6:3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br>**하나님께서 분명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당장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죽으리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요계21:8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br>--요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br>---여기서 보면 죄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즉 사람은 육신의 죽음이 첫 번 사망이고, 그 후에 둘째 사망으로 지옥이 있는 것입니다.<p>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지옥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못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br> <br>--이렇게 사망이란 우리가 단순히 육신이 죽고, 또 지옥 가는 것도 있습니다만 -- 이미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p>*****그러면 죄의 결과로 인한 현재적 사망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br>첫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왜곡된 모습입니다. <br> 2:1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여기서 죽었다는 것도 단순히 육신적인 죽음이 아니라--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끊어진 졌다는 말입니다. <br>--처음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 하나님을 주로 섬기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관계였습니다(그렇게 함으로 그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존재였습니다). <br>---그런데 이런 인간이 이제 오히려 그 하나님에게서 도망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br>--오늘 본문에도 보면 인간이 범죄 한 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합니다(3:8).<p>*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현실에서 도피하여 신의 세계로 도피하려 하느냐?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무언가 나약한 현실도피주의자가 아니냐고 합니다.<br>이렇게 말할 때 우리가 어떻게 말해야합니까?<br>우리가 현실을 도피해서 하나님에게로 도망하는 자가 아니라--오히려 너희들이 하나님에게 도망하여 일에 빠지고, 세상에 빠지는 존재가 아니냐 이렇게 말해야합니다(4장에 보면 가인의 후예들-세상 일의 시조-하나님께 도피하는 수단이다). <br>**그런데 이것뿐만 아닙니다. 인간에게 사망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도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을 욕하고 대적하고 -더 적극적으로 악의를 품는 인간이 되었습니다(김용옥). <br>가인이 하나님에 대하여 분을 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4). <br>-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이 바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의 모습입니다.<p>둘째-죄로 말미암은 사망의 모습은 인간관계의 단절과 왜곡입니다. <br>태초에 아담은 자신의 아내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했습니다. <br>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입니까?<br>그런데 이 땅에 죄가 들어온 후 아담이 자신의 아내를 보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했을 때 아담은 바로 이 여자 때문에 내가 이것을 따먹게 되었습니다”.<br>--이것을 정말 실감나게 말하면 하나님 바로 당신이 준 이 년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습니다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br>--이렇게 죄란 부부관계를 갈라놓습니다. 또 창4장에 보면 형제관계를 갈라놓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이 물었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그때 가인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합니다. 이 말은 형인 내가 아우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왜 형이 아우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br>--또 창6장에 보면 남녀 사이에 음란이 개입되고, 사람사이에 폭력이 개입됩니다.<br>이것이 바로 인간관계에서 보는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모습니다.<br>한 몸인 부부가 서로 갈라져서 자고 싸우고 있다면 사망이 그 가정에 온 것입니다.<br>만일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이라고 하는 교회 지체들까리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고 있다면 그 교회에 사망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br>-- <br>이것이 바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의 모습입니다. <p>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br>우리가 바로 그 죄와 사망에서 구출함을 받는 것입니다.<br>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생명의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br>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내 인생과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br>그리고 그 하나님께 내 모든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의뢰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 살아 갈 수 없습니다고 하면서 --나의 제한된 자원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원을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모습입니다. <br>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기분과 감정과 여건과 관계없이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br>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바른 관계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오는 것이 구원입니다.<p>또 사람과 바른 생명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br>먼저 부부관계가 아담과 하와의 관계처럼 회복되는 것입니다.<br>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해 봅시다-남편들--<p>--단순한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해야합니다. 내 기분과 감정은 죽이고 싶어도 의지를 가지고 사랑해야합니다.<p>--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한 몸의 관계를 이루어야합니다. <br>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바로 교회입니다. 저는 평생 동안 교회가 소그룹의 교제를 통해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하나 된 교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단순히 목회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br>우리가 이 교회 안에서 서로 하나 되고 한 몸 되는 것이 구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p>--그러나 우리안의 죄는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br>사탄은 적개심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게 만듭니다.<br> <br>또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간질 시킵니다. 서로 의심케 만들어 갈라놓게 만듭니다. <br>무엇보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된 교회 안에서 시기, 질투, 분냄, 모함을 통해서 성도사이를 갈라지게 만듭니다. 이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죄의 모습입니다.<p>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이런 죄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합니다. <p>--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 죄에서 구원받고 해방된 참 성도들이 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br>||||||

 

 

 

 

 

 

 

 

 

 

 

 

 

 

 

 

 

 

언약설교10-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11:1-9)

오늘 본문4절에 보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히브리원문으로 보면 나라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베탑을 쌓는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무언가 나라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지금 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이루려고 하는 나라는 바로 세상나라입니다-오늘 본문에 바벨탑을 짖는 이 모습은 세상나라의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첫째-모든 일의 시작과 진행에 있어서 철저히 인간이 중심이 되는 나라입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이 인간들끼리 서로 말하되 라고 합니다. 5절에 보면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성과 대를 높이 쌓자는 말입니다-그러니까 이 세상나라는 모든 일의 시작과 진행에 있어서 철저히 인간이 중심이 되어-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둘째-말씀을 거역하는 나라입니다-

4절에 보면 바벨탑을 지으면서 그들이 하는 말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짖자고 합니다-

91절과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하나님께서 노아홍수이후에 사람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땅에 충만하라-또 땅에 편만하라고 합니다-이 말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모이지 말고 흩어지라는 말씀입니다-그런데 지금 바벨탑을 쌓는 사람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땅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짖자고 합니다-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정반대로 거역하는 말입니다-즉 이 바벨탑에서 보여준 세상나라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고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나라입니다-

셋째는 세상나라는 인간의 이름은 높이고 나타내는 나라입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바벨탑을 쌓고자 하는 목적은 바벨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자신들의 이름을 온 땅에 나타내고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이 세상나라는 무슨 일이든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인간의 이름을 높이고 나타내려 하는 나입니다--

그런데 이제 12장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부르시고 야곱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또 우리들은 영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또 이삭을 부르시고 야곱과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또 이 세상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바벨탑과 같은 세상나라와는 대조되는 하나님나라를 이루기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는 비록 이 세상나라 속에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란 사실입니다(이것을 아는 것이 참중요합니다-그래서 우리의 삶은 세상나라의 원리를 따라 지배받는 삶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따라서 지배를 받는 삶이란 것을 잘 기억해야합니다-지난번에도 여러번 멀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 이삭 야곱중에서 이땅에서 누가 제일 잘 살았습니까? 이삭-아브라함-야곱입니다--이중에서 누가 제일 잘 살려고 노력했습니까? 야곱-아브라함-이식입니다--만일 이들이 세상나라의 사람이었다면-어떤 자가 잘 살았겠습니까 야곱과 같은자입니다--그래서 남을 속여서 까지라도 높이 되고, 가지고 차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잘 살게 되어있습니다-이것이 이 세상나라의 원리입니다---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그리고 우리는 이제 단순히 이 세상나라의 원리에 지배받는 삶이 아닙니다---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나라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땅에서 잘 살수 없습니다----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하나님나라의 백성답게--하나님나라의 원리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하나님나라의 원리대로--하나님나라의 백성답게 살아야-이땅에서도잘 살수 잇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나라의백성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나라사람들과는 반대로--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철저히 반대되고 대조되는 나라입니다-그래서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나라사람들과는 반대로 거꾸로 살아야합니다-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바로 살고 잘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속해 있는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세상과 반대를 이루고 대조를 이룹니까?

오늘 말슴을 통해서 세상나라와 반대가 되고 대조가 되는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하셨던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중심이 아니라 일의 시작과 진행에 있어서 철저히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나라입니다-(하나님중심)

우리는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사건을 통해서 잘 알수 잇습니다=

40살때의 모세를 보시기 바랍니다-그는 애굽의 왕자로서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또 그는 어머니요게벳을 통해서 신앙교육도 철저히 잘 받은 사람입니다-뿐만 아니라 40살때의 모세는 신앙의 용기도 잇던 사람입니다-그래서 40살이 되었을때 자신의 동족이 애굽사람에게 학대를 받는 것을 보면서-의분이 일어나-그 애굽사람을 쳐죽일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이것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이런 모세의 행동이 -왕자로서의 세상적 영광을 버리고-그리스도같이 고난받는 길을 택한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와같이 40살때의 모세는 세상학문과 신앙교육으로도 최고이고, 거기다가 믿음의 결단과 용기까지 있었던 사람입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게서는 40살때의 모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40년동안 광야의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모세의 40년 광야생활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는 하나님앞에서 4번식이나 나는 말못하여 할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당시 애굽의 왕자교육의 첫 번재 과목은 수사학입니다-그러니까 모세가 40살까지 제일 잘 할수 있었던 것이 말하는 법이었습니다-그런데 그러던그가 말을 잘 못한다고 하는 말은--그가 인간적으로 제일 잘할수 있는 것조차도 이제 못하겠다는 말입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조건이 다 갖추어진 40살때의 모세를 사용하지 않고--아무 것도 할수 없다고 말한 80살때의 모세를 사용해서 하나님나라의 일을 맡겨두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나라의논리로 본다면 당연히 40살때의 모세가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기에 가장 적합할 사람일 것입니다-그러나 이것은 세상나라의 논리입니다-하나님나라는 정반대입니다-그렇지 않습니다---하나님나라는 절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우리 인간이 우리 인간으 힘으로 무언가 할수있다고 했을때=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꺽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할수 없다고 했을때==인간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나라가 바로 우리가 속해있는 하나님나라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를 죽이는 말씀이 아니라 너무나 힘을 주로 위로를 주고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왜 그렇습니까?------이 말씀은 우리가 부족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우리가 연약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세상나라에서는 부족하면 되지 않습니디-연약하면 되지 않습니다-강해야합니다(그렇지 않으면 강한체라도 해야합니다)--그러나 하나님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0--우리가 연약하면할수록-하나님은 우리와 더 함계 해주십니다(오주님 내가 그렇습니다나는할수없습니다그러나 믿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다 했을때--우리를 멀리하십니다-그러나 나의 연역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했을때--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그 어떤 강한 사람보다 더 큰 힘을 주시고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삶은 우리 인간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연약한자를 도우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1717절을 보십시오-내가 무언가 할수 있다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믿음이란 인간은 절대 절망입니다-그러나 나는할 수 없지만--하나님으로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속해 있는 나라가 세상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그래서 이제 우리는 인간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의지했을때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재 우리가 속해잇는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반대로 철저히 말씀중심의 나라입니다-또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나라가 우리가 속해있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이세상나라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나라입니다--바벨탑과 같이 철저히 하나님말씀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나라가 바로 이세상나라입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문화를 보십시오-이 세상의 모든 문화는 그 이면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는 대조가 되고--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문화들입니다--

-오래전에 크렘린이란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그 영화에 보면 남자 주인공이 나옵니다-그 남자주인공은 크리스마스를 싫어합니다-왜나하면 크리스마스날은 기쁜 날이 아니라--주인공의 아버지가 굴둑에서 내려오다가 불타서 죽은 끔찍한 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그 영화에 보면 작은 크렘린이란 작은 동물이 나옵니다-그 동물은 물에만 들어가면 세포분열을 해서 엄청난 숫자의 괴물이 됩니다--그런데 바로 그 크렘린이 수영장에 빠져서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는 날짜가 바로 1224일입니다(예수님의 탄생을 연상시켜줌)-우리는 그저 흥미를 가지고 그 영화를 재미있게 봅니다-그러나 그 영화는 은연중에 예수님이 태어날 날을 괴물이 태어난 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지막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그 괴물은 지금 우리주위에 어디든지 있다고 말합니다)---이것뿐만이 아닙니다-저는대학다닐때 기독교세계관을 공부하면서--이 세상문화-특히 영화에 나타난 반 기독교적인 사상들--말씀과 대조되는 사상들을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그래서 월요일이면 혼자서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들을 말씀의 입장에 분석해보는 일들을 해보았습니다(고스트바스트-백투더 퓨처)-그랬더니 정말 지금 이세상의 문화는 마치 오늘 분문에 나오는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그들을 철저히 하나님을 거부합니다-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거부합니다--하나님말슴에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지만 이 세상나라와 문화는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그 모든 영화들에거 그리는 것은 모두 복수와 복수의 연속입니디=

어떤 분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예전에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흘러가는 대로 아무 생각없이 살앗는데-이제 말씀을 공부하면서-하나님의 말씀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와같이 이 세상나라는 철저히 하나님말씀과는 대조가 되는 나라입니다-

또 이 세상나라는 하나님말씀에 불순종하는 나라입니디--그러나 우리가 속해 있는 하나님나라는 철처히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는 나라입니다--우리가 만일 이세상나라의 원리로 본다면 하나님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멍청하고 시대에 맞지 않고-바보스럽게 보입니다-그렇게- 살다가 어떻게 살겟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이 세상사람들은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잘 살수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나라의백성인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십니다-그러나 우리가 만일 말씀중심이 되지 않고---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지 않을때 우리는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이삭의 삶과 야곱의 삶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하나님의말씀에 순종을잘 한 사람은 이삭입니다-

17세때-너 제물되어라햇을때 가만히 있엇다-아바지 이럴수있습니까? 할수잇지않으냐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제단위에 가만히 있었습니다-쉽게 말해=하나님의 말씀이면 죽어도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후 40살이 되엇을때-결혼하지 않았어도 초조하지 않았습니다--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올때도 그는 누가 올것인가? 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리브가가 저 먼발치에서 올때도 이삭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그리고 리브가가 왔을때도 그녀가 외모가 어떤 가 얼마나 예쁠까 하지 않았습니다-오직 그는 아브라함의 종이 하는 말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인도하셔서 리브가를 데리고왔습니다-는 그 말만 듣고--이삭은 리브가를 사랑하였더라고 합니다-당시는 일부다처사회였습니다-그러나 이삭만이 오직 리브가만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이삭은 물질에 큰 욕심도 없었습니다-그래서 우물을 팠습니다-(당시 우물은 재산의 상징입니다)--그런데 그 우물 때문에 싸웁니다-그러나 그냥 그 우물을 줍니다-또 우물을 팠습니다-또 싸웁니다-그러니 또 줍니다-나중에 또 땅을 파니 우물이 나옵니다-이것을 보고 세상사람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게 하시구나는 것을 깨닫고 이삭과 화친을 맺습니다---이러한 이삭의삶은 세상나라로 본다면 정말 멍청하고 바보스럽고-이렇게 살다간 도무지 못 살 것같습니다-그러나 이삭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기에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그와 함께 하심으로 이땅에서 잘 되는 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보십시오--

34장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그러나 야곱은 순종하지 않습니다--세겜과 숙곳에서 머물러 땅을 사고 집짖는 일에만 열중합니다-그때 어떻게 됩니다--세겜에서 딸 디나가 겁탈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또 그것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사람들을 죽이는 사건이 나옵니다--야곱은 오직 가지고 차지하는 일에만 집중했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햇습니다-이럴때 야곱은 이땅의 삶도 험악하고 피곤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호세아서4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구약 1259)“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같이 먹이시겠느냐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은 야곱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았습니다-그래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같이 완강하다고 합니다-이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소가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이 소를 끌고 저 넒은 푸른 초장으로 데리고가서 더 풍성하게 먹이려 하십니다-그런데 이 소는 완강합니다-끌려가려 하지 않습니다--끝까지 버팁니다-이런 완강한 암소같은 이스라엘을 어린 양같이 넓은 들에서 먹임같이 먹이시겟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완강한 암소가 아니라 순한 어린 양이 되어야합니다--순한 어린 양같이 하나님끔중심으로 ===말씀하시는데로 순종하며 살아야합니다--그럴때 주님께서 우리를 더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마지막으로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달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나라입니다-

바벨탑--벽돌 한 장한장 마다 자신의 이름을 세겨넣았다는 말이 있다-이와같이 바벨탑과 같은 이 세상나라는 온통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고 드러내어=-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중심이되고--말씀중심이 되면 당연히 그 결론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0-

왜 모세의 무덤이 없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병을 고쳐주지 않았는가?

왜 칼빈의 무덤이 초라한가

왜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말년에 육신적인 질병으로 고통하며 죽었습니까(스펄전-박복달-쉐이퍼등등--)--저는 이런 사실을 보면서 한가지깨달 은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도 절대 그 사람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디-다 하나님의 은혜때문입니다-그러므로 절대 사람에게 영광이가서는 되지 않습니다--

제가 짖는 죄중에서 가장 큰죄==내가 무언가 했다고 자랑하면 끝이다-오직 겸손히 주님계만 영광이 되게 하소서--

 

 

 

 

 

 

 

 

 

 

 

 

 

 

 

 

언약설교11-하나님나라와 재물(10:17-31)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어떤 한 사람이 갑자기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사람이 젊은 청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9:20). 또 누가복음에 보면 관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8:18). 그런데 모든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이 재물이 많은 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젊었고, 또 관원에다가, 또 돈이 많은 부자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아니라 이 사람은 인격적으로도 겸손한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이 젊은 나이에 돈이 많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으면 교만하여 인간성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달려와서 무릎을 꿇을 정도로 인격적으로 아주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아닙니다. 젊었고, 부자였고, 관원이었고, 겸손하였을 뿐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 부자들은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면 이 젊은 부자가 왜 예수님에게 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부자고, 사회적인 신분이 높아도 그것으로 영적인 만족이 채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언가 영적으로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주간 우리는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죽음 앞 에서 우리는 너무나 당연히 저 영원한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부자 청년이 이제는 저 영원한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부자 청년은 그 문제를 고민하다가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길에서 달려가서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여야 죽어서도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이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이 부자청년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이 부자 청년이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 본문에 나오는 청년이 돈이 많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을 보면서 이 부자청년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단순히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실 자라고 보지 않고, 예수님을 단순한 도덕적으로 착하고 훌륭한 선생님으로만 보았습니다.

또 이 사람의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한 질문 속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행해야 저 영원한 천국에 갈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가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이 부자 청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실 이 땅에 모든 사람은 이 부자청년과 같습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게 살아야 천국에 갈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천국가기 위한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가지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고행이라고 감당하려는 것이 이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이 사람의 가장 큰 문제인줄 아시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을 읽어보겠습니다.

19:17. 네가 생명(천국)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러니까 이 사람이 또 묻습니다.

18: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18:18b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오늘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어떤 행위를 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모든 계명을 다 지키고, 또 거기에다가 나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삶을 살아야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서 모든 계명을 다 지키고, 거기에다가 여러분들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한다면 이 가운데서 천국에 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왜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 하셨습까?

그 이유는 이 부자 청년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해주기 위함입니다. 네가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너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청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행하지 않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네 모든 소유를 다 없이하라고 하니까 예 저는 모든 물질의 소유를 다 포기했습니다. 저는 무소유로 살고 있습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또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네가 무소유로 살아가고 있다고, 그러면 네 평생에 마음으로도 한 사람도 미워한 적이 있느냐, 네가 만일 마음으로 어떤 사람을 미워했다면 그것도 살인죄에 해당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하면 예 저는 내 마음으로도 어떤 사람을 미워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를 비방하고 미워하는 원수가 있느냐, 그러면 그 원수라도 사랑하고 축복해주면서 살아가고 있느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가운데서 왜 이 부자청년에게 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천국에 들어 갈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하나님)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행위,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인간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에게 거울이 없다면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난주에 중고등부수련회 때 저녁식사를 마치고 제가 감자를 숯에 구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집사님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니 얼굴에 여기저기에 검은 숯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울이 없으니 아무도 자신의 얼굴에 검은 숯이 묻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대신 어떻게 말을 합니까? 서로를 보면 네 얼굴에 숯이 묻었다고 이야기할 뿐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얼굴에 묻어 있는 숯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상대방의 죄와 허물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울처럼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지난주 중고등부수련회 때 유다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가 누구입니까? 유다입니다. 또 누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유다입니다. 그러면 왜 유다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가 되었습니까? 또 왜 유다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38장에 유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며느리인 다말이 창녀인 줄 알고 관계를 가졌던 사람이 바로 유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구원을 받았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입니까? 그러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의 본질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았을 때 유다와 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죄를 짓고 있지 않는 것은 절대 우리의 본성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죄를 짓고 있지 않는 것은 전전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수 없고, 천국갈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율법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모든 입을 다 막아버리고,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롬3:21에서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런데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방법 외에 다르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부자청년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행해야 구원을 얻습니까? 즉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청년의 더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의 모든 소유를 다 포기하고 버리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부자청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되는데, 예수님을 떠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또 여전히 연약하여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이때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내 모든 소유를 포기하지 않는 죄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이 부자 청년이 진짜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그의 모든 소유를 다 포기하지 못하는 근심가운데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청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것이 이 부자청년의 가장 큰 문제였고, 어리석음입니다.

저는 이번 중고등부수련회를 참석하면서 그 동안 대학생수련회, 중고등부 연합수련회 등 많은 수련회를 참석했는데 그동안 본 수련회 중에서 최고였다고 감히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중고등부학생들이 완벽하게 변화되었느냐고 말씀하실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중고등부학생들 중에서 금요기도회를 나올 때 아직 슬리퍼를 신고 오는 학생들이 있고, 또 모자를 눌러쓰고 참석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아직 어른들을 보면 인사도 하지 않는 학생도 있습니다. 또 중, 고등부실 청소도 완전하게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집에 가서 어른들의 말씀에 순종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더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는 모습이 아직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최고였다고 말씀을 드리는 기준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고등부 학생들이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정말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려 했습니다. 찬양을 하는데, 정말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도 더 집중해서 들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 1시까지 기도를 하는데 한 학생도 불평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하는 말이 더 기도하지 못해서 아쉬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못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기에 더 예수님께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해도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잘 살아가는 자칭 의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부족하게 살아가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지 않고 잘 살아가는 자칭 의인과 예수를 믿으면서도 부족하게 살아가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 중에서 하나님 앞에 누가 더 의롭겠습니까? 부족하지만 예수를 믿고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더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우리가 부족해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고, 천국 가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각오해야하는가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사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재물이 있는자, 부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기 심히 어렵습니다. 부자가 하나님나라에게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여러분가운데서 오늘 밤에 낙타를 바늘귀에 넣으라는 숙제를 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매우 놀랍다 입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심히 어렵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이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회적 배경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의 사회에서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모든 재산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버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심지어 가족들에게서도 버림받을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각오를 했어야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좋기는 좋은데,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까 하여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천국의 영생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청년은 아무리 천국이 좋고, 또 예수님이 좋다 하더라도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떠나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포기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그런 가운데서 누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자는 예수님 때문에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심지어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까?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나를 믿기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부모니 자식이나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제일 큰 복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은 내세에 영생,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복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이 땅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은 죽어서 반드시 내세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현세에는 어떤 복을 받게 됩니까?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 이 땅에서의 최고의 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천국이란 이 땅에 누리게 되는 천국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자신이나 심지어 내 모든 전 재산을 다 잃어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도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잃어버린 전 재산까지도 백배나 받는 축복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운데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형제를 잃어버렸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더 가깝고 사랑하는 형제들을 얻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부모를 잃어버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또 이 교회가 그분들의 따뜻한 어머니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물질을 잃어버리는 자에게는 잃어버린 물질의 백배나 받는 복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잃어버린 물질의 백배를 정확하게 얻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을 믿는 것을 주식투자하듯이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가 물질적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 물질과는 비교 할 수 없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닮는 인격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데, 사람으로 인한 가시가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가시가 여러분들을 더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더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의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널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고 말씀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가면 당장은 물질에 있어서 손해는 보는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물질에 있어서도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져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이 땅의 모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만큼 잃어버리지 마시고, 놓치지 마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그 어떤 손해가 있고, 희생이 있어도 오직 그 예수님만을 붙들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언약설교12-하나님나라와 종말(3:18)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하나님나라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나라라는 말은 어떤 장소나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 통치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이 끝이 나거나 우리가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벌써 임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이미 임하여진 하나님나라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다가 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 안에 살다가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온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나라는 어떤 장소나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밭에 감추인 보화에 비유를 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는 겉으로 보면 눈으로 볼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밭을 소유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파 보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왔다 고해서 그것을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나라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하나님나라를 확인하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가 이미 우리가운데 왔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 구원받은 우리의 삶의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간섭하시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내 삶 가운데 이미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의 개인적인 삶만 아니라 우리 가정, 국가, 교회, 역사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나라가 이미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지금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마귀가 물러가고, 인간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원하시면 어떤 병이라도 나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나라의 잔치의 풍성함과 기쁨을 누림으로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잔치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바로 하나님나라의 잔치입니다. 또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각종 수련회 세미나 성경공부들이 하나님 나라의잔치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 세겹줄 기도회도 하나님나라의 잔치입니다. 이번주 세겹줄 기도회에 많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711일 총전도주일도 하나님나라의 잔치입니다.

8월 달에는 말씀잔치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주제를 정해 놓고 강사를 교섭 중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노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큐티를 어떻게 잘할 것인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와같은 하나님나라의 말씀 잔치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잔치의 풍성함과 기쁨에 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나라는 침노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침대에 누워서 티브만 보면서 가만히 있다고 해서 이런 하나님나라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두신 이런 하나님나라의 잔치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야 합니다. 침노한다는 말은 원래 물건을 강탈하여 빼앗는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풍성한 은혜와 복을 주시려고 예비해 놓아도 우리가 참여하여, 그것을 빼앗지 않으면 우리가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모든 잔치에 빠지지 않고 더 열심히 참여하여 더 풍성한 하나님나라를 누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와같이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것을 천국잔치에 참여함으로 이 땅가운데서 더 풍성히 누릴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나라만 이 땅에 벌써 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대한 종말과 심판도 이미 왔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장차 미래에 심판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대한 종말과 심판이 이미 왔다는 사실도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 세상은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절대 이 세상에 대한 종말과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한 종말과 심판이 이미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한 종말과 심판이 이미 임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1)첫번째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거나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죄악대로 내어버려두시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임하여져 있는 심판의 모습입니다.

1:18 "하나님의 진노(심판)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 즉 심판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이미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두십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현재 임하여 져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입니다.

또 롬1: 26.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여기서도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두심으로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부끄러운 일들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임하여 있는 심판의 모습입니다. 요즘에 동성애를 드라마에서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두심으로 현재에 임하여져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모습니다.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또 이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어버려두셨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그대로 내어버려두시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불의하고, 추악하고, 탐욕하고, 시기하고, 살인하고, 분쟁하고, 시기하고, 악독하고, 수군수군 하고, 남을 비방하고, 교만하고, 인간적 것을 자랑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우매하고, 약속을 쉽게 어기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입니다. 또 사람들은 이렇게 살면 장차 미래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사실을 양심으로 알고도 그런 일들을 행하고 있으며, 또한 그런 자신의 일들이 옳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임하여 져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주관하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간섭하심으로 금방 벌을 내리십니다. 어떤 분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마음에 조금이라도 교만한 마음이라도 품으면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내게 반응을 하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어벼려 두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를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겉으로 볼 때 너무나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보게 됩니다. 그들을 죄를 지어도 아무 아픔이 없습니다. 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잘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 그들이 너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내어버려두심이 현재 그들에게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시편 73편 기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73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믿지 않는 자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멸망으로 내가는 미끄럼틀 위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조금만 잘못해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심으로 죄를 지을 틈조차도 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성공하지 못한 것-부자되지 못한 것 -교만하여 죄짓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리심입니다)-나를 이렇게 간섭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에 종말과 심판이 이미 임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결핍과 고난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하여 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솝우화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겨울철 배고픈 들개가 숲속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기 보니까 집에서 사는 개가 있었습니다. 그 개는 겨울철인데도 전혀 베고프지도 않고 잘 지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개가 말햇습니다. 너 어떻게 이런 겨울철에도 배고프지도 않고 잘 지내고 있지 라고 말햇습니다. 그때 집에 사는 개가 우리 집에 가면 겨울철에도 전혀 춥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게 잘 살수 있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들개가 집개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따라가다가 들개가 집개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너 목에 잇는 것이 무엇이니/아 이것은 집에가면 주인이 여기에다가 줄을 메여서 여기 저기로 데리고 가면서 먹을 것을 준단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들개는 그 소리를 듣고 깨깽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꿂어 죽을지리도 그런 목걸이 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겠다”--하면서 다시 숲속으로 갔습니다. 결국 그 개는 꿂어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의 상을 마련해놓으시고, 하나님 안에서 배부름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들개의 습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죄의 습성이라고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관자와 공급자가 되어주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그래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나의 결핍된 자원으로 살아가보려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나오는 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나는 굶어죽을지라도 하나님에게 메여서 살지 않겠다그래서 영적인 배고픔과 고난 가운데서 그냥 그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현재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잠시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영적인 배고픔과 고난을 느낍니다. 이때 어떻게 합니까?

16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가리라)”

여러분도 힘드시면 그대로 있지 마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에게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이 세상에 종말 심판이 임하여져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삶속에서 영원한 기쁨이 없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하여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허무주의입니다. 왜 허무주의 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니까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알수 없습니다.

또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니까 우리의 인생이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지나간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니까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죽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삶의 출발과 의미와 목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체바퀴도는 삶을 살다가 나무나 풀처럼 허무하게 죽고 마는 것이 인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쾌락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쾌락에 탐닉을 합니다. 성적쾌락에 탐닉을 합니다. 돈을 통한 쾌락을 얻어 보려고 합니다. 성공을 통해서 쾌락을 얻어 보려고 합니다. 스포츠를 통해서 쾌락을 얻어 보려고 합니다. 또 세상의 인기를 통해서 쾌락을 얻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쾌락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쾌락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입니다. 그것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강렬한 쾌락을 얻으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쾌락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돈이나 희생도 감수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는 내면에는 허무주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허무가 있는 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누려야할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떤 존재로 만드셨습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영원한 기쁨을 누리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초적인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육신의 기쁨이 아니라 영혼을 통해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니까 그 하나님으로 인한 영혼의 기쁨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허무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대신에 세상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으로 인한 영원한 기쁨이 없이 것이 현재 임하여져있는 심판의 모습입니다. --

그러면 마지막으로 미래에 임하여질 심판은 어떤 것입니까? 또 미래에 임하여질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입니까?

베드로후서 310절을 보겠습니다.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여기서 보면 이 세상이 끝이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늘이 없어지고, 이 땅의 모든 물질이 더 없어집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즉 지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벌써 임하여졌습니다. 또 이 세상에 심판도 이미 임하여 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감추어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종말이 무엇입니까?

이 감추어진 사실이 눈에 보이는 사실로 드러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현재적인 심판이 어떻게 됩니까?

현재적 심판이 이제는 눈에 보이는 심판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옥입니다.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런데 여기서 미래에 임할 심판이 지옥의 뜨거운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내어버려두시는 곳입니다. 또 영원한 결핍과 고난이 있는 곳입니다. 또 영원한 슬픔과 탄식이 있는 곳에 지옥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면, 이 세상이 끝이 나면 지옥입니다. 또 지금 이 순간 하나님 나라의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면, 이 세상이 끝이 나면 곧 지옥입니다.

또 이 세상이 끝이 나지 않아도 죽음은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 죽으면 지옥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끝이 나면 현재 임하여 져 있는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는 열두 진주문 황금보석이 있는 나라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열두진주문 황금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7:.17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예수님)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또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는 모든 악한 사탄의 권세가 물러가고, 모든 병들이 다 치유되어서 우리 육신의 몸이 예수님처럼 온전케 됩니다(22: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 이 땅에서 육신의 질병으로 고생하시다가 천국에 들어가신 분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모든 병들이 다 치유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저 영원한 우리가 밤낮 주님을 섬김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인한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영원한 기쁨)이라 이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영원히 웃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교제함으로 이 천국의 기쁨을 날마다 맛보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언약설교13-죽음과 부활과 하나님나라(12:18-27)

여러분들은 내세가 있다고 믿으십니까? 또 내세의 부활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또 저 영원한 천국을 믿으십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20프로만이 내세의 천국과 부활이 있다고 믿는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다섯 명 중의 한명만이 내세의 부활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4명은 내세의 천국과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만일 내세가 없고 천국이 없고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다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일 내세가 없고 부활이 없다면 사도바울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또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을 합니다.

내세는 분명히 있고, 천국도 분명히 있고, 부활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사두개인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에 예수님에게 와서 질문을 합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의 가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김을 당할 때 사독이라는 제사장이 다윗을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사독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사장의 집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적인 권력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항상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의 상위1프로에 해당되는 사람들이사두개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인들이었지만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로마정부도 인정했습니다. 또 이들은 종교인들이지만 천사의 존재도 영혼도 부정하고,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내세도 부정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진보좌파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라면, 사두개인들은 보수우파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도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가 얼마나 대립이 되고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요즘에 인터넷으로 신문을 볼 때도 항상 보수신문과 진보신문을 같이 봅니다. 저희 집에도 몇 달 동안 무료로 어떤 신문이 배달되고 있는데 제가 한쪽으로 치우칠까 하여 절대 보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정말 조심해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완전히 대립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로 예수님에게 질문을 했다가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와서 질문을 합니다.

19절부터 23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19절에 보면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구약성경중에서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모세오경이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리킵니다. 사두개인들은 구약의 성경가운데 선지서와 같은 날카로운 책들을 부인하고 모세오경만을 인정했던 사람들입니다. 모세오경 신명기 205절을 보면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는 말씀을 인용을 합니다(19). 이것을 형사취수법이라고 합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아내로 맡으라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 집안의 대를 잇게 하고, 또 홀로 있는 형수를 보호하는 법입니다. 이 형사취수법을 예로 들면서 만일 칠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아들이 없이 죽었고, 또 둘째도 아들이 없이 죽었고, 마지막 일곱째 형제까지 아들이 없이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큰 형수님은 이 땅에서 일곱형제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부활 때 이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면 그 형수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사두개인들이 이렇게 질문을 한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18절 초두에 보면 이 사두개인들을 가리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두개인들이 이렇게 질문을 한 것은 부활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만일 부활이 있다면 부활 시에 형수가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어야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의 부활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을 하십니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이렇게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성경도 잘 모르고, 또 하나님의 능력도 잘 몰라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오경만은 믿고 있다고 하지만 모세오경조차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세오경 가운데서 부활에 관한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일 먼저 창세기 11절에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이 없는 데서,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고 믿는다면,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모세오경에 부활에 관한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 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부활시켜 주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9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11:19)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켜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부활신앙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는 이 부활신앙을 가지게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는 육신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죽은 태였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죽은 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도 살려주신다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습니다.

또 모세오경에서 부활에 관한 말씀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2: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이것은 출애굽기 3장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장에서 가시나무 떨기에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아직 살아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천국에서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육신은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교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죽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뒤에 27절에서 예수님께서도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은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천국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품에서 살아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사랑하는 딸을, 아들을, 남편을, 아내, 어머니를 일찍 주님의 품에 보내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내 사랑하는 딸이, 아들이, 남편이, 아내가, 어머니가 지금도 저 천국에서 주님의 품에서 살아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주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는 지금도 주님과 함께 살아 있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한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고 한 이유는 그들이 모세오경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모세오경에 나타난 부활에 관한 말씀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부활 때에 일곱남편을 둔 형수가 누구와 결혼하는 것입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부활 이후의 일을 질문을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않지만 만일 부활이 있다면, 부활 때에 이루어질 저 영원한 천국을 이 땅의 삶의 연장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세의 천국이 있다고 한다면, 일곱 남편을 둔 형수가 누구와 살아야합니까 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을 하셨습니까?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저 영원한 천국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 영원한 천국을 이 땅의 삶의 더 나은 연장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부동산 투기를 해서 많은 땅을 가진 사람들이 저 영원한 천국에서도 부동산투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 천국에서 너보다 더 큰 엄청난 맨션을 가지고 있다/나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 너보다 더 큰 땅을 가지고 있다/나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 너보다 더 좋은 관을 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저 천국에서 황금 모자를 쓰는데 너는 저 천국에서 겨우 개털모자 밖에 쓰지 못할 것이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사람들과 이슬람 사람들이 저렇게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도 저 영원한 천국을 이 땅에서 채우지 못한 물질의 욕망의 극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전쟁에서 싸우다 죽으면 저 천국에서 더 큰 물질적 보상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으라고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저 영원한 천국을 이 땅에서 가지지 못한 물질의 욕망의 극대화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영원한 천국에는 열두 진주문과 황금보석의 길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 영원한 천국에 열두 진주문이 있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흘린 눈물이 진주가 되어 있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 입니다. 또 왜 저 천국의 길이 황금길 입니까? 저 영원한 천국은 황금을 길거리의 돌로 생각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저 영원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까? 그것은 저 영원한 천국에 가기위해서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신의 죽음과 동시에 이 땅에서의 모든 욕망들이 죽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죽어야합니다. 육신의 죽음은 생과 사의 갈림만이 아닙니다. 육신의 죽음은 이 땅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욕망의 갈림이며 완전한 단절입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천국은 단순히 이 땅의 삶의 연장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이루지 못한 육신의 욕망이 극대화도 아닙니다. 저 영원한 천국은 우리의 모든 육신의 욕망이 완전히 죽은 곳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자가 여자를 볼 때도 정욕의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있지만 남편도 아내도 없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사랑하며 산 부부라도 저 영원한 천국에서는 그들끼리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곳입니다.

그 땅의 아름다운 과실들이 있고, 또 보석들이 있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삶이라는 것은 사랑을 받기에만 급급한 삶이지만 저 영원한 천국에서는 주님께로 받은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서로 나누어주기에 급급한 곳입니다.

또 저 영원한 천국에서의 다스리는 방식은 오직 섬김입니다. 저 영원한 천국에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도 섬기는 분으로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다 그곳에서 주님처럼 서로 섬기는 모습으로 서로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게 될 저 영원한 천국입니다. 무엇보다 저 영원한 천국에는 죄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눈물이라고 전혀 없습니다. 이 땅의 고통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의와 희락과 평강과 영원한 기쁨만 있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저 영원한 천국은 우리 모두가 다 완전히 변화되어 우리 모두가 다 작은 예수님으로 살아가게 되는 곳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들은 모두 이 땅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과 부활에 마지막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이 아니라 이 세상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인생의 종말인 죽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종말도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부활이 없고, 천국이 없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 때문에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의인들의 삶을 풀어줄 곳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만일 부활이 없고 천국이 없다면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과연 이 땅에서 무엇을 소망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내세의 천국은 분명히 있고, 죽은 자의 부활도 분명히 있고,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왜 이 사두개인들이 내세의 천국과 부활이 없다고 합니까?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천국이 없이 없고 부활이 없다고 합니까? 그 이유는 이 땅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특별이 사두개인과 같이 이 땅에서 상위 1프로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그들이 현재에 누리고 있는 삶 때문에 내세의 천국과 부활을 부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내세의 천국과 부활을 부인하는 이유는 현재 그들의 삶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내세의 천국과 죽은 자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단순히 입으로 지식적으로 나는 부활을 믿는다 내세의 천국을 믿는다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내세의 천국와 부활을 믿는다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합니다.

여러분 정말과 내세의 천국을 믿으십니까? 또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합니까?

1)우리가 참으로 내세의 천국과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저 영원한 천국의 상을 위해서 이 땅에서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 땅에서 내가 더 많은 물질을 가질 수도 있지만 천국과 부활의 소망을 믿는다면 그 물질에 대한 소유도 절제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여러분 정말 부활을 믿는다면 악한 자를 보복하려는 마음도 절제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재림해 오시면 모든 악한 자를 반드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오직 악인에 대해도 오직 사랑과 용서와 긍휼의 마음을 살아야합니다.

내가 얼마든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만, 저 영원한 천국에서의 부활을 믿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들도 절제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어떻게 말합니까?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저 영원한 천국에서)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저 영원한 천국에서)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이 땅의)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또 여러분 정말과 내세의 천국을 믿으십니까? 또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주보에 내어드린 태신자카드를 반드시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천국이 없고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됩니다. 복음을 듣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분명 천국은 있고, 부활은 있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서의 부활도 있습니다.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땅에서 모든 기득권을 가진 상위 1프로의 부자들은 이 땅이 너무 좋아서 천국도 부정하고 지옥도 부정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들을 반대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의가 부자보다 더 낫기 때문에 부자들과는 달리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른 길처럼 보이나 필경 사망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는 마치 수영 잘하는 조오련 선수가 태평양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조오련선수가 우리보다 수영을 잘 하기에 태평양의 중간까지는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태평양바다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내가 누구보다는 더 착하다 의롭게 살았다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마음에 영접하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고, 저 영원한 천국에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저 영원한 천국을 믿으시고, 또 부활을 믿으신다면 아직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을 태신자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또 혹시나 믿다가 낙심한 사람도 있으면 그 사람도 태신 자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많은 전도의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했을 뿐이지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음의 동영상을 보시고 이 시간에 태신 자를 작정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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