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갈등을 격습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갈등을 격습니다.
우리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던 초대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15장2절에 보면 할례문제 때문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더라” 고 하고 있습니다. 또 행15장 39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하게 다투는 장면이 있습니다. 또 롬14장1부터 보면 로마 교회 안에서 고기를 먹는 문제를 가지고,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하는 자와 체소만 먹어야 된다고 하는 자들끼리 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 제사음식을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지고 고린도교회 안에서 서로 갈등이 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가장 가까워야할 가정에서도 부부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또 부모와 자녀 간에, 또 형제 자매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부간의 갈등도 있습니다.
-갈등이 있으면 밥맛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갈등이 있으면 예배도 잘 드릴 수도 없습니다. 또 예배를 드리더라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갈등이란 단순히 인간관계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도 큰 피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예물을 드리다가 서로 갈등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이 세상가운데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가운데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갈등을 치유하고 해소하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평케 하는 자로서 어떻게 성경적으로 갈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갈등이 전혀 없는 교회가 있겠습니까? 성경에서도 보았듯이 갈등이 없는 교회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두 가지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등이 있는 교회와 갈등이 있지만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로핑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갈등과 분쟁이라고는 전혀 없는 교회가 아니라 갈등과 분쟁이 있되 그것이 세상 사회와는 달리 온갖 화해의 골짜기를 뛰어 넘으며 해결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갈등이 있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입니까?
갈등이 있는 교회와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의 차이가 있습니다. 갈등이 있는 교회는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는 조그만 실수도 애교로 용납합니다.
갈등이 있는 교회는 서로의 약점만 찾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는 서로의 장점만 찾습니다. 갈등이 있는 교회는 서로 저주합니다. 그러나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는 서로 축복하고 잘 되기를 기도합니다. 갈등이 있는 교회는 일꾼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는 일꾼들이 많이 세워집니다. 갈등이 있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떠납니다. 특히 어린들과 청년들이 상처를 입고 떠납니다. 마18장 1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입니까? 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등장시키시면서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고,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여기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서 갈등이 있으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는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옵니다. 갈등이 있는 교회는 서로의 허물만 찾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는 서로의 허물을 덮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는 교회는 각자가 가진 은사도 소멸됩니다. 그러나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는 내가 가진 작은 은사로 크게 개발됩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는 교회는 절대 성장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갈등이 있는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먼저 생각할 것은 갈등의 원인과 해결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갈등의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그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갈등의 종합백화점이라 할 수 있는 고린도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고린도교회는 4파로 갈라져서 갈등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1장부터 4장까지는 계속해서 고린도교회의 갈등과 해결책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3장1-3절까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3장10-16절까지는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사랑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될 때 갈등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또 3장 16-17절에서는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전은 성전의 지성소입니다. 그래서 바로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지성소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있는 이곳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지성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3장 18-20절까지는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분쟁하고 싸우는 원인은 내가 제일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리라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3: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그래서 여러분 물과 얼음과 수증기 중에서 무엇이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같이 되어야합니다. 얼음은 서로 깨어집니다. 또 수증기는 뜨겁지만 금방 사라집니다. 그러나 물은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지만 바위를 깍습니다. 그래서 물 같은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4장 1절-5절까지는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판단은 먼저 서로에 대한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볼로 파는 바울파에 대해서, 바울파는 아볼로파에 대해서 서로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충성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인 이만큼 이야기를 했으면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서로 하나가 되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간곡하게 말을 해도 고린도교회는 서로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간곡하게 하나가 되라고 말씀해도 하나가 되지 못한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교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파당으로 분열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을 교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4장에서 교만이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고전4장6절 하반 절에 “--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18절과 19절에 “고전4: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라고 합니다.
그러면 고린도교회 안에서 무엇이 교만이었습니까? 그것은 서로 “내가 이 교회의 주인이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교만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전4:8절을 표준새번역성경에서 보겠습니다.
“고전4: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라도 된 듯이 (군림하듯이) 다스리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왕처럼 (섬김으로) 다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진정한) 왕처럼 (섬김으로) 다스리면 좋겠습니다”
/고린도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는 서로 “내가 이 교회의 주인이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서로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합니다. 그러면 겸손이 무엇입니까?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러니까 겸손이란 예수님 때문에 어리석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비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모든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서도 축복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서도 참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비방을 받으면서도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 때문에” 라는 말이 원어로 ‘예수님을 위하여(디아 크리스톤)’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 여기서 “예수님을 위하여” 란 문맥을 보면 “예수님의 몸인 교회 위하여” 라는 의미로도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겸손입니까? 교회를 위하여 어리석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비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참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비방을 받으면서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의 더러운 것(페리카다르마타)이란 “다른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더럽게 되는 것”이란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더럽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걸레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걸레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도 한평생 걸레목회를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걸레목회가 무엇이냐고 그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은 성도들의 죄와 허물이 생각 날 때마다 자신이 마치 걸레가 되는 듯이 “오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또 만물의 찌꺼기(페리프세마)란 말은 사람 몸의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 몸의 때는 몸 가운데 제일 비천하고 하찮은 존재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바울은 교회를 위해서라면 몸의 때와 같이 가장 하찮고 비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교만이 아니라 겸손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교만이란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이란 예수님처럼 한 없이 끝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한 없이 끝까지 낮아짐으로 온전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갈등의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먼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야합니다(마7:5).
서로간의 갈등이 있을 때 제일 큰 문제는 나의 문제보다 상대방의 문제를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내 문제보다 상대방의 문제가 더 클 수도 있고, 또 상대방이 먼저 원인 제공자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 갈등이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해주고 있습니까?
서로 상대방의 문제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있으면 다른 사람의 들보가 티처럼 보이고, 나의 티가 들보처럼 보여야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 들보가 티처럼 보이고, 상대방의 티가 들보처럼 보인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시험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의 문제가 있을 때 절대 먼저 그 사람에게로 달려가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야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잘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부족하고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서로가 자신들의 잘못을 두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회개해야합니다. 이것이 갈등을 해결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2. 둘째는 공동체의 문제를 나의 죄로 고백해야합니다.
느헤미야가 처해 있는 상황과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너무 비슷합니다. 느헤미야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이 다 무너져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능욕과 수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느1: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여기서 보시면 느헤미야는 저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 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이스라엘자손이 주께 범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나와 내 아버지 집이 하나님께 범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벽에 무너지게 된 것은 이스라엘조상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나와 내 아버지 집이 하나님께 범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갈등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합니까? 하나님 이것은 저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 저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고 기도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공동체의 죄가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나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사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격고 있는 모든 것은 다 나 때문입니다. 나와 우리들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 내어놓고 회개하며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주시는 역사를 베풀어줄 실 줄을 믿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갈등을 넘어 비전을 행해서 나아가야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교회는 관계중심이었습니까? 비전 중심이었습니까? 관계중심입니다.
관계 중심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관계중심일 때 관계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사랑이란 단순히 서로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한 목적지를 향해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목적지를 바라보고 함께 갈 때 그 목적지에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한 일 즉 과거에 있던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라가노라고 합니다.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래서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다 보면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제 우리는 갈등을 넘어서 비전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 안에 관계의 문제가 있는데, 비전을 말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관계가 다 회복되고 난 다음에 비전을 말 하십시오 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관계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 세상 가운데서 죽어져 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돈이 많더라도 생명이 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왜 우리를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함께 하셨습니까?
왜 우리를 지금까지 살려주셨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명이 있는자는 결코 죽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교회가 갈등을 넘고 관ㅇ계를 넘어 한 영혼을 인도하는 사명으로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셨습니까? 내 이름과 명예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래에 직분과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할 대상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영혼 인도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직분과 이름의 명예를 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갈등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소명을 다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갈등을 넘어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교회가 이제 갈등이 해결되는 교회만 아니라 갈등을 뛰어넘어 비전을 향해서 달라가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이 세상 가운데 무너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갈등을 넘어 비전을 향해서 달려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를 통해서 무너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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