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드신 모든 만물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시기에 좋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한 가지 좋지 않은 것이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18절에 있습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혼자 있는 아담을 돕는 배필을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은 오늘 본문에 보면 여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만드셨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이라고 하니까 남자가 여자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만드셨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는다(에제르)” 라고 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롬8:26). 만일 여러분 가운데서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성령 하나님보다 더 우월하다고 한다면 이단이 될 것입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하나님처럼 남자의 돕는 배필이라고 하니까 돕는 여자가 하나님과 같이 남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예전에 어떤 여전도사님의 책상에 “하나님께서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 그래서 돕는 여자가 도움을 받는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글을 붙여놓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누구를 돕는다고 하는 것은 누가 누구보다 더 우월하다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무리 남자가 힘이 있다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그런데 또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 때문에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돕는 배필이라고 했을 때, “배필”이라는 말은 “적합한 자, 또는 동등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란 “그를 돕기에 적합한 자, 그를 돕는 동등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가지고 남자가 더 우월하냐 여자가 더 우월하냐를 가지고 따지는 것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왜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말할 때, 누가 누구보다 더 우월하냐를 따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가 죄를 지은 결과입니다.
인간이 범죄 한 후에 죄에 대한 형벌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형벌이 있습니다.
그것이 창3장 16절입니다. “창3: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다스리려고 욕망하고)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면 여자가 죄에 대한 형벌로 남편을 원한다는 말은 “여자가 남자를 다스리려고 욕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죄에 대한 형벌로서 남자는 여자를 힘으로 지배하고 다스려고 합니다. 여자도 남자를 다스리려고 욕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시기 바랍니다. 왜 가정에서의 부부관계가 깨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나는 당신보다 더 낫고 우월하다고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고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 결혼하는 부부에게 부부간에 처음부터 주도권을 절대 빼앗기지 말라고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비성경적입니다.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힘으로 여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남자이지만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려고 하는 것도 죄의 결과이지만, 또한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려고 하는 것도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메튜 헨리는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신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능가하도록 그의 머리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에 의해서 짓밟히도록 그의 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존재가 되도록 그의 옆구리로부터 만들어졌다. 또한 보호받도록 그의 팔 아래서 그리고 사랑받도록 그의 심장 가까이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창1장 27절에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남자와 여자 모두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돕는 자로서 가정을 창조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가정에 대해서 말씀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왜 모세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가정에 부부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있지만, 부부관계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애굽의 왕 바로에게 지배를 당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종으로 지배를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처럼 지배를 당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힘이 없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어떤 조폭이 매일 조폭 두목에서 매를 맞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조폭 두목에게 매를 맞고 사는 조폭이 집에 와서는 힘이 없는 아내를 종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다 공감을 하지만, 실제 인류의 역사를 보면 여성은 남성의 종처럼 취급받았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남존여비라고 하는 유교적 사상으로 500년을 이어왔습니다. 민주국가라고 하는 미국에서 1920년에 여성참정권이 주었고, 영국에서는 1928년에 여성참정권이 주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로의 종으로 살면서 집에서는 힘이 없는 여성들을 종으로 생각했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가 처음 세상을 만들 때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만들었다.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여자는 남자와 동동한 존재로 남자를 돕는 자란 뜻이다. 또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사람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로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말하면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여기서 돕는 배필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겠습니까? 돕는 배필이 먼저는 여자입니다.
또 돕는 배필로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씀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돕는 배필이란 우리 가족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는 설 명절이 있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드신 것을 통해서 진정한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가족들이 서로 돕는 배필로서 진정으로 서로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때 진정한 가족이 무엇입니까?
첫째. 진정한 가족은 서로 판단하지 않고 감탄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이 제일 먼저 한 말이 무슨 말인 줄 아십니까?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은 제일 먼저 하와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판단입니까? 아니면 감탄입니까?
판단이 아니라 감탄입니다. 그러니까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우리는 서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 한 후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 때문에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범죄 한 후에는 감탄이 아니라 판단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인간 서로 판단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사탄의 시험 때문입니다.
사탄은 창3장 5절에서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세상의 주인 노릇하여) 되어 선악을 알(판단할)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선악과를 먹는 날 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선악을 판단해보지 않을래 라고 시험하였습니다. 이 사탄의 시험에 인간이 넘어가서 사람들은 모두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판단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탄의 시험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밤낮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30년 넘게 제자훈련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요13장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제자는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만을 꾸미고 있습니다. 또 나머지 제자들은 서로 누워서 자신의 발만 씻겨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들이 왜 그러느냐 고 선 악간에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서로 섬기려 하지 않는 상황가운데 혼자 조용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섬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팔려는 제자도차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모든 인간들이 다 네 탓이라고 하는 세상가운데, 아무 잘못도 없이 모두 내 탓이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펴주심으로 이 온 세상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서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을 변화시키려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족들을 하나님이 주신 사람으로 있는 그대로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판단이 아니라 서로 감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김창옥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수고했다는 말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수고했다는 말은 주인이 종에게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또 잘했어 라는 말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잘했어 라는 말은 직장 상사가 직원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성도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좋습니다” 라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명절에도 가족끼리 서로 평가하고 판단하지 마시고 서로 감탄해 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로, 사람을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드셨다는 것을 통해서 가족은 싸움과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도움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고, 곧 바로 여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고, 아담으로 동물들에게 이름을 짓게 하시게 한 다음에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바로 돕는 배필을 만들지 아니하시고 동물들에게 이름을 짓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까? 여러분들은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이란 동물과 비교했을 때 “연약하구나” 라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기린처럼 키가 크지도 않고, 독수리처럼 날지도 못하고, 사자처럼 힘이 세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이 혼자서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이 세상을 섬김으로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담이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자와 사람들을 만드신 목적은 서로의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들 서로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돕는 배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지음으로 서로의 연약한 부분을 도와주기보다는 서로의 연약한 부분들을 공격하는 도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는 다른 동물의 세계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한 마디로 말하면 약육강식입니다. 조금이라도 약하면 먹히고, 또 강하면 먹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동물의 왕국처럼 약하면 사로잡히고 강하면 잡아먹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로의 연약한 부분들에 대해서 공격하고 죽이는 모습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선지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호세아4장에서 "호4:1.--이 땅(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이스라엘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2.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표준새번역)”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호4장 3절에 “호4:3. 그렇기 때문에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질 것이다.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들도 다 야위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씨가 마를 것이다(표준새번역)."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서로 돕는 자로 만드셨다는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하시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칼빈이 말한 것처럼 교회 사람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그 교회를 떠나거나 부정할 조건을 제공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과 헌신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남편이나 아내의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을 보십니까? 또 가족들의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이 보이십니까?
만일 가족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정죄의 조건으로 생각하면 그곳은 세상이 되고, 지옥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서로 도와주고 사랑해야할 조건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에덴동산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번째, 사람을 돕는 배필로 만드셨다는 것을 통해서 가족이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관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셨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23). 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한 몸을 이룰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신약성경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한 몸이라고 하시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라는 말씀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서로 한 몸이라는 말씀은 서로가 서로를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관계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자를 내 몸 속의 뼈나 살이 아니라 나의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귀중한 보물도 돈이 필요하면 팔수 있습니다. 또 보물도 내가 필요하면 그것을 어떤 도구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몸속에 있는 뼈와 살은 절대 팔수 없습니다. 또 내 몸속에 있는 뼈와 살도 내 필요에 따라서 물건처럼 이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자와 사람을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하신 이유는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관계가 되게 하시기 위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창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은 각기 다른 인격체이지만,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심으로 하나 됨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사람들을 만드신 목적은 서로 교통하고 교제함으로 하나가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부성자 성령하나님을 따라서 서로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제일 먼저는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당신을 보니까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고 함으로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부성자성령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서로가 서로의 마음 안에 품어줌으로 서로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함으로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덴동산에 나타난 아담과 하와는 서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는 관계였습니다.
이것은 부부관계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와 가족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지만, 그것이 부끄럽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의 연약함을 같이 도와주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름다운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서 에덴동산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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