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거룩이란 고난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난가운데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식어짐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서 거룩하라는 말씀은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벧전2장22절에“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피에 연결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이란 고난 주일 전에 40일입니다. 원래 천주교에서는 사순절을 금식과 기도로 자신의 공로를 쌓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금식으로 구원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금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피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날마다 십자가의 피를 생각함으로 날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벧전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벧전 2장에서는 당시에 예수를 믿는 종들이 까다로운 주인의 부당한 대우로 인해서 고난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벧전2:18. ○사환(종)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여기서 까다로운 자들이란 예수 믿는 종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주인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해서도 순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벧전2장 19절에서 “벧전2:19. (까다로운 주인에게)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은혜로우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벧전2장 20절에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은혜로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 때문에 당한 고난입니다. 그래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고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벧전2장 21절에 보시면 “벧전2: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죄를 지어 고난받는 삶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삶입니다. 그리고 선을 위하여 고난받는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벧전2장 2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십자가)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가 그 십자가만 바라보는 삶만 아니라 십자가를 따라오게 하시기 위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제일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걸어놓기만 합니다. 심지어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라보기만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따라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 삶입니다.
벧전2장 19절에 보시면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이것은 당시에 종이 당시에 악한 주인에게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것이 아름답고 은혜롭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이 바로 이런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당한 고난가운데서 슬픔을 참으셨습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생각하심으로 그 고난가운데 참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제일 분노하시고 흥분하실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감히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말입니까? 당장 하늘에서 진노의 불을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이것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보다 오래 참으신 그 하나님을 생각하심으로 부당한 고난 가운데서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십자가의 삶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를 믿는 종들이 믿지 않는 상관들에게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것이 아름다고 은혜로운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땅에서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느냐? 그때 이 세상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오래 참으라. 또 십자가에서 부당한 고난 가운데서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삶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맞대응하지 아니하는 삶입니다.
벧전2장 23절에 “벧전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욕을 당하시되”란 말은 “계속해서 욕을 당하시는 동안”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욕을 당하시는 가운데서 단 한 번도 맞받아 욕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에게 고난을 주는 자를 위협하시거나 협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욕을 당하시고, 그에게 고난을 주는 자들을 위협하지 아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모든 심판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벧전2장 24절에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그를 계속해서 욕하고, 고난을 주는 자들에 대해서 맞대응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그들을 사랑하시는 일만을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단순히 슬픔을 참는 삶만 아닙니다. 또 같이 욕하고 맞대응하지 않는 삶만 아닙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십자가의 삶입니다. 적극적인 십자가의 삶이란 자신을 버려 끝까지 그에게 고난을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래서 벧전3장9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야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삶을 살 때 우리가 어떤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생명과 좋은 날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벧전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서로 욕하는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또 기도를 들으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벧전3:12. 주의 눈은 의인(복을 비는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복을 비는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욕을 하는) 자들을 대(적)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죽음의 삶이 아니라 생명의 삶을 원하십니까? 또 여러분 삶의 미래에 정말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모든 간구를 들으시는 삶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삶입니다. 같이 욕하거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삶입니다.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복을 빌어주는 삶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며 복을 빌어주는 삶을 살아갈 때 생명과 좋은 날이 오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서로 사랑하며 복을 빌어주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실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왜 사도 베드로가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에 관한 말씀을 하겠습니까?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지금 현재 너희에게 고난 있지만, 앞으로 너희에게 좋은 날이 오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미래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미래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미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의 미래가 좋은 것 같으면 기쁨으로 현재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미래가 어두우면 현재를 슬픔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건축 탐구 집이란 프로에서 “시골에서 망한 집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 부부가 경북 봉화 산골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완전히 실패한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실패한 집을 설명하면서 아내는 계속해서 즐겁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참 성격이 좋분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당장 헤어지자고 할 것 같았는데 계속해서 웃고 있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처음 실패한 집 때문에 남편이 5년 동안 집을 짓는 일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집은 더 좋은 집을 지었고, 마지막에는 정말 그림 같은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그 집에 정말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왜 아내가 실패한 집에서도 웃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미래에 더 좋은 집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현재에 아무리 많은 고난을 받아도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은 믿음과 소망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 고난 뒤에는 미래에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또 소망이 무엇입니까? 이 고난 뒤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래에 반드시 좋은 날을 주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현재에 그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무조건 웃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받으시 잘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좋은 날에 대해서 공동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벧전3:10. 생명을 사랑하고 (미래에) 행복한 날을 보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혀를 다스려 악한 말을 못하게 하고 입술을 다물고 거짓말을 못하게 해야 한다.
공동 번역에서는 좋은 날을 행복한 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고난 뒤에 여러분 미래에 좋은 날 행복한 날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행복하고 좋은 날이 오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미래에 반드시 좋고 행복한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행복하고 좋은 날이 오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 행복하고 좋은 날이 오기를 원하는 자는 제일 먼저 혀를 금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좋고 행복한 날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좋고 행복한 날을 보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혀를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생활 가운데 계속해서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또 우리는 절대 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만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말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현재의 고난 가운데서 좋은 날이 오기를 원하십니까? 지금 현재의 고난가운데서 행복한 날이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제일 먼저 우리의 입술을 금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안 된다 우리는 망한다 우리는 절대 할 수 없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드시 잘 되게 해 주신다고 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한 말을 들으시고 반드시 잘 되게 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제 큐티 본문에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것이 대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마17:17). 그리고 “마17:18--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낙관적으로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없는 일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미래에 좋은 날이 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혀를 금하시기 바랍니다. 대신 믿음의 말만 하시고 감사하다는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미래에 좋은 날을 볼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좋은 날이 오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둘째, 화평을 구하기를 힘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벧전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0절에서 좋은 날 오기를 사모하는 자는 혀를 금하라고 하고, 11절에서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화평의 복음입니다.
화평이 무엇입니까? 화평이란 누가 한 사람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이란 모두 이기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내가 이기기 위해서 남을 죽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정말 화평이 없습니다. 세상은 모두 서로 자기만 이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기기 위해서 어떤 짓이든지 다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면 결코 좋은 날, 행복한 날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앞으로 더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느냐, 너희의 미래가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먼저는 선을 행하고, 화평을 추구하라, 누가 한 사람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기도록 하라, 그래서 모두 잘되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들에 행복하고 좋은 날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고 행복한 날이 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더욱더 화평을 추구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행복하고 좋은 날이 오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셋째,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여 서로 복을 빌어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복을 빌어주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서로 복을 빌어줄 때 우리가 그 복을 이어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찬송가 “40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그 사랑, 240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 255장 너희 죄 흉악하나,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361장 기도하는 이 시간, 380장 나의 생명 되신 주, 38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내 주 예수, 417장 주 예수 넓은 품에,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439장 십자가로 가까이,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이 찬송의 공통된 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모두 유명한 찬송가 작사인 화니 제인 크로스비가 쓴 가사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기를 축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복이 나에게로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크로스비는 맹인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하나님께 원망했어야 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불평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를 적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또 그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 복을 빌어주는 마음이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크로스비가 그렇게 아름다운 찬양을 만들게 된 원동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마음이었습니다.
“신들의 신 예수”라는 책에서 이상환씨는 초대교회 때 고난받았던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로마 세계를 정복했는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추적했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 고대인은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한 희생적 신인(神人하나님이자 인간 예수)의 출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인류를 향해 이토록 충만한 사랑을 표현한 신은 여태껏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어느 무명순교자의 기도가 있습니다.
무명 순교자의 기도/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더욱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 낼 것입니다. 나를 때리십시오.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어떻게 초대교회때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정복하게 되었습니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며 복을 빌었기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 사랑하며 복을 빌어주기 위함입니다.
또 12절에서 하나님은 누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2. 주의 눈은 (복을 빌어주는)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복을 빌어주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여러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서로 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간구와 기도를 반드시 들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오늘 말씀을 몇 주 전부터 묵상하면 축복기도노트를 만들었습니다. 작년부터 전도대상자들에 대해서 생명기도노트를 만들어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제 “축복기도노토”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시간에 동안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자기 전에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축복기도를 하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요기도회 때도 성도님들 생각하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현재는 어렵지만 미래에 좋은 날이 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서로 복을 빌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사람들도 잘되게 해 주시고, 여러분들도 잘되게 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서로 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빌어주는 의인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현재는 어렵더라도 미래에 좋은 날이 올 것을 믿음으로 오늘 이 하루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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