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27절을 보시면은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이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이다” 고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냐고 물어보셨습니까? 빌립보 가이사랴 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가아사랴는 가이사 황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이사랴 빌립보는 황제를 숭배하는 도시입니다. 황제가 주인이 되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황제는 숭배하는 동상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그 동상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어보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황제를 주라고 하는 도시에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황제를 주라고 하는 도시에서 과연 황제가 주인가 아니면 내가 주인가를 물어보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물어보시겠습니까?
여러분 이 시대의 가장 큰 황제는 누구입니까? 이 시대의 가장 큰 우상은 돈입니다. 사실 이 시대는 돈이 절대적인 우상입니다. 우리가 울고 웃고 하는 것도 모두 돈 때문입니다. 가족들끼리 갈라지는 것도 결국 돈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라고 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물어보시겠습니까?
돈이 우상이 되는 시대 앞에서 너희들은 과연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들은 주는 과연 돈이냐 아니면 나이냐고 물어보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돈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질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물질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돈이 주인이 된 도시에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돈이 너희들은 주인이냐,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냐 고 물어보십니다.
돈이 주인이 되는 이 세상에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31절에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다음에 비로소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십니까?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의 그리스도 즉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받고 죽으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없는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고난이 없는 구원자는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 없는 그리스도가 없듯이 고난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34절과 35절에서 예수님은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고난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주이신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절대 우리에게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 것처럼 희도 미워할 것이고, 사람들이 나를 박해한 것처럼 너희도 박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너희를 죽일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로 실족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조건 복이며 영광이라고 하면 고난이 오면 실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하셨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고난이 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고난이 와도 힘들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또 고난이 와도 어렵지 않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데 여러분 만일 우리가 고난이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사탄이 틈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에게 십자가를지지 말하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난 없는 그리스도를 말하면 사탄이 틈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탄이 틈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고난도 각오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각오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모든 고난을 이기고도 남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또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신앙 고백은 결국 삶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성경 공부를 할 때 대답을 잘하는 학생이 신앙이 좋은 줄 알았습니다. 물론 성경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훌륭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참된 신앙은 고난이 있어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 고백은 우리의 삶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특히 일이 있을 때 진정한 신앙고백이 나와야합니다. 입으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으로 주고 섬기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진정한 신앙고백은 고난 가운데서 나와야 합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여러분들은 그래도 이 모든 고난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모든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내 삶 가운데서 도무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가운데서 그래도 예수님은 나를 죄에서만 구원하시는 분만 아니라 내 삶의 모든 문제에서도 구원자이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단순히 지금 이 시간에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삶 가운데 고난을 있을 때 그 순간에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지금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삶으로 고백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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